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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50일간 만행 이야기

이번 만행은 4월9일 어머니 49재를 지내고 4월11일 백장암을 출발해서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를 거쳐서 5월30일 백장암에 돌아왔다. 50일간의 여행이야기다. 사찰참배를 다니면서도 문경 고녕가야 세미나에 참석하고, 스님들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고, 매주 목요일 오후 9시부터 <온라인불자회> 구글 meet 토론공부도 하고, 5월 20일 서울에서 열린 '시국법회 야단법석'에 참석하였다. 다니면서 글도 여러편 썼다."부처님 오신 날에 왜 연등을 달까?",  “우리는 왜 시국법회 야단법석을 여나?”, "시비(是非)를 내려 놓는게 불교가 아니다", "쓰러진 불상을 세우는 일보다 중요한 일들", "마곡사 안내판 유감"등 다니다보니 글을 쓰기가 더욱 좋았다. 사찰 순례를 하다가 지치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 쓰는 시간을 가졌다. 친구를 만나면 반가웠고 혼자 지내면 자유로워 50일의 시간이 길지 않게 느껴졌다. 이제 하안거 결제가 이틀 남았다.

이렇게 만행을 기록을 남기는게 가능했던 이유는 날마다 facebook에 그날 다녀온 사찰의 사진과 몇마디를 남겼기 때문이다. 그때 그때 올린 사진과 기록을 보면서 이야기에 살을 붙이고 감상을 정리하고 있다.  
예전에는 선일스님과 근래에는 원만스님, 학해스님등과 만행을 하였는데 이번 처럼 혼자 50일을 다녀본건 처음이다. 다니면서 어려움이 왜 없었겠는가? 유목민처럼 하루하루 먹는것, 자는 것을 먼저 신경써야 하니 다른 고민은 덜어진다. 이것이 여행을 다니는 자의 축복이련가? 이번 만행을 통해서 앞으로 더욱 혼자서 멋지게 만행을 할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만행을 하면서 가고 싶은데를 가고 쓰고 싶은 글을 쓰게되니 나로서는 더이상 바랄게 없다. 폐차 직전인 차를 여기저기 고쳤더니 그런대로 안심하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2023년 하안거 해제하면 이제는 해외 사찰순례를 나서 볼까한다. 
 
 

 

 

4월 11일

 

엊그제 어머니 49재가 끝났다. 어디로든 떠나야 겠다. 무작정 길을 나섰다. 그래도 말할수 있는 목적이 있다면 수덕사에 계신 은사스님께 인사드린다는 정도였다. 그나마 머리 굴려서 생각해낸 것이지 사실은 떠나는게 목적이다. 서산으로 가는 길은 멀다. 6년전 이백만원에 산 중고차는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서 걱정이다. 중간중간 끊어서 가자. 중간에 들린 곳이 대선스님이 주석하시는 완주군 요덕사다. 요덕사는 예전에 원만스님과 같이 들린기억이있다. 원만스님은 인도 보드가야에서 사찰을 창건하고 이십년넘게 인도에서 포교하시다가 몇 년전에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만행을 떠나니 원만스님과 전라도를 여행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때는 정말 편안하고 즐겁게 다녔다.

 

원만스님은 내가 만난스님중에서 가장 편안한 스님이었다. 원만스님이 행자생활을 할 때 갑사에 머무시던 대선스님을 처음 만났다고한다. 원만스님은 대선스님을 좋아해서 은사스님보다 더 따랐다고한다. 대선스님은 원만스님이 보드가야 네란자라강 건너에 ‘여래선원’을 개원할 때 이천만원이라는 큰돈을 시주 하였다. 요덕사에 들린 이유는 대선스님께 원만스님이 입적하였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였는데, 대선스님은 이미 소식을 알고 계셨다. 원만스님은 언양 요양병원에 있을 때 대선스님께 전화를 걸어 얼굴을 뵙고 싶다고 말했다한다. 대선스님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내가 수덕사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수덕사 방장 우송스님과 지내던 이야기, 법주사 명진스님 이야기등을 하셨다. 이 모든 이야기는 마당에서 서서 진행되었다. 요덕사에는 밥해주는 공양주가 있다고 하는데 공양주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스님께 룸비니에서 발견된 석주에 브라흐미글자가 새겨진 다포를 선물했다.

 

 

 

 

4월 12일

오늘은 익산 미륵사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기에 와 보았다. 동탑은 이미 현대식으로 복원되었고 서탑은 옛모습이 남아있다. 서탑의 해체과정에서 사리함등 많은 보물이 나왔는데 지금은 익산국립박물관에 있다. 서탑을 복원할 때 탑속에 발견되었던 사리를 원래대로 봉안하였다고 하니 탑돌이를 하는 마음이 달라진다. 박물관에는 전시된 사리 사진을 찾아가 보았다. 투명한 빛, 붉은 빛, 보랏 빛, 검은 빛이 도는 12과의 사리였다. 박물관에서 사리를 설명하는 해설사는 사리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다. 박물관측에서도 사리에 대한 설명을 해놓지 않고 있다.

 

그 거대한 미륵사 서탑과 동탑이 사실은 그 사리를 모시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사리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면 탑의 설명이 제대로 될 것인가? 박물관에는 미륵사지에서 나온 외사리함, 내사리함, 유리사리함등이 전시되어있고 금판에 새겨진 사리봉안 기록이 있어 639년에 무왕이 건립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석사지에서 나온 인물상은 다른 곳에서 볼수 없는 인물들이라 인상깊다. 금판의 글자 원문과 번역문이 있어 소개한다.

 

"가만히 생각하건대,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셔서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감응(感應)하여 몸을 나투심은 물 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아라.왕궁(王宮)에서 태어나시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斛)의 사리(舍利)를 남겨 삼천 대천세계를 이익되게 하셨도다.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를 7번 오른쪽으로 돌면서 경의를 표하면 그 신통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이라.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광겁(曠劫)에 착한 원인(善因)을 심어 뛰어난 과보를 받으시니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삼보(三寶)에 귀의하셨어라.정재(淨財)를 희사하여 미륵사(伽藍)를 세우시고,

"竊以法王出世隨機赴感應物現身如水中月 是以託生王宮示滅雙樹 遺形八斛利益三千遂使光曜五色行遶七遍神通變化不可思議我百濟王后佐平沙乇積德女種善因於曠劫受勝報於今生撫育萬民棟梁三寶故能謹捨淨財造立伽藍以己亥

 

기해년(己亥年, 639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모시었다. 원하옵나니, 세세토록 다함없는 선근(善根) 공덕(資糧)으로 대왕(무왕)의 수명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고 치세(寶曆)는 천지와 함께 영원하여,위로는 정법(正法)을 넓히고 아래로는 중생(蒼生)을 교화되어지이다. 또 원하옵나니, 왕후의 신심(身心)은 물속의 구슬(水鏡)과 같아서 법계(法界)를 비추어 밝히고, 금강신은 허공과 같이 불멸(不滅)하여 칠세(七世)의 조상까지도 함께 복을 받고,중생들이 다함께 불도를 이루어지이다“

年正月卄九日奉迎舍利願使世世供養劫劫無盡用此善根仰資 大王陛下年壽與山岳齊固寶曆共地同久上弘正法下化蒼生又願王后卽身心同水鏡照法界而恒明身若金剛等虛空而不滅七世久遠并蒙福利凡是有心俱成佛道

 

 

 

 

4월 13일

 

왕궁리 오층석탑에 섰다. 넓은 들판에 오층석탑이 늠늠하게 서있다. 든든하기도하고 한편 쓸쓸하기도하다. 왕궁리 석탑 주위를 천천히 걷노라니 혼자서 여행하는 맛을 알겠다. 홀로선 석탑처럼 자유롭기도하고 쓸쓸하기도 한 느낌, 폐사지는 홀로 찾아야 제맛이다. 세월이 쓸고간 자리에 탑 하나 우뚝 남겨졌다. 나도 남겨졌다. 탑과의 만남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하다. 오층석탑이 바라보이는 소나무 밑 의자에 앉아 있자니 시가 저절로 나온다.

 

왕궁리 오층석탑

 

본래 아무것도 없었기에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다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을

스쳐가는 바람은

제행무상을 읊는다

 

금당의 염불소리 간데없고

마주보던 석탑도 자취없다

옛 가람 제 이름까지 잊으려면

얼마의 시간이 흘러야 했는가

시간을 파헤쳐서

옛 수로를 복원하고

어린 소나무 느티나무 심고

빠진 이빨같은 돌담까지 쌓았으니

다시 시작이라 해야 할까

 

천년 시간이 지난

그 자리에

진달래꽃 지니

철쭉이 피었다

폐사지에 서면

온 길은 잊혀지고

갈 길은 지워진다

 

 

시를 짓고 드는 생각 ...그렇치 시는 고요함에서 나오는 것이지. 홀로 있을 때 시는 나오는 것이지...시인들은 외롭게 사는 사람들이군!

이곳 오층석탑에서는 사리를 담는 용기인 보라색 유리병과 금강경이 새겨진 금판, 금동여래입상,청동방울등이 나왔다. 보라색 유리병속에 있던 사리는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박물관에서 만난 해설사는 영주 부석사에 모셔진 어느 탑의 안내문에 왕궁리 오층 석탑에서 가져온 사리를 모셨다는 설명이 있었다고 한다. 문제가 될 것이 염려되서인지 지금은 부석사에 그 안내판이 사라졌다고. 만약 부석사에서 사리를 모시고 있다면 이 곳에 원래대로 모셔왔으면 좋겠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빛난다.

 

왕궁리 오층 석탑 옆에 왕궁박물관이 있다. 왕궁에서 사찰로 변한 이야기, 철을 생산하던 그릇, 왕실정원을 재현해 놓은 모습, 쇠 솥, 종이가 없던 시절에 사용하였다는 똥 막대기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이층에 디지탈 체험관은 아이들에게 인기다. 미륵사지를 설명하는 5분짜리 동영상이 있어서 시청하였다. 스토리 전개와 그림등은 좋았는데 내용에서는 실망이 크다. 미륵사 창건 설화를 설명하는데 미륵이 누구인지, 언제 이 세상에 오는지. 미륵이 오면 무엇을 가르치는지, 왜 이름이 미륵인지...미륵에 대한 설명은 하나도 없고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하고 백성들이 탑돌이를 하니 미륵이 백성을 축복하였다는 짧고 간단한 내용으로 끝맺고 있다.

 

왜 이런 식으로 동영상을 만들었을까? 미륵보살을 설명하는 것이 특정 종교를 선전하는 것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었을까? 이것을 만든 사람들의 공평하지 않은 의도가 보인다. 익산지역에 사는 스님들이 이 사실에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경전과 삼국사기, 삼국유사등에 나타나는 미륵사지에 대한 기록을 찾아내어 제대로 동영상을 만들도록 박물관측에 요구해야한다.

 

 
 
 
 
 
익산 왕궁리터 에서 나온 똥 누고나서 뒤를 닦는 막대기가 인상적이다. 막대기는 반쪽으로 쪼개져 있어 모서리를 사용하여 닦을수 있게 만들었다. 물통을 가지고가서 막대기를 닦아서 재사용하였다고 한다. 인도인들은 지금도 물병(정병)을 가지고 나가서 똥을 눈 다음 오른속으로 물을 끼얹고 왼손으로 닦는다. 나도 인도에서 살 때 몇년을 그렇게 닦았다.깔끔하고 시원했다. 오늘 아침 화장실에서 볼일보고 나니 휴지가 없다. 할 수 없이 바가지에 물을 받아서 항문에 끼얹고 왼손으로 닦았다.
이글은 이러한 인연으로 쓰게된 것. 백제시대에 막대기를 사용하여 닦아내는게 인도인들의 방식보다는 불편했을 듯. 왜냐하면 막대기로 닦고나서도 다시 항문 주위를 손으로 닦아야하고, 막대기도 닦아야 하기때문이다.

 

 

 

 

 

4월 14일

 

서산 개심사에 왔다. 개심사의 벚꽃은 예전과 같지만 도량은 종각 이전 불사와 석축공사, 중앙에 계단 공사로 어수선하다. 석축을 너무 높고 길게 쌓아서 성곽같은 느낌이든다. 예전의 개심사가 보여주던 자연스러움, 소박함이 사라졌다. 지금 석축을 쌓고있는 석축과 옛 사진을 찾아 비교해 보면 예전에는 2단 석축임에도 높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지금은 3단임에도 중앙에 직선으로 난 계단이 길게보이고 석축은 높게 느껴진다. 석축 옆 길이가 수평으로 길어 단조롭다. 이런 불사는 당장이라도 뜯어말리고 싶다. 그러나 어쩨겠는가? 수덕사 높은 분의 지시로 일사천리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이번 개심사 불사는 수덕사 방장스님의 지시를 따른 것이다. 재작년 나는 개심사에 법당부전으로 살았다. 그 여름 방장스님 일행이 개심사를 방문하였고 개심사 종각이전 공사가 추진중이라는 걸 알게되었다. 감히 방장스님께 반대의견을 말했다. 개심사는 서산 제4경으로 서산시민들이 사랑하는 곳이고, 전국 사찰중에서도 옛 모습을 간직한 희귀한 사찰이니 세월의 때가 묻은 그대로 두어야 한다고.  방장스님은 풍수를 이야기를 하며 종각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기고, 계단을 가운데로 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는 수덕사주지, 총무등 8~9명이 있었지만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절집은 수평적인 회의구조가 아니기에, 속으로는 반대를 할지라도 같으로는 어른 스님의 말을 따라야 한다. 더구나 말사주지가 재임을 마음에 두고 있다면 소신발언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종각을 이전하라고 명령한 수덕사 방장스님이 원망스럽다. 개심사  불사는 민주적으로 소통하지 않는 승가 풍토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개심사 석축공사 현장을 페이스북(facebook)에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댓글로 안타까움과 속상함을 표현했다.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이 된 것 같다“ ”고향이 수몰된 느낌이다“ ”다시 개심사를 찾을 일이 없을 것이다“등등...많은 분들이 안타까움과 분노를 표현하였다. 댓글들을 보자니 비판하는 내가 미안해졌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개심사는 사람들이 다녀가는 곳이 아니다. 개심사는 사람들이 담아가는 곳이다”

이번 석축공사를 보며 왜 사찰이 공유재산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천년사찰이 공적인 것이라면 이런 불사에 승려들뿐만아니라 서산시민들의 의견도 반영되어야 한다. 현재 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으므로 이런식으로 석축공사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왕에 공사를 한다하니 두 가지 보완되기를 바란다.

