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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경

[스크랩] 금강경 (법회인유분 제1)~(응화비진분 제32)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 제일(第一)

여시아문(如是我聞) 일시(一時)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여대비구중(與大比丘衆) 천이백오십인(千二百五十人) 구(俱)러시니

 이와 같이 내가 들었아오니, 한 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서, 큰 비구니들 천이백오십인과 함께 계시었다.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는 말은,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의 제자이신 아란존자가 석가모니부처님에게 친히 들었다는 말이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에, 그 제자들이 불경을 편찬하게 될 새, 아란존자가 편집 주필이 되었기 때문에, 부처님 생존 당시에 부처님에게 친히 본바 들은 바를 기록하므로서,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이]는, 이 경 법문이 전부를 총칭하는 대명사가 된다. 한때라함은, 비롯함이 없는 옛날로부터 다함이 없는 미래제(未來際), 과거 현재 미래가 없기 때문에 한 때라 한 것이요.

부처라는 말은, 깨쳤다는 뜻이니, 여기서는 석가모니불을 지칭하는 말이요, 사위국은 이 경을 설하시던 인도에 있는 나라 이름이요, 기수는 기타태자가 심은 나무라 하여 기수라 하고, 급고독은, 그때 자선가로서 고독한 사람들을 많이 구해주던 사위국의 재상인 수달의 별명이니, 이재상이 기타태자에게 동삱을 빌어서 절을 세웠으므로, 절 이름을 급고독원 이라 하고, 비구라는 말은, 비는 선비라는 뜻이니,

마음오로는 법을 빌고, 몸으로는 밥을 빈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 대문에서는,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던 때와 장소와 법주와 청중을 밝힌 것이 된다.

 

이시(爾時) 세존(世尊) 식시(食時) 착의지발(着衣持鉢) 입사위대성(入舍衛大城) 걸식(乞食) 어기성중(於其城中) 차제걸이(次弟乞已) 환지본처(還至本處) 반식흘(飯食訖) 수의발(收衣鉢) 세족이(洗足已) 부좌이좌(敷座而坐)

 그때에 세존께서 공양 하실때가 된지라 가사를 메고, 바루를 들고, 사위대성에서 들으셔 그 성중에서 빌으시되, 차례로 빌어 마치시고, 다시 본처로 오시어 공양을 다하시고,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의신 후 자리를 펴고 앉으신다.

 

※세존(世尊)이라는 말은 부처님의 열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이니 세상에서 제일 높으시다는 뜻이다. 부처님께서는, 하루 한끼를 잡수시는데 사시(巳時)에 공양을 하신다. 때마침 사시가 되어, 부처님께서는 대중과 다름 없이 차림새를 같이 하시고, 성중세서 빈부의 차별없이 밥을 빌어셨다. 이 대문에서 알아야 할 것은 부처님은 세간에 있어서는 인도 정반왕의 태자로서, 장차 만승(萬乘)의 위(位)에 오를 어른이오, 출세간적으로는 삼계(三界) (욕계(慾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 )에 큰 스승이시고, 사생(四生) (태생(胎生) 난생(卵生) 습생(濕生) 화생(化生) )의 자부(慈父) 이시어, 그 지존(至尊) 지귀(至貴)하심이 말할 수 없거늘 어찌하여 밥을 빌어 잡수시었는가 하는, 의문일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위하시어 하신 행동이시다. 어찌하여 그러한가, 중생들은 너나 없이 모두[나]라는 [상(相)]을 떼기 위하여는 먼저[내]다하는 마음을 조복 받아야 하고, [내]라는 마음을 조복 받기 위하여는 걸식을 하는 공부가 한 방편이 될 것이다.

어찌하여 그러한고, 남에게 무엇을 달라고 비는 자가[내]다하는 거만한 마음이 있다든지, 뒤로 자빠듬한 거동을 모인다든지 하면 상대방이 주지 아니할 것은 정한 이치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무엇을 청하는 자는, 반드시 내 머리를 숙여야 하는 것이니, 내 마음을 조복받도록 하는 것이, 이 걸식의 요지이다.

 그리고 빈부를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빈것은, 부자도 항상 부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복이 다 하면 도로 타락하여 가난하게 되므로, 부자도 또 복을 짛어야 할 것이오, 가난한자는 더욱 복을 심지 못하여 가난하기 때문에, 복을 짛어주기 위한 것이다.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제이(第二)

시(時) 장노수보리(長老須菩提) 재대중중(在大衆中) 즉종좌기(卽從座起) 편단우견(偏袒右肩) 우슬착지(右膝着地) 합장공경(合掌恭敬) 이백불언(而白佛言) 희유세존(希有世尊) 여래선호념제보살(如來善護念諸菩薩) 선부촉제보살(善付囑諸菩薩)

 그때, 장노 수보리가 대중가운데서 일어나 오른 어깨에 옷을 걷어 메고, 오른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고 공경하여 부처님께 사루어 말씀하되,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어,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護念)하시며, 모든 보살들에게 잘부촉 하시옵니다.

※부처님께서는 도(道)가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의 평범한데 있음을 말 없이 몸으로서 보이어 가르치실새, 이 뜻을 아는 제자로서 나이 많고 덕이 큰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법을 청하고저 합장공경하고 사루어 말씀하되, 거룩하십니다. 세존이시여, 하고 감탄사를 먼저 발한 다음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간절히 사랑하시며, 모든보살들에게 간곡히 위촉 하시어 법을 전하고, 중생을 제도(濟度) 하도록 하십니다. 하였다.

합장은 두 손을 한데 모으는 것이니 몸과 마음을 하나로 뭉치는 성심의 결정이요, 여래(如來)는 불명호중(佛名號中)의 하나이니 여여히 왔다는 뜻이요, 보살이라는 말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행이 구비하여, 모든 중생을 깨우칠만큼 공부가 된이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세존(世尊) 선남자(善男子) 선녀인(善女人)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응운하주(應云何住)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

 세존이시여, 선남자나 선녀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발한이는, 응당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으오리까,

※이경의 법문이 수보리가 이 말씀을 부처님에게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부처님께서는 이 말씀을 대답하시므로 금강경 법문을 마치신 것이니, 수보리와 부처님 사이에 여러번 묻고 여러번 대답하신 것이 말은 다르나, 뜻은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마음과 이 마음의 머무르는 법과 이 마음의 항복받는 법을 가르치시어 중생들의 무서운 병근(病根)을 고치시기에 고구정녕(苦口丁寧)으로 친절하시었으니, 독자는 이 대문에 착안하여, 이 경의 법문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의 뜻을 말하면 한역(漢譯)으로 무상 정변 정지(無上 正匾 正智)라고 한다. 그러나 한문을 모르는 사람이나 한문을 약간 안다 할지라도, 불교에 초보인 사람은 알기 어려우므로 쉽게 말하여 최고 최상(最高最上)의 진리(眞理)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까 한다. 그리고 최고 최상의 진리는, 가장 잘 사는 법이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은 가장 잘 사는 마음이라고 알면 아무나 이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의 최고 목적과 최고 희망이 잘 살려는데 있고, 잘 사는 이것이 최고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잘 살려는 마음을 낸 사람은, 어떻게 이 마음을 머무르며, 어떻게 이 마음을 항복(降伏) 받아야 할 것인를 수보리가 물은 것이니, 마음을 주(住)할줄 모르고, 마음을 항복받을 줄 모르는 사람은 잘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을 머무른다는 말은, 마음을 가진다는 말이니 이 아래 나오는 법문에서 마음 가지는 법과 마음을 항복받는 법을, 배워서 알지어다.

 

불언(佛言) 선재(善哉) 선재(善哉) 수보리(須菩提) 여여소설(如汝所說) 여래(如來) 선호념제보살(善護念諸菩薩) 선부촉제보살(善付囑諸菩薩) 여금제청(汝今제聽) 당위여설(當爲汝說) 선남자(善男子) 선녀인(善女人)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응여시주(應如是住) 여시항복기심(如是降伏其心)

부처님께서 말씀 하시되 착하고 착하다.

수보리야 네 말과 같이 여래가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하며 모든 보살에게 잘 부촉하나니 네 이제 자세히 들으라, 마땅히 너를 위하여 일러주리라, 선남자 선녀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을 낸이는 응당히 이와 같이 머무르며 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 받을 지니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의 묻는 말씀을 들으시고, 그 말을 고맙게 생각하시어 선재 선재(善哉善哉)라고 칭찬하신 다음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말과 같이 모든 보살들을 잘 사랑하시며 모든 보살들에게 간절히 부탁한다. 너를 위하여 마음 가지는 법과 마음을 항복시키는 법을 말하리니, 자세히 듣고 잊지 말며, 말과 같이 행하여라. 선남자 선녀인이 잘 살려는 마음을 낸 사람은, 당연히 이와 같이 그 마음을 가지고 항복 시켜야 하느니라 하셨으니,[이와 같이]라는 말씀 속에는, 마음을 가지느 법이나, 항복받는 법을 다 일러주신 말씀이시다. 앞으로 나오는 법문이, 모두, 이와 같이라는[이]속에 속하는 것임을 독자는 알아 두어야 할 것이다.

 

유연세존(唯然世尊) 원락욕문(願樂欲聞)하나이다.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즐겨 듣고저 하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수보리는, 반가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여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네 그렇습니다. 즐겨 듣기를 원하옵니다. 하였으니, 수보리와 부처님의 문답은 천고(千古)의 지음(知音)이시다. 물을것 없는 물음과, 대답 할 것 없는 대답은, 중생을 위하시는 대자대비의 간절히 일으키신, 노파심(老婆心)에서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한다.

 

대승정종분(大乘正宗分) 제삼(第三)

불(佛) 고수보리(告須菩提)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詞薩) 응여시항복기심(應如是降伏其心)이니.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모든 보살 마하살이 응당이와 같이 그 마음을 항복받을지니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의 물음에 따라 모든 보살들에게 그 마음 항복받는 법을 일러주시고자, 이렇게 항복받아야 한다 하셨으니, 다음에 나오는 법문에서 [이와 같이]라는 뜻을 차차 알게 될 것이요, [보살마하살]이란 말은, 대승보살(大乘菩薩)의 이름이니, 일체중생을 건져, 다 살게 하려는 대원(大願)을 세운 보살, 즉 대보살(大菩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대문에서 알아야할 것은, 수보리의 말(물은)이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으오리까 하였거늘, 부처님의 대답은, 그 마음을 항복받는 말씀만 하시게 되었으니 먼저 마음을 항복받아야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요, 마음만 항복받으면 그 자리가 곧 [주(住)]가 되는 까닭이다.

 

소유일체중생지류(所有一切衆生之類) 약난생(若卵生) 약태생(若胎生) 약습생(若濕生) 약화생(若化生) 약유색()若有色 약무색(若無色) 약유상(若有想) 약무상(若無想) 약비유상(若非有想) 비무상(非無想) 아개영입(我皆令入) 무여열반(無餘涅槃) 이멸도지(而滅度之)하리니.

 있는바 일체 중생의 무리인, 알로 생긴것 이거나, 태로 생긴것 이거나, 습기로 생긴것 이거나, 화하여 생긴것 이거나, 색이 있는것 이거나, 색이 없는것 이거나, 생각이 있는것 이거나, 생각이 없는것 이거나,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요,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들을 내가 다 하여금 남음이 없는 열반(涅槃)에 들게하여 제도할 것이다.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욕계, 무색계, (慾界色界無色界)셋으로 나누어 이것을 삼계(三界)라고 불교에서는 이른다. 그런데 이 삼계에 있는 중생들을, 아홉가지로 나누어 구별한 것이, 난생, 태생, 습생, 화생, 유색, 무색, 유상, 무상, 비유상, 비무상(卵生胎生濕生化生有色無色有想無想非有想非無想)의 중생들이니, 이것은 외계(外界)의 중생을 말함이요, 내계(內界)즉 자심(自心)의 중생도 이러하니, 미혹한 성품, 익힌 성품, 침울한 성품, 정치 못한 성품, 고집하는 마음, 아무것도 비어서 없다는 마음, 생각만하고 행할줄 모르는 마음, 나무나 돌 같이 아무 생각 없는 마음, 있고 없는데 떨어지지는 아니하나, 진리(眞理)를 구하는 마음등, 이러한 자심 중생이 한량없이 많으니, 이 많은 중생들을 하나도 없이 제도 하여 저 깨끗하고 고요하고 즐거운 열반의 세계에서, 하나도 빠짐없이 잘 살도록 하여야 할것이다.

 

여시멸도(如是滅度) 무량무수무변중생(無量無數無邊衆生) 실무중생(實無衆生) 득멸도자(得滅度者)니.

이와 같이 한량이 없고, 수가 없고, 가이 없는 중생들이 제도하였으되, 실로 제도를 얻은 중생이 없다 할 것이니,

※이대문에서 나는, 불교란 무엇인가를 독자 여러분에게 대강 알리고저한다. 불교라는 말은, 부처의 가르침이라는 말이니, 부처라는 말은 깨친이라는 뜻이요, 가르침이란 말은, 먼저 깨친이가 아직 못 깨친이에게 자기의 깨친바를 가르쳐준다는 뜻이니, 깨쳤다는 것은 무엇을 깨친 것인가, 이것을 먼저 독자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다.

깨쳤다는 것은 다른것을 깨친것이 아니요, 자기에게 있는 본래 마음을 깨친 것이요, 자기의 마음을 깨친것은, 부처의 마음을 깨친 것이요, 일체 중생의 마음을 깨친것이 된다.

부처의 마음이란, 본래 깨끗한 때 없는 마음이요, 중생의 마음이란, 번뇌에 물들어 때묻은 마음이라 할것이나, 이 마음도 본래 깨끗한 마음이다. 깨끗하든지 더러웁든지, 마음은 하나이요, 둘이 아닌 것이다. 깨끗하다 하면 곧 더러운 것이 되고, 더러웁다 하면 곧 깨끗한 것이니, 참으로 깨끗한 것은,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없는 것이요, 하나라 하면 둘이 있는 것이니, 참으로 하나 이면, 하나 이니 둘 이니가 없는 것이다. 마음을 깨쳤다하나 마음은 마음도 아닌 것이니, 마음이라 이름함은, 어느 장난꾼들의 군소리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마음도 아닌 것이 마음인가, 이렇게 생각할지나, 이도 또한, 마음이 아닌 것이다. 참마음에는 마음이니 마음 아니니가 붙지 않는 것이요, 깨치고 못 깨침이 없는 것이요, 참이니 거짓이니가 없는 것이요, 부처니 중생이니가 없는 것이요, 제도하느니 제도를 받느니가 없는 것이요, 이 언덕이니 저 언덕이니가 없는 것이요, 열반이니 생사이니 하는 것이 없는 것이요, 죄니 복이니가 없는 것이요, 선이니 악이니가 없는 것이요, 지옥이니 천당이니가 없는 것이니, 일체 이름과 말과 자취와 냄새가 다 끊어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깨친 것이 마음을 깨친 것인가, 아니다. 깨침이 못된다. 한 물건도 취하지 아니하나, 한 물건도 버리지 않는 것이 불법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불법은 마음 법이니, 마음법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이고(何以故) 수보리(須菩提) 약보살(若菩薩)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즉비보살(卽非菩薩)

 어찌한 연고이냐,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나라는 상(相)이거나, 남이라는 상이거나, 중생이라는 상이거나,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이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고 하셨으니, 중생을 제도한다 함은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 번뇌를 녹혀라하고,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자기의 본연성품(本然性品)을 보게 함이거늘, 만약 중생을 제도한 자가 있고, 제도 받는 자가 있으면, 이는 번뇌요, 깨끗한 본심이 아닐새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의 번뇌가 있으면, 이것은 중생을 멸도(滅度)한 보살이 아니라는 말씀이시다.

이 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상(四相)]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중언부언 고구정녕히 밝히셨으니, 이{사상(四相)]이란 무엇인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이다. 아상은 나라는 상이니, 나 개인을 근본으로 하는 일체 생각과, 일체 행동이요, 인상은 내가 남이라는 일체 생각과 일체 행동이요, 중생상은 괴로운 것을 싫어하고 즐거운 것을 탐내는, 일체 생각과 일체 행동이요, 수자상은 청정열반(淸淨涅槃)을 즐기어 잊지 못하고, 영원히 거기에 주(住)하려는 상이다.

그러나 이 네가지 상이 나라는 상에서 근본된 것이니, 나라는 상만 없으면 인상 중생상 수자상은, 동시에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상만 없으면 곧 부처인 것이다. 부처는 부처도 없는 것이 부처이니, 중생이 어찌 있으며, 부처와 중생이 없으니 누가 멸도(滅度)를 하며 누가 멸도를 받을자이랴,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무량무수, 무변 중생을 멸도하셨으되, 실로 중생이 멸도 받은 자가 없다고 하신 것이다.

 

묘행무주분(妙行無住分) 제사(第四)

부차수보리(復次須菩提) 보살(菩薩) 어법(於法) 응무소주(應無所住) 행어보시(行於布施) 소위부주색(所謂不住色) 보시(布施) 부주성향미촉법(不住聲香味觸法) 보시(布施) 수보리보살(須菩提菩薩) 응여시보시(應如是布施) 부주어상(不住於相) 하이고(何以故) 약보살(若菩薩) 부주상보시(不住相布施) 기복덕(其福德) 불가사량(不可思量)일새니라.

 그리고 또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법에 착한바 없이 보시를 행할지니, 이른바 색에 머물지 않고 보시할 것이며, 소리나, 향기나, 냄새나, 맛이나, 부딪침이나, 법에 착하지 않고 보시할지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보시하여 상에 착하지 말라 함은, 어찌한 연고이냐, 만약 보살이 상에 주하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을 가히 생각으로 헤아리지 못할 지니라.

※이 경이 법문이, 처음 수보리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마음을 낸 이는, 그 마음을 어떻게 머무르며 어떻게 항복 받으오리까 하고, 가르침을 청하였을새, 이 윗대문에서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데 까지는, 그 마음 항복받는 법을 가르쳐 보이시고, 이대문에 와서는 그 마음을 머무르는 법을 일러주신 것이다.

수보리야 보살이 법에 착함이 없이 보시를 행할 것이니라 하셨다. 예를 들면 빛(色)이나 소리(聲)나 냄새(香)나 맛(味)이나 부딪침(觸)이나 법(法) (이것은 육진(六塵)을 말한 것인데 눈 귀 코 혀 몸 뜻 육근의 경계(眼耳鼻舌身意六根境界)이다)에 주하지 말고 보시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마음의 주처(住處)를 일러 주신 말씀이시다.

여기서 독자 여러분의 의심이 생길 것이니, 부주(不住)를 말한 것으로 어찌하여 주(住)를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심이다.

독자여! 가만히 눈을 감고 묵묵히 생각하여 보라, 우리들 본 마음의 주처가 어디인가, 산인가 들인가, 바다인가, 천상인가, 지하인가, 경상도인가, 충청도인가, 아니 서양인가, 동양인가, 아무리 천상천하 시방세계를 다 찾아 보아도, 우리 본심의 주처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육근(六根)에도 주하지 않고, 육진(六塵)에도 주하지 아니하여, 주가 없는 그곳이, 우리의 깨끗한 본심(本心)의 주처이니, 상(相)에 주(住)하지 말고 보시(布施)하라 함은 깨끗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라는 말씀이시다.

보시란 무엇인가, 물질로나 법으로나 남에게 베풀어 주는 것을 보시라 하나니, 보살이 피안(彼岸)에 이르는 방편(方便)으로, 만행(萬行)을 닦는 것이나 일만가지 행(行)이 육바라밀(六波羅密)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육도문(六度門) 가운데도, 보시(布施)가 머리가 되는 것이니, 계(戒)를 가짐과, 지혜(智慧)를 밝히는 것은, 보시의 다음이다.

그러므로 보시는 피안에 이르는데 가장 빠른 길이 된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웁고 더러운 죄악의 근본이, 모두 탐욕(貪慾)에서 기인(起因)되는 것인데 보시는 이 탐욕의 무서운 병근(病根)을 다스리는 선약(仙藥)도 되고, 자비심(慈悲心)의 등불도 되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보시는 내것을 널리 베풀어 준다는 뜻이니, 준다는 것은 곧 놓아 버린다는 뜻이 된다. 우리는 참으로 잘 살기 위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모두를 놓아 버려야 한다. 눈도 놓아 버리고, 귀도 눈도 놓아 버리고, 코도, 혀도, 몸도 아름아리(識見)도, 놓아버려야 한다. 이것이 참으로 보시인 것이다. 모두를 놓아버리고, 한 물건도 더 놓을 것이 없이, 가난하게 된 때가 바로 잘 살게 될 때요, 거기가 도피안(到彼岸)이요, 그곳이 그락세계인 것이다.

독자여! 여기서 또 이런 생각을 일으키지 말라 보시(布施)라 함은, 주고 받는 자가 있고, 주고 받는 물건이 있을 것이니 어떻게 상(相)에 주(住)하지 않고 보시(布施)를 행(行)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하늘이 비와 이슬을 내리고 땅이 만물을 기르되, 내가 보시(布施)한다는 상(相)이 없이 하고 있으며, 공기가 또한 그러하지 않은가, 내 마음이 깨끗하면, 육근(六根)이 육근인 아니요, 육진(六塵)이 육진이 아닌 것이니 주는자 받는자가 있고, 주고 받고 하는 물건이 천만가지가 되기로소, 어찌 한 사람인들 볼 수 있으며 한 물건인 들 있을 수 있으랴. 이것이 상(相)에 머물지 않는 보시(布施)이니, 이와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보시하면, 이 복덕이야말로, 사량(思量)할 수 없이 크다는 말이다.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동방허공(東方虛空) 가사량부(可思量不) 불야(不也) 세존(世尊) 수보리(須菩提) 남서북방사유상하허공(南西北方四維上下虛空) 가사량부(可思量不) 불야(不也) 세존(世尊)이이여.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동방 허공을 가히 사량하겠는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남서북방과 사유상하허공을 가히사량할 수 있는가,못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의 설법이, 매양 법(法)을 설하시고, 다음에 비유(比喩)를 들어 보이기도 하시고 먼저 비유를 들어 보이고, 다음에 법을 설하시기도 하였으니, 그러한 예로 여기서는 상에 주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이, 한량없이 큼을 말씀하시고저 먼저 허공의 비유를 드신 것이다, 사유(四維)는 동서남북의 사이가 되는 것이요, 상하는 위아래이니 동서남북과 사유와 상하를 합하면, 시방 허공(十方虛空)이 된다.

 

수보리(須菩提) 보살(菩薩) 무주상보시복덕(無住相布施福德) 역부여시(亦復如是) 불가사량(不可思量)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상에 주하지 않고 보시하는 복덕도, 또한 이와 같아, 가히 사량 할수 없나니라.

