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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禪家龜鑑(선가귀감)한문본 해설

삼가귀감(三家龜鑑)

1. 저자
청허 휴정淸虛休靜(1520~1604) 속성은 최崔, 속명은 여신汝信, 아명은 운학雲鶴, 자는 현응玄應. 부용 영관芙蓉靈觀을 전법사傳法師로 하여 계를 받았다. 남원 땅을 지나다가 닭이 홰를 치며 길게 우짖는 소리를 듣고서 대오하였고, 만행에 힘써 관동 지방을 유람하고 서울로 올라와 승과에 응시하여 중선으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선교양종판사에 이르렀다. 이후 묘향산, 지리산, 금강산을 편력하였다. 팔도십육종도총섭을 맡아 의승군을 지휘하여 국난 극복에 크게 기여하였다. 선을 중심으로 하면서 염불과 정토와 주력 등 제반 수행을 긍정하였으며, 70여 명의 사법 제자를 배출하여 조계선맥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유교와 도교와 불교로 구분하여 각각의 핵심적인 내용을 소개하는 형식이다. 상권의 유교 대목은 유교의 다양한 경전을 인용하여 개인과 사회에 필요한 덕목을 들고, 그에 대한 간단한 주석까지 곁들인 47가지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순서는 『논어』의 하늘(天), 『서경』의 중도中道, 『중용』의 성性ㆍ도道ㆍ교敎의 관계, 『주역』의 계구戒懼와 신독愼獨, 『명심보감明心寶鑑』의 글귀 등을 요약하여 언급하고 있다.<개행>중권의 도교 대목은 36가지 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장자』 및 『도덕경』의 내용을 중심으로 삼재의 본체인 도, 그 작용인 덕, 진인眞人, 양생, 천도, 천도와 인도, 안빈낙도, 겸양과 하심, 군자의 덕, 무극의 도리, 도의 정체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개행>하권의 불교 대목은 독립된 저술에 해당하는 『선가귀감』의 내용인데, 논해論解와 논행論行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불교의 대목은 별도로 유통되고 있는 『선가귀감』과 그 내용 및 체제가 매우 유사하다. 청허가 경론 및 어록 등에서 발췌한 내용으로만 수록되어 있고, 청허 자신이 붙인 해설은 생략되어 있다. 특히 불교와 관련된 내용이 자세한 것은, 『삼가귀감』을 편찬한 의도가 삼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어디까지나 불교를 제대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제시해 주는 데 있기 때문이다.
 
선가귀감 한문본 1권(82장)은 1564년 여름에 저술되었고 서산스님의 서문과 사명종봉(四溟鍾峯) 과 보원(普願)스님과  충허성정(冲虛性正)스님의 발문이 붙어있다.
선가귀감 언해본은 상하 2권 1책(149장)은  1569년에 “金華道人義天書(금화도인 의천이 쓰다.)”로 미루어보아 법명이 의천인 승려가 저술했음을 알수 있수 있다. 한문본과 언해본은 각각 장수가 다르고 설명이 다르고 언해본에는 서산스님의 서문이 없고 제자들의 발문도 없다.
또한 언해본에는 " 유가(儒家)에서는 일태극(一太極)이라 하고 도가(道家) 에서는 천하모(天下母)라 하며 불가(佛家)에서는 '일물(一物)'이라 한 것이 실은 다 이를 가리킨 것이다"라는 설명이 있는데 한문본에는 이러한 설명이 없다. 이것으로 보아  언해본은 금화도인 의천이 서산의 선가귀감 한문본을 보고 82장에서 149장으로 증광한 것으로 생각된다. 

선가귀감언해, 禪家龜鑑諺解>는 조선시대의 고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가 1564년 (명종 19년)에 지은 <선가귀감, 禪家龜鑑>을 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금화도인(金華 道人) 의천(義天)이 1569년(선조 2년)에 한글로 언해하고, 사명대사(四溟大師)가 발문을 붙여 간행한 책이다. <선가귀감>은 서산대사가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썼던 중요한 글 중의 하나이다. 서산대사는 불교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하여 수많 은 경전에서 선(禪)에 관련된 약 50여 종의 서적을 선정했고, 다시 그중에서 선 수행 에 필요한 중요한 문구를 가려서 강의록을 만들었다. <선가귀감언해>의 간행본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현존 판본(版本)으로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1569년(선조 2) 보현사 간행본, 1605년(선조 38)의 경상도 원적사(圓寂寺) 간행본, 1607년(선조 40)의 전라도 송광사(松廣寺) 간행본 등이 있다. 이 책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은 전라도 송광사본은 원간본인 보현사본을 복각한 것으 로 원간본과 별다른 차이가 없으며, 중세 국어에서 근대 국어로 넘어오는 과도기적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에 나타난 표기상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허웅 1989:55)

 

첫째, 한자음이 표기되어 있지 않았고 방점은 찍혀 있으나 정밀하지 못하다.

둘째, ' ㅇ'과 'ㅇ'이 구분되어서 쓰이기는 하지만 분명하지 못하다.

셋째, '△'의 글자가 쓰이고 있으나, 'ㅇ'이나 'ㅅ' 글자로 대치된 경우가 많다.

넷째, 각자 병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으나, '싸홀'과 '쐬쓸'에서 된소리가 쓰인 예 가 보인다.

다섯째, '안잔느니라, 인누니, 진는다, 니르온누니는, 안잔느니라'처럼 비음화가 일어난 예가 제법 보인다.

여섯째, 物忌, 山누로셔, 滅忌, 面目그로, 紙墨게'처럼 체언의 끝자음이 겹쳐서 표현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일곱째, 거의 대부분 연철의 원칙을 따르고 있지만, '둘이, 기슴을, 몸을, 칼온, 말슴 애, 브스름에'처럼 가끔 분철을 하여 형태소의 경계를 구분한 경우도 나타난다. 

 

禪家龜鑑(선가귀감) 한문본 해설

 

선가귀감서(禪家龜鑑序)


                                                                                                   (한문 원문을 생략합니다)


  옛날에 부처 배우는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면 말하지 않았고, 부처님의 행실이 아니면 행하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배로 여기는 것은 오직 패엽(貝葉)의 거룩한 글뿐이었는데, 지금 부처 배우는 이들은 전하여 가면서 외우는 것이 세속 선비들의 글이요, 청하여 지니는 것이 벼슬아치들의 詩뿐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울긋불긋한 종이에 쓰고, 얼룩덜룩한 비단으로 꾸며서, 아무리 많아도 족한 줄을 알지 못하고 가장 큰 보배로만 생각하니 아, 예와 지금의 부처 배우는 이들의 보배 삼는 것이 어찌 이다지도 같지 않을까?

 

  내가 비록 답지 못하나 옛글에 뜻을 두어 패엽의 거룩한 글로써 보배를 삼기는 하지마는, 그 글이 너무도 번다(繁多)하여 장경(藏經) 바다가 하도 넓고 아득하므로, 뒷날의 도반들이 가지를 헤쳐 가면서 잎을 따는 수고를 면하지 못할 것 같아서, 글 가운데 가장 요긴하고도 간절한 것 수백 마디를 추려서 한 장에 써놓고 보니, 참으로 글은 간단하나 뜻은 두루 갖추어졌다고 할만하다.

 

  만일 이 글로써 스승을 삼아 끝까지 연구하여 묘한 이치를 깨닫게 된다면, 마디마디에 산(활活) 석가여래가 나타나실 것이니 부디 힘써 볼지어다. 그러나 글자를 떠난 한 마디와 틀에 벗어난 기묘한 보배를 쓰지 않으려는 것도 아니지만, 아직 특별한 기틀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가정(嘉靖) 갑자년(1564년) 여름
                                                                         청허당(淸虛堂) 백화도인(白華道人) 序

 

 

 

일물(一物)

 

1. 

하나의 그 무엇[一物]1)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본래부터 밝디밝으며 신령스럽고 신령스럽지만 생성한 적도 없고 소멸한 적도 없으니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을 그려 나타낼 수도 없다.2)
有一物於此, 從本以來, 昭昭靈靈, 不曾生, 不曾滅, 名得, 狀不得.
1) 一物. 그 무엇이라고도 결정지어 말할 수 없는 것. ‘物’을 ‘물건’이라 번역하는 
   것은 본래의 뜻에 적절하지 않다.『六祖法寶壇經諺解』에 ‘한것도 업거니’
   라고 하였는데, ‘物’을 ‘것’이라 한 번역에 따라 ‘하나의 물건’이 아니라 어떤 
   정해진 모습도 가지지 않고 모든 규정의 틀로부터 빠져나가는 ‘하나의 그 무
   엇’으로 옮겼다. 어떤 이름이나 개념과도 친근하지 않지만 동시에 가능한 모
   든 명칭이 붙어도 무방하다. 마음이나 부처나 중생을 비롯한 어떤 이름도 허
   용하지만 그중 어느 것에 확고한 보금자리를 틀고 이해하려 한다면 벌써 ‘하
   나의 그 무엇’은 아니다. 이 말은 “보리에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에
   도 받침대가 없다. 본래 하나의 그 무엇도 없거늘, 어디서 티끌과 얼룩이 생
   기겠는가!”(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라는 6조 혜능
   (慧能)의 게송에서 유래한다. 혜능의 게송 제3구가 본래 돈황본(燉煌本)『壇經』
   에는 “불성은 항상 청정하다(佛性常淸淨)” 또는 “맑은 거울은 본래 청정하다
   (明鏡本淸淨)”라고 되어 있었으나 돈황본 이후의 『壇經』에서는 “본래 하
   나의 그 무엇도 없다(本來無一物)”라는 전혀 다른 문장으로 바뀌었다. ‘불성’
   의 자리에 ‘하나의 그 무엇도 없다(無一物)’는 말이 대신 들어섰는데, 이 두 가
   지가 서로 통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는 없다. 피상적으로는 일물(一物)이 불
   성의 대체어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변화된 선사상의 관점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불성은 언제나 모든 중생에게 갖추어져 있는 변하지 않고 보편적
   인 가능성이지만, 일물은 바로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어떤 보편적 본질도
   개별적 특징도 지니지 않는다. 그것은 본체보다 활발한 작용 중심으로 변화
   된 선법의 관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주석6)에서 보이듯이 신회가 6조의 서자
   가 되고 회양이 적자가 된 까닭은 바로 이 일물에 대한 이해를 기준으로 한다. 
   신회는 그것을 불성이라 단정하여 구태의연한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6조의 본의를 파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미혹한 것도 아니요 깨달은 것도 
   아니니 범부나 성인으로 일컬을 수도 없고, 나도 없고 남도 없으니 자신이나 
   타인이라 칭할 수도 없으므로 다만 ‘하나의 그 무엇’이라 한다. 6조 혜능이 
   ‘하나의 그 무엇이 있다. 머리도 없고 꼬리도 없으며, 부를 이름도 없고 쓸 
   글자도 없다. 위로는 하늘을 지탱하고 아래로는 땅을 받치며, 밝기는 태양과 
   같고 어둡기는 칠흑과 같다. 항상 움직이며 작용하는 속에 있으나 움직이고 
   작용하는 속에서는 거두어들이지 못한다’라고 한 말이 바로 이 뜻이다. 비록 
   이러지만 ‘하나의 그 무엇’이라는 말 또한 억지로 붙인 말일 뿐이다. 
  그러 로 남악회양화상이 ‘하나의 그 무엇이라 말하여도 딱 들어맞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하나의 그 무엇이 여기에 있다’라고 한 말은 현재의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항상 맑고 고요하므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金剛經五家解說誼』
  「序」 韓7 p.10b22. 非迷非悟, 不可以凡聖稱, 無我無人, 不可以自他名, 故但
   云一物. 六祖云, ‘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上柱天, 下柱地, 明如日, 黑似
   漆. 常在動用中, 動用中, 收不得者.’ 是. 然雖如是, 一物之言, 亦强稱之而已. 
   故南嶽讓和尙道, ‘說似一物卽不中.’ ‘有一物於此者.’ 不離當處, 常湛然故, 云爾.) 
   여기에 인용된 6조의 말은 동산양개(洞山良价)와 태수좌(泰首座) 사이의 문답으
   로도 잘 알려져 있다. 『洞山語錄』 大47 p.511a5 참조.
2) 명부득상부득(名不得狀不得). 운문문언(雲門文偃)의 말. 말로 표현할 수도 없고,   

    분별로 헤아릴 수도 없는 경계를 나타낸다. “동산이 ‘부처님의 경지 이상으로 
   향상하는 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말에 대해 학인이 물었다. ‘부처님의 
   경지 이상으로 향상하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동산이 말했다. ‘부처님의 경
   지도 아니다.’ 운문은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을 그려 나타낼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의 경지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雲門廣錄』 
   권중大47 p.558a8. 擧洞山云, ‘須知有佛向上事.’ 僧問, ‘如何是佛向上事?’ 
   山云, ‘非佛.’ 師云, ‘名不得, 狀不得. 所以言非.’)

 

[평]

‘하나의 그 무엇’이란 무엇인가? ○3) 옛사람의 게송에 “과거칠불(過去

七佛)4)께서 나오시기 전부터 (이미 있었던) 뚜렷한 동그라미 하나.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했거늘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었으리오?”5)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하나의 그 무엇이 생성하는 것도 아니요 소멸하는 것도 아니

므로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을 그려 나타낼 수도 없는 까닭이다. 육

조혜능이 대중에게, “나에게 하나의 그 무엇이 있는데, 부를 이름도 없고 

써 보일 글자도 없다. 그대들은 알겠는가?”라고 하자 신회(神會)선사가 나

아와서는 “모든 부처님의 본원(本源)이며, 신회의 불성(佛性)입니다”라고 

하였다.6) 이것이 신회가 육조의 서자(庶子)가 되는 이유이다. 회양(懷讓)

선사가 숭산(嵩山)에서 왔을 때 육조가 “어떤 것이 이렇게 왔는가?”라고 

묻자 회양은 어찌할 줄 몰랐다. 8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스스로 옳다고 여

긴 것이 있어 “하나의 그 무엇이라 말하더라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하였

다. 이것이 바로 회양이 육조의 적자(嫡子)가 되는 이유이다.

一物者, 何物? ○ 古人頌云,“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
迦猶未會, 迦葉豈能傳?” 此一物之所以不曾生不曾滅, 名不
得狀不得也. 六祖, 告衆云,“ 吾有一物, 無名無字. 諸人還識
否?” 神會禪師, 卽出曰,“ 諸佛之本源, 神會之佛性.” 此所以
爲六祖之蘖子也. 懷讓禪師, 自嵩山來, 六祖問曰,“ 什麽物伊
麽來?” 師罔措, 至八年方自肯曰, “說似一物卽不中.” 此所以
爲六祖之嫡子也.
3) 일상원(一相圓)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 ‘하나의 그 무엇’에 대해 일원상을 도시
   하여 대답한 것이다. 진여·법성·실상·불성 등을 나타낸다고 해설하는 경우도 
   있지만, 조사선에서는 불자·주장자·손가락 등을 이용해 땅이나 허공 등에 원
   상을 그려 놓고 상대를 시험하고 점검하는 수단으로 쓰면서 상황에 따라 활용
   하는 틀일 뿐 진여 등과 같이 일정하게 규정된 의미는 없다. 그러므로 조사선의 
   맥락에서 볼 때 일원상은 진여 등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아니며 그때마다의 조
   건에 따라 다르게 제시되는 일종의 화두에 가깝다.『從容錄』권5 77則 「評唱」大
   48 p.276a15에 따르면, 중국에서 일원상을 가르침의 수단으로 처음 사용한 이는 
   혜충국사(慧忠國師)인데, 그는 이 일원상을 시자였던 탐원(耽源)에게 전해주었
   고, 탐원은 다시 앙산(仰山)에게 전해주어 위앙종의 가풍[潙仰家風]이 되었다라
   고 한다. 한편 어떤 수재(秀才)가 24가(家)의 서체(書體)를 안다고 하자 목주(睦
   州)가 허공에 한 점을 찍어 붓글씨를 쓰는 가장 기초적인 필법을 보임으로써 본
   분의 뜻을 보인 인연에 대해 위산모철(潙山慕喆)이 그 핵심을 집어내어 평가한 
   말에 일원상이 화두로 제시된다. “‘목주는 그 한 점의 미묘한 뜻을 활용하는데 
   걸림이 없었으나, 마치 자신의 권세로 상대를 속인 것처럼 보인다. 나라면 그렇
   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라 하고, 원상(○) 하나를 그려 놓고 말했다. ‘알겠는가? 
   글자의 뜻이 분명히 드러나 있으니 이 온전한 문장에 한 점도 덧붙일 필요가 없
   다.’”(『禪門拈頌說話』 656則 韓5 p.504c1. 潙山喆拈, ‘睦州不妨用得這一點妙, 
   又似以勢欺人. 大潙卽不然.’ 乃畫一圓相云, ‘會麽? 字義炳然, 文不加點.’)
4) 과거에 출현한 일곱 분의 부처님. 비바시불(毘婆尸佛 Vipaśyin)·시기불(尸棄佛
   Śikhin)·비사부불(毘舍浮佛 Viśvabhu)·구류손불(拘留孫佛 Krakucchanda)·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 Kanakamuni)·가섭불(迦葉佛 Kaśyapa)·석가모
   니불(釋迦牟尼佛 Śākyamuni) 등을 가리킨다. 석가모니불 이전의 먼 과거부터 
   이들 여러 부처님에 의해 불법(佛法)이 전해져 왔으며, 비바시불에서 비사부불
   까지의 세 부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먼 과거인 과거장엄겁(過去莊嚴劫)에 출현
   하였고, 구류손불에서 가섭불까지의 부처님은 석가모니불과 같은 현겁(現劫)에 
   출현하였다고 한다.
5) 자각종색(慈覺宗賾)의 말. “천동정각(天童正覺)이 자각종색의『권효문』수편(首
   篇)에 나오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부터 뚜렷한 동그라미 하나! 석가도 알
   지 못했거늘 가섭이 어찌 전할 수 있었으리오’라고 한 게송을 들고 평가했다. 
   ‘14조인 용수보살이 법좌에서 몸을 숨긴 채 ○상을 드러내자, 제바가「이는 존
   자가 부처님의 체상(體相)을 드러내어서 우리들에게 보이신 것이다. 이 무상삼
   매(無相三昧)의 형태가 마치 보름달과 같으니, 불성의 뜻은 막힘없이 트이고 밝
   구」라고 말하였으니, 바로 이것을 비유한 것이다.”(『從容錄』 권5 77則 「評唱」
   大48 p.276a11. 師擧, 慈覺勸孝文首篇頌云, ‘父母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不會, 
   葉豈能傳?’, ‘十四祖龍樹, 於法座上, 隱身現○相, 提婆曰, 「此尊者現佛體相, 以
   示吾輩也. 以此無相三昧形如滿月, 佛性之義, 廓然虛明.」 譬此而已.)

[게송]

유·불·도 삼교의 성인7)들이 모두 이 구절로부터 나왔으니, 누가 이에 

대하여 들먹이겠는가? 눈썹 아까운 줄 알라! 8)
三敎聖人, 從此句出, 誰是擧者? 惜取眉毛!
7) 보통유교의 공자, 불교의 석가모니, 도교의 노자를 말한다.
8 어떤 말도 붙을 수 없는 하나의 그 무엇[一物]에 대하여 이러니저러니 들먹인다
    빗나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불법을 오해하여 잘못 말해버리면 눈썹과 수염
   이 모두 떨어져 나간다는 설에 따르는 말이다. 반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진실
   에 대하여 눈썹이 떨어져 나갈 것을 알면서도 방편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은 불
   석미모(不惜眉毛)라 한다.

 

언해본 주해


  '한 것'이란 어떤 물건인가? "○", 옛사람은 이 원상을 그려 보이셨지만 보여서는 안 될 것을 구태여 이렇게 보이셨구나. '석가'도 오히려 알지 못하셨는데 '가섭'이 어떻게 전하랴.

  유가(儒家)에서는 일태극(一太極)이라 하고 도가(道家)에서는 천하모(天下母)라 하고 불가(佛家)에서는 일물(一物)이라 하니, 실은 다 이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옛날 육조 혜능께서 "一物이 있는데 위로는 하늘을 괴고 아래로는 땅을 받쳐 늘 사람이 움직여 쓰는 가운데 있으니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니 '신회 선사'가 곧바로 대중 가운데서 나와서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본원(本源)이시며 신회의 佛性입니다."라고 하였다. '육조'께서 나무라시되 "내 一物이라고 이름지어도 맞지 않을 것인데, 너는 어찌하여 본원이니 불성이니 하고 다시 이름짓느냐" 하시니, 이 '신회 선사'는 언어로 누설했기 때문에 육조의 얼자(子: 서자庶子)가 되었다.


  또 '회양 선사'가 와서 '육조'께 예배하자 육조께서 물으시되 "어디에서 오느냐"라 하시니 회양이 아뢰되 "'숭산'에서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육조께서 "무슨 물건이 이리로 왔느냐"라고 하시거늘, 회양이 8년 동안 궁구(窮究)하여 아뢰되 "一物이라 말해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 '회양 선사'는 스스로 긍정하고 머리를 끄덕였으므로 육조의 적자(嫡子)가 되었다.


  '종본이래(從本以來)'는 이것의 목숨이 한없기 때문에 시작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소소영령'은 수행하고 증득(證得: 깨우침)함에 남의 도움을 빌리지 아니하여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우며 공적(空寂)하고 묘(妙)하여 자연히 잘 통한다는 뜻이다.


  '부증생부증멸'은 범부와 외도(外道)는 태어나기 때문에 죽고, 죽기 때문에 태어나거니와 이 正法은 본래 태어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이제 죽음이 없어 상주불천(常住不遷: 상주불멸)하는 것이 허공(虛空)이 본래 태어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이제 또 죽음이 없음과 같다는 것이다(불생불멸).

   '명부득(名不得)'은 말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고 '상부득(狀不得)'은 뜻이 미치지 못하므로 불가사의라 하는 것이다.(이름짓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고, 모양 그릴 수 없다는 말은 어떤 모양으로도 나타내 보일 수 없음 이른 말이다)

 

 

 

 

 

 

2. 
부처님과 조사가 상에 나온 것은 바람도 불지 않는 곳에서 물결을 
일으킨 것과 같다.9)
佛祖出世, 無風起浪.
9) 무풍기랑(無風起浪). 아무 일도 없는 곳에서 쓸데없이 불필요한 일을 만들어 혼란
   하게 만드는 것.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온 것은 바람도 없는 데서 파도를 일으킨 
   것과 같으며,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연꽃을 들어 보인 것도 한바탕의 잘못에 불과하다.”
   (『緇門警訓』 권7 大48 p.1075b4. 達磨西來, 無風起浪, 世尊拈花, 一場敗闕.)

[평]

부처님과 조사란 세존과 가섭을 말한다. 세상에 나왔다는 말은 큰 자비를 

근본으로 삼아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하나의 그 무엇’

으로써 관찰해 보건대 사람마다 그 면목이 본래 이루어져 완성되어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자신의 본래 모습에) 연지 찍고 분을 발라 

꾸밀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와 공연히 

물결만 일으켰다고 한 이유이다.『허공장경』에 “문자도 마업10)이요 

명상11)도 마업이요, 부처님의 말씀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마업이다”12)

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 이는 곧바로 본분(本分)13)을 들어 말한 

것이니, 부처나 조사일지라도 특별히 할 역할이 없다.14)
佛祖者, 世尊迦葉也. 出世者, 大悲爲體, 度衆生也. 然以一物
觀之, 則人人面目, 本來圓成, 豈假他人, 添脂着粉也! 此出世
之所以起波浪也. 虛空藏經云, “ 文字是魔業, 名相是魔業, 
於佛語, 亦是魔業.” 是此意也. 此直擧本分, 佛祖無功能.
10) 魔業. 마구니의 행위. 마구니는 정법을 방해하고 불도의 성취를 방해하는 유
    형·무형의 존재를 가리킨다. 따라서 마구니의 직접적인 행위뿐만 아니라 중생
    으로 하여금 보리를 증득하는 것을 장애하는 것, 예를 들면 번뇌·게으름·미혹
    등도 통틀어서 마업이라 한다.『大方等大集經』 권15 大13 p.105c17 참조.
11) 名相. nāma-samsthāna. 사물의 명칭과 차별적인 형상. “이 중에서 상(相)이란
    드러난 색 등의 형상에 각기 차별이 있는 것을 말하고, 명(名)이란 저 여러 가지 
    상에 따라서 병(甁)이라는 등의 이름을 세우는 것을 가리킨다.”(『楞伽經註解』권4 
    大39 p.418a7. 此中言相者, 謂所見色等形狀各別也;名者, 依彼諸相, 立甁等名.) 
   『楞伽經』 권4 大16 p.511b12 참조.
12) “문자를 시설하는 것은 모두 마업이니, 부처님의 말씀까지도 마업이 된다.”
    (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 권7 大13 p.642a15. 施設文字, 皆爲魔業, 乃至佛語, 
    猶爲魔業.)13) 어떤 분별과 수단도 허용하지 않는 종사의 법도이다. 어떤 대상에도 규정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활발하고 자유자재하게 작용하는 ‘하나의 그 무엇’에 해당하며, 
    일원상(一圓相)과도 통한다.
14) 앞에서 ‘부처님과 조사가 세상에 나온 것은 바람도 불지 않는 곳에서 물결을 
    일으킨 것(無風起浪)과 같다’라는 구절에 대한 해설이다.

 

[게송]

하늘과 땅도 빛을 잃고, 해와 달도 광명을 잃었네.15)
乾坤失色, 日月無光.
15) 본분을 바로 들어 보여 차별이 사라진 세계를 표현한 말. “파정을 시행하면 하
    늘과 땅이 빛을 잃고 해와 달도 광명이 사라지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 것이다. 방행을 시행하면 바위 골짜기에서 광명이 일어나고 삼라만상이
    밝은 빛을 드러내며, 길면 긴 대로 짧으면 짧은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는 대로 대상 하나하나마다 모두 진실하고 낱낱의 존재가 그 실상을 드러낼 
    이다.”(『圜悟語錄』 권8 大47 p.751a3. 其把定也, 乾坤失色, 日月無光, 盡大地人, 
    喪身失命. 其放行也, 巖谷生光, 森羅顯煥, 隨長隨短, 隨有隨無, 處處皆眞, 頭頭露現.)

 

⊙ 언해본 주해


  부처란 자성을 아시어 만덕을 갖추신 분의 이름이고 조사란 불심의 종지를 아시되 행동과 지해(知解)가 서로 맞는 분의 이름이다. 사람마다 본래 갖추고 있으며 낱낱이 원만하게 이루어져 연지 찍으며 분 바르지 아니한 면목(面目)으로 볼 것 같으면 부처와 조사께서 세상에 나오심은 태평한 세월에 난(亂)을 일으키신 것이며, 바람 잔 바다에 물결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할 것이다.

 

  '허공장경'에 '문자로 펴냄이 이 마업이며, 가령 부처의 말씀이라도 이 마업이니, 문자를 여의고 말씀을 여의어야(글이나 말을 다 떠나야) 마(摩)가 작용하지 못하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선사께서 '말로 나타내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직 지묵(紙墨)에 오를까(기록될까) 저어하노라'고 하시니 또한 이런 뜻이로다.


  이 일절은 부처를 치며 조사를 치고(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죽여) 法을 없애며 사람을 없애(법과 사람을 다 빼앗아) 본래의 태평한 소식을 잡아 나타내시려는 것이다.

 

 

3. 

그러나 법에는다양한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수많은 근기가 있으니, 

그에 따르는 방편을 세워도 무방하다.

然, 法有多義, 人有多機, 不施設.

[평]

법이란 하나의 그 무엇이요, 사람이란 중생을 말한다. 법에는 변하지 않

[不變]는 뜻과 인연을 따르다[隨緣]16)는 뜻이 있고, 사람에게는 돈오와 

점수의 근기가 있으니, 문자나 언어로 방편을 펼치지 않을 수 없다.16) 

이것을 가리켜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허용하지 않지만, 

사적으로는 수레와 말도 통과하도록 허용한다”17)고 한다. 중생이 비록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다고는 하지만, 지혜의 눈을 타고나지 못하여18) 

윤회를 감수하게 된 것이니, 세간의 속박을 벗어나게 하는 금비(金鎞)19)가 

아니라면, 가 무명(無明)의 두꺼운 꺼풀을 벗겨줄 수 있을 것인가! 

고해(苦海)를 건너 즐거운 언덕에 오르는 데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크나큰 

자비심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갠지스 강의 모래알같이 

무수한 목숨으로 도 그 은혜의 만 분의 일도 갚기 어렵다. 이것은 새롭게 

훈습20)하여 습득한 결과를 자세하게 거론하여 부처와 조사의 깊은 은혜에 

감사의 뜻을 드러낸 것이다.

法者一物也, 人者衆生也. 法有不變隨緣之義, 人有頓悟漸修之
機, 故不妨文字語言之施設也. 此所謂,“ 官不容針, 私通車馬” 
者也. 生, 雖曰圓成, 生無慧目, 甘受輪轉故, 若非出世之金
鎞, 誰刮無明之厚膜也! 至於越苦海而登樂岸者, 皆由大悲之恩
也. 然則恒河沙身命, 難報萬一也. 此廣擧新熏, 感佛祖深恩.
16) 진여(眞如)는 모든 법의 근거로서 생성과 소멸을 넘어서 상주하므로 ‘불변’이
    라 하고, 이러한 불변의 본질을 지니면서도 염(染)·정(淨)의 인연에 따라 움직
   이며 삼라만상을 드러내므로 ‘수연’이라 한다. 법성종(法性宗)의 공통된 설이
    며, 화엄종의 법계연기설(法界緣起說)에도 널리 적용된다.『大乘起信論』大32
    p576a5에 따르면, 불변은 심진여문(心眞如門)이고 수연은 심생멸문(心生滅門)
    으로서 일심(一心)의 두 가지 측면이며 이 두 문으로 모든 법을 총괄적으로 포
    섭다고 한다.
17) 관불용침사통거마(官不容針私通車馬). 공적인 일로는 사사로운 이해득실에서
    벗어 오로지 법을 준수해야 하지만, 사사로운 일로는 사정에 따라 법에 어긋
    나더라도 허용할 수 있다는 뜻. 일물을 고수하는 입장에서는 털끝만큼의 말도 
    허용하지 않지만, 상황이나 사람의 수준 등에 따라서는 다양한 방편을 쓸 수 있
    다는 말이다.『景德傳燈錄』권17「曺山本寂傳」大51 p.336b5, 『臨濟語錄』 
    大47 p.506b24 등 선문헌에 널리 나타나는 구절이다.
18) “시작도 없는 때부터 본래 무명을 일으켜 자기의 주재(主宰)로 삼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은 지혜의 눈을 타고나지 못하여 몸과 마음 등의 본질이 모두 무명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끊지 못하는 것과 같다.”
   (『圓覺經』 大17 p.919b20. 由有無始, 本起無明, 爲己主宰, 一切衆生, 生無慧目, 
    身心等性, 皆是無明. 譬如有人, 不自斷命.);“〈경〉모든 중생은 지혜의 눈을 
    타고 나지 못하였다.〈소〉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람이 열 살이나 
    스무 살에 장님이 되었다면, 눈앞에 있는 사물을 비록 보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설명해 주면 이해할 수 있지만, 만약 모태에서부터 눈이 멀어 장님으로 태어
    났다면 색상을 마주고 있을 때에 갖가지로 설명해 주더라도 끝내 이해하는 데 도
    이 되지 않는 것과 같다. 곧 먼저 금비로 눈을 덮고 있는 꺼풀을 도려낸 다음에 
    옳고 그름을 가리켜 보여야 한다.”(『圓覺經略疏』권하 大39 p.564a26. 一切衆生, 
   生無慧目. 未曾悟故. 如人若十歲, 二十始盲, 則眼前, 雖不見物, 說之, 卽能了知. 
    若胎無目, 生來便盲, 則對色之時, 種種爲說, 終無所益. 則先須金錍抉膜, 然後, 
    指示是非.)
19) 인도에서 사용하던 의료기구의 하나. 무명을 타파하는 지혜를 비유한다. 위의
    주석 인용문 참조. 금주(金籌)·금비(金錍·金箄)·금배(金拜) 등과 같은 말이다.
    의사가 맹인의 눈을 고치기 위하여 안막을 도려내는 데 사용했던 의료 도구이
    다. 부처님께서 지혜의 방편으로 중생의 무지를 도려내어 차츰 깨달음의 눈을 
    뜨게 해주는 것을 이것에 비유한다.『大般涅槃經』 권8 大12 p.411c21,『大般涅槃
    經疏』 권11 大38 p.108b24, 『大般涅槃經集解』 권20 大37 p.462b29 등 참조.
20) 신훈(新熏). 본분(本分)에 대칭되는 말이다. 금시(今時)라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본분이 어떠한 분별과 수단도 허용하지 않는 무차별한 조사의 법도라면, 신훈
    이나 금시는 상황이나 학인의 근기에 따라 방편을 허용하는 입장이다.

 

 [게송]

임금이 용상에 오르시니, 촌로가 태평가를 부르네.21)
王登寶殿, 野老謳歌.
21) 임제의현(臨濟義玄)의 문답에 나오는 말.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임금이 용상에 오르시니, 촌로가 태평가를 부르네.’”(『臨
    濟語錄』 大47 p.497a28. 僧云 ‘如何是人境俱不奪?’ 師云, ‘王登寶殿, 野老謳歌.’) 
    주관인 사람과 객관인 경계가 모두 자신의 차별된 지위에서 그 본질을 드러내는 
    것과 같이 어떤 방편도 허용하지 않고 일물의 영역을 고수하는 방식과 대상에 따
    라 다양하게 펼치는 방편을 허용하는 입장을 자유롭게 운용하는 뜻을 나타낸다.

 

 

언해본 주해


  佛法은 本心이며 사람은 중생이다. 불법에 불변과 수연의 두 가지 뜻이 쓰이고, 사람에게는 돈오와 점수라는 두 가지 근기가 있기 때문에(근기가 제각기 달라서) 문자나 언어를 가르치는 여러 가지 방편이 없을 수 없다.(문자와 말을 빌려 설명할 수밖에 없다)


  앞에서는 本分을 의논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와 조사의 공능(功能)이 다 필요 없거니와, 이것은 신훈을 의논한 것이기 때문에 부처와 조사의 큰 은혜에 감격해야 할 것이다. 
  중생이 태어나면서부터 머리는 둥글고 발은 모나지만(원만하게 갖추어져 모자랄 것이 없다하나) 혜일(慧日: 지혜)이 無明 구름에 숨음이 태(胎) 속에서 눈이 머는 것과 같아 흑백을 가리지 못하기 때문에, 만약 부처와 조사가 방편 바람으로 무명 구름을 쓸며 금침으로 눈을 가리는 것을 걷지 아니하면 생사윤회를 벗어날 기약이 영영 없을 것이다.
  슬프다 몸을 부수고 뼈를 두드려도 부처와 조사의 은혜를 조금도 갚지 못할 것이다.  

 

 4. 

마지못해 여러 가지 이름을 붙여 ‘마음’이라고도 하고, ‘부처’라고도 

하고, ‘중생’이라고도 한 것일 뿐이니, 이 이름을 고수하며 이해하려고 

서는 안 된다. 있는 그대로 옳은 것이니,22) 생각을 일으켜 분별하는 

즉시 어긋나 버린다.

强立種種名字, 或心或佛或衆生, 不可守名而生解. 當體便
是, 動念卽乖.
22) 당체편시(當體便是). 황벽희운(黃蘗希運)의 말. 있다·없다, 크다·작다는 등의
    대대적(對待的) 분별에 근거하여 생각이 동요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 본래의 마
    음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모든 부처님과 일체의 중생은 오직 일심일 뿐이며,
    그 이상 다른 법은 없다. 이 마음은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생겨난 적도 없
    고 소멸한 적도 없으며, 푸르지도 누렇지도 않고, 형체도 모양도 없으며, 있거나
    없는 것에 속하지도 않고, 새롭거나 오래된 것으로 분별하지 못하며, 길지도 짧
    지도 않고, 크지도 작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한계와 이름 그리고 자취와 대대를 
    넘어서 있다. 있는 그대로 옳은 것이니 생각을 일으켜 분별하는 즉시 어긋나버
    린다. ”(『傳心法要』 大48 p.379c15. 諸佛與一切衆生, 唯是一心, 更無別法. 
    此心無始已來, 不曾生不曾滅, 不靑不黃, 無形無相, 不屬有無, 不計新舊, 非長非短, 
    非大非小, 超過一切限量名言, 縱跡對待. 當體便是, 動念卽乖.);“눈앞에 있는 
    그대로가 옳으니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고 모자라는 것이 전혀 없다.”(같은 책 
    p.380b18. 直下便是, 圓滿具足, 更無所欠.);“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더 이상 
    다른 부처는 없으며 다른 마음도 없다. 이 마음이 밝고 깨끗한 것은 마치 허공에 
    한 점의 모양도 없는 것과 같다. 마음을 움직여 생각을 일으키면 법의 본체와 
    어긋나게 되며 곧 상에 집착하는 것이다.”(같은 책 p.380a2. 此心卽是佛, 更無
    別佛, 亦無別心. 此心明淨, 猶如虛空無一點相貌. 擧心動念卽乖法體, 卽爲著相.)

[평]

하나의 그 무엇에 굳이 세 가지 이름을 붙인 것은 교법(敎法)상 어쩔 수 없이 

그런 것일 뿐이요, 그 이름을 고수하며 지해(智解)를 일으키지 말라고 한 것 

또한 선법(禪法)을 펼치기 위해 마지못해 한 말일 뿐이다. 한 번은 떠받쳐 

올리고 한 번은 내리누르며, 세웠다가 바로 허물어뜨리고 허물었다가 다시 

세우는 것은 모두 법왕(法王)23)이 법령(法令)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기틀이다. 이것은 위의 구절들을 결론짓고 아래의 구절로 연결시키기 

위하여 부처와 조사가 각각 드러내는 구체적 현상과 본체의 차이점을 

거론한 것이다.

一物上, 强立三名字者, 敎之不得已也, 不可守名生解者, 亦
禪之不得已也. 一擡一搦, 旋立旋破, 皆法王法令之自在者也. 
此, 結起下, 論佛祖事體各別.
23) 본래 부처님을 가리키지만, 여기서는 부처와 조사를 아울러 나타낸다.

 

 

[게송]

오랜 가뭄 끝에 단비 내리고, 타향에서 옛 친구 만났네.24)
久旱逢佳雨, 他鄕見故人.
24) 오래된 소원이 하루아침에 실현되면서 오는 기쁜 심정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道吾眞禪師語要』 古尊宿語錄19 卍118 p.407b16 및『楊岐語錄』大47 p.644c1
    에서는 임제사료간 중 인식주관과 인식대상을 모두 부정하지 않고 허용하는 
    인경구불탈(人境俱不奪)에 대한 대답으로 활용한다. 이 구절의 작자는 알 수 없
    나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온 시구이다. 송(宋)의 홍매(洪邁)가 지은 『容齋四筆』
  「得意失意詩」에 “오래전부터 전해진 4구의 시 중에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실현
    된 심정을 읊은 것이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 내리고, 타향에서 옛 친구 만났네.
    신방에 화촉 밝힌 밤이요, 과거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오른 순간이로다.’”(舊傳
    有詩四句, 誦世人得意者云:‘久旱逢甘雨, 他鄕遇故知. 洞房花燭夜, 金榜掛名時.’)
    라고 전한다.

 

 

 

 언해본 주해


  마음은 영지(靈知: 반야)의 이름이고 부처는 선각(先覺)의 이름이고 중생은 범부와 성인 모두의 이름이다. 이름도 또한 실상(實相)의 손님이다. 손님으로서 실상을 구(求)하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날 것이다.
  일물(一物)은 본래 차별이 없거늘 깨닫지 못한 사람을 위하여 세 가지 다른 이름을 만드신 것이다. 이것의 체(體 : 法 자체)는 시비를 떠났으니 만일 조금이라도 의심쩍어한다면 곧 어긋날 것이다.

 

교외별전(敎外別傳)

 

5. 

세존께서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신 것은 선지(禪旨)이고, 전 생애에 걸쳐 

설하신 일체의 가르침25)은 교문(敎門)이다. 그러므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26)라고 하는 것이다.

世尊三處傳心者, 爲禪旨;一代所說者, 爲敎門. 故曰,“ 禪
是佛心, 敎是佛語.”
25 일대시교(一代時敎). 일대성교(一代聖敎), 일대교(一代敎) 등이라 한다.
26 선가(禪家)와 교가(敎家)의 일치를 주장하는 선교일치(禪敎一致)의 입장에서는
    이 둘을 상보적 관계로 보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는 경향이 강
    하게 나타난다. 혜심(慧諶)은『看話決疑論』「跋文」韓4 p.737b13에서 “근고
    (近古)이래로 불법이 대단히 쇠약해져서 혹은 선을 근본으로 삼아 교를 배척하며,
    혹 교를 받들며 선을 비난한다. 이는 선이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며, 교는 선을 포착하는 벼리요 선은 교를 통괄하는 벼리라는 사실을 전
    혀 모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噫, 近古已來, 佛法衰廢之甚, 或宗禪而斥敎, 
    或崇敎而毁禪. 殊不知, 禪是佛心, 敎是佛語, 敎爲禪網, 禪是敎網)라 주장하였고, 
    선교일치의 전형을 보인 종밀(宗密)은 『都序』 大48 p.400b10에서 “경(經)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부처님의 마음과 입은 결코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經是佛語, 禪是佛意, 諸佛心口, 必不相違)라고 하였으며, 
    휴정(休靜)은『선교결』韓7 p.657b5에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
    의 말씀이다. 교란 말이 있는 것으로부터 말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며, 
    선이란 말이 없는 경지에서 말이 없는 경지로 이르는 것이다.”(然禪是佛心, 敎
    是語也. 敎也者, 自有言, 至於無言者也. 禪也者, 自無言, 至於無言者也.)라고 
    하였다.

