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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셔온 글

스리랑카 ‘패엽경’ 사원 알루 위하라

  같은 강물에 발을 담가도 강물은 그때 그 강물이 아니다. 이 말을 수없이 되뇌었다. 약 2000여 년 전인 기원전 1세기, 세계 최초의 불교 경전이 만들어진 사원 알루위하라를 찾기 전 다진 마음이었다. 남은 유적들을 이제와 둘러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 싶었다. 그래도 불교 최초 경전 ‘패엽경’을 언제 또 볼 수 있겠는가! 같은 강물에 발을 담가 흘러간 그 때 그 강물의 체온과 감촉, 그 속에 깃들어 내밀히 숨 쉬었던 생명력을 더듬어 보고 싶었다.

 

 

첫 경전 제작한 알루위하라 사원

 

캔디에서 북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마탈레 지역에 위치한 알루위하라로 향했다. 가는 길 곳곳에서 만난 스리랑카 아침 풍경은 한국의 여느 도시처럼 부산했다. 눅눅한 이곳 기후가 익숙하지 않아서 게으름만 늘어 난 탓인지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활기 차 보였다. 이슬람 신자로 보이는 한 여인은 아이 손을 꼭 잡고 학교로 향하고 있었고, 하얀 상하의를 입고 머리를 두 갈래로 길게 땋은 예쁜 여학생들은 삼삼오오 등굣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툭툭’이라는 세바퀴 오토바이(인도에서는 오토릭샤)를 타고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풍경이 웬일인지 낯설지가 않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 허리춤을 꼭 잡고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학교에 다녔던 기억이 떠올라 피식 웃고 만다.

 

 

부처님 입멸 후 긴 세월동안 부처님의 말씀은 오직 구전으로만 전해져왔다. 허나 2000여 년 전 이 곳 알루위하라에서는 부처님의 말씀을 문자로 기록, 인류 최초의 불교 경전을 탄생시켰다. 그런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루위하라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아이들이 버스에 탄 채로 손을 흔들며 웃음을 건넨다. 머쓱하게 손을 흔들어 인사에 화답했다. 일단 인사는 건넨 셈이니 “이러지 마세요. 초상권이 있거든요”라고 하진 않을 거라 여기고, 찰칵 카메라로 아이들의 웃음을 훔쳤다.

 

잘 정비된 계단을 올랐다. 이젠 제법 맨발 차림도 익숙해진 모양인지 신발과 양발을 스스럼없이 벗어 제겼다. 허나 햇볕에 달궈진 바닥 탓에 발이 따갑다. 원망스러운 눈길을 쏴 주려 고개를 들자 큰 바위틈 사이로 작은 사원이 시야에 들어왔다. 알루위하라다.

패엽경 제작을 위해 만들어진 동굴이 14곳이나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두 곳만이 보전돼 있다. 두 곳의 동굴 사원을 들여다보다 지옥도를 보고 압도되고 말았다. 이생의 악업으로 인해 고통 받는 중생을 그린 것이리라. 쇠꼬챙이가 온몸에 박힌 사람들, 날카로운 칼이 몸을 파고들자 신음하는 사람들, 가시나무에 과일 마냥 아무렇게나 주렁주렁 매달린 사람들…. “부처님, 참회합니다” 나지막이 신음 섞인 참회가 입에서 새어 나왔다.

 

알루위하라는 도서관과 학교까지 보유하고 있는 등 제법 사원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도서관에는 패엽경 자료들과 제작 과정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었다. 비록 도서관 밖이지만 패엽경 조성 당시의 모습을 재연해 놓은 곳도 있다. 도서관 안에선 한 스님이 패엽경을 재연하고 있어 눈길을 끌었다. 패엽경이란 부처님 말씀을 나뭇잎에 새긴 경전으로 야자수 잎을 쪄서 말리고 사포 등으로 매끄럽게 만든 후 철핀으로 경전을 새기고 재와 식물성 기름, 쌀가루로 반죽하여 문지르고 닦아 제작한다. 철핀 같은 것으로 열심히 글자를 새기는 스님을 보고 있노라니 질 좋은 종이 수첩에 끼적끼적 메모를 쉽게 하는 손과 볼펜이 괜히 부끄럽다.

 

 

사원 지옥도 보며 참회 발원

 

스리랑카 불교의 대승 부파 아브하야기리위하라 승단은 상좌부 전통의 고수를 주장했던 마하위하라 승단과 약 1200여 년간 대립과 경쟁관계를 형성해왔다. 그러나 12세기에 이르러 스리랑카는 마힌다 스님으로부터 전래된 정통 상좌부를 택했고, 아브하야기리위하라 승단은 소멸됐다. 그러나 부파의 발생과 대립은 인도에서 전래된 상좌부 불교를 더욱 단결시키는 결과를 불러왔고 부처님 말씀을 문자로 남기게 된 것이다. 바로 불교 최초의 경전 패엽경의 탄생 역사다.

