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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지식人

불교에 대한 4가지 질문

 

 

1. 모든 것은 변화하고 변화하는 것은 괴로움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법은 상주불변이라합니다.

그렇다면 위의 모든것은 변화한다는 것에 모순되는 것 아닙니까?

 

다발경(SN.2.p249.Bandhasutta)

 

“라훌라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육체는 영원한가 무상한가?

세존이시여, 무상합니다.

그러면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인가? 즐거운 것인가?

세존이시여, 괴로운 것입니다.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법을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 이야말로 나이며 이것은 나의 자아다' 라고 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세존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해설: 위와 같은 경전들이 나중에

제행무상(Sabbe saṅkhārā aniccā),

제행개고(Sabbe saṅkhārā dukkhā)=일체개고,

제법무아(Sabbe dhammā anattā) 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이것을 [삼특상]이라고 부릅니다.

삼특상(무상,고,무아)은 중생의 보편적인 성질이지 삼라만물의 보편적인 성질이 아닙니다.

주석서에서도 제행(Sabbe saṅkhārā)과 제법(Sabbe dhammā)이 각각 무더기(온), ‘중생의 오온’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므로 제행을 “모든 존재” “삼라만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범위를 너무 확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님이 말한 [모든 것은]은 중생의 오온으로 한정되어야 합니다. 그랬을 때에 만 무상한 것 그것은 괴로움이 됩니다. 무상하고 괴로운 대상은 “오취온” 이기 때문입니다. 오취온고(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란 오온을 (나와 나의 것과 나의 자아라고) 취착하는 것이 괴로움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我相입니다.

 

2. 불교에서는 무아를 주장합니다. 무아란 나라고 부를만한 어떤 절대적인 실체가 없다 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론 참나를 회복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듣다보면 분명 무아라고 하였는데 어디서 참나라는것이 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와지라경 (SN.1.135.Vajirāsutta)

 

“마치 여러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있듯이.

이와 같이 무더기들에 의해 중생이란 거짓이름이 있다.

생겨나는 것은 오직 괴로움이다.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도 오직 괴로움이다.

괴로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고 괴로움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

해설: 여러 부속이 모여서 수레라는 명칭이 생기듯이 오온에 의해 중생(나라는 개념)이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여기서 부속이 있는 것이나 오온이 있는 것이 괴로움이란 뜻이 아니다. 부속에서 생기는 수레라는 개념, 오온에서 중생이라는 개념(我想)이 괴로움이다. 이 자기동일성(我想)은 무지와 갈애에서 비롯된 착각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생겨나는 것은 오직 갈애(무지)이다. 갈애만이 머물다가 사라진다. 갈애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고 갈애 이외에는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의미이다.

이렇듯 니까야에서 참나는 철저히 부정되었지만 세월이 흘러 여래장경이나 승만경등의 후기 대승 경전들에서 참나가 등장한다. 그러나 아래 소개되는 조건경(SN.2.26. Paccaya sutta)에서 처럼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머무르거나 그 도리가 정해져 있으며 법으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법으로서 결정되어 있는 것은 참나가 아니라 연기의 법칙 이었다. 여기 연기의 법칙을 표현하는 단어로 진여(tathata)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초기불교는 이치, 법칙의 영원성이 진여라고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3. 또한 이세상에 영원한것은 없다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법 또한 영원한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조건경(SN.2.26. Paccaya sutta) 연기와 연생의 법

 

[세존] "수행승들이여, 연기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나는 것은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머무르거나 그 도리가 정해져 있으며 법으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법으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것을 잘 깨닫고 이해했으며 깨닫고 이해하고 나서 이야기하고 가르치고 알게 하고 앞에 두고 열어 보이고 분별하고 명확히 한다. 그러므로 '그대들도 보라' 고 말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명색을 조건으로 여섯 감역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의식을 조건으로 명색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형성을 조건으로 의식이 생겨나는 것,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는 것은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도리가 정해져 있으며 법으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법으로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여래는 그것을 잘 깨닫고 이해하며 깨닫고 이해하고 나서 이야기하고 가르치고 알게 하고 앞에 두고 열어보이고 분별하고 명확히 한다. 그러므로 '그대들도 보라' 고 말하는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무명을 조건으로 형성이 생겨나는 것은 여래가 출현하거나 여래가 출현하지 않거나 그 도리가 정해져 있으며 법으로서 확립되어 있으며 법으로서 결정되어 있으며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

 

해설:

1)그 도리가 정해진 것:sā dhātu(객관성), tathata(여실,진여)이란 그 조건의 속성이 정해져 있으며 조건 없는 태어남과 늙고 죽음은 결코 없다는 뜻이다.法如法爾,

2)법으로 확립되어 있는 것:dhammaṭṭhitatā(필연성),avitathata(허망하지 않은 것) 이란 조건에 의해 발생한 현상이 존속한다는 뜻이다. 法不離如,

3)법으로서 결정되어 있는 것:dhammaniyāmatā(불변성),anannattata(다른 것이 아닌 것) 이란 조건이 법을 결정한다는 뜻이다. 法不異如,

4) 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idapaccayatā(조건성),idappaccayata(그것을 조건으로 하는 것) 이란 이와 같은 늙고 죽음 등의 특수한 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한다는 말이다. 是隨順緣起

청정도론(대림스님 번역)에는 각각 존재하는 요소, 법의 확립된 성질, 법의 결정된 성질, 이것에게 조건 됨으로 번역하고 있다.