 

세 곳이란 다자탑 앞에서 앉아 계시던 자리를 반 나누어 앉도록 하신 것이 

첫 째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신 것이 두 번째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내어 보이신 것이 세 번째이다. 가섭이 선의 

등불을 별도로 곧장 받았다27)는 말은 이것을 가리킨다. 일생 동안 설하신 

말씀이란 49년간 오교(五敎)28)를 설하신 것을 가리킨다. 인천교·소승교·

대승교·돈교·원교가 그 다섯 가지이니, 아난이 바다처럼 드넓고 깊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흘러 통하게 하였다는 것은 이것을 말한다. 

러므로 선과 교 두 가지 모두의 근원은 부처님이시고, 선과 교로 나뉜 

래는 각각 가섭과 아난이다. 말이 없는 경지로부터 말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선이요, 말이 있는 것으로부터 말이 없는 경지에 이르는 

것이 교이니, 마음은 선법(禪法)이요 말은 교법(敎法)이다. 즉, 법은 

비록 한가지 맛이지만 견해는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엄청난 차이가 

있으니, 이것이 선과 교가 두 갈래 길로 갈라진 이유이다.

三處者, 多子塔前分半座, 一也, 靈山會上擧拈花, 二也, 雙
樹下槨示雙趺, 三也. 所謂迦葉, 別傳禪燈者, 此也. 一代者, 
四十九年間所說五敎也. 人天敎, 一也, 小乘敎, 二也, 大乘敎, 
也, 頓敎, 四也, 圓敎, 五也, 所謂阿難, 流通敎海者,

此也.然則禪敎之源者, 世尊也, 禪敎之派者, 迦葉阿難也. 以無言至
於言者, 禪也, 以有言至於無言者, 敎也, 乃至心是禪法也, 
語是敎法也. 則法雖一味, 見解則天地懸隔, 此辨禪敎二途.
27) 별전別傳).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말한다. 교 밖에 별도로 전한다는 뜻으로 문
    자나 경전과는 관계없이 별도의 방법으로 전한다는 뜻이다. 곧 문자나 언어에 
    의한 르침[敎]을 통하지 않고 깨달음의 경계를 곧바로 전하는 것이다.
28)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으로 얕고 간단한 가르침부터 차
    례대로 깊은 가르침을 설한 것이다. 그 분류는 시대에 따라 또는 분류한 사람
    에 따라 다르다. 당나라의 법장(法藏)이 설한 소승교(小乘敎)·대승시교(大乘始
    敎)·대승종교(大乘終敎)·돈교(頓敎)·원교(圓敎), 제(齊)나라 때 호신사(護身
    寺)의 자궤(自軌)가 설한 인연종(因緣宗)·가명종(假名宗)·부진종(不眞宗)·진
    종(眞宗)·법계종(法界宗), 융통염불종(融通念佛宗)에서 나눈 인천교(人天敎)·
    소승교·돈교·원교·점교(漸敎) 등의 5교가 그 예이다.

 

 [게송]

그대로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번뇌의) 풀숲에서 뒹굴고 있구나.29)
不得放過. 草裡橫身.
29) 부처님의 삼처전심도 아직 번뇌의 경계에 얽매여 있고 해탈에 이른 경지가 아
    니기 때문에 그대로 허용해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말. “어떤 학인이 운문에게
    물었다. ‘눈앞에 있는 기틀도 아니고, 눈앞에 드러난 일도 아닌 경지는 어떤 것
    입니까?’〈뛰어서 무엇 하려는 것인가? 3천 리 밖으로 물러나버렸다.〉 운문이 
    말하였다. ‘모조리 뒤집어엎고 한마디 해보라.’〈다 토해냈다. 죄인이 죄상을 실
    토하였구나. 그래도 그대로 놓아주어서는 안 된다. 여전히 거친 번뇌의 풀숲에서 
    을 뒹구는구나.〉”(『碧巖錄』15則 大48 p.155a21. 擧僧問雲門, ‘不是目前機, 
    亦非目前事時, 如何?’〈跳作什麽? 倒退三千里〉 門云, ‘倒一說’〈平出. 款出囚人
    口 也不得放過. 荒草裏橫身.〉)

 

 

 언해본 주해


  세존은 부처의 별명이니 세간에서 말하는 '추존한다'는 뜻이다. 세 곳은 부처께서 가섭에게 마음을 전한 곳이니 제1처는 다자탑 앞에서 자리를 반 나누어주신 곳이고 제2처는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신 곳이고 제3처는 사라쌍수 아래에서 관 밖으로 두 발을 보이신 곳이다.
  일대소설이란 부처께서 49년 동안 이르신 말씀이니 '아난'이 전하신 法이다. 여래 행적에는 "선등(禪燈은 '가섭'의 마음에 켜시고 교해(敎海)는 아난의 입에 부으셨다" 하신 것이 있다.

 

 

6.

그러므로 누구든 말에 얽매여 근본을 잃어버리면 염화미소30)의 소식도

모두 교의 자취31)에 불과하지만, 마음에서 깨달으면 세간의 온갖 거칠고

자질구레한 말들도 모두 교외별전 32)의선지(禪旨)가 된다.

是故, 若人失之於口, 則拈花微笑, 皆是敎迹, 得之於心, 則
世間麤言細語, 皆是敎外別傳禪旨.
30) 拈花微笑.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하나. 영취산 설법에서 부처님이 꽃 한 송이를
    들어 보이자, 제자들이 모두 무슨 뜻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는데 가섭만이
    미소 지은 일화이다. 위경(僞經)인『大梵天王問佛決疑經』권상「初會法付囑品」
   卍87 p.606a6에 보인다.『禪門拈頌說話』5則「세존염화(世尊拈花)」참조.
31) 교적(敎迹). 교법(敎法)의 자취라는 뜻으로 성인의 가르침을 뜻한다. 언교(言敎)
    라고도 하며 교적(敎跡)이라고도 쓴다. 여기서는 선지(禪旨)와 대비를 이루어
   언어를 넘어서는 염화미소가 도리어 언어의 관념으로 전락한 것을 나타낸다.
32) 敎外別傳. 주석27) 참조.

 

[평]

법은 붙일 이름이 없으므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고, 법은 나타내 보일 

상(相)이 없으므로 마음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33) 말에서 이리저리 헤아리는 

것은 본래의 심왕(心王)34)을 잃은 것이다. 본래의 심왕을 잃으면 세존께서 

꽃을 들어 보이신 것과 가섭이 그에 응답한 미소가 모두 한낱 진부한 말이 

되고, 결국 활력을 잃은 이야기가 되고 말리라. 마음에서 얻은 자는 길거리

에서 하는 말로도 법의 요체를 잘 설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비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도 실상을 깊이 이야기할 수 있다.35) 그러므로보적(寶積)선사가 

곡소리를 듣고 몸과 마음이 뛸 듯이 기뻐하였고,36) 보수(寶壽)선사가 

주먹다짐하는 광경을 보고서 본래면목을 활연히 깨달았던 것37)은 모두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이다. 이상은 선과 교가 지니는 깊이의 차이를 밝힌 

것이다.

法無名故, 言不及也, 法無相故, 心不及也. 擬之於口者, 失本心王也. 失本心王, 
則世尊拈花, 迦葉微笑, 盡落陳言, 終是死物也. 得之於心者, 非但街談善說法要, 
至於鷰語, 深談實相也. 是故, 寶積禪師, 聞哭聲踊悅身心, 寶壽禪師, 見諍拳, 
開豁面目者, 以此也. 此明禪敎深淺.
33) 염화미소도 교적(敎迹)으로 환원시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말. 무명(無名)·
    무상(無相)은 그 어떤 이름이나 상의 제한에서도 벗어난 제법의 실상을 나타낸다.
    공(空)과 같은 맥락의 개념이다. “법은 상을 여의었으니 대상으로 삼을 것이 없기 
    때문이며, 법은 이름이 없으니 언어가 끊어졌기 때문이다.”(『維摩經』「弟子品」 
    大14 p.540a7. 法離於相, 無所緣故, 法無名字, 言語斷故.);“거침없이 트였구나!
    태허의 텅 비고 아득한 공간을 본 듯 실오라기 하나 티끌 하나도 없도다. 끝없이
    드넓구나! 바다의 거대한 물결을 본 듯 언저리와 끝이 없도다. 말로 미치지
    못하고, 미묘하여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음을 깊이 알아야 하리라. 대사께 감사
    드리오니 우리들의 미혹과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우리에게 정법을 보이시고 
    점차적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보리에 이르도록 하셨다네.”(『曆代法寶記』 
   「大曆保唐寺和上傳頓悟大乘禪門門人寫眞讚文」 大51 p.196a6. 蕩蕩乎! 
    如覩太虛之寥廓, 無纖無埃. 洋洋乎! 若視滄溟之浩溔, 無際無涯. 深知道言不及, 
    微妙無名. 感荷大師, 愍我迷愚, 示我正法, 不由階漸, 直至菩提.)
34) citta. 마음 그 자체. 마음 작용의 근본이 되는 것으로 마음이 대상을 받아들여
    통합하는 기능을 왕에 비유한 것이다. 교학에서는 종파에 따라 6식이나 8식을
    심왕으로 본다. 반면 선종에서의 심왕은 법상체계 속의 심왕과는 거리가 멀며,
    마음이 깨달음의 능동적 근거이기 때문에 왕에 비유한 것이다. “심왕(心王)이 
    6적(賊)에게 부림을 당하면 오랜 겁의 세월 동안 벗어날 기약이 없다.”(『龐居士語錄』
    卍120 p.70a10. 心王被賊使, 劫劫無出期.);“근본을 깨닫고 마음을 알고, 마음을 
    알고 부처를 본다.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마음이며, 생각마다 부처의
    마음이요, 부처의 마음으로 부처를 생각한다. 빨리 성불하고자 하는가? 계를 
    지키는 마음 자체가 율이며, 이 청정한 율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부처이니 이 심왕을 제거하고 더 이상 별도의 부처는 없다.”(『善慧大師語錄』 권3
   「心王銘」 卍120 p.23b4. 了本識心, 識心見佛. 是心是佛, 是佛是心, 念念 佛心, 
    佛心念佛. 欲得早成? 戒心自律, 淨律淨心, 心卽是佛, 除此心王, 更無別佛.)
35) 현사사비(玄沙師備)의 말을 활용한 구절이다. “법좌에 올라앉아 제비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서 ‘실상을 깊이 이야기하고, 법의 요체를 잘 설하는구나’라고 한 뒤
    법좌에서 내려왔다.”(『玄沙廣錄』 권하 卍126 p.388a3. 上堂, 聞燕子叫云, ‘深
    談實相, 善說法要.’ 便下座.)
36) 다음과 같은 깨달음의 인연을 말한다. “어느 날 절 밖으로 나섰는데 상여를 들고 
    가는 사람을 보았다. 장송곡을 선창하는 사람이 요령을 흔들며 ‘붉은 해는 서편
    으로 졌는데, 이 혼령은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네’라고 흥얼거리자, 상여 
    천막 아래에서 상주가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하는 소리를 듣고 보적이 홀연 
    뛸 듯이 기뻐하며 마조(馬祖)에게 돌아와 그 사정을 들려주니 마조가 인가해 
    주었다.”(『五燈會元』권3「盤山寶積章」卍138 p.99b3. 一日出門, 見人舁喪.
    謌郎振鈴云, ‘紅輪決定沉西去, 未委魂靈往那方.’ 幕下孝子哭曰, ‘哀哀.’ 師忽身心
    踴躍, 歸擧似馬祖, 祖印可之.)
37) “법좌에 올라 ‘보수가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두 사람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았는데, 그중 한 사람이 주먹으로 한 대 때리면서 「너는 이다지도 면목이 
    없느냐!」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는 이야기를 들고서 말했다. 만일 
    이 이야기에서 귀착되는 뜻을 알아차린 사람이라면 참으로 공적으로나 사적
    으로나 모두 판별하였다고 할 만하다. 대중들이여! 나의 게송 한 수를 들어 
    보라. ‘대단히 묘하고 대단히 묘하도다! 여기서 성명(性命)을 알아차리다니. 
    코를 한 대 쥐어 박은 바로 그 순간 바른 이치를 깨달았도다.’”(『法演語錄』 
    상 大47 p.652c7. 上堂擧, ‘寶壽作街坊時, 見兩人相諍. 一人以手打一拳云,
   「儞得恁無面目!」 寶壽因而得入.’若人於此知落處, 可謂公辦私辦. 大衆, 聽取
   一頌, ‘甚妙也甚妙! 於此知性命. 擗鼻與一拳, 當時便打正.’)

 

[게송]

밝은 구슬을 손바닥에 놓고서 이리저리 마음대로 굴리는구나.38)
明珠在掌, 弄去弄來.
38) 마음에서 근본이 되는 활용의 수단을 성취하여 모든 상황에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한다는 뜻. “마치 맑고 깨끗한 거울이 받침대에 올려져 있거나 밝은 구슬이
    손바닥 안에 있어서 호인(胡人)이 오면 호인이 나타나고, 한인(漢人)이 오면 한
    인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碧巖錄』24則「評唱」大48 p.165a27. 如明鏡當臺, 
    明珠在掌, 胡來胡現, 漢來漢現.)

⊙ 언해본 주해


  '입에서 잃는다(말에 빠진다)'는 것은 이 법이 본래 명자상(名字相)에 대한 집착을 끊으며 언설상(言說相)에 얽매이지 않으며 심연상(心緣相)에 따르지 않는 것(이름이나 설명, 인식 등을 떠난 것)인데 만약 명자상과 언설상과 심연상을 가져 입으로 견주며(시비) 마음으로 헤아린다면(분별)세존 염화와 달마 면벽이 敎의 자취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모든 분별을 다 놓아 자신의 마음을 깨우치면 마을에 사는 일반 남녀가 모든 바른 법을 말하며, 네거리의 땔나무하는 아이와 소치는 늙은이가 모두 다 깊이 실상을 말하며, 꾀꼬리 울음소리와 제비 지저귀는 소리가 모두 천기를 누설하며, 소 울음과 닭 우는 소리가 모두 다 이 法을 말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어느 날 '보적선사'가 푸줏간에 간 적이 있는데, 고기를 사는 사람이 "좋은(정밀한) 부위를 한점 베어달라"고 하자 푸줏간 주인이 "저어, 손님. 어느 부위인들 좋지 않은 것이 있겠습니까"라고 함에 선사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으셨다. 또 한번은 '보수 화상'이 시장 가운데 앉아서 두 사람이 농담하는 것을 보고 계셨는데, 한 사람이 뺨을 치자 맞은 사람이 "너는 면목 없는 것이로다"라고 함에 화상이 이 말에 깨달으셨으니, 이런 것으로 볼 것 같으면 세간의 하찮고 자질구레한 말이 다 敎를 벗어난 禪의 참된 뜻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한갓 이 말만 믿고 간절히 *반조(返照)하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마침내 뜻을 얻지 못하는 골 빈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뜻을 얻었다해도 빈 머리의 허수아비가 됨을 면치 못한다)

7. 

나는 분별을 끊고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잊은 한마디 말을 간직하고 있다.39) 
올연히 일없이 앉아 있어도,40) 봄이 오면 풀은 절로 푸르리라.41)

吾有一言, 絶慮忘緣. 兀然無事坐, 春來草自靑.
39) 명찬(明瓚)화상이 제시한 공안. 명찬일언(明瓚一言)이라고 한다. “나는 분별을
    끊고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잊은 한마디 말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뛰어난 말솜
    씨로도 표현할 수 없으니, 다만 마음으로 전하고자 할 뿐이다.”(『圜悟語錄』권18
    大47 p.796c19. 吾有一言, 絕慮忘緣, 巧說不得, 只要心傳.) 명찬화상은 나찬(懶瓚)
    화상이라고도 불리는데, 대중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만 먹었다고 하여 나잔(懶殘)이
    라고도 하며, 난찬(嬾瓚)으로 명명된 곳도 보인다.
40) 무사좌(無事坐). 번뇌망상을 모두 그치고 본분사를 마쳤으므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사람의 경지를 묘사한 말이다. 나찬의 다음 게송에 이와 관련된 적절한 
    이야기가 나온다. 게으르게 먹기만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나찬의 법명에 
    어울리는 ‘무사’의 경지가 드러난다. “올연히 아무 일도 없고 바꿀 일도 없노라. 
    일이 없거늘 어찌 한 토막의 말이라도 하겠는가! 다만 마음에 산란함이 없으니 
    다른 일을 끊을 필요도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며, 미래에 대해서는 아직 
    헤아리지 마라. 올연히 일 없이 앉아 있거늘 어찌 부르는 사람인들 있겠는가! 마
    음 밖에서 찾으며 공부하는 것은 모두가 어리석고 둔한 사람의 짓이로다.”(『景
    德傳燈錄』권30「南嶽懶瓚和尙歌」大51 p.461b16. 兀然無事無改換. 無事何
    須論一段! 直心無散亂, 他事不須斷. 過去已過去, 未來猶莫算. 兀然無事坐, 何曾
    有人喚! 向外覓功夫, 總是癡頑漢.)
41) 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잊은 상태를 표현한 말. 대상 자체
    의 존재를 망각한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집착 없이 대상이 청정하게 그대로
    드러난 것을 말한다.『白雲語錄』권상 韓6 p.653b5 참조.

 

[평]

‘분별망상을 끊고 대상에 대한 집착을 잊었다’는 말은 마음에서 얻은 

것이니, 한가한 도인42)의 경지를 가리킨다. 아, 그 사람이여! 본래 집착할 

대상도 없고 본래 아무 일도 없으니,43)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44) 맑은 

물 푸른 산 따라 마음 가는 대로 거닐며, 어물전이나 주막에서도 아무 걸림 

없이 자재하여 편안히 쉬는구나. 세월 가는 것은 전혀 알지 못하지만 봄이 

오면 변함없이 풀빛은 완연히 푸르리라. 이상은 특별히 한 찰나에 지혜의 

빛을 돌이켜 비추어 보는45) 사람을 찬탄한 것이다.

絶慮忘緣者, 得之於心也, 所謂閑道人也. 於戱, 其爲人也! 本來無緣, 
本來無事;飢來卽食, 困來卽眠;綠水靑山, 任意逍遙;
漁村酒肆, 自在安閑. 年代甲子總不知, 春來依舊草自靑. 此別歎一念廻光者.
42) 한도인(閑道人). 그 무엇에도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살아가는 사람.
    본분사를 끝마치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어 자유롭게 노니는 사람. 백일무한인(白
    日無閑人) 또는 백일몰한인(白日沒閑人)이라고도 한다. “더 이상 배울 것이 없고 
    억지로 하는 일도 없는 한도인은 망상을 끊으려 애쓰지도 않고 진리를 얻고자 힘
    쓰지도 않는다.”(『證道歌』 大48 p.395c9. 絶學無爲閒道人, 不除妄想不求眞.)
43) 연(緣)은 법이 발생하거나 소멸하는 조건 또는 인식의 대상 등을 가리키는 말인데, 
    ‘본래무연’이란 법이 발생하거나 소멸하는 데 조건이 될 만한 것이 본래 없다는 말
    이다. ‘본래무사’는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쳐서 할 일이 없는 본래의 경지를 가리킨
    다. 또는 본래 있는 그대로의 상태에서 그 모든 것이 진리를 구현하고 있으므로 
    억지로 추구하거나 조작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44) 기래즉식곤래즉면(飢來卽食 困來卽眠). ‘飢來卽食’은 ‘기래끽반(饑來喫飯)’으로도 
    쓴다. 무사(無事)를 표현한 대표적인 말이다. 임제(臨濟)선사의 곤래즉와(困來卽臥)
    도 같은 맥락이다. 세간의 일상생활을 떠나 별도로 추구할 일이 없는 경지를 나타
    낸다. “똥오줌을 누고 옷을 입고 밥을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다.”(『臨濟錄』大47 
    p.498a17. 屙屎送尿, 著衣喫飯, 困來卽臥.);“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
    (『碧巖錄』74則 大48 p.202a9. 飢卽喫飯, 困卽打眠.)
45) 회광반조(廻光返照). 자신에게 내재한 지혜의 빛을 대상세계로부터 거두어들여
    자기 자신 내부를 돌이켜 비추는 것. “만약 한 찰나에 돌이켜 비추어 본다면 전
    체가 모두 성인의 마음일 것이다. 그대들은 각자 자신의 마음에 통달할 일이며, 
    내가 한 말을 기억에 담아두지 마라. 설령 모래알처럼 무수한 도리를 말한다 해
    도 그 마음은 증가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마음이 감
    소하지도 않을 것이다. 말하는 것도 그대의 마음이며, 말하지 않는 그것도 그대
    의 마음이다.”(『馬祖語錄』 卍119 p.811b16. 若能一念返照, 全體聖心. 汝等諸人, 
    各達自心, 莫記吾語. 縱饒說得河沙道理, 其心亦不增, 縱說不得, 其心亦不減. 說得
    亦是汝心, 說不得亦是汝心.);“그대들이 말을 듣자마자 지혜의 빛을 돌이켜 비추
    어 보고 다시는 다른 것에서 구하지 않아 자신의 몸과 마음이 부처님이나 조사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 자리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져야 비로소 법을 얻
    었다고 할 수 있다. 대덕들이여! 산승이 지금 어쩔 도리가 없어서 이야기를 건네
    어 쓸모도 없고 낡아버린 무수히 많은 말을 꺼낸 것이지만 그대들은 착각하지
    마라. 내가 보는 견지에 따르면 진실로 무수히 많은 도리는 없으니, 쓸 만하면   
    곧바로 쓰고 쓸모가 없으면 곧바로 버릴 뿐이다.”(『臨濟語錄』大47 p.502a12. 
    儞言下, 便自回光返照, 更不別求, 知身心與祖佛不別, 當下無事, 方名得法. 大德! 
    山僧今時, 事不獲已, 話度說出, 許多不才淨, 爾且莫錯. 據我見處, 寔無許多般道理, 
    要用便用, 不用便休.);“돌이켜 비추어 보면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주변에서 그때
    마다 헤아리며 ‘이것은 무엇일까?’라고 살펴보십시오. 이리저리 꾸준히 헤아리다
    가 헤아림이 의지할 근거가 전혀 없는 곳에 이르면 평상시의 기지와 기량이 깨끗
    하게 모두 사라져 갑자기 한 찰나에 문득 녹아버리고 마음의 꽃이 발현하면 헤아릴 
    수 없는 겁의 세월 동안 쌓였던 일들이 모두 현재의 자기 주변에 있게 될 것입니다.”
    (『密菴語錄』「答卜運屬」大47 p.981c1. 回光返照, 向己躬脚跟下, 時時推勘, 
    看是什麽. 推來推去, 推到無依倚處, 平生機智, 伎倆淨盡, 驀然一念頓消, 心花發現, 
    塵劫來事, 盡在于今.)

 

[게송]

아무도 없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한 사람 있구나.

將謂無人, 賴有一箇.

⊙ 언해본 주해


  올연(兀然)은 무심한 모양이다. 이런 사람은 마음에 자득(自得)하여 무생경계(無生境界)의 경계에서 배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니, 일없는 한가한 도인의 참다운 즐거움이라 말한 것이다.
  연려심(緣慮心: 바깥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마음)이 나면 없애는 것이 아니며 일이 있으면 없게 하는 것이 아니다. 본래 인연이 없으며 본래 일이 없어 녹수청산과 송풍라월(松風蘿月: 솔바람 불고 칡덩굴에 걸린 듯한 달이 보이는 그런 곳)에 마음대로 노닐며 자맥홍진(紫陌紅塵: 번잡한 장안의 거리)에서나 어촌 술집에서나 편안하고 한가롭고 거리낌이 없어 세월을 오가는 줄 모르지만, 봄이 오니 풀이 절로 푸르도다. 

 

선가귀감 § (언해본 011∼014)  언해본 011) ◁ 언해본에만 있음 ▷
○ 한문 본문


離心求佛者는 外道요 執心爲佛者는 爲魔라 大抵忘機는 是佛道요 分別은 是魔境이라 又分別을
이심구불자    외도    집심위불자    위마    대저망기    시불도    분별    시마경       우분별 
不生하면 虛名이 自照이리라.
불생       허명    자조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찾는 사람은 外道요 마음에 집착하여 부처를 삼는 사람은 마군이다. 무릇 기틀을 잊는 것이 佛道요, 분별은 마군의 경계이다. (마음에)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면 텅 빈 광명이 스스로 비출 것이다.   

 

⊙ 언문 주해


  인연 따라 생긴 萬法이 거짓 이름이다. 실(實)이 없거늘 중생이 미혹하여 이름과 相에 집착하는구나. 텅 비고 밝은 자신의 성품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아가고 물러남(거취, 기거동작)을 어기는지라 외도와 사악한 마군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기(機)는 능소(能所: 주관과 객관)의 마음이 이는 곳이다.

 


(언해본 012) ◁ 언해본에만 있음 ▷
○ 한문 본문


若不秘重得意一念하고 別求見性神通則豈有休歇時리오 一念者는 一法也니 所謂衆生心也라
약불비중득의일념       별구견성신통즉기유휴헐시       일념자    일법야    소위중생심야

 

《한자》則(곧 즉. 법칙 칙) 豈(어찌 기) 歇(쉴 헐) 者(것 자. 사람)

 

  만약 깨친 한 생각을 특히 중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따로 견성이니 신통을 구한다면 어느 때나 쉴 날이 있으리오. 한 생각이라는 것은 한 법(일진법계)이니 이른바 중생심이다.

 

⊙ 언문 주해


  이는 안팎으로 악착같이 구하는 병이니, 역시 마군과 외도의 두 구덩이다. 바로 한 생각도 내지 않고 앞뒤(과거와 미래)가 다 끊어지면 *삼세육추가 다 그쳐 돌이켜 비추어 본체(本體)가 홀로 환히 드러나 우뚝하리니 곧 참 부처의 자리이니라.
-------------
*삼세육추(三細六麤) : 기신론에서 근본무명에 의해 진여(眞如)가 움직이고 모든 생멸유전의 망법(妄

    法)을 나타내는 상태.

   윤회의 과정을 '기신론'은 깨닫지 못하는 불각(不覺)이라고 부르며, 마음이 움직여 타락되어 가는

   과정을 생멸문(生滅門)이라고 한다. 생멸의 상(相)인 삼세육추는 사람의 생각이 타락의 길을 가는

   유전(流轉)의 과정을 인과관계로 설명한 것인데, 중생에게 홀연히 무명(無明)이 생겨 이 영향으로

   업을 지어 과보를 받는 과정을 아홉 가지 모습으로 나누어 놓은 것이다.

   가) 삼세(三細) : 心王(마음 자체), 心所(마음의 속성, 심리, 정신상태)의 구분이 없고 작용하는 모습

        도 미세하여 분명치 않은 세 가지.
    ① 무명 업상(無明業相) : 사람의 마음이 날 때부터 이어받은 밝지 못한 맹목적인 의지의 힘(업보)

      으로서 생멸의 근본원인
    ② 능견상(能見相) ' 생멸의 근본 원인, 즉 無明때문에 나타나는 주관
    ③경계상(境界相) . 주관과 동시에 나타나는 객관
    
   나) 육추(六麤) : 心王과 心所가 상응하여 그 미치는 모습이 뚜렷한 여섯 가지. 
    ① 지상(智相) : 객관적인 대상인 경계(境界)에 대한 가지가지 분별(分別)이 생기는 모습
    ② 상속상(相續相) : 분별하는 마음이 지속되어짐
    ③ 집취상(執取相) : 좋고 나쁨에 대한 주관적인 가치판단 단계
    ④ 계명자상(計名字相) : 허황된 망상을 개념화시켜 실제 있는 양 착각하는 잘못된 마음가짐의 모

      습
    ⑤ 기업상(起業相) : 악을 행동으로 옮기는 단계
    ⑥ 업계고상(業繫苦相) : 악의 행위로 말미암아 고통이 따르는 판국에 빠짐 
-------------

 


(언해본 013) ◁ 언해본에만 있음 ▷

○ 한문 본문


淨名이 云 我의 本性이 元自淸淨하니 卽時豁然하면 還得本心이라 하시며 又一悟에 卽至佛地라
정명    운 아    본성    원자청정       즉시활연       환득본심                 우일오    즉지불지
하시니라.

 

《한자》淨名(정명: 유마 거사) 豁然(활연: 걸림 없이 통하다) 卽(이제 곧 즉) 至(이를 지)

 

  '유마 거사'께서 "내 본성이 본래 스스로 깨끗하니 곧바로 활짝 열리면 도로 본심을 얻으리라"고 하시고, 또 "한번 깨달음에 곧바로 부처의 세계에 이르리라"고 하셨다. 

 

⊙ 언문 주해


  이는 본성이 청정함을 이르신 것이다.

 

 

(언해본 014) ◁ 언해본에만 있음 ▷
○ 한문 본문


祖師가 云 性自淸淨하니 起心着淨하면 却生淨妄하리라 妄無處所하여 着者가 是妄이니 若不生心
조사    운 성자청정       기심착정       각생정망          망무처소       착자    시망       약불생심
動念하면 自然無妄이라 하시니라
동념       자연무망

 

《한자》却(도리어 각. 물리칠)

 

  조사께서 이르시길 "自性이 스스로 청정한데, 마음을 일으켜 맑음에 집착하면 도리어 맑음의 망심이 일어날 것이다. 망심이란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어 집착하는 것이 곧 망심이니, 만약 마음을 내어 생각을 움직이지 아니하면 자연히 망심이 없으리라"고 하셨다. 

 

⊙ 언문 주해


  이는 미혹된 성품(망성妄性)은 본래 空한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선교(禪敎)의 동이점(同異點)

 

8. 

교문에서는 오로지 일심의 법만 전하고,46) 

선문에서는 오로지 견성의 법만 전한다.47)
敎門, 惟傳一心法;禪門, 惟傳見性法.
46) ‘오로지 한마음의 법을 전한다(惟傳一心法)’는 말은 황벽희운(黃蘗希運)의 말인데,
    선과 교가 다른 것이 아님을 주장하기 위해 교문(敎門)과 이 말을 연결시켰다. 
    “마음 그대로 부처이니,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꿈틀거리는
    벌레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는 동일한 마음의 본체이다.
    그러므로 달마가 인도로부터 와서 오로지 일심법을 전하여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도리를 곧바로 가리킨 것이다. 별다른 수행이 필요하지 않고 다만 
    지금과 같이 자기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자기의 본성을 보면 될 뿐이니, 더 이상 
    별도로 구하지 말라.”(『宛陵錄』 大14 p.386b2. 卽心是佛, 上至諸佛, 下至蠢動
    含靈, 皆有佛性, 同一心體. 所以, 達摩從西天來, 唯傳一心法, 直指一切衆生, 本來
    是佛. 不假修行, 但如今識取自心, 見自本性, 更莫別求.)
47) “말로도 통하고 마음으로도 통하니, 해가 허공에 떠 있는 것과 같다. 오로지 
    견성의 법을 전하니, 세상에 나가 삿된 종지를 무너뜨린다.”(宗寶本 『壇經』 
    大48 p.351b14. 說通及心通, 如日處虛空. 唯傳見性法, 出世破邪宗

[평1]

마음은 거울의 바탕과 같고 본성은 거울의 빛과 같다. 자성이 본래 청정하니 

곧바로 활연히 깨닫게 되는 바로 그 순간, 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본분의 뜻을 얻으려는 한 생각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긴 말이다.
心如鏡之體, 性如鏡之光. 性自淸淨, 卽時豁然, 還得本心. 此秘重得意一念.

[게송]
겹겹이 둘러싼 산과 물이여, 맑고 깨끗한 것이 예전 그대로의 가풍이로다!48)
重重山與水, 淸白舊家風!
48) 뒤의 구절은 굉지정각(宏智正覺)의 말이다.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공겁(空
    劫)에 진실한 종지가 있으니, 말로 드러나기 이전에 자기 자신에게 물어라. 가진
    것 하나 없이 궁핍하여 새롭게 살길을 찾으니, 맑고 깨끗한 것이 예전 그대로의 
    가풍이로다. 분명히 드러났으나 3승을 벗어났고, 텅 빈 하나의 인(印:心印) 안
    이다. 다시 이류(異類)로 태어나 살아가니, 온갖 물결이 저절로 동해로 모이는 
    격이다.’”(『宏智廣錄』권1 大48 p.12b7. 上堂云, ‘空劫有眞宗, 聲前問己躬. 
    赤窮新活計, 淸白舊家風. 的的三椉外, 寥寥一印中. 却來行異類, 萬派自朝東.’)

 

[평2]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본원의 마음이요, 다른 하나는 무명으로 

상(相)에 집착하는 마음49)이다. 성(性)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본래 

법의 성이요, 다른 하나는 성과 상이 상대를 이루는 성이다.50) 그러므로 

선법을 닦는 이나 교법을 배우는 이들이 똑같이 미혹하여 이름을 고수하고 

이해를 일으키며 혹은 얕은 것을 깊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깊은 것을 얕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실상을 관하는 수행[觀行]51)에 큰 병통이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그 병을 가려낸 것이다.

評曰 心有二種. 一, 本源心;二, 無明取相心也. 性有二種. 一, 
本法性;二, 性相相對性也. 故禪敎者, 同迷守名生解, 或以淺
爲深, 或以深爲淺, 遂爲觀行大病. 故於此辨之.
49) 무명취상심(無明取相心). “수선사가 『화엄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말하였다. 
    ‘삼계에 별다른 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심이 일으키는 것일 뿐이니, 지
    금 일심이 무명으로 상을 취하여 일으켰다는 말을 가리킨다. 이것(無明取相心)
    이 삼계에서 생사 윤회하는 병통의 근본이다. 만약 무명이 본래 일어나지 않음을 
    안다면 집착하는 마음도 사라질 것이므로 새로운 생사를 만들지 않게 되리니, 
    이것이 병통의 근본을 끊는 것이다.’”(『法集別行錄節要』 韓4 p.761a5. 壽禪師, 
    引華嚴經云, ‘三界無別法, 唯是一心作, 今謂唯是一念無明取相心作也. 此卽三界生
    死之病本也. 若知無明不起, 取有畢故, 不造新, 卽是斷病本.’)
50) “위의 세 가지 교(敎)는 모든 부처님들이 한평생 설한 경전과 모든 보살이 지은
    논서를 빠짐없이 아우른 것이다. 상세한 그 법의(法義)는 세 가지 의미로 전혀 
    다르기는 하나 일법(一法)으로서는 차별이 없음을 드러내고 있다. 세 가지 의미로
    보자면, 첫 번째와 두 번째는 공(空)과 유(有)로 상대를 이루고, 세 번째와 첫 번째는 
    성과 상으로 상대를 이루니, 모두 뚜렷하여 알기 쉽다. 오로지 두 번째와 세번째가 
    파상(破相)과 현성(顯性)으로 상대를 이루니, 강론하는 자와 선을 수행하는 자가 
    똑같이 미혹하여 모두 하나의 종(宗)이며 하나의 교(敎)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 
    모두가 파상을 곧 진성(眞性)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都序』 권하大48 p.406a7. 
    上之三敎, 攝盡佛一代所說之經, 及諸菩薩所造之論. 細尋法義, 便見三義全殊, 一法無別. 
    就三義中, 第一第二, 空有相對, 第三第一, 性相相對 皆條然易見. 唯第二第三, 
    破相與顯性相對, 講者禪者同迷, 皆謂同是一宗一敎, 皆以破相, 便爲眞性.)
51) 신수심법(身受心法)의 네 가지를 관찰하는 사념처관(四念處觀)을 비롯하여 모든 
    대상을 무상으로 관하는 무상관 등 다양한 관행이 있다. “관행이란 말에서 ‘관’은 
    공간적 범위로 말한 것으로서 경계와 지혜에 모두 통한다는 뜻이고, ‘행’은 시간적 
    길이로 바라본 것으로서 원인과 결과에 두루 이어져 있다는 뜻이다.”(『金剛三昧經論』 
    권상 大34 p.961a24. 言觀行者, 觀是橫論, 通於境智, 行是竪望, 亘其因果.)

 

9. 

여러부처님께서는 경을 설하실 때 먼저 모든 법을 분별하신 다음에

필경공52)을 설하셨으나, 조사들께서 들어 보이신 구절에는 교설의 

자취가 생각에서 끊어지면 도리가 마음의 근원에서 드러난다.53)
然, 諸佛說經, 先分別諸法, 後說畢竟空, 祖師示句, 迹絶於
意地, 理顯於心源.
52) 畢竟空 atyamta-śūnyatā. 궁극적인 공. 18공의 하나. 모든 법은 본래부터 실체로 
    존재하지 않아서 궁극적으로 공이라는 뜻이다. “이 미혹에는 본성이 없어 필경공
    이다. 본래부터 미혹된 적이 없었으니 미혹과 깨달음이라는 차별이 있는 듯이 
    보일 뿐이다. 미혹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면 미혹이 사라지니, 알아차리는 그 
    자체로 미혹이 일어나지 않는다.”(『楞嚴經』 권4 大19 p.120b27. 此迷無本性, 
    畢竟空. 昔本無迷, 似有迷覺, 覺迷迷滅, 覺不生迷.);“필경공이란 무엇인가? 
    유위공과 무위공으로 모든 것을 남김없이 무너뜨리는 것을 가리켜 필경공이라 
    한다.”(『大智度論』 권31 大25 p.289b26. 畢竟空者, 以有爲空, 無爲空, 破諸法, 
    令無有遺餘, 是名畢竟空.)
53) “종사는 법에 근거하고 말을 떠나니, 자취가 없는 말을 가지고서 사람들로 하여금 
    집착을 깨뜨려 종지를 드러내보이게 한다. 이것을 가리켜 ‘생각에서 자취가 끊어지면    
    마음의 근원에서 이치가 드러난다’라고 하는 것이다.”(『法集別行錄節要』 韓4
    p.748a9. 宗師據法離言, 以無迹之言, 令人破執現宗. 是謂迹絶於意地, 理現於心源矣.”)

 

[평]

부처님의 교설은 만대가 지나도 누구나 의지하는 근거가 되기에 그 치를 

자세히 들어 보일 수밖에 없고, 조사의 가르침은 곧바로 생사윤회와 

번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있으므로 마음을 근본 도리에 깊이 통하도록 

한 것이다.54) 자취란 조사의 말 자취요, 뜻이란 배우는 이들의 생각이다.

諸佛, 爲萬代依憑故, 理須委示;祖師, 在卽時度脫故, 意使玄
通. 迹, 祖師迹也;意, 學者意地也.
54) 『都序』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보인다.『都序』권상 大48 p.400a2 참조.

 

[게송]

함부로 해설을 달지만55) 팔은 밖으로 굽지 않는 법이라네.56)
胡亂指注, 臂不外曲.
55) 호란지주(胡亂指注). 호란은 임의대로, 함부로, 아무렇게나 등의 뜻이고, 지주는
    하나하나를 낱낱이 가리켜 지적하고 해설을 단다는 뜻이다.
56) 비불외곡(臂不外曲). 비박불향외곡(臂膊不向外曲)·수비종불향외곡(手臂終不向
    外曲) 등으로도 쓰인다. 무리하게 선과 교로 나누어 분별하지만 나누어지는 것
    이 아니라는 말이다.

 

10. 

모든 부처님께서는 활등처럼 설하셨고 조사들은 활시위처럼 설하셨다. 

부처님께서는 걸림 없는 법을 설하시어 한가지 맛57)으로 귀결시키지만, 

이 한가지 맛의 자취조차 떨쳐버려야 비로소 조사들이 제시한 일심이 

드러나게 된다.58) 그러므로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子]59) 같은 화두는 

용궁의 대장경60)에는 있지 않다.

諸佛說弓, 祖師說絃. 佛說無礙之法, 方歸一味, 拂此一味
之迹, 方現祖師所示一心. 故云, 庭前栢樹子話, 龍藏所未
有底.
57) 일미(一味). 다른 맛이 섞이지 않은 하나의 맛이란 뜻에서 동등·평등·무차
    등을 뜻하기도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대상의 근기에 따라 다르지만 그 근본 
    이치는 같다는 말이다.
58) 고려 때 천책(天頙)이 지은『禪門寶藏錄』의 다음 글에서 인용한 말이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활등처럼 설하셨고 조사들은 활시위처럼 설하셨다. 활시위처럼
    설하였다는 말은 선문에서 현묘한 길을 바르게 전하면서 언설을 빌리지 않고
    근본이 되는 마음의 본체를 곧바로 가리켜 보이는 양상이 활시위가 곧은 것과
    같다는 뜻이다. 교문의 경우에 일승은 곧은 길이고 삼승은 굽은 길이므로 근본
    이 되는 마음의 본체를 곧바로 들어서 마음에 보여준 것과 같지 않다. 왜 그러한
    가? 일승교에서 설한 것은 일마다 걸림이 없어 법계의 모든 존재가 원만하게 융
    합되어 있다는 뜻이다. 일마다 걸림 없는 이 법계는 한가지 맛의 법계로 귀결되
    고, 이 한가지 맛의 법계가 남긴 흔적조차 떨쳐버려야 비로소 조사들이 제시한 
    일심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교설은 곧지 않음을 알 수 있다.”(『禪門寶
    藏錄』권상「禪敎對辨門」 卍113 p.987a14. 諸佛說弓, 祖師說絃. 說絃者, 禪門正
    傳玄路, 不借言說, 直示宗本心體, 如弓之絃. 若敎門, 則一乘是直路, 三乘是曲路, 
    不如直擧宗本心體, 示於心念之中. 何故? 一乘敎中所說者, 事事無礙, 法界圓融, 
    此事事無礙法界, 方歸一味法界, 拂此一味法界之跡, 方現祖師所示一心. 故知諸
    敎不直.)
59) 조주종심(趙州從諗)이 제기한 화두. “그때 어떤 학인이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
    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화상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지시하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지시한 것이 아니다.’ ‘달마대사가 서
    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趙州語錄』古尊宿語錄13 
    118 p.307a17. 時, 有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學云, 
    ‘和尙莫將境示人.’ 師云, ‘我不將境示人.’ 云,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60) 장(龍藏). 대승경전을 가리킨다. 고사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에 
    대승경전을 용궁에 간직해 두었다고 한다. “학인이 물었다. ‘묘하고 뛰어난 
    경계란 어떤 것입니까?’ ‘대장경을 열어 보았을 때 패엽에 적힌 구절 그대로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景德傳燈錄』권23「妙勝臻傳」大51 p.390c11. 
    僧問, ‘如何是妙勝境?’ 師曰, ‘龍藏開時, 貝葉分明.’)

