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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결정적 순간’

일상이 ‘결정적 순간’
사진작가 신철균
남신희 기자  

▲ 군산 구암초등학교 교정, 1969
ⓒ 신철균

동생을 들쳐업은 어린 누나, 물지게를 지고 걸어가는 소년…. 포대기 속 동생의 엉덩이는 자꾸 아래로 처져서 한 번씩 훌쩍 당겨올려야 했을 것이고, 균형 맞추기 힘든 물지게는 자꾸 쭐렁거리며 걸음을 더디게 했을 것이다.

삶의 무게를 그렇게 제 몸으로 실감하며 살았던 그 시절 아이들의 모습을 사진 속에서 만난다. 전북도립미술관이 사坪方?신철균(80)씨가 기증한 사진 100점을 한데 모아 <신철균 기증작품전>(6.19∼7.11, 전북도청 기획전시실)을 열었다.

삶이 안겨주는 고난과 슬픔에 아직 손상되지 않은 무구한 모습.
제 몫의 무게들을 벌써부터 감당하고 있으되, 아이들 얼굴엔 웃음이 매달려 있다.
무어 그리 좋은 일 있을까. 들녘에서 동생을 무동 태운 형아의 눈빛과 입매는 기쁨으로 빛난다. 이 순간, 서로의 존재만으로 아무 부족함 없는 충만. 옆모습인 동생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지만 둘 사이에 오가는 무한애정은 ‘너무 잘’ 보인다. 벙그레, 함께 감염돼 버리고 마는 강력한 힘을 지닌 웃음.

지난 1976년 전북 완주 비봉에서 찍은 이 사진은 1978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유네스코 아시아지역 사진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바가지머리를 하고 윗니 아랫니 다 보이도록 환하게 웃고 있는 어린 누나도 있다. 등에는 남동생을 업었다. 이 순간, 어린 누나는 동생의 보호자다. 코 밑으로 콧물 마른 자국 선명해도, 어린 누나가 의젓할 수 있는 까닭이다.

놀 때도 일할 때도 늘 동생을 업고 살던, 동생의 무게에 익숙해져 살았던 그 시절 ‘어린 누나, 어린 언니’들. 사진 속 누나는 ‘암시랑토 않게’ 웃고 있는데 바라보면 왜 눈물나는가.

▲ 충남 서천군 도둔리, 1990
ⓒ 신철균

▲ 군산 중동, 1964
ⓒ 신철균
▲ 전북 완주 비봉, 1976
ⓒ 신철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 숨겨져 있는 아이들의 얼굴

참으로 별스럽지 않은데 함께 웃고 함께 울먹해지는 사진들이다. 신철균의 사진 속 아이들이 지닌 표정의 힘이다.
이번에 전시된 사진들의 시대적 배경은 주로 60∼70년대. 장소는 거의 군산. 요즘의 눈으로 보자면 초라한 입성이고 누추한 배경이랄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을 따뜻하게 밝히는 것은 아이들의 표정이다. 

수많은 찍을 것들 중 왜 아이들인가?
“어린 아이들 보문 어찌 그리도 이삐까. 아이들에겐 머리가 아닌 몸으로 말하는 정직함이 있잖아요.” 
손주들 오는 게 하냥 기다려지고 손주들한테 돈 한 닙 쥐어주는 게 마냥 기쁜 할아버지가 되기 훨씬 전부터서 아이들의 얼굴만 보면 그리도 찍고 싶었더란다.

그의 고향은 함경북도 청진. 해방 후 서울로 내려왔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 곧바로 한국전쟁을 맞게 되었고 우여곡절 거쳐 전북 군산에 정착하면서 1963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작업을 시작했다. 전쟁 뒤의 폐허와 가난, 고향을 떠난 찢김의 삶 속에서 그에게 무엇보다 간절했던 건 희망. 그 희망을 그는 아이들의 천진한 얼굴에서 발견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 숨겨져 있는 아이들의 얼굴.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아이들을 보려 초등학교들을 찾아다녔고 항만 하역장·해망동 시장·째보선창·우풍화학 일대 등 군산 곳곳을 쏘다녔다.
그는 미리 계산된 프레임 안에 풍경이나 인물을 가두지 않는다.