※먼저 비유를 드시고, 이 대문에서 법을 들어 보이셔, 저 가이 없고 위 아래가 없는 것과 같이, 상에 머물지 안혹 하는, 보시복덕(布施福德)도, 크고커서, 어떻다고 사량할 수 없나니라 하신것이다.

 

수보리(須菩提) 보살(菩薩) 단응여소교주(但應如所敎住)니라.

수보리야, 보살이 다만 가르친바대로 주할지니라.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의 물음에 따라 마음 주하는 법을 말씀하시고, 이대문에서 윗 말들을 매잘라, 내가 위에서 일러준바와 같이 그 마음을 머무르라고 주(住) 하신 것이다.

 

여리실견분(如理實見分) 제오(第五)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가이신상(可以身相) 견여래부(見如來不) 불야(不也) 세존(世尊) 불가이신상(不可以身相) 득견여래(得見如來)니.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가히 신상으로써 여래를 본다 하겠느냐, 못하겠느냐,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신상으로는 여래라고 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남달리 설흔두가지(三十二相)의 거룩하신 상을 가졌을새, 중생들이 혹시나 이 신상(身相)이 여래인줄 알까 염려하시어, 수보리를 불러 물으심에, 수보리는 부처님의 물으시는 뜻을 알고,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의 허환(虛幻)한 육신(肉身)을 본 것으로써, 여래의 실다운 법신(法身)을 보았다고 할 수는 없읍니다라고 하였다.

 

하이고(何以故) 여래소설신상(如來所說身相) 즉비신상(卽非身相)일새니라.

어찌한 연고이냐 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옵신 신상이라는 것도, 곧 신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신상(身相)은 곧 육신(肉身)을 말씀하신 것이니, 육신이 실다운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고 하니, 육신은 지수화풍(地水火風) (땅, 물, 불, 바람의 성질)을 합하여 조직된 것이요, 따로 자체가 뚜렷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주하고 있는 집(건축물)이, 주추 기둥 들보 중방 연자 도리 평방등으로 합하여 세운 것인데, 이것을 하나 하나씩 빼어놓으면, [집]이라는 존재는 찾아 볼래야 찾을 수 없고, 거짓 이름한 것에 불과한 것이니, 신상이라는 것도 이와 같아, 집이 집 아니듯이, 신상이 신상 아니라는 말이다.

 

불(佛) 고수보리(告須菩提)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고하사대, 무릇 있는바 상이 다 허망한 것이나,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님을 보면, 곧 여래를 본 것이니라.

※이 대문이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임을 먼저 말하여 둔다. 사구라는 것은 네 글귀라는 말이오, 게라는 말은 시(詩)나 노래와 같이, 글귀로 된 것을 게 라고 이름한 것이니, 이러한 사구게가 금강경 중에 또 두군데가 있다. 그러나 이 대문 사구게가 이 경을 알려는 사람에게 더욱 중요한 게가 되니, 독자는 이 게송에 착안하여, 깊이 깊이 음미하여, 이제까지 발견치 모하였던, 자기의 새 세계 새 천지를 발견하기를 간절히 부탁한다.

그러면 이제 본 강의에 들어가 사구게를 말하고저 한다.

무릇 있는바 상은, 다 허망한 것이나, 만약 모든 상이, 상 아닌 것만 보면, (모든 상을 보아 상이 아니면)곧 여래를 본 것이네, 이러한 게송이다.

무릇 있는바 상이라함은, 이 우주 안에 있는 일체 모든 상을 들어 말씀하신 것이거나,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 모든 상을 들어 말씀하신 것이요, 허망하다는 것은, 다 하나도 실답지 못하다는 말씀이시다.

왜 그런고 하면, 있는 것은 모두가 필경은 없어지고 말며, 그대로 영원히 존재하지 못하고, 낳는 것은 반드시 죽고야 마나니, 이러므로 모두가 허망하다는 것이다.

만나는 자가 갈리게 되고, 부자가 금시에 거지가 되고, 건강하던 사람이 뜻밖에 병신이 되고, 아침에 밥 머든 사람이 저녁에 죽어나가는등, 허망한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것이 모두 남의 일로 알고, 자기 생각하지 않나니, 참으로 허망한 이치를 안 사람은, 몇이 못된다 할 것이다. 참으로 허망한 줄을 절실히 깨친 사람이라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원수와 적을 맺을 것이 뭣이며 이 세상에서 주먹을 부르쥐고, 눈알을 부릅뜨고, 발을 동동거리고, 머리를 쥐어뜯고, 총부리를 겨누고, 칼부림을 하고, 밟고 차고, 살아갈 것이 뭣인가, 입으로는 허망을 말하나, 실로는 허망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사구(四句)중에서첫구와 둘째구는 허망한 이치를 설하시고, 셋째구와 넷째구는 허망치 않는 이치를 보이셨으니, 모든 상이 상 아닌 것을 알면, 곧 여래를 본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그러면[상이 상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말인가, 쉽게 말하여,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고, 하늘이 하늘이 아니고 땅이 땅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산이 물이요, 물이 산이며, 하늘이 땅이요, 땅이 하늘이라는 말도 된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보는 것이 눈이 아니요, 듣는 것이 귀가 아니요, 냄새 맡는 것이 코가 아니요, 맛보는 것이 혀가 아니요, 앉고, 눕고, 서고, 가고, 오고하는 것이, 몸뚱이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면 산이 산이 아니고, 무엇이며, 물이 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부처님께서 말씀 하시기를, 가이 없는 허공각(虛空覺) (두렷한 마음 원각) 하나 나타난바 라고 하시었다. 허공이 각(覺)이어니 허공 안에 있는 물건이 각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무량 백천만억의 가지가지 형상이, 각 하나뿐이요, 천차만볕 종종의 일이 모두 각 하나뿐인 것임에, 팔만사천의 모든 번뇌(煩惱)가 오직 하나뿐인 것이니, 나니 남이니가 무엇이며, 중생이니 수자니 하는 상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운문(雲門)스님께서, 부처가 무엇인가를 물은 즉, 운문은, [마른 똥 말둑(건시궐(乾屎橛))]이라고 대답하였다.

똥 말둑이 부처이거니, 무엇이 부처가 아닐 것인가? [백억 산 서가(百億 活 釋迦)가 취하여 봄 바람에 춤을 추네]한것도, 이것을 노래 함이요, [시내 소리는 모두 부처의 장광설(長廣舌)이요, 산빛은 어찌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아니랴]한 글귀도, 이 사이의 소식을 말한 것이다.

나는 지금, 붓을 들고 이 강의를 초하고 있다. 이것이 탈고(脫稿)가 되어, 인쇄에 붙여 책으로 만들어져, 이 책이 독자의 손으로 들어가, 여러분이 이것을 한자 한자, 한줄 한줄 한 장 한 장씩 읽을줄 안다. 이것을 초하고 있는 나느 누구이며 이것을 읽는 독자는, 누구인가, 방금 오월 석양인데, 매미가 울고 있구나, 나, 독자, 매미, 이셋이 다르냐, 같으냐, 하나냐, 둘이냐, 이것은 독자 여러분의 생각에 맡겨두거니와, 일체 모든 법이 거짓 이름한 것이요, 실상(實相)이 없는(無)것이니, 이름과 상에 속지 아니하면, 상이 그대로 참이요, 실상인 것이다.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요,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지, 어찌 땅이 하늘이고, 물이 산이겠는가, 여기서 사람이라는 명사를 하나 들어서 말해 보자, 우리말로[사람]이라고 부르는데, 일본 사람들은[히도]라 하고, 중국 사람들은[렌]이라하고, 영국 사람들은 [맨]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름은 거짓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이렇게 변하고, 달리할 수 있고, 고칠수 있는 허망한 것이다. 그러나, [맨]이라고 하든지, [히도]라고 하든지, [렌]이라고 하든지, [사람]이라고 하든지, [개]라고 고치든지, [소]라고 고치든지, 사람은 사람이지, 짐승이될 수 없는 것이니, 이름과 상에 속지만 않으면, 상이 상 아닌것을 알 것이요, 상이 상 아님을 알면, 상 그대로 참인 것을 알게 될새, 이것이 상이면서 상이 아니요, 상이 아니면서 상인 이치이니, 이것이 그 마음을 항복받는 것이요, 이것이 그 마음을 주(住)한 것이 된다.

그러면, 넷째 구에 여래를 보리라 하신 말씀은, 구구한 설명이 필요치 않으니 곧 자기 부처인 자성여래(自性如來)를 본다는 말씀이시다. 배를 타는 것은 배에 목적이 있는것이, 아니요, 강을 건너서 저 언덕에 도달 하려는 것이 목적인것 같이, 불교를 알려함은, 그 목적이 자기 자성을 보아 부처 되는데 있는 것이니, 부처가 되면 잘 살게 된 것이다.

 

정신희유분(正信希有分) 제육(第六)

수보리(須菩提) 백불언(白佛言) 세존(世尊) 파유중생(頗有衆生) 득문여시(得聞如是) 언설장구(言說章句) 생실신부(生實信不)

 수보리 부처님께서 사루어 말씀하시되, 세존이시여, 중생들이 이러한 말씀이나 글귀를 얻어 듣고, 실지로 믿으오리까?

※수보리가 부처님께서 사구게(四句偈) 설하심을 듣고, 다른 설법을 듣는 때와는 달리, 한편 기쁘기도 하고, 한편 놀라웁기도 하여, 이와 같이 심히 깊고 깊어 미묘한, 사구게의 법문을 듣고, 이 말씀의 뜻을 깨쳐, 믿을 중생들이 있아오리까 하고 염려되어 물은 말이다.

 

불고(佛告) 수보리(須菩提) 막작시설(莫作是說) 여래멸후(如來滅後) 후오백세(後五百歲) 유지계수복자(有持戒受福者) 어차장구(於此章句) 능생신심(能生信心) 이차위실(以此爲實) 당지시인(當知是人) 불어일불이불삼사오불(不於一佛二佛三四五佛) 이종선근(而種善根) 이어무량(已於無量) 천만불소(千萬佛所) 종제선근(種諸善根) 문시장구(聞是章句) 내지일념(乃至一念) 생정신자(生淨信者)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사대, 그러한 말을 하지말라, 여래가 멸한 후 후오백세에도, 계를 갖고 복을 닦는자만 있으면, 이 장구에 능히 믿는 마음이 나서, 이로써 실다웁게 여길지니,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나 두 부처나, 셋 넷 다섯 부처에게서만,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 아니라, 벌써 무량 천만 불소(佛所)에서 모든 선근을 심었을새, 이 장구를 듣고, 내지 한 생각에 깨끗한 믿음을 내느니라.

※수보리가, 이 법문의 뜻이 깊고 깊어, 후래 박복한 중생들이, 어떻게 신심을 낼가 하는 걱정을 하므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야 너 이런말 하지 말라, 내가 죽은 후 또 오백세가 가드래도, 심지(心地)가 깨끗한 자성계(自性戒)를 가지고, 샘이 없는 복[무루복(無漏福)]을 닦는자만 있으면, 이 장구[사구게(四句偈)]에, 문득, 신심이 발하여, 이것으로써 자기의 안신입명처(安身立命處)를 삼을 것이니, 이 사람이야말로, 비단 일생이생에만 닦는 사람이 아니라, 무량 백첝만겁을 내려오면서, 많은 부처님 곳에서, 선근종자(善根種子)를 심은 사람이라, 이 법문에 어려울 것이 없이, 한 생각에 문득, 자기 성품을 보아 깨닫게 되느니라.

 

수보리(須菩提) 여래(如來) 실지실견(悉知悉見) 시제중생(是諸衆生) 득여시무량복덕(得如是無量福德)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 다 아시고 다 보시나니, 이 모든 중생이 이와 같이 한량 없는 복덕을 얻느니라.

※이 사구게(四句偈)의 진리(眞理)를 깨친 사람은, 자기를 아는 사람이요, 자기를 아는 사람은 곧 여래를 본 사랑이다. 아니, 여래가 곧 자기이다. 이러므로 여래가 다 알고, 다 보는 것이되어, 한량 없는 큰 복덕을 얻나니, 큰 복덕은 지음(作)이 없이 짛고, 받음(受)이 없이 받으므로, 영원히 새지(漏) 않는 복덕이 되는 것이다.

 

하이고(何以故) 시제중생(是諸衆生) 무부아상(無復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무법상(無法相) 역무비법상(亦無非法相)이니

어찌한 연고이냐 하면, 이 모든 중생은, 다시는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으며, 법상도 없으며, 또한 법 아닌 상도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한 생각만 번쩍 깨치면, 전날에 지내온 모든 행위가 다 꿈이 되어버리고, 새로운 세계가 전개 되는 것이니, 어제까지 보던 산이, 산은 산이나, 어제 보던 산이 아니요, 어제까지 보던 물이, 물은 물이나, 어제 보던 물이 아니니, 한 생각 깨끗한 맏음을 낸이는, 벌써 중새잉 아니요, 부처인 까닭에, 아 인 중생 수자상(我人衆生壽者相)이 일시에 없어지는 것이며, 법이니법이 아니니하는 상까지도, 없게 되는 것이다. 아니, 비로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고요하고 비어, 깨끗한 그 자리라, 목전에 한가지 물건도 없는 소이(所以) 인 것이다.

 

하이고(何以故) 시제중생(是諸衆生) 약심취상(若心取相) 즉위착아인중생수자(卽爲着我人衆生壽者) 약취법상(若取法相) 즉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 하이고(何以故) 약취비법상(若取非法相) 즉착아인중생수자(卽着我人衆生壽者)일새니라.

어찌한 연고이냐 하면, 이 모든 중생이 만약, 마음에 상을 취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착함(着)이 된 것이니, 만약 법상을 취할지라도, 아 인 중생 수자에 착한 것이다. 어찌한 연고이냐, 만약 법 아닌 상을 취할지라도, 곧, 아, 인, 중생, 수자에 착됨일새니라.

※상이라는 것은, 한 물건 이라도 마음에 걸리면 상이니, 좋아도 걸리고, 나빠도 걸리고, 미워도 걸리고, 고와도 걸리고, 옳은 것도 걸리고, 그른 것도 걸리고, 있는 것도 걸리고, 없는 것도 걸리고, 크고 작고 짧고 길고 높고 낮고, 밟고 어둡고, 모나고 둥글고, 기쁘고 괴롭고, 중생이고 부처고, 걸리니, 안걸리니 까지도, 모두 상에 떨어져, 깨끗한 본심이 못되는 것이다.

 

시고(是故) 불응취법(不應取法) 불응취비법(不應取非法) 이시의고(以是義故) 여래상설(如來常說) 여등비구(汝等比丘) 지아설법(知我說法) 여벌유자(如筏喩者) 법상응사(法尙應捨) 하황비법(何況非法)

이러한 연고로, 응당 법에 취하지 말며, 법 아닌데도 취하지 말지니라. 이러한 뜻으로써, 여래가 항상 말하기를, 너희들 비구가 나의 설한 법을 뗏배[큰배(筏)]에 비유함 같이 알라 하였나니, 법도 오히려 놓아 버려야 할 것이거늘, 어찌 하물며 법아닌 것이랴.

※법이 본래 없는 법을 법으로 하였으므로, 법(法)과 비법(非法)을 다 놓아버려야 한다. 피안(彼岸)에 이른 자에게는 피안도 없거니, 하물며 이 언덕이 있을 수가 있으랴, 법과 비법을 여의었다는, 이 법도 더러운 허물이 되거늘, 더구나 법이니, 법 아니니 하는, 거짓 법이야 말하여 무엇하리요. 달을 보았거든 손가락 보기를 놓아버리고, 집에 돌아왔거든 길을 묻지 말라고, 고인이 말 하였다. 강을 건넌자가, 육지에서도 배를 타고 가려함은, 심히 어리석은 자가 아닌가. 팔만사천의 법문이 모두가 바다를 건너가는데 타고가는 배에 불과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하므로 부처님께서 일체법을 설하심은, 일체 마음을 제도하기 위하심이니, 내가 만약, 일체 마음만 없고 보면, 일체법이 무엇에 필요할 것인가, 마치 병이 천이면, 천가지 약이 있고, 병이 만이면 만가지 약이 필요하나, 병하나 없는 사람에게는 한가지 약도 필요치 않는 것이다.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 제칠(第七)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야(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여래유소설법야(如來有所說法耶) 수보리언(須菩提言) 여아해불소설의(如我解佛所說義) 무유정법(無有定法) 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역무유정법(亦無有定法) 여래가설(如來可說)이니.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하느냐, 또 여래가 설한바 법이 있느냐, 수보리 말씀 여쭈되, 내가 부처님의 말씀하신바 뜻을 아는바 같아서는, 정한 법이 없는 것을 이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하옵고, 역시 정한 법 없는 것을 여래께서 가히 설하셨나이다.

※나는 저 위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최고 진리인 가장 잘 사는 법이라고 말하였다. 잘 살고저 하는 사람은, 먼저 잘 사는 법을 배워 얻어야 할 것이니, 잘 사는 법이란 무엇인가, 이 마음을 모든 상에 착하지 아니함이 가장 잘 사는 법이다. 어째서 그러하냐, 상에 착하면 자유가 없기 때문이니, 자유가 없는 것은 잘 사는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윗 대문에서 법과 비법을 다 버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러면, 중생들이 생각하기를 여래가 얻은 법은 법이 아니고 무엇일가 하고, 의심할가 염려되어, 이 대문에 와서는 수보리를 불러, [너는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리고 여래가 설한바 법이 있느냐]고 물으신 것이니, 수보리의 대답은 이러하다. [제가 부처님의 말씀 하신 뜻을 아는바 같아서는, 무엇이 잘 사는 법이라고 이름 지을 정해진 법도 없고, 또 부처님께서 무슨 법을 설하신 일정한 법도 없습니다]이렇게 말하였다.

독자여! 이에 이르러 절망하지 말라. 잘 사는 법이라고 지정할 무슨 법이 없으며, 또 어떠한 법을 정하여 말씀하신 것이 없다 하니, 잘 살기를 구하는자, 무엇을 의지하며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이러한 생각을 내지 말라.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곧, 마음 법이다. 마음 법은 본래 정해진 것이 아니다. 비컨대 어떤 그림 그리는 화공이, 무색(無色) 종이 위에다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이, 범을 그리면 범이 되고, 토끼를 그리면 토끼, 개를 그리면 개, 사람을 그리면 사람, 부처를 그리면 부처, 지옥을 그리면 지옥, 천당을 그리면 천당, 푸른색을 칠하면 푸르게, 누런색을 칠하면 누렇게, 붉을 색을 칠하면 붉게, 흰색을 칠하면 희게, 검정색을 칠하면 검정색이 되는 것과 같이, 모두가 실다운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아무 티하나 없는 우리 본심 위에, 한 생각이 일어나면, 동이니 서이니, 남이니 북이니, 선이니 악이니, 괴로우니 즐거우니, 죄니 복이이 하는등, 천차 만별의 종종 상(相)이 생기게 되나, 한 생각만 쉬고 보면, 이러한 것들이 모두가 물거품인 것이니, 본래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열반경지(涅槃境地)에 돌아가는 것이다. 이 자리는 한 물건도 없는지라 얻을 것이 없고 설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얻을것 없는 것을 얻는 것이 아뇩보리(阿耨菩提)요, 설할것 없는 법을 설하신 것이 아뇩보리인 것이다.

 

하이고(何以故) 여래소설법(如來所說法) 개불가취(皆不可取) 불가설(不可說) 비법(非法) 비비법(非非法) 소이자하(所以者何) 일체현성(一切賢聖) 개이무위법(皆以無爲法) 이유차별(而有差別)일새니라.

 어찌한 연고이냐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가히 취할 수도 없으며, 가히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며, 법아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그러하냐, 일체 현성이 다 무위법(함이 없는 법)하나로써 차별이 있는 까닭입니다.

※여래의 설하신 법은 일정한 법이 없다. 어째서 그러냐하면 마음법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법을 가지고 어느 때는 크다고 말씀하시고, 어느 때는 작다고 말씀하시고, 어떤 때는 아무것도 없다하시고, 어떤 때는 우주에 가득 차있다. 하시고, 어느 때는 법이라 하시고, 어느때는 법이 아니라 하시고, 어느때는 하나도 취하지 말라 하시고, 어느때는 하나도 버리지 말라 하시고, 어느때는 상에 착하지 말라 하시고, 어느때는 상이 아니라 하시고, 어느때는 바라밀(波羅密) (저 언덕에 은다)을 설하시고, 어느때는 바라밀이 바라밀이 아니라 말씀하셨으므로, 어느 일정한 법이 없으니, 어떻게 취할 수가 없고, 어떻게 말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아닌 것도 아니니, 어찌한 소이인가 하면, 일체 성현들이 다 이 법(무위법(無爲法))하나로써 중생을 제도하게 되므로, 소승(小乘)을 대하면 소승법을 설하고, 대승(大乘)을 대하면 대승법을 설하고, 외도를 만나면 외도법을 설하고, 아귀를 만나면 아귀도를 설하고 축생을 만나면 축생도를 설하게 되나니, 때에 따라 장소에 따라, 무량 무수한 중생의 근기에 따라, 각각 차별이 있게 설하신 법이기 때문이다.

 

의법출생분(依法出生分) 제팔(第八)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약인(若人) 만삼천대천세계칠보(滿三千大千世界七寶) 이용보시(以用布施) 시인(是人) 소득복덕(所得福德) 영위다부(寧爲多不) 수보리언(須菩提言) 심다(甚多) 세존(世尊) 하이고(何以故) 시복덕(是福德) 즉비복덕성(卽非福德性) 시고(是故) 여래설복덕다(如來說福德多)니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하면, 이 사람의 얻은바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수보리 말씀 여쭈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한 연고이냐 하면, 이 복덕은 곧 복덕성이 아닐새 이러고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정한 법이 없는, 그리고 함이 없는 아뇩보리(阿耨菩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약칭(略稱))를 가지는 이경의 공덕이 얼마나 많음을 알리고저, 먼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금 은 유리 자거 마노 산호 진주( 金銀琉璃자琚瑪瑙珊瑚眞珠)등, 일곱가지 보배로써 물질보시(物質布施)하는 공덕이, 얼마나 많은가를 먼저 비유로 드심에, 수보리가 많다고 말씀 한것은, 이것은 상 없는 보시의 복덕 성품이 못 되고, 다만 상 있는 복덕에 불과하기 때문에, 많고 적은 숫자에 떨어지는 것이므로,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설하신 것입니다 하였다.