 

[평]

활등처럼 말씀하셨다는 것은 상세한 방편으로 설하였다는 뜻이고 활시위처럼 

말씀하셨다는 것은 곧바로 핵심을 가리켰다는 뜻이다. 용장이란 용궁에 간직해 

두었다는 장경을 말한다. 어떤 학인이 조주에게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뜰 앞의 잣나무니라’라고 답한 이 문답은 격을 

벗어난 선지(禪旨)를 말한다.

說弓, 曲也;說絃, 直也. 龍藏, 龍宮之藏經也. 僧問趙州,‘如
何是, 祖師西來意?’ 州答云,‘ 庭前栢樹子.’ 此所謂格外禪
旨也.

 
[게송]

물고기 헤엄치니 물 흐려지고, 새 나니 깃털 떨어지네.61)
魚行水濁, 鳥飛毛落.
61) 원오극근(圜悟克勤)이 자주 썼던 말. 여기서는 조주와 학인의 ‘정전백수자’ 문답이 
    격을 벗어난 선의 종지를 드러낸 말이기는 하나, 이 역시도 한낱 자취[迹]를 남긴 
    것에 불과하다고 서산 스스로 자신의 안목을 드러낸 말이다. “학인이 향림에게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어떤 것입니까?’〈사람들이 의심하고 있
    구나. 아직도 이 같은 이야기가 남아 있단 말인가!〉 ‘오래 앉아 있었더니 피로
    하다.’〈물고기 헤엄치니 물 흐려지고, 새 나니 깃털 떨어지네. 개 주둥이 다물라. 
    작가의 안목은 탁월하구나. 톱으로 저울추를 자른다.〉”(『碧巖錄』 17則 大48 
    p.157a19. 僧問香林, ‘如何是, 祖師西來意?’〈大有人疑著. 猶有這箇消息在!〉 
    林云, ‘坐久成勞.’〈魚行水濁, 鳥飛落毛. 合取狗口好. 作家眼目. 鋸解稱鎚.〉)

11. 

그러므로 배우는 이는 먼저 진실 그대로를 말로 드러낸 가르침에 따라

불변(변하지 않음)과 수연(인연을 따름)62)의 두 가지 뜻이 자기 마음의 

(性)과 상(相)이요, 돈오와 점수라는 두 문은 자기 수행의 처음과 끝임을

세밀하게 판별해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 교의(敎義)에 대한 집착을 놓아

버리고 단지 자기 마음에 드러난 화두일념을 가지고 선지를 참구한다면

반드시 소득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얽매인 몸에서 벗어나 살아나는 

길이다.63)
故學者, 先以如實言敎, 委辨不變隨緣二義, 是自心之性相;
頓悟漸修兩門, 是自行之始終. 然後, 放下敎義, 但將自心
現前一念, 參詳禪旨, 則必有所得, 所謂出身活路.
62) 주석16) 참조.
63)『禪要』卍122 p.709a11 참조.

 

[평]

상근기로서 큰 지혜를 가진 이는 이 같은 한계에 머물지 않으나 중하의 

근기로서는 이 단계를 함부로 뛰어넘을 수 없다. 교의는 불변과 수연 또는 

돈오와 점수 등에 선후가 있지만, 선법은 화두라는 한 생각 가운데 불변과 

수연, 성과 상, 체와 용 등의 두 가지 대대가 원래부터 한꺼번에 있어서64) 

두 가지가 같다는 생각도 떠나고 같지 않다는 생각도 떠나며 같다는 생각이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65) 그러므로 종사들은 법에 근거하되 말에서는 

벗어나 곧바로 한 생각을 가리켜 보이고 제 자신의 본래 성품을 깨달아 

성불하게 할 뿐이다. ‘교의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린다’라고 한 말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上根大智, 不在此限, 中下根者, 不可獵等也. 敎義者, 不變隨緣, 頓悟漸修, 有先有後;
禪法者, 一念中, 不變隨緣, 性相體用, 元是一時, 離卽離非, 是卽非卽. 故宗師, 據法離言, 
直指一念, 見性成佛耳. 放下敎義者以此.
64) 화두 하나에 선법과 교학의 모든 도리가 들어 있다는 뜻이다. 혜심(慧諶)의 다음 
    말에 그 전형이 보인다. “이것 말고 화두를 살피는 ‘간화’라는 하나의 문이 있으니 
    이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지·관과 정·혜가 자연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眞覺語錄』「孫侍郞求語」韓6 p.40a11. 此外有看話一門, 最爲徑截, 止觀定慧,
    自然在其中.)
65) 불변과 수연 등의 대대적인 짝에 대하여 모든 사유의 길을 차단하는 방식. 화두의 
    관문을 설정하는 법에 따른다. 『楞嚴經』의 다음 구절을 활용한 것이다. “이렇게 
    모두 세간과 출세간이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래장의 묘하게 밝은 마음의 근원은 
    세간과 출세간이 같다는 것도 떠나고 같지 않다는 것도 떠나서 같다는 것이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 세간과 삼계의 중생과 출세간의 성문과 연각이 어떻게 
    분별로 가득 찬 마음으로써 여래가 이룬 최상의 보리를 헤아릴 것이며, 세간의 
    언어로써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楞嚴經』권4 大19 p.121a24. 
    以是卽俱世出世故, 卽如來藏, 妙明心元, 離卽離非, 是卽非卽, 如何世間三有衆生, 
    及出世間聲聞緣覺, 以所知心, 測度如來無上菩提, 用世語言, 入佛知見.)

 

[게송]

밝고 뚜렷할 때는 구름이 깊은 계곡을 덮어 가리고, 깊고 은밀한 곳에는 

해가 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비추네.66)
明歷歷時, 雲藏深谷, 深密密處, 日照晴空.
66) 밝을 때는 덮어 가려 어둡게 하고 어두울 때는 빛을 비춰 밝게 만들어서 밝음과
    어두움 그 어느 한편에 고착되어 집착하지 않는 활발한 선기(禪機)를 드러내 
    보인 말이다.

 
화두 참구와 그 요소

 

12. 

배우는 자라면 모름지기 활구를 참구할 것이요, 사구를 참구하지 마라.67)
大抵學者, 須參活句, 莫參死句
67)『圜悟語錄』권11 大47 p.765b13,『大慧語錄』 권14 大47 p.870b4 등에서 인용한
    구절. 동일한 화두에 대해 바르게 의심하면 활구이고,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해서
    물들어버리면 사구이다. 이처럼 활구나 사구로 정해진 말이 각각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말이지만 이를 참구하는 방법이나 태도에 따라 활구도 되고 사구도 
    되는 것이다.『精選 선어록』진각어록 주석284) 참조.

[평1]

활구로 알아차리면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지만, 사구로 

아차리면 제 자신조차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68) 이하는 특별히 활구를 
제기하여 스스로 깨달음에 들어가게 하는 내용이다.
活句下薦得, 堪與佛祖爲師, 死句下薦得, 自救不了. 此下特擧
活句, 使自悟入.
68) “활구를 참구해야지 사구를 참구해서는 안 된다. 활구로 알아차리면 영원토록
    잊히지 않는 사람이 되겠지만 사구로 알아차리면 제 자신조차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大慧語錄』 권14 大47 p.870b4. 須參活句, 莫參死句. 活句下薦得, 
    永劫不忘, 死句下薦得, 自救不了.)『看話決疑論』 韓4 p.737a8.

 

[게송]

임제의 의중을 알고자 하는가? 의지가 굳센 자69)라야 하리라.
要見臨濟? 須是鐵漢.
69) 철한(鐵漢). 이러저러한 이론이나 말에 흔들리거나 속박되지 않는 강철과 같이
    의지가 굳센 사람. 격을 벗어난 사람. 언구에 매몰되어 그대로 따라가지 않는 
    사람 또는 의심이 살아 있는 사람을 말한다.

 

[평2]

화두에는 구절과 뜻이라는 두 가지 문이 있다. 구절을 궁구한다[參句]는 

것은 경절문70)의 활구를 가리키니, 마음으로 헤아릴 길도 전혀 없고 말을 

따라 좇아갈 길도 없어서 모색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뜻을 궁구한다는 

것[參意]은 원돈문71)의 사구를 가리키니, 이치로 통할 길도 있고 말을 

따라 좇아갈 길도 있어 듣고 이해하고 생각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評曰 話頭, 有句意二門. 參句者, 徑截門活句也, 沒心路, 沒語
路, 無摸故也. 參意者, 圓頓門死句也, 有理路, 有語路, 有
聞解想故也.
70) 徑截門. 무수한 우회의 방편을 다 끊어버리고 근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간명
    하며 적절한 방법. 화두를 공부하는 간화(看話)의 방법을 가리킨다. ‘경절’은 
    직절(直截)·첩경(捷徑) 등과 같은 뜻이다. ‘경절’이라는 말은『碧巖錄』,『書狀』 
    등에서 간화선을 묘사하는 말로 나오기는 하지만, 이를 간화선과 직접 연결시켜 
    사용한 것은 지눌(知訥)이 처음이다. “경절문의 맛없는 말(화두)을 듣자마자 지
    해(知解)라는 병에 걸리지 않고 바로 귀착점을 알게 되니, 이것을 일러 하나를 
    듣고 천 가지를 깨달아 대총지(大摠持)를 얻는 사람이라 한다.”(『看話決疑論』
    韓4 p.733a20. 纔聞徑截門無味之談, 不滯知解之病, 便知落處, 是謂一聞千悟, 
    得大摠持者也.);“이 외에 화두를 살피는 ‘간화’라는 하나의 문이 있으니 이것
     가장 빠른 길입니다. 지관과 정혜는 화두 하나만 들면 자연히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眞覺語錄』「孫侍郞求語」韓6 p.40a11. 此外有看話一門, 
    爲徑截, 止觀定慧, 自然在其中.)
71) 圓頓門. 교학상 최고의 이치에 해당한다. 주로 사사무애(事事無礙)를 근본 도리로 
    삼는화엄종의 원돈일승(圓頓一乘)을 말한다. 교판론으로 보자면, 원교(圓敎)와 
    돈교(頓敎)에 해당한다. 『圓頓成佛論』 韓4 p.730a14 참조.

 

13. 

자신이 본래 참구하던 공안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공부하되 마치 닭이 알을 

품듯이,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72) 배고플 때 먹을 것을 떠올리듯이,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듯이,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듯이 하면 반드시 

꿰뚫을 날이 있으리라.

凡本參公案上, 切心做工夫, 如雞抱卵, 如猫捕鼠, 如飢思
食, 如渴思水, 如兒憶母, 必有透徹之期.
72) 닭과 고양이의 비유는 화두를 항상 뚜렷하게 의식하고 잠시도 의식에서 끊어
    지면 안 된다는 공부의 요령을 나타낸다. “다만 오로지 이 무자만 들고서 하루 
    모든 시각 중의 어떤 행위 반경에서도 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 마치 고양
    이가 쥐를 잡거나 닭이 알을 품듯이 해야 하며, 때로는 끊어지고 때로는 이어
    지는 방식이 되지 말도록 하라.”(『誡初心學人文』「皚山正凝禪師示蒙山法語」
    大48 p.1005a9. 只單單提箇無字, 於十二時中四威儀內, 須要惺惺, 如猫捕鼠, 
    如鷄抱卵, 無令斷續.);“비유하자면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마음과 눈을 
    주시하는 대상에 통일시키는 것과 같이 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소홀하면 쥐를 
    놓치기 때문이다. 또한 마치 닭이 계란을 품을 때 따뜻한 기운이 이어지는 것
    을 중시하는 것과 같이 해야 하니, 버리고 떠나면 병아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
    다.”(『天目明本雜錄』 「示徒」 卍122 p.724b4. 喩如猫捕鼠, 心目一於注盹, 
    少怠則失鼠矣;如鷄抱卵, 暖氣貴於相接, 弃之則不成種子矣.);“하루 모든 시
    각 중의 어떤 행위 반경에서도 다만 화두를 생명의 뿌리로 삼아 항상 또렷하게 
    의식하며 어느 순간에나 살피면서 화두를 꼭 붙들고 놓치지 않는 상태로 눈앞
    에 붙이고 있어야 한다. 마치 닭이 알을 품을 때 따뜻한 기운이 이어지게 하는 
    듯이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몸과 마음이 동요하지 않고 눈은 잠시도 쥐
    를 떠나지 않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 몸과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를 느끼지도 
    못한 채 마음의 눈으로 화두를 한곳에 거두어 들이고 다만 이와 같이 또렷하면
    서도 분명하고 분명하면서도 또렷하게 조금의 빈틈도 없이 참구하라. 비유하
    자면 어린아이가 엄마를 생각하는 것과 같고, 배고플 때 밥을 생각하는 것과 
    같으며,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다.”(『太古語錄』
   「示衆」韓6 p.676b16. 於十二時中四威儀內, 只與話頭爲命根, 常常不昧, 時
    時檢察, 提撕話頭, 帖在眼前. 如鷄抱卵, 使暖氣相續;如猫捕鼠, 身心不動, 
    目不暫捨. 不覺身心有之與無, 心眼話頭攝在一處, 但伊麽惺惺歷歷, 歷歷惺惺, 
    密密參詳. 譬如嬰兒憶母相似, 如飢思食, 如渴思水.)

 

[평]
조사들이 남긴 일천칠백여 칙의 공안이 있다. 예컨대 ‘개에게 불성이 없다’,73) 
‘뜰 앞의 나무’,74) ‘마삼근’,75) ‘간시궐’76) 등이 그것이다. 닭이 알을 
품을 때 따듯한 기운을 이어가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눈을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 배고플 때 먹을 것을 생각하고 목마를 때 물을 
생각하며, 어린아이가 어미를 생각하듯이 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진심에서 발로한 것이지 억지로 지어낸 마음이 아니다. 그러므로 간절하다고 
한 것이다. 참선을 하면서 이렇듯 간절한 마음 없이 꿰뚫는 일은 있지 않다.
祖師公案, 有一千七百則. 如狗子無佛性, 庭前栢樹子, 麻三
斤, 乾屎橛之流也. 雞之抱卵, 暖氣相續也, 猫之捕鼠, 心眼不
動也, 至於飢思食, 渴思水, 兒憶母, 皆出於眞心, 非做作底心. 
故云, 切也. 參禪, 無此切心, 能透徹者, 無有是處.
73)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조주종심(趙州從諗)에게서 비롯된 공안. 조주구자(趙州狗子)·
    조주무자(趙州無字) 등이라고도 한다.『趙州語錄』卍118 古尊宿語錄13 p.314a8 참조.
74) 주석59) 참조.
75) 麻三斤. 운문문언(雲門文偃)의 제자 동산수초(洞山守初)가 제시한 공안. 『洞山守
    初語錄』古尊宿語錄38 卍118 p.646a14,『無門關』18則 大48 p.295b4 참조.
76) 乾屎橛. 마른 똥막대기. 운문문언(雲門文偃)이 제기한 공안. 부처와 중생을 이분
    하는 분별심을 가지고 근원을 이해하려는 태도를 봉쇄하고, 궁극의 경지로 유도
    하기 위한 방편적 선어(禪語). 『雲門廣錄』 권상 大47 p.550b15,『臨濟語錄』 
    大47 p.496c10,『無門關』21則 大48 p.295c6 등 참조.

 

14. 

참선에는 반드시 세 가지 요소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지극히 견고한 믿음의 뿌리

[大信根]가 있어야 하고, 둘째 넘치도록 분하게 여기는 의지[大憤志]가 있어야 하며, 

셋째 철두철미하게 의심하는 생각[大疑情]이 있어야 한다. 만약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뜨린다면 다리 부러진 솥이 결국 쓸모없는 그릇이 되는 것과 같다.77)
參禪, 須具三要. 一 有大信根, 二 有大憤志, 三 有大疑情.
苟闕其一, 如折足鼎, 終成廢器.
77) 대신근(大信根)은 화두 공부를 하면 반드시 깨달을 것이라는 목표에 대한 견고한 
    믿음이고, 대분지(大憤志)는 화두를 타파하고 말리라는 충만한 의지이며, 대의정
    (大疑情)은 화두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품는 것으로서 대의단(大疑團)과 통하는 
    말이다. 고봉원묘(高峰原妙)의 『禪要』에 나오는 말이다. “정도에 딱 들어 맞는 
    참선에 대하여 말하자면 반드시 세 가지 요소를 갖춰야 한다. 제1 요소는 대신근이 
    있어야 한다. 이 본분사는 마치 우뚝 선 하나의 수미산에 기대고 있는 것과 같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제2 요소는 대분지가 있어야 한다. 마치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났을 때 곧바로 한칼에 두 토막을 내고자 하는 의지와 같다. 제3 요소는 대의정이 
    있어야 한다. 마치 어두운 곳에서 한 건의 중요한 일을 마치고 곧바로 드러내고자
    나드러내지 못하는 순간의 심정과 같다. …… 만약 이 가운데 하나라도 빠뜨린
    다면 마치 다리 부러진 솥이 결국 쓸모없는 그릇이 되는 것과 같다.”(『禪要』「示衆」
    16卍122 p.714a17. 若謂著實參禪, 決須具足三要. 第一要, 有大信根. 明知此事, 
    如靠一座須彌山. 第二要, 有大憤志. 如遇殺父冤讐, 直欲便與一刀兩段. 第三要, 
    大疑情. 如暗地做了一件極事, 正在欲露未露之時. …… 苟闕其一, 譬如折足之鼎,
    終成廢器.)

 

[평]

부처님께서는 “성불하려는 데는 신심이 근본이 된다”78)라 하셨고, 영가 

현각은 “도를 닦는 데는 뜻을 세우는 것이 우선이다”79)라고 하였으며, 

산은 “참선하는 수행자가 어떤 말과 구절이 되었건 의심하지 않는다면 

는 가장 근본적인 병통이다”80)라 하고, 또한 “크게 의심하면 반드시 

크게 깨닫게 된다”81)라고 하였다.

佛云,“ 成佛者, 信爲根本.” 永嘉云,“ 修道者, 先須立志.” 蒙山云, “參禪者, 
不疑言句, 是爲大病.” 又云, “大疑之下, 必有大悟.”
78) “믿음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로써 모든 선한 법을 늘어나게 한다.”
    (60권본『華嚴經』권6 大9 p.433a26. 信爲道元功德母, 增長一切諸善法.)
79)『禪宗永嘉集』大48 p.387c21.
80) 화두 참구의 요소 중의 요소는 의심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언구란 화두를 가리
    킨다 일체의 의식을 화두에 붙여두고 평소에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던 고
    착된 관념들을 하나하나 제거한 다음 빈틈과 끊어짐[間斷]이 없이 화두를 의심
    해야한다는 뜻이다. 의심이란 어떤 대상을 믿지 못하거나 이리저리 사량 분별
    하는 마음의 작용이 아니라, 화두에 대한 갖가지 분별이 사라질 때까지 불태워 
    없애는화로 같은 기능을 하는 핵심적 작용을 말한다. 안팎의 모든 현상을 화두 
    하나 통일시켜 의심덩어리로 만들고 다른 생각은 전혀 끼어들지 못하게 만든
    다는 에서 이러한 의심을 의단(疑團)이라 한다. 몽산 이전에 원오극근(圜悟克
    勤 103~1125)과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주로 했던 말이다. “어느 
    날 방장에 들어가니 노화상[圜悟克勤]께서 말씀하셨다. ‘그대의 본래 모습을 바꾸
    어 이러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안타깝다! 그대는 죽을 줄만 알았지 다
    시살아나지는 못하는구나. 화두의 구절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근본적인 병통
    이다.「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아야 스스로 수긍하고 알아차릴 것이다. 모
    든 각이 끊어진 다음에 다시 소생하면 누구도 더 이상 그대를 속일 수 없으리
    라(화두의 말을 제대로 안다는 뜻)」고 한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모름지기 이
    러한 도리가 있음을 믿어야 한다.’”(『大慧語錄』 권17 大47 p.883a20. 一日去入室, 
    老和曰, ‘也不易爾到這箇田地. 可惜! 爾死了不能活. 不疑言句, 是爲大病. 不見道,
   「懸崖撒手, 自肯承當. 絕後再甦, 欺君不得.」 須信有這箇道理.’);“원오극근이 
    ‘화두의 구절을 의심하지 않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병통이다’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인가? 의심하지 않는 것은 믿지 않는 데서 비롯되니, 믿지 않고서 무엇을 따라 
    깨달을 수 있겠는가! 믿은 다음에 의심하게 되고 의심한 다음에 진실로 의심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은 경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御製揀魔辨異錄』 권5 卍114
    p.441b15. 圓悟, 以不疑言句, 爲大病者? 蓋不疑由於不信. 不信何由得入! 信而後疑, 
    疑而後眞到不疑之地.);“수행하는 형제들을 보건대 10년이나 20년에서 한평생이 
    다하기까지 세간사를 끊고 세상의 인연을 잊고서 오로지 이 본분사만을 밝히고자 
    하면서도 꿰뚫지 못하는 자들은 그 병통이 어디에 있을까? 본분을 추구하는 납승
    이라면 그 핵심을 집어내 보라. …… 화두의 언구를 의심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얻지 못한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거나 증득하지 못한 것을 증득했다고 생각지는 
    았는가?”(『禪要』 「示衆」 卍122 p.712b9. 兄弟家, 十年二十年, 以至一生, 
    絕世忘緣, 單明此事, 不透脫者, 病在於何? 本分衲僧, 試拈出看. …… 莫是不疑言
    麽? 莫是未得謂得未證謂證麽?)
81) 이 말 역시 대혜종고의 말이며, 그 이후 여러 선사들이 인용한 구절이지만 몽산이 
    말다는 전거는 보이지 않는다. 『大慧語錄』 권17 大47 p.886a28 참조.

 

15. 

일상에서 대상경계와 마주치는 그 어느 때나 다만 ‘구자무불성’화두를 

들어야 한다. 오거나 가거나 항상 들고서 놓치지 않고 오거나 가거나 

제나 의심하다가 도리로 모색할 길도 사라지고 따라갈 규범이 되는 

길도 사라지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아82) 마음이 애달아 답답할 때83)가 

바로 그 당사자 자신의 목숨을 던질 순간84)이며또한 부처가 되고 

조사가 될 바탕이 된다.85)
日用應緣處, 只擧狗子無佛性話. 擧來擧去, 疑來疑去, 覺
得沒理路, 沒義路, 沒滋味, 心頭熱悶時, 便是當人, 放身命
處, 亦是成佛作祖底基本也.
82) 몰자미(沒滋味). 어떤 맛도 없다는 말. 화두는 분별로 더듬을 실마리가 전혀 없
    다는 뜻으로 화두의 본질적 속성을 표현한 말이다. 무자미(無滋味)·몰파비(沒
    巴鼻)·몰가파(沒可把) 등과 같은 뜻이다. 있다·없다 등의 모든 개념 또는 정서
    상의 맛이 끊어져 어떤 수단으로도 분별할 여지가 없는 상황을 말한다.
83) 마음속에 구하는 것이 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애달아하고 말을 하려고 하지
    만 말이 나오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분분비비(憤憤悱悱)의 상태를 말한다. “예전
    에 운봉문열(雲峰文悅)은 ‘불법의 근본적인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옛 스님(임
    제)이 세 번 물었다가 세 차례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늘 기억하고 있었는데, 형
    주의 금란(金鑾)에 선(善)선사가 있고, 균주의 대우에는 수지(守芝)선사가 있다
    는 사실을 알게 되어 발분하고 애타는 심정으로 찾아갔으나 한 생각도 싹트기 
    전에 벌써 대우의 말에 꼼짝없이 사로잡혀 있었다.”(『偃溪和尚語錄』권하 
   「示印維那」卍121 p.297b12. 昔雲峯悅, 誦先德, 如何是佛法大意, 三問三被打話, 
    知金鑾有善, 大愚有芝, 憤憤悱悱. 未萌一念已前, 早被大愚一罩罩定.) 이런 분분
    비비의 상태는『論語』에 그 어원이 보인다. “어떤 대상을 통하기 위해 발분하지 
    않으면 그 뜻을 깨우쳐 주지 말고, 애태워하지 않으면 그 말문을 열어주지 마라. 
    한 모퉁이를 들어 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나머지 세 모퉁이를 들어 보이지 
    못하면 다시 더 가르쳐줘서는 안 된다.”(『論語』 「述而」.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84) 화두 공부가 극치에 이르러 타파되기 직전에 마지막 승부를 벌이는 자리라는
    말이다. 그 궁극의 경계에서도 끝까지 화두를 타파하기 위해 빈틈과 끊어짐 
    이 화두를 들어야 한다.
85) 대혜종고(大慧宗杲)의 『書狀』에 나오는 글이다. “화두를 들 때는 허다한 방편으

     재주를 부릴 필요가 전혀 없이 다만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누워 있는 그 자

    리에서 화두를 빈틈과 끊어짐 없이 들면 될 뿐 희로애락을 유발하는 대상경계     

    에서분별을 일으키면 안 된다. 항상 화두를 들고서 놓치지 않고 언제나 화두를      

    간수하여 도리로 모색할 길도 사라지고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아 마음 애달아      

    괴롭다고 느끼 때가 바로 그 당사자 자신이 목숨을 던질 순간이다.”(『書狀』
   「答宗直閣」 大47 p.933c1. 擧話時, 都不用作許多伎倆, 但行住坐臥處, 勿令間斷, 
    怒哀樂處, 莫生分別. 擧來擧去, 看來看去, 覺得沒理路, 沒滋味, 心頭熱悶時, 
    便是當人, 放身命處也.)

 

[평]

어떤 인이 조주에게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조주가 

‘없다’고 하였다. 이 무(無)라는 한 글자는 종문의 으뜸 관문86)으로서 

무수 많은 그릇된 지각을 꺾어버리는 무기이자87) 또한 모든 부처의 

본래 모습이요 모든 조사들의 골수이다. 이 관문을 뚫어버린 후에야 

부처나조사가 될 기약이 있을 것이다.88) 옛사람이 게송으로 읊었다. 

“조주가 드러낸 칼날이여! 서릿발같이 차가운 빛이 번득이는구나. 

무슨 뜻인 몰라 머뭇거리며 ‘어떤 뜻이냐’고 묻는다면, 몸을 갈라 

두 동강 내리라.”89)
僧問趙州, ‘狗子還有佛性也無?’ 州云, ‘無.’ 此一字子, 宗門
之一關, 亦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 亦是諸佛面目, 亦是諸
祖骨髓也. 須透得此關然後, 佛祖可期也. 古人頌云,“ 趙州露
刃劒, 寒霜光燄燄. 擬議問如何, 分身作兩段.”
86) “바로 무(無)라는 이 한 글자가 곧 종문의 으뜸 관문이다.”(『無門關』1則 
   「趙州狗子」大48 p.292c27. 只者一箇無字, 乃宗門一關也.)
87)『書狀』「答富樞密」大47 p.921c8 참조.
88)『無門關』1則「趙州狗子」大48 p.292c28.
89) 조주의 무자를 즐겨 제기하던 오조법연(五祖法演)에게 한 학인이 그 뜻을 묻자 
    이에 답한 게송이다.『五祖法演語錄』大47 p.666c1,『聯燈會要』권6 卍136
    p.531b12 참조. ‘어떤 뜻이냐?’고 묻는다는 말은 모색할 내용을 미리 예상하고
    접근하는 분별을 가리킨다. 이러한 분별을 잘라내어야 무자가 타파된다는 뜻이
    다. 무자에 관하여 더 이상 묻지도 대답하지도 못하여 이에 관하여 좋다·나쁘다, 
    있다·없다는 등의 그 어떤 분별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이끌기 위한 방편으로써 
    제시한 말이다.

 

16. 

화두를 의심하지 않고 단지 들고만 있는 그 자체로 깨달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이리저리 사량 분별해서도 안 되며, 또한 지금 미혹되어 있다고 

여기며 깨달을 시기를 기다리기만 해서도 안 된다.90) 다만생각으로 미칠 

수 없는 곳에까지 이르러 생각하고자 하지만 마음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지경이 되면 마치 쥐가 소뿔로 만든 쥐틀에 거꾸로 처박혀 오도가도 

못하는 것91)과 같이 될 것이다.92) 또 평소에 이리저리 분별하여 가지런히 

정돈하는 것도 식정(識情)이요 생사를 따라 휩쓸려 다니는 것도 식정이요 

두려워 떠는 것도 식정이거늘, 요즘 사람들은 이러한 병통을 알지 못하고 

오로지 이 안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뿐이다.93)
話頭, 不得擧起處承當, 不得思量卜度, 又不得將迷待悟. 
就不可思量處思量, 心無所之, 如老鼠入牛角, 便見倒斷也. 
又尋常計較安排底, 是識情, 隨生死遷流底, 是識情, 怕怖
慞惶底, 是識情, 今人不知是病, 只管在裏許, 頭出頭沒.
90) 장미대오(將迷待悟). 장심대오(將心待悟)·대오심(待悟心)·구오지심(求悟之
    心)·구증지심(求悟證之心)·구증오지심(求證悟之心) 등이라고도 한다. ‘언제
    쯤 깨달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을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는 무자
    화두공부를 할 때 생기는 십종병(十種病) 중 하나이다.『大慧語錄』권19 大47
    p.891b29에서 “미혹되었다고 집착하며 깨달음을 기다린다(執迷待悟)”라고 한
    말이나 지눌이『修心訣』大48 p.1006c28에서 “미혹된 상태에서 깨닫기를 기다
    린다(將迷待悟)”라고 한 말도 이 병통을 나타낸다. 지눌은 이것을 십종병 중 근
    본적인 병통으로 들었다(『看話決疑論』 韓4 p.732c13. 所言十種病, 以求證悟之心爲
    本.). “이것은 대체로 깨달음을 희구하는 마음을 눈앞에 두고 스스로 장애를 만
    든 것이며, 별다른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니다.”(『書狀』「答曾侍郞」大47 p.917c8. 
    此蓋以求悟證之心, 在前頓放, 自作障難, 非干別事.)
91) 쥐가 소뿔로 만든 쥐틀 속에 들어가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형국에 빗대어 화두를 
    들고 의심하다가 사량 분별로 모색하는 길이 끊어진 상태를 비유한다.
92) ‘마음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다(心無所之)’는 것은 대혜종고(大慧宗杲)가 썼던 
    말이다. “무엇보다 먼저, 화두를 의심하지 않고 단지 들고만 있는 그 자체로
    깨달으려고 해서는 안 되며, 이리저리 사량 분별해서도 안 된다. 다만 생각으로
    미칠 수 없는 곳에까지 이르러 생각하고자 하나 ‘마음이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없는 지경’이 되면 마치 쥐가 소뿔로 만든 쥐틀에 거꾸로 처박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것과 같이 될 것이다.”(『書狀』 권28 「答呂舍人」 大47 p.930a17. 第一, 
    不得向擧起處承當, 又不得思量卜度. 但著意就不可思量處思量, 心無所之, 老鼠入
    牛角, 便見倒斷也.)
93) ‘평소에 이리저리~사라졌다 할 뿐이다’라는 구절은『書狀』「答曾侍郎」大47
    p.918a1~a3의 인용이다.

 

[평]

화두에 열 가지 병통[十種病] 94)이 있다. 의근(意根)을 가지고 사량 분별

하는 것, 눈썹을 움직이고 눈을 깜박거리는 등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에 

리를 내리고 알아내려고 하는 것, 언어문자에서 살 길을 모색하려고 하는 

것, 경전이나 어록등의 문자를 끌어들여 입증하려고 하는 것, 화두를 

심하지 않고 단지 화두를 들고만 있는 그 자체로 깨달으려고 하는 것, 

든 것을 날려버리고 아무 일도 없는 경계 속에 우두커니 머무르는 것, 

다·없다는 대립적 유·무의 무라고 이해하는 것, 진무(眞無)의 무(無)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일정한 도리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 현재 

혹되어 있다고 여기며 깨달을 시기를 기다리기만 하는 것 등이다. 

이러한 열 가지 병통을 벗어난 사람은 다만 화두를 들 때 번잡함을 

털어버리고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의심하기만 하면 된다.

話頭, 有十種病. 曰意根下卜度, 曰揚眉瞬目處挅95)根, 曰語路
上作活計, 曰文字中引證, 曰擧起處承當, 曰颺在無事匣裏, 曰
作有無會, 曰作眞無會, 曰作道理會, 曰將迷待悟也. 離此十種
病者, 但擧話時, 畧抖擻精神, 只疑是箇甚麽.
94) 대혜종고(大慧宗杲)는『書狀』「答富樞密」에서 무자화두를 참구할 때 빠져서는
    안 될 여덟 가지 병통을 제시했는데, 여기에다 보조지눌이 두 가지를 더해 십종병으로 
    나누었다.『선교석』주석38) 참조.
95) ‘垜’의 오기로 보인다.

 

17. 

눈앞에 당면한 이 일96)은 마치 모기가 무쇠소 등에 앉은 것과 같으니97)

이러니저러니 따지며 분별하지 말고 부리를 꽂을 도리가 전혀 없는 경계98)에서 

목숨을 한번 버린다는 생각으로 온몸으로 뚫고 들어가야 한다.99)
此事, 如蚊子上鐵牛, 便不問如何若何, 下觜不得處, 棄命
一攢, 和身透入.
96) 본분사(本分事)를 뜻한다.
97) 모기가 무쇠소를 진짜 소로 착각하여 그 위에 앉아 부리를 대고 피를 빨려고
    한다는 비유이다. 문자나 이론 또는 사량 분별 등 어떤 수단으로도 전혀 통하지 
    않는 경계 또는 화두 자체를 비유한다.『景德傳燈錄』권9「潙山靈祐傳」大51
    p.265b22,『圜悟語錄』권13 大47 p.772a26,『大慧語錄』권16 大47 p.881b18 
    참조.
98) 발 들여 놓을 여지가 없다는 무하각처(無下脚處), 손 쓸 도리가 없다는 무하수처
    (無下手處) 등과 통하는 말이다. 무쇠소의 등 여기저기에 부리를 꽂으려 하지만
   그럴 만한 곳이 없듯이 어떤 말이나 분별로도 파고 들어갈 여지가 없는 경지를
    비한다. 화두가 온전히 성숙되어 타파되기 직전의 상황 또는 화두의 근본적
    속성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99)『景德傳燈錄』권9「潙山靈祐傳」大51 p.265b22,『圜悟語錄』권13 大47 p.772a26,
   『大慧語錄』권16 大47 p.881b18,『密菴語錄』大47 p.974c17 등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보이며 고봉원묘(高峰原妙)의『禪要』卍122 p.714a5~a6의 내용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평]

위에서 말한 뜻을 거듭 결론지어 말하였다. 활구(活句)를 궁구하는 자로

하여금 (어떤 수단도 통하지 않는 경계에서) 물러서지 않도록 한 것이다. 

옛 사람이 “바르게 참선하려면 조사의 관문을 뚫어야 하고, 묘하게 깨달으려면

마음으로 분별할 길이 끊어진 곳을 궁구해야 한다”100)라고 말한 그 뜻이다.
重結上意. 使參活句者, 不得退屈. 古云,“ 參禪, 須透祖師關, 
妙悟, 要窮路絶.”
100) 무문혜개(無門慧開)의 말.『無門關』1則「趙州狗子」大48 p.292c25.

 

18. 

공부는 마치 현악기의 줄을 고를 때에 죄임과 늦춤이 그 중도에 맞아야 

하는 것과 같으니, 지나치게 덤벼들면 집착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된다. 또렷또렷하고 분명하게 화두를 의식하면서 세밀하고 

끊어짐 없이 들어야 한다.101)
工夫, 如調絃之法, 緊緩得其中, 勤則近執着, 忘則落無明. 
惺惺歷歷, 密密綿綿.
101) “시험 삼아 이와 같이 공부해 보십시오. 깨닫거나 깨닫지 못하거나 상관하지 
     말며, 마음속에서 애태우거나 초조하게 느끼지 말고 또한 느슨하게 풀어져서도
     안 됩니다. 현악기의 줄을 고르는 법과 같으니, 그 죄임과 늦춤이 딱 맞으면 곡
     조는 저절로 이루어지게 됩니다.”(『書狀』권29「答林判院」大47 p.936b25. 
     試如此做工夫看. 莫管悟不悟, 心頭休熱忙, 亦不可放緩. 如調絃之法, 緊緩得其
     所, 則曲調自成矣.);흥선유관(興善惟寬 755~817)의 말. “범부의 무명과 이승
     의 집착, 이 두 가지 병통을 여읜 것을 참된 수행이라고 한다. 참된 수행은 지
     나치게 덤벼들어서도 안 되고 잊어버려서도 안 된다. 지나치게 덤벼들면 집착
     하기 쉽고 잊어버리면 무명에 떨어지게 되니, 이것을 마음의 요체라고 한다.”
     (『景德傳燈錄』권7「惟寬傳」大51 p.255b5. 凡夫無明, 二乘執著, 離此二病,
     是, 眞修. 眞修者, 不得勤, 不得忘. 勤卽近執著, 忘卽落無明, 此爲心要云爾.) 
     한 이러한 취지는 혼침에 빠진 것과 같은 망회(忘懷), 산란과 같은 관대(管
     帶)를 모두 벗어나는 방법과 맞닿아 있다. “고목과 같이 메마른 마음으로 마음
     에 품은 모든 것을 잊어서는 안 되며, 마음을 붙들고 항상 놓치지 말고 지니고 
     있으려 하지도 마라.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는 화두를 단지 그렇게 살피며 놓치
     지 마라. 있다는 견해도 없다는 견해도 짓지 말고, 두 가지를 넘어선 진실한 무
     [眞無]가 있다고도 생각하지 마라.”(『眞覺語錄』「示宗敏上人」韓6 p.25c5
     莫枯心忘懷, 莫將心管帶. 狗子無佛性, 只麽看不昧. 不作有無見, 不作眞無會.)

 

[평]

거문고를 타는 사람들이 “줄의 죄임과 늦춤을 적절히 조절한 다음에야 

맑은 소리가 두루 어울려 퍼지게 된다”라고 하는 말처럼 화두 공부 또한 

이와 같아서 급하게 하면 혈기가 오르고 느슨하게 하면 귀신굴102)에 

어가게 되니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다면 공부의 묘한 방법이 그 안에 

있을 것이다.

彈琴者曰, “緩急得中然後, 淸音普矣.” 工夫, 亦如此, 急則動血囊, 忘則入鬼窟, 
不徐不疾, 妙在其中.
102) 생동감이나 지혜가 없는 선정(禪定)을 비유한 말. 마음의 고요함만 지키고 응용
     력이 없는 상태나 혼침 등을 말한다. “아직까지 묵조의 무리들은 귀신굴에서 긴 
     세월 동안 좌선만 하고 있다.”(『大慧語錄』 권6 大47 p.836b3. 致今, 默照之徒, 
     鬼窟長年打坐.)

 

19. 

공부가 (성숙하여) 걸어가면서도 걸어가고 있는 줄 알지 못하고 앉아 

있으면서도 앉아 있는 줄 알지 못하는 데 이르더라도 바로 이때에 

팔만사천 마군(魔軍)이 육근의 문 앞103)에서 엿보며 마음을 따라 

여러 책략을 일으키겠지만,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군인들 

어떻게 하겠는가!104)
工夫, 到行不知行, 坐不知坐, 當此之時, 八萬四千魔軍, 在
六根門頭伺候, 隨心生設, 心若不起, 爭如之何!
103) 육근문두(六根門頭).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등 육근(六根)으로 모든 대상
     들이 출입하므로 문에 비유하여 이를 문두 또는 육근문두라 한다. ‘두’는 명사 
     뒤에 붙는 조사이다.
104)『禪要』卍122 pp.706a18~707a6 참조.

[평]

마(魔)란 생사윤회를 즐거워하는 귀신을 가리키고, 팔만사천 마군이란 

중생의 팔만사천 번뇌를 말한다. 마는 본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 중에 염(念)105)을 잃고 마침내 그 근원을 떠나 생각이 

갈가리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106) 중생은 그 경계를 그대로 따르므로 

순조롭고, 도인은 그 경계를 거스르므로 곤란을 겪는다. 그러므로 

도가 높을수록 마가 무성해진다 107)고하는 것이다. 선정에 들어 있던 

중에 상주를 보고서 자기 다리를 칼로 찔렀다거나 혹은 돼지를 보고서 

코를 잡은 것 또한 자기 마음에서 일어난 상을 보고서 이를 밖에 있는 

마라고 느끼는 것이다.108) 그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마군이 

갖가지 기량을 부리더라도 도리어 칼로 물을 가르거나 빛을 불어 

날려버리려는 시도와 같이 소용없다. 옛말에 “벌어진 벽 틈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고 마음의 틈으로 마군이 침입해 들어온다”109)라고 

한 말이 바로 이 뜻이다.