“나는 무엇보다도 신철균씨 작품의 순수하고 소박한 사진적 성격을 좋아하고 높이 평가한다. 그의 사진에는 가식이나 지나침이 없다. 오직 직관적인 리얼리티가 서정성을 지니면서도 결코 생동감을 잃지 않고 있어 호감이 간다.”(월간 《사진예술》 1990년 3월호 중)

사진평론가 이명동씨는 신철균의 사진이 지닌 매력을 이렇게 이야기한다.
순간포착. 오랜 기다림과 찰나가 부딪히는 접점에서 피어난 사진들이다.

▲ 군산 우풍화학 앞 철길, 1968
ⓒ 신철균

▲ 군산 신영동 거리, 1967
ⓒ 신철균
▲ 군산 우풍화학 옆, 1964
ⓒ 신철균

사소한 장면들에도 제 나름의 이유와 비밀이, 기쁨과 슬픔이…

‘결정적 순간’은 따로 있지 않다. 사소한 장면들에도 제 나름의 이유와 비밀이, 기쁨과 슬픔이 깃들어 있는 게 삶.

가만 들여다보면 거기 삶이 있다. 얼굴에 땀방울 숭글숭글 맺힌 두 남자가 담뱃불을 나누고 있다. 웃통은 벗은 채고 담뱃불을 나누는 손에는 검정 얼룩이 묻어 있다. 1966년 군산항만 연탄하역장에서 찍은 사진. 쉴 참에 담배 한 대, 고단한 노동 뒤의 동지적 유대와 말없는 위로가 거울같은 마주봄 속에 찐하게 담겼다.

‘하루라도 글을 읽지 않으면…’이란 표어를 뒤로하고 길거리에 곡식자루들을 벌려놓고 앉은 할머니를 찍은 사진도 있다. 할머니는 깨알같은 글씨가 아닌 진짜 깨알과 콩알들로 이미 삶을 읽고, 헤아리고, 살고 있다.

한껏 앞으로 쏠린 상체에서 지금 끌고 있는 리어카의 무게가 절로 느껴지는 사진에서 리어카 끄는 아주머니 뒤로 보이는 것은 <람보2> 같은 영화포스터들이 붙은 벽보판. 람보보다 힘이 더 센 것은 자기 앞의 생을, 가족들의 생계를 날마다 감당해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순수한 몰두’가 있어 빛나는 순간도 있다. 직각으로 들어올린 오른팔에 모든 힘을 모두어 이제 막 딱지를 내리치려는 아이에게 지금 이보다 더 심각하고 중대한 일이란 없다.

길거리 나뭇가지에 바구니를 걸어놓고 농구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이채롭다. 길거리농구의 원조는 바로 이것? 1967년 군산 신영동 거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모두의 눈길이 공중에 뜬 공 하나에 모아진 찰나!

▲ 군산항만 연탄하역장,1966
ⓒ 신철균

▲ 군산항만 야적장, 1963
ⓒ 신철균
▲ 옥구 만경교. 1965
ⓒ 신철균

시대적, 공간적 상황을 자연스레 거느린 사진들

농구하는 아이들 뒤로는 60년대 신영동 거리를 짐작해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져 있다. 그의 사진들은 그렇게 시대적, 공간적 상황을 자연스레 거느리고 있다. 대놓고 드러내는 방식은 아니고 배경으로 물러나거나 간략화되어서이다.

1964년 군산 우풍화학 앞에서 도장 파는 노점 아저씨를 찍은 사진의 배경은 선거포스터가 조르라니 붙여진 담. 빗자루 파는 소년 뒤로 ‘병이 나도록 울려주는 명절영화-남진 주연’이라는 카피가 붙은 추석 개봉영화 <어머님前上書> 포스터가 보이는 사진도 있다. 1970년 군산 영동 입구에서 찍었다. 1964년 찍은 군산 째보선창의 옛모습도 있고 1963년 찍은 군산항만 야적장의 모습도 있다.

그는 사진들에 제목을 따로 붙이지 않는다. 대신 연도와 장소만 표기한다.
이유는 “각자의 관점이 다르지 않갔소?”라는 반문에 담겨 있다(고향 함경도를 떠나온 지 60여 년이 흘렀지만 반문하거나 강조할 때 그의 말은 자주 ‘어쩌갔소’ 투가 된다).

