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디샤의 불교
이제까지 우리 불자들은 4대성지 8대성지 12대성지를 순례하여왔다. 그 성지순례의 범위는 우따라 쁘라데쉬와 비하르 주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디샤주에도 불교에 관련된 성지가 많이 있다. 경전에 부처님이 바다의 비유를 많이 하시고 있는 것으로 보아 뿌리의 바닷가에 까지 오셨을 것이고, 바다를 가려면 당연히 오디샤를 지나야 했을 것이다. 오디샤가 불교와 최초로 인연을 맺은 것은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고 7일씩 49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상인 따뿟싸(Tapussa)와 발리까(Bhallika)가 부처님께 과자외 꿀을 올렸다고 한다. 그 두 상인이 오디샤에서 온 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미얀마 전승으로는 이들 두 상인은 미얀마 출신이고 그들은 그때 부처님께 머리카락을 얻어 사리탑을 세운 것이 지금의 쇄다곤 파고다라고 전한다. 오디샤에는 상인들이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얻어 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오디샤가 불교와 인연을 맺은 구체적인 이야기는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Maurya) 왕조 제3대 왕인 아소카(Asoka)왕이 깔링가(Kalinga)를 정복하면서 나타난다. 아소까는 참혹한 전쟁을 경험하고 불교에 귀의하여 법(Dharma)으로 세상을 다스리겠다는 서원을 세운다. 이 내용은 깔링가 전투가 벌어졌던 다야(Daya)강 주변에있는 다울리 언덕(Dhauli)에 아소까 바위칙령으로 남아있다. 오디샤의 옛 이름인 깔링가에 대한 것은 디가니까야의 대반열반경에 한번 등장한다. 깔링가의 왕이 부처님의 사리를 얻어 모셨다는 내용이다.
“눈을 가지신 분의 사리는 여덟 부분으로 분배하여
일곱 부분은 인도 대륙에서 모시고 있다.
최상의 인간의 한 부분은 라마가마에서 나가 왕이 모시고 있고
치아 하나는 삼십삼천이 예배하고 하나는 간다라의 도시에서 모시고 있다.
깔링가 왕이 다시 하나를 얻었으며 하나는 다시 나가 왕이 모시고 있다.
다만 이 대목은 주석서에서 제3차 결집이후에 추가된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렇다면 간다라에 사리탑을 세운 것과 깔링가에 사리를 모신 탑을 세운 것은 깔링가 전투 이후에 아소까에 의해서라고 추측 할 수 있다. 한편 현장의 대당서역기에는 오디샤가 오다국(烏茶國)으로 나타나는데 “이곳에 여래께서 법을 설하신 10여 곳에 아소까왕이 수투파를 세웠다.”라고 나타나고 있다.
“오다국의 둘레는 7천여 리에 달하고 나라의 큰 도성의 둘레는 20여 리에 달한다. 토지는 비옥하며 농사가 매우 번창하다. 온갖 과실이 다른 나라에 있는 것보다 훨씬 크며 기이한 풀과 빼어난 꽃들은 일일이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기후는 덥고 풍속은 거칠고 난폭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체구가 건장하고 얼굴색은 거무튀튀하다. 그들의 언어나 관습들은 중인도와는 다르다. 학문을 좋아하여 게으름을 부리지 않으며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의 법을 믿는다. 가람의 수는 백여 곳이 있고 승도들은 1만여 명 있는데 그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천사는 50곳 있고 이교도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이미령 번역)”
현장스님이 보았다는 수투파중에서 지금 오디샤에 남아있는 라뜨나리(Ratnagiri), 우다야기리(Udayagiri), 랄리따기리(Lalitagiri)에 있는 탑과 승원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우다야기리