魔者, 樂生死之鬼名也, 八萬四千魔軍者, 乃衆生八萬四千煩
惱也. 魔本無種, 修行失念者, 遂派其源也. 衆生順其境故, 順
之;道人逆其境故, 逆之. 故云, 道高魔盛也. 禪定中, 或見孝
子而䂨110)股, 或見猪子而把鼻者, 亦自心起見, 感此外魔也. 心
若不起, 則種種伎倆, 翻爲割水吹光也. 古云,“ 壁隙風動, 心
隙魔侵.”
105) sāti. 선정(禪定)에 들어 산란과 혼침이 없이 주의를 집중하는 작용. 여기서는
     화두만 들려 있고 다른 생각이 없는 화두일념(話頭一念)의 염이다.
106) “천마와 외도는 본래 종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 중에 염을 잃고 마침
     내 그 근원을 떠나 생각이 갈가리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다만 소중히 
     여기는 것과 의지하는 것을 가지고, 분별과 이해를 내세울 줄만 알아서 아주
     작은 견해라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모두 외도가 될 뿐이다.”(『宗鏡錄』권46 大48
     p.689b5. 天魔外道, 本無其種, 修行失念, 遂派其原. 故知但有所重所依, 立知立解,
     絲毫見處, 不亡, 皆成外道.)
107) “그러므로 도가 높아지면 마(魔)가 무성해져 거스르거나 순조로운 경계가 무수히 
     일어날 것을 근심할 일이다. 그러나 정념(正念)이 눈앞에 실현된다면 그 어떤 것에
     도 장애를 받지 않을 것이다.”(『百丈淸規』권5「坐禪儀」大48 p.1143a18. 然恐
     道高魔盛, 逆順萬端. 若能正念現前, 一切不能留礙.)
108) “옛날 어떤 선사가 산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상주(喪主)가 시신 하나를 
     들고 와 선사 앞에다 놓고 곡을 하며 ‘어째서 우리 어머니를 죽였는가?’라고 
     말했다. 선사는 마구니라 알고 ‘이것은 마구니의 경계가 틀림없다. 내가 도끼로 
     이를 찍어버리면 어찌 해탈을 얻지 못하겠는가!’라고 생각한 끝에 기둥에 걸려 
     있던 도끼를 들고 마침내 한 번 휘두르자 상주가 달아났다. 잠시 뒤에 넓적다리
     가 축축한 것을 느끼고 살펴보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의도와는 달리 자기 자신
     을 찍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좌선을 하고 있을 때 마음속에서 망령된 견해를 
     일으킴에 따라 마음 밖에 있는 마구니가 안으로 들어와서 사람의 마음을 움
     직인다고 느끼지만 그 모두가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모
     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까닭 없이 노래하고 춤추는 등의 행
     위도 원래 자기 마음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일체가 오직 마음이 
     지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면 모든 경계는 저절로 소멸할 것이니 어찌 마음 밖
     에 별도로 마구니의 경계가 있을 것인가? 또한 옛날에 어떤 선사가 좌선을 
     하고 있는데, 마침 돼지 한 마리가 눈앞에 나타났다. 선사는 이것을 마구니
     로 생각하고 천천히 돼지의 코를 잡아끌며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불을 
     들고 와서 보니 그 스님이 스스로 자기 코를 잡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음이 변화하여 나타난 현상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바른 선정을 
     닦기만 한다면 어디서 마구니의 일이 벌어지겠는가!”
     (『宗鏡錄』 권29 大48 p.587a8. 昔有禪師在山坐, 見一孝子, 擎一死屍來, 
     向禪師前著, 便哭云, ‘何故, 殺我阿母?’ 禪師知是魔, 思云, ‘此是魔境. 我將斧斫, 
     却可不得解脫!’ 便於柱上取斧, 遂斫一斧, 孝子走去. 後覺股上濕, 便看, 乃見血. 
     不期自斫. 斯乃正坐禪時, 心中起見, 遂感外魔來入, 行人心, 不知皆由自心. 
     或自歌舞等, 元是自心影像. 故知若了唯心, 諸境自滅, 何處心外別有境魔耶? 又, 
     昔有禪師坐時, 見一猪來在前, 禪師將是魔, 則緩擎把猪鼻拽, 唱叫. 把火來, 
     乃見和尚, 自把鼻唱叫. 明知由心變, 但修正定, 何有魔事!)
109) “산상격왕보살이 말하였다. ‘비유하자면 구멍 뚫린 틈으로 바람이 들어가 물체를 
     움직이게 하여 오고 가는 형상이 있게 되는 것과 같이 보살도 그와 같아서 마음에 
     틈이 있을 때 마음이 동요되고, 마음이 동요하므로 마구니가 제멋대로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마음을 지켜서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마음에 틈이 없다면 모든 상(相)이 원만하게 되고, 모든 상이 원만하게 
     되면 그 공한 성품도 원만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이 마구니를 넘어서는 
     법문입니다.”(『大集大虛空藏菩薩所問經』 권7 大13 p.641c9. 山相擊王菩薩曰, 
     ‘譬如有孔隙處, 風入其中, 搖動於物, 有往來相, 菩薩亦爾, 若心有間隙, 心則搖動, 
     以搖動故, 魔則得便. 是故, 菩薩守護於心, 不令間隙. 若心無間隙, 則諸相圓滿,
     以相圓滿故, 則空性圓滿. 是爲菩薩超魔法門.’);“어떤 비구 하나를 마구니가 유혹
     하려고 7천 세가 지났으나 결국 유혹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이 비
     구가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이니, 마치 밀실에 바람이 들어갈 수 없는 것
     과 같았던 것이다. 바람이 들어갈 수 있는 여지는 구멍 난 틈이 있기 때문이듯이
     마구니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다.”(『起信論疏筆
     削記』 권19 大44 p.402b6. 有一比丘, 魔欲惑之, 經七千歲, 竟不得便. 何以故? 
     以是比丘不起心故, 其猶密室風不能入. 風得入者, 由孔隙故, 魔得便者, 由起念故.)
110) ‘斫’의 오기로 보인다.

 

20.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천마(天魔)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음마(陰魔)

이며,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煩惱魔)이다. 

그러나 우리 정법 가운데는 본래 이러한 일은 없다.111)
起心是天魔, 不起心是陰魔, 或起或不起, 是煩惱魔. 然我
正法中, 本無如是事.
111)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법을 이어받은 대주혜해(大珠慧海)의 말. 천마, 음마, 
     번뇌마는 사마(四魔) 또는 오마(五魔)·십마(十魔)에 속한다. 천마( deva-māra,
     lhah i bdud)는 타화자재천마(他化自在天魔)·자재천마(自在天魔)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착한 일을 행하려고 할 때 방해하는 타화자재천(욕계의 꼭대기에 있는 
     6천)의 마왕을 이른다. 음마( skandha-māra)는 온마(蘊魔)라고도 하며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의 5온을 마구니로 본 것이다. 번뇌마( kleśa-māra, kilesa-māra)는 
     번뇌를 마구니로 본 것이다.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사마(死魔 maran3 amāra)
     는 죽음을 마구니로 간주한 것이다. “지관을 강설하는 혜강주가 물었다.
     ‘선사께서는 마를 가려낼 수 있습니까?’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천마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은 음마이며,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것은 
     번뇌마이다. 그러나 우리 정법 가운데는 이러한 일이란 없다.’”(『景德傳燈錄』 권28
    「大珠慧海傳」 大51 p.442a12. 講止觀慧座主問, ‘禪師辨得魔否?’ 師曰, ‘起心是天魔, 
     不起心是陰魔, 或起不起是煩惱魔. 我正法中, 無如是事.’)

 

[평]

대체로 마음의 작용을 잊는 것112)이 부처의 도요, 분별하는 것은 마구니의 

경계이다.113) 그러므로 마구니의 경계라는 꿈같은 일을 무엇 하러 애써

가려내어 따지겠는가! 

大抵, 忘機是佛道, 分別是魔境. 然魔境夢事, 何勞辨詰!
112) 망기(忘機). 자신을 잊고 무심하게 되는 것. ‘기’는 분별을 비롯한 마음의 여러
     가지 작용이다.
113) 황벽희운(黃檗希運 ?~850)의 말. “그런 까닭에 보고 듣는 것은 환예(幻翳)와 같고, 
     알고 느끼는 것은 중생의 작용이다. 조사문 안에서는 단지 마음의 작용을 쉬고 견해를 
     잊는 것만 중시할 뿐이다. 그래서 마음의 기틀을 잊으면 부처의 도가 융성하고 
     분별하면 마군이 거세게 일어나는 것이다.”(『宛陵錄』 大48 p.384b12. 所以云, 
     見聞如幻翳, 知覺乃衆生. 祖師門中, 只論息機忘見. 所以忘機則佛道隆, 分別則魔軍熾.)

 

 21. 

공부가 성숙하여 화두가 하나의 의심덩어리114)가 된다면 설령 금생에

꿰뚫지 못한다 해도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115) 악업에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다.116)
工夫, 若打成一片, 則縱今生透不得, 眼光落地之時, 不爲
惡業所牽.
114) 타성일편(打成一片). 화두에 약간의 분별도 붙을 여지가 없고 몸과 마음뿐만 
     아니라 안팎의 모든 것이 화두로서 한 덩어리가 된 것. 이것이 바로 더 이상 앎의
     수단이 통하지 않는 은산철벽(銀山鐵壁)의 경계이다. “공부를 하면서 화두를 살
     피다가 온몸과 마음으로 용맹하게 정진하여 한 덩어리가 되면 마치 은산철벽과 
     같아질 것이다. 이미 한 덩어리가 되었다면, 몸과 마음 그리고 주관과 객관이 남
     김없이 하나로 뒤섞여 앎의 대상은 전혀 수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한 덩어
     리라고 안다면 다시 두 조각 세 조각으로 갈라져버린 것이니, 어찌 남김없이 하
     나로 뒤섞인 이치가 있겠는가!”(『天目明本雜錄』「示雄禪人」卍122 p.764a11. 
     做工夫看箇話頭, 身心勇猛, 打成一片, 如銀山鐵壁相似. 旣是成一片, 身與心, 
     人與境, 覿體混融, 不容有所知. 苟或知是一片, 則又是兩片三片了也, 安有混融
     之理哉!)
115) 안광락지(眼光落地). 임종할 때의 모습으로써 죽는 순간을 표현한 말이다.
116) 대혜종고(大慧宗杲)의 다음 취지와 같다. “다만 찰나마다 (화두를 의심함에) 
     빈틈과 끊어짐이 있어서는 안 될 뿐이니, 힘을 얻었거나 얻지 못했거나 상관하지
     마라. 과거세에 반야와 인연이 없어 금생에 철저하게 깨닫지 못한다 해도 죽음에 
     임하는 순간에 또한 악업에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다.”(『大慧語錄』권20「示眞
     如道人」大47 p.895a17. 但念念不 要間斷, 莫管得不得. 便是夙與般若無緣, 今
     生未打得徹, 臨命終時, 亦不被惡業所牽.)

 

[평]

업(業)이란 무명이요 선(禪)이란 반야이니, 밝음(반야)과 어둠(무명)이

적수가 되지 못하는 것은 이치가 진실로 그러하기 때문이다.

 

22. 117) 
참선하는 자들이여! 네 가지 은혜118)가 깊고 두터움을 아는가? 사대119)로 

이루어진 더러운 육신이 찰나마다 쇠하여 썩어가는 것을 아는가? 

람의 목숨이란 한낱 호흡에 달려 있을 뿐임을 알고 있는가? 태어난 이래로 

부처나 조사를 만나보았는가? 최상의 법을 듣고 보기 드물고 귀하다는 

생각을 일으켜 보았는가? 참선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참선의 뜻을

굳게 지켰는가? 좌선하고 있을 때 옆에 앉은 사람120)과 잡담하지 않았는가? 

시비를 선동하여 부추기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는가? 화두를 들고 있는 

어느 시각에나 분명하고 또렷또렷하여 알아채지 못한 적은 없는가? 

사람들과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화두를 드는 데 빈틈이나 끊어짐이 

없는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순간마다 그 모든 것이 화두와 한 덩어리가 

되는가? 자신을 돌이켜 관찰하는121) 그때 부처와 조사의 의중을 포착했는가? 

이번 생에 반드시 부처님의 혜명122)을 이을 수 있겠는가? 생활하기 편안한 

순간에도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이 생에 받은 몸으로 결단코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팔풍123)의 경계와 마주쳐도 마음이 동요하지 않았는가? 

이상의 것들이 바로 참선하는 사람이 일상생활 중에 점검해야 할 도리이다. 

옛사람이 말했다. “금생에 이 몸을 건질 수 없다면 다시 또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건지겠는가?”124)
大抵參禪者, ‘還知四恩深厚麽? 還知四大醜身念念衰
杇125)麽? 還知人命在呼吸麽? 生來値遇佛祖麽? 及聞無上
法, 生希有心麽? 不離僧堂, 守節麽? 不與鄰單, 雜話麽? 
切忌鼓扇是非麽? 話頭十二時中, 明明不昧麽? 對人接話
時, 無間斷麽? 見聞覺知時, 打成一片麽? 返觀自己, 捉敗
佛祖麽? 今生決定續佛慧命麽? 起坐便宜時, 還思地獄苦
? 此一報身, 定脫輪廻麽? 當八風境, 心不動麽? 此是
參禪人, 日用中, 點檢底道理. 古人云, “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
117) 여기에서는 화두를 참구하는 수행자가 스스로 자신을 점검하도록 세세한 조목을 
     제시하고 있다. 태고보우(太古普愚)의 설을 따르면서 약간 수정하고 몇 가지 조목을 
     부가했다.『太古語錄』「示衆」韓6 pp.676c14~677a11 참조.
118) 사은(四恩). 네 가지 은혜를 말한다.『大乘本生心地觀經』권2 大3 p.297a12에 
     부모은(父母恩)·중생은(衆生恩)·국왕은(國王恩)·삼보은(三寶恩),『正法念處經』
     권61 大17 p.359b14에 모은(母恩)·부은(父恩)·여래은(如來恩)·설법사은(說法師恩) 
     등으로 나누고 있다.
119) 四大.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라는 네 가지 요소.
120) 단(單). 총림의 승당(僧堂)에 각 수행자들에게 배분된 자리. 여기서 좌선하고 
     공양하고 잠을 잔다. 단위(單位) 또는 괘탑단(掛搭單)이라고도 한다.
121) 반관(返觀). 자기 자신을 돌이켜 관찰한다는 뜻으로 밀밀반관(密密返觀)이라고도 
     한다. 이는 잠깐의 빈틈도 없이 돌이켜 관찰한다는 말로서 화두 공부를 하거나 염불을 
     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령이다.
122) 慧命. 지혜의 생명 또는 목숨과 같은 지혜. 부처님의 지혜는 중생을 살리는 목숨과 
     같으므로 혜명이라 한다. 특히 법신의 근본이 되는 지혜를 말한다.
123) 八風( atthalo-kadhammā). 사람의 마음을 동요케 하는 여덟 가지 상황 또는 
     경향을 바람에 비유한 것. 팔법(八法) 또는 팔세풍(八世風)이라고도 한다. 이익(利lābha)·
     손실(衰 alābha)·칭찬(譽 yaso)·비방(毁 ayaso)·칭송(稱pasamsā)·비난(譏 nindā)·
     즐거움(樂 sukha)·고통(苦 dukkha)을 가리킨다. 이 중 이·예·칭·락을 4순(順), 쇠·훼·기·
     고를 4위(違)라고 한다. “여덟 가지 법이 바로 팔풍이다. 이·쇠·훼·예·칭·기·고·락 등을 
     말한다. 이 여덟 가지 법은 세간에서 애착하거나 증오하는 경계가 되어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바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만일 마음에 관장하는 주인이 있어 
     정법에 안주한다면 애착과 증오에 미혹되어 어지럽혀지지 않을 것이니, 그는 팔풍에 
     흔들리지 않는 자일 것이다.”(『大乘本生心地觀經淺註』권6 卍34 p.382a17. 八法, 
     卽是八風. 謂利衰毀譽稱譏苦樂. 此八法, 世間所愛所憎, 而能扇動人心, 名之爲風. 
     苟心有主持, 安住正法, 不爲愛憎惑亂, 卽八風不能傾動之者.)『增壹阿含經』권39 大2
     p.764b14,『法華文句記』권1 大34 p.168b19 등 참조.
124)『洞山語錄』大48 p.516b23,『死心新和尙語』 續古尊宿語要1 卍118 p.862a10, 
     『蓮宗寶鑑』권5 大47 p.328b24 등에 나오는 구절. “사람의 몸은 얻기 어렵고 
     불법은 만나기 어려우니, 금생에 이 몸을 건지지 못한다면 다시 어느 생에 이 몸
     을 건지겠는가?”(『書狀』권30「答湯丞相」大47 p.942a21. 人身難得, 佛法難
     逢, 此身不向今生度, 更向何生度此身?)
125) ‘朽’의 오기로 보인다.

 

[평1]

네 가지 은혜란 부모와 임금과 스승 그리고 시주의 은혜이다. 사대로 

루어진 더러운 육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아버지의 정수(精水) 

한 방울과 어머니의 피 한 방울은 수대(水大)의 습한 성질이고, 정수가 

뼈가 되고 피가 피부가 된 것은 지대(地大)의 견고한 성질이며, 정수와 

피가 한 덩어리가 되어 썩어 문드러지지 않는 것은 화대(火大)의 따뜻한 

성질이며, 콧구멍이 가장 먼저 이루어져126) 들숨과 날숨을 통하게 하는 

것은 풍대(風大)의 움직이는 성질이다. 아난이 “애욕의 기운은 거칠고 

더러우며, 비린내와 누린내가 나는 몸이 섞인 것일 뿐이다”127)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더러운 몸’이라 한 이유이다. 찰나마다 쇠하여 썩어

간다는 것은 세월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 얼굴에는 저절로 주름살이 

생기고 머리털은 저절로 희어져 ‘지금이 이미 예전과 같지 않고 미래도 

당연히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128)라는 말 그대로이니, 이것은 무상한 

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므로 무상이라는 귀신은 죽이는 것을 즐겁게 

여기니 참으로 순간순간이 모두 두려울 뿐이다. 날숨은 내뿜는 불의 

기운이고 들숨은 들이마시는 바람의 기운이니, 사람의 목숨은 단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팔풍이란 순경과 역경 두 가지를 

말한다. 지옥의 고통이란 인간 세상 육십 겁이 지옥129)의 하루 낮밤이니, 

확탕·노탄·검수·도산 지옥130)에서 겪는 고통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다.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기 어려운 것이 바다에 빠진 바늘 찾기보다 더 

어려우므로131) 이것을 애처롭게 여겨 경계한 것이다.

四恩者, 父母君師施主恩也. 四大醜身者, 父之精一滴, 母之血
一滴者, 水大之濕也;精爲骨, 血爲皮者, 地大之堅也;精血
一塊, 不腐不爛者, 火大之暖也;鼻孔先成, 通出入息者, 風大
之動也. 阿難曰, “欲氣麤, 腥臊交遘.” 此所以醜身也. 念念
衰杇132), 頭上光陰, 刹那不停, 面自皺而髮自白, 如云,‘ 今旣
不如昔, 後當不如今.’ 此無常之體也. 然無常之鬼, 以殺爲戱, 
實念念可畏也. 呼者, 出息之火也;吸者, 入息之風也, 人命寄
托, 只在出入息也. 八風者, 順逆二境也. 地獄苦者, 人間六十
劫, 泥犁一晝夜, 鑊湯爐炭劒樹刀山之苦, 口不可形言也. 人身
難得, 甚於海中之鍼, 故於此愍而警之.
126) “사람이 배태될 때 코가 가장 먼저 형성되므로 시조를 비조라 한다.”(『正字通』.
      人之胚胎, 鼻先受形, 故謂始祖爲鼻祖.)
127)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부처님의 32상은 애욕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고 늘 생각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애욕의 기운은 거칠고 더러우며 비린내와
     누린내가 나는 몸을 섞어 진한 피가 난잡하게 엉기는 것이므로 수승하고 청정하며 
     묘하고 밝은 자금광취(紫金光聚)를 발생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목마른 듯 
     우러러 부처님께 귀의하여 삭발하였습니다.”(『楞嚴經』 大19 p.106c22. 常自思惟, 
     此相, 非是欲愛所生. 何以故, 欲氣麤濁, 腥臊交遘, 膿血雜亂, 不能發生, 勝淨妙明, 
     紫金光聚. 是以, 渴仰從佛剃落.)
128)『從容錄』35則 大48 p.260b22「착어」에 동일한 문장이 보인다.
129) 니리(泥梨). niraya. 나락가(那落迦 naraka)와 마찬가지로 지옥을 나타내는 
     말이다.
130) 확탕(鑊湯)은 끓는 솥에서 삶아지는 고통을 받는 지옥, 노탄(爐炭)은 숯불이 
     벌겋게 달아오르는 화로에 떨어지는 고통을 받는 지옥, 검수(劒樹)는 잎이 모
     칼로 이루어진 나무들이 빽빽이 서 있는 산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 지옥, 도산(刀山)은 
     칼이 하늘을 향해 꽂혀 있는 산에 떨어져 고통을 받는 지옥이다.
131) “한 번 잘못하여 법과 오래도록 멀어지면 억천 겁이 흘러도 다시 만날 수 없다.
     마치 바늘 하나가 깊은 바다에 빠지면 아무리 반복하여 찾아보아도 쉽게 찾을
     수 없는 것과 같다.”(『超日明三昧經』 권하 大15 p.547a5. 若一蹉跌, 與法永違, 
     於億千劫, 未卒値遇, 猶如一鍼, 墮深大海, 反覆求索, 寧易致乎?)
132) ‘朽’의 오기로 보인다.

[평2]

위의 법어는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보면 차가운지 따뜻한지 저절로 

수 있는 것133)과 같다. 총명으로는 업을 대적할 수 없고134) 

간혜135)로는 생사윤회라는 고통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136) 

각자 마땅히 자세히 살피고 생각에 붙여두되 스스로 속아서는 안 될 

것이다.

評曰 上來法語, 如人飮水, 冷暖自知. 聰明不能敵業, 乾慧未
免苦輪. 各須察念, 勿以自謾.
133)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는 직접 마셔보기만 하면 저절로 알 수 있다는 말. 
     깨달음은 스스로 체험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그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그것을 적절히 
     밝힐 수 없다는 것을 비유한다. 곧 성인들의 체험을 전하는 경전이나 어록의 말씀도 
     자기 스스로 그 경지에 도달해야 온전히 알 수 있다는 뜻이다.
134) “총명하고 영리한 사람은 총명한 재능에 장애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까닭에 도안이 열리지 않아 가는 곳마다 막히게 되는 것입니다. 중생은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심의식(心意識)의 부림을 당하여 나고 죽는 세계에 반복하여 유랑하므로 
     자유자재하게 되지 못합니다. 진실로 생사의 굴레를 벗어나 탁 트이고 활발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단칼에 두 동강을 내듯이 심의식의 길을 끊어버려야 
     비로소 본분과 상응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書狀』「答王敎授」大47 p.934b20. 
     靈利人, 多被聰明所障. 以故, 道眼不開, 觸途成滯. 衆生無始時來, 爲心意識所使, 
     流浪生死, 不得自在. 果欲出生死, 作快活漢, 須是一刀兩段, 絶却心意識路頭, 方有少
     分.)
135) 간혜(乾慧). śukla-vidarśanā, tarka. 여러 가지 알음알이를 내지만 선정(禪定)을
     닦아 실다운 것으로 하지 못한 상태. 이러한 지혜를 지니고 있는 지위를 간혜지
     (乾慧地)라고 한다. 법성(法性)의 이수(理水)로 윤택하게 하지 못했기 때문에 말
     랐다는 뜻으로 ‘간’이라고 한다.
136)『景德傳燈錄』권28「大達無業傳」大51 p.444c17,『聯燈會要』권5「大達無業章」
     卍136 p.506a3 참조.

 

23. 

말만 배우는 무리137)들은 법을 설할 때는 깨달은 듯 보이지만 경계를 

마주하면 도리어 미혹될 뿐이니, 이들을 두고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들이라고 한다.

學語之輩, 說時似悟, 對境還迷, 所謂言行相違者也.
137) “본래 신통력으로 괴이한 현상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들의 본분사와는 관계가
     없다. 말만 배운 무리들은 스스로 자신을 살펴 잘못을 알지 못하고 다만 허공에
     서 꽃을 꺾고 물속에서 달을 건져내려는 듯이 하려고만 하니 어떻게 이 마음의
     힘을 붙이고 궁구할 수 있겠는가!”(『景德傳燈錄』권20「瑞龍幼璋傳」p.367
     b16. 自是神通作怪, 非干我事. 若是學語之輩, 不自省己知非, 直欲向空裏采華, 
     波中取月, 還著得心力麽!)

 

[평]

이것은 앞서 말했던 ‘스스로를 속인다’는 뜻을 결론지은 것이다. 말과

행동이 어긋나기에 거짓인지 참인지를 가려낼 수 있다.

此, 結上自謾之意. 言行相違, 虛實可辨.

 

24. 

생사를 대적하려면 이 한 생각138)이 ‘탁!’ 하고 단번에 타파되는 경지를 
얻어야139) 비로소 생사에서 벗어나는 도리를 분명히 알아차릴 것이다.140)

若欲敵生死, 須得這一念子, 爆地一破, 方了得生死.
138) 일념자(一念子). 화두 곧 화두라는 단 하나의 생각. 공부를 할 때는 화두 이외에
     다른 생각이 파고들어 오면 안 되기 때문에 한 생각[一念]이라 한다.
139) 막혔던 장애가 한꺼번에 폭발하듯이 무너지는 것. 궁구하던 화두가 한순간에 
     타파되는 상황을 묘사한다. “시신을 지키는 귀신들과 같이 화두를 항상 지키며 들고 
     있다가 의심덩어리가 갑자기 ‘탁!’ 하고 한 소리를 내며 타파되면 틀림없이 하늘을 
     놀라게 하고 땅을 흔들 것이니 노력하고 노력하라.”(『禪要』「示衆」2 卍122
     p.707a9. 如箇守屍鬼子, 守來守去, 疑團子, 欻然爆地一聲, 管取驚天動地, 勉之勉之.)
140) “만일 가장 빠른 길로 이해하고 싶다면 이 한 생각이 ‘탁!’ 하고 한 번에 타파되는 
     경지를 얻어야 비로소 생사의 도리를 분명히 알아차릴 것이며, 비로소 깨달았다고 
     할 것입니다.”(『書狀』「答富樞密」大47 p.921c2. 若要徑截理會, 須得這一念子, 
     嚗地一破, 方了得生死, 方名悟入.)

 

[평]

‘폭’이란 칠통141)을 깨뜨리는 소리다. 칠통을 깨뜨린 후에야 생사를 

적할 수 있다. 모든 부처가 수행 단계인 인위(因位)에서 행한 법(法)은 

직 이것일 뿐이다.

爆, 打破漆桶聲. 以打破漆桶, 然後生死可敵也. 諸佛因地法
行者, 只此而已.
141) 漆桶. 시커먼통. 보통은 사물의 이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모든 분별이 차단되어 더듬고 모색할 여지가 없는 화두 자체를 
     비유하는 이다.

 

25. 

그러나 한 생각이 폭발하듯이 단번에 타파된 후에는 반드시 눈 밝은

선지식을 찾아가서 올바른 안목을 갖추었는지 점검받아야 한다.142)
然, 一念子爆地一破, 然後須訪明師, 決擇正眼.
142) “진실로 이 경지에 이르면 문 무명이 깨어지고 확 트인 듯이 크게 깨달을 
     것입니다. 깨달 다음에는 반드시 본색(本色)을 갖춘 종장(宗匠)을 친견하여 
     자신이 깨우친 경지가 궁극적인 뜻에 맞는지 점검받아야 합니다. 만일 종사를 
     친견하여 점검받지 않는다면 열이면 열 모두 마구니가 될 것입니다.”(『太古語錄』
     권상 韓6 p.678b16. 實到此田地, 則驀然無明破, 豁然大悟矣. 悟後須見本色宗匠, 
     決擇究竟. 若不見宗師, 則十箇五雙, 成魔去也.);“그래서 ‘참선하려면 반드시 깨
     달아야 하고, 깨닫고 나면 반드시 (점검해줄) 사람을 만나야 한다’라고 말한다. 
     만약 밝은 눈을 가진 종사로부터 인증(印證)을 구하지 않는다면, 마치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이해하여 급제는 했지만 관직에 오르지 못하는 것과 흡사할 것이다.”
     (『兀菴普寧語錄』권상 卍123 p.14b5. 所以道, ‘參禪須是悟, 悟了須遇人.’ 
     若不求明眼宗師印證, 譬如讀書發解及第了, 不得轉官相似.)

[평]

이 일은 극도로 어려우니 겸손한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도는 바다와 

아서 들어갈수록 더욱 깊어지는 것이니 작은 결과를 얻고 만족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깨달은 후에 점검받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한다면, 

제호의 뛰어난 맛이 도리어 독약이 되는 격이다.

此事, 極不容易, 須生慚愧, 始得. 道如大海, 轉入轉深, 愼勿
得小爲足. 悟後若不見人, 則醍醐上味, 翻成毒藥.

26. 

고덕[ 山]은 “오로지 그대의 안목이 바른지 만을 귀하게 여길 뿐, 

대가 어떻게 수행할지는 대수롭게 여기지 마라” 고 하였다.

古德云,“ 只貴子眼正, 不貴汝行履處.”

 

 [평]

지난날 앙산이 위산의 물음에 답하기를 “『열반경』40권143)은 모두 

마구니의 말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앙산의 바른 안목이다. 앙산이 

다시 수행법에 관해 묻자 위산은 “오로지 그대의 안목이 바른지 만을 

귀하게 여길 뿐이다”144)라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먼저 바른 안목을 

뜨고 난 이후에 수행에 관해 말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수행을 하고자 

하면 먼저 단박에 깨달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昔仰山答潙山問云, “涅槃經四十卷, 總是魔說.” 此, 仰山之正
眼也. 仰山又問行履處, 潙山答曰, “只貴子眼正.” 云云. 此所
以, 先開正眼而後說行履也. 故云,“ 若欲修行, 先須頓悟.”
14) 북량(北涼)의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40권본 『大般涅槃經』을 말한다.
144) “위산이 앙산에게 ‘『열반경』 40권은 얼마간이 부처의 말이고 얼마간이 마구니의 
     인가?’라고 묻자 앙산이 ‘모조리 마구니의 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후에는 
     아무도 너를 어쩌지 못하리라.’ ‘제가 일생동안 어떻게 수행해야 합니까?’ ‘오로지 
     그대의 안목이 바른지 만을 귀하게 여길 뿐 그대가 어떻게 수행할지는 말하지 마라.’”
     (『德傳燈錄』 권9 大51 p.265a26. 師問仰山, ‘涅槃經四十卷多少佛說多少魔說?’ 
     仰山云, ‘總是魔說.’ 師云, ‘已後無人奈子何.’ 仰山云, ‘慧寂卽一期之事, 行履在什麽處?’ 
     師云, ‘只貴子眼正, 不說子行履.’)

 

마음의 근원

 

27. 

모든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깊이 믿어서145) 굽히지도 않고 내세우지도 

않기를 바라노라.

願諸道者深信自心, 不自屈不自高.
145) 종밀(宗密)의 말. “비록 이 마음이 범부와 성인에게 평등하게 있더라도 과위는
     드러나서 쉽게 믿을 수 있지만 인위는 감추어져 설명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얕게 
     아는 이들은 인위를 가볍게 여기고 과위를 귀중하게 여기기 마련이다. 도위(道位)의 
     모든 수행자가 자신의 마음을 깊이 믿기를 바란다.”(『圓覺經略疏』 권상大39 p.535c10. 
     然雖此心凡聖等有, 但果顯易信, 因隱難明. 故淺識之流, 輕因重果. 願諸道者深信自心.)

 

[평1]

마음은 평등하여 본래 범부와 성인의 차별이 없지만 사람에 따라 미혹[迷]과 

깨달음[悟] 또는 범부[凡]와 성인[聖]이라는 구별이 있다. 스승의 깨우침에 

의해 참된 자아[眞我]와 부처가 다르지 않음을 홀연하게 깨닫는 것이 돈(頓)이다. 

이것이 자기를 굽히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니 “본래 하나의 그 무엇도 없다”146)고 

한 말과 같다. 깨달음에 의하여 습기를 끊고 범부가 바뀌어 성인이 되는 것이 

점(漸)이다. 이것이 자기를 내세우지 않아야 하는 이유이니 “항상 부지런히 털고 

닦는다”147)라는 말과 같다. 굽히는 것은 교(敎)를 배우는 자의 병통이고 내세우는 

것은 선(禪)을 배우는 자의 병통이다. 교를 배우는 자는 선가(禪家)에 깨달음의 

비결이 있음을 믿지 못하고, 방편적 가르침에 깊이 빠져 진실과 망상이 다르다고 

집착하며, 관행을 닦지 않으니 남의 진귀한 보배를 헤아리기만 하는 격148)이다. 

그러므로 물러나 굽히는 마음을 일으킨다. 선을 배우는 자는 수행하여 번뇌를 

는 바른 길이 교문(敎門)에 있음을 믿지 않고 번뇌에 물든 습관적 기운이

일어나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비록 깨우친 단계가 초심자 수준임에도 자신이 

깨우친 법에 대하여 교만한 생각이 넘쳐 하는 말마다 지나치게 거만한 것이다. 

이런 까닭에 마음을 닦으려는 뜻을 가진 자는 스스로를 굽히지도 말고 내세우지도 

말아야 한다.

此心平等, 本無凡聖, 然約人有迷悟凡聖也. 因師激發, 忽悟眞
我與佛無殊者, 頓也. 此所以不自屈, 如云“本來無一物”也. 
因悟斷習, 轉凡成者, 漸也. 此所以不自高, 如云“時時勤拂
拭”. 屈者, 敎學者病也. 高者, 禪學者病也. 敎學者, 不信禪
有悟入之秘訣, 深滯權敎, 別執眞妄, 不修觀行, 數他珍寶,
故自生退屈也. 禪學者, 不信敎門有修斷之正路, 染習雖起, 不
生慚愧, 果級雖初, 多有法慢, 故發言過高也. 是故, 得意修心
者, 不自屈不自高也.
146) 주석1) 참조.
147) 신수(神秀)의 게송.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밝은 거울의 받침대이니, 
     늘 털고 닦기에 힘써, 먼지와 티끌이 끼지 않게 하라.”(宗寶本 『壇經』 
     大48 p.348b24.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
148) “비유하자면 가난한 사람이 밤낮으로 다른 사람의 보배를 헤아려도 자신에게
      는 반 푼어치도 없는 것과 같으니, 교설에 대해서 많이 듣기만 하는 것 역시 이와 
      같다.”(60권본『華嚴經』권5 大9 p.429a3. 譬如貧窮人, 日夜數他寶, 自無半錢分,
      多聞亦如是.);“남의 보배를 헤아린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證道歌』大48
     p.396c7. 數他珍寶有何益?)

 

[평2]

스스로 굽히지도 않고 내세우지도 않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까운 로 

초심자에 대하여 말하자면 인위(因位)에 바다와 같이 무수한 덕을 구현한 

과위(果位)를 갖추고 있으니, 십신(十信)의 첫 번째 계위일지라도 그렇기 

때문이다. 먼 예로는 보살에 대하여 말하자면 과위가 인위의 근원과 

통하니, 55위의 보살 계위가 모두 그렇기 때문이다.149)
評曰 不自屈不自高者, 略擧初心, 因該果海, 則雖信之一位也. 
廣擧菩薩, 果徹因源, 則五十五位也.
149) “만약 ‘인위가 바다와 같이 무수한 덕을 구현한 과위를 갖추고 있고 과위가 
     인위의 근원과 통하여 있다’라고 한다면 이 두 가지가 상호 침투하여 깊은 도리가
     드러나게 된다. 처음 마음을 일으킬 때에 곧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는 것은 인위가 
     과위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며, 비록 불도를 터득하더라도 인위의 방법을 버리지 
     않는 것은 과위가 인위와 통하고 있기 때문이다.”(『華嚴經隨疏演義鈔』 권1
     大36 p.3b15. 若云, ‘因該果海, 果徹因源’, 二互交徹, 則顯深也. 初發心時, 便成正覺, 
     因該果也. 雖得佛道, 不捨因門, 果徹因也.)

 

28. 

마음을 모르고 도를 닦으면 무명만 늘어나게 할 뿐이다.150)
迷心修道, 但助無明.
150) 종밀(宗密)의 다음 말을 축약한 구절. “미혹된 마음으로 도를 닦으면 설령 
     갖가지 수행의 방편에 의지하여 부지런히 애쓰더라도 무명만 늘어나게 할 뿐이니
     어떻게 불과(佛果)를 이루겠는가?”(『圓覺經略疏』 권하1 大39 p.564b23. 迷心修道,
     縱令勤苦種種行門, 但助無明, 何成佛果?)

 

[평]

깨달음151)이 철저하지 못하다면 수행이 어찌 진실과 부합하겠는가! 

깨달음과 수행의 관계는 마치 등잔의 기름과 등불이 서로 의지하고 

눈과 다리가 서로 돕는 것과 같다.152)
悟若未徹, 修豈稱眞哉! 悟修之義, 如膏明相賴, 目足相資.
151) ‘궁극적 깨달음’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으로서의 마음을 ‘바르게 아는 것’을 
     말한다.
152) 지의(智顗)의『摩訶止觀』권5상 大46 p.48c29, 징관(澄觀)의『華嚴經疏』 
     권21 大35 p.654b13 등에 나오는 비유이며, 종밀도 이 비유를 쓰고 있다. 다리와 
     등잔의 기름은 수행, 눈과 등불은 깨달음을 각각 비유한다. “법에 대한 이해에 
     근거하여 수행해야 비로소 진실한 수행이 되니, 등잔의 기름과 등불이 서로 
     의지하고 눈과 다리가 서로 돕는 것과 같다.”(『圓覺經略疏』권하1 大39 p.557c23. 
     依解而修, 方爲妙行, 膏明相賴, 目足更資.)

 

29. 

수행의 요체는 다만 범부의 망상을 없애는 것일 뿐, 별도로 성인의 경지에 

대하여 이해할 일은 없다.153)

修行之要, 但盡凡情, 別無聖解.
153) 범부와 성인을 갈라놓는 이분(二分)에서 일어나는 집착을 경계하고 있다.『楞嚴
     經』 권9 大19 p.147c9에서 “만약 성인의 경지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면 온갖 삿된 
     견해에 물들 것이다(若作聖解卽受群邪)”라고 한 취지와 같다. “편지를 받은 다음 
     더욱 존경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인연에 따라 마음을 드넓게 하여도 
     생각대로 자유자재하신지요? 사위의 속에서 번뇌망상의 지배를 받지 않으시는지요? 
     깨어 있거나 잠드는 두 경계에서 한결같이 화두가 들리는지요? 이전부터 잘해왔던 
     공부 방식을 마음 밖의 대상에서 찾는 일은 없으신지요? 생사심 속에서도 화두가 
     이어지는지요? 다만 범부의 분별을 없애면 될 뿐, 별도로 성인의 경지에 대하여 
     이해할 일은 없습니다.”(『書狀』「答李參政」第二書 大47 p.920b24. 信後, 益
     增瞻仰. 不識, 日來隨緣放曠, 如意自在否? 四威儀中, 不爲塵勞所勝否? 寤寐二邊, 

     得一如否? 於仍舊處, 無走作否? 於生死心, 不相續否? 但盡凡情, 別無聖解.)

[평]

병이 사라지고 약도 제거되면 다시 본래의 그 사람이다.154)
病盡藥除, 還是本人.
154) 범부의 망상이 병이고 성인의 경지는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처방한 약과 같아서 망상이 사라지면 별도로 추구할 성인이라는 경지도 없다는
     뜻. “부처는 중생의 약이지만, 중생의 병이 제거되면 약 또한 쓸모가 없다. 만일
     병이 제거되고도 약을 남겨둔다면 부처의 경지에는 들어갈 수 있지만 마구니의
     경계로 들어갈 수 없으니, 그 병은 중생의 제거되지 않은 병과 같은 것이다. 병이 
     나으면 약도 버려서 부처와 마구니를 모두 쓸어 없애야 비로소 일대사 인연과 
     조금 상응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大慧語錄』 권19 大47 p.891a3. 佛是衆生藥,
     衆生病除, 藥亦無用. 或病去藥存, 入佛境界, 而不能入魔境界, 其病與衆生未除之病
     等. 病瘥藥除, 佛魔俱掃, 始於此段大事因緣, 有少分相應耳.)

 

30. 

중생의 마음을 버릴 필요 없이 다만 자신의 본성이 번뇌에 물들지 

도록 하라.155) 정법(正法)을 구하려는 마음이 바로 삿된 것이다.

不用捨衆生心, 但莫染汚自性. 求正法是邪.
155) 대주혜해(大珠慧海)의 말이다.『景德傳燈錄』권28「越州大珠慧海和尚語」  
     大51 p.443a13 참조. 대주혜해는 이 말에 이어 60권본『華嚴經』권10 大9 
     p.465c29에 나오는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세 가지는 차별이 없다(心佛
     及衆生, 是三無差別)”라는 구절을 전거로 들고 있다.

 

[평]

버리려는 것과 구하려는 것은 모두 번뇌에 물든 것이다.

