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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불자회

밀린다팡하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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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다팡하 해제 -2024년 7월 10일 전재성번역-

 

 

밀린다팡하는 어떠한 경전인가

 

밀린다팡하는 기원전 2세기 중후반에 인도의 서북부 지역을 지배하던 그리스의 왕 밀린다(pali. Milinda: grk. Menandros)와 승려 나가세나(pali.Nāga- sena:ch.那先,龍軍)사이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밀린다팡하는 불교역사에서 철학적 담론이라는 중차대한 의미를 지닌 것을 제외하고라도, 밀린다(그리스 이름으로 메난드로스)가 그리스 출신의 인도의 왕이라는 것만으로도 세계인의 관심을 끌어왔다. 밀린다팡하는 이 왕과 나가세나라는 영향력 있는 승려 사이의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 그 내용은 우파니샤드적 대화나 플라톤적 대화와 비견될 수 있을 만한 철학적 대화를 구성하고 있다. 대화의 형태는 비록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하는 전형적인 불경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 않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의 모음집인 경전에서 이미 발견되는 대화형식을 사용하고 있고 그것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래서 한역에는 경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밀린다 왕 보다는 수행승 나가세나를 더 중시하여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 이라고 했다. 이 밀린다팡하는 미얀마에서는 <꾸타까니까야>에 포함시켜 경전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러한 문헌적 형태의 발생에 그리스적 영향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는 없다. 처음에는 많은 학자들이 이 경의 대화의 주인공이 그리스계의 왕이라는 것만 가지고 이 경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영향을 받은 대론서라고 소개했지만, 플라톤의 저술에 나타나는 소크라테스식의 산파술(産婆術),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길게 대화를 이끌어 상대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식의 집요한 대론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밀린다팡하의 대론이 산파술이 아니고 문답식이라고 하더라도, 논리와 비유를 들어서 무지를 일깨우는 방식은 산파술과 유사한 것이며, 이는 나선비구경과 일치하는 고층부인 상권에서 두드러진다. 직접적으로 그리스 철학에 대한 언급이나 용어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독일의 인도학자 오토슈라더(F. Otto Schrader)는 밀린다팡하를 두고 "인도인의 종교철학적 문헌에서 그리스 영향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 그리스의 영향력은 다른 문헌이나 인도예술에서 발견되거나 후기에 적어도 헬레니즘적 철학의 인도에 대한 영향력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임에도 - 이 지역에서 그리스인들은 스스로 약자로서 느끼고 인도인들에게 종속된 것을 의미한다. 이를 무시한다고 하더라고 감수성이 예민한 그리스인들이 인도철학 무엇보다도 인도 불교철학이 지닌 완결성과 형이상적 깊이에 감명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Die Fragen des Königs Menandros, Berlin. 1905: S. 21-23)라고 말하고 있다. 밀린다팡하의 내용에는 사실상 그리스적 영향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전통적으로 믿어오던 다신교에 충실했으므로 정치적으로 불교 및 인도종교에 호의를 보여준 것이라는 라모뜨(La Motte)의 견해도 있다. 아니면, 진리를 추구하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그리스 지성인들이 서북인도에서 만난 불교가 지닌 완결성 앞에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보다는 그것을 이해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밀린다팡하는 스리랑카, 태국, 캄보디아 등에 전해오는 빠알리대장경의 장 외문헌으로 제1편에서 제7편으로 구성되어 있고, 모든 빠알리경전을 언급하고 있는 방대한 역작이다. 그것의 한역본인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은 빠알리 본의 앞부분인 상권의 고층부로만 이루어진 것이다. 빠알리본의 제4편에서 제7편까지의 하권 신층부는 나선비구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 하권 부분은 후대에 스리랑카에서 각각 다른 시대에 첨가된 신층부라고 볼 수 있다.

 

1편에서는 세속적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전생에는 존자 나가세나는 강가 강변의 불교승단의 스님이었고 밀린다 왕은 사미였다. 이생에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이루어질 때까지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2편은 특징에 대한 질문의 편으로 왕은 존자 나가세나의 이름을 묻는데, 존자는 무아론에 입각한 철학적인 대답을 한다. 그것에 만족한 왕은 스승을 만난 것을 직감하고 대론을 시작한다. 재생과 윤회, 출가와 수행, 개인과 정신현상 등에 관해 질문한다. 3편은 의혹을 끊음의 편으로, 밀린다 왕은 업보와 업의 다양성, 그리고 열반이 무엇인가 등을 묻고, 그 열반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한지를 묻는다. 이 편의 말미에 밀린다팡하가 끝났다고 되어 있어, 이곳까지가 오리지널한 밀린다팡하인 것을 짐작하게 한다. 4편은 양도논법에 속하는 질문의 편으로, 경전상에서 서로 모순되는 82개의 딜레마들을 다룬다. 여기서 밀린다 왕이 의혹을 제기하고 나가세나가 해명한다. 5편에서는 추론으로 풀리는 질문의 편인데, 밀린다 왕은 부처님이 실존했던 인물인가를 묻고 존자 나가세나는 부처님의 역사성을 그가 가르친 진리로 입증한다. 6편은 두타행의 고리에 대한 질문의 편이다. 밀린다는 재가신도가 열반을 얻는 것이 가능하지를 질문하는데, 여기서 나가세나는 13가지 두타행의 고리를 언급한다. 7편은 비유에 관한 이야기의 편인데, 비유에 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밀린다 왕의 질문을 통해서 나가세나는 비유를 통한 거룩한 경지의 특성에 관해 해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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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다팡하의 대론

 

밀린다팡하를 우리는 흔히 대론서로 알고 있지만, 자신의 견해에 대하여 정당함을 주장하기 위해 논리적 근거를 들어 상대방을 공격하는 토론방식을 전개하고 있는 대론서도 아니고, 무지를 깨우치기 위한 소크라테스식의 산파술로 이루어진 대론서도 아니다. 밀린다팡하는 우파니샤드나 초기불교의 경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답식으로 질문과 해명을 하는 대화서이다. 고층부의 이름에 대한 질문(Miln.25)에서처럼 그리스적 사유와 인도적 사유가 생생하게 충돌하는 몇몇 대론을 제외하고는 토론방식으로 전개되는 논쟁은 거의 없고 문답식의 설명형식을 띄고 있다. 질문은 불교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문화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그리스의 배경을 깔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스 철학을 배경으로 하는 대화라고 본다면, 대화는 단순히 대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론에 버금가는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 밀린다 왕이 당시 유럽을 석권한 그리스 지성을 대표하는 지성인이었고, 나가세나 존자는 동양의 가장 완결적인 사 상인 불교를 대변하는 지성인이었으므로 밀린다팡하는 동서의 예지가 역사상 처음으로 교류한 현장일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밀린다팡하를 이방인을 위한 포교서나 교리문답서 나아가서는 불교입문서라고 규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서경수 교수는 그가 번역한 밀린 다왕문경의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늘날에도 불교는 그 기초교리 조차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데, 그러한 현상이 BC, 2세기 후반 밀린다 왕 당시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밀린다왕문경의 질문 하나하나가 조금도 낡았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오늘날 우리가 질문하고자하는 질문을 대신해 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한 측면에서 오늘날 더구나 서구적 교육을 받은 우리들에게 '현대인들을 위한 불교입문서'로서, 비록 이천여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손색이 없다."

