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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여행|인도에서 본 팔상록(八相綠) 3

명상여행|인도에서 본 팔상록(八相綠) 3




룸비니 가는 길

지도를 보면 인도는 사람의 심장 같은 모양을 하고 히말라야 산맥 밑으로 붙어 있다. 강가 강은 심장의 동맥이듯 손바닥의 생명선이듯 지도 위에 또렷하게 그어져 있고. 강가 강이 흘러〈?인도 북동부의 1월 하순-. 지구 온난화의 영향인지 일교차가 십수 년 전에 들렀을 때보다 심하다. 아침에는 두꺼운 긴 소매 옷을, 한낮에는 반소매 옷을 입어야 한다. 일교차가 섭씨 15도 이상이므로 안개는 아침 늦게야 주춤주춤 게으름을 피우며 사라진다.
그러나 붓다의 유적지를 순례하는 사람들은 이른 새벽부터 길을 나선다. 안개는 늦잠을 유혹하지만 끝내 순례자들의 발길을 붙잡지는 못한다. 붓다의 길이 끝나지 않는 한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이 진정한 순례일 터이다.
붓다는 맨발이셨다. 신발을 신고 벗고 하는 것이 번거로우셨던 것일까. 80여 년을 진리의 몸으로 오시어 여래(如來)하시고, 진리의 몸으로 열반에 드시는 여거(如去)로 순일하시었다. 그래서 우리는 붓다를 ‘여래’라고도 하고, ‘여거’라고도 부른다.
룸비니 가는 길도 안개가 뒤덮고 있다. 룸비니 성지 부근의 한국 절에서 하룻밤 묵고 이른 아침에 나선 길이다. 그런데 룸비니의 안개는 다른 지역과 달리 평화롭고 성스럽다. 포근한 느낌을 주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안개가 어머니 자궁 속의 부드러운 양수 같기도 하다. 룸비니의 모든 존재들은 양수 같은 안개 속에서 아직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할 수 없이 나는 6년 전에 보았던 룸비니에 대한 기록을 다시 상기해 본다. 어젯밤 한국 절 식당에서 미지근한 물을 구해 와 보이차를 우려 마시고 난 뒤 그때의 기록을 펼쳐 보았던 것이다.
“룸비니의 유적이라면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첫 번째는 붓다가 태어나실 때 마야 부인이 기댄 무우수(보리수)와 용들이 붓다의 몸을 씻어 준 싯다르타 연못이고, 두 번째는 이곳이 룸비니 동산임을 증명하는 아소카 석주이고, 세 번째는 붓다 탄생상을 봉안한 뗀?부인 사원이다.”
나그네는 이곳을 두 번째 찾은 셈이다. 10여 년 전, 30대 후반에 후배이기도 한 소설가 구효서와 시인 윤제림과 함께 들렀었다. 그때와 달라진 풍경은 마야 부인 사원이 발굴 사업 때문인지 헐리고 임시로 출입구 옆에 세워진 것뿐이다. 나머지는 예전과 마찬가지이다. 무우수(無憂樹)라 불리는 보리수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싯다르타 연못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고, 아소카 대왕 석주도 그 옛날 현장 법사가 와서 보았듯이 맨 위의 말(馬) 형상이 잘려 나간 굴뚝 같은 모습 그대로이다.


여기 보리수 아래서도 힌두교 신도들은 그루터기에 놓인 조그만 붓다상(像)에 붉은 칠을 하면서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네팔의 승려가 앉아서 명상에 잠겨 있다. 불교 성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타 종교의 제사 의식인데 종교 간의 다툼은 없다. 자신이 신앙하는 대상에 몰두할 뿐, 시비를 떠나 공존과 상생을 보여 주고 있다.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부럽다. 희망 사항이 되고 말지 모르겠지만 나그네는 언젠가 지역 감정의 맹독(猛毒)이 사라지고, 그런 후 남북통일이 되었을 때, 또 그다음에 올 지긋지긋한 갈등을 상상한 뒤에는 지레 몸서리친 적이 있다. 남북통일이 된 그다음 종교 간에 서로 물고 헐뜯는 집단적인 증오가 망측하게도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작은 출발이긴 하지만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성북동의 길상사로 올라가 축하 기도를 하고, 법정 스님이 명동성당으로 내려가 강론하는 것을 보고서 기쁜 마음보다는 스스로 안도한 적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모르는 이웃 간에도 대화를 못할 이유가 없는데,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종교 집단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리.