捨者求者, 皆是染汚也.

 

 31. 

번뇌를 끊는 것은 이승이라 하고,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야 대열반이라 한다.156)
斷煩惱, 名二乘;煩惱不生, 名大涅槃.
156) 전거는 다음과 같다. “번뇌를 끊는 것은 열반이라 하지 않으며, 번뇌를 일으키지
     않아야 열반이라 한다.”(『大般涅槃經』권25 大12 p.514c24. 斷煩惱者, 不名涅
     槃;不生煩惱, 乃名涅槃.)

 

[평]

끊는다는 말은 끊는 주체[能]와 끊을 대상[所]이 나누어져 있다는 뜻이며,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은 주체와 대상의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157)
斷者, 能所也;不生者, 無能所也.
157) 번뇌와 열반이 두 가지 차별된 경계가 아니라는 도리에 기초한다. “번뇌를 끊고
     열반에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大乘起信論』大32 p.578c8. 斷煩惱入
     涅槃者, 卽無有是處.);“진실로 통하는 자라면 벽도 그를 가로막을 수 없다. 이러
     면 다시 번뇌를 불사(佛事)로 삼게 되는데, 이를 가리켜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간다’라고 하는 것이다.”(『維摩經略疏』 권4 大38 p.612b26. 如得通者, 壁
     不能礙. 是則還用煩惱以爲佛事, 是名不斷煩惱而入涅槃.)

 

32. 

모름지기 텅 빈 마음으로 스스로 비추어 보고, 한 찰나의 연기도 발생함이

없다158)고 알라.159)
須虛懷自照, 信一念緣起無生.
158) 두 번째 구절은 이통현(李通玄)의 말이며, 임제(臨濟) 등의 선사들이 즐겨 
     활용했다. “공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은 공이라야 그 공이 헛되게 버려지지 
     않으며, 공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공은 그 공이 모두 무상하다. 수많은 겁의 
     세월 동안 수행을 쌓아도 끝내 사라지고 말 것이니, 한 찰나의 연기도 발생
     함이 없어서 저 삼승 권학(權學) 보살들의 견해를 넘어서는 것만 못하다.”
     (『新華嚴經論』권1 大36 p.724a22. 無功之功, 功不虛棄;有功之功, 功皆
     無常. 多劫積修, 終歸敗壞, 不如一念緣起無生, 超彼三乘權學等見.)『臨濟
     語錄』大47 p.502c21 참조.
159) 보조지눌(普照知訥)의 저술에 두 구절 온전히 드러나 있다. “비록 말세의 
     중생이라도 마음의 크기가 드넓은 자라면 텅 빈 마음으로 스스로 비추어 
     보아 한 찰나의 연기도 발생함이 없다고 알 것이다. 비록 아직은 몸소 증
     득하지 못했더라도 이것은 도를 깨달을 바탕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法集別行錄節要』普照全書 p.152. 雖是末世衆生, 若心量宏闊者, 亦
     可虛懷自照, 信一念緣起無生矣. 雖未親證, 亦爲入道之基本也.)

 

[평]

이는 오로지 성기(性起)160)의 측면만 밝힌 것이다.

此單明性起.
160) 성기란 궁극적 경지인 불과(佛果)의 경계 곧 과위(果位)에서 온갖 현상이 일어
     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오로지 청정할 뿐 오염은 없다. 그러므로 ‘한 찰나의 연기도 
     발생함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반면 연기는 오염되거나 청정하거나 두 가지 차별된 
     인연에 따라 온갖 현상을 일으키는 작용으로 인위(因位)의 경계에서 현상의 발생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연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오염된 연기이고 다른 하나는 
     청정한 연기이다. 청정이란 여래의 완전한 자비와 보살의 만행 등을 말하고, 오염이란 
     중생이 일으키는 미혹된 업과 같은 것들이다. 만약 오염으로 청정을 부정하면 중생에 
     속하므로 오로지 연기일 뿐이다. 여기서는 청정으로 오염을 부정하니 오로지 부처님
     들의 연기에 속하기만 하므로 성기라 한다.”(『華嚴經隨疏演義鈔』권79 大36 p.615
     a24. 緣起有二, 一染二淨. 淨謂如來大悲, 菩薩萬行等;染者, 謂衆生惑業等. 若以染
     奪淨, 則屬衆生, 故唯緣起. 今以淨奪染, 唯屬諸佛, 故名性起.)

33. 

살생·도둑질·사음·망어161)가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자세히 

관찰하라. 일어나는 바로 그 자리가 고요하다면 어찌 다시 끊을 필요가 

있겠는가!162)
諦觀殺盜淫妄, 從一心上起. 當處便寂, 何須更斷!
161) 네 종류의 근본 중죄(重罪)이므로 사중금(四重禁)이라 한다.
162)『宗鏡錄』권18 大48 p.511c14에 나오는 말. 보조지눌(普照知訥)의『修心訣』
     大48 p.1007c20에도 인용되어 있다.

 

[평]

이 구절은 성(性)과 상(相)을 함께 밝혔다. 경에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아야 무명을 영원히 끊었다고 한다”163)고 하였고, 또한 “생각이 

일어나면 곧바로 (일어났다고) 알아차려라!”164)고 하였다.
此雙明性相. 經云,“ 不起一念, 名爲永斷無明.” 又云,“ 念起卽覺.”
163) 두 구절 모두 일치하는 경전은 없지만, 두 번째 구절은『圓覺經』大17 p.913b22의 
     인용으로 보인다. “영원히 무명을 끊었다:본각(本覺)이 일단 나타나면 본래 없었던 
     무명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이것을 가리켜 ‘영원히 끊어졌다’라고 한다.”(『圓覺
     經略疏』권상1 大39 p.533a8. 永斷無明:本覺旣顯, 無明本無, 畢竟不生, 名爲永斷.)
164) 종밀(宗密)의 말이다. “모든 차별상이 공(空)이라고 알아차리면 마음에서 상념
     (想念)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다. 상념이 일어나면 일어난 그대로 알아차려라. 
     알아차리는 순간 상념은 사라질 것이다. 수행의 미묘한 방법은 오직 여기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비록 온갖 수행을 갖추어 닦지만 오로지 무념(無念)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다.”(『都序』권상2 大48 p.403a4. 覺諸相空, 心自無念. 
     念起卽覺. 覺之卽無. 修行妙門, 唯在此也. 故雖備修萬行, 唯以無念爲宗.)
    『修心訣』大48 p.1007c22에도 인용되어 있다.

 

34. 

모든 것이 마술과 같은 현상[幻]인 줄 아는 순간 그것에서 벗어나게 되어 

어떤 방편도 지어낼 필요가 없고, 마술과 같은 현상을 벗어나는 순간

깨닫게 되니 점차로 밟아갈 방편도 필요 없다.165)
知幻卽離, 不作方便, 離幻卽覺, 亦無漸次.
165)『圓覺經』大17 p.914a20에서 마술과 같이 헛되게 나타나는 모든 현상의 공성
     (空性)을 깨닫고 그것에 대한 속박을 벗어나는 수행의 기초로 제시된 구절이다.
    『圜悟語錄』권6 大47 p.740c22를 비롯하여 여러 선문헌에 인용 빈도가 높다.

 

[평]

마음은 마술사[幻師]이고 몸은 마술로 나타난 성(城)이며 세계는 

마술의 옷이고 이름과 모양은 마술로 나타난 음식이다.166) 

마음을 일으키고 상념을 움직이며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말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마술 아닌 현상은 없다.167) 또한 시작도 알 수 

없는 때로부터 이어져 온 마술과 같은 무명도 모두 깨달은 

마음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니, 마술의 현상 하나하나가 허공에 

핀 꽃과 같지만 그 현상이 소멸하면 동요하지 않게 되기에 부동

(不動)이라 한다. 그러므로 꿈에 상처가 나서 의사를 찾던 

사람이 깨어나면 어떤 방편도 필요 없어지는 것과 같으니, 

모든 것이 마술과 같은 현상인 줄 아는 사람도 이와 같다.

心爲幻師也, 身爲幻城也, 世界幻衣也, 名相幻食也. 至於起心
動念, 言妄言眞, 無非幻也. 又無始幻無明, 皆從覺心生, 幻幻如
空花, 幻滅名不動. 故夢瘡求醫者, 寤來無方便, 知幻者, 亦如是.
166) 대주혜해(大珠慧海)의 말에 따른다. 본래 없는 것을 있는 듯이 펼치는 ‘마술’은
     언어의 방편을 비유하며, ‘마술사’는 중생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그 방편을 
     펼치는 불조(佛祖)를 나타낸다. 80권본『華嚴經』권52 大10 p.276c12 등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혜의 방편’을 마술[幻術]에 비유하고 그것을 펼치는
      마술사라 합니까?’ ‘마음을 위대한 마술사라 하고, 몸은 그 마술의 성이며, 이름과 
     형상은 그 마술의 옷과 음식이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에 이 마술을 벗어나는 
     현상은 없다. 범부는 그것이 마술의 현상인 줄 모르고 곳곳에서 마술의 작용에 
     미혹되고, 성문은 마술의 경계를 두려워하여 마음을 어둡게 닫고 고요한 경계로 
     들어가며, 보살은 마술과 같은 법을 알고 그 본질이 마술임을 통달하여 모든 
     이름과 형상에 속박되지 않는다. 부처님은 위대한 마술사로서 그 마술과 같은 
     법의 수레바퀴를 굴려 마술의 열반을 완성하고 마술의 생성과 소멸을 바꾸어 
     생성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경지를 성취한다.’”(『景德傳燈錄』권28
    「越州大珠慧海和尚語」 大51 p.443b25. 問, ‘何名大幻師?’ 師曰, ‘心名大幻師, 
     身爲大幻城, 名相爲大幻衣食, 河沙世界, 無有幻外事. 凡夫不識幻, 處處迷幻業;
     聲聞, 怕幻境, 昧心而入寂;菩薩, 識幻法達體幻, 不拘一切名相;佛, 是大幻師,
     轉大幻法輪, 成大幻涅槃, 轉幻生滅, 得不生不滅.’)
167) ‘마음을 일으키고’라는 구절부터 여기까지는『圓覺經』大39 p.538b10의 인용이다.

 

35. 

중생은 생멸이 없는 경계에서 망령되게 생사와 열반의 차별이 있다고 

보니, 마치 허공에서 꽃이 피었다 지는 환영을 보는 것과 같다.

衆生於無生中, 妄見生死涅槃, 如見空花起滅.

 

[평]

본성에는 원래 생멸이 없으므로 생사와 열반의 차별도 없고,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으므로 피었다가 지는 일도 없다.168) 생사가 있다고 보는 

는 허공에서 꽃이 피는 환영을 보는 것과 같고, 열반이 있다고 보는 

자는 허공에서 꽃이 지는 환영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어나도 

본래 일어남이 없고 사라져도 본래 사라짐이 없으니, 이 두 가지 

견해는 깊이 궁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사익경』에 “모든 

부처님이 세상에 나타나신 목적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사와 열반이라는 두 가지 견해를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169)라고
한 것이다.
性本無生, 故無生涅也;空本無花, 故無起滅也. 見生死者, 如
見空花起也;見涅槃者, 如見空花滅也. 然起本無起, 滅本無
滅, 於此二見, 不用窮詰. 是故, 思益經云, “諸佛出世, 非爲度
衆生, 只爲度生死涅槃二見耳.”
168)『圓覺經』大17 p.915c12의 다음 내용과 같다.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으니, 
     허공에는)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현상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생사와 열
     반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현상과 같다.”(空本無花, 非起滅故, 生死
     涅槃, 同於起滅.)
169)『思益經』권1 大15 p.36c12의 다음 단락을 요약한 내용이다. “마땅히 알라!
     부처님은 중생을 생사로부터 벗어나 열반에 들어가도록 하신 것이 아니라 다
     만 망상에 따라 생사와 열반을 두 가지 차별상으로 분별하는 자들을 제도해 
     주이다. 여기에는 진실로 생사를 건너 열반에 이른 자는 없다. 왜 그런
     ? 모든 법은 평등하여 오고 가는 움직임이 없으며 생사로부터 벗어남도 
     없고열반으로 들어감도 없기 때문이다.” (當知! 佛不令衆生出生死入涅槃, 
     爲度妄想分別生死涅槃二相者耳. 此中實無度生死至涅槃者. 所以者何. 諸
     法平等, 無有往來, 無出生死, 無入涅槃.)

 

36. 

보살이 중을 제도하여 멸도170)에 들게 하지만, 또한 진실로 멸도를

얻는 중생은 없다.171)
菩薩度衆生入滅度, 又實無衆生得滅度.
170) 滅度. 열반( nirvāna, nibbāna)의 한역어. 적멸(寂滅)·무생(無生) 등이라고도 한다.
171)『金剛經』大8 p.749a9.

 

[평]

보살은 다만 낱낱의 상념을 중생으로 삼을 뿐이다. 상념의 본체가 공이라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며, 상념이 텅 비고 고요하면 

진실로 멸도를 얻는 중생도 없다. 이상 신해(信解)172)에 대하여 언급했다.
菩薩, 只以念念爲衆生也. 了念體空者, 度衆生也;念旣空寂
者, 實無衆生得滅度也. 此上論信解.
172) 근본적인이치를 확고히 믿고 이해하는 것.

 

실천의 조목

 

37. 

이치로는 비록 단번에 깨달을 수 있지만, 구체적인 실행으로는 번뇌망상이 

단번에 제거되지 않는다.173)
理雖頓悟, 事非頓除.
173) “이치로는 단번에 깨달아 그 깨달음과 동시에 번뇌망상도 아울러 녹아 없어지
     지만, 구체적인 실행으로는 단번에 제거되지 않으니 수행의 순서와 단계에 따
     라 사라진다.”(『楞嚴經』권10 大19 p.155a12. 理則頓悟, 乘悟倂銷. 事非頓除, 
     因次第盡.);“비록 법신과 진심을 단번에 깨달아 부처님들의 경지와 완전히 같
     더라도, 오랜 겁의 세월 동안 사대(四大)의 육신을 자아로 망령되게 집착함으로써 
     그러한 습기가 본성이 되어버렸기에 한순간에 단번에 제거될 수 없다. 그러므로 
     깨달음에 의지하여 점차로 닦으며 덜어내고 또 덜어내어 덜어낼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르면 성불이라 한다.”(『法集別行錄節要』普照全書 p.117. 雖頓悟法身眞心, 
     全同諸佛, 而多劫妄執四大爲我, 習與成性, 卒難頓除. 故須依悟漸修, 損之又損, 
     乃至無損, 卽名成佛.)

 

[평]
문수는 천진한 이치에 통달했고, 보현은 연기에 밝았다.174) 이해는 번갯불과 
같이 빠르지만 실행은 궁자175)와 같이 느리다. 
이하에서는 수행과 증득[修證]에 대하여 말하겠다.
文殊達天眞, 普賢明緣起. 解似電光, 行同窮子.

此下論修證.
174) 문수보살을 돈오에, 보현보살을 점수에 배대한 방식은 주로 『원각경』 주석서에
     보이는 해석 방식이다. 한편 이러한 방식은 종밀이 제시한 돈오점수의 돈점관에
     근거하고 있다. “『원각경』「문수보살장」은 돈오를 밝힌 것이니 믿고 이해하는 
     도리를 드러내는 장이고,「보현보살장」 아래 10개의 장은 점수를 밝힌 것이니 곧
     믿고 이해한 것을 바탕으로 수행하는 방법을 드러낸 장이다.”(『圓覺疏鈔隨文要解』 
     卍15 p.653a13. 文殊一章, 爲頓悟, 卽是信解;普賢下十章, 爲漸修, 謂依解修行.)
175) 子. 빈궁한 자식.『法華經』권2「信解品」大9 p.16b25에 나온다. 거부인 
     장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출하여 가난하게 살았는데, 어느 날 돌아와 부친인 
     장자 에서 처음에는 빈천한 일을 하다가 서서히 재물을 물려받고 자신의 본래 
     자리를 찾게 되었다. 궁자는 이승(二乘), 재물은 대승의 교설, 장자는 부처님을 비
     유한다.

38. 

음행하면서 선(禪)을 닦으면 모래를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살생하면서 선을 닦으면 자신의 귀를 막고 소리를 지르며 남들이 듣지 않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도둑질하면서 선을 닦으면 새는 그릇이 차기를 바라는 

것과 같고, 거짓말하면서 선을 닦으면 똥을 전단향( 檀香) 모양으로 새겨서 

향기가 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으니, 설령 지혜가 많더라도 모두 

마도(魔道)가 될 뿐이다.

帶婬修禪, 如蒸沙作飯;帶殺修禪, 如塞耳呌聲;帶偸修禪, 如漏巵求滿;
帶妄修禪, 如刻糞爲香, 縱有多智, 皆成魔道. 176)
176) 『楞嚴經』 권6大19 pp.131c13~132c25에 나오는 내용을 축약했다.

 

[평1]

이것은 수행의 법도인 세 가지 무루학177)을 밝힌 것이다. ‘소승은 법을 

받는 것으로 계를 삼아 지말만 대충 다스리는 반면, 대승은 섭심178)을 

로 삼아 뿌리까지 세밀하게 끊는다. 그러므로 소승의 법계(法戒)는 

몸으로 범하는 잘못만 없고, 대승의 심계(心戒)는 생각으로도 범하는 

잘못까지 없는 것이다.’179) 음행은 청정을 끊어버리고, 살생은 자비를 

끊어버리며, 도둑질은 복덕을 끊어버리고, 거짓말은 진실을 끊어버린다. 

지혜를 완성하여 6신통을 얻더라도 살생·도둑질·음행·거짓말을 끊지 

못한다면 반드시 마도(魔道)에 떨어져 보리(菩提)의 바른 길을 영원히 

잃을 것이다. 이 네 가지 계는 다른 모든 계의 근본이므로 별도로 밝혀서 

생각으로 범하는 잘못이 없도록 하는 것이다. 무억(無憶)은 계이고, 

무념(無念)은 정이며, 막망(莫妄)은 혜이다.180) 또한 ‘계는 도둑을 잡는 

것과 같고, 정은 도둑을 묶는 것과 같으며, 혜는 도둑을 죽이는 것과 

같다.’181) 또한 계라는 그릇이 견고하고 정이라는 물이 맑으면, 

혜라는 달이 비로소 나타난다. 이 삼학은 진실로 만법의 근원이므로 

특별히 밝혀서 온갖 번뇌가 없도록 하는 것이다.

此明修行軌則, 三無漏學也. 小乘, 稟法爲戒, 粗治其末;大乘, 
攝心爲戒, 細絶其本. 然則法戒無身犯, 心戒無思犯也. 婬者, 
斷淸淨;殺者, 斷慈悲;盜者, 斷福德;妄者, 斷眞實也. 能成
智慧, 縱得六神通, 如不斷殺盜婬妄, 則必落魔道, 永失菩提
正路矣. 此四戒, 百戒之根, 故別明之, 使無思犯也. 無憶曰戒, 
無念曰定, 莫妄曰慧. 又戒爲捉賊, 定爲縛賊, 慧爲殺賊. 又戒
器完固, 定水澄淸, 慧月方現. 此三學者, 實爲萬法之源, 故特
明之, 使無諸漏也.
177) 三無漏學. 계(戒)·정(定)·혜(慧)를 말한다. 삼학(三學)이라고도 한다. “섭심(攝心)을 
    계로 삼고, 계로 인하여 정을 일으키며, 정으로 인하여 혜를 일으킨다. 이것을 가리켜 
    세 가지 무루학이라 한다.”(『楞嚴經』 권6 大19 p.131c14. 所謂攝心爲戒, 因戒生定, 
    因定發慧. 是則名爲三無漏學.)
17) 心. 마음을 오로지 하나의 경계에 안주하도록 하여 산란(散亂)과 혼침(昏沈)
     이는 두 가지 병통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방법.
179)『嚴經要解』권12 卍17 p.806b15
180) 무억등 삼구는 정중무상(淨衆無相) 곧 김화상(金和尙 684~762)의 선법이었는데, 
     이를 수용하여 삼학에 적용한 것은 무주(無住)이다.『景德傳燈錄』권4「無住傳」 
     大51 p.234b23.
181)『四分律行事鈔』권중 大40 p.50b6,『首楞嚴經集解熏聞記』권4 卍17 p.640b4 
     등에 나오는 말이지만, ‘爲’자가 모두 ‘如’자로 되어 있다.

 

[평2]

영산회상(靈會上)에 어찌 선행을 하지 않는 부처가 있겠으며, 소림

문하(少林門下)에 어찌 거짓말하는 조사가 있겠는가?182)
靈山會上, 豈有無行佛? 少林門下, 豈有妄語祖
182) 교종(영산회상)이나 선종(소림문하)이나 계를 근본으로 한다는 뜻.

 

39. 

덕이 없는 사람은 부처님의 계에 의지하지 않고 삼업(三業)183)을 

키지 않아서 방탕하고 태만하게 지내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시비를 견주어 헤아리는 것만을 일로 삼는다.184)
無德之人, 不依佛戒, 不護三業, 放逸懈怠, 輕慢他人, 較量
是非, 而爲根本.
183) 몸으로 짓는 신업(身業), 입으로 짓는 구업(口業), 생각으로 짓는 의업(意業)을 말한다.
184)『法集別行錄節要』韓4 p.758b3.

 

[게송]

한번 심계(心戒)185)를 깨뜨리기만 해도 온갖 허물이 한꺼번에 일어난다.

一破心戒, 百過俱生.
185) 계를 마음의 측면과 결합시킨 말.『毘尼母經』에서는 심계라는 말을 선정(禪定)과 
     연결시켜 해석하고 있다. “심계라는 것은 선계(禪戒)이니, 마음을 지키고 산란하지 
     않게 하면 정(定)과 합치된다. 그러므로 심계를 얻었다라고 한다.”(『毘尼母經』 
     권6 大24 p.835a6. 心戒者, 禪戒是也, 持心不散, 得與定合. 故名得心戒也.)

 

[평]

이와 같은 마군이 말법시대에 불처럼 번지듯 일어나 정법(正法)을 

어지럽히니 공부하는 자들은 상세히 살피라.

評曰 如此魔徒, 末法熾盛, 惱亂正法, 學者詳之.

 

40. 
만약 계를 지키지 않으면 비루병에 걸린 여우186)의 몸조차도 받지 못하거늘, 
하물며 청정한 보리과187)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若不持戒, 尙不得疥癩野干之身, 況淸淨菩提果, 可冀乎?
186) 개나야간(疥癩野干).『法華經』등에 경전적 근거가 있다. “(『법화경』을 비방한 
     죄로) 여우가 되어서 마을에 들어가면 몸은 비루병에 걸리고 한쪽 눈도 없어 아이들
     에게 맞고 차이며 온갖 고통을 받는다.”(『法華經』권2 大9 p.15c9. 有作野干, 
     來入聚落, 身體疥癩, 又無一目, 爲諸童子之所打擲, 受諸苦痛.)
187) 菩提果. bauddhī. 모든 수행[因行]의 가장 궁극적인 결과인 보리를 나타내는 말. 
     “모든 죄를 제거하면, 청정한 보리과를 성취한다.”(40권본『華嚴經』권24 大10
     p.772a15. 滅除一切衆罪垢, 成就淸淨菩提果.)

 

[평]

계를 소중히 여기기를 부처님처럼 하면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계시 니, 188)
반드시 초계비구189)와 아주비구190)로써본보기를 삼아야 한다.

重戒如佛, 佛常在焉, 須草繫鵝珠, 以爲先導.
188) 『佛遺敎經註』 卍59 p.12b2에 나오는 동일한 문장을 인용했다.
189) 草繫比丘. 청정하게 계를 지킨 수행자를 대표한다. 『大莊嚴論經』 권3 大4 p.268c4·
     『福蓋正行所集經』 권12 大32 p.744b13 등에 일화가 보인다. 행각하고 있는 비구들이 
     있었는데, 도적을 만나 옷을 빼앗기고 나체인 채로 풀에 묶이게 되었다. 그러나 풀을 
     뜯어 버리고서 자신의 목숨을 구할 수가 없어 비구들은 뜨거운 햇살에 화상을 입으면서
     까지 참고 버티었다. 마침 사냥을 나온 왕이 이 광경을 보고 비구들을 풀어주었으며, 
     왕은 비구들의 지계(持戒)에 탄복하여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190) 鵝珠比丘. 초계비구와 함께 청정하게 계를 지킨 수행자를 대표한다.『大莊嚴論經』 
     권11 大4 p.319a20 등에 일화가 보인다. 비구가 보석 세공가의 집에 탁발을 갔는데, 
     때마침 세공가가 공양할 음식을 가지러 간 사이에 옆에 있던 거위가 세공하던 보석을 
     삼켜버렸다. 음식을 가지고 온 세공가는 없어진 보석을 비구가 훔쳤다고 의심해 추궁
     했다. 비구는 거위가 삼켰노라고 말하면 거위의 배를 가를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에 
     불살생계를 지키기 위해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그 비구는 매질을 당하게 되었지만, 

     며칠 후에 세공가는 거위의 배설물에서 보석을 찾을 수 있었다.

 

41. 

생사의 윤회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면, 먼저 탐욕191)과 모든 갈애192)를 
끊어야 한다.193)
欲脫生死, 先斷貪欲及諸194)愛渴.
192) 渴愛. trsn 3 3 3 ā, pipāsa, tan3 hā, pipāsā, sred-pa. 목마른 사람이 아지랑이를 
     물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강렬한 애착을 갖는 것.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마음의 
     강렬함을 목마른 사람이 물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의 간절함에 비유한 말이다.
193)『圓覺經』大17 p.916b14(是故, 衆生欲脫生死, 免諸輪迴, 先斷貪欲, 及除愛渴.)의 인용.
194)『圓覺經』본문에는 ‘諸’자가 ‘除’자로 되어 있는데, 서산이 바꿔 쓴 것으로 보인다. 
     위의 주석 참조.

 

[평]

애(愛)는 윤회의 근본이 되고 욕(欲)은 생을 받는 인연이 된다. 부처님께서 

“음란한 마음을 제거하지 못하면, 번뇌에서 벗어날 수 없다”195)라 하셨고, 

또 “은애(恩愛)에 한번 속박되면, 속박된 그 사람을 끌어 죄의 문으로 

들어가게 한다”196)라고 말씀하셨다. 갈(渴)이란 정애(情愛)가 간절하다는 

뜻이다.

愛爲輪廻之本, 欲爲受生之緣. 佛云,“ 婬心不除, 塵不可出.”
又云,“ 恩愛一縛着, 牽人入罪門.” 渴者, 情愛之至切也.
195)『楞嚴經』권6 大19 p.131c17.
196)『優填王經』大12 p.72a6.

 

42. 

장애 없는 청정한 지혜는 모두 선정(禪定)에 의해서 생겨난다.197)
無礙淸淨慧, 皆因禪定生.
197) 『圓覺經』 大17 p.919a21.

 

[평]

범인의 경계를 넘어 성인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과 앉아서 해탈하거나

서서 입적하는 것은 모두 선정의 힘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도(道)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 방법을 떠나 다른 길은 없다”198)라고 말한다.
超凡入聖, 坐脫立亡者, 皆禪定之力也. 故云,“ 欲求聖道, 離
此無路.”
198)『都序』권상 大48 p.399b9(故三乘學人, 欲求聖道, 必須修禪, 離此無門, 離此無路)의
     단락을 활용한 문장이다.

 

43. 

마음이 선정(禪定)에 들면 세간의 생멸하는 모든 차별상[相]을 알 수 

있다.199)
心在定, 則能知世間生滅諸相.
199) 『遺敎經』을 인용한 문장이다. “만약 마음의 작용을 모두 거두어들이면 마음이
     선정에 들고, 마음이 선정에 들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생멸하는 법의 차별상을
     알 수 있다.”(『遺敎經』 大12 p.1111c26. 若攝心者, 心則在定. 心在定故, 能知
     世間生滅法相.) 차이는 ‘生滅法相’의 법(法)자를 제(諸)자로 바꾼 점이다.

 

[평]

빈틈으로 햇살이 비치니 가는 먼지 날리고, 맑은 연못 바닥에 달그림자가 

또렷하다.200)
虛隙日光, 纖埃擾擾;淸潭水底, 影像昭昭.
200) 바른 선정(禪定)의 경계에서 차별상에 대한 올바른 분별이 구현된다는 점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정(定)에만 치우친 치선(癡禪)과 혜(慧)에만 기운 광혜
     (狂慧)를 모두 비판한『都序』의 다음 단락을 인용했다. “마침내 대중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서 정을 닦고 혜를 고루 갖추어 전후로 분별사려를 쉰 지 10년이 
     되었다. 그럼에도 미세한 습관적 의식들이 고요한 혜(慧)에 생겼다 사라지고 차별된 
     뜻들이 빈 마음에 전개되어 나타나는 것이 빈틈으로 햇살이 비쳐 가는 먼지 날리고, 
     맑은 연못 바닥에 달그림자가 또렷한 것과 같았다. 어찌 텅 빈 마음으로 침묵을 
     지키기만 하는 치선과 단지 문자만을 파고드는 광혜에 비교할 것인가?”(『都序』
     권상 大48 p.399c12. 遂捨衆入山, 習定均慧, 前後息慮, 相計十年. 微細習情起滅, 
     於靜慧, 差別法義羅列, 見於空心, 虛隙日光, 纖埃擾擾, 淸潭水底, 影像昭昭. 
     豈比夫空守默之癡禪, 但尋文之狂慧者?)

 

44. 

대상을 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불생(不生)이라 하고, 불생을 

념(無念)201)이라고 하며, 무념을 해탈이라고 한다.202)
見境心不起, 名不生;不生, 名無念;無念, 名解脫.
201) 망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 이 문장은 보당무주(保唐無住)의 말이기 때문에 남종
     선(南宗禪)의 종지인 무념과 그 개념이 다르다. 남종선에서는 대상 경계에서 활
     발하게 작용을 일으키면서도 망념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로 무념이라는 말을 
     쓴다. “무념이란 상념 속에 있으면서 그 상념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敦煌本 
     『壇經』 大48 p.338c5. 無念者, 於念而不念 );“어떤 것을 무념이라 하는가? 
     무념법이란 모든 법을 보면서도 어떠한 법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곳에 두루 
     있으면서도 그 어느 곳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항상 자신의 성품을 청정하게
     하여 육적(六賊)으로 하여금 육문(六門:眼·耳·鼻·舌·身·意)을 벗어나게 하여
     육진(六塵:色·聲·香·味·觸·法) 가운데 있더라도 그 경계를 떠나지도 않고 
     물들지도 않으면서 오고 가는 데 자유로우니, 이것이 곧 반야삼매(般若三昧)요 
     자재한 해탈이다. 이것을 무념행이라 한다.”(같은 책 大48 p.340c19. 何名無念? 
     無念法者, 見一切法, 不著一切法, 遍一切處, 不著一切處. 常淨自性, 使六賊從六門走出, 
     於六塵中, 不離不染, 去來自由, 卽是般若三昧, 自在解脫. 名無念行.);“어떤 학인이 
     와륜선사의 게송을 읊었다. ‘와륜은 기량이 있어 모든 생각을 다 끊었다네. 경계를
     대하고도 마음이 일어나지 않으니, 깨달음만 나날이 자라네.’ 혜능대사가 이것을 
     듣 ‘이 게송은 심지를 밝히지 못했으니, 그것대로 따라 행하면 속박이 가중된다’고 
     말하 스스로 게송 하나를 보여주었다. ‘혜능은 기량이 없어 생각을 하나도 끊지 
     못했다네. 경계를 대하면 마음이 자주 일어나거늘 깨달음인들 어찌 자라랴!’”
     (宗寶本 『壇經』 大48 p.358a26. 有僧, 擧臥輪禪師偈曰, ‘臥輪有伎倆, 能斷百思想, 
     對境心不起, 菩堤日日長.’ 師聞之曰, ‘此偈未明心地, 若依而行之, 是加繫縛.’ 
     因示一偈曰, ‘慧能沒伎倆, 不斷百思想, 對境心數起, 菩提作麽長!’)
202) 보당무주(保唐無住 714~774)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당나라 상국 두홍점
     (杜鴻漸)이 다시 물었다. ‘무엇이 불생이며, 무엇이 불멸입니까? 어떻게 해탈할 수 
     있습니까?’ 무주선사가 말했다. ‘대상을 보고 마음이 일어나지 않음을 불생이라
     하니 불생이면 곧 불멸입니다. 생도 멸도 없으면 눈앞의 대상에 속박되지 않으니 
     그 자리에서 해탈을 얻습니다. 불생을 무념이라고 하니 무념이면 멸함도 없고 
     무념이면 속박도 없으며 무념이면 벗어날 것도 없습니다.’”(『景德傳燈錄』권4
    「無住禪師傳」大51 p.234c23. 公又問, ‘云何不生? 云何不滅? 如何得解脫?’ 
     師曰, ‘見境心  不起名不生, 不生卽不滅. 旣無生滅, 卽不被前塵所縛, 當處解脫. 
     不生名無念, 無念卽無滅, 無念卽無縛, 無念卽無脫.’)

 

[평]

계이기도 하고, 정이기도 하고, 혜이기도 하다. 그중에 하나만 들어도 

세 가지가 모두 갖추어지니, 각자 홀로 있는 상[單相]이 아니다.203)
戒也, 定也, 慧也. 擧一具三, 不是單相.
203) 이 또한 계·정·혜가 모두 동일하지도 않고 서로 다른 세 가지도 아니라는 보당
     무주의 말을 기초로 한다. “일심이 일어나지 않으면 계·정·혜를 갖추게 되니
     하나도 아니고 셋도 아니다.”(『景德傳燈錄』 권4 「無住傳」 大51 p.234b24.
     一心不生, 具戒定慧, 非一非三也.)

 

45. 

도를 닦아서 멸(滅)을 증득하는 것은 또한 진실한 멸이 아니고, 마음과

법이 본래부터 적멸(寂滅)한 이것이 곧 진실한 멸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본래부터 언제나 그대로 적멸한 상이다”204)라고 한다.
修道證滅, 是亦非眞也;心法本寂, 乃眞滅也. 故曰, “諸法
從本來, 常自寂滅相.”
204)『法華經』권1「方便品」에 나오는 게송 중 한 구절.

 

[평]

눈은 스스로를 보지 못하니,205) 눈이 눈을 본다고 하면 거짓이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은 생각으로 헤아렸지만, 유마거사는 침묵했던 것이다.206)

이하에서는 세부적인 행법(行法)을 두서없이 제시하겠다.

眼不自見, 見眼者, 妄也. 故妙首思量, 淨名杜默. 
此下散擧細行.
205)『大般涅槃經』권29 大12 p.536a19,『大毘婆沙論』권20 大27 p.104b11,『中論』 
     권1 大30 p.6a10,『大慧語錄』권1 大47 p.812c9,『修心訣』大48 p.1007a15 
     등 여러 문헌에 나오는 말이다.
206) 두묵(杜默). 입을 닫고 침묵하는 것. 문수보살이 불이법(不二法)에 대해서 유마
     에게 묻자 유마거사가 침묵으로 응답한 것을 말한다. “이에 문수사리가 유마거
     사에게 말했다. ‘우리들은 각자 불이법문에 대해서 설하였습니다. 이제 당신께
     서 보살이 들어가는 불이법문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설하셔야 합니다.’ 그때 
     유마거사는 묵묵히 말이 없었다. 문수사리가 찬탄하며 말했다. ‘훌륭하고, 훌륭
     하도다! 이처럼 문자와 언어가 있지 않는 경계에 도달해야 진실하게 불이법문에 
     들어간 것이로구나!’”(『維摩經』 권중 大14 p.551c20. 於是, 文殊師利問維摩詰, 
     ‘我等各自說已, 仁者, 當說何等, 是菩薩入不二法門.’ 時維摩詰, 默然無言. 文殊師
     利歎曰, ‘善哉! 善哉! 乃至無有文字語言, 是眞入不二法門!’)

 

46. 

가난한 사람이 구걸하러 오면 자신의 분수에 따라 베풀어주고, 그가 

나와 한 몸인 것처럼 아픔을 느껴야207) 진실한 보시208)이다.
貧人來乞, 隨分施與, 同體大悲, 是眞布施.
207) 동체대비(同體大悲). 고통을 받고 있는 모든 중생이 자신과 동일한 몸이라고 
     관찰하며 함께 아파하는 마음. 종밀(宗密)에 따르면, 동체대비는 본연의 성품에서
     나오는 것으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동체대비는 본성에 그대로
     부합하는 근본적인 원[大願]이다. 이는 성(性)에 본래 지니고 있는 것으로 달리
     새롭게 얻는 것이 아니다.(『圓覺經略疏』권하 大39 p.553b14. 同體大悲, 稱性
     大願, 性本有之, 非別新得.)
208) 布施. dāna. 6바라밀의 하나. 보시란 물질 또는 정신적 측면에서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베풀어주는 것인데, 6바라밀 체계에서는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하면서도 주는 자와 받는 자 그리고 주는 
     보시물에 대한 상(相)을 전혀 지니지 않아야 진실한 보시라 한다.

[평]

자신과 타자가 하나가 되는 것을 동체라고 한다.209) 빈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210)이 우리네 살림살이이다.
自他爲一曰同體. 空手來, 空手去, 吾家活計.
209) “인식 기관과 그 대상이 다 소멸했다면, 자신과 타자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마음속에서 동체대비를 일으킬 수 있다.”(『圓覺經略疏』권하 大39 p.558b27. 
     根塵旣消, 自他無二. 故能內發同體大悲.)
210) 이 말은 전래의 속담과 같이 일반적으로 쓰였던 말로 보인다. 여기서는 아낌없이 
     베는 보시의 덕을 고양하는 말로 쓰였다. “고덕이 말했다. ‘달마대사는 빈 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갔다.’”(『虛堂語錄』권4 大47 p.1012b2. 古德道, ‘達磨大師,
     空手來, 空手去.’)

 

47.

어떤 사람이 와서 해치려 해도 스스로 마음을 굳게 지켜서[攝心] 성내며 

원망하지 라! 한 찰나라도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장애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211)
有人來害, 當自攝心, 勿生嗔恨! 一念嗔心起, 百萬障門開.
211) 80권본『華嚴經』권49 大10「普賢行品」p.257c17에 나오는 “만약 모든 보살이 
     다른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온갖 장애의 문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若諸菩薩於餘菩薩, 起瞋恚心, 卽成就百萬障門故.)라는 말에 근거한다. 문장 자체는 
    『華嚴經隨疏演義鈔』권3 大36 p.21c23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평]

번뇌가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성냄과 교만이 가장 크다.『열반경』

에서는 향을 발라주거나 몸을 베거나 모두 무심하라212)고 했다. 성냄은 

가운 구름 가운데 천둥 번개가 쳐서 불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213)
煩惱雖無量, 嗔慢爲甚. 涅槃云, 塗割兩無心. 嗔如冷雲中, 霹
靂起火來.
212) “여래는 원한이 있는 사람이든 친한 사람이든 그 마음이 평등하다. 예컨대 칼로
     몸을 베려는 자이거나 향을 몸에 발라주는 자이거나 이 두 사람 모두에게 보태거나 
     더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오직 이런 가운데에 처하므로 여래라 한다.”
     (『大般涅槃經』 권7 大12 p.403c16. 如來於怨親中, 其心平等. 如以刀割, 及香塗身, 
     於此二人, 不生增益損減之心. 唯能處中, 故名如來.)
213) “무엇이 성내며 다투는 것인가? 세인들이 분쟁하는 것은 그래도 용서할 수 있으나, 
     출가한사람이 어찌 다투어서야 되겠는가? 출가한 사람이 마음속으로 독을 품고 
     스스로 해치는 것은 차가운 구름 속에서 불(번개)이 나와서 몸을 태우는 것과 같다.”
     (『智度論』 권14 大25 p.167c1. 云何瞋諍? 世人忿諍, 是猶可恕, 出家之人, 
     何可諍鬪! 出家心中, 懷毒自害, 如冷雲中, 火出燒身.)

48. 

만약 인욕행(行)이 없으면, 온갖 수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214)
若無忍行, 萬行不成.
214)『新華嚴經論』권11 大36 p.791c4(若無忍者, 萬行不成.)를 인용하였다.

[평]

수행문이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중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욕하는 

것이 근원이 된다. 참고 있는 마음은 실체 없는 꿈처럼 사라질 것이고, 

모욕을 당하고 있는 상태는 거북이의 털215)과 같이 본래부터 없는 
것이다.216)
行門雖量, 慈忍爲根源. 忍心如幻夢, 辱境若龜毛.
215) 본래 실재하지 않는 것. 거북이가 헤엄을 치다가 수초(水草)가 몸에 묻을 경우
     마치 등껍질에 털이 나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 털은 아니다. 이처럼 사량 분
     별로 만들어 낸 허구의 관념을 비유하는 말로서 토끼뿔[兎角], 석녀의 아이[石
     女子] 등이 있다.
216)『傅大士頌金剛經』大85 p.2a13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49. 

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것217)이 가장 근본적인 정진(精進)이다.
守本眞心, 第一精進.
217) 수심(守心) 또는 수본진심(守本眞心)은 5조 홍인(弘忍)이 강조하는 선법이다.
     “수심이 근본이니 이 수심은 곧 열반의 근본이며, 도에 들어가는 긴요한 문이며,
     12부경의 근본이며, 과거·현재·미래 모든 부처님의 스승이다.”(『最上乘論』大
     48 p.377c11. 守心第一, 此守心者, 乃是涅槃之根本, 入道之要門, 十二部經之宗, 
     三世諸佛之祖.);“수많은 경론이 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것을 넘어서지 않으니 
     이것이 핵심이다.”(『最上乘論』大48 p.378a19. 千經萬論, 莫過守本眞心, 是要也.)

