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7일부터 10월 12일 목요일까지 '온라인불자회'는 휴식기간을 가졌습니다.
이제 다시 2023년 10월 19일부터 초전법륜경(S56:11)을 공부합니다. 10월 19일, 10월 26일, 11월 2일 3회에 걸쳐 초전법륜 경(S56:11)에 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초전법륜경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세번에 걸쳐서 자세히 다루게 되었습니다.
진행은 비구니 일봉스님이 해주십니다.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나모 따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붓당 사라남 가차미 (Buddham Saranam Gacchami)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담망 사라남 가차미 (Dhammam Saranam Gacchami)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상강 사라남 가차미 (Sangham Saranam Gacchami) 승가에 귀의합니다.()
* 윤문 규칙: 각묵스님 번역을 중심으로 윤문하였기에 각묵스님 번역본에 수정한 내용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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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알리 | 전재성박사 | 각묵스님 |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bārāṇasiyaṃ viharati isipatane migadāye.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 계셨다. |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녹야원에 머무셨다. |
tatra kho bhagavā pañcavaggiye bhikkhū āmantesi: "dve me bhikkhave, antā pabbajitena na sevitabbā. |
그 때 세존께서는 다섯 명의 수행승들에게 말씀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출가자는 두 가지의 극단을 섬기지 않는다. 두 가지란 무엇인가? |
그 때 세존께서는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
Yocayāṃ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ṃhito, yo cāyaṃ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ṃhito, ete te bhikkhave, ubho ante anupagamma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cakkhukaraṇī adj. which produces vision; which creates clarity |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가지의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
그것은 저열하고 저속하고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고행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中道)를 완전하게 깨달았다. 나니 안목을 만들고 앎을지혜를 만드는 들며, 이 중도는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
Katamā ca sā bhikkhave,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īdaṃ: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Ayaṃ kho sā bhikkhave, majjhimā paṭipadā tathāgatena abhisambuddhā cakkhukaraṇī ñāṇakaraṇī upasamāya abhiññāya sambodhāya nibbānāya saṃvattati. |
그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수행승들이여, 여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나 중도를 깨달았다. 이것은 눈을 생기게 하고 앎을 생기게 하며 궁극적인 고요, 곧바른 앎, 올바른 깨달음, 열반으로 이끈다.” |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앎을지혜를 만드는 만들어,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여래는 안목을 만들고 앎을 만드는 중도(中道)를 완전하게 깨달았습니다. 이 중도는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ṃ ariyasaccaṃ: jātipi dukkhā jarāpi dukkhā vyādhipi dukkho maraṇampi dukkhaṃ appiyehi sampayogo dukkho piyehi vippayogo dukkho yampicchaṃ na labhati tampi dukkhaṃ saṅkhittena 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
[세존]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것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 자체가 괴로움이다.” 요컨대, 나라고 생각하는 다섯가지 무더기에 대한 취착이 괴로움이다. |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samudayo ariyasaccaṃ: "yāyaṃ taṇhā ponobhavikā nandirāgasahagatā tatra tatrābhinandinī, seyyathīdaṃ: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곧,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 |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쾌락즐김과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o ariyasaccaṃ: yo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 |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 |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의가 남김없는이 빛바램,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seyyathīdaṃ: sammādiṭṭhi sammāsaṅkappo sammāvācā sammākammanto sammāājīvo sammāvāyāmo sammāsati sammāsamādhi. |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곧,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언어, 올바른 행위, 올바른 생활, 올바른 정진, 올바른 새김, 올바른 집중이다.” |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구성요소를 가진 성스러운 도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