첫째, 개심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마실 수 있는 수각을 설치해달라는 것이다. 그동안 개심사는 수각이 없어 방문객들에게 너무 미안했다.(기존의 우물은 수질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아 패쇄되었음)

둘째, 종각앞에 있는 사각형 연못의 물이 깨끗해졌으면 한다. 기존의 연못은 더럽고 악취가 풍겼더랬다.

 

 

 

 

 

 

 

 

4월 15일

 

연암산 천장사에 머물다. 아무래도 천장사에서 며칠 머물러야겠다. 여기 머무르면서 은사스님도 찾아뵙고 산책도해야겠다. 선원 뒷쪽에 있는 조용하고 아담한 방을 얻었다. 마침 오늘이 토요법회하는 날이라 법당에 6~7명의 사람이 모인듯했다. 일요법회가 토요일로 옮겨져 토요법회가 되었다천장암은 내가 처음으로 주지소임(2012~2016)을 본 곳이고 그때 만들었던 일요법회가 아직도 운영중이다. 그 중심에 당진에 사는 정덕거사님 부부와 서울에 사는 벨라거사 부부가있다.  신도회장을 맡고 있는 정덕거사님 부부와 차를 마시다가 저녁 공양을 같이 하다. 오랜만에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하다보니 과식을 하게되었다. 고북면에 사는 낙화보살님은 최근에 위암 수술을 했다고 한다.언제나 반겨주는 반가운 얼굴들이 있다는 것은 즐거움이다.

 

 

 

 

4월 16일

 

수덕사 염불당에 기거하시는 은사스님께 인사를 드렸다. 코로나 때문에 얼굴울 뵌지가 오래되었다. 이제 어머니가 안계시니 나에게 어른은 은사스님 밖에 없다. 난생 처음으로 해제비를 쪼개서 은사스님께 드렸다. 스님은 매우 좋아 하셨다. 어느 사제가 해제비를 은사스님께 드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참에 나도 실천해 본 것이다. 나는 그동안 종단에 비판적인 글을써서 늘 은사스님과 사제들을 불편하게만 하였다. 은사스님은 10여명의 상좌를 두었는데 첫째인 나와 둘째인 선일스님은 은사스님을 매우 어려워 하는 반면 아래로 내려 갈수록 상좌들는 은사스님과 잘 소통 하였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고, 대상에 따라 마음이 다르게 일어나기 마련이니... 같은 은사스님을 놓고도 상좌들의 입장이 다르다.

 

이번에 느낀 것은 은사스님이 수다쟁이란 것이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을 못만나서 그런지...내가 오랜만에 효도 같은 것을 해서 그런지, 예전보다 말씀을 많이 하시고 점심공양을 손수 차려 주셨다. 밥도 반찬도 당신이 차리시고...도와주려고 해도 못 거들게 하셨다. 말씀중에 내가 종단을 비판하는 글을 자주 쓸 때 나와 사제지간의 인연을 끊으려고 하셨는데 다른 사람이 말려서 못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느날 사제스님이 문자로 그렇게 살고 싶으면 불교신문에 이연 공고를 내고 쓰고싶은 글을 쓰며 살라는 문자를 받았다. 그 것이 은사스님의 뜻이었다는 것을 오늘 새삼 확인하다. 은사스님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 언젠가 나에게 네가 쓴 글을 보니 "너의 말이 다 맞다. 그러나 왜 니가 제알 앞에 나서야 하는 거냐? 너는 뒤에서서 그런 일을 할 수도 있는거 아니냐?" 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너의 말이 맞다"는 것에 큰 위안을 얻었는데 나와 인연을 끊으려고 했다니...서운 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것도 잊어버리기로 했다

 

예전에 은사스님과 나의 사이가 어땠는지 알수 있는 일화가 있다.

사미계를 받고 몇 년이 지나도록 내가 은사스님을 찾아뵙지 않자 주변의 스님들이 나에게 은사스님을 찾아가 승복이라도 달라고 해야 정이 생긴다고 충고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은사스님께 입을 옷이 없다고 말했다. 은사스님 대답은 “나도 옷이 없다!” 그렇게 서로 멀뚱히 쳐다보다가 나를 세탁기 있는 곳에 데려갔다. 세탁기 속에 들어가 있는 단신의 옷을 꺼내서 입으시고 나에게는 당신이 입고 있는 옷을 벗어 주려고 하셨다. 나는 놀라서 저는 옷이 필요없어요라고 말하였다.

 

어느 때 나는 치아가 아파서 운수암에 머무시는 은사스님을 찾아갔다. 충치가 있어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야한다고 말했다. 은사스님은 “나도 아프다!”라고 말하며 당신의 몸이 아픈 곳을 여기저기 말하셨다. 나는 더 이상 병원비를 달라고 말하지 못하고 나와야했다. 

 

 

 

 

4월 17일

 

예산에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자연보살(용진옥)을 만나 점심을 함께먹다. 자연보살은 기독교인인데 천장암에서 인연이 되어 나는 자연보살이라고 부르고 있다. 용작가는 예산군에서 농협창고를 개조한 곳에 세를 들어 살며 예술활동을 하고 있었다. 칼국수와 수제비가 섞인 국수일명 칼제비를 사주어서 맛있게 먹다코로나 시기이기에는 예술가들이 가장 힘들 것이다. 요즘 전기세가 올라서 걱정이란다. 호흡을 알아차리며 걱정을 해소시키는 방법을 알려주고 다포도 선물하였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많은 창작활동이 있기를...

 

 

 

 

 

4월 18일

 

구항면에 있는 석련사에서 1박하다. 주지 경보스님은 101세의 노모를 모시고 산다. 용봉사주지할 때부터 모셨으니 어머니를 모시고 산지는 오래되었다. 그동안 요양사자격증과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따는등 열심히 사신 것 같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강원도 어디쯤에 사찰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디지털 포교, 법화경등을 시각화하여 포교하는 꿈을 꾸고 있는데 그 스님을 오랫동안 알아온 나로서는 의외의 발상이다. 마음껏 격려하고 싶지만 전문적인 영역은 더 고민하고 더 재주가 많은 사람들이 많은데 경보스님이 나서는 것이 걱정이 되는면도 있다. 그래서 그 감독과 여러곳을 여행해고 견학해보라고 권했다. 견문이 넓어지다보면 더 쉽게 그러나 더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석련사 마당에 모여있는 다섯그루 정도의 느키나무는 보배다. 느티나무에 앉아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진다. 나무가 나를 위로하는 것 같다. 느티나무를 살려서 템플스테이를 하는 방안을 연구해보면 좋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이 느티나무들이 자꾸 생각난다. 나는 느티나무를 좋아하나보다. 

 

 

 

 

 

4월 18일

 

수덕사에 우송 방장스님을 찾아뵙다. 방장스님은 반갑게 맞아 주신다. 사실 나는 개심사 종각 이전을 지시하고, 수덕사 승려복지를 실현하지 않는 방장스님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다. 차기 주지는 승려복지를 실현할 주지를 추천해 달라고 미리 말씀드린적이있다. 이번에 수덕사주지에 도신스님이 추천되었다. 도신스님이 승려복지를 최우선 과제로 삼을지는 알 수 없다. 방장이나 주지나 공심을 가진 자가 해야한다. 방장스님이 아일선보살에게 돈을 빌려서 차비를 주신다. 방장스님이 나에게 차비를 주실때 매번 아일선보살에게 돈을 빌려달라고 해서 주시기에 내가 "아일선 보살은 돈 나오는 은행같다"고 농담을 건넸다. 방장스님이 사시예불에 참석하자고 해서 같이 법당에 올라갔다. 신도들에게 "이~~뭣꼬?"를 가르치는데 "이~~"하고 숨을 내쉬는 시간이 2~3분이 넘어가는 것 같다. 이렇게 소리내어 다같이 이뭣꼬를 하는 방법은 동질감과 집중력이 기대된다. 참신한 방법같다. "이 뭐꼬~~?"를 길게 소리내어 4번정도 하다보니 어느 덪 법회를 마칠 시간이 되었다.초하루 법회 사회는 노전을 맡은 성두스님이 보았다.성두스님과는 예전에 행자생활을 같이 하였다.

 

사시예불을 마치고 점심공양을 하려고 공양간에 들리니 영수스님, 법안스님, 도광스님등이 공양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서로 어색한데 영수스님이 말을 걸었다. “이번에는 무엇을 쓰려고 왔어?” 내가 그동안 종단에 비판적인 글을 쓴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보여지는데 그 말을 듣는 게 썩 기분은 좋지 않았다. 비판하는 것은 무조건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그 말속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밧줄에 묶인 송아지처럼 침묵하며 사는 것이 더 불행한 것일진데...영수스님은 미안했던지 공양을 마치고 나에게 다가와서 백장암 대중이 몇명이고 어떻게 사는지등등 몇 가지를 더 물었다. 

 

 

 

 

4월 19일

 

추사고택과 화암사에 들리다. 추사 김정희가 백파스님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추사에게 더욱 매력을 느꼈다.  추사김정희는  1786년생이고 백파스님은 1767년생이므로 백파스님이 20년 정도 나이가 많은데 추사가 백파에게 주는 편지는 아이를 가르치는 것처럼 거침이 없다. 추사가 초의에게 주는 편지는 동갑이라서 그런지 따듯한 감성이 묻어나는데 백파스님에게 쓴 편지는 날카롭고 차갑다.  

 

백파에게 주다[與白坡]

 

백파 노사(白坡老師) 편안하신지요? 지난번에 숨김없이 말을 했는데 어찌 다시 반박할 도리가 있으리오? 전후 편지 사이에 털끝만큼이라도 노여움을 숨긴 바는 없었는데, 문득 보내 온 편지에 중언부언하는것은 이는 스님이 스스로 갈등을 일으킨 것이지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밥알이 책상위에 가득하군요.

白坡老師禪安。旣與之放言不諱。寧有反之之理。前後紙楞墨角。曾無一毫近似於藏怒底意。來諭之忽此斤斤。是師自作藤葛。不覺噴筍滿案也

 

 

스님의 연세가 장차 여든입니다. 오늘날 선문(禪門)의 종장으로서 평소에 선지식(善知識)을 만나지 못했고 또 눈 밝은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으니 누가 스님의 공부(機鋒)를 이끌어 주겠나요. 따라서 좁은 안목(頂門)으로 침침한 귀신굴(鬼窟) 속에 허다한 세월을 보내놓고 문득 큰 사자후(獅子吼)를 토하는 사람을 만나니 마땅히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질밖에요.

師年將八十。又是今日禪門宗匠。平昔未甞遇善知識。又未甞見明眼人。機鋒誰爲之撥轉。頂門仍以之湮塞。沉沉鬼窟。過了許多歲月。忽撞差放言人大獅吼。宜其瞠乎爾也

 

 

내 비록 비천하지만 어찌 늙은 두타(頭陀) 한 사람을 용납하지 못하나요. 지난번 편지에서 언급하였듯이 스님은 하나의 속제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깊은(甚深)한 부처님의 뜻(佛旨)에 이르겠나요. 이것은 스님의 턱없이 부족함(敗闕)이니 어찌 웃음이 터져 밥알이 책상에 가득하지 않겠소?

吾雖菲淺。豈不容老頭陀一人。至於並及其先狀也。師於一俗諦文字。尙不得深究。何以透到甚深之彿旨也。卽此而師之敗闕無餘。尤豈不噴筍滿案也。

 

추사기념관을 찾아가기 전에 추사가 쓴 암각화가 있는 화암사를 방문했다. 비구니스님이 주지를 사는데 복지회관장을 겸하고 있기에 낮에는 거의 머물지 않는다.  그래도 용무가 있는 사람은 전화를 달라는 메세지가 붙어 있는 걸 보면 두 가지 소임을 열심히 살려는 마음이 느껴진다. 주지스님과 도반인 스님이 어떻게 오셨냐구 몇번을 묻는다. 그냥왔다고 해도 안 믿는 눈치다.   