 

밀린다팡하의 신충부인 하권에는 대론이 공동의 적인 반대자들을 조복시키기 위한 것(Miln. 94)이라는 진술이 나온다. 이것은 밀린다팡하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모순되는 것들에 대하여 미래세대에서 쓸데없는 논쟁을 할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기획된 것임을 드러낸다. 그런 측면에서 밀린다팡하는 대론서를 넘어서서 밀린다 왕과 나가세나의 이름을 빌어 불교교단의 안팎에서 제기되었던 난문들에 이르기까지 문답형식의 대화로 풀어나가며 사상을 심화시킨 논서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밀린다팡하에서 다루는 주제는 포교를 위한 기초교리, 부처님의 생애나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 조건적 발생의 법칙(緣起法), 여덟 가지 성스러 운길(八正道), 다섯 가지 존재의 다발(五蘊), 여섯 가지 감역(六入)이 아니라, 당시 서북인도에 대두되었던 부파불교의 난문(難問), 즉 윤회의 주체 문제, 시간의 존재 문제, 여래의 사후 존재에 대한 문제, 그리고 까다로운 심리론, 해탈론, 수도론 등이었다.

 

서시(序詞)에서 밀린다 왕은 무지한 장군출신의 그리스 왕이 아니라, 세속적인 모든 학문, 전설, 세속법, 쌍키야, 요가, 니야야, 바이세시까, 수학, 음악, 의학, 사베다. 고담, 고전설, 천문, 환술, 인명, 주술, 병학, 시학, 지륜술(指輪術)19가지에 통달하는 논객으로 설명되고 있다. 나가세나는 '세 가지 베다와 어휘론, 의궤론, 음운론, 어원론, 고전설에 관한 눈이 생겨나서, 어구에 밝고, 문법에 밝고, 세속철학과 대인상 뿐만 아니라 모든 논장을 통달한 논사(Miln.12,45)로 규정되고 있다. 그리고 AD.4세기의 위대한 논사인 바쑤반두(Vasubhandu)는 구사론(Abhidharmakośa)의 제9장 파아집론(破我執論)에서 밀린다팡하를 인하고 있고 AD. 5세기경의 붓다고사는 <디가니까야>의 암밧타의 경(Ambatthasutta)의 주석을 위시한 몇몇 주석에서 밀린다팡하의 내용의 몇몇 구절을 언급하고 있다. 이들이 밀린다팡하를 언급하는 것은 그들이 밀린다팡하를 준경장(經藏)으로 대우한 까닭이다.

 

 

 

밀린다 왕과 메난드로스

 

밀린다(Milinda) 왕을 메난드로스(Menandros)라고 비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밀린다 왕은 싸갈라(Sagala)시의 왕이고, 싸갈라 시는 그리스인의 도시(Miln.1)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밀린다 왕은 '전인도의 제일의 왕'(Miln.27) 이었다. 메난드로스 왕의 주화가 인도의 여러 지방에서 발견되었다.

 

메난드로스가 '밀린다'라고 불린 음성학적인 이유는 리스데이비즈(QKM. xviii-xix)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인도에는 개인의 이름에 제왕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인 인드라(indra) 또는 빠알리어의 인다(inda)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국왕인 메난드로스에게 제왕의 칭호를 붙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따라서 안드로스(andros)가 인드라(indra)또는 인다(inda)가 되었다. 그리고 앞의 멘(Men)은 빠알리어에서 엘(1)이 엔(n)으로 변화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역으로 멜(Mel)이 되었고, 그 가운데 모음인에(e)가 뒷모음과 동화되면 서이(i)로 바뀌어 멜(Mel)이 밀(Mil)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해서 밀(Mil)과 인다(inda)가 합해지면, 범어로는 밀린드라(Milindra) 빠알리어로는 밀린다(Milinda)가 된다. 한역의 음사는 다음과 같다. 진제역의 구사론22권에는 민린타(旻陀), 현장역 제30권에는 필린타(畢陀), 강증희 역 육도집경(六度集經) 4권에는 미란왕(弥蘭王), 잡보장경(雜寶藏經) 9권에서는 난타왕(難陀王), 부다갈마 등 역의 아비달마비바사론(阿毗達磨毘婆沙論)에는 무룬다왕(無崙茶王)이라고 되어있다. 티베트어로는 겔뽀 밀린드라(rGyal po Milindra)이다.

 

그리스 역사가들에게 메난드로스(재위기간 B.C.163-150)로 알려진 밀린다 왕은 그리스 문헌에 따르면, 그는 박트리아의 왕이라고 불렸고 간다라지방을 지배했었다. 박트리아는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 고대 간다라 지역을 마주보고 있는 지역이었고, 박트리아 지방의 언어는 고대 이란어 계열이었으나 지배계층이었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박트리아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의 남쪽과 아프가니스탄의 북쪽이다. 근래의 중앙아시아의 모든 나라에 해당하는 곳이기도하다. 기후가 온화한 산지로, 물이 많고 땅은 비옥하다. 고대 인도의 기록자들은 메난드로스가 빠딸리뿟따(Patna) 시로 남하해서 갠지스강 계곡의 동쪽 멀리까지 왔다고 지적하고 있으며,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Strabo: BC. 63-AD. 24)은 그가 '알렉산더 대왕보다 더 많은 부족을 정복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인도는 알렉산더 대왕조차 기억해 주지 않았지만, 메난드로스는 인도가 유일하게 기억해준 그리스계의 왕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불교의 대박해자로 알려진 슝가 왕조의 뿌시야미뜨라(Puśyamitra)를 서북인도에서 몰아내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북인도의 불교인들은 이방인이 아니라 인도의 왕으로 받들고, '전인도에서 제일가는 왕'이라고 불렀고 '마하라잔(Mahārājan)'이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메난드로스 시대에 와서, 박트리아는 인도-그리스 왕국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때 그들이 사용하던 주화의 대부분이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인도에서 발견된다. 22종류나 되는 금··구리의 동전이 주조·유통되었는데, 동전의 앞면에는 메난드로스의 초상화가 청년기에서 노년기까지 새겨졌고, 그리스어로 '구세주 왕 메난드로스'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다. 그가 남긴, 동전에 새겨진 법률(法輪)이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탑 등을 통해서, 그가 불교에 귀의한 것이 객관적으로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또한 플루타르코스가 기록한 그리스문헌에 따르면,그는 정의로운 통치자로 전쟁중에 사망했는데, 도시들이 유골을 두고 서로 분열하여 다투다가 분배해서 탑을 만들어 세우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그리고 밀린다팡하에서 대론의 배경이 되는 도시는 싸갈라(Sagala)시인데, 메난드로스 왕이 즉위하자 인도-그리스 왕국의 수도가 된 곳이다. 싸갈라시는 알렉산더 대왕의 아시아 원정시의 동쪽 한계에 가까운 지역인데 현재 파키스탄의 쉬알꼬뜨(Sialkot)로 펀자브 북부에 위치한 도시이다. 싸갈라 시를 수도로 삼은 인도-그리스 왕국에서는 그 근처의 간다라 지역을 중심으로 동서양 문화가 절충되는 간다라 양식의 독특한 미술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도-그리스 왕국은 BC.10년 경에 토하라인들이 세운 월지국(月支國:스키타이)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쿠산 왕조에 병합되어 인도에서 그리스 세력은 종식된다.

