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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서본원사(니시혼간지)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불상

 
얼굴마
 


오른쪽으로 3번 도는 행위는 존경의 표시이기도 하지만 부처님에게 누구나 다가갈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여기 법당에서는 부처님에게 다가갈 수 없도록 나무로 만든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다. 불자들은 촛불을 갈아 끼우거나 향을 올리지도 못한다. 서본원사에서도 촛불을 갈아 끼우거나 향을 올리는 것은 모두 승려들이 한다. 게다가 불상의 얼굴도 볼 수 없으니 불자들은 그저 멀리 앉아서 기도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정토진종이라는 종파는 특징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토진종은 신란(親鸞)을 종조로 하는데 그 중에서도 혼간지파(本願寺派)는 신란의 딸 각신니(覺信尼)에 의해 시작된 종파이다. 혼간지파의 신자들이 중심이 된 잇코잇키(一向一揆)의 시작은 제8대 종주였던 렌뇨(蓮如, 1415~1499)에 의해 촉발된다. 렌뇨는 종주로 취임한 직후부터 종래의 종주들과는 달리 적극적인 포교활동에 나선다. 특히 소우손(惣村)으로 불리던 촌란집단의 수장들을 신자로 포섭하여 조직적으로 관리함으로서 촌락전체가 혼간지파의 신도가 되게 하는 방법을 통해 비약적인 교세확정을 이룬다.  타 종파 신도들까지 귀의하였기에 다른 종단의 경계를 불러왔다. 급기야 히에이잔(比叡山) 천태종 승려들이 당시 교토의 히가시야마(東山)에 있었던 오오타니 혼간지(大谷本願寺)를 습격하여 당사를 파괴하고, 오오미의 혼간지파 사원과 신도들을 공격하게 된다.이러한 천태종의 공격에 맞서 혼간지파신도들이 결집하게 되는데, 이것이 최초의 잇코잇키(一向一揆)였다.

방어적 성격의 오오미의 잇코잇키와는 달리, 1488년 카가노쿠니(加賀国, 현재의 이시카와켄)에서 일어난 카가잇코잇키(加賀一向一揆)는 정치적 성격이 강하다. 쇼군 승계를 둘러싼 갈등으로 1467년 시작된 오우닌의 난(応仁の乱)은 전국이 지방의 전국대명들까지 합세하면서 분열양상이 일본 전역으로 확산된다. 그 영향은 카가노쿠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데, 이 지역 대명(大名)이었던 토가시(冨樫)가문이 동군(東軍)을 지지하는 코가시 마사치카(冨樫政親)와 서군(西軍)을 지지하는 수호(守護) 토가시 코우치요(冨樫幸千代)로 분열되어 대립하게 된 것이다. 1474년 양 세력의 전투에서 혼간지파 신도세력을 앞세운 마사치카가 코우치요를 물리치고 수호로 취임한다. 얼마가지 않아 혼간지파세력과 마사치카가 대립하게 되고, 결국 1488년 타코우조(高尾城, 현재의 이시카와켄 카나자와시 타카오초(金沢市高尾町)에 있었던 성)에서 마사치카가 패배하여, 카가노쿠니의 실질적인 권력을 혼간지파에게 넘어가게 된다.

카가노쿠니(加賀国) 자체를 삼켜버린 카가잇코잇키는 전국대명들에게 혼간지파를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실력세력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계기로 충분한 것이었다. 마사치카와의 최후 일전에 참가한 잇키군(一揆軍)의 수가 무려 20만에 이르렀다고 하니, 혼간지파의 위세는 당시 타 지역의 세력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16세기로 접어들면서 혼간지가 막부내부의 정쟁에 깊숙이 개입하게 되고, 그러한 정쟁의 수단으로서 전국의 문도들에게 잇키를 지령하기에 이른다. 16세기 초반 일본은 막부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의 추종세력과 마사모토에 의해 추방되었던 전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植) 세력으로 양분되어 격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혼간지의 9대 종주 지츠뇨(實如)는 마사모토 편에 선다. 그리고 전국의 혼간지 문도들에게 지령을 보내어 반대세력에 대한 잇키를 명령한다.

그 결과 야마토(大和, 현재의 나라켄), 카와치(河内, 현재의 오사카후), 탄고(丹後, 현재의 교토후 북동부), 엣추(越中, 현재의 토야마켄), 에치고(越後, 현재의 니이가타켄), 노토(能登, 현재의 이시카와켄 나나오시), 에치젠(越前, 현재의 후쿠이켄), 비노우(美濃, 현재의 기후켄), 미카와(三河, 현재의 아이치켄) 등지에서 봉기가 일어나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이 밖에도 1570년부터 1580년까지 혼간지의 잇코잇키세력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대립한 이시야마갓센(石山合戦)도 유명하다.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를 지키기 위해 전국 각지의 문도들이 종주의 지령으로 집결하는 한편,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오다 노부나가의 군세와 충돌하였다. 결국 노부나가가 조정을 움직여 혼간지와의 화평이 성립되면서 10년간의 긴 싸움은 끝이 나는데, 화평조건은 혼간지는 오사카에서 철군하고 노부나가는 종래대로 혼간지교단의 존속을 보증한다는 것이었다.

