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는 이야기

글쓰기는 구원이 될 수 있는가

 

글쓰기는 구원이 될 수 있는가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보며 )

 

화두를 들고 사는 수행자는 평생을 묻고 묻고 또 묻는다. 왜 사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고 묻는다. 한강, 그녀는 소설가, 시인이라고 불리지만 내 보기에 그녀의 삶은 수행자와 닮았다. 삶의 의미를 묻고 또 묻는 행위가 그녀에게는 글쓰기였다. 수행자는 삶에 대한 의문, 불합리한 세계,관계의 고통을 하나의 화두로 치환시켰기에 수행자의 내면은 감정적인 동요와 휘몰아침이 적다. 그러나 직접적인 질문에 매달리는 작가는 세상에 던져진 절망과 모순과 구조적인 괴로움 앞에서 늘 울어야 했다. 그 울음소리가, 비명소리가, 내 뱉는 한숨이, 글쓰기이다. 연약한 소녀에게 세상의 약육강식(弱肉强食)과 부조리(不條理)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신()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것이다. 오로지 혼자서 뚫고 지나가야 하는 어두운 터널이다. 붉은 피가 베어나오는 연한 고기를 물어 뜯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채식주의자는 고통스럽게 바라보고있다.

 

한강은 소설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수많은 책에 들러싸여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녀는 자신이 자신에게 물었던 질문을 책에서 찾고 싶었지만 그 책들도 다만 묻고 묻는 질문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겨우 14살에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마주한 질문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겠다는 결심이 작가가 된 이유다. “글 쓰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어렵다라고 말하는 그녀에게 글쓰기는 구원이었을 것이다. 질문이 남아있는 한 글쓰기는 끝날 수 없다. 작가들이 글 쓰는 이유가 대부분의 이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작가들 중에서 유독 진실하고 간단없이 질문을 밀고 나가는 한강에게 노벨상이 주어진 것은 절대로 이상하지 않다.

 

그녀가 글쓰는 이유가 나의 출가 이유와 닮아서 놀랐다. 그녀보다 한 살 많은 69년생인 나는 열다섯 나이에 사는 이유, 죽어야 하는 이유를 알고자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방황하였다. 내가 읽은 모든 책들은 내 생각에는 이렇다고 본다라는 내용이어서 더 이상 책을 읽는 것은 무의미했다. 결국 내가 궁금해하는 의문의 답을 책에서 찾지 못하고 부모님 전상서, 저는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절에 갑니다. ...삼년 후에 돌아오겠습니다.”라는 편지를 잠드신 아버지 머리 맡에 남기고 열여덟, 유월 이른 새벽에 집을 나섰다. 나의 출가가 자식 노릇, 형 노릇, 백성 노릇을 하지 않는 무책임한 행동이라고 괴로워하기도 하였지만, 나중에 부처님도 나와 같은 이유로 출가했다는 것을 알고 위안을 얻었다.

 

그녀는 나와 같은 시기에 같은 고민을 하다가 글쓰기로 질문을 시작하였다. 따뜻한 목소리와 졸리운 듯한 눈빛과 가끔 번지는 환한 웃음에서 오히려 그녀가 고단하게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소년이 온다라는 책을 쓰면서 거의 매일 울었다고 했다. 매일 울면서 글쓰기를 하는 이가 세상에 몇이나 있을것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할 때, 인간이 저지르는 폭력과 부조리를 발견하면서 어떻게 인간이 되는가라고 바꾸어 묻기도 하였다. 그녀는 글 쓰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어렵다고 말한다. 왜라는 생각없이 세상의 아픔에 대한 공감없이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한 발 한 발 왜와 어떻게라는 징검다리를 걷는 소녀에게 삶은 살얼음판이고 낭떨어지다.

 

내가 사는 집에 한강 같은 누나가 있다면, 여동생이 있다면 어떨까? 저렇게 온 종일 틀어박혀 왜와 어떻게에 매달리는 인생을 얼마나 답답해 하였을까? 제발 밖으로 나와서 돈이 되는 일, 세상에 도움이 되는 효율적인 일, 자신의 이력을 쌓는 일을 하라고 다그치지 않았을까? 글을 쓴다고, 책을 읽는다고 밥이 나오냐 돈이 나오냐라고 힐난하며 화를 내지 않았을까? 역사의 트라우마에 갇혀서 울면서 글을 쓰는 그녀에게 효율과 이익만을 말하며 충고하는 우리들, 노벨상은 커다랗고 우악스런 손으로 우리의 뺨을 갈긴 셈이다.

 

그녀의 노벨상 수상으로 '제주 4.3 사건'이나 '광주 5.18 민주항쟁'이 전 세계에 알려지고 세계인에게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다행이다. 그녀의 노벨상 수상으로 세계최고의 청소년 자살률을 기록하는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이 인생의 의미를 찾고, 아름다운 것에 울고 함께 아파하고, 경쟁하지 않는 길을 가지 않더라도 인생을 허비한다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을 것 같다. 다행이다. 2017년 한반도에 전쟁의 위기가 가장 높았을 때 '뉴욕 타임즈'에 미국이 전쟁을 이야기하는 동안, 한국은 몸서리친다(While the U.S. Talks of War, South Korea Shudders)라는 글을 기고하여 전쟁을 쉽게 입에 올리는 미국에 경고하고 우리에게 평화만이 살 길임을 역설하였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에서 많은 이들이 죽고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노벨상 축하 기자회견'도 생략하였다. 그녀에게 일상의 삶과 글쓰기는 일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강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는 불자이다. 한강 작가는 20대에 불교에 심취하였으나 지금은 무종교라고 밝히고 있다. 부처님은 나는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일 뿐, 너의 길은 너 스스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아픔과 죽음을 싫어하듯 타인도 아프고 죽는 것을 싫어하니 역지사지하여 타인에게 폭력을 가하거나 죽이지 말라고 가르쳤다. 부처님은 한 번도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런면에서 불교는 여타종교와 확연히 다르며, 간곡하고 진실하게 묻는 글쓰기는 수행과 다르지 않다. 오늘도 온몸으로 질문을 던지는 한강 작가야말로 진정한 불자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한 발짝 또 나아갈 수 없는 위험한 곳에서 한 발 내딛는 것, 한 마디도 할 수 없는 곳에서 입을 열어 말하는 것, 그곳에서 글쓰기는 수행이 되고 말은 진언(眞言)이 되리라.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