 

나선비구경에서는 밀린다 왕은 태자로 태어나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되어 있어 역사적 사실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밀린다팡하에서는 출신에 대한 언급 없이 전생에서 현생으로 태어나 싸갈라 시의 왕이 되었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그의 출생지는 밀린다팡하에 의하면, 싸갈라 시에서 200요자나 떨어진 알렉산드리아의 두 강 사이의 지역(Alasando nama dīpo:Miln. 82)에 있는 깔라씨(Kalasi)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나선비구경과 밀린다팡하만을 놓고 본다면, 밀린다 왕은 인종적으로는 그리스인인지 몰라도, 그리스식 교육을 받고 자랐는지는 불분명하고, 전생에 인도인으로 살았던 바라문 수도자였고 현생에서도 인도식으로 교육을 받은 자였다. 그는 인도의 상층 계급에서 받는 모든 학문에 정통했다. 그는 밀린다팡하에서 그리스인을 지칭하는 '요나까인'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요나까인'은 인도에 동화되거나 혼혈화된 '인도-그리스' 왕국인 박트리아의 주민을 의미했을 것이다.

 

메난드로스가 언제 살았는지는 이설이 많다. 호너(I. B. Horner: MQ. xxii-xxiv)에 의하면, 빈센트 스미스는 B.C.160-140, 라모떼는 BC. 163- 150, 나레인은 BC. 155-130, 굿스미드는 BC. 125-95. 랩슨은 BC.175 . 바샴은 BC. 1세기후반으로 잡고 있다. 그리고 메난드로스의 인도식 이름 '밀린다'는 빠알리문헌에서는 밀린다팡하 이외에는 거의 언급이 없다. AD. 1516년 태국의 장로에 의해 쓰여진 치앙마이의 연대기 지나깔라말리(Jina-kālamālī)에서 '밀린다는 꾸따깐나띳싸(Kütakannatissa)가 아누라다뿌라를 다스리고 있을 때 인도의 싸갈라 시에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 유일하다. 그러나 꾸따깐나띳싸의 통치시기는 AD. 16/17-38/39년이었으므로, 메난드로스가 그렇게 늦은 시기에 등장했을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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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세나는 실존인물인가

 

밀린다팡하나선비구경의 주요한 테마에 대하여 밀린다 왕이 질문하는 보조적 역할을 하는데 비해, 나가세나는 정확한 해명을하는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두 버전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다. 윤병식의 나선비구경연구에 따르면, 나가세나의 고향에 대해 나선비구경의 2권본에서는 천축(天竺)이라고만 되어 있고, 삼권본에서는 설일체유부의 근거지인 카슈미르(罽賓縣)라고 하고, 밀린다팡하에서는 중부지방의 동쪽 경계에 있던 상업도시 까장갈라(Kajangala)라고 되어 있는 등 모두가 불일치하고, 이러한 불일치성은 나가세나 존자의 실존을 의심케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에서 두 판본이 차이가 나지만, 동일한 원전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사실과 나가세나가 내부적으로 실존인물일 가능성은 틱민찬 스님의 밀린다팡하(P)와 나선비구경(C)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입증될 수 있다. 1) P에 따르면 사미와 수행승이 모두 서원을 세웠고, 후에 서원에 따라 밀린다 왕과 수행승 나가세나로 태어났다. C에 따르면, 전생에 코끼리였던 바라문과 신선이자 그 바라문의 친구였던 바라문이 각각 서원을 하였고, 그들의 뜻에 따라 나선(那先)과 미란(彌蘭)으로 태어났다. 2) P에 따르면, 나가세나는 바라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세 가지 베다와 바라문으로서의 지식을 배웠으며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승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C에 따르면, 코끼리가 역시 바라문 가문의 아들, 나선(那先)으로 다시 태어나 커서도 부처님의 가르침과 수행승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3) P에 따르면, 온 일행이 마하쎄나 (Mahāsena) 천신에게 세상에 태어나기를 청하러 갔을 때, 앗싸굿따(Assa-gutta)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로하나(Rohana)에게 나가세나의 본가에 가서 7년 반 동안 탁발하고 나가세나를 재가의 삶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를 출가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C에 따르면, 나선(那先)에게는 아라한인 누한(樓漢)이라는 삼촌이 있었는데 그가 나선을 출가시키고 십계를 준다. 누한은 로하나와 동일인물일 수 있다. 4) P에 따르면 앗싸굿따는 밧따니야(Vattaniya) 초암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밑에서 나가세나는 우기 3개월 안거를 보냈다. C에 따르면, 화전사(和戰寺)라는 사원에 500명의 아라한들이 있었는데 제일인자가 존자 알파왈(頻波日) 밑에서 공부했다. 바타니야 암자는 화전사와, 아라한 앗싸굿따는 알파왈과 동일시 될 수 있다. 5) P에 따르면, 나가세나는 여성 재가신도에게 아비담마를 설파했는데, 앗싸굿따는 설법하는 자나 청취하는 자 모두가 흐름에 든 경지를 얻었다고 기뻐하면서 나가세나가 화살 한 방으로 두 목표를 맞혔다고 칭찬했다. C에서도 역시, 나선은 재가신도에게 가르침을 설했는데, 모두 흐름에 든 경지에 들어섰다. 알파왈은 나선이 두 개의 과녁을 화살 한 방에 명중시켰다고 칭찬했다. 6) P에서는 담마락키따는 나가세나가 '삼장의 부처님 말씀을 기억하더라도 수행자의 삶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아니다.'라고 그가 거룩한 경지를 얻지 못한 것을 꾸짖었는데, 그 말을 듣고 그날 밤 나가세나는 열심히 노력하여 거룩한 경지를 얻었다. C에서도 나선은 스승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상가에서 쫓겨난 뒤에, 참회하여 열심히 노력하여 아라한과를 얻었다. 7) P에서는 거룩한 경지를 얻은 뒤에 나가세나는 싸갈라시로 가서 쌍케이야(Sankhyeyya) 승원에 머물면서 밀린다와 대론하였고, C에서도 나선은 사갈국(舍竭國)에 와서 지설지가사(止泄坻迦寺)에 머물면서 미란 왕에게도 전하였다. 싸갈라시는 사갈국, 쌍케이야 승원은 지설지가사와 일치한다.

 

위의 일곱 가지 유사점으로부터, 우리는 많은 세부 사항이 다르지만, 빠알리 본과 한역본이 모두 동일한 원전의 출처에서 파생되었으며, 공통된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적어도 내부적으로 나가세나 존자의 실존을 의심할 만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세세한 부분의 차이는 원래의 원전이 다른 장소에서 번역되거나 첨삭되면서 달라진 것이다.