 

 

 

 

4월 22일

 

해미 보리수 원룸에 사시는 일초스님과 점심 공양을 하고 소화도 시킬겸 문수사 벚꽃을 보러 들리다. 일초스님은 절집으로는 후배스님이지만 속가의 나이는 나보다 많다. 요즈음 건강이 좋치 않아서 해미에 있는 원룸에 살고계시다. 매달 40만원정도 월세를 내면서 살고 있다는데 그 돈을 어떻게 감당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분들은 본사인 수덕사에서 도와주어야 한다. 제일 좋은 방법은 수덕사에서 방 하나를 내어주어 같이 사는 것이다. 수행자가 저렇게 홀로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안타깝다. 스님이 스님들을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랴? 안타까운 현실이면서 몇년후의 내 모습이기도 하다. 

 

문수사는 개심사와 2km떨어져 있는데 겹벚꽃이 한창이다일초스님도 서산 문수사 벚꽃을 보고 놀란다. 자가용이 없으니 일초스님은 해미에 살아도 문수사의 벚꽃이 이렇게 장관인 것을 몰랐던 것이다. 전국에서 유일하게 청벚꽃이 피는 개심사이기에 벚꽃은 개심사가 제일이지만 벚꽃이 피는 시즌이면 개심사입구는 차량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벚꽃이 만개한 시절에는 신창리 삼거리에서 대웅전에 도착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린다. 평소에는 1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다. 도로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짜증나는 일인가? 문수사는 진입로와 출구도로가 따로 있어서 차량소통이 원활하다. 오늘 내가 개심사를 지나치고 문수사를 선택한 이유다. 개심사에 들어가려다 차가 막혀서 답답해하던 사람들이 꿩대신 닭이라고 우리처럼 문수사를 들린다. 닭치고는 너무 훌륭하여 곧 꿩이 될듯하다. 문수사주지 범주스님은 누구나에게 차를 대접하고 쉬어가도록 마당에 오두막을 만들어 놓았다. 올해는 서산시 합창단을 초청하여 노래하고 효도잔치도 하는 모양이다. 친절하고 편안한 문수사의 많은 발전을 기대한다.

 

 

 

 

 

 

4월 24일

 

오늘 명진 tv에 나와 도정스님, 진우스님과 생방송에 출연하기에 서울에 왔다. 중간에 대구 동화사에 관심이 많은 젊은 거사님을 만나서 같이 저녁을 먹다. 1시간이 넘게 생방송을 끝내고 차를 마시고 헤어졌다. 진우스님이나 도정스님은 혼자서 방송을 해도 어지간히 이끌어 가는데, 나는 혼자서 방송하면 너무 진지해지는 면이 있다. 그래서 나는 셋이서 같이 방송하는 것이 편안하다. 오늘은 자승스님 일행이 인도에가서 43일 걷기를 하고 돌아온 것에 대하여 평가하고 윤석렬 대통령이 잘못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상월결사 인도 순례를 계기로 인구대비 0.5%에 불과한 인도 불자들이 결집하면서, '인도판 상월결사 순례단'이 결성돼 불교유적지 순례에 나섰습니다. "라고 마치 상월결사 걷기에 감동한 인도 불자들 500여명이 순례를 시작한것처럼 보도하였다. 오늘은 그 기사가 왜 가짜인지 그 증거를 이야기하였다. 진우스님의 비판이 있고나서 인도 불자들이 순례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한국 불교계 언론은 한번도 후속보도를 하지 않고 있다. 그들도 그것이 가짜 뉴스였다는 것을 알고 있음이다. 정말로 불교신문,불교방송등에서 가짜뉴스로 민중을 속이려 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분노가 끓는다. 그 들은 그런 가짜뉴스를 생산해 내고도 한마디 사과도 없다. 

 

 

http://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02810 

 

낙타 앞세운 '인도판' 상월결사 순례단 등장...K불교 확산 - BBS NEWS

상월결사 인도 순례를 계기로 인구대비 0.5%에 불과한 인도 불자들이 결집하면서, \'인도판 상월결사 순례단\'이 결성돼 불교유적지 순례에 나섰습니다. 인도 언론 \'유니 뉴스24(UNI NEWS24)\'는 어제

news.bbsi.co.kr

 

 

https://www.youtube.com/watch?v=bh1VQmSNFhE&t=522s 

 

 

 

 

4월 25일

 

나는 용산역에서 홍성역으로 가는 새마을호를 타고 홍성에 도착하였고 선일스님은 서산버스터미널에서 도착하였다. 내일 만공스님 다례제와 수덕사 주지 진산식에 참여하고자 경주에서 선일스님이 온 것이다서산에서 만나서 저녁을 먹고 천장사에서 1박하다. 선일스님이 따듯한 방에서 자야 한다고 하길레 나는 다실에서 자고 선일스님에게 나의 방을 양보하다. 

 

 

 

 

4월 26일

 

만공스님 다례제에 참석하기 위해 선일스님과 천장사 주지 중현스님과 함께 정혜사에 도착하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스님들과 눈인사를 하였다. 큰방에서 나오는 설정스님과 눈이 마주쳤다. 빠르게 인사를 했지만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셨다. 금선대에서 다례를 올리고 설정스님이 밤을 가지고 내려와 스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와 눈이 마주쳤지만 곧 바로 외국인들에게 다가가서 밤을 나누어 주었다. 점신공양을 하고나서 사람들이 거의 빠져 나갔을 때 나는 다시 설정스님께 다가가서 그동안 찾아뵙지 못했다고 큰 절을 올렸다. 그때서야 설정스님은 나를 보고 니가 나를 총무원장에서 내려오라고 해서 결과적으로 종단이 지금 어떻게 되었니? 라고 다그치셨다. 지금 종단이 한 사람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을 바라고 그런 운동을 한 것이냐고 물으셨다. 나는 스님을 내려오라고 한 것이 아니라 그런 흐름속에 있다보니, 스님 눈에는 그렇게 비친 것이라고 변명을 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자승스님에게 가장 비판적인 글을 쓰고 있다고 설명 드렸다. 

 

스님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졌고 시자스님과 혜우노스님이 난처해 하셨다. 옆에 앉아있던 혜우스님은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듯이 우리를 번갈아 쳐다보셨다. 설정스님의 목소리가 커지자 선일스님과 선경스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갔다. 설정스님은 만공스님 다례제에 현 방장 우송스님이 참석하지 않은 것도 문제를 삼았다. 사제가 방장자리를 이어 받았지만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뒤 나는 결과적으로 스님께 죄송하게 되었다고 말씀드리고 앞으로 자주 찾아뵈겠다고 했다. 스님이 나의 면전에서 화를 낸 것만으로도 어느정도 화가 풀린것 같다. 이렇게라도 대면하여 화를 풀었으니 다행이다. 앞으로 대중이 모이는 자리에 적극적으로 참석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저녁에 심운스님, 혜산스님, 선일스님과 나는 쿠쿠 뷔폐식당에서 저녁을 먹기로 약속하였다. 약속시간이 남아서 선일스님과 나는 호수공원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들에게 ‘승가’라는 단어를 열심히 설명해도 듣는 사람들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 같지 않다고 내가 하소연 하듯이 말했다. 선일스님은 그동안 스님들이 승가라는 것을 모르고도 잘 살아왔으므로 새삼스럽게 승가를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으며,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기에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승가를 공동체라고만 이해해도 승가의 명확한 뜻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본인이 그런 경우였다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아래와 같은 이유를 알고나서 ‘승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첫째 부처님 사후에 새로운 계목을 제정하거나 폐기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가 승가다.

둘째 불법이 유지되도록 수계를 주어 출가자를 만들어내는 유일한 단체가 승가다.

셋째 사찰과 임야등을 보시 받고 미래세대에 물려주고 불가피한 경우에는 재산을 처분 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가 승가다.

넷째 법과 비법을 판가름할 수 있는 유일한 단체가 승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백명의 아라한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부처님께 보시하는 것보다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공덕이 더 크다”고 부처님이 웰라마경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결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한다”고 말하면 안되는 것이다. 조계종안에서는 누구도 승가의 의미를 가르쳐주지 않는다. 선일스님이 설명하는 방법으로 승가를 설명한다면 이해가 명확해 질 것이다.

 

 

 

 

 

 

4월 27일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이주 노동자들을 상대로 법회를 하고 있는 아산 마하위하라 스리랑카절에 갔다. 한국에 온지 18년째라는 담마끼띠 주지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주지스님 이외에 2명의 스님이 더 있었다. 초기불교와 중관사상을 비교하여 박사 논문을 쓴 담마끼띠스님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나름대로 명쾌하게 설명하였다. 마하위하라 사찰은 코로나 시기에도 사찰 문을 닫지 않았다한다. 오히려 사찰의 담장가까이 걷기 코스를 만들어 누구나 찾아와 행선을 하게 하고, 열대식물을 키우는 비닐 하우스를 만들어 이주 노동자들이 고향의 향수를 달래게 하고, 매일 아침 저녁 예불을 facebook으로 생중계 하고, 코로나에 걸리지 않도록 날마다 보배경을 독송하였다고한다. 그래서 그런지 사찰을 폐쇄하지 않았어도 사찰에서 코로나 환자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도 매일 아침 저녁 예불을 facebook으로 생중계 하고 있다고 한다. 스님들이 만든 스리랑카 음식을 점심공양으로 대접했는데 매우 맛있었다. 6월8일 날에는 스리랑카에서 오신 종정스님을 모시고 통도사를 방문하여 조계종의 종정스님과 만나는 교류행사를 한다고 한다. 젊은 스님이 명석하기도 하고 에너지가 넘친다. 몇년후에는 명상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명대학으로 공부하러 갈것이라고 한다. 

 

 

 

4월 27일
 
참 아름다운 절. 진천 보탑사
지광 노 비구니스님이 88년부터 불사를 했다네요.
오천만원으로 불사를 시작하여 우여곡절 끝에 4년만에 목탑을 완성했다합니다.
거대한 목탑을 중심으로
와불, 반가사유상, 입상, 윤장대,업경대 등등 아기자기한
도량구성은 다른사찰에서는. 보기 어려운 색다른 모습입니다.
도량 곳곳이 창의적인 건축과 조경이어서
본의 아니게 사진을 많이 찍었습니다.
도량을 가꾼 것만으로도
마음이 안식을 얹고, 포교가 되는 사찰,
주지 능현스님으로부터 불사에 대한 이야기를 상세히 들을 수 있어
더욱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아소까석주에새겨진. 브라흐미문자 칙령 다포를 선물하였습니다.
 
 
 

 
 
 
 
 
 
 
 
보탑사에서 나오는 길에 문수암에들리다.
문수암 주지 지정스님 바쁘다.
연등을 진입로에 나무들에게 선물이라도 하듯 소복소복 걸었다.
처음보는 얼굴임에도 정겹다.
6년동안 도량을 가꾸느라 힘들게 지냈단다.
부처님. 배가 불룩해서 아이 못낫는 여인들이 기도하면. 영험이 있단다.

 

 

 

4월 28일
 
문경 봉천사
가야 학술세미나를 준비하고 계신
지정스님을 만나러 봉천사에 오다.
대웅전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전망이 멋지다.
지정스님은 '상주함창고녕가야 선양회'를 만들어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데 5월2일 오후2시 문경문화예술회관에서 제4회 함창고녕가야 세미나가 열린다.

 

 

 

 

 

4월29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안동 봉정사에왔다. 영화 촬영지로 유명한 곳이라 기대를 많이하고 왔는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누각과 영산암은 보수공사를 하고 있었다.원래의 봉정사 모습을 가늠할 수 없어서 옛 사진이라도 보려고 종무소에 들어갔다. 사무장보살이 컴퓨터에 저정되어있는 사진을 보여주었다. 차도 얻어 마시고 나와서 대웅전에 들어가 사진을 찍었다. 대웅전과 극락전은 국보이다. 대웅전에 들어가니 용모양의 단청이 생생하세 살아있다. 오래된 작은 범종에 새겨진 보살상이 귀여웠다. 법당 앞에는 누각처럼 마루가 있는 새로운 건축양식이었다. 법당 축대도 통돌이 아니고 담장처럼 여러개의 자연석으로 쌓여져있었고 작약이 피어있어 운치를 더했다.영산암에 오르는 계단이 아름답다. 계단을 보고 오르다보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까 기대를 갖게 만든다. 영산암에도 수리를 하고 있는 건물이 많아서 영산암의 고요와 건축미를 감상할 수 없다. 다만 소나무 사이로 갈라진 두 개의 계단을 즐겁게 감상 했다. 나무가 생기고나서 만들어졌을 계단은 물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은 법당 규모에 비해 크기가 컸다. 이곳 법당 앞에도 마루가 있는데 흡사 개심사 심검당 앞에 마루 같다. 이렇게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암자의 전모를 수리하는 시기에 와서 못보니 많이 아쉽다.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봉정사 선원으로 가다. 선원은 원래 지조암이라는 암자였는데 현재 선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금해스님이 산철에는 이 곳에서 쉬고있다고 해서 찾아온 것이다. 선원에 잠시 들렸다는 법융스님이 선원 여기저기를 안내해 주었다. 특히 전망이 가장 좋은 곳을 안내해 주었는데 정말로 정원같은 안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러한 풍경이 영주 부석사에서도 펼쳐진다. 선덕 정묵스님이 머물고 있다는 중암에도 올랐다, 정묵스님은 산철에 극락암에 가 있어 중암의 문은 닫혀 있었다. 봉정사에서 원인스님이 계시는 봉화 도성암에 도착하였다. 원인스님은 울진에가서 늦게 돌아온다고 하여 혼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부엌에 있던 수박도 후식으로 먹었다. 인터넷이 안되는 지역이라서 밀린 만행기를 썼다.