 

약부유인(若復有人) 어차경중(於此經中) 수지내지사구게등(受持乃至四句偈等) 위타인설(爲他人說) 기복(其福) 승피(勝彼) 하이고(何以故) 수보리(須菩提) 일체제불(一切諸佛) 급제불(及諸佛)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개종차경출(皆從此經出)일새니라.

 만약 또 어떤 사람이 있어, 이 경 가운데에서 내지 사구경등이라도 받아가지고, 남을 위하여 일러주면, 그 복덕이 저보다 낳으리니 어찌한 연고이냐, 수보리야 일체 모든 부처와 및 모든 부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다 이 경으로 좇아 나오는 까닭이니라.

※위에서 칠보로써 보시한 복덕의 장함을 비유로 들고, 이 대문에서는 실다운 법을 들어서 보이신 말씀이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에 있는 사구게(四句偈)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 제상비상 즉견여래(凡所有相皆是虛妄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만이라도, 자기가 알고 남을 위하여 일러주면 이 사람의 지은 복덕이 저 물질보시한 사람의 복덕보다 승하다고 하시었다. 그 소이는 과거 현재 미래의 일체 모든 부처와, 그 부처들의 잘사는 법이 모두 이 경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 하시었다.

독자여! 이 경이 무슨 경인가, 입없는 사람에게 물어볼지어다.

 

수보리(須菩提) 소위불법자(所謂佛法者) 즉비불법(卽非佛法)이니라.

 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라는 것은 곧 불법이 아니니라.

※ 수보리야 불법이라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는 이 말은,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라고 한 말과 같다. 불법이라는 말이나, 불법이라는 이름이나, 불법이라는 글자가 어찌 불법이겠는가, 언어와 명상(名相 )과 문자를 떠나서 있는 것이 불법이다. 이 말을 다시 바꾸어 말하면 언어가 어찌 언어이며, 이름이 어찌 이름이며, 문자가 어찌 문자이랴! 그러므로 말이 곧 불법이요, 이름이 곧 불법이요, 글자가 곧 불법인 것이다. 고인이 말하기를 내게 한 권 경이 있는데, 종이와 먹으로 된것이 아니다. 펴놓아 글자 하나 없으되, 항상 큰 광명을 놓는다고 하였다.

 

일상무상분(一相無相分) 제구(第九)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수다원(須陀洹) 능작시념(能作是念) 아득(我得) 수다원(須陀洹) 과부(果不) 수보리언(須菩提言) 불야(不也) 세존(世尊) 하이고(何以故) 수다원(須陀洹) 명위입류(名爲入流) 이무소입(而無所入) 불입색성향미촉법(不入色聲香味觸法) 시명수다원(是名須陀洹)이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수다원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 말씀하되,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오. 왜 그러하고 하면, 수다원은 성류(聖流)에 든다는 이름이오나, 들어간바 없아오니, 빛이나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부딪침이나 법에 들어가지 아니함이, 이 이름이 수다원입니다.

※이 대문 부터서는 마음을 닦어나아가는 공부중에 얻은 결과의 차서를 하나 하나씩 문답하신 것이니, 처음에 수다원과(須陀洹果)를 말하고, 다음에 삼과(三果)를 차례로 말씀하게된다.

수다원(須陀洹)은 성인의 류(流)에 들어간다는 이름이니, 샘(漏)이 있는 상법(相法)에서, 샘이 없는 실다운 법에 들어 갔다는 뜻이된다. 이 과(果)를 증(證)하여 얻은 사람이 내가 수다원과를 얻었다는 생각을 갖겠느냐는 부처님의 물으심에 대하여, 수보리는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다원은 성류에 들었으나, 내가 성류에 들었다는 상이 없이 들었을새, 육진경계(六塵境界)에 물들지 않음이, 수다원이라고 대답 하였다.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사다함(斯多含) 능작시념(能作是念) 아득(我得) 사다함(斯多含) 과부(果不) 수보리언(須菩提言) 불야(不也) 세존(世尊) 하이고(何以故) 사다함(斯多含) 명일왕래(名一往來) 이실무왕래(而實無往來) 시명사다함(是名斯陀含)이니이다.

 수보리야 네뜻에 어떠하냐, 사다함이 능히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사다함과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 여쭈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한 연고이냐, 사다함은 한번 갔다 온다는 뜻이나, 실은 가고 옴이 없을새, 사다함이라 이름합니다.

※사다함은 성문(聲聞)의 제이과(二果)인데, 한번 갔다 온 다는 뜻이다.

앞 생각이 망념을 일으키면, 뒷 생각이 곧 참회하여 그치며, 앞 생각이 착하였다가, 뒷 생각이 곧 깨달어, 여이므로, 한번 가고 온다 하나, 실은 이러한 생각을 없이할새, 사다함이라 이름 한다고 대답하였다.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아나함(阿那含) 능작시념(能作是念) 아득아나함(我得阿那含) 과부(果不) 수보리언(須菩提言) 불야(不也) 세존(世尊) 하이고(何以故) 아나함(阿那含) 명위불래(名爲不來) 이실무불래(而實無不來) 시고(是故) 명아나함(名阿那含)이니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아나함(阿那含)이 능히 이러한 생각을 하되, 내가 아니함과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 말씀하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한 연고이냐. 아나함은 오지 않는다는 말이오나, 실은 오지 아니함이 없을새, 이런고로 이름을 아나함이라 합니다.

※이것은 성문(聲聞)의 셋째 과(果)이니, 안 마음과 바깥 경계가 고요하고 깨끗하여, 번뇌인 욕계(欲界)에 오지 아니 한다는 뜻이로되, 실로 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없을새, 이런고로 이름이 아나함이라 합니다.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아라한(阿羅漢) 능작시념(能作是念) 아득(我得) 아라한도부(阿羅漢道不) 수보리언(須菩提言) 불야(不也) 세존(世尊) 하이고(何以故) 실무유법(實無有法) 명아라한(名阿羅漢) 세존(世尊) 약아라한(若阿羅漢) 작시념(作是念) 아득아라한도(我得阿羅漢道) 즉위착아인중생수자(卽爲着我人衆生壽者)일새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아라한(阿羅漢)이 능히 이러한 생각을 가지되, 내가 아라한 도를 얻었다 하겠느냐. 수보리 말씀하되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한 연고이냐 하면, 실로 있음이 없어야 이름이 아라한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라한이 이런 생각을 하되, 내가 아라한도를 얻었다 하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걸리기 때문입니다.

※아라한은 성문 사과(四果)중, 가장 높은 자리인 넷째 과(果)이다. 망상을 제할 것도 없고, 참을 구할 것도 없이, 한 법도 있지 아니 하므로 배울 것이 없다는 이름이니, 이 과를 증득(證得)한자가 내가 아라한을 얻었다 하면, 얻었다는 생각이,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에 착해진 것이라는 뜻이다.

 

세존(世尊) 불설아득무정삼매인중(佛說我得無諪三昧人中) 최위제일(最爲第一) 시제일이욕아라한(是第一離欲阿羅漢) 세존(世尊) 아부작시념(我不作是念) 아시이욕아라한(我是離欲阿羅漢)이니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내가 고요한 삼매를 얻은 사람 가운데 가장 제일인지라 이것이 제일 욕심을 떠난 아라한이라 말씀 하셨아오나 세존이시여 내가 이러한 생각을 가져 내가 이 욕심을 여인 아라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조용한 사람은 내가 고요한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고, 욕심이 참으로 없는 사람은 내가 욕심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존(世尊) 아약작시념(我若作是念) 아득아라한도(我得阿羅漢道) 세존(世尊) 즉불설수보리(卽不說須菩提) 시요아란나행자(是樂阿蘭那行者) 이수보리(以須菩提) 실무소행(實無所行) 이명수보리(而名須菩提) 시요아란나행(是樂阿蘭那行)이니다.

세존이시여, 내가 만약, 아라한도를 얻었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세존께서 곧 수보리에게 아란나(阿蘭那)(다툼이 없는)행을 즐기는 자라고 말씀 아니하셨을 것이나, 실은 수보리가 행한바가 없을새, 수보리더러 아란나행을 즐기는 자라고 이름한 것입니다.

※아란나는 다툼이 없다는 뜻과 고요하다는 뜻이다.

이 대문까지는 소승 사과(小乘四果)에 대한 불(佛)과 수보리의 문답이 끝난 것이니, 얻어도 얻음이 없이 얻는 것이, 참으로 얻음이 됨을 밝히신 것이다.

 

장엄정토분(莊嚴淨土分) 제십(第十)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여래(如來) 석재연등불소(昔在燃燈佛所) 어법(於法) 유소득부(有所得不) 불야(不也) 세존(世尊) 여래재연등불소(如來在燃燈佛所) 어법(於法) 실무소득(實無所得)이시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고하사대, 뜻에 어떠하냐, 여래가 옛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법에 얻은바가 있다 하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여래가 연등불소에서 법에 실로 얻은바가 없습니다.

※연등불은 석가모니불을 인가(수기)하신 먼저 부처님이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묻기르, 여래, 내가 옛날 연등불소에서 얻은 법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심에, 수보리는 연등불소에서 실로 얻은 법이없다하고 대답하였으니, 이 법은 이름과 상이 끊어지고, 주고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 것이다.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보살(菩薩) 장엄불토부(莊嚴佛土不) 불야(不也) 세존(世尊) 하이고(何以故) 장엄불토자(莊嚴佛土者) 즉비장엄(卽非莊嚴) 시명장엄(是名莊嚴)이니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보살이 불토를 단장하느냐, 아니하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한 연고이냐, 불토를 단장 한다는 것은, 곧 단장이 못 되고, 이 이름이 장엄입니다.

※상이 있는 장엄은 상으로써 하려니와, 상이 없는 장엄은 깨끗한 마음이 장엄인지라, 함이 없이 하는 것이므로, 보살이 불국토(佛國土)를 장엄한다는, 것은, 장엄이 아니라, 거짓 이름하여 장엄이라고, 수보리는 말하였다.

 

시고(是故) 수보리(須菩提) 제보살마하살(諸菩薩摩詞薩) 응여시생청정심(應如是生淸淨心) 불응주색생심(不應住色生心)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니라.

 이런고로 수보리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응당 이와같이 청정한 마음을 낼지니, 마땅히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말며, 또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부딪침이나, 법에 머물지 않고, 마음을 낼 것이요, 응당 주한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부처님의 천가지 말씀이 그뜻이 다른데 있지 않고, 오직, 중생을 건지는데에 있다. 중생을 제도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을 깨치도록함에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알라, 마음을 밝히라, 마음을 깨쳐라, 마음을 닦어라, 하시고 또 그 마음의 항복받는 법, 주하는 법, 가지는 법, 쓰는 법, 행하는 법, 등을 설하신 것이다. 이 경 전부에 뜻이 이것이요, 천경만론(千經萬論)의 뜻이 이것이니, 불교를 배우고저하는 자는 자기 마음에서 배우고, 구하고, 깨치고, 행하고, 할 것이요, 다른데서 구하지 말라. 그러면 글이나 말을 의지하지 않고, 소연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이 대문에서 [응당 주한바가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하시 말씀도, 마음의 주하는 법과 쓰는법, 행하는 법을 가르치신 말씀이시니, 그 뜻이 무엇인가. 주한바가 없다는 말은 착한바가 없다는 말이니, 마음은 본래 주소가 없기 때문이다. 생각하여 보라. 마음의 주소가 어디 인가.

우리가 서로 모르는 사람끼리 처음 만나게 되면, 수인사를 하게 된는데, 먼저 성명을 알린 다음에, 그 주소를 묻고 대답하게 된다. 외국이면 어느 나라에 사느냐고 묻고, 우리 나라 사람끼리면 당신은 어느 도 어느 군 어느 면 어느 마을에 사느냐고 묻고, 나는 또 이와 같이 어데 살고있음을 알려 준다. 그러나 이것은 서로 자기의 몸이 있는 주소를 말함이요, 마음을 지적한 말은 못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있어 당신 마음의 주소는 어디냐고 물어면, 이 말을 대답할 사람은 적다. 어찌하여 그런고 하면, 자기 마음의 주소는 자기도 모르기 때문이다.

형상이 있는 자기 육신과는 달라 몸은 자기 집에 있으되, 마음은 자기 집에 있지 않고, 한 시간에도 몇천만 군데를 돌아다니게 된다. 산이건, 들이건, 하늘이건, 땅 속이건, 평지이건, 가시 밭이건, 물, 불을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는 마음은 한 때도 쉴새가 없이 바쁘다.

이리하여 마음은 일정한 주소가 없다. 주소가 없으므로 육신의 경계를 따라, 찰라 찰라의 주소[상에 착 하는 것]를 자기 주소[마음]인양, 알아, 내집이라는 액착의 생기게 된다. 그러나 이 주소는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데로 옮겨, 변하고 하므로 마음은 한시라도 내 집이라고, 다리 뻗고, 잊어버리고, 편안히 앉아 쉴 곳이 없다. 이 마음의 신세야 말로, 얼마나 고달프고 괴로웁고 불안할 것인가. 제 집하나 없이 남의 집[경계]으로만 돌아다니는, 팔자 사나운 마음인지라, 자연히 불안과 공포와 전율(戰慄)과 저주와 고독과 비관과 타락과 악의가 아니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이 마음이 삼독심(탐심, 진심, 치심)이 되어, 자기가지의 일을 저질르는 것이니, 죽이고, 죽고, 속이고, 시새우고, 음해하고, 방탕하고, 모욕하고, 경멸하여, 이사회에서 날로 일어나는. 살인, 자살, 강도, 절도, 강간, 사기, 협잡, 방화, 약탈등, 무시무시한 죄업들이다.

이리하여 사회는 날로 질서가 어지러워지고, 사람은 점점 짐승으로 화 하게 되나니, 마음이 있는자 어찌 이것을 무심히 보고 말수 있을 것인가. 이리하여 마음의 주소인, 집을 하나 만들어, 정하여 주고, 잘 편히 쉬도록 하여주자는 것이, 먼저 깨달으신 부처님의 자비하신, 마음이요, 또 이경의 뜻이요, 천경만론(千經萬論)의 뜻인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이 마음의 주소가 될 집을 정하여 줄가. 독자여! 그리 어렵지 않다. 주가 없는 마음이니 주가 없는 그 곳에다 자리를 잡는 것이 주소가 되고, 정처가 될 것이 아닌가. 주가 없는지라, 주에도 머무르지 않을 것이며, 상에도 주하지 않고, 상 없는데도 주하지 않을 것이며, 법에도 주하지 않을 것이니, 무주에 주하는 마음의 주처일 것이다.

이 주처를 새로 부처가 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본 주소가 그러한 것이거늘, 우리들이 번뇌 망상으로 인하여, 자기의 본 주소를 알지 못하고,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경계를 따라, 간데마다 자기 집을 삼고, 닥치는 대로 실상을 삼아, 착하는 병을 이루게 되나니, 모두가 병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큰 것은 커서 병이요, 작은 것은 작아서 병이니, 큰 것은 작은데 쓸수가 없고 작은 것은 큰데 쓸 수가 없는 까닭이요, 긴 것은 길어서 병이요, 짧은 것은 짧아서 병이니, 긴것은 짧게 쓸 수 없고, 짧은 것은, 길게 쓸 수가 없는 까닭이요 모난 것은 모나서 병이요, 둥근 것은 둥글어서 병이니, 모난 것은 둥글게 쓸 수가 없고, 둥근 것은 모난데 쓸 수가 없는 까닭이요, 푸른 것은 루르러 병이요, 붉은 것은 붉어서 병이니, 루른놈은 붉게 쓸 수가 없고, 붉은놈은 푸르게 쓸 수가 없는, 까닭이요, 강한놈은 강하여 병이요, 약한놈은 약하여 병이니, 강한 놈은 약하게 쓸 수가 없고, 약한 것은 강한데 쓸 수가 없는 까닭이요, 있는놈은 있어서 병이요, 없는놈은 없어서 병이니 있는 놈은 있게에 괴롭고, 없는 놈은 없어서 괴로운 까닭이요, 부처는 부처이시라 걱정을 하고, 중생은 중생이어서 걱정이 있나니, 일체 제법이 모두 병이다.

그러면 이 병은 어떻게 하여야 치료를 할 것인가. 독자여! 걱정 하지 말라. 바로 네게 좋은 약이 있으니, 다른데서 구하지 말라. 크도 작도 않고, 길고 짧지도 않고, 모나고 둥글지도 않고, 푸르고 붉지도 않고, 강하고 약하지도 않고,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고, 부처도 중생도 아닌, 한 물건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좋은 약이요, 이약이 바로 독자 여러분들의 본 마음[일체 상을 여인 깨끗한 마음]인 것이다.

엄양존자가 조주에게 묻기를, 한 물건도 잡아오지 않는 때가 어떠합니까, 한즉 조주는 놓아버리라고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다시 묻기를, 한 물건도 갖지 않았거니 무엇을 놓으라 하삽니까, 하였다. 조주는 놓지 않을려거든 짊어지고 가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의 청정 본심에는 한물건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이 벌써 한 물건을 가져온 것이 되고 만것이다.

아무 티하나 없는 우리들의 본심에는 없다는 것도, 있는 것이되고 만다.

독자여! 그러면 어찌하란 말인가. 죽은 재와 같이 되자는 말인가, 마른 나무가된다는 말인가, 굳은 바위가 되어버린다는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살길을 찾아야 한다. 도리켜 생각 하여보라. 주가 없고, 정함이 없는 우리 마음[본심]이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 마음대로 되나니, 크고작지도 않은지라 크게도 되고, 작게도 되는 것이요, 길고 짧은 것이 아니라, 길 때는 길고, 짧을 때는 짧은 것이요, 모나고 둥근 것이 아니라, 푸르게도 만들고, 붉게도 만드는 것이요, 강하고 약한 것이 아니라 강할때는 강하고, 약할때는 약하게 되는 것이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지라,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이요 부처도 아니요, 중생도 아닌지라,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나니, 깰 것이 없지마는, 깨게하고, 배울 것이 없지마는배우게 하고 얻을 것이 없지만는 얻을것 없는 것을 깨쳐 얻도록 함이, 부처나 조사들의 자비하신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거이므로, 또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임을, 깨어 얻은 사람이라면, 천차 만별의 경계가 어찌 딴 것이리요. 산도 내것, 물도 내것, 하늘도 내것, 땅도 내것, 미운 것도 내것, 더러운 것도 내것, 깨끗한 거도 내것, 눈물도, 웃음도 내것, 원수도 내것, 애인도 내것, 원숭이, 토끼, 여우, 사슴, 꾀꼬리, 제비, 개구리, 개미등도내것이요, 지옥, 천당, 아수라, 부처, 중생들이 모두 내것이요, 딴 것이 아닌 것이니, 나밖에 아무 것도없는 것도없는 것이다. 이[나]는 우주 전체적인 나인고로 나 아닌 상대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상대물이 없으므로,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딴 것이 아니요, 내 것이니, 아상도 좋고, 인상도 좋고, 중생상도 좋고, 수자상도 좋다. 나는 여기서[응무소주 이생기심]의 강의를 이만 멈추고, 독자 여러분의 성불을 기도하겠습니다.

 

수보리(須菩提) 비여유인(譬如有人) 신여수미산왕(身如須彌山王) 어의운하(於意云何) 시신위대부(是身爲大不) 수보리언(須菩提言) 심대(甚大) 세존(世尊) 하이고(何以故) 불설비신(佛說非身) 시명대신(是名大身)이니이다.

 수보리야, 비컨대, 어떤 사람이 몸이 큰 수미산왕만 하다면, 네 뜻이 어떠하냐. 이몸이 크다 하겠느냐. 수보리 말씀 여쭈되, 매우 큽니다. 세존이시어. 어찌한 연고이냐. 부처님께서는 몸 아닌 것을 말씀 하시어, 이 이름이 큰몸 이라 하셨나이다.

※수미산은 산 중에 제일 높은 산이어서, 묘고산이라는 뜻이니, 높이와 넓이가 삼백 삼십육만리나 되는 가장 큰 산이라 한다. 이 큰 것을 비유하기 위하여, 어떤 사람의 몸이 이만큼 크다 하면, 이몸을 크다 하겠는가, 하고 수보리에게 물으심에, 수보리는 부처님의 물으시는 뜻을 알고, 아무리 큰 몸일지라도, 이것은 상이 있는 몸이므로, 제한 된 큰 몸에 불과한 것이옵고, 참으로 큰 몸은 상이 없는, 몸아닌 몸이라야, 큰 몸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수미산이 크다해도, 하늘아래 있고, 하늘이 크다해도, 코구멍에 넣으면 한 미진(微塵)에 불과 하다. 독자여, 묻노니 코구멍이 어디 있는고.

 

無爲福勝分(무위복승분) 第十一(제십일)

須菩提(수보리) 如恒何中所有沙數(여항하중소유사수) 如是沙等恒河(여시사등항하) 於意云何(어의운하) 是諸恒河沙(시제항하사) 寧爲多不(영위다부) 須菩提言(수보리언) 甚多(심다) 世尊(세존) 但諸恒河(단제항하) 尙多無數(상다무수) 何況其沙(하황기사)리이까.

수보리야 항하 가운데 있는바, 모래 수와 같이 이렇게 많은 항하가 있다 하면, 네 뜻에 어떠하냐. 이 모든 항하의 모래가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수보리 여쭈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다만 저 항하도 오히려 수 없이 많거늘 어찌 하물며 그 모래이겠나이까.

※먼저 수미산의 큰 것을 들어 말씀하시고, 이번에는 항하 모래의 많음을 들어 말씀하셨으니, 이 뜻이 어데 있는가를, 다음에 하신 말씀에서 알게 될 것입니다.

 

須菩提(수보리) 我今實言(아금실언) 告汝(고녀) 若有善男子(약유선남자) 善女人(선녀인) 以(이) 七寶(칠보) 滿爾所恒河沙數三千大千世界(만이소항하사수삼천대천세계) 以用布施(이용보시) 得福(득복) 多不(다부) 須菩提言(수보리언) 甚多(심다) 世尊(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내가 이제 실다운 말로 네게 고하노니,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있어, 저 항하 모래 수대로 있는,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에 쓴다면, 그 복덕이 얼마나 많다 하겠느냐 수보리 말씀하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항하 모래를 드심은, 모래 수와 같이 많은 세계를 비유코져 하심이요, 이 많은 세계를 말씀하심은, 이 많은 세계에 가득찬 많은 보배를 말하고저 하심이요, 이 많은 보배의 보시를 말씀하심은, 한량없이 많고, 한량없이 큰, 복덕을 말씀코저 하심일새, 수보리의 대답이 매우 많습니다. 매우 큽니다. 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복덕은 없을는지, 혹시 이보다 더 큰 복덕이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 복덕일는지, 다음 부처님의 말씀을 기다려 보기로 하자.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 若善男子(약선남자) 善女人(선녀인) 於此經中(어차경중) 乃至受持四句偈等(내지수지사구게등) 爲他人說(위타인설) 而此福德(이차복덕) 勝前福德(승전복덕)이니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고하사대,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이 경 가운데에 내지 사구게등만 가져 남을 위하여 일러줄지라도, 이 복덕이 앞에 말한 복덕보다 승하니라.