 

그러나 나가세나 실존의 외부적 증거를 찾으려 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모든 논장을 단 한 번의 설명으로 통달한'(Miln.12) 인물이라고까지 설명되는 나가세나라는 위대한 인물이 동시대에 다른 문헌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지나깔라말리의 한 신화적 이야기로 부가되었는데, 그의 친교사 로하나나, 스승 담마락키따를 비롯한 나가세나의 인연담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지나깔라말리 이외의 다른 빠알리문헌에 등장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나선비구경의 나선비구도 다른 한역 경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단지 구사론(30)에서 나가세나를 용군(龍軍)이라고 지칭하고 잡보장경(9)에서는 나가사나(那伽斯那)로서 난다왕(難陀王)과 문답을 한 것을 기록하고 있지만, 전혀 전기적인 기술은 없다. 따라서 나가세나는 부파불교시대에 논사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가공인물일 수 있다는 가정을 배제할 수는 없다. 더구나 밀린다팡하에 기록된 나가세나의 행적은 후대 스리랑카의 마하방싸에 서술된 목갈리뿟따 띳싸의 젊은 시절과 유사하다. 나가 세나에 대하여 정밀히 연구한 대승불교학자 드미에뷰(Demiéville)를 비롯하여 나까무라 하지메(中村元)에 이르기까지 모든 불교학자들이 나가세나의 역사성을 의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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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다팡하의 저자와 성립시기

 

밀린다팡하가 언제 누가 저술한 것인지 알려져 있는 것은 없다. 다만 밀린다 왕이 서북인도에서 실존했던 메난드로스 왕과 동일인물이라면, 밀린다팡하의 성립연대는 메난드로스 왕과 동시대이거나 그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고 전설적으로 살아있던 때였을 것이다. 메난드로스왕의 재위 기간은 BC. 2세기 중엽, BC.163-150년이었다. 그러나 나선비구경과 밀린다팡하에 나타난 밀린다 왕의 전기나 나가세나의 전기를 살펴보면, 나가세나는 진위조차 의심되는 인물이고, 메난드로스는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전설적인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불란서 학자들은 적어도 메난드로스 사후 50년이 지나서 BC. 1세기에 밀린다팡하의 원형이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독일학자 에리히 프라우발르너(Erich Frauwallner)'메난드로스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던 BC. 1세기경'(Die Philosophie des Buddhismus, 1956, S.66)이라고 주장했다. AD. 5세기 전반에 왕 마하나마(Mahānāma: AD. 412~434)의 통치시에 붓다고사가 스리랑카에 들어와 니까야의 고대의소를 통합하여 주석을 달면서, 디가니까야의 암밧타경(Ambatthasutta)의 주석을 위시한 몇몇 주석에서 밀린다팡하 내용 몇몇 구절을 언급했으나, 붓다고사는 고대의소를 통합했으므로 그 고대의소는 훨씬 이전인 AD. 1세기 후반까지 성립된 것들이라고 본다면, 밀린다팡하의 원형적 형태의 성립는 AD.1세기 중반을 넘어설 수 없다. 따라서 밀린다팡하의 성립은 상한선이 BC.1세기, 하한선이 AD.1세기로 잡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 시기는 그리스인들이 서북인도에 그리스식의 도시를 세우고 1세기나 2세기가 지나서, 즉 메난드로스 왕 사후 1~2세기가 경과해서 나타나기 시작한 간다라 미술이 등장한 시대와 맞아떨어 지기도 한다.

 

베셔르트(H. Bechert: FKM.20)에 의하면, 밀린다팡하의 원형적 언어는 빠알리어와 친화적인 서북인도의 프라크리트어였거나 그와는 차이가 있는 중세 인도아리안어였다. 한역 나선비구경의 원전은 중세인도아리안어, 산스크리트어나 하이브리드산스크리트어 또는 그들의 혼합어로 쓰여진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데, 제목은 "나가세나빅슈쑤뜨라(Nagasenabhiksusūtra)였을 것이다. 밀린다팡하는 고층 부분이라도 각각의 상세한 내용이 모두 원래의 초기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 많은 부분이 BC. 1세기에서 AD.1세기경의 서북인도의 불교를 반영하고 있다. 밀린다팡하의 저자도 물론 그 당시에 서북인도에 살았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 내용에 갠지스 강 이남의 지명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존하는 밀린다팡는 적어도 제2편의 말미와 제3편의 말미에서도 '밀린다 왕의 질문이 끝났다.'라는 구절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밀린다팡하는 구성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뉠 수 있고, 훗날 붓다고사에 의해서 첨가된 에필로그의 시들까지 포함한다면, 네 부분으로 나뉠 수 있다. 이렇게 유추해 본다면, 최초의 저자는 BC. 1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에, 1편과 제2편까지의 자료를 구전으로 전해 듣고, 3편의 자료는 다른 저작자가 나중에 수집하여 첨가한 것일 수 있다. 문자화된 것도 이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인도에서의 모든 성전의 문자화는 기원전후에 비로소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AD.5세기경 붓다고사에 의해서 '밀린다팡하가 그의 주석에서 인용된 것은 제3편까지의 자료(상권)였다. 이때 붓다고사는 에필로그의 서사를 쓴 것이 된다. 그리고 제4편 이후(하권)의 자료는 밀린다팡하가 일단 문자화된 이후에 스리랑카에 전해 졌다가 붓다고사 이후에 또 다른 저작자에 의해서 첨가된 것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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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린다팡하의 전체 줄거리

 

밀린다팡하의 전체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싸갈라 시에 대한 묘사와 나가세 나의 생애와 이유빨라(Ayupala)와의 대담에서 실망한 밀린다 왕의 이야기와 두 사람이 싸갈라 시에서 만남으로써 대론이 시작된다. 드디어 왕은 스님 앞에서 하나하나의 의문을 제기한다. 스님은 왕이 만족하도록 그것들을 풀어낸다. 대화가 끝나자 왕은 의문을 해결해준데 대하여 감사를 표한다. 그는 마침내 재가의 불교신도가 되고 왕위를 아들에게 물려주고, 출가하여 거룩한 경지를 얻고, 밀린다 정사를 지어 나가세나 존자에게 기증한다. 우리는 빠알리본에 나오는 이러한 진술의 정통성을 증명할 만한 역사적 증거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불교와 교류한 것은 그리스의 플루타르크(Plutarch)의 기록에서 입증된다.

 