 

 

 

 

 

4월 30일

 

원인스님과 아침에 죽을 먹고 스님의 토굴(도성암)에서 보이차를 마시다. 나는 문화재관람료 무료화문제와 5월20일 광화문에서 시국법회에 참석하시길 부탁드렸다. 스님은 지금 불사를 하고 있어서 참석이 어렵다고 하셨다.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스님이 주시는 보이차를 받아가지고 나왔다. 근처에 있는 홍제사에들려서 청원스님이 차려준 점심을 먹고 차를 마셨다. 마침 덕*스님이 같이 잠시 머물고 있어서 차를 같이 마셨다. 덕*스님은 원인스님의 상좌라서 원인스님에 대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부정적인 내용이 많아서 여기에다 적을 수 없다. 홍제사는 양명하고 맑은 도량이다.

 

 

 

 

 

 

각화사로 가다가 봉화산사라는 곳에 들렸다. 봉화산사는 불교박람회에서 자주보았던 절이름이었는데 여기가 거기였던 것이다. 비구니스님 두분이 운영하는 사찰인데 주로 홍도라치청을 만들어 판매하고 연잎차도 만들어 팔고 템플스테이도 한다고한다. 신생사찰이지만 나름대로 현대인들에게 어필데는 곳이 있어보인다. 두 스님이 성격이 달라서 오히려 잘 조화를 이루며 살고있는 듯 했다. 나는 백장암에서 하고 있는 원융살림과 토론공부를 이야기 하였는데 비구니스님이 신선하게 생각했다. 홍도라지청을 선물 받았는데 백장암 주지스님이 먹으면 좋을 것 같다. 나중에 이 도라지청은 학해스님에게 돌아갔다. 

 

 

봉화 각화사에는 처음 와보았는데 기대한 것보다 실망이 크다. 각화사 입구 축대는 위압적이고 계단은 단조롭고 선방은 대웅전과 너무 붙어있다.종각 밑에 메어 놓은 검은 개도 눈에 거슬리고 간이 화장실을 열어보니 청소가 안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절이 산만하고 정리가 안되어 있다. 산신각 앞에서 풀을 뽑고 있는 보살님을 발견하였다. 각화사에 온지 보름밖에 안되었다는 공양주 보살이다. 주지스님은 출타중이며 절에 머무는 날이 많치 않다고...아직 주지스님하고 차 한잔 안했고 주지스님 법명도 모른단다. 각화사는 불사를 끝낸지 오래되어 보이지는 않는데 불사를 잘못한 사례로 남을 것같다. 보살님은 서산 부석사에서 1년반이나 공양주를 하셨다한다. 내려오다가 부도탑을 발견하였는데 부도가 기울어져 있는 것들이 보였다. “부도 조차 기울어지고 있네”라는 생각이 든다. 비석을 세워 놓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돌이 문화재로 지정되어있는데 철재로 담장을 만들어 놓았다. 철재 담장이 높고 우왁스럽다. 여기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4월 30일 축서사

 

무여스님이 계신 축서사에 들리다. 도량의 불사는 입이 딱 벌어질 만큼 해놓았다.

이 스님의 스케일과 섬세함이 느껴진다. 그렇치만 나는 왜 동화사 방장에 서의현이 오르는 데도 아무 말 안하고 있습니까?를 물으러 왔다. 다음날 아침 9시쯤에 무여스님 방에 찾아갔다. 객실에 상월결사 달력이 있다고 말씀드리니 각화사는 상월결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전국 선원과 강원과 종회의원들에게 서의현 방장 추대에 관한 공개질의서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고 여쭈니, 스님은 그런 공문을 받지 못하였다고 대답했다. 순간 허탈하였다. 나는 의현스님이 방장이 된 것은 조계종의 정체성이 바뀐 것이라고 한탄하며 말했다. 스님은 침묵으로 듣고 계셨다. 전국선원수좌회에서 화두 두는 사람 아니면 전국선원에 방부 받지 않는다라는 청규는 발심출가자를 쫓는 일이라고 비판하였다. 스님도 미얀마 스리랑카 등지에서 위빠사나 수행을 접하고 출가한 사람들에게 따로 종단에서 수행처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 하셨다. 백장암에 살았다고 하니 예전에 축서사에서 지낸 행선스님과 선일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며 반가워 하셨다. 백장암에서 실험적으로 일주일에 한번씩 법담탁마하며 지내는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 기대와 우려를 같이 내 보이셨다. 한 시간 넘게 이야기를 하다가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나중에 축서사를 나서는데 시자스님이 차비를 가지고 따라왔다. 

 

 

 

 

 

5월 1일

 

영주 부석사에 들리다. 자연에 순응하는 도량, 베흘림 기둥으로 당당하게 버티는 무량수전만으로도 압도한다.
아미타불이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향해있고, 법당 앞에 서있어야 할 삼층석탑이 서쪽에 물러나 도량을 굽어본다. 안양루 누각은 종각과 어긋나있고, 일주문에서부터 좁아지고 넓어지고를 반복하는 계단을 지그재그 밝고 올라야 무량수불 앞에 도착한다. 어긋나고 뒤틀려 있는 것에, 질서를 부여하고 유지하는게 부석사의 여유다. 부처님 품안이다.

무량수전에서 멀리 떨어진 자인당에 모셔진 석조 삼존불은 모두 보물이다.그런데 자인당의 문이 잠겨있어 방문객은 안내판만 읽고간다.내가 안타까워 "문을 열어보셔도 되요"라고 말해주니 방문객은 
"정말 열어봐도 되요?" 라고 되묻는다.왜 문화재관람료를 받으면서 법당 문을 잠가 놓는가? 

"꽃문양이 조각된 승각기(내의)"라는 안내판의 표현도 자연스럽지 않다.

부석사에는 각각의 문화재를 소개하는 안내판은 있지만 부석사를 종합적으로(화엄사상,의상대사,법성게,선묘,고려와조선시대의 부석사등)설명하는 안내판이 없다. 정감있고 친절한 안내판은 몇 백명의 포교사 역활을 한다.
유홍준교수의 제안처럼 '사찰 안내판 공모전'이라도 열어서 중학생들도 공감하는 최상의 안내판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일에 신경 쓰는게 승려와 불자들의 권리이자 의무 아닌가?

1층은 공양간이고 2층은 관음전이다. 1층 공양간 벽면은 사진처럼 녹아내려 구멍이 뚥려있다. 손으로 돌을 만져보니 흙처럼 돌가루가 흘러내린다. 부실공사다.
나라의 세금으로 지어졌을 것인데,
어찌 이런일이...

 

 

 

 

 

 

5월 2일

 
문경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예천을 지나다가 회룡포와 장안사를 들렸다. 장안사와 회룡포는 불과 300m 정도 떨어져 있었다. 회룡포를 올라가는 길이 멋스럽고 곳곳에 설치된 나무에 시들을 적어 놓았다. 걸으면서 시를 읽느라 발걸음이 느려진다. 요즘 부쩍 시에 관심이 가서 등산로 주변의 시들을 유심히 읽으며 걸었다. 회룡포안에 섬처럼 마을이 하나가 있었다. 그동네에서 식당도 하고 민박도 하나보다. 시간이 있으면 회룡포의 모래를 걷고 싶은데 시간이 없어 장안사로 향했다. 장안사 주지스님은 풍채가 좋다. 도량 곳곳에 법구경등 부처님 말씀을 적어 놓아 절을 찾는 이들에게 법보시를 하고있다. 너무 많은 경구가 걸려 있다는 느낌이 든다. 처음 본 객승에게도 차비를 챙겨주시며 공양주가 휴가를 가서 공양을 같이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 하셨다. 나중에라도 다시 들려서 살아오신 이야기, 포교하신 이야기를 듣고싶다.  

 

 

 

 

 

 

 

5월 2일 

 

문경 문화예술회관에 고냥가야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하다. 문경봉천사 지정스님이 고녕가야를 알리기 위해 고분군투하고 있기에 울력한다는 심정으로 참여하였다. 마침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칠곡에서 학해스님이 왔고 전국선원수좌회 대표 지오스님과 예전에 계룡산 갑사에 머무셨던 야운 스님도 뵈었다. 대표스님을 모시고 온 스님도 만났는데 법명은 기억하지 못한다. 그 스님들이 명진 TV에서 나를 보았다며 이것저것 궁금한 것을 질문 하셨다. 세미나가 시작되고 첫번째 강의를 맡은 바른역사협의회 이매림 강사의 강의는 시원시원 하였다. 저녁 공양을 하러 식당에 들렸다가 가야문화진흥원장 도명스님을 만났다. 나중에 김해 도명스님의 절 여여정사에 들리기로 하고 헤어지다. 

 

 

 

5월 3일 

 

세미나장에서 만난 학해스님을 따라 금곡사에 와서 머물다. 학해스님이 근처에 있는 설봉스님 도자기 장터에 가보자고 하여 설봉스님 처소인 토향암(土香痷)에가서 도자기를 구경 하였다. 설봉스님은 건강이 안좋으셔서 더 이상 작품을 못하시고, 기존에 가지고 있는 작품을 정리하려고 내놓으셨다고. 도자기 중에서 사는 싶은 것도 있었으나 값이 비싸서 포기했다. 

설봉스님 도자기 전시장:
경북 칠곡군 지천면 황학리 448번지  ‘
054-972-5085

 

 

 

5월 4일

 

칠곡 보덕사 선암 동욱스님 대종사 품수 및 팔관재 수계식에 참석하였다. 스님은 간단하게 의식을 진행하였는데 그 모습이 좋게 느껴졌다. 지역에 사는 스님들이 많이 참석하였는데 비구니 스님들이 대다수였다. 나는 비구니스님들께 아소까 석주에 새겨진 브라흐미 글자가 들어간 다포를 설명하였다. 관심을 보이는 스님이 두 분 계셔서 그분께만 다포를 선물하였다.

보덕사를 나와서 동욱스님이 주신 차비봉투를 열러 보니 꽤 많은 금액이 들어 있었다. 행사를 치루는데 비용이 많이 들었을텐데 이렇게 차비를 많이 주시다니 ... 새삼스님의 마음씨에 감동하다. 보덕사에서 나와 금곡사 반대편에 있는 절에 들리기로 하고 가다가 팔공산 묘향사에 들리게 되었다. 신생 사찰인데 후불벽화가 특이하다. 홍익대 문봉선 교수의 작품이라고 한다. 보드가야에 일본절에 현대인들이 등장하는 후불탱화가 생각났다. 이렇게 문화는 창조해가는 것이지 무조건 전승만 해서는 안될것이다.    

 

 

 

 

 

5월 5일

 

경주 열암곡 부처님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천년 불교를 세우는 것이라고 홍보하기에 페이스북에 몇자 적다.

 

누워있는 부처님은 세계에서 유일하다.
서있는 부처님은 세계에 너무많다.

특별한 부처님을 평범하게 만드는게 조계종에서 하는 불사다.
그것도 3년뒤에나 일으킨단다. 
3년동안 기도비라는 명목으로 돈을 걷을수 있기때문이다. 
3년뒤면 총무원장 임기가 끝난다.

부처님을 누워있게 두면 돈을 걷을 수 없다.
돈을 걷기 위해서는 세계에서 유일한, 
자연이 만든 특별한 부처님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

자연이 만든 특별한 부처님은 그냥 그대로 두는게 옳다. 
엎드려있는 불상이 지구상에 하나쯤 있어도 좋다.

지금 일으켜 세워야 하는건 불상이 아니라
어디에서도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는 불자들 마음일것이다.

 

 

 

 

 

 

 

5월 6일

 

어제 쓴 글이 밑천이 되어 다시 한번 열암곡 부처에 대한 글을 쓰다

 

천년을 세우다?

지진으로 엎어진 불상을 세우는 것이 불자로서 옳치 않느냐?는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바른견해로 그런 일을 한다면 동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해도 그 일이 총무원장4년 동안 할 일의 중심과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거짓 이유를  만들어 돈을 뜯는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총무원장은 불상을 세우면서 “어리석고 미혹한 과거천년을 세월을 보냈다면 불상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행복한 미래천년의 약속을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불상을 세우는 것이 나를 세우는것이며 우리의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라합니다. 

과거천년이 왜 미혹한 천년이 됩니까? 불상을 세우는 것이 어째서 행복한 미래천년의 약속이며, 불상을 세우는 것이 어째서 나를 세우는 일이며 우리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됩니까? 이런 것을 거짓선동이며 혹세무민이라 합니다. 

불자들의 정성을 모으는 것이라면 천원 만원 이만원...각자의 형편대로 정성을 모으는 불사여야 합니다. 오로지  10만원, 30만원, 100만원 3가지 기도비를 책정해놓고 기도비를 받으면 50%는 사찰에서 갖고 50%는 보내달라 합니다. 이것은 나누어먹기 장사입니다.  

