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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지식人

믿음을 버려라 vs 믿음을 내어라

니까야 번역 문제 -믿음을 버려라-

whoami3 2008.08.0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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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의 기록에 위하면 붓다는 깨닫고 나서 아래와 같이 설법하기를 주저했습니다.

 

“....설혹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저들이 내말을 완전하게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로를 줄 뿐이고 그것은 나에게 성가신 일이다.”

(ahañce ca kho pana dhammaṃ deseyyaṃ, pare ca me na ājāneyyuṃ so mamassa kilamatho, sā mamassa vīhesā'ti.)

그리고 나서 세존은 게송을 읊습니다.

 

“어렵게 나는 중득 했나니 이제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탐욕과 성냄으로 가득한 자들이 이법을 실로 잘 깨닫기란 어렵다. 흐름을 거스르고 미묘하고 깊고 보기 어렵고 미세한 법을 어둠의 무더기로 덮여있고 탐욕에 빠진 자들은 보지 못한다.[각묵스님 번역]

 

그런데 범천이 이러한 붓다의 마음을 알고 3번에 걸쳐 설법해주기를 권청합니다. 결국 붓다는 사람의 근기가 같지 않음을 숙고하시고 설법을 허락합니다. 아래 경전은 이제 설법을 허락하는 장면입니다.

"Apārutā tesam amatassa dvārā ye sotavanto pamuñcantu saddham vihimsasaññī pagunam na bhāsim Dhammam panītam manujesu brahme"ti.

권청경(SN.1.137.Āyācanasutta) 대전기경(DN.2.14.Mahāpadānasutta) (MN.1.169) (MN.2.94)

 

[전재성님 번역]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듣는 자들은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범천이여, 나는 상처받는다는 생각으로 사람에게 미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각묵스님 번역]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도다. 귀를 가진 자 믿음을 내어라. 범천이여,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으려 하였다.“

 

[최봉수님] 귀 있는 자들에게 불사의 문을 열겠으니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 범천아,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하왁가 p.53)

 

 

질문1. pamuñcantu saddham의 번역입니다.

믿음을 버려라(전재성).

믿음을 내어라(각묵).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최봉수).

 

[의견]

pamuñcantu는 pamuñcati(벗어나다.나가다.버리다)의 3인칭 명령형 복수입니다.

이 두 분의 번역이 전혀 반대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주석]서 에서는 “믿음을 버리라”는 말은 모든 자신의 믿음을 버리라, 제거하라.

(Pamuñcantu saddhanti sabbe attano saddhaṃ pamuñcantu vissajjentu,)는 뜻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전]에서는 pamuñcantu saddham (邪)信을 버려라.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경전들]에서도 각각 버리라,놓아라 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수따니빠따 5장

1067. Taṃ taṃ namassāmi samantacakkhu

Pamuñca(미래수동분사) maṃ sakka kathaṃkathāhi

널리보는 눈을 가지신 샤끼야여! 저는 당신께 예배드립니다.

저를 온갖 의혹에서 풀려나게 해주십시오.

 

 

1151. Evameva tvampi pamuñcasasu(수동명령형 2인칭 단수) saddhaṃ

Gamissasi tvaṃ piṅgiya maccudheyyassa pāraṃ.

그대도 믿음을 버리시오. 삥기야여 그대는 죽음의 영역의 저쪽으로 갈 것입니다.

 

 

 

상윳따니까야 (SN.1.51.Candimasutta)

Rāhu candaṃ pamuñcassu buddhā lokānukampakāti. "

그때 세존께서는 하늘아들 짠디마에 관해서 아쑤라의 왕 라후에게 시로 말씀하셨다.

[세존] " 하늘아들 짠디마는 지금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에게 귀의했네.

라후여, 짠디마를 놓아주게. 깨달은 이들은 세상을 불쌍히 여긴다네."

 

 

"Tathāgataṃ arahantaṃ suriyo saraṇaṃ gato,

Rāhu suriyaṃ pamuñcassu buddhā lokānukampakāti.

[세존] "하늘아들 쑤리야는 지금 이렇게 오신 이, 거룩한 이에게 귀의했네.

라후여, 쑤리야를 놓아주게. 깨달은 이들은 세상을 불쌍히 여긴다네.

 

 

 

그러므로 사전과 주석서와 수따니빠따와 상윳따니까야등에서 pamuñcantu가 사용되는 용례를 보아서는 pamuñcantu saddham는 (삿된) 믿음을 버려라.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설법을 할 테니 기존의 선입견과 믿음을 버리고 열린 마음, 객관적인 마음으로 들을 자세를 하라는 가르침이라고 이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믿음을 내어라]라고 해석한다면 붓다는 설법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믿어라 라는 말이 되어서 “와서 보라”는 붓다의 설법자세와 어긋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조건 믿고 따르지 말라는 깔라마경과도 위배되는 가르침이 됩니다. 믿음이라는 단어를 “죽은 자에 대한 근거 없는 제사는 그만두어라(최봉수)”라고 번역한 것은 그 믿음이란 것이 그 당시 제사 지내는 브라흐만사상이라고 이해 해서 그렇게 의역한 것 같습니다.

 

 

 

 

 질문2. 다음 문장을 어떻게 번역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vihimsasaññī(주격,) pagunam na bhāsim Dhammam panītam manujesu(남성명사 처소격 복수) brahme(감탄)"ti.

 

나는 상처받는다는 생각으로 사람에게 미묘한 진리를 설하지 않았네 (전재성)

이 미묘하고 숭고한 법이 인간들 사이에서 해악을 초래 할지도 모른다는 인식 때문에 나는 설하지 않으려 하였다.(각묵)

나는 단지 피로할 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에게 덕스럽고 숭고한 법을 설하지 않았던 것이다.(최봉수)

 

 

 

[의견]이 번역은 크게 상처받는 것이 붓다인가 사람들인가 하는 것입니다.

vihimsasaññī는 vihimsā(해로움)+saññin(산냐를 가진자)인데 saññin의 주격 단수가 saññī입니다. 그래서 “해롭다는 생각을 가진 자인 (나는) ” 의 뜻입니다.

 

여기서 망설여지는 부분은 붓다가 어떻게 상처받는 다는 산냐(vihimsasaññī)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처받는 다는 산냐(vihimsasaññī)는 이미 앞에서 “설혹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저들이 내말을 완전하게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피로를 줄 뿐이고 그것은 나에게 성가신 일이다.”라고 언급한 것을 다시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 합니다. 그러므로 상처받는 다는 산냐란 앞에서 붓다가 “나에게 피로를 줄 뿐이고 그것은 나에게 성가신 일이다.” 라고 3번 생각한 적이 있는 “붓다의 산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전]에서도 상처받는 다는 산냐(vihimsasañña)는 성가심(vīhesā)과 같은 의미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위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 귀 있는 자들이여! 자신의 믿음을 버려라. 그들에게 불사(不死)의 문은 열렸다. 범천이여, 피로할 것이라는 생각한 나는 미묘하고 숭고한 법을 인간들 사이에서 설하지 않았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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