※물질보시(物質布施)보다 법보시(法布施)의 공덕이 큼을 말씀하신 것이니, 七寶(칠보)는 물질이요, 四句偈(사구게)는 법이다. 물질은 상이 있고, 법은 상이 없나니, 상은 무너지고, 부서지고, 없어지므로, 잠깐인 것이요, 법은 불생 불멸이므로, 영원한거이다. 고인의 말씀에 [만약 사람이 잠깐이라도 고요히 앉으면, 항하 모래와 같이 많은 칠보로 塔(탑)을 쌓은 것보다 승하리라. 보배탑은 무너져 먼지로 화하지마는,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은 正覺(정각)을 이룬다]하셨다.

 

尊重正敎分(존중정교분) 第十二(제십이)

復次須菩提(부차수보리) 隨說是經(수설시경) 乃至四句偈等(내지사구게등) 當知此處(당지차처) 一切世間天人阿修羅(일체세간천인아수라) 皆應供養(개응공양) 如佛塔廟(여불탑묘) 何況有人(하황유인) 盡能受持讀誦(진능수지독송)이리요.

 그리고 또 수보리야, 이경에 내지 사구게등만 따라서 설할지라도, 마땅히 알라, 이 곳은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기를 부처님의 탑과 절 같이 할 것이거늘, 어찌 하물며 사람에 있어, 다 능히 수지하며 읽고 외움이겠냐.

※사구게만 설하는 곳이라도, 이 곳은 부처님의 사리(실령한 구슬)를 모신 탑이나, 부처님을 모신 절과같이, 모든 세간의 하늘이며, 사람이며, 아수라(육취중에 싸움을 좋아하는 중생)들이 와서 공양 하거늘 하물며 어떤 사람이 이경전 전부를 수지독송(受持讀誦)한다면 어찌 되겠는가.

 

須菩提(수보리) 當知(당지) 是人(시인)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성취최상제일희유지법) 若是經典(약시경전) 所在之處(소재지처) 卽爲有佛(즉위유불) 若尊重弟子(약존중제자)라니.

 수보리야,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가장 상(上)가는 제일 희유한 법을 성취한 것이니, 만약 이 경전이 있는 처소는, 부처님과 존중하신 제자가 계심이 되느니라.

※사구계를 수지하여, 남을 일러주는 공덕도 한량이 없이 크거늘, 경 전부를 수지독송(受持讀誦)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잘 사는 법을 성취한 사람이다.

이 경이 있는 곳은 곧 불법승삼보(佛法僧三寶)가 있음이 되나니, 부처님이 계시므로 이법을 설하시고 이 법을 설하셨으므로 이 법을 믿는 제자가 있는 소이이다. 그런데 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은 아(我), 인(人), 중생(衆生), 수자상(壽者相)이 없어, 제도할자도 없고, 제도 받을자도 없으며, 이 없다는 상까지도 없다고, 저 위에서 말씀하고, 이 대문에 와서, 이 경이 있는 곳에는, 부처와 법과 승(제자)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앞의 말과 뒤의 말에 전도가 아닐까, 의심할지 모르나, 저 위에서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의 강의를 살펴보면 알 것이다. 가장 잘 사는 법은 걸림없이 되 법이기 때문이다.

 

如法受持分(여법수지분) 第十三(제십삼)

爾時(이시) 須菩提(수보리) 白佛言(백불언) 世尊(세존) 當何名此經(당하명차경) 我等(아등) 云何奉持(운하봉지) 佛告須菩提(불고수보리) 是經(시경) 名爲金剛(명위금강) 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 以是名字(이시명자) 汝當奉持(여당봉지) 所以者何(소이자하) 須菩提(수보리) 佛說(불설) 般若波羅蜜(반야바라밀) 卽非般若波羅蜜(즉비반야바라밀) 是名般若波羅蜜(시명반야바라밀)일새니라.

 그때에 수보리 부처님께 사루어 말씀하되, 세존이시여, 마땅히 이 경을 무엇이라 이름하오며, 우리들이 어떻게 받들어 가지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사대 이 경 이름이 금강반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이니, 이 명자보살로써 네 마땅히 받들어 가질지니라. 어찌한 소이이냐, 수보리야. 내가 말한 반야바라밀은 곧 반야바라밀이 아니요 이 이름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 이름을 금강반야바라밀이라, 하신 소이는 반야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시었다.

바꾸어 말하면 반야바라밀 아닌 것이, 반야바이밀이라는 뜻이니, 다시 말하면, 마음은 마음이 아닌것이, 마음이 된다는 말과 같다. 반야바라밀이라 해도, 반야바라밀이 아니요 반야바라밀이 아니라 해도 옛 부처 생기기 전부터 반야바라밀인 것을 어찌하랴. 그렇다고 해도 아니요, 아니라고 해도 그러하니, 그렇고, 그렇지않은 것을 의논치 말라. 그렇다 해도 좋고, 아니라 해도 좋다.

 

須菩提(수보리) 於意云何(어의운하) 如來有所說法不(여래유소설법부) 須菩提(수보리) 白佛言(백불언) 世尊(세존) 如來無所說(여래무소설)이니이다.

 수보리야, 네뜻에 어떠하냐. 여래가 설한 바 법이 있는냐, 없느냐, 수보리, 부처님께 사루어 말씀 여쭈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설한바가 없습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성취하여, 저 언덕에 이른 자에게는 이소리가 군소리인 것이다. 입 한번 안 벌려도 벌 설하시는 소리, 천지가 진동하고, 부처 나기 전부터 지금까지 설법을 하여도, 한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무엇을 가르쳐 설법이라 하고, 무엇을 일러 설법이 아니라 할것인가.

 

須菩提(수보리) 於意云何(어의운하) 三千大天世界(삼천대천세계) 所有微塵(소유미진) 是爲多不(시위다부) 須菩提言(수보리언) 甚多(심다) 世尊(세존) 須菩提(수보리) 諸微塵(제미진) 如來說非微塵(여래설비미진) 是名微塵(시명미진) 如來說世界(여래설세계) 非世界(비세계) 是名世界(시명세계)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미진을 많다 하겠느냐, 아니 하겠는냐. 수보리 말씀 여쭈되,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모든 미진을 여래께서는, 미진이 아니라 이 이름이 미진이라고 말씀하시고, 여래께서는 세계가 세계가 아니라, 이 이름이 세계라 하였나니라.

※미진(먼지)이 합하여, 세계가 되고, 세계가 부서져 미진이 된 것이니, 미진을 버리고 따로 없고, 세계를 떠나서 미진이 따로 없으니, 미진이 미진이 아니요 세계가 아님을 알 것이다. 한 생각이 걸리면 팔만 사천의 번뇌가 생기고, 한 생각이 비어, 통하면, 팔만 사천의 불보리(佛菩提)를 성취하는 것이니, 번뇌를 버리고 보리를 찾을 수 없고, 보리를 떠나서 번뇌가 따로 없을새, 번뇌와 보리가 이름 뿐이요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님을 알지니라.

 

須菩提(수보리) 於意云何(어의운하) 可以三十二相(가이삼십이상) 見如來不(견여래부) 不也(불야) 世尊(세존) 不可以三十二相(불가이삼십이상) 得見如來(득견여래) 何以故(하이고) 如來說(여래설) 三十二相(삼십이상) 卽是非相(즉시비상) 是名(시명) 三十二相(삼십이상)이니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가히 삼십 이상으로써 여래를 보겠느냐, 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얻어보지 못 할지니, 어찌한 연고입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은, 곧 이것이 상이 아니라, 이 이름이 삼십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본다 하여도 옳지 않고,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지 못한다 하여도 옳지 않으니, 모두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요, 금강반야바라밀이 아닌 소이이다.

독자여 여러분 어떻게 보아야 여래를 참으로 본 것이 될는지 한번말하여 봅시다.

 

須菩提(수보리) 若有善男子(약유선남자) 善女人(선녀인) 以恒河沙等身命(이항하사등신명) 布施(보시) 若復有人(약부유인) 於此經中(어차경중) 乃至受指四句偈等(내지수지사구게등) 爲他人說(위타인설) 其福(기복) 甚多(심다).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있어 항하 모래와 같은 많은 목숨을 바쳐 보시하였을지라도, 만약 어떤 사람이고 이 경 가운데에 내지 사구게등만 수지하여, 남을 위하여, 일러주는 이가 있다면, 그 복이 훨씬 많느니라.

※무엇보다도 중히 여기고 액착하는 것이, 자기의 생명인 건인데, 어떤 사람이 자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다생을 두고 보시하였드래도, 이 경의 사구게를 남에게 일러준 복덕만 못하다는 말씀이시다. 사구게의 공덕이어찌하여 많고 큰가. 사구게를 수지하여 남을 일러주는 자는, 아뇩보리를 성취한 자요, 반야바라밀이 된 자이기 때문이다.

독자 여러분 물을 마시는 사람이라야, 차고 더운 것을 자기 스스로 알 것이요, 다른 사람의 알바가 아니니, 아무리 그 복이 많고 크다 한들 어찌 믿어 알리요. 고인의 글에[산에 산에 무엇이 있나, 봉우리에 흰구름도 많네, 이리좋은 경치를 나만 혼자 즐길뿐, 가져다 임 앞에 바치지는 못 하네]하였다.

나무아미타불 성불하세요..._()()()_

 

이상적멸분(離相寂滅分) 제십사(第十四)

이시(爾時) 수보리(須菩提) 문설시경(聞說是經) 심해의취(深解義趣) 체루비읍(涕淚悲泣) 이백불언(而白佛言) 희유세존(希有世尊) 불설여시심심경전(佛說如是甚深經典) 아종석래소득혜안(我從昔來所得慧眼) 미증득문여시지경(未曾得聞如是之經)이니이다.

 그때에 수보리 이 경 설하심을 듣고, 깊이 이 뜻을 깨달아, 눈물을 흘려 슬피 울며, 부처님께 사루어 말씀하되, 희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심히 깊은 경전을 설사심은, 제가 예로부터 오면서 얻은바 지혜의 눈으로는 일찍이 이와 같은 경을 얻어 듣지 못하였나이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오백제자 가운데 공(空)의 이치를 깨침이 제일이라 하였거니, 어찌 이런 법을 처음 알리요마는, 깨침도 심천(深淺)이 있고 앎도 차별이 있는 것이라, 슬픔이 극하면 웃음이 나오고 기쁨이 극하면 도리여 눈물이 나오는 것이니, 이번과 같이 부처님께서 크고 크고, 깊고 깊은, 법을 간절하시고 극진하신 대자대비심으로 설하심을 듣고, 법에 대한 희열을 더 한층 깊게 깨치며, 불은(佛恩)에 대한 감사를 더 한층느끼어, 울며, 부처님께 사루되, 지금까지 제가 알아온 지혜의 눈으로는 일찍이 이러한 경을 얻어 듣지 못하였다고 감사의 말씀을 뼈저리게 올린 것이다.

 

세존(世尊) 약부유인(若復有人) 득문시경(得聞是經) 신심청정(信心淸淨) 즉생실상(卽生實相) 당지시인(當知是人) 성취제일희유공덕(成就第一希有功德)이니이다.

 세존이시여, 만약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신심이 청정하면 곧 실상이나니라,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을 성취한 줄로 마땅히 알겠나이다.

※이 경의 뜻을 얻어 듣고 신심만 청정하면 이 사람은 곧 실상을 보게 되나니, 신심은 거짓이 없고 참답기 때문이다. 참답기 때문에 실다운 상을 얻게 된다. 실다운 상은, 상과 상 아닌데 걸림이 없고, 있고 없음에 걸림이 없고, 주와 무주에 걸림이 없고, 공덕과 비공덕에도 걸림이 없어서, 이것이 실상이니, 이 경을 듣고 신심이 깨끗하게 된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이 아닌, 공덕을 성취한 사람인 것이다.

 

세존(世尊) 시실상자(是實相者) 즉시비상(卽是非相) 시고(是故) 여래설(如來說) 명실상(名實相)이니이다.

 세존이시여, 이 실다운 상이라는 것은, 곧 이 상이 아닌지라 이런고로 여래께서 말씀하시되, 이름을 실상이라 하셨나니라.

※실상이라는 것은, 말에 있지 않고 문자에 있지 않고, 명상(名相)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문자나, 명상이, 또한 실상인 것도 알아야 한다.

 

세존(世尊) 아금득문여시경전(我今得聞如是經典) 신해수지(信解受持) 부족위난(不足爲難) 약당래세(若當來世) 후오백세(後五百歲) 기유중생(其有衆生) 득문시경(得聞是經) 신해수지(信解受持) 시인(是人) 즉위제일희유(卽爲第一希有) 하이고(何以故) 차인(此人)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 소이자하(所以者何) 아상(我相) 즉시비상(卽是非相) 인상중생상수자상(人相衆生相壽者相) 즉시비상(卽是非相) 하이고(何以故) 이일체제상(離一切諸相) 즉명제불(卽名諸佛)일새니다.

 세존이시여, 내가 지금 이와 같은 경전을 얻어 듣고, 믿어 알고, 받아 가지기는 족히 어렵지 않거니와, 만일 당래세인 후오백세에 있는 중생들이, 이 경을 얻어 듣고, 신해수지(信解受持)하는 이 사람은 곧 제일 희유함이 될지니, 어찌한 연고이냐, 하면 이사람은 아상도 없고, 인상도 없고, 중생상도 없고, 수자상도 없는 까닭입니다. 이 소이가 무엇일까요 아상이 곧 상이 아니며 인상중생상 수자상도 곧 상이 아닙니다. 어찌한 연고이뇨. 일체 모든 상을 여이어사, 곧 이름이 부처인 까닭입니다.

※이 경을 신해수지하는 사람은 참으로 드물게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상을 여인 사람이니, 상을 여인 사람은 곧 부처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상을 여임이 되는가. 상에 착하면 사이요, 상을 여이면 여인 상이니, 착하고 여인 상을 놓아버려야, 이것이 일체 제상을 여인 것이된다. 그리고 상을 떠나서 상을 여일려 말라.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 여시여시(如是如是) 약부유인(若復有人) 득문시경(得聞是經) 불경불포불외(不驚不怖不畏) 당지시인(當知是人) 심위희유(甚爲希有)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고하시되, 그렇다 그렇다,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얻어 듣고,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사람은 매우 희유함이 되나니라.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의 말씀을 긍정하시었다. 그리고 이 경을 듣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매우 희유하다고 찬탄 하시었다. 물 속에서 불이 일어나고 불 속에서 연꽃이 피면,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 것인가, 이 경의 처음부터, 만약, 보살이 사상(四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라, 말씀하시어, 사상을 여이어야 할 것을 여러번 부탁하시고, 이제 와서는 아상이 곧 상이 아니요,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상이 아니라 말씀을 하시니, 이런 말씀을 듣고 놀라지 않는 사람은 심히 희유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기의 본심만 본 사람이면, 그리 희유하다. 할 것이 없는 것이다. 상이라 하거나 아니라 하거나 그놈이 그놈이요,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이고(何以故) 수보리(須菩提) 여래설제일바라밀(如來說第一波羅蜜) 즉비제일바라밀(卽非第一波羅蜜) 시명제일바라밀(是名第一波羅蜜)일새니라.

 어찌한 연고 이냐, 수보리야, 여래가 제일 바라밀이라 말한 것도, 제일 바라밀이 아니요, 이 이름이 바라밀이니라.

제일 바라밀은 보시바라밀을 말씀한 것이나, 신심이 깨끗하여 실다운 상을 본 사람은, 보시가 아닌 것이니, 줄 사람도 없고, 받을 사람도 없고 주고 받을 물건이나, 법도 없는 까닭이요, 바라밀이라는 저 언덕에 이르는 것도 없을지니, 이 언덕이 없는지라, 저 언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수보리(須菩提)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여래설비인욕바라밀(如來說非忍辱波羅蜜) 시명인욕바라밀(是名忍辱波羅蜜) 하이고(何以故) 수보리(須菩提) 여아석위가리왕(如我昔爲歌利王) 할절신체(割截身體) 아어이시(我於爾時)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 하이고(何以故) 아어왕석(我於往昔) 절절지해시(節節支解時) 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응생진한(應生嗔恨)일새니라.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인욕바라밀이 아니요, 이 이름이 인욕바라밀이라고, 여래가 말하였느니라. 어찌한 연고이냐. 수보리야 내가 옛적 가리왕에게 신체를 베이고, 끊음을 당하였으되, 내가 그때에 아상이 없었고, 인상이 없었고, 중생상이 없었고, 수자상이 없었나니, 어찌한 연고이냐 내가 지나간날 마디마디 사지를 찢길 때에, 만약,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응당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었을 것이니라.

※가리는, 번역하여, 극악하다는 뜻이니, 예날 인도에 가리왕이 있었고, 부처님은 그때에 인욕행을 닦는 선인(仙人)이되시었다 한다. 하루는 가리왕이 산중에서 사냥을 하다가, 곤하여 잠을 자고 깨어본즉, 시녀들이 한사람도 보이지 않으므로, 이리 저리 찾아본즉, 이 시녀들은, 어떤 선인이 편안히 앉아 있는 곳을 둘러싸고, 예배를 드리고 있거늘, 왕은 크게 노하여, [그대는 어찌하여 방자히 남의 여색을 탐내는가]선인이 말하기를, 나는[인욕계(忍辱戒)를 갖는다]고 대답하였더니, 왕은 칼로 선인의 몸을 오리고, 끊고 하였으나, 선인은 엄연히 안색을 불변하고, 가리왕을 원망하는 생각도 없었다는 이야기가 경에 있다.

 

수보리(須菩提) 우념과거어오백세(又念過去於五百世) 작인욕선인(作忍辱仙人) 어이소세(於爾所世) 무아상(無我相) 무인상(無人相) 무중생상(無衆生相) 무수자상(無壽者相)이니.

 수보리야, 또 생각하니 과거 오백세에 인욕선인이 되었던 그 세상에서도 아상, 인상, 중생상도, 없었고 수자상도 없었더니라.

※모기만 물어도 가려움을 느껴, 견디기가 어려웁거늘,어찌 칼로써 찌르고, 끊고, 도리고 함을 참아서, 견딜수가 있을 것인가. 참는다는 것은 도무지 거짓말이다. 선인은 할절신체(割截身體)를 당할때에도 가리왕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선인이라는 내가 없거니, 선인을 해칠 가리왕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의 몸을 칼로써 베인다는 것은 번개빛 그림자 속에 봄바람을 베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고(是故) 수보리(須菩提) 보살(菩薩) 응리일체상(應離一切相)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불응주색(不應住色) 생심(生心) 불응주성향미촉법(不應住聲香味觸法) 생심(生心) 응생무소주심(應生無所住心) 약심유주(若心有住) 즉위비주(卽爲非住)니

 이런고로 수보리야, 보살이 응당 일체 상을 여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할 것이니 응당 색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 말며, 응당 소리나, 향기나, 맛이나, 부딧침이나, 법에 머물러 마음을 내지말지니, 만약 마음에 주가 있으면 곧 주 아님이 되나이다.

※우리들이 편안히 살려면 마음이 고요하여야 하나니, 마음이 고요하려면 싸우지 않어야 하고 싸우지 않으려면 시비가 없어야 하고, 시비가 없으려면 분별이 없어야 하고 분별이 없으려면 마음이 공하여야 하고, 마음을비우고저하면 일체 상이 없어야 하고, 일체상을 여이려면 이 마음을 붙잡아 놓아야 하고, 이 마음을 붙잡아 놓으려면 이 마음을 붙잡아 매일 주처, 즉 머물러 있을 곳을 정하여 놓아야 한다. 이 마음의 주처를 정하여 잡아매지 않고는 시끄러워 살수가 없는 것이다. 시끄러운면 편아치 못하고 편안치 못하면 괴로웁고, 괴로우면 잘사는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이겨의 법문이 맨 첫머리에서 수보리가, 부처님께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 하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경 전부가 이 뜻을 묻고 이뜻을 대답한 것으로 마치는 것이니, 부처님이 일체중생을 하나도 남김없이 잘 살도록 건지려는 대자대비심이, 이토록 간절하심을 잘 알수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떻게 이 마음을 어데다 붓잡어 매어 그 주처를 정하여 줄것인가. 이것이 우리들이 잘 살아 보려는데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당연히 일체상을 떠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여야 한다]고. 다시 말하면 육진 경계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주한바 없는 마음을 내라는 말씀이시다.

또 다시 자세히 말하면, 크고, 작고, 밝고, 어둡고, 밉고, 곱고, 깨끗하고, 더러웁고, 치하고, 서먹하고, 착하고, 악하고, 괴로웁고, 즐겁고, 지혜있고 미련하고 성현이고, 범부이고, 참이고, 거짓이고, 상이고, 상아니고, 쓰고, 못 쓰고, 고르고, 옳고 낳고 죽고 이러한등, 모든 일체 상을 여이고, 그 마음을 쓰라는 말씀이시다.

이 소이는 무엇인가 하면, 이 법이 본래 정해진 법이 없고, 이 마음이 본래 정해진 마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마음이 어데 한군데나, 한 물건에나 주하고 있다 하면, 이것은 이 마음의 참 주처가 못되는 것이니, 마음의 주처는, 무주처가 주처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주라고 하는 말은, 무주에도 주함이 없는, 무주에 주하는 것이, 마음의 주처라는 말이니, 주가 없으므로 일체 상을 여이고, 주가 없으므로 일체 상을 놓아 두게 될새, 우리들의 마음을 이 무주에다 붙잡어매어, 놓으면, 이것이주가 된다. 주가 된다는 말은, 마음이 제 자리에있게 된다는 뜻이니, 마음이 제 자리에 있게되면, 종일 먹어도 먹는 것이아니요, 종일 입어도 입는 것이 아니요, 종일 가도 가는 것이 아니요, 종일 울어도 우는 것이 아니요, 종일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요, 종일보아도 보는 것이 아니요, 종일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므로, 언제나 마음을 제자리 즉, 무주에 주하게 되는 것이다.

 

시고(是故) 불설(佛說) 보살심(菩薩心) 불응주색보시(不應住色布施)라하니라.

 이러므로 불이 말씀 하시되, 보살은 마음을 응당 색에 주 하지 않고, 보시한다 하니라.

수보리(須菩提) 보살(菩薩) 위이익일체중생(爲利益一切衆生) 응여시보시(應如是布施)니.

