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일(1월 11일)
논점
1. 무아를 잊어버린 한국불교는 힌두교의 아류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2. 善·不善(kusala/akusala)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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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주 발제내용
"자아든 불성이든 대아든 진아든 진인이든 자성이든 주인공이든 내 부처든 불생불멸이든 공이든 그 어떤 존재론적인 무엇을 상정하여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몰입하면 아무래도 힘으로 그것을 향해서 밀어붙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점점 극단적인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되니 바른 수행은 아니라 할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조계종의 여러 문제는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역자는 반성해본다."
" 탐 진 치가 증장하는 것은 不善이고 반대로 탐 진 치가 줄어들고 소멸되는 것은 善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그 무상 정등각은 자아 없음, 중생 없음, 영혼 없음, 개아 없음으로 평등하나니 모든 선법(꾸살라 다르마)들로 철저하게 깨달아지는 것이다." 라고 하여 꾸살라 다르마는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선 불선 - 꾸살라 아꾸살라 - 의 철저한 간택, 이런 노력을 통해서 위없는 깨달음은 성취되는 것이라고 대승 경전인 본 경도 힘주어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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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강내용
한국 불교가 자아, 불성, 대아,진아,주인공 등을 실체론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3가지다.
첫째는 스님들이 무식하다.
둘째는 강원등 전통교육기관에서이루어지는 관습적인교육 때문이다.
셋재는 지금 우리종단에서 행해지는 의식집전이 영혼을 인정하는 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해강)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得成於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위 문장에서 得成於忍의 忍을 인욕으로 보면 안되고 無生法忍의 忍으로 봐야 한다.(혜원)
고덕 들이 忍을 無生法忍의 忍으로 봤다는걸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원어의 뜻대로 인욕으로 번역 했다(각묵)
참는다는 마음없이 참음을 이름하여 인욕이라 한다.
그러므로 無生法忍이나 인욕이나 다 맞다.(성범)
무상 무아를 아는 것하고 실천하는 것하고 둘이될수 없다.
각묵스님이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인욕으로 해석했다면 곤란하다.(도법)
강당에서의 전반적인 흐름은 초기불교에 대한 폄하가 심하다.
현 시대의 불교교학의 일반적인 흐름과 강당의현실은 어긋난다.(효원)
강당에서 교리발달사를 안가르치는게 큰문제다.(혜월)
엄밀한 의미에서 선업과 불선업을 구분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예를 들면 칼을 들어서 사람 몸에 상처를 주는 행위 그 자체는 그냥 하나의 행위지만 여기에 작용하는 의도에 따라서 善 不善으로 나누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선법을 능숙한법 이라고 번역했다.(각묵)
선업과 불선업을 구분하기위해서는 매순간을 잘살펴야하고 이것은 초기의 수행법과 맞닿아 있다.(각묵)
인과를 통해서 중도가 보다쉽게 설명된다.(해월)
불교를 말할때 인연과 인과는 구분해야 한다.
선법과 불선법을 좋다,나쁘다는 감정상태로 보면 결과론적인 시점이된다.
선법과 불선법은 의도의 문제이다.
(초암)(원묵)
한국불교의 문제를 지적하며 간화선 비판할때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를 함께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또한 간화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간화선만이 수승하다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김재범)
불성 여래장 의 신념을 가지고 수행하는 자들은 한국불교의최고의 수행자들이다.그러므로 이문제는 한국불교의 전체의 문제라고 봐야한다.
법을 논하는 자리에서 만큼은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된다.
휴암스님은 "한국불교는 방편때문에 망한다"라고 말했다.(도법)
[오늘의 주제 [방편]에 대한 토론]
방편을 빼면 한국 불교의 존립 근거가 없다.(현각)
업사상과,49재를 무아의 관점에서 설명해 달라(유홍열)
개인적인생각으로는 49재 같은 재는 없어져야 한다.
49재는 죽은자를 위한 내용보다 산자를 위안하기 위한것 같다.
진정한 방편이 아닌걸 알면서도 한국불교의 존립을 위해서 해야한다면 그것이 불교인지 묻고싶다.(해강)
부처님은 영혼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씀 안하셨다.
그리고 49재는 엄연히 죽은자를 위한 법문으로 봐야 한다.(성륜)
스님들이 술집에가서 술먹는 것도 중생제도를 위해서,혹은 본래 무아 이니까....라고 변명한다.