“Idaṃ dukkhaṃ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이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Taṃ kho panidaṃ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eyy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상세히 알려져야 한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 괴로움의 진리는 철저하게 알아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이지혜[智]가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Taṃ kho panidaṃ dukkhaṃ ariyasaccaṃ pariññā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상세히 알려졌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 괴로움의 진리는 철저하게 알아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Idaṃ dukkhasamudayo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Taṃ kho panidaṃ dukkhasamudayo ariyasaccaṃ pahātabb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는 제거되어야 한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는 버려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Taṃ kho panidaṃ dukkhasamudayo ariyasaccaṃ pahīn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가 제거되었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는 버려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Idaṃ dukkhanirodho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Taṃ kho panidaṃ dukkhanirodho ariyasaccaṃ sacchikātabb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Taṃ kho panidaṃ dukkhanirodho ariyasaccaṃ sacchika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는 실현되었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었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Id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이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Taṃ kho panid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bhāvetabb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져야 한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진리는 닦아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Taṃ kho panid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ṃ bhāvit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의 거룩한 진리는 닦여졌다.’라고 예전에 들어보지 못한 것에 관하여 나에게 눈이 생겨났고, 앎이 생겨났고, 지혜가 생겨났고, 명지가 생겨났고, 광명이 생겨났다.” |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진리는 닦아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
Yāvakīvañca me bhikkhave,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na suvisuddhaṃ ahosi. neva tāvāhaṃ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 paccaññāsiṃ. |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의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린 열두 가지의 형태로 있는 그대로 완전히 청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하게 깨달았다고 선언하지 않았다. |
13.“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지 못하였다면 지극히 청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의을 포함한 세상에서,사문 바라문과 신과 사람과 그들의 후손들에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에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곧 바로 스스로 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명하지 못했다. |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u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suvisuddhaṃ ahosi, athāhaṃ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 paccaññāsiṃ. Ñāṇañca pana me dassanaṃ udapādi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네 가지 거룩한 진리에 대하여 나의 앎과 봄이 세 번 굴려서 열두 가지 형태로 있는 그대로 청정해졌기 때문에, 수행승들이여, 나는 신들과 악마들과 하느님들의 세계에서, 성직자들과 수행자들, 그리고 왕들과 백성들과 그 후예들의 세계에서 위없이 바르고 원만한 깨달음을 바르게 원만히 깨달았다고 선언했다. 나에게 ‘나는 흔들림 없는 마음에 의한 해탈을 이루었다. 이것이 최후의 태어남이며,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생겨났다.” |
“비구들이여, 그러나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의 세상에서,사문 바라문과 신과 사람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곧 바로 천명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이제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지와 견이 일어났다.” |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pañcavaggiyā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Imasamiñca pana veyyākaraṇasmiṃ bhaññamāne āyasmato koṇḍaññassa virajaṃ vītamalaṃ dhammacakkhuṃ udapādi: "yaṃ kiñci samudayadhammaṃ sabbantaṃ nirodhadhammanti". |
세존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다섯 명의 수행승들은 세존의 말씀에 환희하고 기뻐했다. 또한 그 가르침을 설할 때에 존자 꼰당냐에게 ‘무엇이든 생겨난 것은 그 모두가 소멸하는 것이다.’라고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진리의 눈이 생겨났다. |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자셨다. 다섯 비구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가르침이설명이 설해졌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 ‘일어난 것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소멸하는사라지게 것법이다.되어있다’라는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 |
Pavattite ca pana bhagavatā dhammacakke bhummā devā saddamanussāvesu: "etaṃ bhagavatā bārāṇasiyaṃ isipatane migadāye anuttaraṃ dhammacakkaṃ pavattitaṃ appativattiyaṃ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 세존께서 이와 같이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실 때에 땅위의 신들은 ‘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 |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법륜을 굴리시자, 땅의 신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나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도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도다.’라고 |