수보리야 보살이 일체중생을 이익되게하기 위하여 응당 이와 같이 보시 하나니.

※색에 주하는 것만 상이 아니라, 색에 주하지 않는다는 것도 상이니, 보시한다는 것도 상이며, 일체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는 것도 상이니, 어떻게 하는 것이 상에 주하지 않는 보시일까. 상이 상 아닌줄 알면, 이것이 곧 상에 주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상이 상 아닌 것이 되는가, 이 세계는 상 밖에 한 물건도 없기 때문이니, 상이다. 상 아니다, 하는 이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또 이 상이 어디서 나왔을가 모두가 이것이다. 이것도 이것이요, 저것도 이것이다. 산과 산, 물과 물이, 다 진여(眞如)아님이 없고, 꽃과 꽃, 풀과 풀이 무엇하나 반야가 아니랴! 마음만 제 자리에다 주하여 보라 무엇하나 딴 물것이 있을 것인가, 주한다 하여도 이것이요, 주하지 않는다 하여도 이것이요, 상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상이 아니라하여도 이것이요 상에 착한다 하여도 이것이요, 상을 여이었다 하여도 이것이요. 번뇌라 하여도 이것이요 보리라 하여도 이것이요, 거짓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참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열반이라 하여도 이것이오 생사라 하여도 이것이요, 지옥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천당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불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중생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있다 하여도 이것이요, 없다 하여도 이것이요 마음이라 하여도 이것이요 마음 아니라 하여도 이것이니, 이것 밖에는 한 물건도 없는 줄을 믿어서 알면, 이것이 곧 상이 상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일체 상으로써 보시할지라도, 이것은 부주상 보시임을 알아야 한다. 보살들은 일체 중생들을 위하여 허공과 같이 보시를 하나니라.

 

여래설일체제상(如來說一體諸相) 즉시비상(卽是非相) 우설일체중생(又說一切衆生) 즉비중생(卽非衆生)이니라.

 여래가 말한 일체 제상도, 곧 이 상이아니며, 또 말한 일체 중생도, 곧 중생이 아니니라.

 ※일체 제상도 상이 아니고, 일체 중생도 중생 중생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보리(須菩提) 여래(如來) 시진어자(是眞語者) 실어자(實語者) 여어자(如語者) 불광어자(不誑語者) 불이어자(不異語者)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이 참다운 말을 하는 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 자며, 같은 말을 하는 자며, 속이는 말을 않는 자며,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니라.

※이 말씀에서 부처님의 뜻이 어데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무엇 때문에 금강반야바라밀을 설하시었는가. 중생의 병이 있기 때문이다. 중생의 병이 어찌 하나 둘뿐이리요마는, 천병 만병의 근원이 집착하는데에서 원인이 된것이요, 집착하는 원인은 내가 있기 때문이니, 병을 고치는데는, 나를 놓아버리는 것 밖에는 아무 약이 없다.

그러나 이 약을 먹을 사람은 고금을 통하여 만에 하나 있기가 어려웁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나를 놓아버리면, 천하 만사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없으면, 좋은 음식도 못 먹고, 좋은 옷도 못입고, 좋은 물건도 못가지고, 좋은 벼슬도 못 살고, 애인도 못 보고, 즐거운 음악도 못 듣고, 좋은 법도 못 배우고, 아들도 없고 손자도 없고, 부처도 없고, 천당도 없을 것이데, 어떻게 나를 놓아버릴 수가 있을것인가 말이다. 정말로 나를 놓아버리기가 가장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약을 먹지 않고는 도저히 중생들의 병을 고칠 수가 없을새, 부처님께서 천언 만언으로써 이약을 먹이고저 노바심절,고구정녕(老婆心切苦口丁寧)하시었으니, 동쪽을 들어서 모르는 사람에게는 서쪽을 들어 말씀하시고, 서쪽을 보여도 모르는 사람에게는 남쪽을 보이시고, 남쪽을 일러 모르는 사람에게는 북쪽을 말하시며, 동서남북에 고집하여 모르는 사람에게는 동서남북이 없는 것을 들어 말씀하시고, 없는 것에 고집하는 자에게는 없는 것도 없다 말씀하시고, 상에 고집하여 상으로써 부처를 보려는 자에게는 상을 여이어사 를 보는 것을 말씀하시고, 상을 떠나서 부처가 따로 있는줄로 고집하는 자에게는 상이 곧 부처임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에 걸린 놈은 없는 약을 주시고, 없는 것에 체한 놈은 있는 약을 주시고 있도 없도 않은데 체한놈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한 약을 주시어, 하나도 일정한 약이 없고, 하나도 일정한 화제가 없는 것이, 이 경의 설법이시나, 요는 나를 놓아버리는데에 필요한 약방뭉이다. 나를 놓아 버리라 하심은 나를 놓아서 참으로 참나, 참으로 큰 나, 참으로 영원불멸인, 실다운 나를 얻기 때문이다. 이 얻음은 얻음이 없이 얻는 것이다. 이 대뭉에서 여래는 참 말을 하는자며 실다운 말을 하는 자며, 여여한 말을 하는 자며, 속이는 말을 않는 자며, 다른 말을 않는 자라고 다섯 번이나 말씀 하신데서, 우리들은 더욱 부처님의, 중생을 위하시는 간절하신 마음과 고심되는, 모습과 이법을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과, 중생들의 근기가 얼마나 열한가를 절실히 짐작할 수 있다. 참말은 말이 없는 것이어늘, 여래는 부득이 참 말이라고 말씀하시고, 참 말이라고만 하여도 중생이 믿지아니할가 염려 되시어, 또 사시 실다운 말이라고 하시고, 그래도 부족하여 여여한 말씀이라 하시고 그리고도 시원치 못 하여 속이는 말이 아니라 하시고, 그리고도 또 못 믿어 다른 말을 않는다고 당부를 하시었으니, 참말은 곧 실다운 말이요, 여여한 말이요, 속이지 않는 말이요, 다른 말이 아니어늘, 이렇게 다섯 번이나 같은 말을 중복하심은 이 토록 중생을 위하심이 간곡하신 뜻에서, 행여나 이 법을 믿지 않을가 하는 염려가 크시기 때문이다.

 

수보리(須菩提) 여래소득법(如來所得法) 차법(此法) 무실무허(無實無虛)니라.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바 법은 이법이 실도 없고 허도 없나니라.

※중생은 말만 떨어지면 병을 이루나니, 이것이 상을 여이지 못한 소이이다. 그러므로 실을 말하면 실병이 되고, 허를 말하면 허병이 될새, 실과 허가 둘다 없는 근본을 들어서 밝히시니, 실이 있으면 실아니 허가 있는 것이요, 허가 있으면 허아닌 실이 있는 것이니, 이 것은 마음을 주하는법이 못되는 것이요, 실과 허를 둘 다 놓아서, 이것이 참으로 마음을 주하는 법이요, 이것이 참으로 실과 허를 자유 자재로 쓰는 아뇩보리 법이요, 이것이 참으로 반야바라밀 법이요, 이것이 곧 우리들의 본 마음법인 것이다.

 

수보리(須菩提) 약보살(若菩薩) 심주어법(心住於法) 이행보시(而行布施) 여인입암(如人入闇) 즉무소견(卽無所見) 약보살(若菩薩) 심불주법(心不住法) 이행보시(而行布施) 여인유목(如人有目) 일광명조(日光明照) 견종종색(見種種色)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주하여 보시를 행하면 사람이 어둔데 들어감에, 보이는 바가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보살이 마음을 법에 주하지 않고 보시를 행하면, 사람이 눈이 있고 햇빛이 밝게 비치어, 가지가지의 색을 보는 것과 같나니라.

※보는 것으로써 보는 것을 삼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많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써 보는 것을 삼으면 안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이니, 주하고, 주하지 않는 보시의 차이가 이 만큼 다른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수보리(須菩提) 당래지세(當來之世) 약유선남자(若有善男子) 선녀인(善女人) 능어차경(能於此經) 수지독송(受持讀誦) 즉위여래(卽爲如來) 이불지혜(以佛智慧) 실지시인(實知是人) 실견시인(悉見是人)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나니라

 수보리야, 마땅히 오는 세상에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있어, 눙히 이경을 수지독송하면, 곧 여래가 큰 지혜로써 이 사람을 다 알고, 이 사람을 다 보아, 한량이 없고 가 없는 공덕을 얻어 성취함이 된나니라.

※아무것도 없는 깨끗한 물에다 소금을 치면 짜고, 초를 치면 시고, 설탕을 풀면 달고, 쓴것을 넣으면 쓰고, 기름을 치면 고소하고, 고추를 넣으면 맵다. 그리하여 이 물을 마시는 사람들이 짜다, 시다, 달다, 쓰다, 고소하다, 맵다고, 제 각기 말하고 있으나, 물의 본 맛은 시고, 짜고, 맵고, 쓰고, 고소한 것이 아니요, 담담하여 아무맛도 없는 것이 물의 본 맛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 맛있는 물들을 즐겨 다투어 마시고, 이 아무 맛 없는 본 물의 본 맛을 즐기는 자는 매우 드물다.

이와 같이 아무 것도 섞지 않은 본연 청정의 법 아닌 법을 설한, 심심미묘한 이경을 수지독송하는 사람이야 말로, 물의 본맛을 즐기는 자이니, 이는 곧 자기의 깨끗한 본심을 증득한 사람이므로, 부처가 곧 이삶이다. 내가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나이기 때뭉에, 여래가 이 사람을 다 알고 다보아, 무량 무변의 공덕을 성취한다는 말씀이시다.

 

지경공덕분(持經功德分) 제십오(第十五)

수보리(須菩提) 약유선남자(若有善男子) 선녀인(善女人) 초일분(初日分) 이항하사등신보시(以恒河沙等身布施) 중일분(中日分) 부이항하사등신(復以恒河沙等身) 보시(布施) 후일분(後日分) 역이항하사등신(亦以恒河沙等身) 보시(布施) 여시무량백천만억겁(如是無量百千萬億劫) 이신보시(以身布施) 약부유인(若復有人) 문차경전(聞此經典) 신심불역(信心不逆) 기복(其福) 승피(勝彼) 하황서사수지독송(河況書寫受持讀誦) 위인해설(爲人解說)이리요.

 수보리야, 만약 어떤 선남자 선녀인이, 아침에 항하 모래와 같이 많은 몸으로 보시하고, 낮에도 다시 항하 모래와 같이 많은 몸으로 보시하괴, 저녁때에도 또한 항하 모래와 같이 많은 몸으로 보시하여, 이와 같이 한량 없는 백천만억겁을 몸으로써 보시 할지라도, 만약 다른 어떤 사람은이경전을 보고 신심으로 거슬리지 아니하면, 그 복이 저보다 승할 것이거늘 항차 이경을 등하고 수지독송하고, 남을 위하여 일러줌이겠는가

※이렇게 백천만억겁을 두고, 사람의 몸을 수생(受生)하기를 헤아릴수 없이 많이 한 그 몸으로, 승사공양(承事供養)하여 보시할지라도, 이 경을 얻어듣고, 진심으로 믿는 복덕만 못하다는 말씀이니, 더군다나 서사 수지독송(書寫受持讀誦)하고, 남을 위하여 일러주는 공덕이야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하신 부처님의 말씀이시다.

 

수보리(須菩提) 이요언지(以要言之) 시경(是經) 유불가사의(有不可思議) 불가칭량(不可稱量) 무변공덕(無邊功德)하나니.

 수보리야, 한 말로써 하자면, 이 경이 가히 생각할 수 없고, 가히 측량 할 수 없는 한없는 공덕이 있나니,

※아무리 부처님께서 천언 만언으로써 이 경의 공덕을 찬탄 하실지라도, 믿어지지 않는 것이니, 다만 자기 본심을 반조(返照)하여 스스로 얻음이 있기를 바란다. 물을 마시는 사람만이 차고 더운줄을 아는 것이다.

 

여래위발대승자설(如來爲發大乘者說) 위발최상승자설(爲發最上乘者說)이니라.

 여래가 대승을 발한 자를 위하여 설한 것이요, 최상승을 발한 자를 위하여 설한 것이니라.

※불교에는 대승소승(大乘小乘)이란 말이 있으니, 본래 이 자리는 대소, 고하가 없는 것이나, 사람의 근기에 따라 대 소승으로 비교한 것이니, 대승은 기차와 같고, 소승은 자전거와 같다. 기차는 대승을 위한 것이요, 자전거는 소승을 위한 것이다. 나도 건지고 남도 건지는 것은 대승이요, 나만을 건지려고 하는 것은 소승이다.

이 법을 수행함에 있어, 상에 집착하여 닦는 것은 소승이요, 상을 여이고 닦는 것은 대승이다. 지옥을 싫어하고 천당을 좋아하여, 닦는 것은 소승이요, 천당과 지옥이 둘 아닌 것을 알고 닦는 것은 대승이다.

여기 최상승(最上乘)이란 말이 있으니, 배움도 없고, 함도 없어 망상을 제하지도 않고, 참을 구하지도 않는 것은 최상승이다.

그런데 이 경은 대승심을 발한 자와 최상승심을 발한 자를 위하여 설한 것이라고 하셨다. 과연 그렇다. 나무을 얻어 가지 만지기가 기특한 일이 아니라, 천만 길 되는 절벽에서 붙잡았던 손을 탁 놓아버리는 것이, 장부의 일인 것이다. 조그마한 뱁새가 어찌 대붕(大鵬)의 뜻을 알 수가 있으랴.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을 내딛여야한다.

 

약유인(若有人) 능수지독송(能受持讀誦) 광위인설(廣爲人說) 여래(如來) 실지시인(實知是人) 실견시인(悉見是人) 개득성취불가량(皆得成就不可量) 불가칭(不可稱) 무유변(無有邊) 불가사의(不可思議) 공덕(功德) 여시인등(如是人等) 즉위하담여래(卽爲荷擔如來)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수지독송하고, 남을 위하여 일러주면, 여래가 이 사람을 다알고, 이 사람을 다 보아 헤아릴 수 없고, 일커를 수 없고, 한없는, 가히 생각지 못할 공덕을 다 얻어 성취하리니, 이러한 사람들은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짊어진 것이 되나니라.

※이 경을 능히 수지독소하고, 여러 사람을 위하여 일러주는 사람은, 이가 곧 여래의 둘도 없는 가장 잘 사는 법을 자신 있게 짊어지고, 몸을 바쳐가며 전법도생(傳法度生)을 하는 대승 보살이니, 작은 선(善)에나 집착하여 지옥을 피하고, 천당을 원하며,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소승 따위의 유가 아니다.

 

하이고(何以故) 수보리(須菩提) 약요소법자(若樂小法者) 착아견인견중생견(着我見人見衆生見) 수자견(壽者見) 즉어차경(卽於此經) 불능청수독송(不能聽受讀誦) 위인해설(爲人解說)이니라.

 어찌한 연고이냐, 수보리야. 만약 작은 법을 좋아하는 자는, 아견과 인견과 중생견과 수자견에 착하여, 곧 이 경을 능히 알아듣고, 읽고, 외운다든지 남을 위하여 해설하여 주지 못하느니라.

※소승은 항상 나(소아(小我))를 근본으로 하여 수행하기 때문에 사상(四相)의 견해(見解)를 여이지 못하고, 상(相)있는 작은 과(果)를 좋아하므로, 감히 과가 없는 불과(佛果)를 얻음이 없이, 얻을 생각을 하지못하므로,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는, 이 경이, 귀에 들어가지를 않기 때문에, 읽어 외울 생각도 없거니, 어찌 자기도 모르는 것을 남에게 일러 줄 수가 있을 것인가 말이다.

 

수보리(須菩提) 재재처처(在在處處) 약유차경(若有此經) 일체세간(一切世間) 천인아수라(天人阿修羅) 소응공양(所應供養) 당지차처(當知此處) 즉위시탑(卽爲是塔) 개응공경(皆應恭敬) 작례위요(作禮圍遶) 이제화향(以諸華香) 이산기처(而散其處)하니라.

 수보리야,ㅣ 간데마다 만약, 이 경만 있으면, 일체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가, 응당 공양하는 바이니, 마땅히 알라, 이곳은 곧 탑묘가 됨이니, 응당 다 공경하여, 예를 지어 둘러 싸며 모든 꽃과 향으로써 그 곳을 흩어 덮나니라.

※그러므로 알아라, 수보리야, 어느 곳을 막론하고, 이 경의 진리를 신해수지 하는 이만 있으면, 이 곳이 곧 부처가 계시는 도량인지라 모든 세간의 하늘이며, 사람이며, 아수라들이, 다 모아 공양하며, 받들고 절하고 에워싸고, 꽃이며 향으로써, 그 곳에다 흩어놓게 된다는 말이시다. 관세음보살 마하살 성불합시다._()()()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 제십육(第十六)

부차수보리(復次須菩提) 선남자(善男子) 선녀인(善女人) 수지독송차경(受持讀誦此經) 약위인경천(若爲人輕賤) 시인(是人) 선세죄업(先世罪業) 응타악도(應墮惡道) 이금세인(以今世人) 경천고(輕賤故) 선세죄업(先世罪業) 즉위소멸(卽爲消滅) 당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다시 또 수보리야, 선남자 선녀인이 이경을 수지독송하므로, 만약 남에게 친히 여김이 되면, 이 사람은 선재 죄업으로 응당 악도(惡道)(지옥, 아귀, 축생)에 떨어질 것이로되, 이세상 사람이 천히 여김으로써, 선세의 죄업이 곧 소멸되고,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라.

※이 경을 수지독송함으로 인하여, 만약 남에게 경멸과 천대를 받는 일이 있다면, 이 사람은 전세에 지은 죄업이 중한 소이로, 악도(惡道)에 떨어질 것이나, 이 세상 사람이 경천히 하는 고로, 악도에 떨어질 과(果)를 경천으로 대신받고, 곧 선세업장(先世業障)이 소멸되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것이니라는 말씀이시다.

 

수보리(須菩提) 아념과거무량아승지겁(我念過去無量阿僧祗劫) 어연등불전(於燃燈佛前) 득치팔백사천만억나유타제불(得値八百四千萬億那由他諸佛) 실개공양승사(悉皆供養承事) 무공과자(無空過者) 약부유인(若復有人) 어후말세(於後末世) 능수지독송차경(能受持讀誦此經) 소득공덕(所得功德) 어아소공양제불공덕(於我所供養諸佛功德) 백분불급일(百分不及一) 천만억분(千萬億分) 내지(乃至) 산수비유(算數譬喩) 소불능급(所不能及)이니라.

 수보리야, 내가 생각하니 과거 무량아승지겁에, 저 연등불전에, 팔백사천만억나유타 모든 부처님을 얻어 만나, 다, 공양하고 받들어, 그저 지냄이 없었으나,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이후 말세에 능히 이 경을 수지독송하여, 얻은바 공덕에 비하면 내가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바, 공덕으로는 백분의 하나도 미치지 못하여, 천만억분 내지 숫자의 비유로는, 능히 미치지 못할 바이니라.

※아승지(阿僧祗)는 인도에서 끝없는 수를 말함이요, 나유타(那由他)는 천만 혹은 천억이라고 한다. 내가 무량 아승지겁에 연등부처님 처소에서, 모든 부처님에게 공양승사(供養承事)한 공덕이, 이 경을 능히 수지독송한 사람의 공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이시다.

고인의 말씀에, 백천 제불에게 공양하는 것이, 한낱, 무심 도인에게 공양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부처를 다른데서 찾지 말고 내게서 알아보라.

독자여! 이 경을 문자로나 책으로 알지 말라. 그리고 아는 것으로써 알지 말라, 부처님이 중생을 위하여 아무리 천언만 어로써 이 경의 공덕을 횡야설 수야설(橫也說竪也說)할지라도, 사람이 먼저 자기 자성을 반조(返照)하여 깨닫기 전에는, 부처님의 그토록 핍진하신 말씀도, 한같 노이무공(勞而無功)의 허언에 돌아가고 말 것이다.

 

수보리(須菩提) 약선남자(若善男子) 선녀인(善女人) 어후말세(於後末世) 유수지독송차경(有受持讀誦此經) 소득공덕(所得功德) 아약구설자(我若具說者) 혹유인문(或有人聞) 심즉광란(心卽狂亂) 호의불신(狐疑不信)하리니.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저 후말세에,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이가 있어, 얻은바 공덕을 내가 만일 다 말하게 되면, 혹 어떤 사람은 듣고 마음에 곧 겁이나서, 의심하고, 믿지 않을 것이니라.

※지금도 방금 이 경의 공덕을 말하였지마는, 어찌 이뿐이겠는가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을 내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갖추어 말할것 같으면, 죄업이 중하고 박복한 중생들은, 이말을 듣고 겁내고, 놀랫여, 미치고 여우같은 의심을 내어, 잘 믿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시었다.

 

수보리(須菩提) 당지(當知) 시경(是經) 의(義) 불가사의(不可思議) 과보(果報) 역불가사의(亦不可思議)니라.

 수보리야, 마땅히 알아라. 이 경은 뜻도 가히 사의치 못하며, 과보도 또한 가히 사의할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 경의 공덕은 말로나 문자로나 어떠한 산수 비유(算數譬喩)로나 사의 상량(思義商量)으로써 어떻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최후에 한 말씀으로, 이 경의 뜻은 사의 할수도 없고, 이 경의 뜻을 깨어 얻은 과보는 사의 할 수없는 것이라고 결론하시었다. 이 대문까지 금강경의 상권 범문이 끝난 것이다. 법은 하나이지마는, 대중의 근기는, 우열심천(優劣深淺)이 달라, 대개 세가지로 나눈다면, 상근, 중근, 하근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이 경 첫머리에 [세존께서 공양하실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들으시고, 사위대성(舍衛大城)에 들어가시어 그 성중에서 밥을 빌어 가지고, 본처로 돌아오시와 공양을 끝내시고, 의발을 거두시고,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펴고 앉으신데 까지는 상근을 점한 말 없는 말, 곧 일상 생활에 하시는 평범한 행동으로써 보이신 것이다.

그 다음에 이뜻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불가불 말이 없을 수 없으니, 수보리와 부처님 사이에 벌어지게 된 것이다. [선남자 선녀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이는, 응당 어떻게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으오리까]로부터[수보리야, 이른바 불법이란 자는, 곧 불법이 아니니라], 까지는 중근을 점한 말씀이시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부터 상권 끝까지는 하근을 점한 말씀시라고 생각한다...나무아미타불...()()()

 

구경무아분(究竟無我分) 제십칠(第十七)

이시(爾時) 수보리(須菩提) 백불언(白佛言) 세존(世尊) 선남자(善男子) 선녀인(善女人)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운하응주(云何應住) 운하항복기심(云何降伏其心)이니까.

