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창조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창조신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창조신이 인간의 역사와 운명을 그의 뜻대로 좌지우지하는지 하는 물음에 매달려서 밤새도록 입씨름을 한다고 하여도 그 대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상상과 추측을 바탕으로 출발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보고, 듣고, 먹고, 느끼는 현실세계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무엇보다도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 대한 문제부터 꼼꼼하게 따져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물음들을 해결하게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확실한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광활한 우주가 끝이 있는지 없는지, 이런 우주를 누가 만들었는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확실한 것은 바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이상으로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모습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내가 산다는 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나는 무엇인가와 끊임없이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산다는 것은 쉼 없이 무엇과 만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살펴봅시다. 우리가 눈으로 무얼 보고 있다는 것은, 바로 눈을 통해서 내 밖에 있는 사물들과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푸른 하늘의 구름도, 바다에 펼쳐지는 수평선도 모두 눈으로 만나는 것이고, 그것들의 아름다움을 알게 됩니다. 광활한 우주의 수많은 별들도 눈을 통해서 만나고, 아주 작은 생물들의 움직임도 눈으로 알게 됩니다. 눈으로 만나서 알게 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눈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이런 만남은 눈이 아닌 귀를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소리들과 만나게 되고 그 소리를 통해서 갖가지 다양한 소리들의 세계를 알게됩니다. 우리는 귀로 듣는 소리의 세계와 눈으로 보는 세계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압니다. 다시금 우리는 코를 통해서 여러 가지의 냄새를 맡게 되고 그 냄새들이 서로 다른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입으로 들어와서 우리와 만나는 다양한 음식들을 혀로써 그 맛을 보고, 그것이 짠지 신지 매운지 하면서 음식의 맛을 알게 됩니다. 이것 또한 다른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몸을 통해서 덥다거나 춥다거나 아니면 부드럽다거나 딱딱하다거나 하는 촉감들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산다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이렇게 끊임없이 무엇과 만나고 있는 것이며, 그 만남을 통해서 무언가를 자꾸 알아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이 만나서 만들어진 경험세계 이외에도 우리는 의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 의지는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라는 특질을 나타냅니다. 이와 더불어 자연은 객체적인 존재로서의 특징인 법(法)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이처럼 눈, 귀, 코, 혀, 몸을 우리가 우리의 의지(意志)를 통하여 각각 무엇과 만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에서 잠시 함께 생각을 해 봅시다.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무엇일까요? 과연 태초에 창조신이 세계를 존재하게 했다고 믿어야 할까요? 잘 알 수 없는 것이니 믿어야 한다는 태도는 지혜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불교에서는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세계가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확실한 세계는 여기 있는 나와 그리고 나와 만나는 모든 것들을 모두 합한 것을 세계, 즉 일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 세계, 즉 일체는 어떻게 구성되었으며,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존재, 즉 인간을 포함한 일체의 성질에 대하여 불교에서는 대체로 세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첫째, “모든 것은 멈추어 있지 않고 변한다(諸行無常)”는 것입니다. 거대한 우주에서 작은 생물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인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상(無常)이란 말을 ‘덧없다’거나 ‘허무하다’라는 뜻으로 알고, 마치 불교의 가르침이 허무주의인양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제행무상은 모든 것들은 변한다는 뜻입니다, 변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이미 생성된 것이 파괴된다는 뜻이 있는가 하면, 아직 생성되지 않은 것이 성장하고 발전한다는 의미도 갖고 있습니다. 한 예로 사람이 병들어 죽는 것만 무상이 아니라 말기 암환자가 병을 극복하고 건강해진 것도 무상입니다. 만일 무상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큰 문제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상하기 때문에 아이가 어른이 될 수 있고, 사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물이 변하고 인간이 늙고 병들고 죽는다는 것이 그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이 아닐 뿐더러, 또한 죄악의 대가도 아닌 것입니다. 또한 무상이란 좋고 나쁘고 기쁘고 슬프고 하는 감정의 문제가 아닌 만물의 성질을 나타내는 법(法)인 것입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둘째,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諸法無我)”라고 파악하고 있습니다. 제법무아(諸法無我)라는 말은 어떤 일에 몰두해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는 망아의 경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무아(無我)는 ‘나’라고 할 수 있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제법은 무아’라고 할 때 이것이 인간만 아니라 모든 사물에게도 다 적용됨을 말합니다.
모든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존재의 원인과 근거가 된다는 연기의 가르침에서 보면 모든 존재는 이 연기적 관계를 벗어나 홀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무상의 진리에서 본다면 어떤 존재도 불변의 실체나 자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 존재를 유지시키는 원인과 조건도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한 예를 들어봅시다. 여기에 딸기잼이 있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저장을 잘못하면 부패하고 썩어버리게 되어 쓰레기로 변하고 맙니다. 또한 딸기잼은 딸기와 설탕과 향료와 굳게 만드는 물질 등 여러 가지가 함께 모여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어느 하나를 딸기잼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원인과 조건에 의해 생성, 유지되며 그러한 모든 것은 고정 불변하는 성질이나 실체가 없다는 것을 무아라고 합니다.
일체개고(一切皆苦)
셋째,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히는 법으로서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들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해서 마치 불교가 염세주의를 표방하는 종교로 오해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괴로움, 고(苦)란 말은 인간의 가치관이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들의 성질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고(苦)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느끼는 고통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 일체(一切)가 모두 고(苦)라고 말하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고 불편한 상태이며, 이러한 상태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갖은 힘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를 유지하려고 힘을 들이고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한 마디로 고(苦)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만이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사물 즉 일체가 이와 같은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이라는 진리 속에 서 있는 존재가 가진 ‘불완전성’과 그 불완전한 개체를 지속시키려고 ‘힘들이는’ 모든 작용까지도 함축한 것이 바로 고(苦)인 것입니다. 꽃이 피는 것도, 어린아이가 배고파 우는 것도, 책상이 여기에 이렇게 있는 것도 고(苦)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도 따라서 ‘일체의 모든 것이 고(苦)이다’는 결코 염세주의가 아니라, 모든 존재의 속성을 밝혀낸 법(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