1편은 세속적 이야기로서 대론하기까지의 '전생과 금생의 인연담'을 서술한 것이고, 2편부터 마지막 제7편까지 대론의 형태를 띈다. 대론은 경전적 가르침에서 유래한 것이나 아비담마적인 것으로 특별히 논사(論事: Kathavatthu)에 발견되는 논제들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러한 주제들은 당시에 설일체유부에 속하는 서북인도의 불교논사들 사이에 잘 알려진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2편의 대화는 출발부터 그 주제선정이 놀랍다. 나가세나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Miln. 25)라는 질문에 대답하면서 '나가세나'라고 하지만 '이름 뿐이고 거기서 개아(個我)는 발견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래코-박트리아 시대의 불교는 크게는 개아론파(犢子部:pudgalavāda), 실재론파(上座部 sthaviravāda), 유명론파(說假部:prajñaptivāda)로 나뉘는데, 이러한 분파들은 개아(個我)가 실유(實有)인가 가유(假有)인가의 논란에서 파생 된 것이다. 여기서 나가세나는 초기불교의 입장에서 당시에 강한 실재론적 입장을 보여주던 서북인도의 설일체유부도 뛰어넘어 무아론(無我論)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인도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시되는 그리스 철학자 피론(Phyrrho)'모든 것은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라는 철학과 동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밀린다 왕은 "내가 갓난아이로 어리고 유약하게 침대에 누워있을 때와 내가 지금 성장했을 때는 다르다."(Miln.40)라고 주장한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에피카르모스(Epicharmus: BC.5세기)는 그의 희극에서 이와 같이 풍자를 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 쓴 사람이 어느날 친구를 만나자 인간은 계속 변화하기 때문에 자기는 이제 그 당시 돈을 빌린 사람이 아니라고 우겼다. 친구는 그 변명을 받아들이고 대신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가 만찬장에 도착했을 때 하인들이 그를 도로 내쫓았다. 친구는 이미 그가 초대했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밀린다 왕도 헤라이클레토스의 함정에 빠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속적인 흐름이면 아무 것도 존재 하지 않게 된다. 무상을 끊임없는 변화로 해석한다면, 사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나가세나는 초기불교의 무상(無常)의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고 아비담마의 상속(相續: santati)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론을 도입하여 해결 하고 있다. 나가세나는 주인이 심은 망고 열매와 도둑이 훔친 망고 열매가 달라진 것이라고 진술하여 처벌을 면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Miln.46)는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의 신도였던 플라톤은 윤회사상을 갖고 있었다.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는 일이 정말로 있고, 살아있는 것은 죽은 것에서 생기고, 죽은 자의 영혼은 생존하며, 착한 영혼은 악한 영혼보다 좋은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을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밀린다 왕은 무엇이 윤회하면서 생을 받는가(Miln.46), 즉 영혼이 윤회하는가를 묻고 있는데, 여기서 나가세나는 영혼을 명색으로 해체하여 대답하고있다. ()은 개체의 인식적 측면을 색()은 개체의 재료적 측면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다. 명은 정신적 요소에 속하는 느낌, 지각, 의도, 접촉, 정신활동(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a, manasikāra)이고, 색은 물질적 요소로서 땅···바람(地水火風)과 거기에서 파생된 물질(upādāya rūparn: 所造色)이다. 이를 모두 합해서 명색이라고 한다. 따라서 명색은 '정신·신체적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 이 윤회하면서 무아윤회(無我輪廻: Miln.46)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밀린다 왕이 '시간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나가쎄나는 '과거의 시간, 미래의 시간, 현재의 시간이 있다.'(Miln. 49)라고 대답했는데, 밀린다 왕의 물음은 헤라클레이토스적으로, 무한한 과정이 수많은 소멸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시간과 동일시되는 세계질서를 복선으로 깔고 있는 문답일 지도 모른다. 유위법을 시간의 본질로 보는 설일체유부의 사상과 토대가 같다는 점에서 흥미 있는 대화로 이끌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윤회와 시간과 관련하여 알렉산더의 스승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의 제일원인으로서 인과적 효능을 가지는 최초의 시작은 '부동(不動)의 동자(動者)'라고 주장했다. 밀린다 왕은 '시간의 뿌리'(Miln. 50)를 생각하면서 그러한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을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원인들은 동인을 낳는 원인이 아니라 제일원인이 개입하기 위한 기회원인들이 될 뿐이다. 이것은 절대적인 형이상학이 빠지기 쉬운 함정을 잘 대변하고 있다. 나가세나는 최초의 절대적 시작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적인 원인과 결과의 무한소급을 요청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Miln. 51)

 

그리고 나가세나의 '지속적 존재 없이 생성되는 어떤 형성들은 없다.'라는 관점(Miln.52)은 다분히 그레코 부디즘적인 명제이다. 인도철학과 불교철학은 '생성''존재'를 명확히 구분하지 않았다. 플라톤은 그와는 달리, 존재(혹은 존재자)와 생성(혹은 생성자)을 구별했지만, 이 우주는 '언제나 존재하는 동시에 언제나 생성하는 것', 즉 존재자인 동시에 생성자라고 주장했다. 나가세나는 이러한 사유에 동조한다.

 

그리고 밀린다 왕은 감각기관과 분리된 영혼의 존재(Miln. 54)를 강조하는데, 이러한 생각은 영혼이 불멸하는 존재로서 몸에 정착하여 있다고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견해나 '영혼은 보이는 신체 이외의 것이 틀림없으나 신체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대변하는 듯 보인다. 나가세나는 감관을 통한 체험에서 오류경험의 가능성을 타진함으로써 그러한 그리스적 영혼관을 수정한다.

 

3편에서는 그리스 철학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업설에 대한 논쟁으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사회적 불평등과 생리적 불평등을 구분하지 않았던 밀린다 왕의 자연주의적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나 인도가 모두 계급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던 만큼, 그러한 불평등이 종자의 차이에 기반한 결과라고 나가세나는 설득력 있게 해명한다. (Miln.65) 그리고 업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품었던 밀린다 왕은 '어디에 업이 존재하는가?' (Miln.72)를 묻자, 그 업은 우리의 인격적 개체인 명색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만, 아직 열매가 열리지 않은 나무에서 어디에 열매가 있는지 보여줄 수 없는 것처럼, 그 업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열반이 소멸인가?'라는 밀린다 왕의 물음에 대해 나가세나가 '안팎의 감역에 대하여 환호하고 집착하며 생겨나는 그 흐름에 따라 생노병사가 생겨나는데, 그것의 소멸이 열반이다.'라고(Miln.69) 대답한다. 이러한 열반의 개념은 일반사람도 공덕행의 결과로 열반을 얻을 수 있다는 식으로 변화한다. 스키타이, 그리스 중국, 알렉 산드리아, 카슈미르, 간다라 등에서 올바로 실천하는 자는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개념으로 변화했다. AD. 134년의 까라완(Karawan) 비문에서 '설일체유부의 스승을 위해 행한 공덕행이 청신녀가 열반을 얻는데 도움을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특징적인 것은 밀린다 왕이 "나는 '백 년 동안을 약하고 불건전한 일을 행하더라도, 죽는 순간에 한 번이라도 부처님에 대한 새김을 확립할 수 있다면, 그는 천상에 태어날 것이다.'(Miln. 80)라는 말을 믿지 않는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믿음에 의한 구원보다는 현세에서 조화로운 삶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가세나는 '아무리 무거운 돌이라도 배 위에 실으면, 물 위에 뜰 수 있다.'(Miln.80) 논리를 내세워 그것을 정당화시켰다. 초기불교에 부처님에 대한 새김(佛念: Buddhānusati)의 명상이 있었지만, 그것이 믿음에 의한 구원과 연결을 시도하려고 싹을 틔운 것은 그레코-박트리아 시대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생각은 대승불교적 경향과 동질적인 것이고, 후대에 대승불교의 정토교(淨土敎)가 등장하면서부터는 가장 중요한 명상수행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하권 제4편부터는 형이상학과 관계된 양도논법에 속한 문제가 크게 부상한다. 1) 영혼이 없다면 무엇이 윤회하는가? 2 왜 부처님처럼 완전히 깨달은 자가 괴로워하고 죽어야 하는가? 3) 진리란 무엇인가? 4) 철학적 논의의 잘못은 무엇인가? 5) 삶이 고통이라면 왜 자살이 출구가 되지 않는가? 6) 왜 유덕한 자가 고통을 받고 사악한 자가 번영하는가? 7) 왜 경전의 구절에 모순이 있는가? 8) 부처님의 신과 같은 특성에 대해서는 의혹이 있는데, 부처님은 실존하는가? 이러한 형이상학적 문제에 의혹(Samsaya)을 제기하는 것은 우파니샤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대에 지성인의 마음을 지배하는 주된 의문은 주로 죽음과 죽음 이후의 운명, 대상적 우주의 본질, 인간 자신의 자아의 본질, 인간의 업과 사후의 운명, 재생으로 향하거나 최종적 해탈을 얻는 길 등이었다. 우파니샤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러한 질문을 대답을 줄 수 없는 무기(無記)로 분류했다. 부처님에 의하면 이러한 모든 질문은 해탈에 쓸모가 없고 장애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린다팡하에서 유사한 양도논법에 속하는 딜레마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 것은 의혹을 표현하고 수수께끼같은 질문을 하는 관행이 인도서북부에 유행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모든 것은 불확정적이다.'라고 주장하면서 판단유보, 즉 에포케(epochee)를 단행한 그레코 부디즘적 피로니즘의 회의주의와 유사하다. 또한 제4편에서는 전생이야기들을 많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서북인도의 불교가 윤회전생에 관하여 특별히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5편에는 서북인도 불교의 재가신도들을 사로잡은 중요한 문제가 등장한다. 그것은 출가생활의 유용성에 관한 문제였다.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 교단이 주장했듯, 가정을 꾸리고 생활하는 것이 영적 지식의 추구를 위해 양립할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밀린다 왕은 서사(序詞)에서 존자 이유빨리에게 '재가자나 출가자나 여법하게 올바로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출가자의 이점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아유빨라는 침묵을 지켰지만(Miln.20) 나가세나는 "대왕이여, 출가자는 욕망을 여의고, 만족하고, 멀리 떠나있고, 사람을 여의었고, 정근하고, 애착이 없고, 주처가 없고, 계행을 구족하고, 버리고 없애는 삶을 살고, 두타행의 실천에 밝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출가자에게는 무엇이든 해야 할 일이 속히 성취되는 만큼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Miln. 244) 라고 정확한 답변을 내린다.