 저 때에,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루어 말씀하되,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녀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였아오니, 어떻게하여 마땅히 머물도록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으오리까.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의 고구정녕하신 불법을 듣고, 수보리와 및 대중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 어떠한 경인 것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이 어떠한 법 인것과 또 이 경을 수지독송하는 공덕이 얼마나 큰 것을 깨쳐, 이 법의 희열을 크게 감탄하게 되었으며, 자기가 여래 인것도 잘 증득(證得)하였다. 그러나 한가지 실망되는 점이 있었으니, 이것이 무엇일까.

이(理)치로는 비록,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확실히 깨어 얻었으나, 일(事)은 이치와 합일되지 않는 점이다. 마치 대와 죽순과 같이, 대는 똑같은 대이지마는, 죽순을 가지고는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죽순이 대 되는 것이요, 소나무가 대 되는 것은 아니니 죽순만 되면 대 되는 것은 시일만 걸릴 뿐이다.

이와 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치로는 알았으나, 행으로는 이치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말로는 나도 부처와 같이 행할 수 있지마는 행(行)은 부처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아(我)가 공(空)하고, 법(法)이 공(空)하고, 공 한것까지 공 한줄도 잘 알지만, 항시 상에 착하기가 쉽다는 말이다. 눈에 아무 경계도 보이지 않고, 귀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히 앉아 있을 때에는, 나도 없고 남도 없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깨끗한 부처 이지마는, 바람이 치불고, 비가 퍼붓고, 집이 떠내려가고, 번개가 번쩍하고, 우뢰가 소리하고, 천지가 진동 할 때에는 공포심이 일어나고,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생긴다는 말이다. 아무 일 없는 평시에는, 모두 자타가 없는 것 같지마는, 탐진치(貪嗔痴)의 경계를 당하여 보면, 사상(四相)에 착되고 만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중생을 건지시고저, 그 토록 친절 정녕히 갖은 수단과 갖은 방평으로 상, 중, 하근기를 다 맞추어 정한 법이 없는, 가장 잘 사는, 아뇩보리법을 보여주셨거늘, 누가 제게 있는 제 보리를 보지 못할 사람이 있으며, 제게 있는 제경을 깨지 못할 사람이 누구일 것인가.

그러나 고인의 말씀에도, 얻기는 쉬워도 지키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이 말은, 알기는 쉬워도, 안 것과 같이 행하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과연 그렇다. 일생을 두고 수행을 하였다는 이들 중에도, 이(理)와 사(事)가 같지 않고, 아는 것과 행이, 하나가 못되고, 말과 행이 다른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선지식 아닌 것은 아니니, 법을 배우는 자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여야 한다. 지(知)와 행(行)이 일치 되는 것은 깨친 사람으로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오랜 세상을 두고, 다생 다겁으로 내려오면서, 익힌 습기(習氣)라는 것은, 일조일석에 전부 제(除)하여지는 것이 아니므로, 다생(多生)을 두고 닦고 닦아야 제하여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러하므로, 상권 법문에서 수보리와 및 대중은 아뇩보리를 깨어얻어, 본래 주가 없는 마음을 무주에 주할 것을 알았으나, 깨친 바와 같이, 무주(無住)가 않되고 경계를 대하면 곧 상(相)에 주하게 되므로, 다시 부처님에게 똑같은 말로써 물었으나, 뜻은 다른 것이니, 상권에서는, 마음을 주하는 이치를 물은 것이요, 하권에서는 행을 물은 것이다. 행을 떠나서 이치가 없고, 이치를 떠난 행이 없으나, 이(理)와 행(行)을 구별하여 보면 그러하니, 행은 이치의 증거이기 때문에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 증거를 보이지 않고 말로만 설하여서는, 잘 믿어지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필자의 생각에는, 상권에서는 이(理)를 밝히고, 하권에서는 행(行)을 밝힌 것이라고 한다.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 약선남자(若善男子) 선녀인(善女人) 발아뇩다라(發阿耨多羅) 삼먁삼보리심자(三藐三菩提心者) 당생여시심(當生如是心) 아응멸도일체중생(我應滅度一切衆生) 멸도일체중생이(滅度一切衆生已) 이무유일중생(而無有一衆生) 실멸도자(實滅度者)니라.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사대,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자일진데,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이 나리라. 내가 응당 일체 중생을 멸도하였으나 일체 중생을 멸도하고 나서는, 실은 한 중생도 멸도 된자가 없다 하리라.

 

하이고(何以故) 수보리(須菩提) 약보살(若菩薩) 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 즉비보살(卽非菩薩)이니.

 어찌한 연고이냐,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으면, 곧 보살이 아니니라.

 

소이자하(所以者何) 수보리(須菩提) 실무유법(實無有法) 발아뇩다라(發阿耨多羅) 삼먁삼보리심자(三藐三菩提心者)니라.

 어찌한 까닭이냐.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자가 없나니라.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친자는, 자기 자심에서 생기는, 모든 번뇌인, 일체 중생을 제도 할 것이다. 이 모든 중생을 하나도 남김 없이 멸도하고 나면, 멸도를 받는한 번뇌 중생도 없을 것이니, 본래 한 법도 없는 것을 깨친자가, 곧 아뇩보리를 깨친자이기 때문이다. 깨친자는 깨침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 중생, 수자상이 있으며, 어찌 보살이라 할 것인가.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여래(如來) 어연등불소(於燃燈佛所) 유법득(有法得) 아뇩다라삼먁삼보리부(阿耨多羅三藐三菩提不) 불야(不也) 세존(世尊) 여아해불소설의(如我解佛所說義) 불어연등불소(佛於燃燈佛所) 무유법득(無有法得)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가 연등불소에서, 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내가 부처님 말씀하신 뜻을 아는바 같아서는, 부처님께서 연등불소에서, 법이 있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아뇩보리는 실로 법이 있지 않음을, 더 한번 분명히 믿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과거사를 증거로 들어, 여래가 연등스승님 처소에서 무슨 법이 있어, 아뇩보리를 얻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때에 수보리는 곧 아니라고 대답하였으니, 이는 자기의 증득(證得)한 바나, 실로 법이 있지 않는고로 아뇩보리를 얻었다고 여쭈었다.

 

불언(佛言) 여시여시(如是如是) 수보리(須菩提) 실무유법(實無有法)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사대, 그렇고 그렇다, 수보리야, 실로 법이 있지 아니할새, 여래가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니라.

※이는 부처님께서 수보리 말씀을 인가하시어 암, 그렇고말고, 옳다, 옳다, 하신것이다.

 

수보리(須菩提) 약유법(若有法)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자(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 연등불(燃燈佛) 즉불여아수기(卽不與我授記) 여어래세(汝於來世) 당득작불(當得作佛) 호서가모니(號釋迦牟尼) 이실무유법(以實無有法)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시고(是故) 연등불(燃燈佛) 여아수기(與我授記) 작시언(作是言) 여어래세(汝於來世) 당득작불(當得作佛) 호서가모니(號釋迦牟尼)라하시니라.

 수보리야 만약 법이 있어,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진대, 연등불이 곧 나에게 수기를 주어, 네가 오는 세상에 마땅히 불(佛)을 짛을지니, 호를 서가모니라 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나, 실로 법이 있지 아니함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새, 이런고로 연들불이 나에게 수기를 주시되, 네가 세상에 마땅히 부처가 될 것이니, 호를 서가모니라 하라고, 이런 말씀을 하셨느니라.

※연등불은 과거 서가모니불의 스승이요, 서가모니는 능히 어질고 고요하여 묵묵하다는 뜻이다. 실로 법이 있지 않다 함은 법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 물건도 취 하지 않고, 한물건도 버리지 않는 것이 실로 법이 있지 않는 아뇩보리다.

 

하이고(何以故) 여래자(如來者) 즉제법여의(卽諸法如義) 약유인(若有人) 언(言) 여래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須菩提) 실무유법(實無有法) 불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佛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어찌한 연고이냐, 여래라함은 곧 모든 법이 같다는 뜻이니, 설사 사람이 있어 말하되,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할지라도, 수보리야, 실로 불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법이 있지 않느니라.

※여래라는 것은 같다는 뜻이니, 있고 없는 것이 같고, 기쁘고 슬픈 것이 같고, 괴로복 즐거운 것이 같고, 낳고 죽는 것이 같고, 생사와 열반이 같고, 번뇌와 보리가 같고, 부처와 중생이 같아서, 모든 법이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으므로 같고, 같으므로 하니이고, 하나이므로 하나라는 수(數)도 서지 않는다. 말하자면, 일여하다 하여 여래이다. 그러므로 따로 얻을바 아뇩보리법이 없다는 말이다.

 

수보리(須菩提) 여래소득(如來所得)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 어시중(於是中) 무실무허(無實無虛)니라.

 수보리야, 여래의 얻은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 가운데에는 실도 없고 허도 없나니라.

※한 물건도 취하지 아니하므로, 실다움이 없고, 한 물건도 버리지 아니하므로, 헛됨이 없다는 말씀이시니, 이것을 깨친 것이, 얻을 것 없는 아뇩보리를 얻으신 것이 된다.

 

시고(是故) 여래설일체법(如來說一切法) 개시불법(皆是佛法)이라 하나니라.

 이런고로 여래가 말씀 하기를, 일체 법이 다 이 불법이라고 하니라.

※삼라만상 가지가지의 형형색색 있고 없는 것, 알고 모르는 것, 내지 허공까지라도 모두 이 법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니, 이 법이기 때문에, 일체 법이 다 이 불법이라고 말씀하시 것이다.

산 푸르고 물 흐르는 것도 이것이요, 구름가고 달 오는 것도 이것이요, 잎 떨어지고 꽃 피는 것도 이것이요, 꾀꼬리 노래하고, 제비 지저귀는 것도 이것이요. 비행기 날고, 기차 달리는 것도 이것이요, 인공위성과 로켓트도 이것이요, 원자탄, 유도탄도 이것이요, 치고, 받고, 싸우는 것도 이것이요, 웃고, 즐기고, 좋아하는 것도 이것이요, 음탕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것도 이것이요, 계(戒)와 정(定)과 혜(慧)도 이것이요, 정치, 경제, 종교, 문화가 이것이요, 민주주의, 공산주의가 이것이요, 내가 지금 사경하는 것도 이것이요, 독자들이 책을 보고 한줄 한줄씩 읽는 것도 이것이다. 무엇하나 이 밖에 또 다른 것이 있을 것인가. 이러므로 일체 법이 다 불법인 것이니, 불법을 욕하는 것도 불법이요, 불법을 찬하는 것도 불법이라, 불법 외에는 다시 한 물건도 없는 것이다.

 

수보리(須菩提) 소언일체법자(所言一切法者) 즉비일체법(卽非一切法) 시고(是故) 명일체법(名一切法)이니.

 수보리야, 말한바 일체 법이라 한자는 곧 일체법이 아니라, 이런고로 이름이 일체 법이니라.

※말하자니, 일체법이라 한 것이요, 이름하자니, 일체법이라 하였을지언정, 일체법이 일체법이 아니니, 말과 이름에 따라다니지 말라 일체 법에 착할가 두려워 하신 말씀이시다.

 

수보리(須菩提) 비여인신장대(譬如人身長大) 수보리언(須菩提言) 세존(世尊) 여래설인신장대(如來說人身長大) 즉위비대신(卽爲非大身) 시명대신(是名大身)이니이다.

 수보리야, 비컨대 사람의 몸이 장대하다는 말과 같으니라. 수보리, 말씀하되,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인신장대하고 하심은, 곧 큰 몸이 아니라, 이 이름이 큰 몸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하는 말에, 아무개는 사람이다. 대인이다, 하는 말을 하나니, 이것은 그 사람의 키가 큰 것을 말 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지혜나, 덕이나, 도량이 큰 것을 지칭하는 대명사임을 알면 따로 강의할 것이 없다.

 

수보리(須菩提) 보살(菩薩) 역여시(亦如是) 약작시언(若作是言) 아당멸도무량중생(我當滅度無量衆生) 즉불명보살(卽不名菩薩) 하이고(何以故) 수보리(須菩提) 실무유법(實無有法) 명위보살(名爲菩薩) 시고(是故) 불설일체법(佛說一切法) 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라하시니라.

 수보리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만약 이러한 말을 하되 내가 마땅히 무량중생을 멸도 하였다 하면, 곧 보살이라 이름하지 못할지니라. 어째서 그러하냐 하면, 수보리야 실로 법을 두지 아니함이, 이름이 보살이 되나니라. 이런고로 부처님 말씀하시되, 일체법이 나도 없고 남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다 하니라.

※보살은 자기 본심을 알아 일체법에 통달 무애한 것이어늘, 멸도한 내가 있고, 멸도 받은 중생이 있고, 멸도 시킨 법이 있고, 이를 즐기는 마음이 있으면, 이것이 곧 상이니 걸림이 있는 보살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처가 말하기를 일체법이 나만 없으면, 남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다 한 것이다.

 

수보리(須菩提) 약보살(若菩薩) 작시언(作是言) 아당장엄불토(我當莊嚴佛土) 시불명보살(是不名菩薩) 하이고(何以故) 여래설장엄불토자(如來說莊嚴佛土者) 즉비장엄(卽非莊嚴) 시명장엄(是名莊嚴)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이러한 말을 하되 내가 마땅히 불국토를 장엄하였다 하면 이는 보살이 아니니, 어찌한 연고이냐. 여래가 말씀한 불국토의 장엄은, 곧 장엄이 아니요, 이 이름이 장엄이니라.

※장엄이라는 것은, 좋게 단장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연지 찍고 분 바르는 것으로 알지 말라. 그리고 향등 화촉(香燈 花燭)을 밝히는 것으로도 알지 말라. 불국토의 장엄은 자기 본심의 장엄이니, 본심의 장엄은 한법도 서지 않는 청정본연의 장엄인 것이요, 장엄이란 이름도, 더러운 때가 되는 것이다.

 

수보리(須菩提) 약보살(若菩薩) 통달무아법자(通達無我法者) 여래설명진시보살(如來說名眞是菩薩)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내가 없는 법을 통달한 자이면, 여래가 말하기를 참으로 이것이 보살이라 이름하나니라.

※무아법(無我法)을 통달(通達)한 자라야, 참으로 이것이 보살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아법이란 내가 없는 법이니, 내가 없으면 법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아뇩보리는 쉽게 말하여 잘 사는 법이라고 하였는데, 누가 있어 잘 살며, 잘 사는 법이 설사 있다한들 누구에게 필요하느냐 말이다. 여기서 먼저 무아법을 깊이 알아야 할 것이니 지금까지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 전부 무아를 말씀하셨으므로, 보살들은 이미 무아법을 깨쳐 알았을 줄로 생각하거니와, 내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큰나(大我) 참나(眞我)를 뜻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가장 잘 사는 부자가 되려면 먼저 가장 못 사는 가난뱅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니, 한 물건도 갖지 아니한 자가 가장 간뱅이요, 한 물건도 없는 것 없이 다 가진 것이 가장 부자일 것이다.

저 허공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우주 삼라 만상을 하나도 버림없이, 다 가진 부자가 아닌가. 허공이 이처럼 가장 크게 소유한 것은, 터럭도 없이 비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뇩보리를 성취할 사람은, 티끌 하나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

가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까지도 마저 없어야 한다. 이것이 무아법, 즉 내가 없는 법이다. 무아법은 이러하거니와, 이 법을 알았다하여 보살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저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하권 법문은 이보다 행에 더 치중하여 착안하신 법문이시다. 그러므로 무아법을 통달한 자라야 보살이라 하셨으니, 통달(通達)이라는 두 글자가 매우 중요한 말씀이시다.

깨침과 같이, 얻음과 같이, 무아법을 그 이치와 같이 걸림이 없이, 때를 따라, 처소를 따라, 자유자재로 무아법을 사용하는 것이 통(通)한 것이요, 이 법으로 목적지인 피안에 이르는 것이 달(達)이 된다. 예를 들면, 국가들 위하고, 민족을 위하고, 사회를 위하고 전 세계 인류의 유익과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희생한 의인 열사, 혁명가, 학자, 예술가, 성현들과 발명가들이 곧 무아법을 통달한 사람들이다. 이들이야말로 내가 없는 법을 알아, 내가 없는 법과 같이 내가 없는 행을 한 전체인 나, 참 나의 영원불멸의 생인 것이니, 어찌 오척단구(五尺短軀)인, 작은 나에 탐착하여 오욕락(五慾樂)을 즐기는, 하루 살이의 구구한 못난 생(生)에 비할바이겠는가. 그러므로 이 무아법인, 아뇩보리를 행하는 사람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일체동관분(一體同觀分) 제십팔(第十八)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여래유육안부(如來有肉眼不) 여시(如是) 세존(世尊) 여래유육안(如來有肉眼)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여래유천안부(如來有天眼不) 여시(如是) 세존(世尊) 여래유천안(如來有天眼)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여래유혜안부(如來有慧眼不) 여시(如是) 세존(世尊) 여래유혜안(如來有惠眼)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여래유법안부(如來有法眼不) 여시(如是) 세존(世尊) 여래유법안(如來有法眼)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여래유불안부(如來有佛眼不) 여시(如是) 세존(世尊) 여래유불안(如來有佛眼)이니이다.

 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냐, 여래가 육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육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냐. 여래가 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생각에 어떠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혜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혜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법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법안이 있습니다. 수보리야 생각에 어떠하냐. 여래가 불안이 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가 불안이 있습니다.

※육안은 일체 유형(有形)의 색상(色相)을 한계 안에서 보는 눈이요, 천안은 가까운 한계가 없이, 중생들의 모든 사물과 업보등을 보는 눈이요, 혜안은 중생들이 모든 근기와 경계를 살피는 눈이요, 법안은 일체법의 실다운 상을 걸림없이 보는 눈이요, 불안은 오안이 구족하여, 시방을 두루 보나, 보는자도 없고, 보이는 경계도 없이, 보는 눈이다.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여항하중소유사(如恒河中所有沙) 불설시사부(佛說是沙不) 여시(如是) 세존(世尊) 여래설시사(如來說是沙)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여일항하중소유사(如一恒河中所有沙) 유여시사등항하(有如是沙等恒河) 시제항하소유사수(是諸恒河所有沙數) 불세계(佛世界) 여시(如是) 영위다부(寧爲多不) 심다(甚多) 세존(世尊)이시여.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항하 가운데 있는바 모래와 같이라고 부처가 이 모래를 말씀한적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이모래 말씀을 하셨습니다. 수보리야 생각이 어떠하냐 한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와 같이, 이와같은 모래등의 항하가 있고, 이 모든 항하에 있는바, 모래 수대로 불세계가 있다하면 진실로 많다 하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많은 수를 말씀하실 때에는 항시 항하 가운데 있는 모래를 비유로 드시었는데, 이번에는 이 항하 가운데에 있는 모래 수대로 항하가 또 그렇게 많이 있고, 또 그 항하마다 낱낱이 깔려있는, 모래 수와같이 많은 불세계(佛世界)가 있다 하면, 어떠하냐 하고 그 엄청나게 많은 불세계를 말씀하심에, 수보리는 즉시 많다고 여쭈었다.

 

불고수보리(佛告須菩提) 이소국토중(爾所國土中) 소유중생(所有衆生) 약간종심(若干種心) 여래실지(如來悉知) 하이고(何以故) 여래설제심(如來說諸心) 개위비심(皆爲非心) 시명위심(是名爲心)이니.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사대, 저곳 국토 가운데에 있는바, 중생의 여러 가지 마음을 여래가 다 아나니, 어찌한 연고이냐 여래가 말한 모든 마음이 다 마음이 아니요 이 이름이 마음이 됨이니라.

※수보리야, 그와 같이 많은 불세계 가운데에 있는 가지 가지 중생들의 가지 가지 마음들을 여래가 다 아나니, 여래가 다 아는 소이가 무엇이냐. 여래가 말한바 마음이라는 것은, 마음이 아니고, 이름이 마음이 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마음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항하 모래 수와 같이 많다. 사람은 사람 마음, 하늘은 하늘 마음, 귀신은 귀신마음, 짐승은 짐승의 마음, 새는 새마음, 고기는 고기마음, 벌레는 벌레 마음, 오는 놈은 오는 마음, 가는 놈은 가는 마음, 앉은 놈은 앉은 마음, 섯는 놈은 선 마음, 누운 놈은 누운 마음, 웃는 놈은 웃는 마음, 우는 놈은 우는 마음, 기쁜 놈은 기쁜 마음, 슬픈 놈은 슬픈 마음, 분한 놈은 분한 마음, 참는 놈은 참는 마음, 어진놈은 어진 마음, 악한 놈은 악한 마음, 부한 놈은 부한 마음, 가난한 놈은 가난한 마음, 부지런한 놈은 부지런한 마음, 게으른 놈은 게으른 마음, 큰놈은 큰 마음, 작은 놈은 작은 마음, 둥근 놈은 둥근 마음, 모난 놈은 모난 마음, 긴 놈은 긴 마음, 짧은 놈은 짧은 마음, 밝은 놈은 밝은 마음, 어두운 놈은 어두운 마음, 푸르고, 누르고, 붉고, 희고, 검고, 이루 헤아릴수없는, 수많은 마음들을 그 많은 중생들이 가지고 있다. 이 많은 마음을 여래가 다 안다 함은, 여래의 마음이 곧 중생의 마음이요, 중생의 마음이 곧 여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마음이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마음으로 화하고,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이 많은 마음이 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다시 또한 마음은 이름도, 형상도, 냄새도, 그림자도 없기 때문에 마음도 아닌 것이다.

 

소이자하(所以者何) 수보리(須菩提) 과거심(過去心) 불가득(不可得) 현재심(現在心) 불가득(不可得) 미래심(未來心) 불가득(不可得)이니라.

 어찌한 소이이냐, 수보리야, 지나간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으며, 현재의 마음도 가히 얻을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가히 얻을 수 없음이니라.

※마음, 마음 하지마는 마음을 찾아보면, 마음이 실로 없다. 위에서 항하모래수와 같이 많은 중생들의 가지가지 많은 마음들을 들어서 말하였으나 이것은 다만 말이고, 이름일뿐, 과연 어떤 것이 실로 마음이냐고, 그 실상을 되잡아 물으면, 이것이라고 명확히 보여줄 것이 없다. 연기 나느 것을 보고 불이 있을 것을 짐작 할 수 있으나, 연기는 연기일 뿐이고, 정작 불은 아닌 것과 같이, 중생들의 가지 가지 항하사 모래 수와 같은 씀씀이를 보고, 이것이 모두 마음의 조화인 줄은 짐작 되나, 이것이 정작 참 마음은 아닌 것이다. 마음, 마음 하지마는 이 참 마음을 아는이는 오직 부처 한 사람뿐이다. 아니, 이 부처도 참 마음은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법은 모르는데 이르기까지가 구경 목적(究竟目的)이다. 나는 이런말들을 사람들에게 가끔 하고 있다. 다른 모든 학문이나, 지식은, 모르는데서 출발하여 아는데 그치고 말지마는, 불법은 아는데서 출발하여, 모르는데 이르는 것이 구경 목적이라고 한다.

