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을 거론할 때 예술가와 연예인 등 대중문화인이 다수를 차지한다. 그만큼 대중문화는 이미 우리 삶 속 깊이 들어와 있으며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 또한 크다. 본지는 전통문화의 진정한 가치를 발견하고 우리 시대의 문화 흐름을 반영하는 코너 - 집중인터뷰를 마련, 각 분야에서 의미 있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분야별로 대중문화를 돋보이게 하는 인물을 만나보기로 한다.
수행은 내 삶의 최우선
그의 작업실 창가에 서면 홍은동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창가로 부는 바람의 촉감이나 청정함 저 아랫마을과는 다르다. 작업실 바로 뒤엔 산도 있다. 맘만 먹으면 잘 꾸며진 산책로를 따라 걸을 수도 있고, 헬스 장비를 이용해 건강을 챙길 수 있는 공원도 있다. 하지만 오전 11시면 작업실로 출근해 밤 11시까지 ‘철두철미’하게 작업을 하고 가는 노희경 작가는 작업실 뒷산을 산책할 엄두를 내본 일이 없다.
그런 그가 놀랍게도 수시로 오르내리는 산이 있으니 경상북도 문경의 희양산 자락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희양산 자락의 정토수련원을 찾아 수시로 용맹정진하고 돌아온다. 그곳보다 노희경 작가가 더 자주 찾는 곳은 서초동에 자리한 정토법당이다. 정토법당의 수요일 저녁법회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방송작가의 모임에서보다 정토회의 크고 작은 행사 현장에서 그를 찾는 일이 더 쉽다. ‘제3세계 어린이를 위한 모금’이 있던 지난 연말의 명동, 그는 선두에서 모금 활동을 했다.
뿐만 아니다. 열에 아홉쯤은 “노희경 작가님이 꼭 해보라고 해서” 시작했노라 고백하는 방송인 수행모임 ‘길벗’의 한가운데에도 그가 있다. 철저한 ‘마음공부’ 과정을 거쳐야 정식 회원이 되는 길벗모임은 1기부터 6기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1기 멤버 중의 한 사람인 그는 6기 후배들까지 아우르고 챙긴다.
“정토회 활동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어요. 3년 전에 ‘길벗’을 시작하면서 앞으로 제1순위로 수행에 투자하겠다고 마음먹었죠. 모두들 바쁜 일정 속에서 어떻게 가능하느냐고 묻는데, 최우선으로 놓고나니 다른 일정들이 자연스럽게 조율되던데요. 마음이 없는 것이지 시간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마음공부를 통해 만난 부처님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절을 자주 찾았고, 어머니를 따라 소원성취 기도를 하곤 했다. 그가 스물 여섯 살 때 그의 가장 큰 의지처인 어머니가 위암을 앓으셨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위해 딱히 해드릴 게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108배였다. 『지장경』을 펼쳐 읽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지장보살이 광목여인일 때 지옥고를 당하는 어머니를 위해 서원을 세우는 내용을 읽고 또 읽으면서 노희경은 ‘불교가 이런 종교구나, 이렇게 자비롭구나’를 되뇌었다. 『지장경』을 읽는 사이 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를 살려달라던 기도는 어느덧 어머니를 잘 보내게 해달라, 내가 이 현실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달라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그렇게 앓던 어머니를 여의고 이후 10년 사이, 노희경. 그 이름 석자는 대한민국 시청자들을 텔레비전 앞에 불러 앉히는 대명사가 되었다. 일에서 그처럼 승승장구했지만 가족과는 남보다도 더 멀게 살았다. 2002년, 심혈을 기울인 드라마 「고독」이 ‘망하고’말았다. 작품에 대한 평이 좋을 땐 전혀 문제되지 않던 인간관계조차 작품이 실패하자 함께 나빠졌다. 건강도 상했다. 임파선부터 갑상선까지 결절이 깨알처럼 늘어나 일어나기조차 힘들었다.