기도명목으로 걷은 돈을 명상센타를 짓는다고 합니다. 목동의 국제선센타는 명상센타 용도로 지었습니다만 지금은 일반사찰처럼 운영하고 있습니다. 있는 건물도 애초의 용도대로 사용하지 못하면서 다시 건물을 짓겠다는 겁니다. 기도비를 걷어서 인재양성을 한다고 합니다. 3년후에 불상을 일으켜 세운다고 돈을 걷는데 걷는 돈을 미리 사용하겠다는 겁니까? 아니면 3년후에나 인재 양성을 하겠다는 걸까요? 지금 총무원장은 1년이 다 되어가고 3년후면 퇴임해야 합니다. 결국 본인의 임기동안에는 돈만 모으다 퇴진하겠다는 겁니다. 

기도비가 얼마나 걷혔는지 투명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백만원력이라는 명목으로 돈을 걷었던 원행총무원장도 그렇게 돈을 걷다가 퇴임 했습니다. 불투명하게 운영되는 돈은 결국 누군가의 주머니로 들어 갈 것입니다. 

작년에 봉은사는, ‘잃어버린 강남 땅찾기’ 재판에서 최종 승소해서 국가가 417억을 배상 받았습니다. 올해도 문화재관람료 지원금 419억 받았습니다.이런 돈을 인재양성에 쓰고 명상센타건립에 쓰면되지 않습니까?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불교가 불자가 승가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불상 세우는 일이 나를 세우는 일이고 본성을 세우는 일이고 미래천년의 행복을 약속하는 일이라고 혹세무민하면서 불자들이 시대가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총무원장이 하는 일은 자승이 천막안거와 걷기순례를 하면서 자기가 하는 일이 모두 불교중흥이라고 거짓 선전 하는 거와 다르지 않습니다. 

93%의 승려들이 반대함에도 탈종자이며 멸빈자인 서의현을 동화사 방장이되게 해서 출가자의 정체성을 천년넘게 망쳐놓았습니다. 정말 천년을 세우려면 서의현이 방장되는 걸 목숨걸고 막았어야 되지 않습니까? 이런일에는 눈감고 황당하게도 불상을 세우는 일로 천년을 세운다고 말합니다. 국민을 속이고 불자를 속이는 짓입니다.

 

 

5월7일

 

시비(是非)를 내려 놓는게 불교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는 보살님이 오마이뉴스TV에 도정스님이 나와서 시국법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정스님이 나와서 ‘허정스님’이라는 이름을 말하길레 스님도 이런 일을 하고있는지 궁금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수행자는 시비를 놓고 조용히 공부 해야한다. 정치에 참여하여 번거롭게 살지 말고 일신(一身) 편안하게 사는게 좋다”는 충고를 하였다. 전화를 마치고 생각해보니 시비를 놓고 혹은 시비분별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그동안 많이 듣던 말이다. 마치 불자들은 그것이 요긴한 수행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듯하다. 그런데 시비를 내려놓는게 불교일까? 탐진치를 내려놓는게 불교일까? 

이제 생각해보니 ‘시비를 내려놓으라’는 말이 승려들과 불자들을 멍청하게 만들고 무조건 복종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비를 내려놓으라’는 말은 불교를 오해하게 만들고 있다. 부처님은 신구의(身口意)로 짓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옳고(是) 그른 것(非)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바른 견해와 삿된 견해, 바른 사유와 삿된 사유, 바른 정진과 삿된 정진, 바른 행위와 삿된 행위등 팔정도를 온통 바른 것과 그른 것으로 설명한다. 

부처님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신구의(身口意)로 짓는 삼업(三業) 중에서 바른 견해가 가장 앞선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바른 견해가 있어야 삿된 견해를 삿된 견해라고 알고 바른 견해를 바른 견해라고 파악 할 수 있다. 바른 행위와 삿된 행위, 바른 말과 삿된 말을 분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른 행위와 바른 말은 홀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바른 견해, 바른 정진, 바른 알아차림과 함께 나타나고 그 것들을 기반으로 한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부처님은 출가자에게나 재가자에게나 항상 옳고(是) 그름(非)을 잘 구분하고 파악하라고 가르치시는 분이다. 부처님은 왜 시비를 내려놓지 못하는가? 부처님은 무엇을 하기 위해 바른 것과 삿된 것을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내려놓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옳고 그름을 내려놓으라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불교를 오해하고 있으면서 마치 자신이 불교를 제대로 알고 있는 듯이 남에게 충고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자신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믿으며 거침없이 충고한다. 승려가 정치에 참여하는 일도 무조건 나쁘게 본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선호하는 정치인이 뚜렸하다. 이러한 이중적인 자신의 태도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이런 부류들은 대부분 객관적인 사실판단도 못하면서 가짜뉴스에 현혹되어 있다. 

인간이 사회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한 나라의 국민으로 사는동안 정치를 떠날 수 없고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국민이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국에서 정치참여는 필수다. 경전에서 부처님이 왕의 이야기를 하지말고 잡담하지 말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오히려 부처님이 자주모여 토론하고 정기적으로 모여 대소사를 결정하는 한 그 나라는 쇠망하지 않고 그 승가는 쇠망하지 않는다는 말씀과 맞닿아있다. 승가의 운영도 대중전체가 참여해서 절차에 맞게 대소사를 결정한다. 승가의 운영이나 나라의 운영이 다를 바가 없다. “많은 이들의 이익을 위하고 많은 이들의 행복을 위하고 세상을 연민하여 길을 떠나라”는 부처님의 전도선언은 사회정치에도 적용되고 승가운영에도 적용된다.

그래서 헌법이든 종헌종법이든 승려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막지 않는다. 후보자로 나선 정치인의 정책을 보고 그 사람이 살아온 내력을 보고 투표하는 것이 왜 나쁜가? 바른 사회를 이루고 자유와 평화가 유지되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투표하는 과정도 즐기고 결과도 즐기는게 민주주의다.

정작 종교인이 하지 말아야 할 일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결탁해서 서로의 이득을 챙기는 것이다. 깨어있지 못하고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면서 학연(學緣), 지연(地緣), 혈연(血緣), 사대주의(事大主義)등에 집착하여 무조건 자기편을 지지하고 상대편을 비난하는 것이다. 이것은 욕망에 붙들린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사회구성원이 불행해지는 일이다. 여기에서 불자들에게 바른 정치참여와 삿된 정치참여를 구분하는 눈이 필요하다. 이러한 시비를 구분도 못하면서 무조건 종교인이 정치 참여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거나 무조건 시비를 내려놓아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 비유하자면 자신은 땅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상대방에게는 땅에서 1m쯤 떠 있으라고 요구하는 것과 같다. 

그런 허황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의 말을 거룩한 충고로 여기는 불자들이 많다. 평생 불교공부를 해왔다는 이들이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 잘못 이해한 불교의 폐해가 우리 주위에 넘쳐흐른다. 스님들과 불자들이 "시비(是非)를 내려 놓으라"는 허황된 말에서 탈출하자. 더구나 우리 조계종은 관람료문제를 종교차별 불교탄압이라며  2022년 1월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특정후보를 유리하게 만든 과오가 있다. 그것은 종단이 저지른 일이고 나는 상관 없다고 말할 것인가? 당신이 침묵으로 동조하고 수행이란 이름으로 방조한 일이 아니던가? 천주교, 기독교, 교수, 학생, 노동자등 사회구성원들이 일어나 나라가 위태롭고 망하게 생겼다고 각 단체의  입장에서 시비(是非)를 논하고 있다. 우리 불교계도 늦게나마 5월 20일 토요일 오후3시에 서울에서 열리는 '시국법회'에서 시비(是非)를 논한다. 민주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부처님 제자로서 법답게, 가르침을 존중하며 시비(是非)를 논해보자.

 

 

 

 

5월 8일

 

비가 오는데 동화사를 방문하여 여기저기 둘러보다. 200억 혹은 300억?을 들여 사명대사 수장고,체험관을 짓는다는 장소에 가보았다. 커다란 탑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연담 의신조사 적광탑 뒷면에 "의현스님은 1954년 교단정화불사에 동참하여 옥중에서 불사성취를 염원, 우리종단이 탄생하였다."라고 써 놓았다. 훗날에 이 비석만보는 사람들은 마치 서의현이 조계종을 만든 줄 오해 하겠다.

이렇게 허무맹랑한 글을 써놓고 자신을 자신이 스스로 우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를 방장으로 만들고 법문을 듣는 동화사 대중들이 애처롭다.  서산에 치과치료를 해야해서 다시 서산으로 향하다. 충청도까지 운전해야 하니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마음이 되었다. 그래도 어찌하나? 해야하는 일은 해야 하는 것이니....

 

 

 

 
 
5월 9일
 
 
조계종단에 희망이 있습니다
조계종단에 개혁적인 스님과 재가단체가 지리멸럴한 상황에서도, 대부분의 스님들이 비민주적인 종단운영에 침묵을 지켜도, 종단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1. 오천명의 승려들에게 원하는 때에 설문조사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중공의로 운영되는 전통을 지켜온 승가에서 설문조사는 대중공사와 같은 효과가 있습니다.설사 설문조사 결과를 현집행부가 무시하더라도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 끝내, 대중을 배반한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2.명진tv로 필요한 때에 대중에게 설문조사 결과를 공유하고 이슈를 분석하고 설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좋은 컨텐츠는 대중이 찾아 듣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불교신문등 기존 언론이 권승들에게 충성하는 기사만 쓰더라도 설문조사와 유튜브가 더 큰 효과를 발휘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제적당하면서도 명진tv를 만들고 키워낸 명진스님의 공헌이 큽니다.
3. 설문조사를 지속적으로 하고 유튜브로 대중에게 다가 가는 것은 스마트폰이 있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총무원장 직선제'도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너무 간단하고 투명하게 시행할 수 있습니다.이제 이러한 사실을 대중에게 설득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미 설문조사로 대중의 뜻을 확인하는 연습을 수 없이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단체는 자신이 속한 교단에 비판을 지속적으로 하기 어렵습니다. 일예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사회의 일에 비판을 하지만 천주교 내부를 비판하기는 어렵다합니다.
불교의 승가안서 승려들은 서로 서로가 평등한 관계이기에 비판이 자유롭습니다.
부처님도 안거가 끝나는 해제날에 대중앞에 맨 먼저 나아가서 "함께 사는 안거동안 나에 관하여 본 것,들은 것 중에서 허물이 있다면, 대중스님들은 저를 가엾이 여겨 지적해 주십시요"라고 청하였을 정도입니다. 사람이 아닌 법,진리를 찾는 종교이기에 신이나 인간에게 어떤 권위도 부여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사상적으로나 승가의 운영면에서 사회에 모델이 될 수있는 종교입니다.종단이 건강하고 민주적으로 거듭나면 우리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고 타종교에도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조계종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희망은 처음부터 있지 않았습니다.희망과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않고 해야할 일을 하다보니 시대가 변하여 기회가 온것 뿐입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는 희망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해야하는 일이기에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5월 10일
 
치과 치료를 마치고 홍성 석불사 부처님을 참배하다.
석불사 부처님은 늠늠하기가 천하제일이다. 석불사 부처님을 모시고 있는 범상스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스님이 안내한 곳은 비닐하우스로 만든 사무실이다. 스님은 불교 인권위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저녁 공양을 같이 하면서 여러가지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지난 대선때 전국의 사찰을 돌아다녔다길레 그런 경험을 살려서 5월 20일 열리는 시국법회에 다른 종단의 스님들이라도 참석할 수 있도록 홍보를 부탁하였다.  

 

 

 

 

5월 11일

 

어차피 남쪽으로 내려와야 하는데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오면 빠르기는 하지만 올라갈때 갔던 길이라 다른 길로 내려오기로 하다. 그래서 공주를 거쳐오는 길을 선택했는데 공주에서 생각난 곳이 공주 무위암이다. 페북에서 무념스님과 토론을 많이 하던 스님이 인상 깊었다. 주지스님 법명은 도상스님이다. 스님은 대승불교만 공부하다가 페북에서 초기불교를 알게되었다고한다. 페북에서 초기불교를 많이 배우게 되었다고....그러고 보면 페이스북은 소통하는 자리이면서 공부하는 도량이기도 하다. 무념스님이 싸움이 될만한 문제를 제기하여 여러 논객을 끌어들이고 있다.
 
주지스님은 무위암을 꽃밭으로 만들어 누구나 쉬어 가는 곳으로 만들어 가고자 애쓰고 계시다. 차실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 지는 곳, 극락 혹은 도솔천이 따로 없다.커피, 둥글레차를 얻어마시고 나는 다포를 성물하였다.()

 

 

무위암에서 마곡사는 지척이다. 오랫만에 마곡사에 들려서 쉬어각로하다. 마곡사에서 1박을 하려고 하였으나 객실이 없다고한다. 마곡사에서 숙박을 할수 없다는 것은 매우 실망스럽다. 그러나 방이 없다하니 어쩌랴. 마곡사도량에서 한참을 앉아 있다가 저녁공양은 할 수 있었다. 오후 산사의 고요함과 여유를 느끼며 도량을 곳곳을 둘러 본결과 아래와 같은 글을 쓰게 되었다.

 

 

마곡사 안내판 유감

 

며칠전 공주 마곡사에 들렸다. 마곡천 계곡 물 위에 띄어진 연꽃이 유유히 떠다니고 있었다. 대웅전으로 향하는 다리에는 연등이 빼곡하게 달려있고 도량곳곳에 연등이 걸려있어 참으로 아름답고 고풍스러웠다. 마곡사 옆에는 종단에서 운영하는 연수원이 있다. 이런저런 주제에따라 연수를 받으러 온 스님들의 단골 산책코스가 연수원에서 마곡사까지 걷는 길이다. 그만큼 본사급 사찰중에서도 스님들이 자주 들리는 사찰이 마곡사인 것이다. 마곡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되었는데 우리나라에 천년고찰은 많지만 유네스코에 선정된 산사는 일곱개 뿐이다.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 그리고 공주 마곡사다. 유네스코에서는 사찰 창건 이후 현재까지의 사찰의 모습이 지속성을 유지하고 있느냐를 기준으로 일곱 개 사찰을 선정하였다.

