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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도법스님께 드리는 5가지 질문

 

도법스님께 드리는 5가지 질문

 

2013년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본부장 도법스님)는 자문위원회 스님들과 범어사에서 좌담회를 열었습니다. 고우,무비,도법,성우,지안,자승,수불스님들이 모여 합의한 좌담회 결론은 중도를 바탕으로 사람이 부처라는 불교관을 갖고 세상을 고통에서 건지는 구세대비행을 실천하자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론을 바탕으로 도법스님은 한동안 붓다로 살자는 운동을 종단적으로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고우스님이나 적명스님이 이미 입적하신 상황에서 도법스님은 이 주제를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실상산문 수행론으로 정리할 것으로 보입니다.

 

 

붓다로 살자는 운동의 배경은 60권 화엄경 야마천궁보살설게품(夜摩天宮菩薩說偈品)에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 , 마음과 부처와 중생(衆生) 이 셋은 차별이 없다.그리고 대승 열반경 여래성품(如來性品)에서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 , 일체 중생이 다 불성을 가졌다라는 사상에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불성을 종자(種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불성은 결과가 아니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원인임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이렇게 불성은 깊고 아득하여 보기 어려운 것이니 부처님만이 볼수 있다(所有佛性如是甚深 難得知見 唯佛能知)라는 표현이나  보살이 지위가 10지에 올라서도 불성을 분명하게 보지 못한다(如是菩薩位階十地尚不了了知見佛性)”라는 표현을 보면 불성이 누구에게나 쉽게 드러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지만 번뇌가 가려서 알지도 보지도 못하므로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서 번뇌를 끊어야 한다(一切衆生悉有佛性 煩惱覆故 不知不見 是故應當勤修方便 斷壞煩惱)”라고 설명합니다. 이처럼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는 말은 누구나 부처될 가능성이 있으니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수행하라', '자신감을 갖고 수행해라'는 메시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회주스님처럼 '본래 붓다', '당장, 붓다로 살자'라고 이해하는 것은 비약이고 왜곡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떤 초등학생이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대통령감이야!"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대통령이니까 당장 다른나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해야한다"라고 말하는 격입니다. 과거 칠불등 어떤 부처님도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팔정도를 실천하라고 하셨지 여기에서 당장 '붓다로 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화엄경과 열반경의 가르침은 물과 얼음과 수증기는 모두 H2O분자로 이루어져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같다는 것입니다. 모두 H2O분자로 이루어져 있으니 본질에서는 물이 얼음이다’, ‘물은 수증기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현상적으로는 물은 마실 수 있는데 얼음은 마실 수 없고 물은 빨래를 할수 있는데 수증기로는 빨래를 할 수 없습니다. 부처와 중생도 본질적으로는 차이가 없으나 현상적에서나 역활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얼음이 물이 되기 위해서는 온도라는 조건이 필요하고 중생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8정도 수행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조건을 무시하고 본래붓다, 당장 붓다로 살자라고 말하는 것은 열반경의 뜻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닙니다.

 

비유를 하자면 어떤 손님이 커피숍에가서 아이스커피를 시켰습니다. ‘얼음이 물이고 수증기다라고 굳게 믿는 주인이 커피에 물을 더 섞어서 건넸습니다. 손님은 화가나서 얼음을 요구했는데 주인은 얼음이 물이다’ '그냥 먹어라'라며 끝내 얼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손님의 요구를 맞추어주지 못하는 그 커피숍은 망할 수밖에 없듯이 붓다로 살자는 냉엄하고 구체적인 현실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붓다로 살자는 문장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살자라고 권유하는 것은 이미 지금 그 상태가 아닌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최근에 회주스님은 실상산문 수행론이라는 것을 만들려고합니다. 이것은 그동안 스님이 주장해온 본래 붓다이다’, ‘당장, 붓다로 살자는 말을 다시 한번 뒤집는 것입니다. ‘당장, 붓다로 살자고 하면서 다시 수행론을 정립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제서야 얼음이 물이 되기 위해서는 '온도'라는 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살아보니 나는 붓다가 아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계속 붓다로 살자는 이야기를 하시겠습니까? 이 질문과 아울러 아래 네 가지 질문을 더 드립니다.

 

 

 

1.'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 또는 기독교가 있으므로 불교가 있다.’ 라는 아소까 선언 내용을 아직도 지지하시나요?

 

 

 

2.<붓다 중도로살다> 66p에서는  사고팔고(四苦八苦)를 첫번째 화살의 고통"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아직도 그렇게 생각 하시나요?

 

 

3.종단에서 만든 불교성전을 백장암 대중이 검토해본 결과 ‘’160여곳이 잘못된 번역, 표현이 있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스님의 수행론을 정리하는 것보다 만인이 보는 '불교성전'을 잘 만드는게 더 시급하지 않을까요? 또한 종단은 삼귀의를 한글화 하면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종단이 승가의 의미를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개인적인 일을 하기전에 종단의 정체성을 혼란케하는 '삼귀의'를 바로잡는 노력을 먼저해야 하지 않을까요?

 

 

4. 대승불교의 사의지(四依止)를 근거로 회주스님은 항상 "뜻(artha)에 의지하지 문장(vyañjana)에 의지하지 말라" 말씀하시는데,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도 "의미(sāttha)와 문장(sabyañjana)을 갖춘 가르침을 설하라."라고 당부합니다. 불자로서 수행자로서 어떤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옳은 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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