오디샤(Odisha)는 예전에 오리샤(Orissa)불렸었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화 하면서 인도 지명을 영어식 이름으로 불렀었는데 영국에서 독립한 이후 캘커타를 꼴까따, 봄베이를 뭄바이로 인도인들의 고유 발음으로 환원해서 부르고 있다.오디샤(Odisha)의 수도 부바네스와르(Bhubaneswar)는 꼴까따(Kolkata)에서 남쪽으로 380km거리에 있다. 부바네스와르 북쪽으로 북쪽으로 60km 떨어진 거리에 유다야기리, 라뜨나기라, 랄리따기리가 있다. 유다야기리와 라뜨나기리와 랄리따기리는 삼각형을 이룬다. 방문자는 유다야기리, 라뜨나기라, 랄리따기리 순서로 들리는 것이 교통 편의 상 좋다. 나는 까뚝(Cuttack)시에서 오토릭샤를 타고 우다야기리에 갔다. 인도에는 유독 우다야기리(Udayagiri)라는 명칭이 많다. 우다야(Udaya)라는 단어가 일어나다, 흥기하다, 부흥하다라는 뜻이이어서 인도인들이 선호하는 것 같다. 마치 중국인들이 복(福)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기리(giri)는 산(山)이라는 뜻이다. 오토릭샤는 평지 도로를 계속 달리더니 어느 집에 데려다 주듯 나를 우다야기리 정문에 내려주었다. 릭샤에서 내려서 우다야기리로 올라가는 길은 완만해서 노인들도 쉽게 걸을 수 있다. 올라갈수록 시야가 넓어지면서 툭 트인 산야가 보였다. 마치 우리나라의 어느 평지 사찰을 온 듯이 마음이 평안하다. 이렇게 넓고 평안 한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많은 수행자들이 오랫동안 머물렀을 것이다.
조금 올라가니 사무실 같은 건물이 나타나는데 그 건물에서 한 인도인이 나오더니 나를 안내하겠다고 나선다. 영어를 못하고 힌디어만 하는 사람이 어떻게 나를 안내 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를 따라서 승원1로 들어섰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유물들을 보니 대승불교와 밀교의 흔적이 대부분이다. 우다야기리의 불교유적은 1985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제1차 발굴(1985~1989년)은 계곡의 북쪽 지역에서 이루어졌고 제2차 발굴(1997~2003년)은 남쪽에서 진행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모습을 드러난 따라보살(Tara), 지세보살(Vasudhāra), 아라지따(Aparajita), 귀자모신(Häriti)등 다양한 여신상들을 보면 금강승 불교가 유행하였을 알 수 있다.
승원1 아래에 바위를 깍은 흔적이 보이는데 거대한 바위를 깍아서 승원을 지은 듯하다. 이러한 방법은 아잔타 석굴을 깍아서 방을 만들고 쩨띠야(법당)를 만든 방법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불상과 보살상들은 상처가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부처님의 평온한 얼굴에 절로 합장하게 된다. 승원1의 수투파는 사면(四面)에 각각 불상이 안치되어있다. 한 부처님은 항마촉지인, 한 부처님은 여원인, 두 부처님은 선정인을 하고 있다. 선정인을 한 부처님중에서 한 분은 보관을 쓰고 있다. 성도하기 전의 부처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앉아서 오른 손을 아래로 펴보이는 수인(手印)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이한 수인의 불상이다.
사면불 주위에서 일꾼들이 조그만 탑을 조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사방에 탑들이 나뒹굴고 있으니 이곳이 제대로 정비될 날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사면불 뒤쪽에 문이 잠겨있는 곳을 열고 들어가니 부처님이 앉아계신다. 이 가이드는 이 문을 열어주기 위해서 따라온 듯하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불상의 손과 발에 법륜이 새겨져 있고 몸 전체는 모두 다섯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렇게 부처님을 여러 조각으로 만든 것은 이곳에 큰 돌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승원1을 참배하고 삼백여미터 떨어져 있는 승원2로 갔다. 넓은 들판에 귀여운 얼굴을 한 사자상 몇 마리가 뒹굴고 있다. 저 정도 유물이라면 곧 분실 될 것 같다는 안타까움이 생긴다. 박물관에 전시해도 될 유물들이 여기서는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다. 조그만 봉헌탑은 너무 많아 숫자를 셀 수 없을 지경이다. 소변을 보기 위하여 숲에 들어서니 숲속에도 봉헌탑이 뒹굴고 있다. 이 봉헌탑들은 우리나라의 부도탑 같이 생겼다. 여러개를 모아 놓으니 천상 통도사에서 보았던 그 부도밭이다. 우리의 부도탑은 이 봉헌탑에서 유래하였을 것 같다. 승방에 계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스님들이 사는 승방은 2층 집이었을 것이다. 곳곳에 다섯조각 여섯조각으로 만든 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건물과 건물사이에 물이 흐르도록 돌 수로가 놓여있다.