독자여! 이것이 말이 되었는가 아니면 말인가를 한번 생각하여 보라.

알기는 쉬워도, 모르기가 정말 어려운 것이다. 팔만사천의 번뇌망상이모두 아는것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이 아는 것만 죽여버리면, 우리들의 얼마나 편안히 살 것인가. 참 마음이란 우리가 가진 본래 마음이다. 이 마음은 이름이 마음일뿐, 마음도 아닌 마음이다. 그러하거니, 무슨 지나간 마음, 현재의 마음 미래의 마음을 논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과거가 현재 현재가 미래이었으며 미래가 현재, 현재가 과거이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가 없거니, 무엇을 일러 과거 현재, 미래를 삼을 것인가, 이와 같이 마음도 마음이 아니요. 삼세도 말뿐이니, 삼세심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이시다.

여기서 독자 여러분에게 덕산선감선사(德山宣鑑禪師)의 이야기를 하여 드리고저 한다. 덕산선감선사라하면, 주금강(周金剛)이라는 별명을 가진 이로서 금강경으로는 무소부지로 통달하였다는, 자신 만만하신 스님이신데, 그때 남방에서 참선 공부를 하는 선지식들이 있어 문자를 세우지 않고, 바로 사람의 마음을 가르쳐,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도록 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사람들이 운집한다는 말을 듣고, 주금강이 생각하기를 이런 마구니들을 쳐부수어 불법을 바로잡으리라 결심하고, 자기가 손수 지은 금강경 소초(疏抄)를 짊어지고, 남방을 행하던중, 중로에서 떡 장사 노파를 만나게 되었었다. 때마침 한낮이어서 점심을 하고자, 노파에게 점심을 청하였더니 노파가 말하기를, 스님의 짊어진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주금강은 금강경소초(金剛經疏抄)라고 대답하였다. 노파는 다시 말을 이어, 스님에게 금강경에 있는 말씀을 묻고져 하니, 대답을 하여주시면 점심을 올리겠고, 대답을 못하시면 점심을 못드리겠다고 하였다. 이에 주금강은 무슨 말이고 금강경 말이면 물으라고 하였더니, 노파는 이에 금강경에 말씀하시기를, 과거 마음을 가히 얻지 못하고, 현재 마음을 가히 얻지 못하고, 미래 마음을 가히 얻지 못한다 하였다는데, 스님은 어느 곳에다 마음을 점치(點心)시렵니까, 하고물었다. 주금강은 이 말에 가슴이 딱 막혀무엇이라고 대답을 못하고 초조하였다. 이것을 본 노파는 다시 말머리를 돌리어, 남방으로 가면 용담선사(龍潭禪師)라고 하는 선지식(善知識)이 있으니 그리 가시라고 일러주었다. 이에 주금강은 머리를 숙이고, 노파의 말대로 용담선사를 친방하여 처음에 묻기를, 오래 용담이라는 성화를 들었는데, 와서 본즉 용도 보이지 않고, 못도 보이지 않는다고 화살을 던졌더니, 용담선사는 자네가 친히 용담에 왔네, 하고 온화하게 맞아주었다. 오래 오래 밤이 깊도록 서로 담화를 하다가, 주금강이 숙소로 돌아올적에, 밤이 어두어 용담선사가 촛불을 켜서 주금강에게 주었더니, 주금강은 불을 받아들고 방에서 나와, 신을 신자 마자, 용담 선사는 틈을 주지 않고 불을 확 불어 꺼버렸다. 이 순간 주금강은 문득 과거에 보지못한 신천지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그 이튼날 자기가 짊어지고 온 금강경소초를, 천부 태워 버리고, 이까짓 문자가 아무 소용 없는 것이요,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도 역시, 한가한 문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였다 한다.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제십구(第十九)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약유인(若有人) 만삼천대천세계칠보(滿三千大千世界七寶)

이용보시(以用布施) 시인(是人) 이시인연(以是因緣) 득복다부(得福多不) 여시(如是) 세존(世尊) 차인(此人) 이시인연(以是因緣) 득복(得福) 심다(甚多) 수보리(須菩提) 약복덕(若福德) 유실(有實) 여래불설(如來不說) 득복덕다(得福德多) 이복덕무고(以福德無故) 여래설득복덕다(如來說得福德多)니라.

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하면 이 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복을 얻음이 많겠느냐, 마느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사람이 이 인연으로써 복을 얻음이 매우 많겠습니다.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로 있을진대, 여래가 복덕을 얻음이 많다고 말하지 아니하련만, 복덕이 없는고로 여래가 말하기를 복덕이 많다하니라.

※칠보로 보시하는 복덕은, 상으로써 하는 보시이며, 함이 있는 보시이며 샘이 있는 보시이므로, 이 복덕으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지 못하므로, 복덕이 실지가 없다 말씀하시고, 복덕을 얻음이 많다 하심은 상에 주한 보시복덕, 샘이 있는 복덕도, 복덕은 복덕이므로, 이것은 사량으로 헤아릴 수 있는 숫자의 복덕이기 때문에 많다고 말씀하신 것이요, 참으로 실다운 복덕이면, 얻음이 없이 얻는, 한없는 복덕이므로 많다는 말을 붙일 수가 없는 소이인 것이다.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제이십(第二十)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불(佛) 가이구족색신(可以具足色身) 견부(見不) 불야(不也) 세존(世尊) 여래(如來) 불응이구족색신(不應以具足色身) 견(見) 하이고(何以故) 여래설구족색신(如來說具足色身) 즉비구족색신(卽非具足色身) 시명구족색신(是名具足色身)이어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부처를 가히 구족한 색신으로써 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색신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어찌한 연고오리까, 여래께서 설하신 구족색신이 곧 구족한 색신이 아니요, 이름이 구족색신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또다시 상을 여이지 못하는 중생들이, 나의 삼십이상(三十二相)과 팔십종호(八十種好)의 구족한 색신을 탐내어 이것으로써 부처를 본 것으로 알가 염려하시어, 이 말씀을 소보리에게 물으심에, 수보리는 이 뜻을 알고 밖에 나타나는 구족색신을 본 것으로써 부처를 보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니, 이것은 실다운 구족색신이 아니요, 참다운 구족색신은 안으로 정과 혜가 뚜렷이 맑어 만행(萬行)이 청정하여, 시방 세계에 나타내지 아니함이 없으시사, 이것의 이름이 구족 색신인 것을 밝히었다.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여래(如來) 가이구족제상(可以具足諸相) 견부(見不) 불야(不也) 세존(世尊) 여래(如來) 불응이구족제상(不應以具足諸相) 견(見) 하이고(何以故) 여래설제상구족(如來說諸相具足) 즉비구족(卽非具足) 시명제상구족(是名諸相具足)이니다.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여래를 가히 구족제상으로써 보느냐, 마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구족한 모든 상으로써 볼 수 없습니다. 어찌한 연고오리까. 여래께서 말씀하신 제상구족이 곧 구족이 아니요, 이 이름이 제상구족입니다.

※구족색신이니, 구족제상인, 부처니, 중생이니, 보았느니, 못보았느니가 모두가 한 생각의 망동이니, 이것을 모르는 한 사람만이, 가히 여래의 법신을 보았다 할것이다.

 

비설소설분(非說所說分) 제이십일(第二十一)

수보리(須菩提) 여물위여래작시념(汝勿謂如來作是念) 아당유소설법(我當有所說法) 막작시념(莫作是念) 하이고(何以故) 약인(若人) 언(言) 여래유소설법(如來有所說法) 즉위방불(卽爲謗佛) 불능해아소설고(不能解我所說故) 수보리(須菩提) 설법자(說法者) 무법가설(無法可說) 시명설법(是名說法)이리니.

 수보리야, 너는 여래가 이러한 생각을 하되[내가 마땅히 설한바 법이 있다 하면,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 되고, 능히 나의 설한바를 알지 못하는 소이 이니라. 수보리야 설법이란 것은 가히 설할 법 없음이, 이 이름이 설법이니라.

※설법이라는 것은 먼저 깨친 자가 아직 깨치지 못한 자를 위하여 깨치도록 말로 일러 주는 것을 설법이라 한다.

그리하여 석가여래가 사십구년 간에 걸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팔만 사천의 법문을 설하신 것이 불교의 경전이다.

이러하거늘, 이 대문에 와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한바 법이 있다고 말하면, 이것은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요, 나의 설한바 뜻이 알지 못한 소이라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설법이 무슨 말씀일까.

저 위에서도 말한바가 있거니와, 불법은 다른 학문이나 지식과 달라서,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요, 바르쳐서 아는 것이 아니요, 아는 것으로써 아는 것이 아니다. 왜그런가하면, 배워서 얻을수 없고, 가르쳐서 얻을 수 없고, 아는 것으로써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설법이 필요치 않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법은 본래 한 물건도 없다. 한 물건도 없는, 이 자리에 무슨 법이 있고, 법을 설할 자가 있고, 법을 들을 자가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설법이 필요치 않다.

그리고 또 이 자리는, 구태여 말하자면, 성현이니 법부니 중생이니, 내지 개미 벌레까지라도,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평등하여차별이 없다. 그러하거늘 누가 깬 자이고, 누가 못 깬 자이며, 누가 제도하고 누가 제도받을 자 인가, 그러므로 설법이 필요치 않다.

이러하므로 석가의 사십구년 설법이, 어떠한 일정한 법이 있어 설한 것이 아니요. 구태여 설법이라는 이름을 부치자면 가히 설할 법이 없다는 말뿐이다. 왜냐 하면 사람 사람마다 주리면 밥 먹고, 목마르면 물 마시는 것이 누구에게 있어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어찌 사람만 이러할 것이나가, 짐승이나, 새나, 벌레도, 다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어찌 설법을 입으로만 하고, 말로만 하는 것인가, 보라, 산과 물은 입이 없어도 상주(常住) 설법을 하고 있고, 꽃과 새는 말이 없어도 때를 따라 설법을 하지 않는가.

옛날 현사(玄沙)스님은 법을 설하려고 법상에 올라 앉았는데, 마침 들보 위에서 제비가 지저귀는 것을 듣고 말없이 그대로 내려오셨다 한다. 그르고 구지선사(俱祗(저袛)禪師)는 천룡(天龍)스님에게 한 손가락선(禪)을 얻어 가지고, 일생을 두고 손가락 하나로써 중생을 교화하고도 남았다 한다. 이것이 모두 설법인가, 아닌가는, 독자 여러분의 생각에 맡겨두거니와, 여래의 설하신 법은 천언 만언을 하실지라도 상이 없고 함이 없어, 종일 설하여도 설이 아닌 것이거늘, 상에 속는 부처인 중생들은, 말만 떨어지면 하나 하나의 법을 삼아 병을 만드므로, 자기의 본래성품을 망각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한다.

 

이시(爾時) 혜명수보리(慧命須菩提) 백불언(白佛言) 세존(世尊) 파유중생(頗有衆生) 어미래세(於未來世) 문설시법(聞說是法) 생신심부(生信心不) 불언(佛言) 수보리(須菩提) 피비중생(彼非衆生) 비불중생(非不衆生) 하이고(何以故) 수보리(須菩提) 중생중생자(衆生衆生者) 여래설비중생(如來說非衆生) 시명중생(是名衆生)이니라.

 제때에 혜명 수보리 부처님께 사루어 말하되 세존이시여, 단지 중생이 오는 세상에 있어, 이 법 설하심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내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저희가 중생이 아니며 중생 아님도 아니니, 어찌한 연고이냐,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함은, 여래의 말로는 중생이 아니라, 이 이름이 중생이니라.

※수보리는 후세 중생들이 이러한 심심 미묘한 법문을 듣고, 믿는 마음을 낼는지 걱정되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저희들이 중생도 아니오, 중생 아님도 아니라고 하시고, 이 까닭은 중생 중생이라고 여래가 말한 것은, 중생이 아니고 그 이름만이 중생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뜻은, 중생이 아니라 함은 , 사람마다 본래 성불하였으므로 중생이 아니라는 것이요, 중생 아님도 아니라는 것은, 자기 자성이 틀림 없이 부처인줄은 알았으나, 마치 죽순이 대 구실을 못하듯이 부처가 부처 노릇을 못하고, 육진경계(六塵境界)에 속아 탐진치(貪嗔痴)의 번뇌를 일으키므로 중생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아닌 자는 부처이니 부처가 부처를 믿거나, 구할 필요가 없고, 중생은 중생이니, 부처가 되기 위하여 부처의 말을 믿고, 육파라밀(六婆羅密)을 닦아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성취할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므로 아니라는 중생이나 옳다는 중생이나 다 이름만 중생이지 중생이 아닌 것이다.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제이십이(第二十二)

수보리(須菩提) 백불언(白佛言) 세존(世尊) 불(佛)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위무소득야(爲無所得耶) 불언(佛言) 여시여시(如是如是) 수보리(須菩提) 아어아뇩다라삼먁삼보리(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 내지무유소법가득(乃至無有所法可得)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니라.

 수보리 부처님께 사루어 말하되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심은 얻은바 없음이 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사대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야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내지, 작은 법이라도 가히 얻음이 없었을새, 이, 이름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니라.

※위세서 중생이 아니고, 중생 아님도 아니라는 말씀은, 둘이 다 중생이고 둘이 다 부처라는 말씀이시니, 말하자면 부처와 중생이 부처인 중생과 중생인 부처이니 오직 하나임을 밝히시고, 이 대문에 와서 수보리는 다시 묻기를, 그러면, 부처님께서 얻으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얻은바가 없기 때문입니까, 한즉,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의 묻는 말을 옳다고 긍정하시었다.

그러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는 어떻게 성취하였을까, 위에서 몇 번 말하였거니와, 불법은 말이 아니고, 문자가 아니고 철학도 아니고 종교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 아니다. 기다 함이 다 거짓이다. 말이나, 문자나, 명사를 따라다니다가는, 백천겁을 불교에 몸을 받칠지라도 불법과는 거리가 십만팔천리(十萬八千理)로 멀어지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알아도 아는 것이 없이 알고, 얻어도 얻는 것이 없이 얻는 것이 불법(佛法)이니 작은 법을 즐기는 자들은 항시 상에서만 취(取)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다.

 

정심행선분(淨心行善分) 제이십삼(第二十三)

부차수보리(復次須菩提) 시법(是法) 평등(平等) 무유고하(無有高下)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이무아무인무중생무수자(以無我無人無衆生無壽者) 수일체선법(修一切善法) 즉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須菩提) 소언선법자(所言善法者) 여래설즉비선법(如來說卽非善法) 시명선법(是名善法)이니라.

 다시 또 수보리야, 이 법이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을새,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이름한 것이니, 나도 없고 중생도 없고 수자도, 없으므로써, 일체 착한 법을 닦으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나니라. 수보리야 말한바 착한 법이란 것은, 여래의 말로는, 곧 착한 법이 아니라, 이 이름이 착한 법이니라.

※불법은 마음법이다. 그러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마음법이니, 이 법은 성현이나, 범부나, 더하고, 덜함이 없고, 깨친이나 깨치지 못한이와, 있고 없음이 없고 사람이나 곤충이나, 높고 낮음이 없이, 본래 평등한 것이요, 본래 구족한 것이다. 그러나 부처와 중생이 다른 것은, 부처는 깨끗한 본 마음 그대로 일체, 거슬리는 경계나, 순한 경계에도 물들어 더럽히지 않고, 중생은 본 마음을 지키지 못하고, 일체 역순(逆順) 경계에 부딪치는 때마다, 부딪치는 곳마다, 변하고 변하여, 더러워지므로, 자기 자성이 부처인줄을 알면서도, 앎과 행이 일치하지 못하나니, 이것이 걱정인 것이다.

예들 들면, 모든 법의 공한 이치를 확실히 깨달아, 자기 자성이 부처님을 본 사람에게 향하여, 어떤 사람이 와서 머리를 좀 빌려달라고 청하는 이가 있다하면, 주저하지 않고 얼른 허락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이것이 곧 깨침과 행이 일치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곧 아뇩보리를 성취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이 곧 부처를 이루지 못한, 부처인 중생이다. 이것이 곧 이치로는 사상(四相)이 공한 것을 알고, 입으로나 붓으로는 얼마든지 공한 것을 말하고, 기록하지마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딴판이란 말이다.

이러므로 약간의 공리(空理)를 알았다고 [내노라]하지말고, [선지식이다]자처를 하지 말고, 육도 만행의 갖은 선법을 닦아, 역순 경계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물들지 않고, 더럽히지 않고, 때를 따라, 처소를 따라. 중생의 근기를 맞추어 자유자재하여사, 이것을 가히 수행한 사람이라고 이름할 것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이름할 것이니. 선한 법을 닦아도 선한 법에 무심하므로 선법이 아닌 것이다.

 

복지무비분(福智無比分) 제이십사(第二十四)

수보리(須菩提) 약삼천대천세계중(若三千大千世界中) 소유제수미산왕(所有諸須彌山王) 여시등칠보취(如是等七寶聚) 유인(有人) 지용보시(持用布施) 약인(若人) 이차반야(以此般若) 바라밀경(波羅蜜經) 내지사구게등(乃至四句偈等) 수지독송(受持讀誦) 위타인설(爲他人說) 어전복덕(於前福德) 백분(百分) 불급일(不及一) 백천만억분(百千萬億分) 내지산수비유(乃至算數譬喩) 소불능급(所不能及)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삼천대천세계 가운데 있는바, 모든 수미산왕과 같은 칠보 무더기들을 어떤 사람이 가져다 보시 할지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이반야바라밀경에, 내자 사구게등만 수지독송하여, 남을 위하여 일러주면, 이 앞에 복덕으로는 백분의 하나도 미치지 못하여, 백천만억분과 내지 숫자나 비유로써 미치지 못할바이니라.

※부처님께서는 도 다시 간절하신 마음으로, 이 경을 가지는 공덕이 한이 없음을 말씀 하셨으니, 칠보(七寶)는 값이 있는 보배요, 사구게는 값이 없는 보배인 까닭이다.

값이 있는 보배는, 아무리 많아도 쓰고 쓰면, 다할 날이 있고, 값이 없는 보배는 아무리 쓰고 써도 다함이 없는 소이이니, 어찌 칠보 보시로서 사구게의 공덕에 비할바이랴.

 

화무소화분(化無所化分) 제이십오(第二十五)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여등(汝等) 물위여래(勿謂如來) 작시념(作是念) 아당도중생(我當度衆生) 수보리(須菩提) 막작시념(莫作是念) 하이고(何以故) 실무유중생(實無有衆生) 여래도자(如來度者) 약유중생(若有衆生) 여래도자(如來度者) 여래즉유아인(如來卽有我人) 중생수자(衆生壽者) 수보리(須菩提) 여래설유아자(如來說有我者) 즉비유아(卽非有我) 이범부지인(而凡夫之人) 이위유아(以爲有我) 수보리(須菩提) 범부자(凡夫者) 여래설즉비범부(如來說卽非凡夫) 시명범부(是名凡夫)니라.

 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너희들은 여래가 이런 생각을 갖는다고 이르지 말라. [내가 마땅이 중생을 제도한다]고 수보리야, 이런 생각을 가지지 말라 함은, 어찌한 소이이냐, 실로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없음이니, 만약 여래가 제도할 중생이 있다 하면, 여래가 곧 아인, 중생, 수자상(我人衆生壽者相)이 있음이니라, 수보리야, 여래의말에 내라고 있는 것은, 곧 내가 있음이 아니거늘, 범부들이 내가 있음을 삼느니라. 수보리야 범부라는 것도, 여래의 말씀에는 곧 범부가 아니고 이 이름이 범부 이니라.

※이 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마음을 주하고, 마음을 항복 받기 위하여 사상(四相)을 여의도록 하신 법문이시니, 우리의 본마음인 보리(菩提)가 본래 상이 없기 때문에 본마음에 돌아가도록 하신 것이 부처님의 뜻이거늘, 범부들은 이것을 망각하고, 나를 말하면, 아상에 걸리고 중생이라고 말하면 중생에 걸리고 범부라 말하면, 범부에 걸리나니, 여래의 말씀이신 나나, 중생이나, 범부는 이름만 다른 한 사람임을 알면 명상에 속지 않을 것이며, 상을 여인자라 할 것이다.

 

법신비상분(法身非相分) 제이십육(第二十六)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가이삼십이상(可以三十二相) 관여래부(觀如來不) 수보리언(須菩提言) 여시여시(如是如是) 이삼십이상(以三十二相) 관여래(觀如來) 불언(佛言) 수보리(須菩提) 약이삼십이상(若以三十二相) 관여래자(觀如來者) 전륜성왕(轉輪聖王) 즉시여래(卽時如來) 수보리(須菩提) 백불언(白佛言) 세존(世尊) 여아해불소설의(如我解佛所說義) 불응이삼십이상(不應以三十二相) 관여래(觀如來)니이다.

 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냐,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본다 하겠느냐. 수보리 말하되, 네, 네,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사대, 수보리야, 만약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본다 할진대, 전륜성왕도 곧 여래이겠구나, 수보리, 부처님께 사루어 말하되 세존이시여 내가 부처님의 설하신바 뜻을 아는바 같아서는, 응당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본다고 못합니다.

※전륜성왕은 사주세계(四洲世界)를 맡아 다스리는 대왕(大王)이니, 부처님과 같이 삼십이상이 구족하다.

