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모셔온 글

‘옥천독립군’ 이끌고 ‘안티조선운동’하는 오한흥

“사랑을 품은 한 사람은 이미 백만대군
셋만 모이면 삼백만대군!”
‘옥천독립군’ 이끌고 ‘안티조선운동’하는 오한흥

▲ 언론개혁운동으로 강력한 변화의 새바람을 일으킨 전 <옥천신문> 대표 오한흥씨. 서재 앞에
선 그의 등 뒤로 ‘당당한 대한민국, 부끄러운 조선일보’라는 글귀가 보인다.

업체 홍보담당에게 계좌번호를 불러주는 기자가 있단 말을 들었다. 지갑을 나눠 쓰자며 공무원 지갑 속 현금을 집어가는 기자, 술값을 출입처 관련자 이름으로 달아두는 기자도 있다고 했다. ‘카더라’ 통신이 아니라 알리바이와 목격자가 정확한 지역토박이 기자들의 이면이다.

이처럼 수위를 넘나드는 도덕적 불감증이 외려 적당히 있어야 할 프로근성(?)으로 둔갑되는 곳이 어디 언론뿐이랴. 지역의 교수집단도, 시민운동 영역도 불량 부실한 용역과 전문성 떨어지는 성명서를 남발하면서 탕내를 피우기 시작한 지 오래다. 공부를 안 하는 데다 원칙마저 무너져 있으니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침묵하고, 침묵해야 할 때는 악을 쓴다. 5·18 이후, 광주는 새로운 가치를 생산해내기보다는 위에서 떨어진 고물만 앞다투어 먹어왔다는 아픈 진단이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89년 군민주 모금 <옥천신문> 창간…주민 시선 ‘지역’으로
그래서 정치인들은 5·18묘역에 절을 하고, 운동권들은 옥천으로 가더라는 말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80년대 운동권들의 정신적 고향이 광주였다면, 2000년 이후 운동세력들의 재충전 장소는 충북 ‘옥천’이라고도 한다. 대체 왜 광주는 ‘옛 영화’만을 되뇌며 가라앉고, 옥천은 시대를 흔드는 변화의 진원지가 된 것일까. 

“옥천신문이 큰 역할을 했죠. 여기서는 다른 신문 기자들도 취재 제대로 하려면 옥천신문 기자라고 이야기한데요. 왜냐면 주민들이 옥천신문을 믿으니까. 대부분.”

옥천시장을 한바퀴 돌면서 최근 몇 년 사이에 일어난 옥천의 변화에 대해 물었다. 철물점, 포목점, 금은방, 길거리 노점상들도 ‘옥천신문’을 돈내고 보고 있다고, 이 신문이 지역을 바꿨다고 당당하게 이야기를 했다. ‘요즘 신문이 거기서 거기지’가 아니었다.  

사실 육영수의 고향이었던 옥천은 보수성향이 강한 지역이었다. 유신시절에도, 그 이후로도 야당이 맥을 못 추던 지역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곳이 대한민국 3대 권력의 하나인 조선일보를 상대로 한 언론개혁운동의 성지로, 주민운동이 지역공동체를 회복시킨 성공사례로 꼽히는 ‘개혁의 성지’로 불린다. 그 강력한 변화의 그 한가운데에 바로 오한흥(50·전 옥천신문대표, 현 여의도통신 대표)씨가 있었다.


“옥천이 부러우세요? 저야말로 광주를 부러워했던 사람이에요. 뭔가에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 있구나, 전 광주의 그런 힘이 너무 부러워서 그리 이사를 가려고도 했어요. 파랑새를 찾아가면 행복할 줄 알았던 교만한 시절이었죠. 봄에 뿌린 씨앗은 안 돌아보고 결실만 탓했던 거예요.”

광주에 대한 부러움을 멈추고, 옥천에 씨앗을 뿌렸다는 이야기였다. 
“88년에 그 해 창간된 한겨레신문지국을 운영했고, 89년에 군민주를 모금해 옥천신문을 창간했는데, 언론이 지역을 소홀히 하니까 주민들 시선이 늘 중앙에 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주민의 일상, 마을이야기 등 지역문제를 부각시켜 냈고, 실명으로 군정과 의정 감시를 시작했죠. 항의전화가 오면 그 사실까지도 정확히 보도를 했어요.”

핫 이슈가 쏟아지자 유료구독자들이 늘었다. 3500명 유료구독자는 옥천신문의 재정을 탄탄하게 지켜냈고, 주민들 투표성향마저 바꿔내기 시작했다. 단적인 예로 한나라당의 싹쓸이바람이 거셌던 지난 해 5·31지방선거에서도 옥천에서 열린우리당 출신 군수가 뽑혔고, 민주노동당 군의원이 최다득표를 한 것이다. 

이처럼 주민들의 신뢰 속에 옥천신문이 지역변화를 끌어낼 무렵인 98년, 《월간조선》이 당시 대통령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이던 최장집 교수의 사상을 악의적으로 검증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글을 쓴 <조선일보> 이한우 기자를 ‘스승의 등에 칼을 꽂은 청부살인업자’라고 비판했던 강준만 교수, 이런 식의 사상검증은 ‘마조히즘적 정신분열증상’이라 쓴 《말》지의 정지환 기자가 고소를 당해 수백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러자 네티즌들 사이에서 ‘나를 고소하라’는 서명운동이 벌어진다. 