그때 이금림 드라마작가가 “마치 저승에 서 있는 듯 보이는” 그에게 마음공부를 권했다. 그곳이 문경의 정토수련원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깨달음의 장>이란 4박 5일 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태어나서 많은 이들 앞에서 그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내 안에 있다”는 관점에서 세상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노희경은 ‘내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면서’ 매일 초기경전을 읽고 명상을 하고 108배를 하며 마음상태를 기록하는 수행을 거르지 않았다. 의심나면 곧장 문경으로 달려가서 법륜 스님과 법사님들께 여쭙곤 했다. 그렇게 수행의 시간이 쌓이면서 가족과의 관계도 회복했다. 그의 드라마는 더 밝아지고 더 깊어졌다.
“전 항상 어머니가 지혜로운 분이라고 믿어왔어요. 그런데 불교를 만나면서 세상에서 내가 의지할 데가 또 있는 거예요. 지금의 어머니는 부처님이에요. 그동안 저는 입으로 살아왔지만 부처님, 그 젊은 남자는 온몸으로 해냈잖아요. 그리고 끝까지 해냈고요. 감동입니다. 그렇게 불교를 만나면서 그 멋진 남자는 어느 틈에 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따라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감동이었다. 그런 부처님의 일생을 사랑하면서부터 예수님도 성 프란체스카도, 소크라테스도 사랑하게 됐다.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이 의외로 너무나 많았어요. 경전에 등장하는 대대 선지식, 오백 비구, 이들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세상에 대한 의심이 묵은 체증 내려가듯 말끔히 가셔졌어요. 세상 모든 게 다 제 문제였던 거죠. 고고한 척 서른 일곱 해를 살아왔는데 이 모든 게 내 문제일 뿐. 문제가 아니로구나 가벼워지기도 했고요.”
기아, 질병, 문맹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그가 최우선으로 챙기는 ‘길벗 모임’은 올해 대단한 일을 치렀다. ‘말로만 하지 말고 우리의 재능으로 조금만 좋은 일을 해보자’는 성준기 감독의 제안에 노희경 작가를 비롯해 이선희, 서희정 작가와 배우 배종옥 등 길벗 수행자들이 뜻을 합쳤다. 드라마의 연출료와 원고료, 출연료 전액을 국제난민구호단체인 JTS를 통해 북한어린이와 제3세계 어린이 돕기에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기부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은 그렇게 탄생됐다.
그러나 그는 ‘오만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고 했다. 취지는 좋았으나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는 일도, 방송 편성을 따내는 일도, 제작 맡을 프로덕션을 찾는 일도, ‘하나도 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도중에 속물 같은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하는 이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남 탓을 내려놓고 오직, 그곳에서 못난 자신의 꼬락서니만을 잘 지켜보며 반성합니다”라는 명심문을 새기며 정진했다.
기부 드라마는 방송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런 파워’도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소명의식만으로 만든 드라마가 이 ‘살벌한 21세기’에 제작됐다는 게 ‘신기하다’는 평도 받았다. 쟁쟁한 배우들을 노개런티로 끌어 모은 건 순전히 노희경 작가의 힘이었다. 더구나 그렇게 좋은 취지의 드라마가 ‘정말 좋았다’는 반향을 일으킨 것이 더 큰 화제였다. 진심으로 사람을 믿는 이들이 한마음으로 만든 작품이라 그랬을 것이다.
“부처님께 부처님 안 계신 세상에선 누구에게 공양을 올려야 하는가를 여쭙자 가난한 자, 병든 자에게 공양하라고 하시잖아요. 그게 불교 아닌가요.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서는 일, 그것이 진정 부처님 가르침을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불교는 모던하고 진보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종교예요. 불교가 정말 생활 속에서 필요한 거라는 걸 드라마를 통해서 알리는 게 제 몫이죠.”
세상을 위해 잘 쓰이는 사람 되고 싶어
촬영 직전에 쪽대본이 급히 드나드는 요즘의 드라마 현실 속에서 노희경은 대본을 일찍 보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연기력이 문제됐던 한 배우는 그의 드라마로 스타가 됐다. 그때 배우가 말했다. “대본을 일찍 넘겨줘서 연습할 시간을 많이 준 노희경 작가님께 너무 감사드린다”고. 그것이 노희경표 드라마의 핵심이다. 그런데도 작가는 칠팔십 퍼센트로 시작하는 드라마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했다. 올가을에 시작하는 드라마는 기필코 100% 완성작으로 시작하겠다는 게 그의 새해 희망이다. 올해는 안 써도 될 돈을 써야 하고, 안 써도 될 힘을 쓰는 일이 비일비재한 드라마 시스템에 새바람이 불 것 같다.