“보는 사람에 따라 수많은 제목과 감상들이 나올 수 있는데 그 가능성을 막아버리면 재미없지 않갔소. 물음표도 허락하지 않고 여운도 없고.”
사진에 따라붙은 연도와 장소는 제목보다 많은 의미를 건넨다. 좀더 풍부한 해석과 공감의 재료이기도 한 것. “연도와 장소 같은 정보가 있어야 사진이 원래 지닌 기록성의 의미를 더하고, 생명력을 갖게 되죠.”

군산 나운동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는 암실과 사진자료실을 겸한 방이 하나 있다. 꼼꼼한 기록과 정연한 정돈. 60년대 찍은 필름들도 흠결없이 간수해오고 있다.
카메라를 두고 그는 문하생들에게 “작업할 때는 머슴처럼 부리고 보관할 때는 황제처럼 모셔라”는 말을 자주 하는데 그런 치열함과 엄정함은 필름이나 사진의 정리에도 일관되게 이어진다.

▲ 군산 시외, 1989
ⓒ 신철균
▲ 군산 개복동, 1994
ⓒ 신철균
▲ 군산 개복동, 1994
ⓒ 신철균

먼 데 욕심내지 않고 자신이 사는 지역을 쉼없이 기록

그렇게 사진을 찍어온 세월이 40년을 넘었지만 뜻밖에도 개인전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98년 《신철균 흑백사진집》 한 권을 냈을 뿐이다.
첫 전시이니 얼마나 각별했으랴만, 개막식도 갖지 않았다. “챙피하잖아요. 그냥 어느 하루 가만히 가서 보고 왔지요.”

그의 홈페이지(
www.shinck.pe.kr)를 통해 이미 사진을 본 사람들이라면 전시장에 가서 더큰 사이즈로 봐야겠다는 마음도 있었을지 모른다. 허나 전시장 사진들은 크지 않았다. 모두 고만고만하게 A4 안팎 크기. 일부러 그리 했다.

“내용이 좋아야지요. 크기가 문제 아니라. 멀리서 쓰윽 지나치듯 보지 않고 가깝게 다가들어 정성껏 봐주면 좋지 않갔소. 그래야 정감도 오가고.”
액자를 두고 부리는 사치도 싫어한다. 평소에 사진을 액자에 담을 일이 있을 때도 대개 5천원, 더 쓴다 해도 1만원을 넘지 않는 선에서다.

이번 전시에는 60∼70년대 사진이 주를 이뤘지만 그의 작업은 언제든 쉼없이 계속돼 왔다.
“과거에 뭘 했다가 아니라 현재가 중요하지 않갔소. 과거와 현재가 이꼬르돼야지.”
필름카메라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작품이 목적이고 결과물의 완성도가 중요한 것이지,
무엇으로 찍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잖아요.”

▲ 사진작가 신철균씨.
ⓒ 김태성 기자
그래서 2005년부터는 디지털카메라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콤퓨타 만지는 것이 겁나서 공포심이 엄청 컸는데, 필요하다 싶으니 결국 익히게 됩디다. 내가 모르던 새로운 세상도 열리고.”
나운동 아파트 동네에서 그는 ‘사진할아버지’로 통한다. 아이들을 찍어선 경비실들에 사진을 맡겨두곤 한다. 사진 임자 찾아서 건네주라고. 

 “동네서 많이 찍지요. 요새 기름값 비싸서 어디 멀리 가겠어요, 허허. 어디든 나서면 찍을 것들이지요.” 굳이 먼 곳을 찾지 않아도 족한 마음. 돌아보면 늘 그래 왔다. 먼 데를 욕심내지 않고 자신이 사는 지역을,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을 꾸준히 기록해 왔다.

세월 흘러도 관심사는 변하지 않는다. 희로애락에 따라 천변만화하는 인간의 표정, 인간의 얼굴. 그 미세하고도 극적인 움직임을 좇는 일에는 질리지 않는 설렘이 있고 “요거다!” 하는 희열의 순간이 있다. 여든 살인 지금도 그가 카메라를 놓지 않는 이유다.

http://www.jeonlado.com/v2/ch01.html?&number=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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