승원2에서는 벽돌로 만든 수투파보다 돌로 수투파가 더 많아 보였다. 돌로 수투파를 만든 것은 지금 파키스탄 지역인 간다라 수투파에서 볼 수 있다. 비하르주에서는 돌로 만든 수투파는 전혀 볼 수 없다. 그 만큼 이곳에는 돌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아래쪽에 거대한 돌이 드러누워 있다. 얼굴과 손의 윤곽이 드러난 것으로 보아 불상을 만들다가 중간에 그만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본의 와는 다르게 운주사의 와불상처럼 누운 불상이 되었다. 저렇게 미완의 불상이 방치된 이후로 오늘날까지 누워있는 걸 보면 그동안 이곳에 불교가 한 번도 부흥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인도의 불교상황을 말해주는 듯하다.
승원2쪽 반대편에 규모가 작은 수투파가 있는데 인도인은 그곳이 부엌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무슨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었지만 그는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부엌이라는 소리만 되풀이 했다. 승원2에서 아래쪽으로 내려오니 거대한 우물이 나타났다. 그 우물은 사면이 바위로 되어있는데 바위를 파들어가서 우물을 만든 것이다. 실로 대단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우물은 물에 이끼가 껴서 사람이 먹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옛날에는 스님들이 여기서 각 사찰로 물을 길어 갔을 것이다. 여기에 이 우물을 만들었으므로 우다야기리에 사찰이 번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저렇게 힘들게 바위를 파내어 우물을 만들었을 것이다. 물은 많은 대중스님들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이다. 산치 대탑 승원이나 제따와나 승원, 죽림정사 승원, 룸비니 승원, 웨살리 승원에는 승원안에 인공연못이 있고 우물이 있다. 주위에 강이 없으므로 인공 연못을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꼬삼비승원이나 네팔의 까삘라왓투나 부바네스와르의 우다야기리, 칸다기리 같이 승원옆에는 강이 흐르기에 인공연못을 만들지 않았다.
그 우물 옆에는 힌두교 사원이 들어서 있다. 한두교 사두가 나를 보더니 사원에 참배하라고 손짓 한다. 안내원도 참배하라고 거든다. 나는 그들의 제안을 거부하고 아래로 내려왔다. 사찰이 쇠망하고 나서 그 자리에 대부분 흰두교 사원이나 무슬림 사원이 자리잡았다. 보드가야도 그렇고, 녹야원, 죽림정사, 룸비니, 상카사등 어느 곳이나 그런 실정이다. 우다야기리는 유적지로서 개발이 덜 되어서 입장료도 없고 박물관도 없다. 여기에는 게스트 하우스도 없고 식당도 없다. 우다야기리에서 10km떨어진 라뜨나기리를 향해 출발하는데 아쉬운 마음이든다. 시간이 있다면 여기에서 이 삼일 머물면서 여기저기를 걷고 싶은 곳이다.