 

[평]
만약 정진하려는 마음을 일으키면, 이것은 망상일 뿐 정진이 아니다.218) 
그러므로 “망상 피우지 마라! 망상 피우지 마라!”219)라고 말한다.
게으른 자는 언제나 훗날만을 기약하니, 이런 자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사람이다.220)
若起精進心, 是妄, 非精進. 故云,“ 莫妄想! 莫妄想!” 懈怠者, 
常常望後, 是自棄人也.
218)『華嚴經隨疏演義鈔』권39 大36 p.301b13.
219) 막망상(莫妄想). 분주무업(汾州無業 760~821)의 화두로 유명하지만, 그 뒤로 
     여러 선사들이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했다. “학인들이 무슨 질문이건 해 오면, 무업은 
     대부분 ‘망상 피우지 마라!’고 대답해 주었다.”(『景德傳燈錄』권8「汾州無業傳」
     大51 p.257a25. 凡學者致問, 師多答之云, ‘莫妄想!’);“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여러 화상들이여, 망상 피우지 마라! 하늘은 하늘이요 땅은 땅이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며, 승은 승이요 속은 속일 뿐이다.’”(『雲門廣錄』권상 大47 p.547c11. 
     上堂云, ‘諸和尙子! 莫妄想! 天是天, 地是地;山是山, 水是水;僧是僧, 俗是俗.’)
220) “내가 지금 만약 스스로 물러나 굴복하려는 마음을 일으켜서 게으름을 피우고
     항상 훗날을 기약한다면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악취에 떨어질 것이다.”(『修心訣』 
     大48 p.1009a19. 我今若自生退屈, 或生懈怠, 而恒常望後, 須臾失命, 退墮惡趣.)

50. 

주문을 외우는 까닭은 현세의 업은 제어하기 쉬워 자신의 힘으로 실행하여 

피할 수 있으나, 과거세의 업은 제거하기 어려워 반드시 신주(神呪)의 힘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持呪者, 現業易制, 自行可違, 宿業難除, 必借神力.

 

[평]

마등가녀221)가 아나함과222)를 얻은 것은 진실로 거짓이 아니다.223) 그러므로

신주를 지송하지 않고 마사(魔事)로부터 멀리 벗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摩登得果, 信不誣矣. 故不持神呪, 遠離魔事者, 無有是處.
221) 마등(摩登). mātanga. 마등기(摩登祇) 또는 마등가녀(摩登伽女)라고도 한다.
     마등가는 종족 이름으로서 인도 신분 계급 중 최하층인 전다라(旃陀羅 cāndāla)의 
     일종에 속한다. 이 마등가 종족의 한 여자가 아난(阿難)에게 물을 건네준 이후로 
     아난을 연모하게 되었다. 그래서 부인이 되려고 자기 어머니의 주문을 빌려 아난을 
     방에 갇히게 했는데, 이때 부처님이 문수보살로 하여금 신주(神呪)로써 아난을 
     풀려나게 했다. 이후에도 아난을 쫓아다니자 부처님은 비구의 처가 되려면 
     비구니가 되어야 한다고 하고 출가시켜서 불퇴전위(아나함과)를 얻게 했다. 
    『摩登伽經』권상「度性女品」大21 p.399c26 참조.
222) 阿那含果. anāgāmin. 소승 4과(四果) 중 세 번째. 불환과(不還果)라고도 한다.
     이 과를 성취하면 다시는 욕계(欲界)로 돌아가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이 부른다.
223)『摩登伽經』이외에『楞嚴經』권1 大19 p.106c9 등에도 일화가 전한다.

 

51. 

예배란 공경이요 굴복의 뜻이니, 진실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

시키는 것이다.224)
禮拜者, 敬也, 伏也, 恭敬眞性, 屈伏無明.
224) “예라는 것은 공경이고 배라는 것은 굴복의 뜻이다. 진실한 성품을 공경하고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을 가리켜 예배라고 한다.”(『破相論』大48 p.369a6. 夫禮者, 敬也;
     拜者, 伏也. 所謂恭敬眞性, 屈伏無明, 名爲禮拜)

 

[평]

신·구·의 삼업이 청정해지면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신다.225)
身口意淸淨, 則佛出世.
225) “신·구·의 삼업이 청정해지는 것을 두고 부처님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며, 
    신·구·의 삼업이 청정하지 않은 것을 두고 부처님이 멸도했다고 한다”(『黃
     龍語錄』大47 p.637b13. 身口意淸淨, 是名佛出世;身口意不淨, 是名佛滅度.)

 

염불(念佛)

 

52. 

염불을 할 때 입으로 내는 소리는 ‘송(誦)’이라 하고 마음속으로 외우

것은 ‘염(念)’이라 한다. 단지 입으로 소리만 낼 뿐 마음속에서 놓쳐버리면226) 

도를 이루는 데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다.

念佛者, 在口曰誦, 在心曰念. 徒誦失念, 於道無益.
226) 실념(失念). 염불을 할 때 간단없이 놓치지 않고 불명(佛名)을 외워야 하는 이 
     요령은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과도 통한다. 염(念)이 대상을 명백하게 기억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마음의 작용이라면, 실념은 대상으로 삼는 경계와 모든 
     선법(善法)에 대해 명백하게 기억하지 못하는 마음의 작용을 가리킨다. 교학적 
     측면에서는 유식백법(唯識百法) 중 이십수번뇌(二十隨煩惱)의 하나로 보기도 
     한다.

 

[평1]

‘나무아미타불’ 6자 진언은 반드시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는 

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의 경계를 대상으로 삼아 간직하고 잊지 

않으며, 입으로는 부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분명하여 산란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서로 딱 들어맞는 것227)을 

염불이라고 한다.

阿彌陁佛六字法門, 定出輪廻之捷徑也. 心則緣佛境界, 憶持
不忘, 口則稱佛名號, 分明不亂. 如是心口相應, 名曰念佛.
227) 심구상응(心口相應). 마음과 입으로 하는 실천수행이 온전히 일치해야 함을 
     가리킨다. 염불은 단순히 입으로 소리 내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처님의 상호와 공덕을 떠올리고 마음을 모두 집중하여 관찰하고 새기는 데 
     주안점이 있다는 점에서 관심(觀心)과 통한다. “마하반야바라밀은 범어로서 
     한역하면 큰 지혜로 피안에 도달한다는 뜻의 대지혜도피안(大智慧到彼岸)이다. 
     이것은 모름지기 마음으로 행할 것이며 입으로 외우는 데 달려 있지 않다.
     입으로만 외우고 마음으로 행하지 않으면 환영·허깨비·이슬·번개 등과 같이
     허망하며, 입으로 외울 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행하면 마음과 입이 딱 들어맞을 
     것이다.”(宗寶本 『壇經』 大48 p.350a19. 摩訶般若波羅蜜, 是梵語, 此言大智慧到彼岸. 
     此須心行, 不在口念. 口念心不行, 如幻, 如化, 如露, 如電;口念心行, 則心口相應.)

 

[평2]

5조 홍인(弘忍)은 “본래의 진심(眞心)을 지키는 것이 시방제불의 명호를 

칭념하는 것보다 낫다”228)라 하였고, 6조 혜능은 “늘 타방의 부처만을 
칭념할 뿐이라면 생사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229) 또 “자신의 
본심을 지키는 것이 피안에 도달하는 길이다”230)라고 하였다. 또한 
“부처는 자신의 본래 성품에서 이루는 것이니 자신 밖에서 구하지 마라”,231) 
“어리석은 사람은 염불을 통해 서방정토에 태어나려 하지만 지혜로운 
사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232) 또는 “모름지기 
중이자신의 마음을 깨달아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지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는것은 아니다”233)라는 등의 말이 있다. 이상에서 든 여러 

선덕들의 말씀은 곧바로 본래의 마음을 가리켜 보인 것일 뿐 별다른 

방편을 쓴 것이 아니다.〈본심을 곧바로 가리키는 하나의 법으로써 

모든 근기에 맞아떨어지게 한다.〉 근본 이치는 참으로 이와 같으나 

방편을 펼치는 적문(迹門)에는 진실로 극락세계가 있기에 아미타불은 

48대원234)을 세우셨으니, 누구든지 아미타불을 열 번 칭념하기만 하면 

아미타불의 원력을 받아 연태235)에 왕생하여 윤회의 굴레에서 곧바로 

벗어날 것이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한결같이 이처럼 말씀하셨고, 

시방세계의 모든 보살들은 왕생을 함께 염원하였다. 또한 하물며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왕생한 사람들의 전기(傳記)에 분명히 나타남에랴! 

바른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이들은 삼가 잘못 이해하지 말고 수행에 

힘쓰고 또 힘쓰라.

評曰 五祖云,“ 守本眞心, 勝念十方諸佛.” 六祖云,“ 常念他
佛, 不免生死.” “ 守我本心, 卽到彼岸.” 又云, “ 佛向性中作, 
莫向身外求.” 又云,“ 迷人念佛求生, 悟人自淨其心.” 又云, 
“大抵衆生, 悟心自度, 佛不能度衆生.”〈云云〉 如上諸德, 直指
本心, 別無方便.〈方將一法, 便逗諸根.〉 理實如是, 然迹門, 實有極
樂世界, 阿彌陀佛, 有四十八大願, 凡念十聲者, 承此願力, 往
生蓮胎, 徑脫輪廻. 三世諸佛, 異口同音, 十方菩薩, 同願往
生. 又況古今往生之人, 傳記昭昭! 願諸行者, 愼勿錯認, 勉之
勉之.
228) 수심(守心)은 본래의 진심(眞心)을 지키는 선법이다. 이는 4조 도신(道信)의 
     수일(守一) 또는 수일불이(守一不移)의 선법을 계승한 것이며, 이후에는 북종 
     신수(神秀)의 심불기(心不起)라는 선법에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계통의
     선법은 모두 망념의 발생을 억제하면서 선정(禪定)에 드는 수정(修定) 내지 좌선에 
     초점을 둔다. 『최상승론』에 수심(守心)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글들이 실려
     있다. “꼼짝 않고 집중하여 마음을 붙들고 있기만 한다면 망념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열반의 진리가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마음이 본래
     청정한 줄 알아야 할 것이다.”(『最上乘論』大48 p.377b1. 但能凝然守心, 妄念
     不 生, 涅槃法, 自然顯現. 故知自心本來淸淨);“‘자신의 마음이 피안의 부처를 
     염하는 것보다 수승하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자신의 마음이 아닌 피안의 
     부처를 염하는 것으로는 생사윤회를 벗어날 수 없고 자신의 본심을 지키는 것이 
     피안에 도달하는 길이다. 『금강경』에 「만일 색으로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
     로 나를 찾고자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부처를 볼 수 없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본래의 진심을 지키는 것이 타방의 부처를 염하는 것
     보다 낫다」고 한다.’”(같은 책 p.377b17. 問曰, ‘何名自心勝念彼佛?’ 答曰, 
     ‘常念彼佛, 不免生死, 守我本心, 則到彼岸. 金剛經云,「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故云,「守本眞心, 勝念他佛.」’);“다만 가거나 머무
     르거나 앉거나 누워 있는 일상의 생활 중에 항상 분명하게 본래의 참 마음을 지
     킨다면 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라.”(같은 책 p.378b8. 但於行住坐臥
     中, 常了然, 守本眞心, 會是妄念不 生.);“수많은 경론의 내용이 모두 본래의 진
     심을 지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수행의 요체이다.”(같은 책 
     p.378a19. 千經萬論, 莫過守本眞心, 是要也.)
229) 이와 동일한 문장은 보이지 않고 다만 돈황본(敦煌本)『壇經』大48 p.339c19에
     “경전에서는 단지 스스로 부처에 귀의하는 것이라고만 말하였지, 다른 부처에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다.”(經中只卽言自歸依佛, 不言歸他佛.)라고 한 구절이 
     보인다. 종보본(宗寶本)『壇經』大48 p.354b10 참조.
230) 6조 혜능이 한 말로는 경전상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最上乘論』大48 
     p.377b18에 같은 말이 실려 있다.
231) 자신에게 있는 부처[自佛]가 참된 부처[眞佛]라는『壇經』의 자성불(自性佛)
     사상이 드러난다. “부처는 자신의 본래 성품에서 이루는 것이니 자신 밖에서 구하지 
     마라. 자성이 미혹되면 중생이요, 자성을 깨달으면 부처이다.”(宗寶本『壇經』
     大 48 p.352b9. 佛向性中作, 莫向身外求. 自性迷卽是衆生, 自性覺卽是佛.)
232) “어리석은 사람은 염불하여 서방정토에 태어나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은 ‘그 마음의 청정함을 따르면 
     그것이 곧 불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 마음에서 청정
     하지 못한 생각을 일으키면서 염불을 통해 서방정토에 왕생하려 한다면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敦煌本 『壇經』 大48 p.341b11. 迷人念佛生彼, 悟者自淨其心. 所以, 
     言佛隨其心淨, 則佛土淨. …… 心起不淨之心, 念佛往生難到.)
233) “중생 스스로가 제도하는 것이지 부처가 제도할 수 없다.”(『頓悟入道要門論』 
     권 상 卍110 p.850b3. 衆生自度, 佛不能度);“경에 말하였다. ‘중생이 마음을 
     깨달 스스로 제도하는 것이지 부처가 중생을 제도해주는 것은 아니다. 부처가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라면 과거의 여러 부처님께서 항하의 모래알과 같이 무수
     하게 계는데도 무슨 까닭에 우리들은 성불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다만 정
     성스럽게 스스로 안에서 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해의 바다에 침몰한 것이다.’”
     (『最上乘論』大4 p.378c1. 經云, ‘衆生識心自度, 佛不能度衆生. 若佛能度衆
     生者, 過去諸佛恒沙無量, 何故我等不成佛也? 只是情誠不自內發, 是故沈沒苦海.);
     “미혹할 때스승이 건네주지만 깨닫고 나면 스스로 건넌다. 건넌다는 말은 
     비록 같지만 그 작용하는 근거는 같지 않다.”(宗寶本 『壇經』 大48 p.349b9. 
     迷時師度, 自度. 度名雖一, 用處不同.)
234) 아미타불의 본원(本願). 아미타불이 과거세에 성불하기 이전 법장비구였을 때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 앞에서 48가지 서원을 세우고 이 서원이 실현되었을
     때에 성불하겠다고 하였다. 그중 제18원이 대표적인데 다음과 같다. “만약 내가
     부처가 되어, 시방의 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믿고 즐거워하며 나의 국토에 왕
     생하고자 하여 십념(十念)을 행하고도 왕생하지 못한다면 정각을 얻지 않으리
     라. 다만 오역(五逆)을 지었거나 정법을 비방한 자는 제외한다.”(『無量壽經』 
     大12 p.268a26. 設我得佛, 十方衆生, 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 若不生者, 
     不取正. 唯除五逆, 誹謗正法.)
235) 蓮胎. 이곳에 의탁하여 왕생하거나 부처의 지위에 오르기 때문에 마치 모태에
     서 태가 성장하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부처님 명호[寶號]를 칭념하자마자
     벌써 연태에 씨를 뿌린 것이며, 보리심을 한 번 일으키면 금지(金地)에 자신의
     이름 올린 것이다.”(『蓮宗寶鑑』 권1 大47 p.306a20. 纔稱寶號, 已投種於蓮胎, 
     一發菩提, 卽標名於金地.)

 

범어 아미타는 무량수(無量壽) 또는 무량광(無量光)이라 한역되는데,

시방과 삼세를 통틀어 근본이 되는 부처님의 명호이다. 인위 때의 명칭은 

법장비구236)라 하였는데, 세자재왕불237)에게 48가지 원을 일으켜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부처가 되었을 때 시방의 무앙수238)세계의 모든 천인

(天人)으로부터 날아다니거나 기어 다니는 온갖 벌레들에 이르기까지 저의 

이름을 열 번만 칭념하면239) 저의 불국토에 반드시 태어나게 해주시옵소서. 

이 원을 이루지 못한다면 끝내 성불하지 않겠습니다.”240)

梵語阿彌陀, 此云無量壽, 亦云無量光, 十方三世, 第一佛號
也. 因名法藏比丘, 對世自在王佛, 發四十八願云, “我作佛時, 
十方無央數世界, 諸天人民, 以至蜎飛蝡動之流, 念我名十聲
者, 必生我刹中. 不得是願, 終不成佛.”〈云云〉
236) 法藏比丘. Dharmākara. 아미타불이 인위 때 가졌던 명호. 법장보살이라고도
     한다. 세자재왕불(世自在王佛)이 출현했을 때 교시가(憍尸迦)라는 국왕이 설법을 
     듣고 보리심을 일으켜 왕위를 버리고 스님이 되었는데, 그가 법장비구이다.
     세자재왕불의 감화를 받아 이백십억의 불국토를 보고 그곳의 장점만 골라 이상적인 
     정토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고 48대원을 세웠으며, 10겁 이전에 아미타불이 되어 
     지금 서방정토에서 설법하고 있다고 전한다.
237) 自在王佛. Lokeśvararāja, Lokeśvara. 세요왕불(世饒王佛)이라고도 하며, 범어 
     음어 루이긍라(樓夷亘羅)이다. 과거세 아미타불이 법장비구였을 때 세상에
     머물고 계셨던 부처님의 명호이다.
238) 무앙수(無央數)는 인도 52수 가운데 52번째 수로서 계산할 수 없는 무한 수를
     가키며 무진수(無盡數)와 같은 뜻이다. “무앙〈앙은 어와 양을 반절한 음이다. 
     범어는 아승기, 한역어는 무앙수이다. 앙은 진(盡)과 같은 뜻이다.〉”(『一切經音義』 
     권9 大54 p.359b21. 無央〈於良反. 梵言阿僧祇, 此言無央數也. 央盡也.〉)
239) 십성(十聲). 십념(十念)과 같은 말이다. 아미타불 또는 나무아미타불을 열 번 
     염불하는 것을 말한다. 십념에 도달했다는 것[乃至十念]은 염불수행자가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는 지위에 이른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지극한 마음으로 끊어짐 없이 
     소리 내어 열 번을 다 채워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라. 마음으로 관하는 것을 ‘염’이라 
     하고, 입으로 소리 내어 외는 것을 ‘칭’이라 하며, 십념은 열번 소리 내는 것이다.”
     (『觀無量壽佛經義疏』 권하 大37 p.304b11. 如是至心, 令聲不絕, 具足十念, 
     稱南無阿彌陀佛. 心觀爲念, 口誦爲稱, 十念謂十聲也.);“이제 『관무량수불경』
     에서 ‘열 번 소리 내어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에는 열 가지 원과 열 가지 행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무란 귀명의 뜻이고, 또한 발원하고 회향한다는 뜻이다. 아미타불이란 곧 
     그 행이다. 이런 뜻 때문에 반드시 왕생하게 된다.”(『觀無量壽佛經疏』 大37
     p.250a27. 今此觀經中, ‘十聲稱佛, 卽有十願, 十行具足.’ 云何具足? 言南無者, 
     卽是歸命, 亦是發願, 廻向之義. 言阿彌陀佛者, 卽是其行. 以斯義故, 必得往生.);
     “모든 중생들은 마땅히 모든 부처님께서 지켜주시는 이 경전을 믿어야 한다. 
     무엇을 지켜주신다고 하는가? 만약 중생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를 이레 
     혹은 하루동안 하거나, 그 아래로 열 번 내지 한 번 외우거나 또는 한 번만 
     염하여도 반드시 왕생하게 될 것이다.”(『往生禮讚偈』 大47 p.448a6. 汝等衆生, 
     皆應信是一切諸佛護念經. 云何名護念? 若有衆生, 稱念阿彌陀佛, 若七日及一日, 
     下至十聲, 乃至一聲, 一念等, 必得往生.)
240) 48대원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후세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제18원
     이다. 이 서원을 십념왕생원(十念往生願) 또는 염불왕생원(念佛往生願)이라고도
     한다.

 

옛 성인이 말했다. “부처님의 명호를 한 번 소리 내어 부르면241) 천마
(天魔)의 간담을 상하게 하고,242) 귀신의 명부243)에서 이름이 지워져 
백은(白銀)이 깔려 있는 연못244)에 연꽃으로 피어나리라.” 또 참법
(懺法)에는 이렇게 전한다. “자력(自力)과 타력(他力)이 있으니, 한쪽은 
더디고 한쪽은 빠르다. 바다를 건너고자 하는 자가 나무를 심어 자란 

뒤에 배를 만든다면 더딜 것이니 이는 자력을 비유한 것이다. 배를 빌려 

타고 바다를 건넌다면 빠를 것이니 이는 불력을 비유한 것이다.” 

또 말하였다. “세간의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거나 불에 타는 등의 급박한 

지경에 직면하여 큰소리로 울부짖으면 부모가 그 소리를 듣고 급히 달려와 

구원해주는 것이 마치 사람이 임종에 이르러 큰 소리로 염불하면 부처님께서 

신통력을 갖추시고 반드시 맞이하러 오시는 것245)과 같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자비심은 부모보다 더하고 중생의 생사윤회를 떠도는 고통은 

물에 빠지고 불에 타는 고통보다 더 심하다.

先聖云, “唱佛一聲, 天魔喪膽, 名除鬼簿, 蓮出金池.” 又懺法
云,“ 自力他力, 一遲一速. 欲越海者, 種樹作船, 遲也, 比自力
也. 借船越海, 速也, 比佛力也.” 又曰, “世間稚兒, 迫於水火, 
高聲大呌, 則父母聞之, 急走救援, 如人臨命終時, 高聲念佛, 
則佛具神通, 決定來迎爾.” 是故, 大聖慈悲, 勝於父母也, 衆
生生死, 甚於水火也.
241) “또한 예를 들어 소강법사의 영험에 따르면, 부처님의 명호를 한 번 소리 내어
     부르면 중생은 부처님 한 분이 입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부처님의 명호를 열 번
     소리 내어 부르면 열 분의 부처님이 입에서 나는 듯이 나왔다고 한다.”(『淨土或問』 
     大47 p.302b20. 又如少康法師, 唱佛一聲, 衆見一佛, 從口飛出;唱佛十聲, 則有十佛, 
     從口飛出.)
242) 천마상담(天魔喪膽). 부처님이 성도(成道)하셨을 때 제6천의 마왕을 항복시킨
     행적에서 유래한 말. 도를 깨달은 사람의 한 구절은 귀신의 간담도 서늘하게 하는 
     힘이 있다는 뜻이다. “대장부여, 지혜의 칼을 잡았구나. 반야의 칼날이여, 금강왕의 
     불꽃과 같이 거세구나. 외도의 마음을 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찍이 천마의 
     간담까지 떨어뜨렸도다.”(『證道歌』 大48 p.396b3. 大丈夫, 秉慧劍. 般若鋒兮, 
     金剛焰. 非但空摧外道心, 早曾落却天魔膽.)
243) 귀부(鬼簿). 저승사자의 명부. 또는 절에서 죽은 신도들의 법명·속명 및 사망 
     연월일 등을 적어 놓은 장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244) 금지(金池). “황금 연못에는 그 바닥에 백은의 모래가 깔려 있고, …… 자금 
     연못에는 그 바닥에 백옥의 모래가 깔려 있다.”(『無量壽經』 권상 大12 p.271b1. 
     黃金池者, 底白銀沙, …… 紫金池者, 底白玉沙.)
245) 내영(來迎). pratyudyāna. 극락정토에 왕생할 때 아미타불과 성중(聖衆)이 
     오시어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영접(迎接)·내영영접(來迎迎接)·성중내영(聖衆來
     迎) 등이라고도 한다. 아미타불이 인위(因位)에서 일으킨 48대원 중 제19원
     ‘내영인접원(來迎引接願)’이 이 맥락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정토이니 별도의 다른 정토에 태어날 수 없고, 

자신의 성품이 아미타불246)이니 아미타불을 볼 수 없다”고 하는데, 이 

말은 옳은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247) 저 부처는 탐냄과 진노함이 없는데 

나 또한 탐냄과 진노함이 없는가! 저 부처는 지옥을 연화장세계로 변화 

시키는 것을 마치 손바닥 뒤집는 것처럼 쉽게 하시는데 나는 업력으로 

해 늘 스스로 지옥에 떨어지지나 않을까 걱정하고 있으니 하물며 연화장 

세계로 변화시키는 일에 있어서임에랴! 부처는 무진세계를 관하기를 치 

눈앞에 있는 것을 보시듯 하나 나는 단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인 

일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시방세계를 눈앞의 것을 대하듯이 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모든 사람의 본성 자체는 비록 부처라고 하여도 

드러난 행위에서는 중생일 뿐이니, 현실적인 상(相)과 용(用)으로 따지자면 

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다.

有人云, “自心淨土, 淨土不可生, 自性彌陀, 彌陀不可見!” 此
言, 似是而非也. 彼佛無貪無嗔, 我亦無貪嗔乎! 彼佛變地獄
作蓮花, 易於反掌, 我則以業力, 常恐自墮於地獄, 況變作蓮花
乎! 彼佛觀無盡世界, 如在目前, 我則隔壁事猶不知, 況見十
方世界, 如目前乎! 是故, 人人性則雖佛, 而行則衆生, 論其相
用, 天地懸隔.
246) 자성미타(自性彌陀). 아미타불과 극락정토는 항상 자기 마음속에 있으므로 자
     기 자신이 곧 아미타불이라는 말. 자력신심(自力信心)을 의미한다. 기심미타(己
     心彌陀)·기신미타(己身彌陀)·유심미타(唯心彌陀)·기심정토(己心淨土)·유심정
     토(唯心淨土) 등이라고도 한다.
247) 이와 같은 취지의 정토관이『龍舒增廣淨土文』의 다음 글에 보인다. “세간에 
     참선에만 몰두하는 사람들 사이에 ‘오직 마음만이 정토이거늘 어찌 다시 별도의
     정토가 있겠는가! 자신의 성품이 아미타불이니 아미타불을 다시 만날 필요는
     없다’라는 말이 전하는데 이는 옳은 듯하지만 그렇지 않다. 왜 그런가? 
     서방정토에는 리(理)와 적(跡)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리로 말하자면, 마음을 
     깨끗이 할 수 있으므로 일체가 모두 깨끗하여 진실로 유심정토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적으로 말하자면, 실제로 극락세계가 있다고 부처님께서도 입이 닳도록
     상세하게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어찌 망령된 말이겠는가! 사람마다 누구나 성불
     할 수 있으니 자신의 성품이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진실로 망령된 말이 아니다.
     그러나 한순간에 성불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유하자면 훌륭한 재목에
     물상을 새겨 화려함을 극대화하려면 반드시 조각의 공력이 더해진 다음에야 
     이룰 수 있는 것과 같다. 훌륭한 재목을 지목하여 그것에 의지하는 것만으로 
     물상의 화려함을 극대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인 것이다. 이런 이치에서 
     오직 마음이 정토라 하는 것일 뿐이니, 다시 어디에 정토가 있으며 자신의 성품이
     미타불이니 아미타불을 다시 만날 필요는 없다고 한 말도 잘못인 것이다. 또한 
     정토가 있다는 것을 믿고서 ‘마음일 뿐이다’라는 주장에 빠져 서방정토에 태어날 
     필요가 없다거나 참선하여 자신의 본성을 깨우치고 부처나 조사를 넘어서면 
     아미타불을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하는 말도 모두 잘못이다. 왜 그런가? 이러한 
     말들 너무 고원(高遠)하여 쉽게 이르지 못할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龍舒增廣淨土文』권1「淨土起信五」大47 p.255c7. 世有專於參禪者云, 
      ‘惟心土, 豈復更有淨土! 自性阿彌, 不必更見阿彌.’ 此言似是而非也. 何則? 
      西方淨土, 有理有跡. 論其理, 則能淨其心, 故一切皆淨, 誠爲唯心淨土矣, 論其跡, 
      則實有極樂世界, 佛丁寧詳復言之, 豈妄語哉! 人人可以成佛, 所謂自性阿彌者, 
      固不妄矣. 然猝未能至此, 譬如良材可以雕刻物像, 而極其華麗, 必加以雕刻之功, 
      然後能成. 不可據指良材, 而遂謂極物像之華麗也. 是所謂唯心淨土, 而無復更有淨土, 
      自性阿彌, 不必更見阿彌者, 非也. 又信有淨土, 而泥唯心之說, 乃謂西方不足生者, 
      謂參禪性超佛越祖, 阿彌不足見者, 皆失之矣. 何則? 此言甚高, 竊恐不易到.)

 

규봉종밀248)이 “설령 실제 돈오하였다 하더라도 종국에는 반드시 점차

으로 수해야 한다”249)라고 하였으니, 이 말은 대단히 진실하도다! 

러한즉 ‘자신의 본성이 곧 미타’라고 전하는 말이 어찌 나면서부터 

석가라거 자연히 이루어진 아미타불이라는 뜻이겠는가?250) 모름지기 

스스로 헤아려본다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임종에 이르러 생과 사가 

교차는 고통스러운 순간에 확고하게 자유자재할 수 있는가? 만약 

그러하지 못하다면 한순간 의기양양하여 뽐내다가 도리어 영겁토록 

지옥에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마명251)이나 용수252)와 

같은 조사들이 모두 가르침의 말씀을 분명히 남겨 왕생에 대해 깊이 

권장하셨는데,253) 나는 어떤 사람이기에 왕생하고자 하는 원을 품지 

않을 것인가!

圭峯云, “設實頓悟, 終須漸行.” 誠哉, 是言也! 然則寄語自性
彌陀者, 豈有天生釋迦自然彌陀耶? 須自忖量, 人豈不自知! 
臨命終時, 生死苦際, 定得自在否? 若不如是, 莫以一時貢高, 
却致永劫沉墮. 又馬鳴龍樹, 悉是祖師, 皆明垂言敎, 深勸往
生, 我何人哉, 不欲往生!
248) 圭峰宗密(780~841). 당나라 때 스님. 화엄종(華嚴宗) 제5조. 시호는 정혜(定慧).
     선맥(禪脈)으로는 하택선(荷澤禪)을 이어받았다.『圓覺經科文』,『圓覺經纂要』,
    『都序』,『原人論』등을 지었다.
249)『都序』 권하 大48 p.411b7 참조.
250) “나면서부터 석가이거나 자연히 이루어진 미륵불이란 있지 않다. 그 누가 어머니 
     배 속에서 깨달았단 말인가?”(『圜悟心要』권상「示倫上人」卍120 p.737b11. 
     未有天生釋迦自然彌勒. 阿那箇在娘肚裏便會?)
251) 馬鳴(100?~150?) Aśvaghosa. 중인도 사위성(舍衛城) 남쪽에 위치한 사기다성
     (娑枳多城) 출신. 부법장(付法藏) 제12조.
252) 龍樹. Nāgārjuna. 부법장(付法藏) 제14조. 용맹(龍猛)·용승(龍勝)으로도 불린다. 
     남인도 바라문 출신이며, 중관학파(中觀學派)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253) 마명의『大乘起信論』에 나오는 다음 구절이 이 취지와 통하며, 용수의 저술로
     알려진『大智度論』권38~40의「往生品」등을 염두에 둔 말로 보인다. “만약 
     중생이 서방극락세계의 아미타불만 오로지 염하고, 닦아서 쌓은 선근을 회향하여
     그 극락정토에 태어나기를 염원하면 그곳에 태어나 항상 부처님을 친견할 것이며 
     끝내 이 경계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大乘起信論』권1 大32 p.583a17. 
     若人專念, 西方極樂世界, 阿彌陀佛, 所修善根迴向, 願求生彼世界, 卽得往生, 常見
     佛故, 終無有退.)

 

또한 부처님께서 친히 “서방정토와의 거리가 십만〈10악〉팔천〈8사〉리254)나 

떨어져 있다”라고 하신 말씀은 근기가 둔한 중생에게 상(相)을 설정하여 

설하신 것이다. 한편 “서방정토와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마음〈중생〉 

대로가 곧 부처〈아미타불〉이다”255)라고 하신 말씀은 근기가 영리한 

중생에게 본성을 그대로 설하신 것이다. 교문에는 권교(權敎)와 실교

(實敎)가 있고 말씀에는 드러나는 가르침[顯]과 비밀스러운 가르침[密]이 

있다. 만약 이해와 행위가 상응한다면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통할 것이다. 

그러므로 조사 문하에는 혜원256)의 경우처럼 아미타불을 칭념하던 이도 

있고〈혜원〉,서암257)의 경우처럼 주인공을 부르던 이도 있었던 것이다〈서암〉.

又佛自云, “西方去此遠矣, 十萬〈十惡〉八千〈八邪〉.” 此爲鈍根說
相也. 又云, “西方去此不遠, 卽心〈衆生〉是佛〈彌陀〉.” 此爲利根
說性也. 有權實, 語有顯密. 若解行相應者, 遠近俱通也. 故
祖師下, 亦有或喚阿彌佛者〈慧遠〉, 或喚主人公者〈瑞巖〉
254) 십악(十惡)과 팔사(八邪)를 비유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서방정토와의 거리
     가 십만팔천 리로 떨어져 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장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
     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불국토를 지나면 극락이라는 세계가 있다. 그 
     불국토에는 아미타불이 계시는데 지금도 법을 설하고 계신다.’”(『阿彌陀經』大 
     12 p.346c10. 佛告長老舍利弗, ‘從是西方, 過十萬億佛土, 有世界名曰, 極樂. 其土有
     佛, 號阿彌陀, 今現在說法.’);“서방과의 거리가 십만팔천 리라고 하였는데 여기
     서 서방은 서축을 잘못 쓴 것이다. 경에 ‘이곳에서 서쪽으로 십만억 불국토를 지
     나면 극락이라는 세계가 있다’고 하였으나 어찌 십만팔천 리에 그칠 뿐이겠는
     가! 간략하게 일단을 가리켜 말한 것일 뿐이다.”(『觀無量壽佛經義疏』권상 大37
     p.284b29. 西方去此, 十萬八千里, 此亦誤以四竺爲西方也. 經云, ‘從此西方, 過十萬億
     佛土, 有世界名曰, 極樂.’ 豈止十萬八千乎! 略指一端.) 십악(十惡)은 살생(殺生)·투
     도(偸盜)·사음(邪淫)·망어(妄語)·기어(綺語)·악구(惡口)·양설(兩舌)·탐욕(貪
     慾)·진에(瞋恚)·우치(愚癡) 등이며, 팔사(八邪)는 사견(邪見)·사사유(邪思惟)·
     사어(邪語)·사업(邪業)·사명(邪命)·사방편(邪方便)·사념(邪念)·사정(邪定)등이다.
255) 종보본(宗寶本)『壇經』大48 p.341b14의 다음 말과 전후의 내용이 통한다. 
     “마음에 청정하지 않음이 없기만 하다면 서방정토는 이곳에서 멀지 않을 것이나, 
     마음에서 청정하지 못한 생각을 일으키면 염불하여 왕생하려 해도 도달하지 못한다. 
     10악을 제거하면 10만 리를 가고, 8사가 없으면 8천 리를 지나리라.”(心但無不淨, 
     西方此不遠;心起不淨之心, 念佛往生難到. 除惡卽行十萬, 無八邪卽過八千.)
256) 여산혜원(廬山慧遠 334?~416?). 동진(東晋) 때 동림사(東林寺)에 주석했던 
     스님. 정토왕생을 위한 염불수행(念佛修行)에 전념하기 위해 염불결사(念佛結社)인
     백련결사(白蓮結社)를 맺고 정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결사에서 주로 닦던 
     삼매는 반주삼매(般舟三昧)이다.
257) 서암사언(瑞巖師彦)이 스스로 ‘주인공!’ 하고 부른 다음 스스로 ‘예!’ 하고 대답
     했다는 일화를 말한다.『無門關』「巖喚主人」大48 p.294b19 참조.

 

경전의 인연

 

53. 

경전 읽는 소리를 듣고258) 귀에 스치기만 해도 인연이 되고 다른 사람의 

공덕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자신도 공덕을 쌓는 일이 되니, 덧없는 

몸뚱이는 다하여 사라질 날이 있지만 진실한 수행은 사라지지 않는다.259)
聽經, 有經耳之緣, 隨喜之福, 幻軀有盡, 實行不亡.
259)『緇門警訓』권7「釋門登科記序」大48 p.1079b14의 다음 내용에 근거한다. 
     “덧없는 몸뚱이는 다하여 사라질 날이 있지만 진실한 수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붉은 도랑물과 같이 선명한 말씀과 구슬알과 같이 온몸의 뼈를 부수어 
     가루로 만들 정도의 정진이 모두 책에 기록되어 전해지니 견식이 있는 이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하물며 『반야경』에는 귀로 스쳐 듣기만 해도 인연이 
     된다는 말씀이 있고, 『법화경』에는 다른 사람의 공덕을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며 
     자신도 공덕을 쌓는 복을 가르치고 있음에랴!”(幻軀有盡, 實行不亡. 故有舌相粲若紅渠, 
     身骨碎如珠顆, 具書傳錄, 識者備聞. 況般若有經耳之緣, 法華校隨喜之福!)

 

[평]

이는 지혜로운 공부법에 대해 밝힌 것이니 마치 금강을 먹은 것260)과 같고 

칠보를 보시하는 것보다 더 수승하다. 영명연수(永明延壽)261)선사가 말

하였다. “듣고서 믿지 않더라도 오히려 부처가 될 씨앗을 심은 인연을 

은 것이요, 배웠으나 이루지 못했더라도 오히려 인천의 복을 모두 포괄

만하다.”262)
此明智學, 如食金剛, 勝施七寶. 壽師云,“ 聞而不信, 尙結佛種之因, 學而不成, 
猶盖人天之福.”
260) 식금강(食金剛). 금강은 먹어도 소화되지 않고 몸 밖으로 배출되는 것과 같이 경
     을 듣는 것만으로도 번뇌와 뒤섞이지 않게 됨을 비유한 『화엄경』의 말이다. “비
     유하면 장부가 금강을 조금만 먹어도 끝내 소화시키지 못하고 그 몸을 통과하여
     밖으로 배출되는 것과 같다. 왜 그러한가? 금강은 몸속의 더러운 것들에 뒤섞여
     함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여래께 적은 선근을 심는 것도 이와 같아서 일체 유
     위의 모든 행과 번뇌의 몸을 뚫고 지나 무위의 구경지(究竟智)에 이른다. 어째서
     인가? 이 적은 선근은 유위의 모든 행이나 번뇌와 함께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80권본 『華嚴經』 大10 p.277a23. 譬如, 丈夫食少金剛, 終竟不消, 要穿其身, 
     出在於外. 何以故? 金剛不與肉身雜穢而同止故. 於如來所種少善根, 亦復如是, 
     要穿一切有爲諸行煩惱身過, 到於無爲究竟智處. 何以故? 此少善根, 不與有爲
     行煩惱而共住故.)
261) 94~975. 법안종(法眼宗) 3조. 임안부(臨安府) 여항(餘杭) 출신. 천태덕소(天台德
     韶)의 법을 이었다. 저서에『宗鏡錄』·『萬善同歸集』·『唯心訣』 등이 있다.
262) 『心訣』 大48 p.996c21 참조.『唯心訣』에는 ‘猶盖人天之福’의 ‘盖’자가 
     ‘益’자로 되어 있다.

 

54. 

경전을 읽을 때 263)에 자기 본분상에서 공부하지 않는다면 비록 수많은

경전을 모두 읽었다고 해도 아무런 이익이 없다.

看經, 若不向自己上, 做工夫, 雖看盡萬藏, 猶無益也.
263) 간경(看經). 경전을 보고 읽는 것 또는 부처님 앞에서 경전을 독송하는 것. 풍경
     (諷經)·송경(誦經)과 같은 말이다. 눈으로 문자를 보고 마음으로는 진리를 관조하는 
     것을 뜻한다. 소리 내지 않고 읽는 것을 간경이라 하고, 소리 내어 읽는 것을 
     독경(讀經)이라고 한다. “간경하거나 법을 들을 때 하나하나를 자기의 본심으로 
     귀결시키지 않고, 단지 문자의 차별된 관념만 좇아 움직이면 곧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고 달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경전의 문자도 분별할 수 없다.”(『宗鏡錄』 권92 大48
     p.918c15. 或看經聽法之時, 不一一消歸自己, 但逐文句名身而轉, 卽是觀指, 
     以爲月體. 此人豈唯不見自性, 亦不辯於敎文.)

 

[평]

이는 어리석은 공부법에 대해 밝힌 것이니 마치 봄날에 새가 지저귀고 

가을밤에 벌레가 우는 것과 같다.264) 규봉종밀선사가 말하였다. “글자나 

별해가며 경전을 읽는 것으로는 원래 깨달을 수 없고, 문구나 새기고 

뜻을 풀기만 해서는 다만 탐욕과 성냄과 삿된 견해만 치성해질 뿐이다.”265)
此明愚學, 如春禽晝啼, 秋蟲夜鳴. 密師云,“ 識字看經, 元不
證悟, 文釋義, 唯熾貪嗔邪見.”
264) 마음으로 뜻을 궁구하지 않고 경전의 문구에만 매달리는 것이 무의미함을 
     비유한 말이다. “그대들이 이곳에서 경전을 잔뜩 늘어놓고 외우며 성인의 뜻을 
     궁구하고 음미하여 점수의 공을 닦은 인연으로 돈오에 들어가고 돈오를 인연으
     하여 원교의 진리에 들어간다면 삼장이 곧 그대 자신이고 그대 자신이 곧 삼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봄날에 새가 지저귀고 가을밤에 벌레가 울며 
     바람의 기운에 이끌리는 것과 같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緇門警訓』권
     3「撫州永安禪院僧堂記」 大48 p.1054a18. 汝能於此, 橫經而誦, 研味聖意, 
     因漸入頓, 因頓入圓, 則三藏卽汝, 汝卽三藏. 若不然者, 春禽晝啼, 秋虫夜鳴,
     風氣所使, 曾無意謂.)
265)『都序』권상 大48 p.400a14.