 

그리고 음식과 물을 바치는 조상숭배는 고대 바라문교의 전통이지만, 밀린다팡하에서 장자들이 행하는 풍습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것으로 메난드로스 시대에 서북인도의 불교도들이 바라문교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밖에도 밀린다팡하에서 서북인도 불교의 중요한 몇몇 문화적 양상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처님의 유골에 대한 숭배, 부처님의 유골로 사리탑을 세워 부처님에게 예경하는 것, 종교적 공덕의 성취를 위해 승원에 보시하는 것 등, 대중적 불교가 인도-그리스 시대와 그 이후 이어지는 시대에서 널리 유행했다는 사실을 기원전후의 많은 카로슈티 비문이 보여준다.

 

6편에서는 밀린다 왕은 두타행에 대해서 강한 호기심을 표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인 전체가 품고 있던 인도인의 고행에 대한 경외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알렉산더 대왕은 자신의 원정의 목적에 인도의 고행주의 철학자를 만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타행이란 불교적 고행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말은 맛지마니까야나 율장에 언급되고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두타행은 수행승들에게 의무적인 실천덕목이 아니었다. 그러나 밀린다팡하의 배경이 되는 그레코 박트리아의 불교에서는 열반을 얻기 위한 두타행이 승려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재가신도에 의해서도 일반적으로 널리 행해진 것을 알 수 있다.

 

밀린다팡하는 불교교리뿐만 아니라 불교윤리, 형이상학과 심리학에 대한 포괄적 해설을 보여준다. 나아가 서북인도에서의 발전된 불교의 특별한 양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서북인도의 불교의 역사적 배경을 알려면 그레코 부디즘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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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코 부디즘(Greco-Buddhism)

 

우리는 바실리아데스(D. TH. Vassiliades)그리스와 불교라는 논문을 중심으로 밀린다팡하의 대론의 중심지였던 서북인도의 그레코 부디즘적 의미를 좀 더 일반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알렉산더 대왕 이전에 정보가 부족한 그리스인들에게 인도에 대하여 알려진 것은 최초의 그리스 작가들의, 지금은 상실된 책의 파편들을 통해서였다. 그러다가 베다 시대부터 인도 반도에 만연했던 고대 바라문 및 수행자(사문)의 전통에 대한 그리스인의 지식, 인도 금욕주의자들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알려졌다. 헤로도토스(BC.484-424)는 아무것도 죽이지 않고 특이한 방식으로 죽음을 선택한 자인 금욕주의자들의 관습을 소개했다. 이솝(BC. 620-564)이야기에 등장하는 특히 원숭이, 악어, 그리고 다른 열대 동물의 묘사는 인도가 기원일 가능성도 있다.

 

맛지마니까야(MN. II. 149)에는 역사적인 부처님(BC.560-480)이 직접 그리스인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등장한다: "앗쌀라야나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대는 '요나, 깜보자, 그리고 다른 변경 지방의 백성들에게는 귀족과 노예란 두 계급이 있는데, 귀족으로 있다가 노예가 되기도 하고, 노예로 있다가 귀족이 되기도한다.'라고 들은 적이 있습니까?" 요나(Yona)는 후세에 야바나(yavana)또는 요나까(yonaka)라고 불리었다. 박트리아인과 관련된 그리스의 이오니아를 뜻하며, 그 지방과 지방민을 모두 뜻한다. 그러나 '요나'라는 나라는 초기경전과 자이나 문헌이 제시하고 있는 국가 목록인 16대국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다만 쭐라닛데싸 (Cullaniddesa)앙굿따라니까야에 제시된 16대국의 목록에서 간다라를 '요나'로 대체하고 있다.

 

역사적 부처님의 생애를 전후하여,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제국(BC. 559- 330)은 트라키아(유럽의 발칸반도)에서 간다라(현대 파키스탄의 대부분)까지 확장되었다. 이 시대에 압데라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BC. 460-380)는 마가다 국의 궁정의사인 지바까 의학을 가르쳤던 탁실라 교수들과 동시대 사람이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페르시아 황제의 신하였다. 또한 당시 한 인도인이 소크라테스를 방문하여 철학하는 의미에 관해 질문했는데, 소크라 테스가 인간의 삶의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고 하자, 인도인은 웃으면서 인간을 연구해서 이해하는데, 신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India and Europe. 8) 아테네에서 빠딸리뿟따 시에 이르는, BC. 5세기 내지 BC. 4세기의 세계는 많은 면에서 상호작용하는 하나의 문화권이었다. 통치자들은 다른 언어와 종교를 가지고 군대에 복무했던 사람들을 고용하여 행정부를 운영하였고, 무역로를 건설하여, 세상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 로 사상과 상품을 전달하였다. 아쇼카 왕은 시리아에 있는 그리스 왕 안티오코스에게 불교의 포교사절들을 보냈다. 기원전 1세기경에 인도 중부(현재의 마하라슈트라)에 지어진 신전의 바위 벽에는 '시하다야''담마'라고 불리는 두 그리스 기부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인도의 주요 불교 중심지인, 즉 그리스와 그 반대 방향, 박트리아와 간다라 식민지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있어, 그리스 불교도들이 인도아대륙에 정착한 정도를 보여준다(Lam- otte 1988, 512)

 