 

대웅전에 참배하고 한참동안 멋지게 생긴 소나무옆에 앉아서 도량의 고요를 만끽하였다. 그런데 도량이 예전과 달라진게 보였다. 마당 한쪽에 커다란 바위에 새긴 불(佛)자가 보였다. 대웅전 옆에는 옥으로 만든 관세음보살상이 설치되어 있다. 입구쪽에는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글씨가 새겨진 커다란 돌 수각이 설치되어 있다. 예전에 없었던 것들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글씨 아래에는 수각을 보시한 사람의 이름이 직함과 함께 새겨져 있다. 감로수(甘露水)등의 불가의 용어를 놔두고 굳이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상선약수(上善若水)를 새긴것도 이해가 인되고, 수 많은 사람이 방문하는 사찰의 수각에 보시자의 직함과 이름을 새겼다는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 이름을 새기더라도 눈에 띄지 않게 뒷면에 작은 글씨로 새겼다면 좋았을 것이다. '백범김구선생 은거 기념식수'를 설명하는 나무 안내판은 글자의 색이 빛바래서 보이지 않는 글자가 여러개 있다.  각래관세관 유여몽중사(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라는 주련의 문장도 해석을 해 놓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최근에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관세음 보살상은 상체와 하체의 비례가 1:1로 되어있어 수준급의 조각은 아니다. 이 보살상의 안내문에는 2015년 4월에 허공에 관세음보살 형상의 구름이 생겨난 것을 보고 관세음보살의 화현한 것이라고 여겨서  보살상을 조성했다고 적혀있다. 구름이야 천만가지로 변화하여 이런 저런 형상으로 나타날수 있는 것인데 구름이 관세음보살의 형상과 비슷하다고 관세음보살상을 세워놓다니 어이가 없다. 부처님 가르침 어디에 구름 형상을 보고  불보살상을 세우라고 한적이 있던가? 관세음보살상 안내판에도 보살상을 세우자고 제안한 사람의 직업과 이름, 보살상을 기증한 사람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구름 모양을 보고 관세음보살의 화현이라고 생각하는 불자가 있다면 그런 허망한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스님들이 가르쳐야 하건만 이렇게 관세음보살상을 세워 놓은 것이다.  보살상 안내문에 보이는 태화도장(道場백화도장(道場)이라는 표현은 태화도량백화도량으로 바로 잡아야한다불교에서는 미타도량(彌陀道場), 관음도량(觀音道場)처럼 도장(道場)을 도량(道場)으로 발음하고 의미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안내문 말미에 "천추 만세에 만인이 우러러 예경하고 복연을 중승케 할지니라"라고 끝맺고 있는데 '복연' '중승'등과 같은 단어도 쉽게 풀어써야한다.   

 

 

백범 김구가 붓으로 쓴 불(佛)자를 새긴 비석도 마당에서 정면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 설치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대웅전 앞에는 석탑이외에 다른 구조물이 설치 되는 것은 사찰의 전통양식으로 맞지 않다. 마곡사 도량 안내판중에서 가장 오자가 많은 안내판은 사천왕상을 소개하는 안내판이다. 안내판의 내용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을 그 대로 복사한 것이다. 사전에서 옮겨왔더라도 어려운 단어는 쉬운 단어로 교체하고 해석을 붙여야 할것인데 그대로 베껴와서 무성의하게 느껴진다.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의 안내판을 보자.

 

"동쪽을 수호하는 지국천왕(持國天王) 그는 안민(安民)의 신으로서 수미산 동쪽 중턱의 황금타(黃金垂)에 있는 천궁에서 살고 있다. 16선신(善神)의 하나이기도 한 지국천왕은 선한 자에게 상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항상 인간 고루 보살피며 국토를 수호 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얼굴은 푸른빛을 띠고 있으며, 왼손에는 칼을 쥐었고 오른손은 허리를 잡고 있거나 또는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는 형상을 취하고 있 그는 휘하에 팔부신중 하나로서 술과 고기를 먹지 않고 향기만 맡는 음악의 신 건달바(乾達婆)를 거느리고 있다."

 

갑자기 튀어나온 16선신(善神)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황금타(黃金埵) ,팔부신중의 단어는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우니 설명이 필요하다. 탐방객의 수준을 배려하지 않은 무성의한 안내판이다.

 

"서쪽을 수호하는 광목천왕(廣目天王) 그의 몸은 여러 가지 색으로 장식되어 있고 입을 크게 벌린 형상을 함으로써 웅변으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친다고 한다. 또 눈을 크게 부릅뜸으로써 그 위엄으로 나쁜 것들을 몰아낸다고 하여 악안·광목이라고 하는 것이다. 광목천왕의 근본 서원은 죄인에게 벌을 내려 매우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가운데 도심(道心)을 일으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모습은 붉은 관을 쓰고 갑옷을 입었으며, 오른손은 팔꿈치를 세워 끝이 셋으로 갈라진 삼차극(三又戟)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보탐을 받들어 쥐 있다. 그의 권속으로는 용(龍)과 비사사(毘舍閣)등이 있다."

 

서쪽을 수호하는 광목천왕의 설명은 더욱 심각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분명히 ‘갑옷’과 ‘보탑’이라고 나타나고 있음에도 안내판에는 '보탑'을 '보탐'이라고 쓰고,'갑옷'을 '갑온'이라고 잘못 쓰고 있다. 악안, 광목이라는 단어는 한문도 곁들이지 않았다. 삼차극(三又戟), 비사사(毘舍閣)는 한문과 같이 나오지만 삼차극은 한문이 어렵고 비사사는 음사한 단어라서 한문을 보여져도 그 뜻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북쪽을 수호하는 다문천왕(多聞天王) 그는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이라고 한다. 그가 맡은 역할은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인데 한때 불법에 귀의하여 광명신(光明神)이 되었으나, 본래 자신의 원을 지킨다 하여 금비라신(金毘羅神)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다문천왕은 왼손에 늘 비파를 들고 있다. 그는 수미산의 북쪽 수정타(水精埵)에 살며, 그의 권속으로 야차와 나찰을 거느리고 있다."

 

북쪽을 수호하는 다문천왕의 설명도 어렵다. '암흑계의 사물을 관리하는 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광명신(光明神), 금비라신(金毘羅神),수정타(水精埵), 야차, 나찰등의 설명이 없어서 사람들을 갸우뚱하게 만들고 있다.이 안내문을 만든 사람은 이 뜻을 알고 썼는지 모르겠다. 

 

 

"남방을 수호하는 증장천왕(增長天王) 그는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한다. 구반다 등 무수한 귀신을 거느린 증장천왕은 온몸이 적육색이며 노한 눈 을 특징으로 삼고 있다. 그의 모습은 대게 갑온으로 무장하고 오른손은 용을 잡아 가슴 바로 아래에 대고 있고 왼손에는 용의 여의주를 쥐고 있는 경우가 많다."

 

남쪽을 수호하는 증장천왕의 설명에서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이 없고 위덕, 구반다, 적육색등의 단어에 대한 설명도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증장천왕은 수미산 남쪽의 유리타(瑠璃埵)에 살고 있다'고 설명하지만 어쩐일인지 이 문장만은 옮겨오지 않았다. 어느 부분은 인용하고 어느 부분은 빼는 기준은 무엇일까? 

 

백번양보해서 어려운 단어를 설명하지 않고 어려운 안내판을 만들 수 있다고 치자. 그런데 '보탑'을 '보탐', '갑옷'을 '갑온'이라고 잘못 쓴 안내판을 걸어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안내판을 설치할 때 주지스님등 마곡사스님들이 한 번도 감수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오자가 발견되는 안내판, 어려운 단어가 빽빽한 안내판은 제 6교구 본사의 위상에도 걸맞지 않고,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된 사찰에도 걸맞지 않다. 마곡사를 방문하는 탐방객이 단순히 돈을 내고 들어오는 관람객이 아니라 그들에게 불법을 전해야만 하는 예비불자들이라고 생각했다면 이러한 안내판을 만들 수 있었을까? 출가자가 급격히 감소하고 불자들이 감소하는 현 상황을 절실하게 인식하고 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세상사람들에게 이익과 행복을 준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면 어떻게 저런 안내판을 설치할 수 있는가?

 

 최근 포교원도 각 계층 포교 최일선에서 활동하는 사부대중 500여명이 모여 “부처님 법 전합시다”라는 행사를 열었다. 그 전에는 전 총무원장 자승스님도 '성불합시다'라는 인사 대신에 '전법합시다'라고 인사하자고 말했다. 얼굴이 화끈 거리더라도 지나가는 사람에게 '전법하자'고 말했다.그런데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불자가 되는가? 그런 행사를 연다고 부처님 법이 전해지는가? 그것보다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잘못된 점을 전수조사하여 바로잡는 작업을 종단이 해야 한다. 나아가 초기경전 한글 번역본 판권을 사서 인터넷에 올리고, 청소년도 이해하는 불교성전을 제대로 만들어야한다. 

 

불교는 믿음의 종교가 아니기에 '불교 믿으세요', '부처님 믿으세요'라고 말할 수 없다. 불교는 이해의 종교이기에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설명해야 하는 종교이다. 불교를 이해시키는 첫 걸음은 사찰의 안내판을 잘 만들어 방문객들에게 불교를 알려주고 불법과 인연을 심어주는 것이다. 사찰 안내판을 이렇게 무성의하게 만들어 놓고 어떻게 '성불합시다'라는 인사 대신에 '전법합시다'라고 인사하자는 말을 할 수 있나? 정감있고 자세한 안내판은 백명의 포교사 보다도 훨씬 많은 일을 한다. 우리 조계종은 ‘사찰 안내판 공모전’이라도 개최하여 멋진 안내판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제라도 마곡사 스님들과 총무원 스님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오후에는 공주국립박물관에 들리다.
아름다운 보살상과 기품있는 불상을 만나다

 

5월12일
 
구미 마하붓다사에 늦게 들리다. 달리기하는 진오스님은 에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더구나 진오스님이 43일간 인도걷기순례에 다녀 왔다고 하니 그 이야기도 들을 겸 마하붓다사를 방문하다.
저녁늦게 저녁을 먹고 밤 12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솔직 단백한 성격이다. 무엇보다 마하붓다사에서 하고 있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놀라다. 베트남,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스님들에게 법당과 공양간을 통째로 빌려주면 그 분들이 날짜를 정해서 자기네 사람들을 모아 법회를 연다는 소식은 매우 신선했다. 진오스님이 이러한 배려를 해주지 않으면 그 스님들은 각각 자기네 법당을 지어야 했을 것이다. 이주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닌 한국의 시민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을 하는 진오스님의 노력이 성공하기를 축원한다. 불자들이 보시를 하려면 이런 사찰에 보시를 하는 것이 더 의미있을 것이다.
 
 
 
 
 

 

 

 

 
 
 
5월 13일
 
구미 격외사 선우스님을 만나 보리밥집에서 점심을 먹다. 안곡묵집도 좋았다. 
상주 용흥사 가는 길에 있는 무인찻집,
마당에는 소들이 누워있고요. 갤러리에는 가족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되고 있네요.
가족전시회는 오늘까지.
특히 돌을 이용한 소 작품이
인상적이어서 사진으로 남겨봅니다.

 

 

 

 

5월 14일
 
예천 전통사찰 서악사
사천왕상이 돌로 조각되어있다.
힘든 작업이었을 것인데...
아는 스님을 만나서 저녁공양도 하고
선물도 받았다.

 

 

 

 

5월 15일
선산 죽장사
국보 5층석탑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용있는 석탑일거라 생각해봅니다.
마침 연등설치하는 날이었는데
인상좋은 주지 범일스님과 이야기도 나누고 떡과 과일도 대접받있습니다.
마주치는 분들마다 공양하라는 말을 합니다..