 

수행에 대한 경책과 바른 길

 

55. 

배움이 도에 이르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한갓 교묘한 

말재주로써 돋보이려고 하는 것은 측간에 울긋불긋 색을 칠하는 것과 

같다.266)
學未至於道, 衒耀見聞, 徒以口舌辯利相勝者, 如厠屋塗
丹雘.
266) 단확(丹雘)은 고운 빛깔의 흙 또는 붉은색 안료를 말한다. 여기서는 겉만 화려
     하고 실속 없이 허황한 것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원공이 도오진에게 말하였다. 
     ‘배움이 도에 이르지도 못했으면서 자신의 지식을 뽐내고 기민한 이해력을
     과시하며 한갓 교묘한 말재주로써 돋보이려고 하는 것은 측간에 울긋불긋 색을
     칠하여 더럽히는 것과 같으니, 단지 그 악취만 더할 뿐이다.’〈「서호기문」〉”
     (『禪林寶訓』 권1 大48 p.1018b20. 遠公, 謂道吾眞曰, ‘學未至於道, 衒耀見聞,
     馳騁機解, 以口舌辯利相勝者, 猶如廁屋塗污丹雘, 秖增其臭耳.’〈西湖記聞〉);
     『禪林寶訓順硃』 권1 卍113 p.451a5~a14 참조.

 

[평]

말세의 어리석은 배움에 대해 특별히 밝힌 것이다. 공부란 본디 자기 

성을 닦는 것인데,267) 오로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에서 공부한다면268)

이는 참으로 어떤 마음이란 말인가!

別明末世愚學. 學本修性, 全習爲人, 是誠何心哉!
267) “배움이라는 것은 본디 자기 본성을 닦는 데 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낼 것인가! 도(道)라는 것은 천성을 온전히 보존하는 것을 귀하게
     여길 뿐이니, 세상에 쓰이기를 바라지 마라.”(『緇門警訓』권7 大48 p.1078b7. 
     且夫學本修性, 豈慍人之不知! 道貴全生, 無蘄世之爲用.)
268) “공자가 말하였다. ‘옛사람들은 자신의 수양과 학문을 완성하기 위해 공부하였
     는데, 요즘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공부하는구나.’”(『論語』「憲問」. 
     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56. 

출가한 자로서 외전269)을 익히는 것은 마치 칼로 진흙을 베는 것과 

으니 진흙은 베지도 못하면서 칼만 상하게 하는 꼴이다.270)
出家人, 習外典, 如以刀割泥, 泥無所用, 而刀自傷焉.
269) 외전(外典). 외서(外書)라고도 한다. 불교 이외의 서적을 외전이라 하고, 이에 
     대하여 불교서적은 내전이라 한다. 유가(儒家) 등의 입장에서는 불교서적을 외전
     이라고 한다. “육신을 구제하는 교전은 외(外)라 하고, 정신을 구제하는 교전은
     내(內)라고 한다. 『대지도론』에 내·외의 두 가지 경전이 모두 있고, 『인왕경』
     에 내·외의 두 가지 논을 모두 밝혔으며, 방등경에서는 내·외의 두 가지 율(律)을
     모두 밝혔고, 『백론』에서는 내·외의 두 가지 도리를 모두 말했다. 내·외를 통
     틀어서 말하면 중국과 그 이외의 나라를 모두 포함하지만, 중국으로만 한정할 
     때는 유교와 불교를 들 수 있는데, 불교는 내이고 유교는 외이다.”(『廣弘明集』 
     권「二敎論」 大52 p.136c11. 救形之敎, 敎稱爲外, 濟神之典, 典號爲內. 是以, 
     度有內外兩經, 仁王辯內外二論, 方等明內外兩律 , 百論言內外二道. 若通論內外, 
     則該彼華夷, 若局命此方, 則可云儒釋, 釋敎爲內, 儒敎爲外.)
270)“계를 수지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날카로운 지혜를 갖추고 있다 하여도 세간의
     잡다한 일을 함으로써 때때로 생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구하고자 하기 때문에
     혜로운 근기가 점차 둔해진다. 비유하면 예리한 칼로 진흙을 베면 마침내 칼만 
     무디게 만드는 것과 같다.”(『大智度論』 권14 大25 p.163b19. 不持戒人, 雖有利智,
     以營務, 種種欲求生業之事, 慧根漸鈍. 譬如利刀以割泥土, 遂成鈍器.) 『緇門警訓』
     권4 大48 p.1060c2에는 “智論云, ‘學習外典, 如以刀割泥. 泥無所成, 而刀自損.’”으로
     ‘泥無所用’의 用자가 ‘成’자로 되어 있고, 『紫柏老人集』 卍126 p.647b17에는
     “칼이 비록 예리해도 진흙을 베는 데 쓰면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지는 못하고 칼날은 
     날로 무뎌질 뿐이니 이것은 칼을 잘 사용하지 못한 것이다.”(刀雖快利, 惟用割泥, 
     泥無所成器, 刀刃日損, 此不善用刀者也)라 하여 그릇을 이루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평]
문 밖에 있던 장자의 아이들이 다시 불타는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격이다.271)
門外長者子, 還入火宅中.
271) 화택(火宅)은 온갖 번뇌와 괴로움으로 가득 찬 삼계(三界)를 비유하는 말. 
    『法華經』권2「譬喩品」大9 p.12b12에 실려 있는 화택유(火宅喩)의 비유를 끌어와 
     외전을 공부하는 것은 마치 불타는 집에 있던 아이들을 방편(삼승의 교설)으로 유인하여 
     집 밖으로 불러내었는데, 다시 불타는 집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57.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이 어찌 작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는가? 

안하고 한가로움을 구하기 때문도 아니며, 따뜻하고 배부름을 구하기 

문도 아니며, 이익과 명예를 구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고, 번뇌를 끊기 위한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잇기 위한 것이며, 삼계에서 벗어나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다.272)
出家爲僧, 豈細事乎? 非求安逸也, 非求溫飽也, 非求利名也. 
爲生死也, 爲斷煩惱也, 爲續佛慧命也, 爲出三界度衆生也.
272) “출가하여 스님이 되는 것이 어찌 작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겠는가? 편안하고 
     한가로움을 구하기 때문도 아니며, 따뜻하고 배부름을 구하기 때문도 아니며, 
     달팽이 뿔과 같은 감투를 쓰고 이익이나 명예를 구하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생사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것이며, 번뇌를 끊기 위한 
     것이고, 삼계의 고해를 벗어나 부처님의 지혜를 잇기 위한 것이다.”(『緇門警訓』 
     권2「釋難文」大48 p.1049c12. 蓋出家爲僧, 豈細事乎? 非求安逸也, 非求溫飽也, 
     非求蝸角利名也. 爲生死也, 爲衆生也, 爲斷煩惱, 出三界海, 續佛慧命也.)

[평]

하늘을 찌르는 대장부의 기상이라 할 만하다.273)
可謂衝天大丈夫.
273) “법좌에 오르자 한 학인이 물었다. ‘최조공이 국일조사에게 「제가 출가하고자
     하는데 괜찮겠습니까?」라고 묻자 「출가는 대장부의 일이니 장수나 재상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답하였는데, 이는 어떤 의미입니까?’ ‘배우러 
     찾아온 자의 근기를 깊이 판별한 것이다.’”(『密菴語錄』大47 p.962a21. 上堂, 
     僧問, ‘崔趙公, 問國一祖師云, 「弟子欲出家得否?」 國一云, 「出家乃大丈夫事, 
     將相所能爲.」意旨如何?’ 師云, ‘來機深辨.’)

 

58. 

부처님께서 “무상이라는 불이 온 세상을 불태운다”,274) “중생을 태우는 

고뇌의 불길이 천지 사방을 온통 불사른다”,275) “번뇌라는 온갖 도적이 

상 사람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276)라고 하셨으니, 도를 닦는 

들은 마땅히 스스로를 경계하여 일깨우기를 마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듯이 긴급한 일로 여겨야 할 것이다.277)
佛云,“ 無常之火, 燒諸世間.” 又云,“ 衆生苦火, 四面俱焚.” 
又云,“諸煩惱賊, 常伺殺人.” 道人, 宜自警悟, 如救頭燃.
274) 무상지화(無常之火)란 영원불변한 것이 없고 모든 현상이 생성하면 반드시 
     덧없이 사라지는 삼라만상에 대하여 모든 것을 불태워 없애는 속성을 가진 불로써 
     비유한 말이다. 수행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경책의 뜻을 담고 있다. “마땅히
     무상이라는 불이 온 세상을 불태우고 있음을 마음속에서 잊지 말고 조속히 자신을 
     제도하고자 힘써야 할 것이니 수면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번뇌라는 온갖 
     도적이 항상 사람을 죽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이 원수보다 더 심하니,
     어찌 수면에 빠져 스스로를 경계하며 일깨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 大12 p.1111a29. 當念無常之火, 燒諸世間, 早求自度, 
     勿睡眠也. 諸煩惱賊, 常伺殺人, 甚於怨家, 安可睡眠, 不自警悟!)
275) “죄악은 처음에는 작은 잔을 넘치는 정도에서 시작되나 그 재앙은 끝내 
     정수리까지 차오를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중생을 태우는 고뇌의 불길이 사방을 
     온통 불사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태연히 앉아서 무의미한 잡담이나 하고 있을
     것인가!”(『緇門警訓』권1「自警文」大48 p.1048a21. 罪始濫觴, 禍終滅頂. 何也? 
     衆生苦火, 四面俱焚. 豈可安然, 坐談無義!)
276) 도적이 사람의 목숨을 해치는 것은 마치 번뇌가 법신과 혜명(慧命)을 손상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에 도적에 비유하여 번뇌적(煩惱賊 kleśa-śatru, kleśāmitra)이라고 
     한다. “도를 구하는 수행자가 대사(大事)를 판별하지 못하면 번뇌라는 온갖 도적이 
     항상 침입할 기회를 엿보게 된다.”(『大智度論』 권68 大25 p.538a28. 求道者, 
     大事未辦, 諸煩惱賊, 常伺其便.);“‘무슨 까닭에 번뇌를 도적이라 하고, 무명을
     잠이라고 하는가?’ ‘번뇌는 일체중생을 결박하여 온갖 악업을 지어 삼악취에 
     떨어뜨리고 법신의 목숨을 해친다. 그러므로 도적이라 한다. 무명은 대상경계에
     어두워 지각하지 못하게 하므로 잠이라 한다.’”(『華嚴經三寶章圓通記』 권상 韓
     p.165a9. 問, ‘何故, 煩惱名賊, 無明名睡耶?’ 答, ‘煩惱則, 縛諸衆生, 造諸惡業, 
     墮三惡趣, 害法身命, 故名爲賊. 無明則, 於境迷暗, 令不知覺, 故名爲睡也.)
277) 구두연(救頭燃). 두연이라고도 하며 구두학도(救頭學道)와 같은 뜻이다. 머리에
     불이 붙으면 우물쭈물 망설이며 지체할 사이 없이 바로 불을 끄고자 하는 것처럼 
     도나 학문을 닦을 때에도 가장 다급한 일로 여기며 정진해야 한다는 뜻이다.
     “면밀하게 열심히 닦고 익혀 잠시도 버린 적이 없는 것이 마치 머리 위에 놓인
     돌을 제거하거나 머리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같이 긴급하게 한다.”(『大乘本生
     心地觀經』 권5 大3 p.313a22. 精勤修習, 未嘗暫捨, 如去頂石, 如救頭燃.);
     “정진하며 눕지 않는 태도가 머리의 불을 끄는 것과 같다.”(『法華經安樂行義』 
     大46 p.700b3. 精進不臥, 如救頭然.)

 

[평]

몸에는 생·로·병·사가 있고, 세계에는 성·주·괴·공이 있으며, 마음에는 

생·주·이·멸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무상이라는 불과 고뇌의 불로서 

사방을 온통 불사르는 바로 그것이다. 깊은 도를 참구하는 사람들에게

삼가 이르노니, 세월을 결코 헛되이 보내지 마시라.

身有生老病死, 界有成住壞空, 心有生住異滅, 此無常苦火, 四
面俱焚者也. 謹白參玄人, 光陰莫虛度.

 

 59. 

세간의 부질없는 명성을 탐하는 것은 헛된 공부로 몸만 수고롭게 하는 

꼴이요,278) 세간의 이익을 애써 구하는 것은 업의 불길에 땔나무만 더하는 

꼴이다.279)
貪世浮名, 枉功勞形, 營求世利, 業火加薪.
278)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쫓아 이름만 화려한 
     명예를 구하는 것은 마치 향을 살라 사람들에게 그 향을 맡게 하기 위한 것과 같다. 
     그러나 향은 스스로를 불태워 향기를 내는 것이니, 어리석은 사람이 세속의 명예를 
     탐하느라 도의 진제(眞諦)를 지키지 못하는 꼴이다. 이름만 화려한 명예는 자신을 
     위태롭게 하는 재앙이니 그 회한은 나중에 남게 된다.’”(『四十二章經』大17 p.723a22. 
     佛言, ‘人隨情欲求華名, 譬如燒香, 衆人聞其香. 然香以熏自燒, 愚者, 貪流俗之名譽, 
     不守道眞. 華名危己之禍, 其悔在後時.’);“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을 쫓아 명성을 구하지만, 명성이 뚜렷이 드러나는 찰나에 몸은 
     이미 늙어버린다. 세간에 길이 남을 명성을 탐하면서 도를 배우지 않는 것은 헛된 
     공부로 몸만 수고롭게 하는 꼴이다.’”(『四十二章經註』卍59 p.73b7. 佛言,
     ‘人隨情欲, 求於聲名, 聲名顯著, 身已故矣. 貪世常名, 而不學道, 枉功勞形.’)
279) “청정한 계를 받아 지니는 자는 물건을 팔거나 교환하거나 논밭과 집 등을 
     소유하거나 집에서 부리는 사람이나 노비·축생 등을 길러서는 안 된다. 일체의
     가산과 재보를 모두 마땅히 멀리하기를 마치 불구덩이를 피하듯이 해야 한다.”
     (『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 大12 p.1110c22. 持淨戒者, 不得販賣貿易, 安置田宅, 
     畜養人民奴婢畜生. 一切種殖, 及諸財寶, 皆當遠離, 如避火坑.);“세간의 이익을 
     애써 구하는 것은 업의 불길에 땔나무를 더하는 꼴이요, 뜻을 무위에 두고자 
     한다면 보배와 같은 계율과 비교할 대상이 없다.”(『佛遺敎經註』 卍59 p.12b5. 
     營求世利, 業火加薪, 志存無爲, 戒珠絕類.)

[평]

세간의 부질없는 명성을 탐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의 시에, “기러기 하늘 

저 끝으로 날아갔어도 자취는 모래에 남고, 사람은 황천으로 떠나갔어도 

그 이름은 집안에 남아 있네”280)라고 한 취지와 같다. 세간의 이익을 애써 

구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의 시에, “온갖 꽃에서 채취하여 꿀을 만들고 

더니, 누구 입 달게 하려고 쓰라린 고생 무릅썼는지 알지 못하겠네”281)

라 한 뜻과 같다. 헛된 공부로 몸만 수고롭게 하는 꼴이라는 것은 얼음을 

아 조각품을 만들려는 것처럼 불필요한 기교일 뿐이라는 뜻이다.282) 

업의 불길에 땔나무만 더하는 꼴이라는 말은 거칠고 낡아빠진 색이나 

향은 욕의 불길을 더욱 치성하게 돋우는 도구가 될 뿐이라는 뜻이다.283)
貪世浮名者, 有人詩云,“ 鴻飛天末迹留沙, 人去黃泉名在家.”
營求世利者, 有人詩云,“ 采得百花成蜜後, 不知辛苦爲誰甛.”
枉功勞形者, 鑿氷雕刻, 不用之巧也. 業火加薪者, 麤弊色香, 
致火之具也.
280) 누구의 시인지 미상이다.
281) 당나라 말기 때 시인 나은(羅隱 833~909)의「咏蜂詩」에 나오는 구절. 
     여기에서는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를 꿀을 모아 허망하게 사람의 입만 달게 
     하는 벌에 비유했다. “평지와 산 어느 것이 높은지 따지지 말지니, 한량없는 
     풍광이 세상을 온통 덮고 있느니라. 온갖 꽃에서 채취하여 꿀을 만들고 났더니, 
     누구 입 달게 하려고 쓰라린 고생 무릅썼는지 알지 못하겠네.”(不論平地與山尖, 
     無限風 光盡被占. 采得百花成蜜後, 不知辛苦爲誰甜.)
282) 얼음 조각이 쉽게 녹아버리듯이 허망하다는 비유.
283)『法華經』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요약하여 해설로 취한 것이다. “그대들
     삼계의 불타는 집에 머물러 살기를 좋아하지 말지니, 거칠고 낡아빠진 색·성·
     향·미·촉을 탐내지 마라. 만약 탐착하여 애착을 일으키면 곧 그것에 불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대들이 속히 삼계로부터 벗어나면 성문이든 벽지불이든 
     불승이든 그 삼승 중 하나를 얻게 되리라.”(『法華經』 권2 大9 p.13b10. 汝等, 
     莫得樂住, 三界火宅, 勿貪麤弊色聲香味觸也. 若貪著生愛, 則爲所燒. 汝速出三界, 
     當得三乘, 聲聞辟支佛佛乘.)

 

60. 

명예와 이익을 좇는 납자는 초야에 묻혀 사는 은둔자나 시골의 천한 

사람만도 못하다.

名利衲子, 不如草衣野人.

 

 [평1]

금륜성왕284)의 지위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설산으로 들어가는 것285)은 

분의 세존이 태어나도 변함이 없는 법도인데, 말세에 양의 몸에 범의 

가죽을 뒤집어 쓴286) 듯한 무리들은 염치도 알지 못한 채 형세를 살피고 

권세를 따르며 남몰래 아첨하여 총애를 받으려 하는구나. 아, 이러한 

현상들이 그 증거가 아닌가!

唾金輪, 入雪山, 千世尊, 不易之軌則, 末世羊質虎皮之軰, 不
識廉耻, 望風隨勢, 陰媚取寵. 噫, 其懲也夫!
284) 金輪聖王. Cakra-varti-rājan, rājā-cakkavattin, h khor-los sgyur-bah i rgyal-po.
     금륜을 가지고 세계(4대주)를 통치하는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서 금륜성제
     (金輪聖帝)·금륜적자(金輪嫡子)라고도 한다.
285) “우리 부처님이신 세존께서 금륜성왕의 지위를 버리시고 설산에서 6년 동안 
     고행하시다가 한밤에 샛별을 보고 도를 깨달으신 것 또한 이 일대사의 본원을 
     깨달은 것이다.”(『禪要』「除夜小參」卍122 p.717b8. 吾佛世尊, 捨金輪王位,
     雪山六年苦行, 夜半見明星悟道, 亦是悟者一大事之本源.);『虛堂語錄』권2 大47 
     p.998c5 참조.
286) 양질호피(羊質虎皮). ‘외양은 화려하지만 내실은 빈약하다’ 또는 ‘본질이 바뀌지 
     않는 한 변하는 것은 없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스스로 성(姓)을 공(孔)이라 
     하고 자를 중니라 하며, 공자 문하에 들어가 그 본채에 올라가서는 공자의 책상에 
     기대어 앉고 공자의 옷을 입는다면 그 사람을 공자라 할 수 있습니까?’ ‘그 겉
     모습은 그럴 듯하지만 바탕은 아니다.’ ‘바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양은 그 
     몸에 호랑이 가죽을 씌워 놓아도 풀을 보면 좋아하며 뜯어 먹고, 승냥이를 만
     나면 두려워 떨며 자신이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과 
     같다.’”(『法言』「吾子」. 或曰, ‘有人焉, 自姓孔而字仲尼, 入其門, 升其堂, 
     伏其几, 襲其裳, 則可謂仲尼乎?’ 曰, ‘其文是也, 其質非也.’ 敢問質. 曰, 
     ‘羊質而虎皮, 見草而說, 見豺而戰, 忘其皮之虎也.’)

 

[평2]

마음이 세간의 이익으로 물든 자들은 권문세가에 아부하고 세상에 떠도는 

헛된 말287)만 쫓아다니다가 도리어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말 

. 이러한 납자들을 (범의 가죽을 뒤집어쓴) 양에 비유한 까닭은 

이를 입증할 만한 여러 가지 행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징야부’288)라는 

 자로써 결론을 맺은 것이다. 이 세 글자는『장자』에 나온다.

世利者, 阿附權門, 趨走風塵, 返取笑於俗人. 此衲子以羊
質, 證此多行. 以懲也夫, 三字結之. 此三字, 文出莊子.
287) 풍진(風塵). 유언비어와 같다.
288) 懲也夫. “어리석은 군주와 어지러운 신하들 사이에 있으면서 고달프지 않고자
     하니 어찌 될 법한 일인가! 이는 비간(比干)이 상(商)의 주왕(紂王)에게 직간하다가 
     심장이 도려내진 일과 비교할 수 있는 증거가 된다.”(『莊子』 「山木」. 
     今處昏上亂相之間, 而欲無憊, 奚可得邪! 此比干之見剖心, 懲也夫.)

 

61.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슨 까닭에 도적이 내 옷을 빌려 입고서 

래라는 이름을 팔며 가지가지 업을 짓는단 말인가!” 289)

佛云,“ 云何賊人, 假我衣服, 裨販如來, 造種種業!”
289)『楞嚴經』권6 大19 p.132b11.

[평1]
말법비구290)를 가리키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으니, 조서승,291) 아양승, 292)
독거사,293) 지옥의 찌꺼기,294) 가사 입은 도적295) 등이 그것이다. 
아,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신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구나!
末法比丘, 有多般名字, 或鳥鼠僧, 或啞羊僧, 或禿居士, 或地獄滓, 或被袈裟賊. 
噫, 其所以以此!
290) 末法比丘. 말법시대에 태어난 비구로서 정법시대나 상법시대의 수행자에 비해
     신행력이나 근기가 약한 비구를 가리키는 말.
291) 鳥鼠僧. 여기에 붙었다 저기에 붙었다 하는 ‘박쥐 같은 스님’이라는 말. 정체가
     명확하지 않아 출가자라고 단정할 수 없는 자나 혹은 스님 자신이 스스로를 낮추어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비승비속(非僧非俗) 또는 반승반속(半僧半俗)이라고도 하며

     줄여서 반승(半僧)이라고도 한다. “슬프다! 6척의 몸은 있으되 지혜가 없으니 
     부처님께서 이를 두고 어리석은 중[癡僧]이라 하였으며, 세 치 혀는 있으되 설법하지 
     못하니 부처님께서 이를 두고 벙어리 양과 같은 중이라 하였으며, 중인가 하면 중도 
     아니요 속인인가 하면 속인도 아니니 부처님께서 이를 두고 박쥐 같은 중이라 하고 
     또 대머리거사라 하였다.”(『緇門警訓』권2 大48p.1049c23. 悲夫! 有六尺之身, 
     而無慧, 佛謂之癡僧, 有三寸舌, 而不能說法, 佛謂之啞羊僧, 似僧非僧, 似俗非俗,
     佛謂之鳥鼠僧, 亦曰, 禿居士.)
292) 啞羊僧. 군양승(群羊僧)이라고도 한다. 특별히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무능한
     스님을 비난하여 부르는 말. “무엇을 아양승이라 하는가? 비록 계는 범하지 않았으나 
     둔하여 지혜가 없고 좋고 나쁨을 가릴 줄 모르고 일의 경중도 알지 못하며 죄 있고 
     죄 없음도 알지 못하여 혹 승가에 일이 발생하여 두 사람이 다투면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하지 못하고 잠잠히 말이 없는 것이 마치 사람이 죽여도 아무 소리 내지 못하는 
     흰 양과 같은 이를 아양승이라 한다.”(『大智度論』 권3 大25 p.80a15. 云何名啞羊
     僧? 雖不破戒, 鈍根無慧, 不別好醜, 不知輕重, 不知有罪無罪, 若有僧事, 二人共諍, 
     不能斷決, 默然無言, 譬如白羊, 乃至人殺, 不能作聲, 是名啞羊僧.)
293) 禿居士. 독인(禿人)·독노(禿奴)·독두거사(禿頭居士)·독두사문(禿頭沙門)이라고도 
     한다. ‘독’은 머리털이 빠진 것, 곧 머리카락이 없다는 말이다. 머리털을 깎아 겉모습은 
     스님처럼 보이지만 실제 생활하는 모습을 보면 속인과 다를 것이 없을 뿐 아니라, 
     계율 또한 지키지 않아서 반승반속(伴僧半俗) 혹은 비승비속(非僧非俗)인 파계승을 
     가리키는 말이다. “계율을 무너뜨리고 법을 지키지 않는 이를 독거사라고 한다.”
     (『大般涅槃經』 권3 大12 p.383c18. 破戒不護法者, 名禿居士.)
294) 지옥재(地獄滓). 지옥 끝에 떨어져서도 한낱 그곳의 쓰레기에 불과할 정도로 죄
     과가 무겁다는 말.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권세와 재물에 연연하는 추
     잡하기 짝이 없는 속물이라는 뜻이다. “막돼먹은 부류의 장로들은 서신과 정보
     를 주고받으며 여기저기로 (절의 살림을 도맡아하는) 원주 자리를 분망히 찾아다
     니다가 마침내 원주 자리를 얻게 되자마자 곧바로 좋은 날을 가려 취임하고는 
     ‘나는 장로다’라 떠벌이며 방장에서 마음대로 쾌락을 누려대니, 이러한 부류의 
      무리들을 지옥의 찌꺼기라 부른다.”(『緇門警訓』권6「黃龍死心新禪師小參」 
     大48 p.1071b6. 有一般破落戶長老, 馳書達信, 遮邊討院住, 那邊討院住, 纔討
     得院住, 便揀箇好日入院. 又道, ‘我是長老.’ 方丈裏自在受快活. 遮般底, 喚作地
     獄滓.)
295) 피가사적(被袈裟賊). 가사를 입고 겉모습만 비구로 가장하여 탐욕을 누리고 
     악행을 일삼는 무리. “만약 하고 싶은 대로 즐거움을 누리며 항상 음식에나 탐착
     한다면 가사 입은 도적에 불과하니, 이런 사람은 비구라 하지 않는다.”(『正法
     處經』권49 大17 p.292c15. 若心憙樂欲, 常貪於飲食, 是著袈裟賊, 不名爲比丘.);
     “그 마음이 항상 아첨과 속임수를 일삼고 언제나 맛난 음식을 탐하며 욕심나는 
     일에 즐겨 집착한다. 이렇게 나쁜 짓을 저지르는 비구를 가리켜 가사 입은 도둑이라 
     한다.”(『諸法集要經』권9 大17 p.507c12. 其心常諂詐, 常貪妙飲食, 樂著於欲事. 
     此惡行比丘, 名著袈裟賊.)

 

[평2]

여래의 이름을 파는 자는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고296) 죄나 복의 결과도 

없다고 배척하며,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을 물이 끓어오르듯 맹렬하게 

지어대고, 애증을 번갈아 일으키니, 참으로 애처롭게 여길 만한 일이로다.

스님의 본분도 빗겨가고 속인의 신분도 피해가니 박쥐[鳥鼠僧]라 하고, 

는 있으되 법을 설하지 못하니 벙어리 양[啞羊僧]이라 하고, 겉모습은 

님이지만 마음속은 속인이니 까까머리거사[禿居士]라 하고, 죄가 

무거워 돌이킬 수 없으니 지옥의 찌꺼기[地獄滓]라 하고, 부처님을 

팔아서 생계를 도모하니 가사 입은 도적[被袈裟賊]이라 하는 것이다. 

특히 가사 입은 도적이라는 말이 이 같은 여러 가지 명칭의 뜻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그래서 ‘이차(以此:이러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구나)’나)’297)

라는 두 글자로 결론을 지었는데, 이 두 글자는 『노자』에 나온다.

裨販如來者, 撥因果排罪福, 沸騰身口, 迭起愛憎, 可謂愍也. 
避僧避俗, 曰鳥鼠;舌不說法, 曰啞羊;僧形俗心, 曰禿居士;
罪重不遷, 曰地獄滓;賣佛營生, 曰被袈裟賊. 以被袈裟賊, 證
此多名. 以此二字結之, 此二字, 文出老子.
296) 발인과(撥因果). phala-hetv-apavādin.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는 것. 연기(緣起)의 
     근거를 부정하는 삿된 견해이며, 모든 것은 단멸하여 상속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단견(斷見)이다. 발무인과(撥無因果)라고도 한다. “만일 인과의 도리를 부정한다면 
     이것은 사견이며, 이것을 헤아려 도라 여긴다면 계취(戒取)이고, 이를 헤아려 
     열반이라 여긴다면 견취(見取)이다.”(『摩訶止觀』권5 大46 p.66a20. 若撥因果
     是邪見, 計此爲道是戒取, 計爲涅槃是見取.);“아무것도 없는 공이라는 견해로 
     인과의 도리를 부정하면 크게 휩쓸려 아무것도 남지 않으리니 재앙을 불러들일 
     뿐이다.” (『證道歌』大48 p.396a27. 豁達空撥因果, 莽莽蕩蕩招殃禍.)
297)『老子』21, 36, 54, 57장 등에 보인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곧 앞에서 서술한 말들을 근거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는 뜻이다.

 

62. 

아! 부처님의 제자들의 한 벌 옷과 한 그릇 밥에도 농부의 피땀과 직녀의 

노고가 깃들지 않음이 없거늘 도안(道眼)을 밝히지 못한다면 어떻게 

마음껏 쓸 수 있겠는가!298)
於戱! 佛子, 一衣一食, 莫非農夫之血, 織女之苦, 道眼未
明, 如何消得!
298) 소득(消得)은 ‘구하다’ 또는 ‘향유하다’는 말로서 여기서는 ‘보시물을 어떻게 
     마음껏 쓸 수 있겠는가’라는 의미에서 시주자의 은혜를 갚을 수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 得은 허사이다. “편담산효료(匾檐山曉了)화상은 일생토록 상률(橡栗)을
     주워 삶아 먹었고, 영가대사는 호미에 붙은 채소 부스러기조차 먹지 않았으며,
     당나라 때 혜휴법사는 30년 동안 신 한 켤레를 수없이 기우고 꿰매 신었는데 
     부드러운 땅을 밟을 때는 맨발로 다녔다. 다른 사람이 신심으로 보시한 것을 
     헛되이 손실할까 염려하여 그 시주물을 함부로 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주
     자들이 모두 그들 처자의 입을 줄여 그대들에게 공양한 것이니 복을 받아들
     이고 죄를 참회해야 한다. 그대들이 하루 어느 시각에나 마음껏 쓰는 갖가지 
     상주물은 모두 다른 사람들의 노고에서 나온 것인데,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며 더럽지 않아도 씻고 피곤하지 않아도 자니 도안을 밝히
     지도 못하여 번뇌를 씻지 못했는데 어떻게 시주의 은혜를 갚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옛 성인이 ‘도업을 성취하라고 시주한 것인데 도업을 성취하지 못
     한다면 어떻게 시주의 은혜를 갚을 것인가!’(「慈恩法師出家箴」)라 한 것
     이다.”(『緇門警訓』권7「慈受深禪師小參」大48 p.1076b28. 匾檐山和尚, 
     一生拾橡子煮喫, 永嘉大師, 不喫钁頭下菜, 高僧惠休, 三十年著一緉鞋, 百補
     千綴, 遇軟地行則赤脚. 恐損他信施, 信心物難消. 他總是妻子口中減削, 將來
     供養爾了, 便要邀福懺罪. 爾十二時中種種受用, 盡出他人之力, 未饑而食, 未
     寒而衣, 未垢而浴, 未困而眠, 道眼未明, 心漏未盡, 如何消得. 故古德云, ‘爲
     成道業施將來, 道業未成爭消得.’)

 

[평]

『경덕전등록』에 “어떤 도인이 도안을 밝히지 못하였기 때문에 대신 

을 버섯으로 바꾸어 보시 받은 은혜를 갚았다”299)고 한다.

傳燈,“ 一道人, 道眼未明故, 身爲木菌, 以還信施.”
299) “존자가 법을 깨닫고 나서 후에 비라국에 이르고 보니 그곳에 범마정덕이라는
     장자가 있었다. 어느 날 정원의 나무에서 큰 버섯이 났는데 맛이 매우 좋았다.
     오직 장자와 그의 둘째 아들 라후라만이 여러 번 그것을 따서 먹었는데 따는 대
     로 다시 자라나고 그것이 다하면 또 다시 자라나왔으나, 다른 식구들은 아무도
     그것을 볼 수조차 없었다. 존자가 이와 관련된 과거세의 인연을 알고 마침내 그
     집에 이르니, 장자가 존자에게 그 연유를 물었다. ‘당신 집에서 과거에 어떤 비
     구에게 공양했으나 이 비구가 도안을 밝히지 못하여 보시의 은덕만 헛되이 입
     은 까닭에 버섯이 되어 보답했던 것입니다. 오로지 당신과 아들〈『전법정종기』
     에는 둘째 아들이라 되어 있다〉만이 정성으로 공양하였기에 그 버섯을 따서 
     맛 볼 수 있고 다른 식구들은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존자가 장자에게 ‘장자의 
     나이는 몇입니까?’라고 묻자 ‘일흔 아홉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존자가 게송으로
     읊었다. ‘도를 깨치려고 했으나 도를 통달하지 못하여, 다시 몸을 받아 보시
     갚았다네. 당신의 나이 여든 하나가 되면, 이 나무에는 버섯이 나지 않으리라.’”
     (『景德傳燈錄』 권2 「迦那提婆傳」 大51 p.211b8. 尊者旣得法, 後至毘羅國, 
     彼有長者, 曰梵摩淨德. 一日, 園樹生大耳如菌, 味甚美. 唯長者與第二子羅睺羅,
     多取而食之, 取已隨長, 盡而復生, 自餘親屬, 皆不能見. 時尊者知其宿因, 遂至其家,
     長者問其故. 尊者曰, ‘汝家昔曾供養一比丘, 然此比丘道眼未明, 以虛霑信施故, 
     報爲木菌. 惟汝與子〈正宗云, 與次子.〉 精誠供養, 得以享之, 餘卽否矣.’ 又問, 
     ‘長者年多少?’ 答曰, ‘七十有九.’ 尊者, 乃說偈曰, ‘入道不通理, 復身還信施. 
     汝年八十一, 此樹不生耳.’)

 

63.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뿔을 이고300)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가? 신도가 신심으로 시주한 것을

헛되이 받아서 쓰는 자들을 가리 킨다.301) 어떤 자는 배고프지 않아도 

먹고 춥지 않아도 입으니 이것은 진실로 무슨 심보란 말인가! 이는 

모두 눈앞의 즐거움이 바로 다음 생의 괴로움이 된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故曰,“ 要識披毛戴角底麽? 卽今虛受信施者是. 有人未飢
而食, 未寒而衣, 是誠何心哉! 都不思目前之樂, 便是身後
之苦也.”
300) 피모대각(披毛戴角). 여기서는 죽은 다음 축생으로 윤회한다는 말로 쓰였다. 또
     는 윤회의 굴레에 떨어져 중생을 제도하거나 신도의 보시를 받아 수행한 은혜
     를 갚고자 밭을 가는 소가 된다는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이와는 달리 보통은 
     선종 식의 보살행을 대표하는 용어로 쓰이며, ‘사람과 다른 류의 존재가 되어
     살아 간다’라는 뜻의 이류중행(異類中行)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이다. 조산
     본적(曹山本寂)이 피모대각을 이류(異類)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했던 평가
     (『曹山語錄』 大47 p.543c12)가 그것이다. “그대가 만약 찰나마다 마음을 
     쉬지 못한다면 저 무명의 나무에 올라가거나 6도와 4생이라는 윤회의 굴레에 
     떨어져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뿔을 이고 살아갈 것이다.”(『臨濟語錄』大47 
     p.500c22. 爾若念念 , 心歇不得, 便上他無明樹, 便入六道四生, 披毛戴角.);
     “그런 까닭에 고양이와 물소가 전혀 모르는 것만 못하다. 그들은 부처님도 
     모르고 조사도 모르며 보리나 열반, 선악이나 인과도 모른다. 그들은 다만 
     배가 고프면 풀을 뜯어먹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신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분별하지 못하더라도 걱정하지 않는다. ‘계교분별을 하지 않기 때문에 본
     분사를 안다’라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뿔을 이고 
     쟁기를 끌면서도 이렇게 자유로울 수 있어야 비로소 깨달음에 조금 근접
     했다 할 수 있을 것이다.”(『禪林僧寶傳』「曹山本寂傳」卍137 p.445a18.
     所以, 不如黧奴白牯, 兀兀無知. 不知佛, 不知祖, 乃至菩提涅槃, 及以善惡因果. 
     但饑來喫草, 渴來飮水. 若能恁麽, 不愁不成辦. 不見道, ‘計較不成, 是以知有.’ 
     乃能披毛戴角, 牽犁拽耒, 得此便宜, 始較些子.)
301) “털가죽을 뒤집어쓰고 뿔을 이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가? 그대들 
     중에서 평상시에 함부로 주재하려고 드는 자가 바로 그이다.”(『緇門警訓』 
     권7「法昌運禪師小參」大48 p.1077c23. 爾要識披毛戴角底麽? 便是爾尋常
     亂作主宰者是.)

[평]

『대지도론』에 “어떤 도인이 다섯 알의 조 때문에 소의 몸을 받고 태어

서는 온몸을 바쳐 일해 갚고, 죽어서는 가죽과 살로써 갚았다”302)는 

일화가 있다. 신심으로 보시한 시주물 헛되이 받아쓰면 그 인과의 보응은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리라.

智論,“ 一道人, 五粒粟, 受牛身, 生償筋骨, 死還皮肉.” 虛受

信施, 報應如響.
302) “또한『무량수경』에 따르면 이렇게 전한다. ‘교범발제가 과거세에 비구였을 때
     남의 조밭 가에서 조 한 줄기를 따서 얼마나 익었는지 살펴보다가 낟알 몇 개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5백 번 태어날 때마다 소가 되어 밭을 갈면서 그 빚을 
     갚았다.’”(『諸經要集』권9 大54 p.83a12. 又依無量壽經云, ‘憍梵波提, 過去世, 
     曾作比丘, 於他粟田邊, 擿一莖粟, 觀其生熟, 數粒墮地, 五百世作牛償之.’);
     “예를 들면 교범발제는 전생에 소로 태어났던 업의 습기 때문에 항상 먹은 것을 
     되새김질했다.”(『大智度論』권27 大25 p.260c22. 如憍梵鉢提, 牛業習故, 常吐
     食而呞.)

64.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차라리 뜨겁게 달군 쇠로 몸을 휘감을지언정 

신도들이 보시하는 옷을 받지 말며, 차라리 쇳물이 입에 퍼부어지는 고통을 

받을지언정 신도들이 보시하는 음식을 받지 말며, 차라리 쇳물이 끓는 솥에 

들어가 삶겨지는 고통을 받을지언정 신도들이 보시하는 거처에 살지 마라.”303)
故曰,“ 寧以熱鐵纏身, 不受信心人衣;寧以洋銅灌口, 不受信心人食;
寧以鐵鑊投身, 不受信心人房舍等.”
303)『涅槃經』의 다음 구절을 인용하였다.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서원하여 
     ‘차라리 뜨겁게 달군 쇠로 이 몸을 휘감을지언정 파계한 몸으로는 정녕 신심으로
     보시한 시주의 의복을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또
     서원하여 ‘차라리 이 입으로 뜨겁게 달구어진 쇳덩어리를 삼킬지언정 파계한
     입으로는 정녕 신심으로 보시한 시주의 음식을 먹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다시금 서원하여 ‘차라리 이 몸을 뜨겁게 달군 쇠 위에 
     누일지언정 파계한 몸으로는 정녕 신심으로 보시한 시주의 침상과 와구를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한다.”(『大般涅槃經』권11「聖行品」大12 p.433a25. 復次, 
     善男子, 菩薩摩訶薩, 復作是願, ‘寧以熱鐵周匝纏身, 終不敢以破戒之身, 受於信心
     檀越衣服.’ 復次, 善男子, 菩薩摩訶薩, 復作是願, ‘寧以此口吞熱鐵丸, 終不敢以毀
     戒之, 食於信心檀越飲食.’ 復次, 善男子, 菩薩摩訶薩, 復作是願, ‘寧臥此身大熱
     鐵上, 終不敢以破戒之身, 受於信心檀越床敷臥具.’);中阿含1 『木積喻經』 大1 
     pp.25a16~427a8 참조.

 

[평

『범망경』에 “파계한 몸으로 신도들이 보시하는 갖가지 공양과 시주물을 

받아서는 안 되니, 보살로서 이러한 서원을 세우지 않는다면 경구죄304)를 
짓는 이 된다”305)라고
 하였다.

梵網經云, “不以破戒之身, 受信心人, 種種供養, 及種種施物, 
菩薩若不發是願, 則得輕垢罪.”
304) 輕罪. dusk-ārta, dukkata, lahukapatti. 음사어는 돌길라(突吉羅). 청정행
     (淸淨行)을 더럽히는 허물로서 비교적 가벼운 죄에 해당하며, 무거운 죄에 속하는
     바라이죄(波羅夷罪)와 구별된다.
305)『梵網經』권하 大24 p.1007c7~c15.