청정도론에서는 이 4가지 단어들(tathatā avitathatā anaññathatā idappaccayatā)이 동의어(vevacana)라고 말하고 있다.

이 4 가지에 관해 잡아함경에서는 sā dhātu dhammaṭṭhitatā dhammaniyāmatā idapaccayatā. 는 此法常住 法住法界라고 간략히 표현하고 tathatā avitathatā anaññathatā idappaccayatā는 法住․法空․法如法爾。法不離如。法不異如。審諦眞實․不顚倒。如是隨順緣起으로 여러개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은 같은 의미이다.

 

 

4.그리고 이건 제 개인적 질문인데 분명 삶을보면 모든사람들이 다 다릅니다.

그들만의 고유한 삶이 있고 현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업력에 의해 다르게 나타난다고 알고있습니다. 그렇다면 최초의 몸을받아 최초의 업력을 쌓아 지금의 '나' 가 있게한자는 누구입니까? 대체 어쩌다가 현재의 '나' 라는것이 나타나게 된것입니까?

 

몰리야 팍구나경(SN. 2.14.Moḷiyaphaggunasutta)잡아함372경- 9지연기 설명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의 제따바나에 있는 아나타삔디까 승원에 계셨다.

2. 그때 세존께서 '수행승들이여' 라고 수행승들을 부르셨다. 수행승들은 '세존이시여' 라고 세존께 대답했다.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한 네 가지 자양분이 있다. 그 네 가지 자양분이란 무엇인가? 첫째 거칠거나 부드러운 음식의 자양분, 둘째 접촉의 자양분, 셋째 의도의 자양분, 넷째 의식의 자양분이다. 수행승들이여, 이들 네 가지 자양분은 이미 태어난 뭇삶의 섭생을 위하거나 혹은 다시 태어남을 원하는 뭇삶의 보양을 위해 존재한다."

3. 이와 같이 말씀하셨을 때 존자 몰리야 팍구나가 세존께 이와 같이 말했다.

[팍구나] "세존이시여, 누가 이 의식의 자양분을 먹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 "그런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먹는다' 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사람이 먹는다' 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먹습니까'라는 말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의식의 자양분이 있습니까? 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의식의 자양분은 미래에 다시 생성되고 태어남을 위한 조건이다. 그것이 생겨날 때 여섯 감역이 생겨나고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난다."

4. [팍구나] "세존이시여, 누가 접촉을 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접촉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접촉을 만든다'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접촉을 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접촉이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여섯 감역을 조건으로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난다."

5. [팍구나] "세존이시여, 누가 감수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감수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감수한다'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감수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감수가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여섯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생겨나고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6. [팍구나] "세존이시여, 누가 갈애 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갈애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갈애 한다'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갈애 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갈애가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나고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난다."

7. [팍구나] "세존이시여, 누가 취착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취착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취착한다'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취착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취착이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갈애를 조건으로 취착이 생겨나고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난다."

[팍구나]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존재한다'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존재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취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난다."

[팍구나] "세존이시여, 누가 태어납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세존] "그와 같은 질문은 적당하지 않다. 나는 '사람이 태어난다'고 말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사람이 태어난다'고 말했다면 '세존이시여, 누가 태어납니까'라는 질문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와 같이 말하지 않은 나에게는 오로지 '세존이시여, 무엇 때문에 태어남이 생겨납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이 올바른 질문이다. 그것에 대한 올바른 대답은 이와 같다.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고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이 생겨난다. 이와 같이 해서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함께 생겨난다.

8. 그러나 팍구나여,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에서 탐욕이 남김없이 사라지면 접촉이 소멸하고 (Channaṃ tveva phagguna, phassāyatanānaṃ asesavirāganirodhā phassanirodho), 접촉이 소멸하면 감수가 소멸하며, 감수가 소멸하면 갈애가 소멸하고, 갈애가 소멸하면 취착이 소멸하며, 취착이 소멸하면 존재가 소멸하고, 존재가 소멸하면 태어남이 소멸하며, 태어남이 소멸하면 늙고 죽음,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소멸한다. 이와 같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이 소멸하는 것이다."

 

해설: 잘못된 질문과 바른 질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누가 의식의 자양분을 먹습니까?

누가 감수합니까?

누가 태어납니까?

라고 물음처럼 “누가”라고 물으면 잘못된 물음이고 다시

무엇 때문에 감수가 생겨납니까?

무엇 때문에 존재가 생겨납니까?

무엇 때문에 태어남이 생겨납니까?

라는 물음 처럼 “무엇 때문에”라고 물으면 바른 물음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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