<디가니까야(DN.II.5)에는 개의 삶을 흉내낸 네 발로 걷는 나체수행자인 꼬락캇띠야(Korakkhattiya)가 땅에 던져진 음식을 입으로만 삼키고 입으로만 먹는 것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시노페의 냉소적인 디오게네스 (BC.404-323)는 거리의 통 안에서 살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개로 조롱을 받았고, 자신을 개로 여겼다. 디오게네스의 삶은 대중에게 충격을 주기 시작했고, 자신의 제자들을 불교 수행승처럼 훈련시키면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치장하지 않고, 가볍게 옷을 입고, 맨발로 걸으며, 거리에서 두리번거리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는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을 때, 어떤 나라나 도시와도 동일시하기를 거부했고, 자신은 '세계의 시민'이라고 대답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등장으로 인도아대륙으로의 그리스의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알렉산더의 동방출정에 동행한 그리스 철학자로는 칼리스테네스(Kalli-stenes), 오네시크리토스(Onesicritos: 디오게네스의 제자), 피론(Pyrrho), 아낙사르코스(Anaxarchos)가 있었다. 그들은 인도에 체 류한 18개월 동안, 아리스토텔레스가 데려오길 원했던 짐노소피스트(gymno-sophists:裸形哲學者)로 묘사되는 금욕을 추구하는 인도철학자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피론은 평정과 이욕을 주장했는데, 그리스로 돌아와 현대 학자들에 의해 최초의 서양 회의론학파로 간주되는 피로니즘을 창시했다. 냉소주의자 오네시크리토스는 인도에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은 나쁜 일도 좋은 일도 아니며, 견해들은 단지 꿈에 불과하다. 마음을 즐거움과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시 키는 것이 최고의 철학이다.'라고 배웠다. 그들은 인도에서 고행주의자들을 만났고 그리스와 인도 철학의 유사성에 주목했다.

 

오네시크리토스는 인도 나형철 학자인 단다미스(Dandamis)와의 대화에서 그의 철학적 이해와 피타고라스 (BC.570-495), 소크라테스(BC.470-399)의 철학적 이해 사이에 부합되는 점이 많다는 것과, 단다미스가 그리스인이 자연법칙(physis)을 사회적 규약(nomos)으로 대체한 것에 대해 비판했다는 사실도 주목했다. 알렉산더 대왕의 모험은 인도인의 마음에 아무런 직접적인 인상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정복 전쟁의 영향으로 그리스 문화가 인도에 끼친 그레코 부디즘적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고대의 인도문헌에서 발견되지 않지만, 알렉산더와 인도 나형고행주의 철학자와의 만남은 헬레니즘 작가들이 죽음과 삶에 대한 그들의 철학적 생각을 표현하는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알렉산더가 죽은 몇 년 후, 그리스인의 피가 흐르는 황제 아쇼카(BC. 304-232)가 전인도를 통일한 뒤에 불교로 개종하고 전 세계에 불교를 전파했다. 불교는 셀레우코스 제국으로부터 분리된 그레코-박트리아 왕국으로 퍼졌다.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인도의 마우리아 제국 통치기간 동안 인도의 문턱에서 강력한 헬레니즘 문화를 유지하면서도 불교친화적 태도를 유지했다. 기원 전 180년경 마우리아 제국이 슝가 제국(BC.185-73)에 의해 무너졌을 때, 불교친화적인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슝가 인들로부터 마우리아인들을 보호했고, 인도로 확장하여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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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왕국의 가장 유명한 왕인 메난드로스는 꽃피는 불교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인 싸갈라 시에 수도를 세웠다. 데메트리오스(Demetrius)가 건설하고 메난드로스가 재건한 그리스의 대도시가 탁실라(Taxila) 인근 시르카프(Sirkap)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는데, 이곳에는 불교의 스투파들이 힌두교 사원과 그리스 사원들과 나란히 서 있었다. 메난드로스가 불교의 종교적 관용을 잘 실천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마하방싸29장에 따르면, 메난드로스의 통치기간 동안, 마하다르마락시따(Mahādharmarakşita)라는 그리스인 장로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북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곳에 있는 코카서스 산맥의 알렉산드리아에서 3만 명의 승려를 이끌고 스리랑카에 스투파를 봉헌했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가 메난드로스의 영토에서 번성했으며 그리스인들이 불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기원전 1세기에 만들어진 스투파 안의 꽃병에서 테오도로스(Theodoros)라는 이름의 그리스 지방총 독이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했다는, 카로스티 문자로 쓰여진 기록이 발견되었다.

 

또한 인도의 영향 아래 살았던 그리스인들의 대부분은 불교로 개종했는데, 이는 문헌과 비문에서 발견된 많은 그리스 승려들이 인도식 이름을 채택했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초기불교가 부처님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장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을 닮은 신의 형태로 표현하지 않았다. 인간의 형태로 부처님을 표현한 가장 초기의 모습은 BC. 1세기부터 AD. 5세기까지 페샤와르 계곡 - 리그베다에서는 간다라로 알려져 있음에 번성했던 헬레니즘적인 간다라 학파의 조각들에서 발견된다. 오늘날 불교 예술은 대부분 그레코 간다라 문화의 영향하에 성립한 것이다.

 

부처님의 주요 관심사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었으므로 불교는 기본적으로 실용주의적이고 다원주의적이었으나, 철학적으로는 점점 레우키포스(Le-ukippus)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영원한 물질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았지만, 테라바다는 세속적인 존재 전체를 구성하는 28개의 물질적 요소(rūpadhamma)를 인정했다. 설일체유부에 속하는 바이바시까(Vaibhāşika)는 단일원자(dravyaparamāņu)와 집합원자 (sanghataparamāņu)의 두 종류의 원자를 인식했다. 단일원자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와 닮았지만, 설일체유부의 논사들은 다른 불교도들과 마찬가지로 영구적인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물질과 마음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찰나멸론(ksanabhangavāda)을 발전시켰다.

 

불교도들은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BC. 500-428)처럼 모든 물질적 대상에 네 가지 기본 요소가 존재한다고 주장했지만, 아낙사고라스와는 달리 그것들 사이에 양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테라바다의 불교인들은 그것들이 동등하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피타고라스(Pythagoras: BC. 570- 495)의 환생 교리는 인도, 특히 쌍키아 철학과 자이나 철학에서 유사점이 발견되는데, 이들은 복수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인간의 노력을 영혼의 정화를 위한 필수조건으로 인식했다. 인간의 영혼이 동물의 몸으로 윤회하는 것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믿음은 인도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리스의 플라톤(Platon: BC. 428-348)처럼, 인도철학자들은 미래의 삶을 현재의 행동의 결과로 여겼다. 인도의 전승 교리와 카르마법칙과의 연관성은 자이나교, 불교 및 후기 철학에서 더욱 발전되고 정교화되었다. 피타고라스가 신(헤르메스)의 은총으로 자신의 전생을 알고 있었다고 설명한 것과 가장 유사한 내용이 디가니까야의 비유의 큰 경(Mahāpadanasutta)에서 발견되다. 여기서 부처님은 자신이 과거칠불이었을 때를 회상하고 괴거의 사회적 계급, 이름, 성취 및 해탈 등 자신의 전생에 대한 모든 사실을 회상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곧바른 앎(신통)의 능력과 자신에게 알려준 신들의 고지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영혼의 신성한 본성에 대한 경험은 지상의 요소들로부터 최종적으로 떠남으로써 얻을 수 있다. '탄생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난 영혼은 다시 불멸의 신이 되어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이러한 사상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아랍 철학자 알베루니(Alberuni)에 의하면, 피타고라스의 다음과 같은 말, '세상에서 당신의 욕망과 노력을, 영원할 수도 있는 당신의 존재 원인인 제일원인과 결합하도록 하라. 당신은 파괴와 전멸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고, 당신은 영원한 즐거움과 환희 속에서 진정한 의미의, 진정한 기쁨의, 진정한 영광의 세계로 갈 것이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다. 이 또한 인도철학과 매우 유사하다.