어디나 행복한 기운이 가득한 성지

‘붓다의 탄생’을 이야기하는 경전은 많다. 『본생경』이나 『과거현재인과경』, 『불본행집경』 등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다 아는 이야기지만 마야 부인이 아기를 낳고자 숫도다나 왕의 허락을 받고 친정인 데바다하(天臂城)로 가게 된다. 그런데 가는 도중 룸비니 동산에 이르러 마야 부인은 산기를 느끼고서 무우수 가지를 붙들고는 옆구리로 아기를 낳고 마는데, 그가 바로 세존이신 붓다이다. 그때 공중에 있던 용왕의 형제들이 더운물과 찬물로 어린 붓다를 목욕시켜 주자 어린 붓다의 몸은 황금빛을 내쏘며 삼천대천세계를 비추었다고 한다.
이윽고 붓다는 홀로 일곱 걸음을 옮기었다. 그러자 옮기는 걸음자리마다 수레바퀴만 한 큰 연꽃이 솟아올랐다. 이에 어린 붓다는 오른손은 위를, 왼손은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엄하도다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나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이른바 탄생게(誕生偈)인데, 그 해석은 분분하다. 그러니 나그네식의 설명을 붙이지 않을 수 없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은 전생에 수많은 정업을 닦은 붓다이시니 천상천하에 존귀하다는 것이고, ‘삼계개고아당안지’란 고통받는 중생을 편안하게 구제하겠다는 결의이자 맹세이다.
나그네 마음에 울림이 더 큰 것은 자비의 극치인 ‘삼계개고아당안지’다. 이는 붓다의 존재를 더 위대하고 거룩하게 하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수행자가 진리를 구하고자 정진하는 것은 중생을 편안케 구원하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결국 그렇게 회향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수행자가 존경을 받아야 할 그 어떤 이유도 명분도 없기 때문이다.
나그네는 명상에 잠긴 네팔의 승려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다가간다. 그는 룸비니 동산에서 가까운 네팔 사원의 승려인 모양이다. 묻지 않는데도 자신의 일과를 소개한다.
“하루 한 끼만 먹고 네 시간씩 이 자리에서 명상을 합니다. 승려가 된 지 24년이 됐습니다.”
하루 한 끼만 먹는 소위 일종식은 붓다의 식사법이다. 그 전통에 따른 선가의 식사법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자리끼 같은 죽은 들 때도 있고, 저녁에 식사 흉내를 내는 약식을 할 때도 있지만 밥과 반찬을 내놓고 정식으로 공양하는 것은 점심때뿐인 것이다.
나그네는 그와 통성명을 한다. 그의 이름은 ‘비베깐난다’라고 한다. 표정이 매우 진지하고 온화하다. 룸비니 동산의 가장 큰 장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어디나 행복한 기운이 가득한 성지”라고 말한다. 그래서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대는 태어나기 전에 무엇이었는가

나의 노트에는 16년 전에도 신라의 구법승 혜초처럼 이곳을 참배했고, 6년 전에도 찾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6년 전의 기록을 떠올려 보니 룸비니의 풍광을 가볍게 스케치한 것만 같다. 붓다 탄생의 의미를 주마간산처럼 훑고 지나갔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룸비니의 수행자인 듯한 안개가 내게 묻는다.
‘그대는 태어나기 전에 무엇이었는가.’
태어나기 전 나는 무엇이었을까. 조주 선사의 사자후라면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본래면목(本來面目)”이다. 태어나기 전 나의 본래면목이 무엇이었냐는 물음이다. 그것을 깨쳐야 순간순간 온몸으로 살 수 있고 죽어 돌아가 편히 쉴 곳도 알 수 있을 터이다.
안개는 또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를 묻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에 실존주의 철학이나 문학에 빠진 적이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족을 떠나 직립보행하려는 젊은이들 사이에 광풍처럼 휩쓸었던 사조였다. 실존주의는 인간을 이 세상 현실에 우연히 던져진 존재라고 하여 반항적인 나에게 고립과 고독을 즐기게 하였다. 소설 「이방인」의 작가 카뮈의 이 한마디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인간이 갈구하는 것은 오아시스가 아니라 혼도 의지할 수 없는 사막이다.”
이 말은 그 무렵 나의 화두였다. 오아시스란 이상향이나 극락 같은 곳인데, 인간은 정작 지옥 같은 사막을 갈구한다니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고, 나를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일까. 나는 『법화경』을 보면서 인과의 진리를 깨달았다. 실존주의에서 말하듯 우연히 던져진 실존이 아니라 인과법에 따른 필연의 실존이라는 것을 믿게 됐다. 붓다의 전생을 알면서 붓다의 탄생이 왜 축복이고 거룩한지를 이해했다.

욕지전생사(欲知前生事)
금생수자시(今生受者是)
욕지내생사(欲知來生事)
금생작자시(今生作者是)

전생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받는 이것이다
내생 일을 알고자 하는가
금생에 하는 이것이다.

붓다의 이 말씀을 되새겨 보면 붓다는 삼생(三生), 즉 과거·현재·미래가 다하도록 영원히 붓다일 수밖에 없다. 전생의 정진과 원력으로 탄생하시니 금생에 붓다이실 수밖에 없고, 금생의 삶도 수많은 중생들을 제도하시어 열반하시니 내생에도 붓다가 되실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차(茶) 농사를 지으면서 연기(緣起)를 스스로 느꼈다. 인간은 낯선 곳에 던져진 고독한 이방인이 아니라 유무정물과 서로 한몸이라는 것을 체험했다. 나뭇잎 하나가 병들면 다른 가지의 나뭇잎까지도 병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산중으로 내려온 나는 처음 한동안 차 씨가 제 힘으로 흙을 뚫고 올라와 싹을 틔우는 줄 알았는데, 초보 농사꾼의 딱지를 떼고 나니 그게 아니었다. 햇볕과 바람과 비와 땅, 그리고 농부의 수고가 어우러져 맑은 향과 맛을 내는 것이 차였다. 생명은 서로 한 뿌리로 닿아 있으므로 어느 하나만 빠져도 차 씨는 죽고 마는 것이니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하니 저것이 소멸한다”는 연기의 도리가 차 씨 한 알에도 있었음이다.