 

 

 

 

반면 그 이면에는 가슴 아픈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최초의 도읍 아누라다푸라는 기원전 1세기 남인도 타밀족의 거듭된 침략으로 수난을 겪고 있었다. 끊이지 않는 전쟁과 이민족의 지배, 급기야 계속된 가뭄으로 기근까지 덮쳤다.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토록 존경하던 비구의 육체를 먹는 일까지 벌어졌다. 민심은 흉흉해졌고 신심은 땅에 떨어졌었다. 일설에는 상좌부 전통의 맥이 끊길 위기가 패엽경 제작이라는 최후 결단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몽골 민족의 침략을 팔만대장경이라는 장엄한 신심의 응집으로 이겨 낸 우리 민족과 스리랑카 민족의 신심은 닮은꼴이라는 생각이 든다. 땅에 떨어진 신심을 똘똘 뭉쳐 패엽경을 만들고 대기근을 이겨낸 것이다. 짠한 가슴을 진정시키고 패엽경을 빤히 쳐다봤다. 현지 가이드가 찰싹 달라붙어 또 다른 사실을 전해줬다.

 

“이것은 1981년부터 1991년까지 스님 5분이 만든 패엽경입니다. 2000년 전 것은 1848년 영국군이 알루위하라를 파괴하면서 같이 불태웠습니다.”

 

약 2000여 년 전에 500여명의 스님들이 알루위하라에 모여 7년에 걸쳐 제작한 패엽경이 그렇게 사라지다니. 희고 눈 푸른 사람들에게는 패엽경이 그저 오래된 나무 잎사귀 정도에 불과한 것이었다. 2000여 년 전 제작된 위대한 유산인 최초의 패업경은 무너진 사원 건물더미 속에 이는 먼지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췄다. 문득 알루위하라의 지옥도가 떠올랐다. 가이드가 말을 이었다.

“지옥도에 묘사된 뿔나고 괴상하게 생긴 것(?)들은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 침략 국가 민족들을 희화화 한 것이에요.” 아무래도 영국군들은 이생의 악업을 잔뜩 지고 숨을 거두었을 것 같다. “부디 극락왕생하소서.”

 

사원 맨 끝 다고바가 있는 곳에 올랐다. 시원하게 트인 마탈레가 한 눈 가득 들어왔다. “웨어 아 유 프롬?(where are you from?)”, “펜, 펜(pen)”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럽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아침에 만났던 그 아이들이다. 이방인이 가진 펜을 갖고 싶은지 연신 펜 달라고 소리친다. 같이 서 있던 여 선생님이 만류할 정도다. 맨발로 사원을 돌아다니던 아이들은 스리랑카의 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그네들은 공책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또 열심히 보고 느끼고 있었다. 견학이나 왔겠지 싶었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한국에 와서 안 사실인데 스리랑카는 사원마다 교리학교가 있다. 일요일만 교리를 배우는 학교라 ‘일요 불법학교’라고도 하는데 일요일이면 사원이 있는 마을 학생들이 흰색 전통 의상을 입고 꽃을 따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는 사원에 모여든다.

최초 패엽경은 영국군이 파괴

 

스님에게 오계를 받고 부처님께 꽃 공양을 올리고 나서 교리공부를 한단다. 보통 불교학교에 참석하는 아이들은 1학년부터 10학년으로 나누어 수준에 맞게 스리랑카 행정부인 불교부에서 만든 교재를 가지고 공부한다.

교리뿐만 아니라 부모님을 위한 효도,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방법 등도 함께 배운다고 한다. 아이들이 사원마다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에 이른다고. 과장이라고 해도 천진불이 없어 고민하는 한국불교와 사뭇 다른 모습에 마냥 부럽기만 하다. 알루위하라를 찾은 날이 일요일은 아니었으나 그네들도 일요일이면 자신들이 사는 마을 사원에 흰색 옷을 입고 꽃을 바구니에 담아 사원에 삼삼오오 모여들겠지.

 

알루위하라를 빠져 나오며 아침에 올랐던 계단을 올려다본다. 아직도 아이들이 사원에서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렇다.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흐르게 마련이다. 그래도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 그 강물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어딘가에서 흘러왔던 그 강물은 결국 다시 흘러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법이다. 2000여 년의 세월을 간직한 스리랑카 상좌부 불교 전통은 스리랑카 미래인 아이들과 그렇게 소통하고 있었다.

 

sshoutoo@beopbo.com


961호 [2008-08-11]

불교 최초 경전 ‘패엽경’이 탄생한 알루위하라. 아이들의 표정이 천진하다.
스리랑카의 대표적 교통수단 ‘툭툭’
미소로 인사를 건네는 여학생들
동굴 사원에 그려진 벽화 ‘지옥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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