무아를 방편으로 보지 않고 목적으로 보고있다.
무아를 이해하고 행동한에도 인욕이 필요한 것이다.(신용국)
목표대치현상 이라는게 있다.
목표가 수단이 되는 걸 말한다.
한국불교는 수단이 목표가 되어있다.
방편은 방편일 뿐이다.
(이지엄)
49재도 얼마든지 연기무아로 풀어낼수 있다.
올바른 수단(방편)을 떠나서 우리의 삶이 없다.
고로,방편이 필요한거냐 아니냐를 따지는건 무의미하다.
아함경의 뱀을 잡는 비유처럼 방편이란 법답게,지혜롭게 행동함을 말한다.(도법)
실상사에서는 단지 뱀머리를 잡는것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간화선 수행자는 그문제에 있어
"뱀은 이미 죽었습니다"
"어디서 뱀을 보느냐?"
라고 말할수도 있다.
뱀머리 잡는 이야기만을 하는 실상사의 분위기는 한계가 있다.(무명월)
당연히 방편은 꾸살라(善法)다.
선법이 아닌것은 방편이 아니다.
방편이 이런것 이란것을 알고 논의를 해달라.
선법과 불선법을 잘 구분하는것--이것이 바른 정진이다.
내말을 잘 못알아 듣더라도 햇볕정책을 쓰겠다.(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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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느낌
지난 토요일에는 폭설이 내리는 관계로 많은사람들이 참석 못한 이유인지 이번에는 100명이 훨씬넘는 사람들이 참석해서 열띤 논쟁을 벌였습니다.
無我에대한 확신과 善法 不善法에 대한 지혜로운 구분은 수행생활의 전부라 할수있는 일이기에 많이 유익 했습니다.
논강은 여러사람의 지혜를 빌려 자신을 되돌아 볼수있는 좋은 공부 방법이란 생각입니다.
누가 선지식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는 다면 저는 선지식을 멀리서 찾을것이 아니라 "실상사 금강경논강의 자리에 오라!" 고 말하겠습니다.
논점
1. 무아를 잊어버린 한국불교는 힌두교의 아류로 전락하고 말았는가?
2. 善·不善(kusala/akusala)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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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주 발제내용
"자아든 불성이든 대아든 진아든 진인이든 자성이든 주인공이든 내 부처든 불생불멸이든 공이든 그 어떤 존재론적인 무엇을 상정하여 그것을 추구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몰입하면 아무래도 힘으로 그것을 향해서 밀어붙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점점 극단적인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되니 바른 수행은 아니라 할 것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조계종의 여러 문제는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역자는 반성해본다."
" 탐 진 치가 증장하는 것은 不善이고 반대로 탐 진 치가 줄어들고 소멸되는 것은 善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신다."
"그 무상 정등각은 자아 없음, 중생 없음, 영혼 없음, 개아 없음으로 평등하나니 모든 선법(꾸살라 다르마)들로 철저하게 깨달아지는 것이다." 라고 하여 꾸살라 다르마는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선 불선 - 꾸살라 아꾸살라 - 의 철저한 간택, 이런 노력을 통해서 위없는 깨달음은 성취되는 것이라고 대승 경전인 본 경도 힘주어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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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강내용
한국 불교가 자아, 불성, 대아,진아,주인공 등을 실체론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유는 3가지다.
첫째는 스님들이 무식하다.
둘째는 강원등 전통교육기관에서이루어지는 관습적인교육 때문이다.
셋재는 지금 우리종단에서 행해지는 의식집전이 영혼을 인정하는 식으로 행해지고 있다.
(해강)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得成於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위 문장에서 得成於忍의 忍을 인욕으로 보면 안되고 無生法忍의 忍으로 봐야 한다.(혜원)
고덕 들이 忍을 無生法忍의 忍으로 봤다는걸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원어의 뜻대로 인욕으로 번역 했다(각묵)
참는다는 마음없이 참음을 이름하여 인욕이라 한다.
그러므로 無生法忍이나 인욕이나 다 맞다.(성범)
무상 무아를 아는 것하고 실천하는 것하고 둘이될수 없다.
각묵스님이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인욕으로 해석했다면 곤란하다.(도법)
강당에서의 전반적인 흐름은 초기불교에 대한 폄하가 심하다.