 

 

 

 

5월 14일
 
선산 수다사
수다사에서는
부처님도
묵언으로 수다스럽고
바람도 물도 세월도
수다스럽다
대웅전앞 세워 놓은
주지스님 시비도 수다스럽다
지지배배 새소리도
수다스럽고
백년이나 묵었을 앵두도
뚜벅뚜벅 떨어지며
수다스럽다
사천왕 팔뚝같은 백일홍나무에
딱다구리가 뚫어 놓은
두개의 구망
옛 이야기 수다스럽다
맨발로 다박다박 걷는
참나무. 숲 황톳길
발다박듵도 수다스럽다
어차피
온 세상이 수다라
바람이 읊고. 새가 읊고
법당에 사시불공 올리는
스님도 목탁치며
수다라 수다라 수다라
각각 제 말을 하는
제비 주둥이 같이
수다라 수다라 수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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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시국법회 ‘야단법석’을 여나?
허정 스님
 

“모든 생명은 폭력을 두려워하고,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 이치를 자기 몸에 견주어 남을 때리거나 죽이지 말라” (법구경 129)

부처님 말씀이지만 누구나 알고 있고 누구나 동의하는 말입니다. 수행을 통해서 깨달아야 알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특정 종교에서만 가르치는 것도 아닙니다. 배우지 않아도,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양심이라 하고 역지사지하는 능력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시국법회를 여는 것은 어떤 사람들이 비판하듯이 종교인이 정치에 참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윤석열 정부 출범 1년 만에 우리는 도덕과 상식과 양심이 무너진 사회를 목도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바이든 날리면’에서 보듯 잘못을 하고도 사과할 줄 모릅니다. 오히려 언론이 가짜뉴스를 만들어 낸다며 호통치고 국민들의 듣기 능력을 무시하고 겁박합니다. 이태원 참사에서 보듯 인간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할 줄 모릅니다. 위패도 없고 영정도 없는 행사에 참석하여 짐짓 침통한 표정으로 향을 사르면서 정작 친구와 자녀를 잃은 유족은 만나지도 않고 위로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상식과 양심을 대통령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 때 “검사가 수사권 갖고 보복하면 그게 깡패”라고 말해 놓고는 대선 경쟁자였던 야당 대표에게 숱한 압수수색을 자행했습니다. 금융 사기를 일삼아온 장모와 논문을 표절하고 주가를 조작한 아내에게는 한없이 자비롭습니다. 국가의 요직마다 검찰 출신을 임명하고, 독선과 불통의 정치만을 일삼았습니다. 그가 입만 열면 강조해온 공정과 정의가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우리는 똑똑히 알 수 있었습니다.

중국이 우리의 최대 무역국임에도 미국을 향한 일방적인 외교로 대중국 무역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습니다. 일본에는 굴욕적인 외교를 펼치고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일제의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 일본의 사과와 배상 없이 한국 기업의 돈으로 해결하는 제3자 변제안을 내세워서 피해자와 가해자를 뒤바꿔 버렸습니다. 이것은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국민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일본이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려는 것을 막아낼 의지도 방법도 없어 보입니다. 오히려 ‘시찰단’을 보내 면죄부를 주려 합니다. 우크라이나에는 살상무기를 제공해 러시아와 대립하고,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에 적극 가담해 중국과 적대하며, 한미일 군사동맹 강화로 한반도를 전쟁위기로 빠트리고 있습니다. 최근 노동절에는 강원도지역 양회동 노동자가 “정당한 노조 활동을 한 것뿐인데 윤석열 검사독재정치의 제물이 됐다, 무고하게 구속되신 분들을 풀어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하여 끝내 사망하였습니다. 윤 대통령은 노동자를 조직폭력배와 간첩으로 취급하는 발언을 해왔습니다.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스님들이 8일 오전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방류 중단을 촉구하며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광화문을 돌아 일본대사관을 향해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2023.5.8. 연합뉴스
 
 

우리 출가자와 재가자들은 국민 앞에 참회합니다. 윤석열을 대통령이 되게 만든 원죄가 우리 불교계에 있습니다. 지난 2022년 1월, 대선을 코앞에 두고, 엄중한 동안거 기간에, 코로나 방역지침을 어겨가면서, 우리 종단은 승려대회를 강행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정청래 의원이 문화재 관람료를 ‘봉이 김선달’에 비유한 것을 문제 삼았지만, 민주당과 정청래의 거듭되는 사과를 받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과거의 종교차별 사례까지 열거하며 스님들 63%가 반대함에도 승려대회를 밀어붙였습니다. 전국 사찰에 인원수를 할당하여 버스를 내려보냈고 강제로 동원된 승려들이 승려대회라는 이름으로 불자들의 민의를 왜곡하였습니다. 승려대회 결과가 윤석열 정부가 근소한 표 차이로 탄생하게 만든 한 원인으로 작동했다고 봅니다. 이 승려대회는 명백한 선거 개입이었고,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결탁한 최악의 사례입니다.

부처님은 녹야원에서 육십여 명의 제자들에게 최초로 ‘전도 선언’을 하였습니다.

“수행자들이여, 많은 이들의 이익(hita)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행복(sukha)을 위하여, 세상을 연민하여 길을 떠나라!”

부처님이 말하는 이익과 행복은 생명을 죽이거나 해치지 않고,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지 않고,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지 않는 양심에서 시작하여 어리석음을 없애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모든 생명이 행복을 원하고 괴로움을 싫어하는 이치를 자기 자신에 견주어 남의 행복을 파괴하거나 괴롭히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것, 세상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共感)하고 연민(憐愍)하는 것은 정치와 불교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민주공화국의 구성원인 국민의 자격으로서, 많은 이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하여 5월 20일 ‘시국법회 야단법석’을 개최합니다. 승려대회로 정치와 결탁한 것을 참회하고, 많은 이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떨쳐 일어난 자리입니다. 정치권력을 옹호하는 눈먼 호국불교가 아니라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과 정의롭지 못한 자들에게 죽비를 내려치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자리입니다. 불자님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5월 18일 

청도운문사

하룻밤 재워 달라고 했더니 운문사는 비구스님들을 재우지 않는다고 하더니 나중에는 어른스님들이 없어서 안된단다. 나의 지난 경험을 이야기하고 아는 사람의 이름까지 들목이니 그렇다면 아래 숙박업소에 방을 잡아주겠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운문사 매표소 옆에 있는 숙박업소에서 하룻밤 자다. 다음날 일찍 절에 올라와서 도랴을 구경하다. 비구니 스님들이 오랜 시간 가꾸어온 도량이 정갈하고 아름답다. 

 

약속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데
꼭 그렇게 하고야 마는 것
고요한 호수에 파문이 일도록
돌을 던지는 것
땅바닥에 원을 그려놓고
나갈까 들어갈까 고민하는 것
의미를 만드는것
보람을 가꾸는것
사랑을 키우는것
흩어지기는 담배연기 같은 것
 

 

 

 

5월 19일

 

청도 영담한지미술관에 들리다. 여기에는 윤길중이란 분의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이 그림 같아서 놀랍고 따스하고 정감있는 느낌에 더 놀라다. 누구나 소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겠다.

영담스님으로부터 작가의 고생담을 들으니 더욱 작품이 와 닿는다.

세상에 고수가 많다. 그림을 그리는 비구니 스님과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다. 

 

 

 

 

5월 19일
 
청도 대비사
비오는 날 추저추적 찾아간 곳이다.
예전에 대비사주지를 하셨다는,지금은 광양에사는 스님께 대비사 이야기를 들은지 몇년만에.
저수지를 끼고 들어가는 풍경이 낯설지 않다.
주지스님이 나의 사제스님과 친해서
나를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다.

 

 

 

 

5월 21일
 
양산 통도사
도량에 초파일 장엄등이 전시되어 있고...통도사 직영 상가가 11개나 운영되고 있다. 최근에 통도사 주지에 현덕스님이 임명되었다. 통도사성보박물관에 들렸는데 해설사 진여화보살님이 내 얼굴을 알아보았다. 명진tv를 보고있으며 내가 천장사 주지 할때부터 소식을 알고 있다고한다. 보살님으로 부터 팔상도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도 몇가지 의견을 보탰다. 보살님은 기장에 산다고 한다. 
 

 

 

영축산 극락암
극락암에는 선방이 있고 선방에는 스님들이 항상 머물고있다. 산철임에도 선원 다각실에서 몇몇스님들과 차를 마시다. 오랫만에 동선스님과 무용스님을 만나서 지나간 이야기를 나누다. 통도사 맞은 편에 있는 불광사의 문수스님도 찾아 뵙다. 오랫만에 보는 얼굴이다. 스님과 소설가, 화가와 같은 창조적인 삶을 살것이냐. 평론가,해설가 처럼 평가하고. 해석하는 삶을 살것이냐? 하는 이야기를 나누다. 이렇게 설득해보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차맛은 좋다.
다음날은 일찍 금수암 근처에 사는 관정스님을 찾아가 차를 마셨다. 관정스님은 <반야심경 정해>를 지으신 분이다. 범어와 훈민정음이 만든 방법과 자음체게가 비슷하다는 것을 설명하니 매우 관심을 보이셨다. 다포를 선물하다. ()

 

 

 

 

 

5월 20일 시국법회 야단법석

시국법회 야단법석이 성공적으로 끝나다

제주도 모임에서 처음 시국법회 말이 나왔고 재가자들과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시작은 정말 초라하게 지리멸렬 하였으나
마치고 보니 성공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개의 연꽃을 만들어 주신분들, 현장에서 자원봉사를 해주신분들, 소식을 듣고 몸소 나와주신분들 덕분이다., 도정스님,진우스님의 유튜브 방송 덕에
홍보가 잘되어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행사 시작 전에 오신다는 스님들이 못간다는 연락이 와서 실망 하기도 했지만, 예상치 않은 열혈 스님들이 오셔서 참석스님이 17명이 넘었다.
귀한 분들을 만난 것이 가장 큰 수확이다.
명진스님의 법문의 "네이놈~ 윤석렬~" 법문이 압권이었고, 진우스님과 이수영불자가 번갈아 읽는 호소력있는 성명서 낭독, 준비위원장 도정스님의 깔끔한 마무리 발언으로 1시간의 행사가 끝났다.

시국법회가 끝나고 스님들과 근처 버거킹에서 차 한잔 할 때 여러 스님의 의견도 전체적으로 "성공이다" "기대 이상이다"는 평가를 하셨다. 5시부터 시작한 촛불집회에 스님들과 6시까지 참석하고. 저녁 공양을 하고 느슨한 연대를 약속하고 헤어졌다.()

 

 

 

 

 

 

5월 21일

 

"가야불교, 빗장을 열다"라는 책을 쓰고 가야불교를 알리는 김해 여여정사에 들리다. 잃어버린 가야역사를 추적하고 있는 #도명스님은 지난 5월 2일 문경에서 지정스님 주최로 열린 제4회 고녕가야 세미나장에서 보았다. 통도사 극락암에 머무는 도반 무용스님과 함께 여여정사에 들렸다. 도명스님이 출판한  "가야불교, 빗장을 열다"는 인도에서 많은 관심을 보여 인도에서 이책을 영어와 힌디어로 번역출판하였다고 한다. 가야불교를 밝히는 작업은 한반도 불교 전래시기를 340년이나 끌어내리는 작업이다. 일본인들에 의해 조작된 ''#광개토대왕 비문'에 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나도 관심이 가는 분야이다. 점심공양, 차담을 나누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도명스님은 후배지만 배울 점이 많은 스님이다.

 

 

 

울산 황룡사
해인사 스님인 황산스님이 창건한 사찰이다. 울산에서는 성공한 포교당으로 이름이 높다. 무료급식, 떡공양, 불교대학,어린이 법회, 찻집등등 언제 찾아가도 황룡사는 활기가 넘친다.태화강을 산책하면서 유일하게 보이는 것이 황룡사 옥상에 모셔진 불상이다. 부처님을 옥상에 크게 만든 것은 홍보를 위해서 일것이다. 어디서든 불상이 보이니 홍보효과는 뛰어나다. 태화강을 걸으니 물고기도 보이고 그 물고기를 잡아 먹으려는 두루미도 보인다. 주지 황산스님은 종단 적폐청산운동에 참여했다고 공권정지 3년의 징계를 받았다. 승려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고 이렇게 징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을 황산스님의 케이스에서 여실히 보여주고있다. 

 

 

 

 

 

울산 법연정사

 

황룡사에서 걸어서 7~8분 거리에 탄구스님이 포교당을 냈다. 탄구스님은 용주사 스님인데 선원에 다니다가 일찌감치 포교일선에 뛰어든 것이다. 예전에 어떤 스님이 십여년 운영하던 포교당이라서 법당은 나름대로 포근하고 안정감이든다. 건물 3층이라 걸어다니면 운동도 되고....탄구(시문)스님이 여기서 어떤 프로그램으로 대중을 만날지 ....후배스님이 어렵게 마음을 내어 운영하는 포교당이니 잘 되었으면 좋겠다.

 
 
 
 
5월 23일
 
경주로오다. 다보탑, 석가탑 주위에 연등이 달려 있어 부처님 오신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게한다.
이번에 불국사 선원에서 초파일을 지낸 선일스님의 전언으로는 부처님 오신날 볼거리가 하루종일 있었고 저녁때 연등을 들고 탑돌이를 하는 인파도 오백명이 넘었다고 한다. 불국사 대웅전에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문화재와 굽어진 나무로 만든 바닥이 특이하다. 대웅전 천장에는 귀여운 동물조각이 있는데 그 이름을 알기 어렵다. 한쪽은 멧돼지 같고 한쪽은 호랑이나 고양이 같은 동물이다. 고양이 같은 동물은 귀엽다. 대웅전 뒷 건물에는 황룡사,분황사,감은사지에서 나온 사리를 친견할 수 있도록 전시되어있다.황룡사에서 나온 사리가 보관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 나한전 옆에는 일본에 반출되었다 돌아왔다는 아름다운 부도탑도 있다. 부도탑 사면에 불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나한전을 맡은 법당보살님이 나한에 대해서 이것 저것 설명을 해주었다.  그런데 정작 제화갈라보살이 연등부처님 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삼세불에 대해서 설명해주니 다른 것도 설명해 달라고 해서 아는 만큼 16나한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16나한의 설명도 확실하지 않다. 왜 그 많은 나한들중에서 16나한을 따로 모시게 되었는지 잘 설명하고 있는 곳이 어디없나?
 