이 경 첫머리에서 이와 같이 내가들었사오니...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온 설법에서 불법이 무엇인가를 대강 짐작하였을 것이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무엇인 줄도 알았을지니, 이 대문의 강의에 있어 구구한 설명을 피하거니와 부처님이 왜 이토록 말이 많으신가를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단하선사(丹霞禪師) 이야기를 참고로 하나 하기로하자. 옛날 단하선사라는 조사(祖師)스님이 한분 계시었는데, 어느해 겨울 몹시 추운날, 어느 절에를 찾아 가시었다. 방에를 들어가 본즉, 삼척냉방이요, 주인도 어데를 가고 없으므로, 불을 좀 때려고, 밖에 나와서 나무를 찾은즉, 나무도 없었다. 마침 법당을 들어가 본즉, 커다란 목조불상(木造佛像) (나무로 조성한 부처님)삼존(三尊)이 계시므로, 목불 한불을 업어다 부엌에 놓고, 도끼로 쪼개서 불을 넣고, 뜨뜨한 방에 누어 잠이 들었다. 그제야 주인이 돌아와서 방에 들어와 본즉, 의외에도 방은 쩔쩔 끓고, 알지못하는 객승 한분이 코를 골고 있었으므로, 객승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나무가 없는데 어떻게 방을 더웁게 했느냐고 물은즉, 단하선사는 법당에서 목불을 한분 가져다 땠다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주인은, 깜짝 놀래어, 큰소리로, 중놈이 부처님을 패서, 불을 때는 놈이 어데가 있느냐고 꾸짖었다. 이말을 들은 선사는, 아무 말도 없이 부엌으로 가서, 부지깽이로 다 타버린 재를 허적허적 하므로, 주인이 어이 없어, 그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다시 물은즉, 선사는 사리(사리는 구슬이니 부처님이나 수행이 높은 스님에게서 나오는 정신의 결정인 구슬임)를 찾노라고 대답하였다. 주인은 또 다시 어이 없어, [이 중놈아 목불에서 무슨 사리가 나올 것이냐]고, 말한즉, 선사는 주인을 보고 그러면 나머지 두불상을 마저 패서 불을 때어야겠다고 하였다 한다. 그 당시 주인은 눈썹이 다 떨어지고 말았으며, 그리하여 단하선사의 목불을 때었다는 말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독자여! 여기서 조심하여야 할 것은 부처님의 뜻이 어데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이고 부처님의 말만 따라다니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실다히 상을 여인 사람이라면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본다는 것이 무슨 허물일 것인가. 상이 상이 아닌 줄만 안다면, 상으로써 여래를 볼것이요. 상을 여의고서야만, 여래를 본다는 것이 도리혀 허물 되는 말이다.

왜냐 하면, 상과 상 아님을 둘로 보는 소이이니, 우리 문중에는 하나도 허물 되거니, 둘이 있을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불법은 물론 마음 법이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곧 부처인 것이니, 마음 밖에서 부처를 구함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자기의 참 부처를 알지 못하고, 삼십이상의 거룩한 상모가 부처인줄로 믿어, 공양승사를 한다든지, 더구나 나무나, 돌이나, 흙이나, 쇠나, 금으로 조성한 불상을 부처로 믿어, 공양승사를 하고, 기도를 한다든지, 염불, 참선을 하는 이들 중에도, 부처가 보이기를 기다리고 있다든지 하는 것은 어리석은 중에도 더 어리석은 일이요, 미신 중에도 더 큰 미신이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크게 고치지 못 할 어리석은 병이 있으니, 이것은 다소 불교를 안다는 이들 중에 있는 병이다.

내 마음이 참 부처요, 불상은 우상(偶像)이라하여, 공양승사는 말 할 것도 없고, 기도나 예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만 하지 아니 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하는것 까지도 비방을 하고있는 사람이 있다.

이 것이 참으로 불법을 아는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금강경을 본 독자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싶다. 마음이 부처라 하니, 마음이 무엇인가 물론 불교서적을 다소 본 사람이라든지, 문자를 아니 읽었다더라도 참선이나, 염불을 좀 한 사람이면 누구나 한결 같은 소리로, 마음이란 이름도 없고, 상도 없고,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고 방원장단(方圓長短)도 없고, 청황적백도 없는 것이 마음이라고 대답 할것이다.

이경을 읽으시는 독자 여러분도, 이경에서 마음이란 이러한 것임을 짐작하였을 줄 안다. 그러면 이렇게 안것이 마음을 안 사람인가. 아니다. 마음이란, 이름도 있고, 상도 있고, 소리도 있고, 방원장단도 있고, 청황적백도 있는 것이 마음이다.

다시 말하면 다 없고, 다 있는 것이 마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마음이 부처인 줄을 확실히 알았을진대 목불은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며, 토불, 철불, 금불은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절하는 것은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며, 기도나, 공양승사는 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람이, 나무나 흙으로 만들어 놓았으니,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를 모르는 삼척동자도 아는 것을 어찌 마음이 부처인 줄을 아는 사람들이 할 말이겠는가.

그러므로 모두가 병이다. 중생들이 이 병을 떼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간절하신 마음으로 중언 부언 하신 것이니, 부처님의 뜻을 취하고 부처님의 말만 따라다니지 말기를 부탁한다.

 

이시(爾時) 세존(世尊) 이설게언(而說偈言) 약이색견아(若以色見我) 이음성구아(以音聲求我) 시인행사도(是人行邪道) 불능견여래(不能見如來)니라.

 저 때에 세존께서 계를 설하여 말씀하시되, 만약 모양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구하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함이라, 능히 여래를 보지 못하느니라.

※중생의 가장 많은 병이, 상에 착하는 병이기 때문에, 상 있는 나를 본 것으로써 상 없는 참 나를 본 것을 삼지 말라, 상에서 나를 보고, 구하려고 하는 사람은, 바른 도를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래를 보지 못한다는 말씀이시다.

 

무단무멸분(無斷無滅分) 제이십칠(第二十七)

수보리(須菩提) 여약작시념(汝若作是念) 여래불이구족상고(如來不以具足相故)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須菩提) 막작시념(莫作是念) 여래(如來) 불이구족상고(不以具足相故)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수보리(須菩提) 여약작시념(汝若作是念)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설제법단멸(說諸法斷滅) 막작시념(莫作是念) 하이고(何以故)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어법(於法) 불설단멸상(不說斷滅相)이니라.

수보리야, 네가 혹시 이 생각을 가지되[여래는 구족상을 쓰지 아니한 연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하느냐, 수보리야. 여래가[구족상을 쓰지 않는 고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이런 생각을 하지 말라. 수보리야, 네가 혹시 이런 생각을 하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자는, 모든 법이 단멸됨을 말하는가, 이 생각도 두지 말지니 어찌한 연고이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자는 법에 단멸상을 말하지 않느니라.

※업장이 두터운 사견 중생들은 말만 떨어지면 병을 이루어, 한 병을 고치면 또 한 병이 생기고, 그 병을 고치면 또 다른 병이 생기어, 성할 날이 없으모로, 이 병을 고치기에 갖은 고심과 갖은 노력을 다하신, 대의왕(大醫王)의 대자대비하신 은혜를 또 한번 생각 하여볼 것이다.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 제이십八(第二十八)

수보리(須菩提) 약보살(若菩薩) 이만항하사등(以滿恒河沙等) 세계칠보(世界七寶) 지용보시(持用布施) 약부유인(若復有人) 지일체법무아(知一切法無我) 득성어인(得成於忍) 차보살(此菩薩) 승전보살(勝前菩薩) 소득공덕(所得功德) 하이고(何以故) 수보리(須菩提) 이제보살(以諸菩薩) 불수복덕고(不受福德故) 수보리(須菩提) 백불언(白佛言) 세존(世尊) 운하보살(云何菩薩) 불수복덕(不受福德) 수보리(須菩提) 보살(菩薩) 소작복덕(所作福德) 불응탐착(不應貪着) 시고(是故) 설불수복덕(說不受福德)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항하 모래와 같은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보시에 가져다 쓸지라도, 만약 다른 사람이 있어 일체 법에 내가 없음을 알아, 인(忍)을 얻어 성취하면, 이 보살이 앞에 말한 보살의 얻은 공덕보다 승하리라. 어찌한 연고이겠느냐, 수보리야 이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 까닭이니라. 수보리 부처님께 사루어 말하되, 세존이시여, 어찌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다 하시나이까. 수보리야 보살의 지은바 복덕은 응당 탐내고 착(着)함이 아닐새, 이런고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 말함이니라.

※언제나 부처님께서는 중생을 사랑하시는 자모이신지라 한 중생이라도 더 믿도록하고, 더 건지려는 생각이 노바심절 하신지라, 또 다시 이 경 가지는 공덕을 말씀 하시되, 어떤 사람이고 일체법이 내가 없는 것을 알아, 인을 성취하면 칠보로 성취한 사람의 공덕보다 승하다 하시고, 칠보 보시 보다, 승한 소이는 이 보살은 복덕을 받지 않는 까닭이라고, 어어서 말씀 하시었다. 그러면 이 대문에서는 [忍]이 무엇인 것과, 보살은 어찌하여[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하시었는가, 이것이 중요한 뜻이나 이 경의 설법이 모두 상 없는 것을 주로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물질로 보시하거나, 법으로 보시하거나, 상관 없이 하면 복덕을 짛어도 짛는 것이 아니요, 복덕을 받아도 받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복덕에 탐착하지 않고 무심히 하는 까닭이요, [인(忍)]이란 뜻은 한자(漢字)로는 [참을인(忍)]자 이지마는, 뜻으로는 [인칠인(印)]자의 뜻과 같으니, 쉽게 말하여, 우리가 중요한 일에 중요하게 쓰는 인(印)이니만큼, 아무나 함부로 파서 쓰는 것도 아니요 인(印)은 나를 대표하는 것이므로, 일반이 나를 인증하여주는 거짓 없는 실다운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일체 법이 내가 없음을 알아 인(忍)을 성취하였다는 것은, 곧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음을 이치로만 안 것이 아니라, 앎과 행이 둘이 아니어서 지행이 일치 되어가지고, 다시 동요됨이 없고, 속임이 없고, 굳어져서 다시는 변함이없이 여여하여, 어떠한 곳, 어떠한 때에나 다시는 낳고 멸함이 없고, 더하고 덜함이 없이, 요지부동으로 하나가 된 것을 인이라 하는 것이니, 이치가 그러하니만큼, 행도 하나가 됨을 말하심이다.

 

위의적정분(威儀寂靜分) 제이십구(第二十九)

수보리(須菩提) 약유인(若有人) 언(言) 여래약래약거(如來若來若去) 약좌약와(若坐若臥) 시인(是人) 불해아소설의(不解我所說義) 하이고(何以故) 여래자(如來者) 무소종래(無所從來) 역무소거(亦無所去) 고명여래(故名如來)니라.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되, 여래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거나 하면 이 사람은 나의 말한 바 뜻을 알지 못함이니라. 어찌한 연고이냐 여래라는 것은 온 바도 없으며, 또한 가는 바도 없는고로, 이름이 여래라 하나니라.

※오고 와도 옴이 없고, 가고 가도 감이 없고, 앉고 누워도 앉고 눔이 없이, 오고, 가고, 앉고, 눕고 하는 것이 곧 여래인 줄을 알면, 가히 이 경을 수지 독송 하였다 할 것이다.

 

일합이상분(一合理相分) 제삼십(第三十)

수보리(須菩提) 약선남자(若善男子) 선녀인(善女人) 이삼천대천세계(以三千大千世界) 쇄위미진(碎爲微塵) 어의운하(於意云何) 시미진중(是微塵衆) 영위다부(寧爲多不) 수보리언(須菩提言) 심다(甚多) 세존(世尊) 하이고(何以故) 약시미진중(若是微塵衆) 실유자(實有者) 불즉불설시미진중(佛卽不說是微塵衆) 소이자하(所以者何) 불설미진중(佛說微塵衆) 즉비미진중(卽非微塵衆) 시명미진중(是名微塵衆) 세존(世尊) 여래소설(如來所說)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 즉비세계(卽非世界) 시명세계(是名世界)니.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삼천대천세계로써 부셔서 먼지를 만들면, 뜻에 어떻다 하겠느냐, 이 먼지들이 진실로 많음이 되겠느냐. 매우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한 연고이냐 하면 만약, 이 먼지들이 실다히 있는 것이진대, 부처님께서 곧 이 먼지들이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할 것입니다. 어찌한 소이이냐 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먼지들은 곧 먼지들이 아니요, 이 이름이 먼지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 하신 바 삼천대천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라, 이 이름이 세계입니다.

※먼지도 먼지가 아니요, 세계도 세계가 아니라면 이것이 무엇인가. 모두다, 거북털과 코끼뿔인 것이다. 거북털과 토끼뿔이 실다운 것이 아닌줄 알면, 먼지도 세계도 실이 아닌 것을 알 것이다. 중생들의 마음 가운데에는 삼천대천세계도 격립되어 있고, 불가설 불가설의 미진 수의 중생들이 일일 일야에도 만번 낳고, 만번 죽고 한다. 그러나 먼지가 모여서 세계를 이루고, 세계가 부서져 먼지가 되는 것이므로 먼지나, 세계가, 따로 제실상이 없듯이, 중생들의 마음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무량한 세계라든지 한없이 일어나고, 죽고 하는 번뇌가 모두 허환하여서, 그저 이름이 먼지요 세계이지, 참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이고(何以故) 약세계(若世界) 실유자(實有者) 즉시일합상(卽是一合相) 여래설일합상(如來說一合相) 즉비일합상(卽非一合相) 시명일합상(是名一合相) 수보리(須菩提) 일합상자(一合相者) 즉시불가설(卽是不可說) 단범부지인(但凡夫之人) 탐착기사(貪着其事)니라.

 어찌한 연고입니까, 만약 세계가 실다히 있는 것일진대, 곧 이 한뭉치의 상이라 할 것이다, 여래의 경계로는, 한뭉치도 곧 한뭉치가 아니요, 이 이름이 한뭉치의 상입니다. 수보리야, 일합상 한뭉치란 것은, 곧 가히 말로 못할 것이거늘, 다만 범부의 사람들이 그 일에 탐착하나니라.

※먼지고, 세계고 하는 것이 거짓 이름뿐이니, 만약 실상인 세계가 있다 하면 이것은 한 뭉치의 상이라고나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래의 경계에서 보면, 한 뭉치는 말도, 말로 한 뭉치이지, 한 뭉치도 아니라는 것이니, 한 뭉치라는 것은, 번뇌와 보리가 둘이 아니요, 중생과 불이 둘이 아니요, 상과 비상이 둘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번뇌를 버리고 보리가 따로 없으며, 생사를 떠나서 열반이 따로 없으며, 중생을 버리고 따로 불이 없으며, 상을 떠나서 상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니, 번뇌니, 보리니, 생사니, 열반이니, 중생이니, 불이니, 상이니, 비상이니가 모두 한덩어리, 한뭉치인 세계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한더어리 상이라는 것도, 여래의 경지에서 보면 한덩어리가 아니요 거짓 이름한 것이니, 이 자리에는 아뇩보리니, 저 언덕이니, 부처니, 여래니 하는 것까지도, 모두 죄가 되는 망설이기 때문이다. 독자는 이 경[본심]의 진리를 묵묵히 참고하여 보라. 어찌하여 모두 마구니의 말이 된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일합상이란 이치는 마로 다 할 수 없거늘, 이것을 모르는 범부들은 이치와 일이 하나인 줄은 알지 못하고, 그 일에만 탐착하고 있으며, 하나인 줄을 알았다는 사람도 하시 둘이 되어, 아는 것과 행이 일합이 못 되니 불법을 공부한다는 자, 어찌 아는 것으로써 만족을 삼을 것인가.

실로 육도만행을 닦고 닦아, 백천생을 단련하여 타성일편(打成一片)이 될 큰 원(願)을 세워야 할것이다.

 

지견불생분(知見不生分) 제삼십일(第三十一)

수보리(須菩提) 약인(若人) 언(言) 불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수보리(須菩提) 어의운하(於意云何) 시인(是人) 해아소설의부(解我所說義不) 불야(不也) 세존(世尊) 시인(是人) 불해여래소설의(不解如來所說義) 하이고(何以故) 세존(世尊) 설아견인견중생견수자견(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 즉비아견(卽非我見) 인견(人見) 중생견(衆生見) 수자견(壽者見) 시명아견(是名我見) 인견(人見) 중생견(衆生見) 수자견(壽者見)이니이다.

 수보리야, 만약, 사람이 말하되, 부처가 나라는 지견과 남이라는 지견과 중생이라는 지견과 수자의 지견을 말하였다 하면, 수보리야, 뜻에 어떠하냐, 이 사람이 나의 말한바 뜻을 안다 하겠느냐, 아니라 하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이 여래의 설한바 뜻을 알지못한 것입니다. 어찌한 연고이냐 하면, 세존께서 설하신 아견, 중생견, 수자견은 곧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 아니요 이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인 것입니다.

※사은 밖에 나타나는 것을 말하고, 지견은 손에서 헤아리는 것을 뜻한 것이나, 안에 있으면 밖에 나타나고, 밖에 나타나면 안에 숨어 있을 것이니, 상이 없으면 견(見)도 없는 것이요, 견이 없으면 상도 없는 것이다.

저 위에서 말씀하신 아상도, 곧 상이 아니요,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상이 아니라는 말씀이나, 말은 달라도 뜻은 한가지이니, 구태여 문자 해석에 구구할 것은 없는 것이다.

 

수보리(須菩提)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자(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 어일체법(於一切法) 응여시지(應如是知) 여시견(如是見) 여시신해(如是信解) 불생법상(不生法相) 수보리(須菩提) 소언법상자(所言法相者) 여래설즉비법상(如來說卽非法相) 시명법상(是名法相)이니라.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한 자는, 일체법에 응당 이와 같이 알며,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어 알아, 법상을 내지 말지니라. 수보리야, 말한바 법상이란 여래의 말로는 곧 법상이 아니라. 이 사람이 항시 자기를 미(迷)하고, 물건만 쫓아다니면, 경계를 당할 때 마다 마음이 항시 시끄럽고, 천파만랑(千波萬浪)의 파도(波濤)중에서도, 자기를 매(昧)하지 아니하면 마음이 항시 고요하여, 편안한 것이다. 그러므로 잘 살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일체 경계에 부딪힐 때 마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고, 이렇게 믿어 마음을 동하지 말지니라, 마음을 동하지 말라는 말도, 중생들의 말로는 벌써 동한 것이 된다.

이것으로써 하권 처 머리에서 수보리가 물은바 [잘 살려는 마음을 내었다면 어떻게 응당 머무르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으오리까]를 매잘라 말씀하신 것이다.

 

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 제삼십이(第三十二)

수보리(須菩提) 약유인이만무량아승지세계칠보(若有人以滿無量阿僧祗世界七寶) 지용보시(持用布施) 약유선남자(若有善男子) 선녀인(善女人) 발보살심자(發菩薩心者) 지어차경(持於此經) 내지사구게등(乃至四句偈等) 수지독송(受持讀誦) 위인연설(爲人演說) 기복(其福) 승피(勝彼) 운하위인연설(云何爲人演說) 불취어상(不取於相) 여여부동(如如不動)이니.

 수보리야, 만약 사람이 있어, 무량 아승지 세계에 가득찬 칠보로써 가져다 보시에 썼다 할지라도, 만약 선남자, 선녀인이 보살심을 발한자 있어, 이 경을 가지되, 내지 사구게만이라도 수지독송하여, 남을 위하여 연설하면 그 복덕이 저보다 승하리라. 어떻게 하는 것이 남을 위하여 연설 함인고. 상을 취하지 아니하여, 여여부동 할지니라.

※독자여! 어떤 것이 상을 취하지 않는 것인가, 상을 상으로 알고, 상으로 취하는 것도 상이요, 상을 상 아닌 것으로 알아, 상을 취하지 않는 것도 상이다. 상에 착(着)하는 것도 상이요, 상을 여이었다 함도 상이니, 어떤 것이 상을 취하지 않고, 여여하여 동하지 않는 것이냐 본래 한 물건도 취하지 않고, 한 물건도 버리지 않는 것이, 상을 본래 취하지 않는 것이된다. 취하지 아니하려는 생가으로 취하지 않는 것이 아니요, 버리지 아니하려는 생각으로 버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 자리가 그러한지라, 우리들의 행하는 것도 그 자리와 같이 그렇게 행하고 움직이지 말라는 말씀이시다.

지극한 도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오직 간택(揀擇) (분별하는 것)하는 것을 혐오(嫌惡)한다고 고인이 말씀하시었으니, 간택하는 마음만 없으면, 이것이 곧 부처요, 이것이 곧 불법이요, 이것이 곧 바라밀이요, 이것이 곧 가장 잘 사는 법이다.

그러므로 공부가 다른 것이 공부가 아니라, 여여부동(如如不動), 마음을 동하지 않는 것이 공부요, 수행이, 다른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우, 어떠한 때를 당할지라도, 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이 수행이요, 도인이, 다른 것이 도인이 아니라,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기쁘고, 성내고, 슬프고, 즐거웁고, 헐고, 찬하는 경계에 처하여 조금도 흔들림이 없어, 여여부동 하는 것이 도인이요, 부처가 다른 것이 부처가 아니라, 내가 부처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 것이 부처인 것이다. 부처라는 생각을 가지면 이것은 벌써 부처가 아닌것이 되고 만것이다.

 

하이고(何以故)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하라.

 어찌한 연고이냐, 일체 함이 있는 법은, 꿈이요, 환이요, 거품이요, 그리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또한 번개와 같나니, 응당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질지니라.

※함이 있는 법이란 것은, 나고, 멸하는 법이니, 변하고, 움직이고, 있다, 없다, 하는 상에 취하는 마음과 일과 경계등을 말함이다. 곧 유심으로 하는것은, 모두가 함이 있는 법이니, 이 법은 실답지 못하고 허망하여, 꿈과 같고, 환과 같고, 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아침이슬과 같고, 번개와 같으니, 낳고 멸함이 없고, 있고 없음이 없고, 크고 작음이 없고, 밝고 어둠이 없고, 얻고 잃음이 없는 적멸무위의 법을, 나도 알고, 남도 알리어 나도 행하고, 남도 행하도록 하여,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하나도 빠짐 없이, 이 하염없는 안락국토에서 자고 먹고, 먹고 자고, 영원히 잘 살도록 하라는 부처님의 간절하신 위촉이 이 대문에 은근히 숨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불설시경이(佛說是經已) 장노수보리(長老須菩提) 급제비구비구니(及諸比丘比丘尼) 우바새우바이(優婆塞優婆夷) 일체세간천인아수라(一切世間天人阿修羅) 문불소설(聞佛所說) 개대환희(皆大歡喜) 신수봉행(信受奉行)하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여 마치시니, 장노 수보리와 및 모든 비구, 비구니며, 우바새, 우바이며, 일체 세간에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등이, 부처님의 말씀하신 바를 듣고, 다들 크게 환희하여, 믿어 닦고, 받들어 행하니라.

※비구니는 여자 비구란 말이요, 우바새는 청신사(淸信士)요, 우바이는 청신녀(淸信女)이다. 이 윗대문까지 부처님께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을 설하여 마치시니, 그때 대중에 장노 수보리를 비롯하여, 모든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며 일체 세간에 천인아수라(天人阿修羅)들이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실상묘법을 듣고, 크게 무위법(無爲法)의 법열(法悅)에 환희하여 불퇴전(不退轉)의 원력(願力)으로써 믿어 가지고 받들어 행하다. 독자여러분 읽는 다고 수고 많았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성불하셔요...()()()

출처 : 나무아미타불
글쓴이 : 빵導師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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