이시야마갓센 이후 오다 노부나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천하가 통일되고 전국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혼간지의 잇코잇키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잇코잇키는 정토진종 혼간지파의 주도로 일어난 반체제운동이었다. 그리고 그 명분 또한 종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혼간지파 지도부의 정쟁에 신도집단이 동원되어 이용된 것이다.

그러나 신자 동원의 논리는 지극히 종교적인 것이었다. 타력의 신심을 설하여 문도들에게 정토왕생의 길을 열어준 신란에 대한 보은으로써 마땅히 신란의 혈통인 혼간지를 지켜야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혼간지로부터의 동원에 응하지 않는 문도가 있다면 그는 극락왕생이 불가능한 불신자이거나, 신란의 은혜를 저버린 배은망덕한 인간으로서 치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도들 입장에서는 잇코잇키의 참전은 혼간지를 지키는 이른바 성전(聖戰)과도 같은 것으로서 이는 곧 정토왕생의 길이기도 하였다. 실제로 이시야마갓센 당시의 군기(軍旗)에는 “진격하면 극락왕생, 물러나면 무간지옥”이라는 슬로건이 적혀있기도 하였다. 

 

현재 호넨을 종조로 모시는 정토종은 일본 전역에 8천여개의 사찰과 600만 명의 신자를 자랑하고 있으며, 호넨의 제자 신란을 종조로 모시는 정토진종의 경우 약 2만개의 사찰과 약 1333만 6천의 신자수를 자랑한다. 정토진종의 규모가 우리나라의 모든 불교종파와 종단을 합한 교세와 맞먹을 정도인 셈이다. 아울러 이들 양종을 합하면, 전체 일본불교의 약 60%정도를 차지한다.

 
 
전토진종의 종지인 신란(1173-1263) 은 처음에는 천태종의 승려였는데 나중에 아미타불의 '본원'에 귀의했다.요기서 본원사라는 사명이 유래한다. 신란은 자신의 내면 세계가 죄악으로 가득 찼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기는 순수한 마음으로 염불하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해서 염불하게 하는 것이며 아미타불이 가진 본원의 힘으로서 해탈이 가능하다는 절대 타력의 신앙을 행했다. 더 나아가 이들은 싸우다가 순교하면 정토로 갈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당시 영주, 무사들과 마찰이 심해졌다. 이 당시 사찰은 많은 승병을 거느리는 군사 세력이기도 했다. 혼간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밀접한 관계였고 에도 막부 말기에는 막부 휘하에서 치안을 담당하는 군사조직인 신선조(新選組)의 본거지로 사용되었다. 세계 최대 목조건물이라고 자랑하는 대웅전 또한 정치권력의 보조를 받지 않았다면 건축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찰의 법당은 왕궁과 비슷하고 승려들은 왕의 신하와 비슷하다. 불상 옆 화려한 조명과 갖가지 장식들,불상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하여 권위를 높이는 것, 부처님 앞에 다가오지 못하게 칸막이를 치는 것, 쇠로 만든 법당의 문들, 불공을 올리는 승려들의 바라문 사제같은 권위적인 의식(儀式)등 정치권력의 냄새와 군사시설로서의 흔적이 남아있는것이다. 종조인 신란은 결혼하였고 혼간지의 7대 주지는 5명의 부인에게서 27명의 아이를 두었다. 정토진종은 불교계의 이단이라고 천태종으로부터 공격을 받았고 신란은 쫒기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내가 하룻밤 묵어갈 수 있냐고 물었을 때 혼간지의 승려들은 황당해하였다. 출가자가 사찰에 묵고싶다고 요청하는 것이 일본에서는 너무 이상한 것이다. 여기는 승가라는 것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서본원사 종무소에서 있던 승려들은 내게 자신들이 운영하는 호텔을 소개해주었다. 종무소를 지키던 승려들에게 룸비니 아소카 석주에 브라흐미 문자로 쓰여진 칙령을 탁본하여 만든 다포를 선물하고 안내소를 나와서  그들이 추천하는 숙소(聞法會館)에 들렸다. 하룻밤 자고 싶다고 말했더니 하룻밤에 9천엔(팔만원)이란다. 제일 저렴한 방으로 달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삼인이 같이 사용하는 방이 6천엔(오만사천원)이란다. 내일은 일본 사찰에서 운영하는 호텔에 묵어보기로 하였다.
 
 

 

일본 서본원사 아미타당과 동본원사 어영당의 크기와 우리나라 최대급 목조건물과 비교

건물                                        정면              측면                 높이

 

경회루                                      34.4M          28.5                 21.5

경복궁 근정전                          30                 21                    22.5

서본원사 아미타당                  42                  45                    25

동본원사 어영당                      76                  58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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