민족문화백과사전의 설명을 빌리자면

"입대승론(入大乘論)』에는 “부처님이 열반하실 때 16아라한에게 불멸(佛滅) 후의 불교 호지(護持)를 부촉(付屬)하셨다.”고 하였다. 이들 16아라한은 삼장(三藏)에 통달하였고 외전(外典)에 능하여 외도(外道)를 항복받으며, 신통력으로써 자신들의 수명을 연장하였다고 한다.

정법기(正法期)에는 불교를 지키고, 말법기(末法期)에는 불교인들의 복전(福田)이 되어, 그들로 하여금 열반의 과보(果報)를 얻게 한다는 것이다. 이 16나한에 대한 신행은 중국·우리나라·일본 등에 크게 성행하였는데, 중국의 경우 현장(玄奘)이 인도구법에서 돌아온 7세기 중반부터 크게 성행하였다. 둔황(敦煌)의 천불동(千佛洞) 제79번 석굴에는 부조(浮彫)로 채색한 16나한상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말세신앙과 함께 특히 8세기 후반부터 16나한에 대한 존숭(尊崇)이 성행하였던 듯하다. 신라의 사불산(四佛山)에 16나한의 변형상(變形像)을 모셨던 것을 효시로 하여 그 뒤 탱화나 불화의 소재가 되었다. 나한탱화와 16나한상은 우리나라 사원의 응진전(應眞殿)에 많이 봉안된다."

 

 

 

 

 

 

 

 

 

 

5월 23일

 

경주 불국사 선원에서 지내고 있는 선일스님 덕문스님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공양후 비구니스님들이 모여사는 경주 금선선원에 들리다. 금선선원에는 온라인불자회에서 같이 공부하는 일봉스님이 머무시고 있다. 일봉스님을 만나서 금선선원에 대해서 설명을 듣다. 비구니스님들만 모여 사시는 경주 금선선원(경주시 충효6길11-20)에는 현재 비구니 삼십여분 모여살고 선원도 운영하고 있다.

금선선원 앞뒤로 여래선원,달마선원등이 있는데 모두 비구니 스님들이 방을 얻어 사는 곳이다. 방 하나에 오천만원이상 내야 들어올 수 있다고.그렇게 입주금을 내고 들어와 사는 스님들이 백여분 계시단다. 전국적으로 비구니스님들이 모여사는 이런 곳이 논산 법계사, 경주 감산사, 해인사 자비원등 몇군데 더 있다. 조계종 비구니 스님들이 열악한 상황에 처해있다보니 비구니스님들끼리 이렇게 자구책을 마련해서 비구니스님들만 모여사는 아파트형태의 건물을 여러개 지었다. 그래서 비구니스님들이 들어갈 방이 비구스님들보다 더 많게 된 것이다. 목탁 소리를 듣고 스님들이 밖으로 나와서 자기 몫의 공양물을 받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지금 초파일이 가까워 각자 인연있는 곳으로 초파일을 보내러 (알바)가고 세 스님만 남아있다.
 
비구스님들이 모여사는 곳은 해인사 근방의 소리원이 있다.  소리원은 한달에 40만원정도의 월세를 내야한다고 한다.
 
 
 
 
 
 
 
5월 26일
 
경주 지장암
참, 기발하고 재미있고 유쾌한 무구스님,
스님을 뵈러 왔는데,
작년 2월에 입적 하셨다네요.
대웅전 대신에 소웅전이라 이름 짓고,
소웅전 앞에는 남근석을 만든 괴짜스님,
입적소식도 못듣고 이렇게 한참 뒤에 왔네요.
예전에 스님이 주신 책을 읽고 쓴 독후감이 있어 첨부한다.
 

https://whoami555.tistory.com/13742347

 

무구스님의 <진똥개똥>을 읽고

우리출판사는 다음과 같이 책소개를 한다. 저자는 자신을 거짓말쟁이라고 하면서 글은 솔직담백하고 진실적이다. 이 책은 러시아, 북유럽, 남미, 그랜드캐넌,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담은 여행기

whoami555.tistory.com

 

 

 

 

 

5월 26일

 
 
내일이 부처님 오신날이라서 연등에 대한 글을 써보았다.
 
왜 부처님 오신 날에 연등을 달까?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사찰마다, 종단적으로 연등(燃燈) 행사가 한창이다. 부처님 오신 날과 연등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부처님 당시에는 전기가 없었으므로 법회를 하려면 사찰의 곳곳에 등을 밝혀야 했다. 사찰이나 가정에 기름 등을 밝히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등을 밝히려면 기름을 사서 태워야 하는데 난타라는 여인은 가난하여 기름을 살 돈이 없었다. 다행히 거리에 나가 구걸 하여 아주 작은 양의 기름을 살 수 있었다. 아래는 가난한 여인이 기름을 사서 등을 밝힌 빈자일등(貧者一燈) 이야기의 일부분이다.
“기름집 주인은 난타 여인을 가엾이 여겨 기름(油)을 갑절로 주었다. 여인은 매우 기뻐하여 등불을 만들어 가지고 사원에 가서 부처님 앞에 있는 여러 등불 가운데 두었다. 그리고 서원을 세웠다. 저는 지금 빈궁하여 이 작은 등불로 부처님께 공양합니다. 이 공덕으로 내생에 지혜의 광명을 얻어 일체중생의 어두움을 없애게 하겠나이다.(以此功德,令我來世得智慧照,滅除一切衆生垢闇)”
난타라는 여인이 사원에 호롱불을 켜고 서원을 세운 공덕으로 밤 늦도록 오직 여인의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빈자일등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서원(誓願)을 발하라'는 것이다. 이 날 만큼은 ‘나’라는 개인적인 소원을 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공적(公的)인 마음으로 살자는 메시지이다. 이것이 부처님 오신 날에 불자들이 연등을 다는 의미이고,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는 불자의 자세일 것이다. 얼마전에 연등회(燃燈會)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2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연등회(燃燈會)를 영어로는 Buddhist Lantern Festival이라고 한다. 영어에도 한문에도 연꽃(蓮)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고 있다. 연등회의 연은 연꽃 연(蓮)이 아니고 태울 연(燃)이기 때문이다. 빈자일등의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부처님 당시에는 기름을 태워서 불을 밝히는 연등(燃燈)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기름 대신에 양초와 전기를 사용하게 되었고 등의 모양도 연등, 주름등, 수박등, 팔모등, 장구등등 갖가지 모양으로 변화되었다. 요즈음 연등 행렬에는 사천왕상 모형의 장엄등, 석탑 모형, 동자승 모형, 심지어 마장가제트 모형의 장엄등이 등장하여 사람들을 즐겁게 해준다. 연등회 행렬을 보기위한 목적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외국인들도 많다고 한다.
최근에 들린 사찰에서 등 값을 책정하여 홍보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등의 크기에 따라, 등을 다는 장소에 따라,등을 거는 시간에 따라 등값이 매겨지고 있었다. 노동의 가치가 모두 가격으로 매겨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찰에서 행해지는 스님들의 노동에도 가격이 매겨지는 것을 나무라기 어렵다. 부처님 오신날에 등을 팔아 생기는 수입이 사찰의 일년 재정이라고 말하는 스님들이 많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재가자들에게 보시에 대한 이야기(dānakathaṁ), 계행에 대한 이야기(sīlakathaṁ),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saggakathaṁ)를 말씀 하시며 인간의 욕망이 점차로 성취되는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빈자일등(貧者一燈)을 이야기하는 부처님 오신날에는 소원(所願)이 아닌 서원(誓願)을 발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스님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닐까? 불자라면 부처님 오신날 만큼은 건강회복, 가정화목, 사업번창등 소소한 개인적인 소망을 내려놓고 부처님이 오신 뜻을 기억하고 찬탄하고 서원을 세워 보았으면 좋겠다. 그런면에서 부처님 오신날 나오는 봉축사의 내용도 달라져야 할것이다. 젊은이들이 읽지 못하는 한문투의 구태의연한 표현은 대중들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이 느끼는 남북분단의 문제, 불평등 문제, 소수자 차별 문제, 지역 갈등 문제등 국민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봉축사를 발표하였으면 좋겠다. 이런 걸 잘 하는게 불교중흥이 아닌가? 종정스님, 총무원장, 포교원장, 교육원장, 종회의장등 너도나도 따로 봉축사를 발표할 것이 아니라 존단의 역량을 모아서 조계종의 이름을 걸고, 조계종의 자존심을 걸고, 내보내는 봉축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하며 국민들의 가슴에 올해의 봉축사는 어떤 내용이었더라고 감동하고 기억하는 봉축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
 
(어제 오후 <온라인불자회> 영상 토론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참조하여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5월 27일 

 

오늘은 부처님 오신날에는 대구 유심사 봉축법회에 참석하다. 주지 선행스님은 나의 사제인데 법랍이 적음에도 사찰을 맡아서 잘 운영하고 있다. 봉축법회는 해마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잘 진행되었다. 주지스님의 요청으로 나는 행복경을 같이 독송하며 설명하였다.

부처님의 일생을 노래로 만들어 부르고 관욕과 장미꽃을 올리는 행사가 정착되어 매년 시행되고 있었다.

유심사 주소는 아래와 같다. 대구시 동구 팔공로 28길 101-3

 

 

 

 

 

 

 

5월 28일

영천 만불사
여느 절과는 다른 분위기,점심 공양하는 사람 많다.
전체적으로 조금 서둘러 불사한 것이 보인다.
'아미타우스'라는 장묘사업을 하는데 잘 되는 것 같다. 도량 곳곳에 '밥먹고 가라'는 안내문이 마음에 든다.
"누구나 공양하실 수 있습니다"
영천 만불사에서 좋게 느낀 것.
"누구나 공양하실 수 있습니다"
나도 저 안내판보고 공양간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 공양 할 수 있나요?"라고 물을 필요도 없이, 스님이나 종무원의 안내를 받을 필요도 없이,당당하게 먹을 수 있었다.
"전법합시다"라고 말하기 전에 저렇게 먼저 베풀어야 하리라.전국 사찰에서 이것 부터 실천하면 어떨까?

 

 

 
 
 
5월 29일
 
합천 천불천탑
절 이름이 없고 방문객들에게 천불천탑으로 소문이나서 절 이름이 천불천탑이 되었다.
용탑스님이 10년 동안 홀로 쌓은 탑이다. 예전에 해인사 선원에서 용탑스님(옛법명은 초중)과 같이 지낸 인연이 있다. 천불천탑으로 방송에 소개되어 유명세를 타고 있는데 나도 우연히 그 방송을 보고 찾아온 것이다. 공부할때도 순수했는데 혼자서 탑을 쌓는 지금도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고 있는듯하다. 혼자서 탑을 쌓는 마음이 어찌 거짓과 여행심이 깃들수 있겠는가? 그나저나 갑자기 이렇게 탑을 많이 쌓게된 이유가 궁금하다. 물오봐도 별이유가 없는 듯하다. 
요즈음에는 천불천탑 말고도 합장하고 절하는 개로 유명하다. 용탑스님이 허굴,허불이라는 개를 키우고 있는데 이 개들이 합장하고 절을 할줄 알아서 많은 사람들이 개를 보려고 찾고있다한다. 그 방송 때문에 초파일 연등이 많이 나갔다고 한다. 개가 살아 있을때까지 불사를 끝내야 한다고. 천불천탑 주소는 "합천군 가회면 월계리 371"
 
점심을 먹고 차를 마시다가 선일스님과 연결되어 마침 해인사에 와있는 선일스님이 들렸다. 그래서 하룻밤을 더 머물게 되었다. 저녁때 MOIDA라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선일스님은 다음날 불국사로 짐을 가지러 떠나고 나와 용탑스님은 안의 종림스님이 머무시는 고반재에 오다. 

 

 

 

 

 

5월 30일
 
각각 차를 몰고 안의 고반재에 도착하다. 용탑스님은 고반재에 있는 경전이나 골동품에 크게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종림스님의 설명도 짧았다. 용탑스님을 보고 내가 가장 짧게 장경각을 관람한 사람이라고 놀렸다.  종림스님은 근처 맛집을 찾아가서 점심을 대접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두 집이나 쉬는 날이라 문을 닫아서 전혀 예상치 않은 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었다. 용탑스님이 관심을 갖는것은 고반재 연못에 있는 연꽃이다. 네팔에서 가져왔다는 연을 얻어가려고 열심히 연을 캐었다. 종림스님도 가래를 가져와서 연을 연못 바닥에서 끌어 올렸다. 용탑스님은 연을 얻어서 합천으로 돌아가고 나는 인월 백장암으로 돌아오다. 이로서 50일간의 만행이 끝났다. 

 

 

6월 1일
4월9일 어머니 49재를 지내고 4월11일 백장암을 출발해서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를 거쳐서 5월30일 백장암에 돌아왔다. 사찰참배를 다니면서도 문경 고녕가야 세미나에 참석하고, 스님들 상대로 설문조사를 하고, 매주 목요일 오후 9시부터 <온라인불자회> 구글 meet 토론공부도 하고, 5월 20일 서울에서 열린 '시국법회 야단법석'에 참석하였다. 사찰 순례를 하다가 지치면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글 쓰는 시간을 가졌다. 친구를 만나면 반가웠고 혼자 지내면 자유로워 50일의 시간이 길지 않게 느껴졌다. 이제 하안거 결제가 이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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