신분은 행위에 따라 달라진다

붓다가 탄생하는 장면을 『팔상록』에서는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이란 제목을 붙여 이야기하고 있다. 붓다가 마야 부인의 몸을 빌려 이 세상에 태어나시는 이야기가 『팔상록』의 두 번째 장면인 것이다.
룸비니 동산은 6년 전과 조금 다르다. 그때는 유물을 발굴 중이었으므로 마야 부인 사원이 헐린 채 가건물이 지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직사각형의 시멘트 건물이 마치 시골의 실내 경기장처럼 들어서 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순례자에게 물어보아도 마찬가지다. 건물이 주변의 평화스러운 자연과 어울리지 못한 것도 그렇고, 도드라질 정도로 진홍색 페인트로 단장한 모습이 왠지 생뚱맞다.
그러나 그 나머지는 예전과 같다. 마야 부인 사원 측면에 자리한 아소카 석주도 그대로이다. 아소카 석주는 기원전 250년 아소카 대왕이 붓다의 탄생지에 왔던 기념으로 세운 것이다. 그때 아소카 대왕은 석주에 이렇게 새겼다.
“많은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피아다시(아소카의 다른 이름) 왕은 즉위한 지 20년이 지나 이곳을 친히 참배하였다. 여기서 붓다 석가모니께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석주를 세우도록 했다. 이곳에서 위대한 분이 탄생했음을 경배하기 위한 것이며, 이를 기리어 룸비니 마을은 조세를 면하고 생산물의 8분의 1만 징수케 한다.”
현재는 석주의 상층부가 소실되고 없는데, 현장 법사는 『대당서역기』에서 석주의 윗부분 마상(馬像)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밝히고 있다. 악룡의 벼락 같은 소리에 석주의 기둥이 부러졌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마야 부인 사원 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싯다르타 연못가에 있는 무우수를 보고서 ‘아, 변함없는 수행자가 저기 있군!’ 하고 깜짝 놀라고 만다. 마야 부인이 산기를 느끼고 손을 뻗어 잡았던 그 무우수 그루터기 언저리에 그 네팔 승려가 앉아 있는 것이다. 마치 무우수의 착한 자식처럼.
안개가 아직 완전히 물러서지 않았으므로 승려의 모습은 어렴풋했으나 나는 직감으로 그가 ‘비베깐난다’임을 알았다. 그는 6년 전과 같은 모습으로 명상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이미 6년째 그곳에 있었다고 했으므로 이제 12년째 그곳을 지키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먼저 합장한 뒤 손을 내밀었다. 그도 입가에 미소를 물었다. 나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표정이었다. 6년 전 이곳에서 나와 얘기를 나누지 않았느냐고 하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치아가 보이도록 소리 내어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이제 그는 무우수의 한 가지가 된 듯했다. 까마귀 한 마리가 그에게 다가왔다가 순례자들이 몰려오자 날아가기도 했다.
여전히 무우수 그루터기 뿌리 위는 작은 동굴처럼 공동화(空洞化)되어 있고, 그 안에는 붉은 안료를 묻힌 붓다상이 모셔져 있다. 순례자 중 한 사람이 무우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나서는 내게 묻는다.
보리수에 모셔진 불상을 보니 마치 마야 부인 옆구리로 부처님이 탄생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왜 마야 부인 옆구리로 태어나셨을까요?”
나는 신분에 따라 출생하는 곳이 다르다는 힌두 신화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예전에 인도를 순례하는 동안 힌두 사두에게 바라문은 신의 입에서, 왕족은 신의 옆구리로, 바이샤는 신의 배에서, 천민인 수드라는 신의 발바닥에서 태어난다고 하는 얘기를 들었던 것이다.

“부처님의 탄생에 힌두 신화가 결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부처님은 크샤트리아계급으로 왕족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다 알다시피 붓다는 타고난 신분을 부정했다. 신분은 사람이 하는 행위에 따라서 달라질 뿐, 천한 신분의 여자라도 깨달으면 거룩한 붓다가 된다고 했다.
- 자비를 베푸는 이는 거룩한 사람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는 천박한 사람이다.
<계속>

[느낌]

“보리수에 모셔진 불상을 보니 마치 마야 부인 옆구리로 부처님이 탄생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왜 마야 부인 옆구리로 태어나셨을까요?”

대전기경에도 ‘옆구리’ 이야기는 없다. 다만 자궁에서 나올 때 아주 깨긋한 상태로 나온다고 설명한다. 해와 달보다 찬란한 빛에 휩싸인다고 하고 거룩한 32상을 갖춘다고도 한다. 그런데 ‘옆구리’ 이야기만 없다.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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