Cātummahārājikānaṃ devānaṃ saddaṃ sutvā tāvatiṃsā devā saddamanussāvesuṃ: "etaṃ bhagavatā bārāṇasiyaṃ isipatane migadāye anuttaraṃ dhammacakkaṃ pavattitaṃ appativattiyaṃ2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 네 위대한 왕들의 하늘나라에 사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 | 사대왕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삼십삼천의 신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다.’라고 |
Tāvatiṃsānaṃ devānaṃ saddaṃ sutvā yāmā devā saddamanussāvesuṃ: "etaṃ bhagavatā bārāṇasiyaṃ isipatane migadāye anuttaraṃ dhammacakkaṃ pavattitaṃ appativattiyaṃ2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 서른셋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축복 받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 | 삼십삼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야마천의 신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다.’라고 |
Yāmānaṃ devānaṃ saddaṃ sutvā tusitā devā saddamanussāvesuṃ: "etaṃ bhagavatā bārāṇasiyaṃ isipatane migadāye anuttaraṃ dhammacakkaṃ pavattitaṃ appativattiyaṃ2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 축복 받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 |
야마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도솔천의 신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다.’라고 |
Tusitānaṃ devānaṃ saddaṃ sutvā nimmāṇaratī devā saddamanussāvesuṃ: "etaṃ bhagavatā bārāṇasiyaṃ isipatane migadāye anuttaraṃ dhammacakkaṃ pavattitaṃ appativattiyaṃ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 만족을 아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창조하고 기뻐하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 | 도솔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화락천의 신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다.’라고 |
nimmāṇaratīnaṃ devānaṃ saddaṃ sutvā paranimmitavasavattī devā saddamanussāvesuṃ: "etaṃ bhagavatā bārāṇasiyaṃ isipatane migadāye anuttaraṃ dhammacakkaṃ pavattitaṃ appativattiyaṃ2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 창조하고 기뻐하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다른 신들이 만든 것을 누리는 신들의 하늘나라의 신들도‘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 | 화락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타화자재천의 신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다.’라고 |
Paranimmitavasavattīnaṃ devānaṃ saddaṃ sutvā brahmakāyikā devā saddamanussāvesuṃ: "etaṃ bhagavatā bārāṇasiyaṃ isipatane migadāye anuttaraṃ dhammacakkaṃ pavattitaṃ appativattiyaṃ2 samaṇena vā brāhmaṇena vā devena vā mārena vā brahmunā vā kenaci vā lokasminti". | 다른 신들이 만든 것을 누리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세계의 신들도‘세존께서 바라나씨 시의 이씨빠따나에 있는 미가다야에서 어떠한 수행자나 성직자나 신이나 악마나 하느님이나 세상의 어떤 사람도 멈출 수 없는, 위없는 가르침의 수레바퀴를 굴리셨다.’라고 소리쳤다. |
타화자재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범신천의 신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다.’라고 |
Itiha tena khaṇena tena muhuttena yāva brahmalokā saddo abbhuggañchi. Ayañca dasasahassī lokadhātu saṅkampi sampakampi sampavedhi. Appamāṇo ca uḷāro obhāso loke pāturahosi: atikkamma devānaṃ devānubhāvanti. | 이와 같이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하느님의 세계에 까지 소리가 미쳤다. 또한 이 일만 세계가 움직이더니 흔들리고 크게 진동했다. 무량하고 광대한 빛이 신들과 신들의 위력을 뛰어넘어 세상에 나타났다. |
이처럼 그 찰나, 그 짧은 순간, 그 잠깐 사이에그 순간에 범천의 세상에 이르기까지 그 소리는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만세계는 흔들렸고 강하게 요동쳤으며, 한량없는 찬란한 빛이 나타났나니 그것은 천인들의 광채를 능가하였다. |
Atha kho bhagavā udānaṃ udānesi: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ti". Itihidaṃ āyasmato koṇḍaññassa aññākoṇḍaññottheva nāmaṃ ahosīti. * aññāsi .aor 3rd sg, * aññā:f. [Sk. ājñā] 了知,完全智,開悟,已知. -citta 知解心, |
이 때 세존께서는 감흥어린 말로 이와 같이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라고 읊으셨다. 그래서 존자 꼰당냐는 앙냐 꼰당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어린 말로 읊으셨다.감탄을 하셨다. "꼰단냐여, 그대가 참으로 알았구나!" "꼰단냐여, 그대가 참으로 알았구나!" 이로 인해 꼰단냐는 '안냐 꼰단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
온라인 불자회 공부방에서는 2023년 10월 19일, 26일 두번 초전법륜경에 대한 토론이 있었습니다. 일봉스님의 매끄러운 진행으로 여러가지 논점들이 심도있게 논의 되었는데 저의 입장에서 이렇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1회로 끝날줄 알았던 초전법륜경이 두번째에도 못 끝나서 11월 2일 목요일에 다시 초전법륜경에 대해서 토론하기로 하였습니다. 다음에 오취온고에 대해서 더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초전법륜경을 마치면 11월 9일에 다른 경전과 새로운 사회자가 진행하게 됩니다.
초전법륜경 논점 정리
논점- 1,이와같이 나는 들었다 에서 나는 누구일까요? 대부분 붇다의 오랜시자를 살았던 아난 이라고 생각하는데 모든경전의 나는 아난일까요?
..아난이 들은 직접 들은 것이나 부처님이 아난에게 들려준 것을 아난이 ' 이와같이 나는 들었다'고 설명하고있다.
논점- 2,여래께서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다 하셨는데 이 중도는 무엇이며 중도는 깨달음의 결과일까요?
.. " 여래는 중도( majjhimā paṭipadā )를 완전하게 깨달았다(abhisambuddhā )"라는 문장으로 중도를 깨달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러나 "이중도는 고요함(upasamāya)으로, 최상의 지혜(abhiññāya)로, 바른 깨달음(sambodhāya) 으로, 열반으로(nibbānāya) 인도한다.라는 목적을 말하고 있으므로 과정으로서의 중도, 목적에 이르는 방법으로서의 중도라는것을 알 수있다. 그런데 고요함(upasamāya)으로, 최상의 지혜(abhiññāya)로, 바른 깨달음(sambodhāya) 으로, 열반(nibbānāya)으로, 라는 용어는 동의어인가? 아니면 수행의 점차적인 단계일까?