“정지환 기자 이야기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조선일보 그러는 것 인제 알았어?’ 이런 식으로 냉소적인 무력감이 지배적이더라는 겁니다. 우리 사회가 자기 몫을 챙기는 것은 익숙한데 자기 책임의 몫을 챙기는 데는 서툴러요. 저는 저 책임의 몫을 찾자, 결심했어요. 조선일보의 친일행각을 기획기사로 연재하면서 옥천독립군들의 조선일보 절독운동을 시작했죠. 왜냐, 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니라 신문을 가장한 반민족범죄집단입니다. 안티조선운동은 이념운동이 아니라 상식과 염치의 회복운동이에요.”

▲ 지난 5월 3일'전라도닷컴과 광주드림을 통해 본 지역 언론의 역할과 가능성'이란 주제로 열
린 토론회에서 오한흥씨가 '언론'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 김태성 기자

“안티조선운동은 이념운동 아니라 상식과 염치의 회복운동”

언젠가 오한흥씨와 함께 광주의 한 갈치조림집으로 밥을 먹으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 집 마루에 조선일보가 놓여 있었다. 그는 바로 주인을 불러 세웠다.
“왜 이런 쓰레기가 좋은 밥집에 있어요? 생각 있는 사람들이 욕합니다. 제호 위에 일장기를 걸었던 신문을 보는 사람하고는 사돈도 맺어선 안되니까 조선일보 끊으세요.”

타이틀 내건 행사장이 아닌 일상에서 싸움은 어떻게 하는가를 현장에서 목도한 셈이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는 회의를 통해서 결론 내려면 복잡해요. 안중근 의사가 가족회의 끝에 의거했겠습니까. 꼭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야겠다 싶으면 니가 달기만 기다릴 일이 아니라 각자 주머니에 방울 넣고 다니다가 달아버리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옥천은 작으니까 가능하다, 큰 도시는 어렵다고 하시는데, 작은 고장이 더 힘들어요. 실명기사 나가거나 조선일보 절독운동 하면 바로 당숙이, 아제가 쫓아옵니다.”

그는 지난해 지방선거 때 ‘풀뿌리옥천당’이라는 주민운동조직을 만든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엉뚱하게도 정당법 위반으로 고발을 당한 것이다.
“재판부에 물었어요. 우리 옥천에 명륜당 서점, 풍미당 과자점이 있다. 그 주인들이 ‘당’을 붙였대서 정당법 위반이냐, 폭소클럽에 나올 일이지. 보통 소송에 걸려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재판을 빨리 끝내고, 법정 최저형을 받길 원한다는데 저는 작전을 바꿨습니다. 아주 늦게, 법정 최고형을 목표로 삼고 나니 여유가 생겨요. 제가 재판정에 가면 보통 3시간이 걸립니다. 판사님들이 아주 힘들紵萬?”

세상에, 이런 자세로 덤비면 못 이길 싸움이 어딨겠나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들었다. 실제로 그는 이 재판과정에서 판사의 재판정 태도를 문제삼아 재판부 기피신청을 하기도 했다. 영동재판소 탄생 이래 처음 일이었다. 자신이 발 딛고 선 일상에서의 싸움은 소홀한 채 공중전에나 끼여드는 싸움방식과는 분명한 차이가 느껴지는 대목이다. 

“싸울 수 있는 힘은 세상에 대한 사랑”
지역 언론의 희망이 된 옥천신문의 성공을 경험삼아 그는 올해 3월5일, 조선일보 창간일에 맞춰 입법전문신문 <여의도통신>을 창간했다. 신문 하나가 얼마나 세상을 바꾸는지를 잘 아는 승부사가 여의도에 깃발을 꽂은 것인데, 이 싸움의 승률이 몹시도 궁금했다.

“이미 이겼어요. 여의도통신이 씨줄이 되고, 풀뿌리신문들이 날줄이 되는 새로운 전투인데, 한달 구독료 3만원을 내겠다는 유료구독자가 벌써 400명이 넘습니다. 750부가 넘어가면 손익분기점, 1000부가 넘어가면 조선일보에 곡소리가 나기 시작할 겁니다. 서열주의 문화, 분할통치의 문화, 끼리끼리문화, 가해자가 안되면 피해자가 된다는 불안감, 모두 조선일보식 문화입니다. 여통과 풀뿌리신문이 바꿔나갈 겁니다.”  

이기기를 각오한 싸움은 이미 이긴 것인가. 신문 하나만 제대로 살아나도 사람들 삶이 바뀌는 것인가, 가슴 뛰는 질문들로 광주를 다시 생각해보는데, 그가 대뜸 이런 질문을 했다.  “행복하세요? 인생 짧아요. 행복한 일만 하고 사세요. 전 살면 살수록 사랑하는 일이 제일 행복하구나, 싶대요. 진짜 잘 드는 칼은 숫돌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가죽에 갈잖아요. 싸움도 미움에 마음을 갈면 안되고, 사랑에 마음을 갈면 되더라고요. 저같이 힘도 없는 사람이 맷집 좋은 조선일보랑 싸울 수 있는 힘이 뭐냐! 저는 세상에 대한 사랑이라고 제 나름대로 믿거든요. 거대한 게 힘이 있나요? 옥천전투도 몇 사람이 시작했는데, 하지만 사랑을 품은 한사람은 이미 백만대군이더라구요. 셋만 모이면 삼백만대군!”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열정을 품은 한 사람은 세상에 얼마나 뜨거운 존재인가, 환하게 웃는 그의 뒤로 정말 수백만 대군이 보이는 듯했다.


"전라도의 힘 전라도닷컴을 지켜주세요" >> 전라도닷컴 후원 신청하기 <<

 

http://www.jeonlado.com/v2/ch01.html?&number=9383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