 

역사적 부처님(Buddha: BC. 560-480)과 동시대인이었던 피타고라스(BC. 570-495)의 교단은 인도의 사문 전통과도 유사했다. 피타고라스는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출생에 의한 차별과 성에 의한 차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스와 인도의 수행단체는 출생이나 사회적 부에 기초하지 않았고, 이념적이고 윤리적인 근거 위에 성별과 사회적 지위에 대한 차별 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피타고라스의 교단에서는 심지어, 노예들도 저명한 교사가 될 수 있었고, 입문을 위한 유일한 조건은 그 지원자가 좋은 인격을 배우고 닮으려는데 성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피타고라스 교단은 계층 구조상, 가장 높은 곳에는 승단의 스님들처럼, 식사 를 같이하고 재산을 공유하는 진정한 수행단체, '마테마티코이'(mathema- tikoi)가 있었지만, 그들은 피타고라스의 본보기를 따르고 가정을 꾸렸다. 가정을 꾸리고 실천적인 삶을 사는 것이 영적 지식 추구와 양립할 수 없다고 볼 수는 없었다. 이 점에서 피타고라스는 모든 생명체에대한 탐구, 번식, 자기 수양, 사랑을 재생의 순환에서 벗어나는 충분한 수단으로 여겼던 바라문에 더 가깝다. 피타고라스가 신비로운 사유와 비밀주의를 강조한 점도 바라문교에 더 가까웠다. 인도의 수도승들처럼, 피타고라스인들은 긴 머리와 흰옷과 같은 외적 특징들을 채택함으로써 그들 자신들을 신체적으로 구별했고, 동물의 희생을 금했다. 그리고 그들은 사업에 종사하는 것과 법정에서 자신들을 방어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고, 비폭력을 강조했다. 피타고라스는 친구를 또 다른 자신으로 규정함으로써 우정(philia)을 격려했고, 친구들과 그의 사회 구성원들 사이에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을 지지했다. 자연, 인간, 신들에 대한 기본적인 피타고라스의 태도는 가장 나이 많은 구성원이 저녁 식사 후에 낭독한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알 수 있다: '경작된 땅이나 과일 나무나, 인류에게 해롭지 않은 동물을 해치거나 파괴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신들, 악마들, 영웅들뿐만 아니라 부모들과 은인들에게도 존경스럽고 고귀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

 

고타마 붓다도 율장에서 비폭력에 관한 유사한 계율들을 지지했지만, 탁발수행승에게 주어진 육식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다만 익히지 않은 고기를 받아들이는 것을 금하고, 오후불식하며, 종자와 식물을 파괴하는 것을 금하도록 했다. 피타고라스인 들은 불교와 마찬가지로 오직 청정한 사람만이 세속적인 열정과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녔고, 정화의식(katharmoi)을 발전시켰고, 성찬의(orgia)을 발전시켰으나, 음악이 정신질환을 치료하고, 감정을 훈련하고, 정신의 열정적이고 공격적인 부분을 정화할 수 있기 때문에 음악을 중시한 점은 초기불교와 다른 점이다.

 

 

그리고 기독교 시대 초기의 헬레니즘적 근동(近東)과 인도 사이에 긴밀한 역사적 접촉의 증거가 있다. 사도 토마스(Apostle Thomas)AD. 21-46년 탁실라의 곤도파레스의 궁정에서 기독교를 전파하였고, 인도와 실론 항구에서는 그리스와의 무역과 선적은 엄청나게 증가했고, 인도 상인들과 이민자들의 작은 공동체들이 이집트와 시리아의 국제적인 중심지에 자리를 잡았다. 헬레니즘 도시인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수레바퀴와 삼지창이 있는 묘비가 발견된 것은, 인도 이민자들이 그들의 관습과 종교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사라센인 스키티아노스(Scythianus)는 인도와 무역을 했다. 그는 인도 철학에 대한 지식을 습득한 후에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하면서, 이집트의 전설에도 정통하게 되었고, 그의 제자인 테레빈토스(Terebinthus)의 도움으로, 마니가 마니교의 기초를 만들 정도였다. 테레빈토스는 그의 스승을 능가했는데, 그는 자신이 이집트인들의 모든 지혜에서 배웠다고 선포했다. 자신은 새로운 부처님이고, 처녀에게서 태어나 천사에 의해 키워졌다고 선언했다.

 

근동은 인도와의 교역이 증가하면서 인도와 인도인의 금욕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들이 인기를 얻게 되었고, 동양 신비주의의 중심이 이집트에서 인도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인도의 바라문과 사문의 전통이 널리 알려지면서, 신학자들과 영지주의자들은 인도의 금욕주의자들이 신에 대한 헌 신과 세상의 쾌락을 포기한 것에 대해 찬사를 보냈다. 시나이산의 금욕주의에서 그리스의 헤시카스트(Hesychasts)로 전해진, 기독교 종교의 중요한 특징인 수도원주의는 인도의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헤시카스트들의 금욕주의는 불교승려들의 금욕주의와 유사했다. 그들은 기도를 계속해서 암송하고 기도를 호흡과 묵주에 맞추며, 집중, 명상, 금식 등과 같은 수행을 하는데, 이러한 수행의 목적은 욕망으로부터의 해탈과 더 높은 진리의 실현에 있었다. 헤시 카스트들과 불교 승려들은 외형적으로 비슷했지만, 전자는 은혜를 베푸는 신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가르쳤고, 후자는 최고의 성취인 열반은 인간의 노력과 불보살들의 가피로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인도의 영향은 헬레니즘, 근동에서 번성했던 이교도 그리고 기독교 영지주의 공동체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기독교 영지주의는 경전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와 그리스도의 역사적 성격을 부정하고, 영지주의에 기초한 신비적 의미만을 인정했다. AD. 2세기 전반에 살았던 영지주의 신학자 바실리데스(Basilides:AD 117-138)는 힌두교와 불교 철학에서 발견되는 것과 매우 유사한 교리를 가르쳤다. 그는 천국이 365개 있는데, 각각의 천국은 아래의 천국보다 더 우수하고 덜 구체적인데, 그 아래 모든 것들의 절대적 제일원칙이자 원인으로 가장 높은 궁극적 천국은 완전한 '()'라고 가르쳤다. 신은 공간, 시간의식 그리고 심지어 존재 그 자체 위에 있고, 겨자씨 한 알이 식물 전체를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신은 잠재적으로 자신 안에 모든 것을 포함하며, 창조는 신의 의지의 결과라고 가르쳤다. 바실리데스는 불교도들처럼 고통이 모든 존재의 근본 원칙이고 인간의 인격은 다섯 가지 요소들로 구성된 복합적인 것이라고 믿었다. 윤회의 교리를 전파하고, 우리의 영혼을 최종적인 정화로 이끄는 불굴의 필요에 의해 지배되는 탄생은 전생에서 우리의 행위의 결과라는 관점을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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