그는 드라마를 쓰면서 언제부턴가 자꾸 가르치려 하는 자신을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 아침 108배를 마친 뒤 ‘그저 배우겠습니다’ 하는 명심문을 외며 3배를 더 했다. 몇 해 전부터는 포화 상태에 이른 욕심을 그만 내려놓고 싶었다. 그래서 ‘더는 바라지 않겠습니다’를 외며 3배를 더하고 있다. 108배에 6배를 더 올리는 우리 시대 작가 노희경은 말한다.
“불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가르침이잖아요. 이 불교가 번창하면 좋겠어요. 부처님 말씀을 만났으니 그 말씀대로 애쓰고 세상에 잘 쓰일 일들을 찾아나서려고 해요. 아무리 피곤하고 지쳐도 꾸준히 할 겁니다. 올핸 출판을 통한 수익금을 사회에 환원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에요. 기부 드라마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하고,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나눔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으면 해요.”
2009년 내년 이맘때 노희경 작가는 뭘 하고 있을까. 긴 세월 동안 가슴에 품어온 그이, 길에서 나고 길 위를 걷고 길 위에서 열반에 든, 멋진 그이의 생애를 달달 꿰뚫고 있는 노희경 작가는 ‘눈물나게 아름다운 그 남자’의 발자취를 찾아 경전 속에 등장하는 인도의 시골 마을 어디쯤을 걷고 있을 것이다.
수행은 내 삶의 최우선
그의 작업실 창가에 서면 홍은동 일대가 내려다보인다. 창가로 부는 바람의 촉감이나 청정함 저 아랫마을과는 다르다. 작업실 바로 뒤엔 산도 있다. 맘만 먹으면 잘 꾸며진 산책로를 따라 걸을 수도 있고, 헬스 장비를 이용해 건강을 챙길 수 있는 공원도 있다. 하지만 오전 11시면 작업실로 출근해 밤 11시까지 ‘철두철미’하게 작업을 하고 가는 노희경 작가는 작업실 뒷산을 산책할 엄두를 내본 일이 없다.
그런 그가 놀랍게도 수시로 오르내리는 산이 있으니 경상북도 문경의 희양산 자락이다. 보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희양산 자락의 정토수련원을 찾아 수시로 용맹정진하고 돌아온다. 그곳보다 노희경 작가가 더 자주 찾는 곳은 서초동에 자리한 정토법당이다. 정토법당의 수요일 저녁법회에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다. 방송작가의 모임에서보다 정토회의 크고 작은 행사 현장에서 그를 찾는 일이 더 쉽다. ‘제3세계 어린이를 위한 모금’이 있던 지난 연말의 명동, 그는 선두에서 모금 활동을 했다.
뿐만 아니다. 열에 아홉쯤은 “노희경 작가님이 꼭 해보라고 해서” 시작했노라 고백하는 방송인 수행모임 ‘길벗’의 한가운데에도 그가 있다. 철저한 ‘마음공부’ 과정을 거쳐야 정식 회원이 되는 길벗모임은 1기부터 6기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1기 멤버 중의 한 사람인 그는 6기 후배들까지 아우르고 챙긴다.
“정토회 활동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어요. 3년 전에 ‘길벗’을 시작하면서 앞으로 제1순위로 수행에 투자하겠다고 마음먹었죠. 모두들 바쁜 일정 속에서 어떻게 가능하느냐고 묻는데, 최우선으로 놓고나니 다른 일정들이 자연스럽게 조율되던데요. 마음이 없는 것이지 시간이 없는 건 아니었어요.”