현 시대의 불교교학의 일반적인 흐름과 강당의현실은 어긋난다.(효원)
강당에서 교리발달사를 안가르치는게 큰문제다.(혜월)
엄밀한 의미에서 선업과 불선업을 구분하는 객관적인 기준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예를 들면 칼을 들어서 사람 몸에 상처를 주는 행위 그 자체는 그냥 하나의 행위지만 여기에 작용하는 의도에 따라서 善 不善으로 나누어진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선법을 능숙한법 이라고 번역했다.(각묵)
선업과 불선업을 구분하기위해서는 매순간을 잘살펴야하고 이것은 초기의 수행법과 맞닿아 있다.(각묵)
인과를 통해서 중도가 보다쉽게 설명된다.(해월)
불교를 말할때 인연과 인과는 구분해야 한다.
선법과 불선법을 좋다,나쁘다는 감정상태로 보면 결과론적인 시점이된다.
선법과 불선법은 의도의 문제이다.
(초암)(원묵)
한국불교의 문제를 지적하며 간화선 비판할때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이를 함께 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
또한 간화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간화선만이 수승하다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김재범)
불성 여래장 의 신념을 가지고 수행하는 자들은 한국불교의최고의 수행자들이다.그러므로 이문제는 한국불교의 전체의 문제라고 봐야한다.
법을 논하는 자리에서 만큼은 적당히 타협해서는 안된다.
휴암스님은 "한국불교는 방편때문에 망한다"라고 말했다.(도법)
[오늘의 주제 [방편]에 대한 토론]
방편을 빼면 한국 불교의 존립 근거가 없다.(현각)
업사상과,49재를 무아의 관점에서 설명해 달라(유홍열)
개인적인생각으로는 49재 같은 재는 없어져야 한다.
49재는 죽은자를 위한 내용보다 산자를 위안하기 위한것 같다.
진정한 방편이 아닌걸 알면서도 한국불교의 존립을 위해서 해야한다면 그것이 불교인지 묻고싶다.(해강)
부처님은 영혼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말씀 안하셨다.
그리고 49재는 엄연히 죽은자를 위한 법문으로 봐야 한다.(성륜)
스님들이 술집에가서 술먹는 것도 중생제도를 위해서,혹은 본래 무아 이니까....라고 변명한다.
무아를 방편으로 보지 않고 목적으로 보고있다.
무아를 이해하고 행동한에도 인욕이 필요한 것이다.(신용국)
목표대치현상 이라는게 있다.
목표가 수단이 되는 걸 말한다.
한국불교는 수단이 목표가 되어있다.
방편은 방편일 뿐이다.
(이지엄)
49재도 얼마든지 연기무아로 풀어낼수 있다.
올바른 수단(방편)을 떠나서 우리의 삶이 없다.
고로,방편이 필요한거냐 아니냐를 따지는건 무의미하다.
아함경의 뱀을 잡는 비유처럼 방편이란 법답게,지혜롭게 행동함을 말한다.(도법)
실상사에서는 단지 뱀머리를 잡는것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간화선 수행자는 그문제에 있어
"뱀은 이미 죽었습니다"
"어디서 뱀을 보느냐?"
라고 말할수도 있다.
뱀머리 잡는 이야기만을 하는 실상사의 분위기는 한계가 있다.(무명월)
당연히 방편은 꾸살라(善法)다.
선법이 아닌것은 방편이 아니다.
방편이 이런것 이란것을 알고 논의를 해달라.
선법과 불선법을 잘 구분하는것--이것이 바른 정진이다.
내말을 잘 못알아 듣더라도 햇볕정책을 쓰겠다.(각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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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느낌
지난 토요일에는 폭설이 내리는 관계로 많은사람들이 참석 못한 이유인지 이번에는 100명이 훨씬넘는 사람들이 참석해서 열띤 논쟁을 벌였습니다.
無我에대한 확신과 善法 不善法에 대한 지혜로운 구분은 수행생활의 전부라 할수있는 일이기에 많이 유익 했습니다.
논강은 여러사람의 지혜를 빌려 자신을 되돌아 볼수있는 좋은 공부 방법이란 생각입니다.
누가 선지식이 어디에 있는가? 하고 묻는 다면 저는 선지식을 멀리서 찾을것이 아니라 "실상사 금강경논강의 자리에 오라!" 고 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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