라뜨나기리
라뜨나기리는 보석의 산이라는 뜻으로 우다야기리에서 서북쪽으로 10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에는 박물관이 있어서 먼저 박물관에 들렸다. 다행히 박물관은 인도인들과 같은 관람료를 받았는데 라트나기리는 외국인 요금 300루피를 받았다. 태국, 미얀마, 스리랑카, 라오스, 캄보디아, 티벳 사람들은 인도인과 같은 요금을 받는다고 한다. 라뜨나기리는 300루피를 내야 할 만치 볼 것은 많치 않았다. 그러나 보지 않으면 후회가 남으니 반드시 박물관은 들린다. 박물관에는 불두(佛頭)가 많았다. 크기가 제법 큰 것도 있었는데 우리나라 석굴암의 불두보다 더 큰 불두도 있었다. 이렇게 커다란 불상이 많았다면 여기도 필시 많은 스님들이 살았을 것이다. 라뜨나기리에서 인상적인 것은 언덕에 오르니 봉헌탑을 줄세워 모아놓은 것이다. 봉헌탑은 적어도 300여개는 될 것 같다. 이 봉헌탑과 우리나라의 부도밭은 너무 닮아 보였다. 라뜨나 기리에 오르니 숲에 널부러진 것 땅에 파 묻힌 것들을 포함해서 봉헌 탑이 수도 없이 보였다. 너무 많으니 저렇게 줄세워 세워 놓았던 것이다. 이것만 보더라도 이곳이 얼마나 불교가 번성했었지 알 수 있다. 이곳은 우다야기리처럼 터가 넓지 않아서 인지 돌을 다듬어서 담장을 쌓았다. 돌담을 자세히보면 직사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모양등 다양한 돌이 사용되었는데 스님들이 입는 손 누비를 보는 것처럼 돌을 다듬는 정성이 엿보인다. 사방으로 담장을 쌓았으나 오직 정문에만 출입할 수 있는 문을 만들어 놓았다. 오직 정문으로만 드나들 수 있기에 정문의 바닥돌은 닳고 닳아서 초승달처럼 패여있다. 이렇게 폐쇄적인 공간을 만든 것은 분명 이유는 무엇일까? 담장으로 드러쌓인 승원의 중앙은 넓은 광장처럼 사용되고 사면으로 승방이 들어서 있다. 중앙 끝에는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우다야 기리처럼 네 조각 다섯조각을 붙여서 만든 것들이다. 관람료를 받고 입장하는 곳임에도 탑 주위에는 염소 때가 한가로히 풀을 뜯고 한쪽에는 소를 키우는 민가도 아직 있다. 그 민가에는 넓적한 돌이 축대에 사용되고 있었는데 분명 탑의 부재였을 것이다. 어디서든 마찬가지로 자이나교 사원이 제법크게 건축되어있고 승원과 자이나교 사원 사이에 경계를 표시하는 돌담이 쌓여지고 있다. 돌담에 사용되는 돌은 약간 푸석한 돌이여서 얼음을 자르듯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사용하고 있다.
랄리따기리
랄리따기리는 라뜨나기리에서 남쪽으로 25km떨어진 곳에 있다. 다른 곳과 달리 랄리따기리는 언덕을 올라 가면서 좌우로 승원이 나타나는 구조다. 마지막 언덕의 정상에 커다란 수투파가 있는데 그 곳에서는 사방이 훤히 둘러 볼 수 있다. 산의 승원에서 머물다가 때가되면 마을로 탁발을 나갔다가 올라오는 스님들의 모습을 상상 해 보았다. 랄리따기리 박물관은 다른 박물관에 비해서 훨씬 잘 만들어져 전시실에 들어서면 감탄하게된다. 인도 수상 모디가 개관식에 참여한 듯 한쪽에 그의 사진이 걸려있다. 아름답고 예술적 가치가 높은 보살상이 많이 전시되고 있다. 어느 것이나 아름다워서 도저히 카메라를 놓을 수 없었다. 입상이나 심지어 좌상의 불상에서도 시무외인의 수인이 다수 전시 되고 있다. 일본에 들렸을 때 서산 마애삼존불과 닮은 삼존불이 있어 놀란적이 있는데 여기서 다시 서산마애 삼존불의 부처님과 너무 닮아서 놀란 마음으로 한참을 바라다보았다. 이 불상은 4~5세기 작품이므로 6~7세기 작품인 백제 마애삼존불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불상이 조성된 시기로보면 랄리따기리가 우다야기리나 라뜨나기리보다 먼저 건립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불상중에서 도리천에서 하강(下降)하는 부처님이 발자국이나 법륜이나 보리수로 상징되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조각된 작품은 처음 본다. 역설적이게도 상징으로 부처님을 표현되었을 때가 더 애틋하고 감동적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이곳에는 부처님 사리를 담았던 사리기도 6기가 전시되고 있다. 이 사리기들은 특별히 유리 보호벽으로 보호되고 있어 그 자세한 전모를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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