마음공부를 통해 만난 부처님
어린 시절 어머니를 따라 절을 자주 찾았고, 어머니를 따라 소원성취 기도를 하곤 했다. 그가 스물 여섯 살 때 그의 가장 큰 의지처인 어머니가 위암을 앓으셨다. 편찮으신 어머니를 위해 딱히 해드릴 게 없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108배였다. 『지장경』을 펼쳐 읽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지장보살이 광목여인일 때 지옥고를 당하는 어머니를 위해 서원을 세우는 내용을 읽고 또 읽으면서 노희경은 ‘불교가 이런 종교구나, 이렇게 자비롭구나’를 되뇌었다. 『지장경』을 읽는 사이 암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를 살려달라던 기도는 어느덧 어머니를 잘 보내게 해달라, 내가 이 현실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달라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그렇게 앓던 어머니를 여의고 이후 10년 사이, 노희경. 그 이름 석자는 대한민국 시청자들을 텔레비전 앞에 불러 앉히는 대명사가 되었다. 일에서 그처럼 승승장구했지만 가족과는 남보다도 더 멀게 살았다. 2002년, 심혈을 기울인 드라마 「고독」이 ‘망하고’말았다. 작품에 대한 평이 좋을 땐 전혀 문제되지 않던 인간관계조차 작품이 실패하자 함께 나빠졌다. 건강도 상했다. 임파선부터 갑상선까지 결절이 깨알처럼 늘어나 일어나기조차 힘들었다.
그때 이금림 드라마작가가 “마치 저승에 서 있는 듯 보이는” 그에게 마음공부를 권했다. 그곳이 문경의 정토수련원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깨달음의 장>이란 4박 5일 수행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태어나서 많은 이들 앞에서 그렇게 울어본 건 처음이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내 안에 있다”는 관점에서 세상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노희경은 ‘내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면서’ 매일 초기경전을 읽고 명상을 하고 108배를 하며 마음상태를 기록하는 수행을 거르지 않았다. 의심나면 곧장 문경으로 달려가서 법륜 스님과 법사님들께 여쭙곤 했다. 그렇게 수행의 시간이 쌓이면서 가족과의 관계도 회복했다. 그의 드라마는 더 밝아지고 더 깊어졌다.
“전 항상 어머니가 지혜로운 분이라고 믿어왔어요. 그런데 불교를 만나면서 세상에서 내가 의지할 데가 또 있는 거예요. 지금의 어머니는 부처님이에요. 그동안 저는 입으로 살아왔지만 부처님, 그 젊은 남자는 온몸으로 해냈잖아요. 그리고 끝까지 해냈고요. 감동입니다. 그렇게 불교를 만나면서 그 멋진 남자는 어느 틈에 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따라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구나’ 하는 감동이었다. 그런 부처님의 일생을 사랑하면서부터 예수님도 성 프란체스카도, 소크라테스도 사랑하게 됐다.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이 의외로 너무나 많았어요. 경전에 등장하는 대대 선지식, 오백 비구, 이들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는 걸 알게 된 거죠. 세상에 대한 의심이 묵은 체증 내려가듯 말끔히 가셔졌어요. 세상 모든 게 다 제 문제였던 거죠. 고고한 척 서른 일곱 해를 살아왔는데 이 모든 게 내 문제일 뿐. 문제가 아니로구나 가벼워지기도 했고요.”
기아, 질병, 문맹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
그가 최우선으로 챙기는 ‘길벗 모임’은 올해 대단한 일을 치렀다. ‘말로만 하지 말고 우리의 재능으로 조금만 좋은 일을 해보자’는 성준기 감독의 제안에 노희경 작가를 비롯해 이선희, 서희정 작가와 배우 배종옥 등 길벗 수행자들이 뜻을 합쳤다. 드라마의 연출료와 원고료, 출연료 전액을 국제난민구호단체인 JTS를 통해 북한어린이와 제3세계 어린이 돕기에 기부하기로 한 것이다. 국내 최초의 기부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은 그렇게 탄생됐다.
그러나 그는 ‘오만의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고 했다. 취지는 좋았으나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는 일도, 방송 편성을 따내는 일도, 제작 맡을 프로덕션을 찾는 일도, ‘하나도 되는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도중에 속물 같은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하는 이 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남 탓을 내려놓고 오직, 그곳에서 못난 자신의 꼬락서니만을 잘 지켜보며 반성합니다”라는 명심문을 새기며 정진했다.