논점-3: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부존재에 대한 갈애도 있는데 곧 ‘자살욕구’이다. 존재의 의미, 가치를 부정하고 부존재로 변하고 싶어하는 욕구는 심리학에서도 인정하는 인간의 기본심리 중 하나이다.
논점-4: 3전12행상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봅시다.
...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이다.’(1전) 이 괴로움의 진리는 철저하게 알아져야 한다.(2전) 이 괴로움의 진리는 철저하게 알아졌다(3전)
이 세 상태에서 모두 "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cakkhuṃ]이 생겼다. 앎[ñāṇaṃ]이 생겼다. 통찰지[paññā]가 생겼다. 명지[vijjā ]가 생겼다. 광명[ āloko ]이 생겼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일반적인 문제해결방법의 순서(문제제기, 문재해결을 위한 노력, 문제해결달성)에서 나타나는 것과 다르다. 문제제기, 문재해결을 위한 노력에서는 완전한 지혜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전법륜경에서는 1전,2전,3전에서 평등하게 최고,최상의 지혜가 발휘되고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사유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논점-5: 부처님은 어떤 이익때문에 사성제라는 방식으로 불교를 설명하는가?
..부처님은 12연기를 깨달았으나 사성제로 설명한다. 둑카(dukkha)는 관념이나 개념이 아닌 느낌이다. 불교의 핵심 수행법인 사념처의 호흡관찰, 느낌 관찰,마음관찰도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대상(실제)이지 개념이 아니다. 부처님이 첫 설법을 개념, 관념적인 용어로 설명하지 않는 것은 어느시대 어느 계층에게 오해없이 가르침이 전달되게 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만약에 12연기로 첫 설법을 시작하셨다면 '무명'을 설명해야 하는데, 무명을 이해시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이기에 오비구들이 수다원과를 얻는게 더 어려웠을 것이다.
논점-6: 사성제를 설할때 여러종류의 신들이 차례대로 등장하여 찬탄하는 이유는?
..우주에 여러신들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일 것이기 때문이다. 니까야에서 윤회, 여러신들의 이야기를 못믿겠다고 하면 니까야 자체가 존립하기 어렵다. 양자역학이나 천문학에서 보다시피 우리가 모른다 하여(不認識)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수 없고 보이지 않는다 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새로운 눈이 뜨일 때 보이는 영역이라 할 수 있다.
논점-7:오취온고(pañcupādānakkhandhā dukkhā )에 대한 적절한 해석은?
(각묵)요컨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 자체가 괴로움이다.”
(전재성)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
(백장암)요컨대, '나라고 생각하는' 다섯가지 무더기에 대한 취착이 괴로움이다.
(수자또) In brief, the five grasping aggregates are suffering.
(보디) in brief, the five aggregates subject to clinging are suffering.
(아난다조띠)In brief, the five constituent groups (of mind and body) that provide fuel for attachment are suffering.
(한문)總括之,五取蘊是苦
(일본)要略するに、五取蘊が苦です。
1. Five aggregates affected by clinging (Bodhi)
2. Five clinging aggregates (Thanissaro)
3. Five grasping aggregates (Sujato)
4. Five categories of clinging objects (Nanamoli)
5. Five aggregates subject to grasping (Piyadassi)
6. Five bundles of grasping-fuel (Harvey)
...."오온은 나의 것, 나,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방법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초기의 표현법이 금강경에서는 아트만산냐(아상)으로 정리된다. 오취온(pañcupādānakkhandhā)에 '나라고 생각하는'이라는 표현은 없지만 금강경에서 아트만산냐로 표현된다는점, 집착(upadana)의 핵심이 자아에 대한 집착(attavādupādāna)이라고 설명된다는 점을 감안하여 백장암에서는 오취온고를 '나라고 생각하는' 다섯가지 무더기에 대한 취착이 괴로움이다.'라고 번역하였다. 오취온고는 불교의 핵심인데 이 복합어를 젊은이들이 알아듣기 쉽게 윤문하려는 의도가 컸다.
*분별의 경(Vibhaṅgasutta, S12:2)
수행승들이여, 집착이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kāmupādāna), 견해에 대한 집착(diṭṭhupādāna), 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sīlabbatupādāna), 실체의 이론에 대한 집착(attavādupādāna)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집착 (upadana) 이라고 한다.
4가지 집착(upadana)에서 3가지 집착이 견해의 문제이다. 그 만큼 인간에게 견해가 큰 고통을 주고 있다.
(오온에 대한 경전 인용)
Katame ca, bhikkhave, pañcakkhandhā?
Yaṁ kiñci, bhikkhave, rūpaṁ atītānāgatapaccuppannaṁ ajjhattaṁ vā bahiddhā vā oḷārikaṁ vā sukhumaṁ vā hīnaṁ vā paṇītaṁ vā yaṁ dūre santike vā, ayaṁ vuccati rūpakkhandho.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취착된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인가? 비구들이여, 그것이 어떤 물질이건 그것이 과거의 것이건 미래 의 것이건 현재의 것이건 안의 것이건 밖의 것이건 거칠건 미세하건 저열하건 수승하건 멀리 있건 가까이 있건 번뇌와 함께하고(sāsavaṁ) 취착 되기 마련인 것(upādāniyaṁ)을 일러 취착된 물질의 무더기[色取蘊]라 한다
Katame ca, bhikkhave, pañcupādānakkhandhā?
Yaṁ kiñci, bhikkhave, rūpaṁ atītānāgatapaccuppannaṁ …pe… yaṁ dūre santike vā sāsavaṁ upādāniyaṁ, ayaṁ vuccati rūpupādānakkhandho. 온 경(S22.48)
(오온에 대한 경전 인용)
비구여, 취착은 오취온과 같지도 않고, 오취온 취착과 다르지도 않다.
“Na kho, bhikkhu, taṃyeva upādānaṃ te pañcupādānakkhandhā, nāpi aññatra pañcahupādānakkhandhehi upādānaṃ.
-보름밤의 긴 경(M109)-
논점-8: 오비구는왜 사성제 법문을 듣고 아라한이 되지 못하고 다시 무아상경을 듣고서야 아라한과를 얻는가?
...
논점-9:
(각묵)“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지 못하였다면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신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 · 바라문 신과 사람들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스스로 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장암)"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의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과 신과 사람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라고. 곧바로 천명하지 못했다."
.... 두가지 번역은 표현이 다른것뿐만아니라 내용도 달라졌다. 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해 봅시다.
논점-10:
(각묵)꼰단냐여, 그대가 참으로 알았다(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전재성)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두가지 번역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자.
논점-11:
(전재성)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각묵)“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허정)“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의 남김없는 빛바램, 소멸,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Idaṃ kho pana bhikkhave, dukkhanirodho ariyasaccaṃ: yo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o cāgo paṭinissaggo mutti anālayo.
* taṇhāya는 여격,탈격,소유격으로 사용되지 주격이나 목적격이 아니다.
논점-12: 인간이 두가지 극단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백장암에서 윤문한 것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는 바라나시에서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 머무셨다.
그 때 세존께서는 다섯 명의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 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저속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고행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中道)를 완전하게 깨달았습니다. 안목을 만들고 앎을 만드는 이 중도는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안목을 만들고 앎을 만들어,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이니,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마음챙김, 바른 삼매이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여래는 안목을 만들고 앎을 만드는 중도(中道)를 완전하게 깨달았다. 이 중도는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것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것들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나라고. 생각하는 다섯 가지 무더기에 대한 취착이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쾌락과 탐욕이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欲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성스러운 진리[苦滅道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이니, 즉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이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진리는 철저하게 알아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진리는 철저하게 알아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는 버려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는 버려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었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진리는 닦아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의 진리는 닦아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眼]이 생겼다. 앎[智]이 생겼다. 통찰지[慧]가 생겼다. 명지[明]가 생겼다. 광명[光]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의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과 신과 사람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라고. 곧바로 천명하지 못했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의 세상에서, 사문 바라문과 신과 사람과 그들의 후손들에게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라고. 곧바로 천명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이제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는 앎과 봄이 일어났다.”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다섯 비구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가르침이 설해졌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 ‘일어난 것은 그 무엇이든 모두 소멸하는 것이다.’라는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법륜을 굴리시자, 땅의 신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라고.
사대왕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삼십삼천의 신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라고.
야마천의 신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라고.
도솔천의 신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라고.
화락천의 신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라고.
타화자재천의 신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라고.
범신천의 신들이 한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다.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 그리고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다.’라고.
이처럼 그 찰나, 그 순간, 그 잠깐 사이에 범천의 세상에 이르기까지 그 소리는 퍼져나갔습니다. 그리고 일만세계는 흔들렸고 강하게 요동쳤으며, 한량없는 찬란한 빛이 나타났나니 그것은 천인들의 광채를 능가하였다.
그때 세존께서는 감흥어린 말로 읊으셨다.
"꼰단냐여, 그대가 참으로 알았구나!"
"꼰단냐여, 그대가 참으로 알았구나!"
이로 인해 꼰단냐는 '안냐 꼰단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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