기부 드라마는 방송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런 파워’도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소명의식만으로 만든 드라마가 이 ‘살벌한 21세기’에 제작됐다는 게 ‘신기하다’는 평도 받았다. 쟁쟁한 배우들을 노개런티로 끌어 모은 건 순전히 노희경 작가의 힘이었다. 더구나 그렇게 좋은 취지의 드라마가 ‘정말 좋았다’는 반향을 일으킨 것이 더 큰 화제였다. 진심으로 사람을 믿는 이들이 한마음으로 만든 작품이라 그랬을 것이다.
“부처님께 부처님 안 계신 세상에선 누구에게 공양을 올려야 하는가를 여쭙자 가난한 자, 병든 자에게 공양하라고 하시잖아요. 그게 불교 아닌가요. 소외된 이들에게 다가서는 일, 그것이 진정 부처님 가르침을 알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불교는 모던하고 진보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종교예요. 불교가 정말 생활 속에서 필요한 거라는 걸 드라마를 통해서 알리는 게 제 몫이죠.”
세상을 위해 잘 쓰이는 사람 되고 싶어
촬영 직전에 쪽대본이 급히 드나드는 요즘의 드라마 현실 속에서 노희경은 대본을 일찍 보내는 작가로 유명하다. 연기력이 문제됐던 한 배우는 그의 드라마로 스타가 됐다. 그때 배우가 말했다. “대본을 일찍 넘겨줘서 연습할 시간을 많이 준 노희경 작가님께 너무 감사드린다”고. 그것이 노희경표 드라마의 핵심이다. 그런데도 작가는 칠팔십 퍼센트로 시작하는 드라마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했다. 올가을에 시작하는 드라마는 기필코 100% 완성작으로 시작하겠다는 게 그의 새해 희망이다. 올해는 안 써도 될 돈을 써야 하고, 안 써도 될 힘을 쓰는 일이 비일비재한 드라마 시스템에 새바람이 불 것 같다.
그는 드라마를 쓰면서 언제부턴가 자꾸 가르치려 하는 자신을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 아침 108배를 마친 뒤 ‘그저 배우겠습니다’ 하는 명심문을 외며 3배를 더 했다. 몇 해 전부터는 포화 상태에 이른 욕심을 그만 내려놓고 싶었다. 그래서 ‘더는 바라지 않겠습니다’를 외며 3배를 더하고 있다. 108배에 6배를 더 올리는 우리 시대 작가 노희경은 말한다.
“불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가르침이잖아요. 이 불교가 번창하면 좋겠어요. 부처님 말씀을 만났으니 그 말씀대로 애쓰고 세상에 잘 쓰일 일들을 찾아나서려고 해요. 아무리 피곤하고 지쳐도 꾸준히 할 겁니다. 올핸 출판을 통한 수익금을 사회에 환원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에요. 기부 드라마도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하고,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나눔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으면 해요.”
2009년 내년 이맘때 노희경 작가는 뭘 하고 있을까. 긴 세월 동안 가슴에 품어온 그이, 길에서 나고 길 위를 걷고 길 위에서 열반에 든, 멋진 그이의 생애를 달달 꿰뚫고 있는 노희경 작가는 ‘눈물나게 아름다운 그 남자’의 발자취를 찾아 경전 속에 등장하는 인도의 시골 마을 어디쯤을 걷고 있을 것이다.
글_이윤수(문화예술 전문 방송작가)·사진_김민
728x90
'모셔온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色法에 대한 오해 (0) | 2008.08.20 |
---|---|
스리랑카 ‘패엽경’ 사원 알루 위하라 (0) | 2008.08.18 |
세계적인 위빠사나 수행자 우 빤디따 스님에게 듣는다 (0) | 2008.08.07 |
[스크랩] “강의석 판결…종교폭력에 면죄부 준 꼴” (0) | 2008.07.24 |
[스크랩] 불교 사이트의 현황과 문제점 (0) | 2008.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