 

65.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 먹는 것을 

치 독약을 먹는 것처럼 하고 시주물 받는 것을 마치 화살에 맞는 

것처럼 여겨야 하니, 후한 공양과 듣기 좋은 말은 도를 닦는 사람이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306)
故曰,“ 道人, 進食如進毒, 受施如受箭, 幣厚言甘, 道人
所畏.”
306)『緇門警訓』권7「慈受深禪師小參」大48 p.1076c20 참조.

 

[평]

음식 먹는 것을 마치 독약을 먹는 것처럼 하라는 것은 도안(道眼)을 

실하지 않을까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고, 시주물 받는 것을 

마치 화살에 맞는 것처럼 여겨야 한다는 것은 도과(道果)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307)
進食如進毒者, 畏喪其道眼也;受施如受箭者, 畏失其道
果也.
307) 도안은 불법의 진실을 보는 눈, 도과는 불도 수행의 결과로서 깨달음이나 열반
     등을 말한다.

 

66. 

그러므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도를 닦는 사람은 마치 칼을 가는 

한 덩어리 숫돌과도 같아서 장씨도 와서 갈고 이씨도 와서 갈며 

계속해서 칼을 갈아 대니 칼을 가는 사람의 칼은 갈수록 예리해지지만 

자신의 돌은 점차로 닳아 없어지고 만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은 도리어 

다른 사람이 자신의 숫돌에 갈러 오지 않는다고 싫어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다.”308)
故曰, “修道之人, 如一塊磨刀之石, 張三也來磨, 李四也來
磨, 磨來磨去, 別人刀快, 而自家石漸消. 然有人更嫌他人
不來我石上磨, 實爲可惜.”
308)『緇門警訓』에는 위『선가귀감』66의 내용에 이어 65순으로 서술되어 있다. 
     『門警訓』권7「慈受深禪師小參」大48 p.1076c16에 “在出家人, 如一塊磨
     刀石, 一切人要刀快便來, 爾石上磨, 張三也來磨, 李四也來磨, 磨來磨去, 別人
     刀, 自家石漸消薄. 有底更嫌他人不來我石上磨, 有甚便宜處.”라고 한 부분 참조.

 

[평]

이 도인 같은 사람은 평생토록 바라는 것이 단지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 데 있을 뿐이다.

如此道人, 平生所向, 只在溫飽.

 

 67. 

그러므로 옛말에도 있듯이 “삼악도(三惡途)의 고통은 고통도 아니요

가사를 걸치고도 다음 생에 사람의 몸을 잃는 것이야말로 고통이다”309)

고 하는 것이다.

, 古語亦有之曰,“ 三途苦未是苦, 袈裟下失人身, 始是
苦也.”
9)『禪林寶訓』권1 大48 p.1021b24(三途地獄受苦者, 未是苦也. 向袈裟下失却人身, 
     實爲苦也.) 참조.

 

[평]

옛람이 “금생에 마음을 밝히지 못하면 시주가 베푼 한 방울의 물조차 
받아먹어서는 안 된다”310)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가사를 걸치고도 
다음 생에 사람의 몸을 잃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불자여! 불자여! 
분발하고 마음을 떨쳐 일으켜라. 이 장(62~67)은 ‘아[於戱]’라고 한 
말에서 뜻을 일으켜 ‘옛말[古語]’로 결론을 짓고, 중간 중간에 허다하게 
‘고왈(故曰)’이라는 글자로 근거가 되는 실마리를 끌어내었으니, 이 또한 
일단의 문장을 구성하는 방법이다.
古人云,“ 今生未明心, 滴水也難消.” 此所以袈裟下失人身也.
佛子! 佛子! 憤之激之. 
此章, 始起於一於戱, 終結於一古語, 中間紬繹許多故曰字, 亦
一段文法也.
310) “그대가 천 일 동안 지혜를 배우는 것이 단 하루 동안 도를 배우는 것만 못하니,
     만약 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한 방울의 물조차 받아먹어서는 안 될 것이다.”
     (『傳心法要』 大48 p.384a10. 汝千日學慧, 不如一日學道, 若不學道, 滴水難消.)

68. 

아, 이 몸이여! 아홉 개의 구멍에서 항상 더러운 기운이 흐르고, 무수히 

많은 부스럼을 한 조각 얇은 껍데기가 싸고 있구나.311) 또한 ‘가죽 

주머니에 가득 찬 똥이요 고름과 피의 덩어리’312)라고 하였으니, 

그 악취와 더러움은 전혀 가치가 없어 탐내거나 아까워할 것이 없다. 

하물며 한평생 부양해 준 은혜를 한숨에 저버리는 것을 어찌하랴!313)
咄哉, 此身! 九孔常流, 百千癰疽, 一片薄皮. 又云, ‘革囊盛
糞, 血之聚.’ 臭穢可鄙, 無貪惜之. 何況百年將養, 一息
背恩!
311) 이 문장은 전체적으로『大般涅槃經』에서 대의를 취했다. 아홉 개의 구멍은 두 
     눈·두 귀·두 콧구멍·입·항문·요도 등을 가리킨다. 항상 흐르는 더러운 기운[流]이 
     있기 때문에 구류(九流) 또는 구루(九漏)라고 하며, 그러한 아홉 기관을 구규(九竅)·
     구입(九入)·구창(九瘡) 등이라고도 한다. “이 몸은 청정하지 못하여 아홉 개의 구멍
     에서 항상 더러운 것이 흐른다. 이 몸은 성(城)과 같아서 피와 살과 근육과 뼈는 
     껍데기(피부)로 싸여 있다.”(『大般涅槃經』권1 大12 p.367b1. 是身不淨, 九孔常流. 
     是身如城, 血肉筋骨, 皮裹其上.);승량(僧亮)은 이 구절을 부정관(不淨觀)의 하나로 
     해설했다.『大般涅槃經集解』권2 大37 p.387c27 참조.
312)『禪宗永嘉集』「淨修三業」大48 p.388c1. 전등(傳燈)의『永嘉集註』 
     권상 卍111 p.419a2에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가죽 주머니에 가득 찬 똥은 장과 
     위에 있는 찌꺼기를 가리키고, 고름과 피의 덩어리란 가죽 주머니 속에 있는 것
     을 가리킨다.”(革囊盛糞, 指腸胃中之所有也;膿血之聚, 指革囊中之所有也.);“
     죽 주머니에 가득 찬 똥은 청정한 것이 아니다.”(『方廣大莊嚴經』권9 大3 p.593a17. 
     革囊盛糞, 非淸淨物.)
313) 먹고 마시며 몸을 유지해온 것을 은혜에 비유하였고, 한순간에 맞이하는 죽음은 
     그 은혜에 대한 배반으로 보았다.

 

[평1]

이상에서 보인 모든 업은 하나같이 이 몸에서 따라 나온 것이니 소리

높여 들려준 꾸짖음에는 깊은 경계의 뜻이 들어 있다. 이 몸은 모든 

애욕의 근본이니 그것이 허망하다고 깨우치면 모든 애욕은 저절로 

제거되겠지만, 그것에 빠진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허물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특별히 밝힘으로써 도를 닦는 바른 눈을 

뜨게 하려는 것이다.

上來諸業, 皆由此身, 發聲叱咄, 深有警也. 此身, 諸愛根本, 
了之虛妄, 則諸愛自除;如其耽着, 則起無量過患. 故於此特
明之, 以開修道之眼也.

 

 [평2]

몸을 구성하는 사대(四大)에는 주인이 없으므로314) 한편으로는 네 가지

원수에 의지한다 하고, 사대는 길러준 은혜를 저버리므로315) 한편으로는

네 마리 뱀316)을 기르는 것이라 한다. 내가 허망함을 깨우치지 못했으므로

타인에게 성내고 오만하게 굴며, 타인 또한 허망함을 깨우치지 못했으므로 

나에게 성내고 오만하게 구니, 두 귀신이 하나의 시체를 두고 다투는 꼴과 

같다. 하나의 시체가 지니는 본질은 물거품 덩어리317)라고도 하고, 꿈 

덩어리라고도 하며, 고통 덩어리라고도 하고, 똥 덩어리라고도 하니, 빨리 

썩을 뿐만 아니라 매우 더럽기도 하다. 얼굴의 일곱 구멍에서는 항상 

눈물과 침이 흐르고, 아래 두 구멍에서는 항상 똥과 오줌이 흐른다. 

그러므로 하루 어느 시각에나 몸을 깨끗이 하고서 사람들과 어울려야 한다. 

행동거지가 거칠고 깨끗하지 못한 자들은 선한 신들[善神]이 반드시 등을 

돌릴 것이다.『인과경』에는 “깨끗하지 못한 손으로 경전을 잡거나 부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거나 침을 뱉는 자는 반드시 측간의 벌레로 태어나는 

과보를 받게 된다”고 하였고,『문수경』에는 “대소변을 볼 때는 목석과 

같은 몸가짐을 하여 말하거나 소리를 내지 않도록 조심하라. 또한 벽에 

낙서하지 말고, 변기에 가래침을 뱉지  라”318)고 하였다. 또한 “측간에 

들어갔다 나와서 씻지 않은 자는 선상(禪床)에 앉아서는 안 되고, 보전

(寶殿:佛殿)에 올라가서도 안 된다”319)라고 하였다.

評曰 四大無主故, 一爲假四寃;四大背恩故, 一爲養四蛇. 我
不了虛妄故, 爲他人也嗔之慢之;他人亦不了虛妄故, 爲我也
嗔之慢之, 若二鬼之爭一屍也. 一屍之爲體也, 一曰泡聚, 一曰
夢聚, 一曰苦聚, 一曰糞聚, 非徒速朽, 亦甚鄙陋. 上七孔, 常
流涕唾, 下二孔, 常流屎尿. 故須十二時中, 潔淨身器, 以參衆
數. 凡行麤不淨者, 善神必背去. 因果經云, “將不淨手執經卷, 
在佛前涕唾者, 必當獲厠蟲報.” 文殊經云,“ 大小便時, 狀如
木石, 愼勿語言作聲. 又勿畵壁書字, 又勿吐痰入厠中.” 又云, 
“登厠不洗淨者, 不得坐禪床, 不得登寶殿.”
314) 사대로 구성된 몸을 무아(無我)로 보는 관점이다. 자아 자체도, 자아의 소유도
     없으므로 ‘주인이 없다’라고 한다. “사대가 화합하여 이루어졌으므로 임시로 몸이라 
     한다. 사대에는 주인이 없기에 몸에도 자아가 없다. 또한 이 병이 일어난 까닭은 
     모두 자아가 있다고 집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아에 대하여 집착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維摩經』권중 大14 p.544c29. 四大合故, 假名爲身. 四大無主, 
     身亦無我. 又此病起, 皆由著我. 是故, 於我不應生著.)
315) 사대가 흩어져 종국에는 죽음에 이른다는 말.
316) 네 마리 독사는 사대를 비유한다. “스스로 자신의 몸을 네 마리 독사와 같다고
     관찰하라.”(『大般涅槃經』권1 大12 p.367a28. 自觀己身如四毒蛇.);승량(僧亮)은 
     이것을 고관(苦觀)의 하나로 보았다.『大般涅槃經集解』권2 大37 p.387c26 참조.
317) “이 육신[色]은 물거품 덩어리와 같아서 알차지 못하고 변함없이 머물지도 않는다.”
     (『阿育王經』 권1 大50 p.134b3. 此色如泡聚, 不實不常住.)
318) 이상 경전의 전거는 미상이며, 『緇門警訓』권9「登廁規式」大48 p.1092a14의
     말을 근거로 한다. 다만 『文殊舍利問經』 권상 大14 p.492b29에 따르면, 예불(禮佛)
    할 때나 법문을 들을 때나 대중과 어울려 있을 때나 걸식할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대소변을 볼 때 등 여섯 가지 모든 상황에서 소리를 내면 안 된다고 하였다.
319)『緇門警訓』권9「登廁規式」大48 p.1092a1 등에 나오는 말.

 

율문(律文)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측간에 들어가는 순간 먼저 반드시 

손가락을 세 번 퉁겨서, 오물을 먹고 사는 귀신들을 경각시키고,320) 

없이 신주(神呪)를 각각 일곱 번 외운다.321) 처음에는 측간에 들어

가면서 시행하는 주문[入厠呪]을 외운다. ‘옴 하로다야 사바하!’ 

다음으로 씻으면서 시행하는 주문[洗淨呪]를 외운다. ‘옴 하나마리제 

사바하!’ 오른손으로는 물병[淨甁]을 들고 왼손〈넷째 손가락[無名指]

을 사용함〉으로 씻는데, 정병의 물[淨水]을 천천히 기울여 꼼꼼하게 

씻어야 한다. 그 다음은 손을 씻으면서 시행하는 주문[洗手呪]을 외운다. 

‘옴 주가라야 사바하!’ 이어서 더러움을 제거하는 주문[去穢呪]322)을 

외운다. ‘옴 시리예바혜 사바하!’ 마지막으로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한 

주문[淨身呪]을 외운다. ‘옴 바아라 놔가닥 사바하!’ 이 다섯 가지 

신주에는 큰 위덕이 있기 때문에 모든 악한 귀신들이 그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두 손이 묶인 듯 아무 짓도 할 수 없게 된다. 약 

법도에 맞게 그대로 외우고 지니지 않는다면, 설령 일곱 가지 갠지스 

강의 물로 씻어 금강제(金剛際)323)에 이르더라도 몸이 청정하게 되지 

못한다.” 또한 이렇게 말한다. “씻을 때는 반드시 냉수를 사용하되, 

손은 주엽나무로 씻어야 하며 톱밥이나 잿가루도 괜찮다. 만약 

잿가루를 써서 닦아 내지 않으면 촉수(觸水)324)가 손등에 흘러내려서 

생긴 지저분한 기운이 그대로 남게 되고, 그 상태로 예불을 하거나 

경전을 읽으면 반드시 죄를 받는다.”325) 이렇게 측간에 들어가 씻는 법 

또한 도를 닦는 사람이 일상에서 지켜야 할 행실이므로 간략하게 

경전의 말씀을 인용하여 여기에 함께 붙여둔 것이다.

律云,“ 初入厠時, 先須彈指三下, 以警在穢之鬼, 黙誦神呪各
七遍. 初誦入厠呪曰, ‘唵 狼嚕陀耶 莎訶 옴 로다아 바하.’ 
次誦洗淨呪曰,‘ 唵 賀囊密㗚帝 莎訶 옴하나 리뎨 바하.’
右手執甁, 左手〈用無名指〉洗之, 淨水旋旋傾之, 着實洗淨. 次誦
洗手呪曰, ‘唵 主迦羅野 莎訶 옴주가라야 바하.’ 次誦去穢
呪曰, ‘唵 室利曳娑醯 娑縛賀 옴시리예바혜 바하.’ 次誦淨身
呪曰,‘ 唵 跋於囉 惱迦吒 娑縛賀 옴바 라놔가다 바하.’ 

此五神呪, 有大威德, 諸惡鬼神聞必拱手. 若不如法誦持, 則雖
用七恒河水, 洗至金剛際, 亦不得身器淸淨.” 又云,“ 洗淨須用
冷水, 洗手須用皂角, 又木屑灰泥, 亦通. 若不用灰泥, 則觸水
淋其手背, 垢穢尙存, 禮佛誦經必得罪〈云云〉.” 此登厠洗淨之
法, 亦是道人日用行實故, 略引經語, 幷附于此.
320)『釋氏要覽』권하 大54 p.300a28에서『三千威儀經』의 설을 인용하여 측간에 
     들어갈 때에 지켜야 할 25가지 법 중 여섯 번째로 제시된 조목이다. “여섯째, 들어가고 
     나서는 바로 손가락을 퉁겨야 한다.〈이것은 똥을 먹고 사는 측간 귀신들을 경각하기 
     위함이다.〉”(六, 已登正彈指.〈此警噉糞諸鬼.〉)
321) 하에서 측간에 들어가서 외우는 다섯 가지 신주 곧 입측오주(入厠五呪)가 
     제시된다. 이 입측오주 하나하나에 대하여 일곱 번씩 외운다는 뜻이다.
322) 탐(貪)·진(瞋)·치(癡) 등의 더러움을 제거하여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323) 금륜제(金輪際)·금강륜제(金剛輪際)라고도 한다. 대지(大地)에서 160만 유순(由旬) 
     아래에 있는 금륜의 바닥을 가리킨다. 또는 뜻이 확장되어 ‘어떠한 일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어디까지든지’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제(際)는 다하다 또는 끝 등의 
     뜻이다.
324) ‘觸’은 탁(濁)과 같은 뜻. 뒷물을 할 때 쓰는 물. 그 다음에 쓰는 정수(淨水)와 
     엄격히 구별된다. “그때 여러 비구들이 먼저 촉수를 데우고 그 다음에 정수를 데우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정수를 데우고 그 다음에 촉수를 데워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월법죄(越法罪)를 범하는 것이다.’”(『有部律雜事』권10 大24 
     p.250b4. 時, 諸苾芻, 先煖觸水, 後煖淨水, 佛言, ‘先煖淨水, 後煖觸水. 若不爾者,
     得越法罪.’)
325)『緇門警訓』권9 大48 p.1092b1에는『溪堂雜錄』을 인용하여 30년 동안 
     『華嚴經』을 외워왔던 지초법사(智超法師)에게 어떤 동자가 찾아와서 나눈 
     다음과 같은 문답이 전한다. “지초가 동자에게 말했다. ‘어디서 왔느냐?’ ‘오
     대산에서 왔습니다.’ ‘무슨 일로 멀리 이곳까지 왔느냐?’ ‘사소한 일을 전해 
     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들어 보자.’ ‘스님께서 경전을 외우시는 일은 
     진실로 훌륭하십니다. 다만 측간에 들어가 씻을 때 촉수가 손등에 흘러내리
     지만 잿가루로 씻어내지 않는 것에 잘못이 있습니다. 사용하는 잿가루는 율
     에 일곱 번 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두세 차례만 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더러운 기운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이며, 그대로 예불을 하거나 경을 외우게 
     되면 모두 죄를 받게 됩니다.’ 말을 마치자 동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지초는 부끄럽게 여기며 잘못을 고쳤다. 아는 자들 중에는 ‘이것은 틀림없
     이 대산에 계시는 문수보살이 동자로 변하여 나타나 지초에게 경계의 
     말을 남긴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손을 씻을 때는 반드시 법
     도에 따라야 함을 알아야 한다. 『인과경』에는 ‘더러운 손을 하고 경을 
     보면 측간의 벌레로 태어나는 과보를 받게 된다’라고 하였다.”(超曰, ‘何
     來?’ 曰, ‘五臺來.’ 超曰, ‘何遠至此?’ 曰, ‘有少事欲相導故.’ 超曰, ‘願聞.’ 
     曰, ‘吾師誦經, 固可嘉矣. 但失在登廁洗淨時, 觸水淋其手背, 而未嘗用灰
     泥洗之. 所用灰泥, 律制七度, 今但二三, 緣此觸尚存, 禮佛誦經, 悉皆得罪.’
     言訖不見, 超慚而改過. 識者或曰, ‘此必文殊化現, 有警於超也.’ 故知洗手
     必須依法. 因果經云, ‘觸手請經, 當獲廁中蟲報.’)

 

69. 

죄가 있을 경우 참회하고 화를 냈을 경우 부끄러워한다면 장부의 

기상이 있는 것이다. 또한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로워지면 죄는 

그 마음을 따라 소멸할 것이다.

有罪卽懺悔, 發業卽慚愧, 有丈夫氣象. 又改過自新, 罪隨
心滅.

 

 [평]

참회란 이전에 저지른 허물을 뉘우치고[懺] 이다음에는 잘못이 없도록

반성한다[悔]는 뜻이다. 부끄러워한다[慚愧]는 말은 마음속으로 부끄럽게

여기며[慚] 잘못을 책망하고, 밖으로는 뉘우치며[愧] 그 잘못을 남들에게

숨김없이 고백한다326)는 뜻이다. 그러나 마음은 본래 텅 비고 고요하여 

죄업이 붙어살 터가 없다.

懺悔者, 懺其前愆, 悔其後過. 慚愧者, 慚責於內, 愧發於外. 
然, 心本空寂, 罪業無寄.
326) ‘발(發)’이란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참회하는 발로참회
     (發露懺悔)의 맥락이다. “만약 부끄럽게 여기며 발로참회하는 자라면 어찌 저지른
     죄를 소멸시키는 데 그치겠는가! 또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덕을 늘려서 여래의 
     열반이라는 뛰어난 결과까지 세우게 될 것이다.”(『慈悲水懺法』권상 大45
     p.970c3. 若能慚愧, 發露懺悔者, 豈唯止是滅罪! 亦復增長無量功德, 竪立如來涅槃妙果.);
     “마땅히 죄를 드러낼 일이며 덮어서 숨기지 마라. 드러내면 마음이 편안해지지만 
     드러내지 않고 숨기면 죄가 더욱 깊어진다. 이것을 가리켜 자신의 죄를
     살펴 대중 앞에 고백하는 것이라 한다.”(『集異門足論』권24 大26 p.381a15. 
     應發露, 勿覆藏. 發露則安穩, 不發露罪益深. 是名覺察擧罪.)

70. 
도인이면 마음을 단정히 하여 소박하고 곧은 태도를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표주박 하나 들고 납의(衲衣) 한 벌 걸친 채327) 이리저리 돌아다녀도 
얽매임이 없으리라.
道人宜應心, 以質直爲本. 一瓢一衲, 旅泊無累.
327) 표주박과 납의는 오로지 도(道)를 생각하는 수행자의 소박하고 곧은 의식(衣食)을 
     나타낸다. “‘옛 부처의 가풍은 어떤 것입니까?’ ‘표주박 하나와 납의 한 벌이다.’”
     (『黔南會燈錄』 권6 「祖鼻最章」 卍145 p.790a16. 問, ‘如何是古佛家風?’ 師云, 
      ‘一瓢一衲.’);이처럼 소박하고 청빈한 삶에 만족하고 도를 즐기는 풍모를 나타내는 
     예로서 공자(孔子)가 그 제자인 안회(顔回)를 칭송한 말이 유명하다.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국으로 누추한 거리에 산다면 남들은 그것이 괴로워 견디지 
     못할 것인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는다. 어질구나, 안회여!”(『論語』
     「雍也」. 一簞食, 一瓢飲,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 回也!)

 

[평]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곧은 활시위와 같다 ”328)라 하시고, 또한 “곧은 

음이 량이다”329)라고 하셨다. 이 몸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분명코 

어디에 머무르더라도 아무런 얽매임이 없을 것이다.

佛云,“心如直絃.” 又云, “直心是道場.” 若不耽着此身, 則必
旅泊無累.
328)『楞嚴經』권6 大19 p.132c22에 나오는 말. “만약 비구들의 마음이 곧은 
     활시위와 같이 모든 것에 진실하다면 삼매에 들어가도 영원히 마구니가 방
     해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 보살로서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리라고 인가한다.”(若諸比丘, 心如直絃, 一切眞實, 入三摩提, 永無魔事. 
     我印是人成就菩薩無上知覺.);이 경문에 대한 주석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모든 때에 전혀 거짓이 없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러한 사람이라면 진실로 
     도를 구하는 자일 것이니, 어찌 속히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겠는가! 만약 겉
     모습을 드러내어 꾸미면서 도를 얻었다고 속이거나 안으로는 거짓을 품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명성을 드러낸다면, 어찌 수행이라 하겠는가!”(『首楞
     嚴義疏注經』 권6 大39 p.915a21. 一切時中, 悉無虛僞. 若斯人也眞求道歟, 
     豈不速至乎! 若示相標形, 詐稱得道, 內懷諂曲, 外現名聞, 豈曰修行!)
329) “곧은 마음이 도량이니, 거짓이 없기 때문이다.”(『維摩經』권1 大14 p.542c15. 
     直心是道場, 無虛假故.);『注維摩詰經』 권4 大38 p.363c26에서 승조(僧肇)는 
     이렇게 풀이한다. “곧은 마음이란 안으로는 진실하고 곧으며, 밖으로는 거짓으로 
     꾸미는 습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수행을 떠받치는 근본이요 
     도를 펼치는 터이다.”(直心者, 謂內心眞直, 外無虛假. 斯乃基萬行之本, 坦進道之場也.)

 

71. 

범부는 마음 밖 경계에 집착하고 도인은 마음에 집착한다. 마음과 

계를 모두 잊어야만 진실한 법이다.330)
凡夫取境, 道人取心. 心境兩忘, 乃是眞法.
330)『傳心法要』大48 p.381a20.

 

[평]

경계에 집착하는 것은 사슴이 허공 꽃331)을 쫓아가는 꼴과 같고,332) 

마음에 집착하는 것은 원숭이가 물에 잠긴 달을 건지려는 꼴과 같다.333)

경계와 마음이 비록 다르지만 그것에 집착하는 병은 똑같다. 이것은 

범부와 이승을 함께 거론한 내용이다.

取境者, 如鹿之趂空花也;取心者, 如猿之捉水月也. 境心雖
殊, 取病則一也. 此合論凡夫二乘.
331) 공화(空花).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하여 헛된 생각을 일으켜 있는
     듯이 착각하는 분별을 비유하는 말. 눈병이 있는 사람이 허공에 꽃이 핀 것으로
     오인하는 현상을 비유로 끌어들인 것이다. “마치 세간 사람들이 허망하게 분별한 
     끝에 허공 꽃과 두 번째 달 등의 존재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과 같다. 반드시
     먼저 세간의 자잘한 현상에 대한 경험을 거친 다음에 비로소 이와 같은 현상도
     있고 집착하는 것이다.”(『大乘廣百論釋』권2 大30 p.196c8. 如世間虛妄分別, 
     執有空華第二月等. 必由先見世間少事, 然後方執有如是事.)
332) “비유하자면 사슴 떼가 갈증에 시달리다가 봄날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고 
     생각하여 미혹되고 어지러운 마음으로 쫓아가며 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범부는 시작도 알 수 없는 허위와 망상에 
     물들 삼[貪·瞋·癡]으로 마음을 애태우고 색의 경계를 즐긴다.”(『楞伽經』권2
     大16 .491a7. 譬如群鹿爲渴所逼, 見春時焰, 而作水想, 迷亂馳逐, 不知非水. 如是愚夫,
     無始虛僞妄想所熏, 三毒燒心, 樂色境界.)
333)『訶僧祇律』권7 大22 p.284a7 등에 나오는 비유. “나의 소유이거나 밖의 경계
     라고 령되게 생각하여 탐욕과 애착을 일으킨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쫓고어리석은 원숭이가 물에 잠긴 달을 건지려는 것과 같아서 없는 것에서 제멋
     대로 있다고 분별하며 부질없이 고통의 수레바퀴로 빠져드는 것이다.”
     (『宗鏡錄』권6 大48 p.447c17. 妄謂我所及外境界, 而生貪愛. 如渴鹿馳焰, 
      癡猿捉月, 無而橫計, 枉入苦輪.)

 

[게송]

천지에는 진나라의 해와 달이 일찍이 없었고, 

산하에는 한나라의 임금과 신하가 보이지 않는다.334)
天地尙空秦日月, 山河不見漢君臣.
334) 담영달관(曇穎達觀)이 임제(臨濟)의 사료간(四料揀) 중 인식 주관[人]과 인식 
     대상[境]을 모두 빼앗는 인경양구탈(人境兩俱奪)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답한 말이다. 
    『續燈錄』 권4 大51 p.489c3 참조. 진나라가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해와 달
     (또는 황제와 그 황후)은 없고, 한나라의 임금과 신하도 불변의 관계가 아니기 
     때에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이는 인식 대상으로서의 경계와
     인식 주인 마음이 모두 없다는 뜻을 드러낸다.

 

72. 

성문은 숲에서 고요히 앉아 좌선하다가 마구니에게 붙들리지만,335) 

살은 세간에서 즐겁게 노닐어도 외도나 마구니가 찾지 못한다.

聲聞, 宴坐林中, 被魔王捉;菩薩, 遊戱世間, 外魔不覓.
335) 고요히 앉아 좌선한다는 말은 연좌(宴坐)를 가리킨다.『維摩經』에서 ‘번뇌와 세
     간사를 떠나지 않으면서도 불도를 실현하는 것’이라 정의한 연좌의 개념에 따른다. 
    『壇經』에서는 이 교설로써 좌선에 치우친 선법을 비판하고 활발한 선법으로 전
     환하는 근거로 삼았다. “도법을 버리지 않고 범부의 일을 드러내는 것을 연좌라 
     한다. …… 번뇌를 끊지 않고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연좌이다.”(『維摩經』
    「弟子品」 大14 p.539c22. 不捨道法, 而現凡夫事, 是謂宴坐. …… 不斷煩惱, 
     而入涅槃, 是爲宴坐.);“만약 앉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옳다면 유마힐이 숲에서 
     고요히 좌선하는 사리불을 비판한 것은 합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지식이여, 
     또한 어떤 사람들은 남들에게 앉아서 마음을 살피거나 청정함을 살피면서 
     움직이지도 말고 일어나지도 말도록 가르치며 이것에서 공(功)을 남기려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깨우치지 못하고 그 말에 집착하여 전도되어 버린다.”(敦煌本 
    『壇經』大48 p.338b22. 若坐不動是, 維摩詰, 不合呵舍利佛宴坐林中. 善知識, 
     又見有人敎人坐, 看心看淨, 不動不起, 從此置功. 迷人不悟, 便執成顚.)

 

[평

성문은 고요함을 수행이라 집착하므로336) 마음이 움직이고, 마음이 

직면 귀신에게 발각된다. 보살은 본성이 저절로 텅 비고 고요하므로 

취가 남지 않고, 자취가 남지 않으면 외도나 마구니가 찾지 못한다. 

이것은 이승과 보살을 아울러 말한 것이다.

聲聞, 取靜爲行故, 心動, 心動則鬼見也. 菩薩, 性自空寂故, 
無迹, 無迹則外魔不見. 此合論二乘菩薩.
336) 이것은『圓覺經』大17 p.917c15에 나오는 말이지만, 경의 취지를 그대로 따르지는 
     았다.

 

[게송]

3월에 꽃 떨어지는 길에서 일없이 노니는데, 어느 집은 시름에 잠겨 

비 내리는 문을 닫는다.337)
三月懶遊花下路, 一家愁閉雨中門.
337) 앞 구절은 경계에서 걸림 없이 노니는 대승, 뒷구절은 경계를 차단하고 고요함을
     지키는 이승을 말한다. 송나라 때 한표(韓淲)의 『澗泉集』에 「雨中」이라는 시에 
     이어 「又」라는 제하의 다음 시에 나오는 구절이다. “아득하게 녹아내린 들물은 울
     타리 밑까지 이르고, 한없이 푸른 산은 멀리 산촌에 접해 있네. 3월에 꽃 떨어지
     는 길에서 일없이 노니는데, 어느 집은 시름에 잠겨 꽃비 내리는 문을 닫네. 
     茫茫野水浸籬根, 無數靑山接遠村. 三月懶遊花下路, 一家愁閉雨中門.”라는 시가 있다.
     한편, 풍혈연소와 학인과의 문답 중에 이 시구가 나온다. “‘유와 무가 모두 온데간데
     없을 때는 어떻습니까?’ ‘3월에 꽃 떨어지는 길에서 일없이 노니는데, 어느 집은 
     시름에 잠겨 꽃비 내리는 문을 닫는다.’”(『景德傳燈錄』권13「風穴延沼傳」大51
     p.303b18. 問, ‘有無俱無去處時, 如何?’ 師曰, ‘三月懶遊華下路, 一家愁閉雨中門’)

 

73. 

누구라도 목숨을 마치는 순간을 맞이하면 다만 오온이 모두 공(空)이고339) 

사대는 무아(無我)라고 관하라. 진심은 어떤 상(相)도 없어서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으며 태어날 때도 본성은 생겨나지 않고 죽을 때도 

본성은 떠나지 않으니, 맑은 물같이 원만하고 고요하여 마음과 경계가 

하나로 같다. 다만 이와 같이 그 자리에서 단번에 깨우친다면 삼세(三世)에 

속박당하지 않을 것이니 곧바로 세속을 벗어난 자유인이 될 것이다. 

만일 부처를 보더라도 따라갈 마음이 없고 지옥을 보더라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며, 다만 어떤 마음도 없이[無心] 법계와 하나가 될 뿐이니, 

이것이 바로 긴요한 핵심이다.340) 이처럼 평상의 생활이 원인이고

임종은 그 결과라는 것을 도 닦는 사람은 눈을 붙이고 자세히 살펴야 

한다.

凡人臨命終時, 但觀五蘊皆空, 四大無我. 眞心無相, 不去
不來, 生時性亦不生, 死時性亦不去, 湛然圓寂, 心境一如. 
但能如是, 直下頓了, 不爲三世所拘繫, 便是出世自由人也. 
若見諸佛, 無心隨去;若見地獄, 無心怖畏, 但自無心, 同
於法界, 此卽是要節也. 然則平常是因, 臨終是果, 道人須
着眼看.338)
338)『傳心法要』大48 p.381c5~c12.
340) 여기까지가『傳心法要』의 인용이다.

 

[평]

죽음이 두려운 노년에야 부처님을 가까이하려 하는구나.341)
怕死老年親釋迦.
341) 소옹(邵雍)의 「學佛吟」에 나오는 구절. “죽음이 두려운 노년에야 부처님을 
     가까이하여, 망령되게 인연을 끊고자 하나 인연은 더욱 무거워지고, 병을 제거하려
     하지만 병은 더욱 많아진다.”(『佛祖綱目』 권37상 卍146 p.708b4. 怕死老年親釋迦,
     妄欲斷緣緣愈重, 徼求去病病還多.)

 

[게송]

바로 지금 자기 자신의 본분을 밝힐 일이니, 죽음의 순간342)에 생각을

바꿀지라도 그르치리라.343)
好向此時明自己, 百年光影轉頭非.
342) 백년광영(百年光影). 백 년은 사람의 일생 또는 일생을 마치는 죽음. 광영은
     시간을 나타낸다.
343) 법천(法泉)의『證道歌頌』卍114 p.884a5에 나오는 구절.

 

74. 

누구라도 목숨을 마치는 순간을 마주하여 한 터럭만큼이라도 범부와

성인을 차별하는 헤아림이 사라지지 않거나 사유분별을 잊지 않는다면,

나귀의 태나 말의 배 속에 태어나거나344) 지옥345)의 끓는 가마솥에 삶아

지거나 전생과 마찬가지로 다시 땅강아지·개미·모기·등에가 될 것이다.

凡人臨命終時, 若一毫毛凡聖情量不盡, 思慮未忘, 向驢胎
馬腹裏托質, 泥犁鑊湯中煮煠, 乃至依前再爲螻蟻蚊虻.
344) ‘한 터럭만큼이라도’라는 구절부터 여기까지는 무업국사(無業國師)의 말이다.
    『東林頌古』卍118 p.814a12.
345) 니리(泥犁). niraya의 음사어 중 하나. 가염처(可厭處)·불행처(不幸處)·무복처
     (無福處)·명부(冥府) 등으로도 한역한다.

 

[평]    

백운수단(白雲守端)이 말했다. “설령 범부와 성인을 차별하는 한 터럭

큼의 헤아림까지 깨끗이 사라졌을지라도 또한 나귀의 태나 말의 배 

속에 태어나지 않을 수 없다.”346) 두 가지로 갈라진 견해의 별똥이 

날리면,347) 갖가지 윤회의 길로 흩어져 들어가리라.

白雲云,“ 設使一毫毛, 凡聖情念淨盡, 亦未免入驢胎馬腹中.” 
二見星飛, 散入諸趣.
346) 차별심이 사라지지 않아도 윤회를 벗어날 수 없고 차별심이 사라지더라도 마
     찬가지라고 함으로써 윤회를 벗어날 조건을 모두 박탈했다. 백운의 말이 짝이 
     되어서 무업의 말은 비로소 하나의 관문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동림(竹庵士
     珪)의 송과 운문(大慧宗杲)의 송을 예로 든다. “동림의 송:하나의 길이 거문
     고 줄과 같이 곧게 뻗어 있으니, 마음에 가까이 와 닿고 손으로 만지기에도 
     가깝도다(무업). 화살이 붉은 태양의 그림자를 뚫어야, 비로소 수리를 쏘아 
     맞히는 사람이라 하리라(백운). 운문의 송:몸은 옮기지만 발걸음은 옮기지 
     않고(무업), 발걸음은 옮기지만 몸은 옮기지 않는구나(백운). 금사자를 쫓아
     가다 놓치고, 도리어 옥기린을 잡았도다.”(『東林頌古』 卍118 p.814a13. 
     東林頌:一道如絃直, 心親手更親. 箭穿紅日影, 方是射鵰人. 雲門頌:移身不
     移步, 移步不移身. 走卻金師子, 捉得玉麒麟.)
347) 무업과 백운의 말에 대하여 서로 다른 것으로 분별하는 이견(二見)을 가리킨다.
     다르다고 해도 윤회의 길로 들어서고, 다르지 않다고 해도 윤회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렇다고 하여 서산의 이 말을 듣고 두 선사의 말을 같은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게송]    

맹렬한 불길 아득히 퍼지고, 보검 들고 문 앞을 지키고 있네.348)
348) 지옥의 불길과 지옥의 문을 지키고 있는 옥졸을 묘사한 장면이다.
烈火茫, 寶劒當門.

 

[평]

이 두 절은 특별히 종사가 무심하게 도와 합하는 문을 열어 보이고, 

전에 제시된 염불하여 왕생하기를 구하는 문은 방편상 막아 놓았다. 

그러나 근기가 같지 않고 뜻과 소원 또한 달라 각각 이와 같을 뿐이며 

두 가지는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 도를 닦는 모든 자들은 평소에 

자신의 분수에 따라 각자 노력하고 마지막 찰나에 의심과 후회를 

일으키지 않기 바란다.

評曰 此二節, 特開宗師無心合道門, 權遮敎中念佛求生門. 然
根器不同, 志願亦異, 各各如是, 兩不相妨. 願諸道者, 平常隨
分, 各自勞力, 最後刹那, 莫生疑悔.

 

병통과 화두의 본질

 

75. 

선(禪)을 공부하는 자가 본지풍광349)을 아직 밝히지 못했다면, 우뚝 

솟은 현묘한 관문을 무엇에 의지하여 뚫으려 하는가? 왕왕 현상이 

완전히 소멸되고 드러난 공(空)350)을 선(禪)으로 여기고, 무기공351)을 

도라고 생각하며, 모든 것이 무라는 생각을 고상한 견해라 여기기도 

한다. 이는 아무것도 없는공352)과 하나가 되어 깊은 병에 걸린 상태

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선(禪)을 말하는 자들은 보통 이 병에 주저앉아 

있다.

禪學者, 本地風光, 若未發明, 則孤峭玄關, 擬從何透? 往往
斷滅空, 以爲禪, 無記空, 以爲道, 一切俱無, 以爲高見. 此
冥然頑空, 受病幽矣. 今天下之言禪者, 多坐在此病.
349) 本地風光. 자기 자신의 본래 심성(본지)이 고스란히 드러난 세계(풍광)를 가리
     킨다. 어떤 오염도 없는 경계로서 주관의 깨달은 심경을 지시할 경우에도 눈앞
     의 세계를 소재로 하여 본지풍광이라 한다. “당장에 분별[情]에 얽매인 의식을
     털고 벗어서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본지풍광을 증득하고 본래면목(本來面
     目)을 볼 것이다.”(『圜悟語錄』권9 大47 p.751c16. 直下擺脫情識, 一念不生, 
     證本地風 光, 見本來面目.)
350) 단멸공(斷滅空). 현상으로서의 색(色)과 단절되거나 그것을 소멸한 다음에 드러
     나는 공. 색 그대로 공이라는 이치 곧 즉색공(卽色空)과 대칭된다. 이것은 공에
     대한 집착으로서 진실한 공[眞空]이 아니라 악취공(惡取空)이라 한다. “색을 벗
     어난 공[離色空]이란 공이 색 밖에 있다는 뜻이다. 마치 담장 안은 비어 있지 않
     았지만 담장 밖은 빈 것과 같다. 단멸공이란 색을 소멸시켜 공을 밝히는 것이다.
     마치 우물을 팔 때 흙을 제거하면 빈 공간이 드러나는 것과 같이 반드시 색을 
     소멸시키고자 한다.”(『註華嚴法界觀門』 大45 p.685a16. 離色空者, 空在色外. 
     如牆處不空, 牆外是空. 斷滅空者, 滅色明空. 如穿井除土出空, 要須滅色也.)
351) 無記空. 선도 악도 모두 없다고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
352) 공(頑空). 색과 어울리지 못하고 공 자체에 치우친 공이기 때문에 편공(偏空)
     이라고 한다. “주장자를 집어 들고 말했다. ‘범부는 주장자를 보고 주장자라
     부르고, 성문인은 주장자를 보고 아무것도 없는 공이라 오인하여 주장자의 존
     재를 부정한다. 보살인이라면 주장자를 보고 어찌 조금이라도 입에 담아 두겠
     는? 그들은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며, 추워지면 불을 쪼
     이러 가고, 더우면 서늘한 기운을 즐길 뿐이다.’”(『翠巖可眞禪師語』 續古尊
     宿語 1卍118 p.854a3. 拈起拄杖云, ‘凡夫, 見拄杖, 喚作拄杖;聲聞人, 見拄
     杖, 認得頑空, 撥無拄杖;菩薩人, 見拄杖, 幾曾掛著牙齒? 飢來喫飯, 困來打睡, 
     寒來向火, 熱則乘涼.’)

 

[평

향상하는 유일한 관문에는 발을 들여놓을 문이 없다. 운문이 말하기를

“자기 래의 광명을 뚫고 벗어나지 못하면 두 종류 병이 있고, 법신을 

어도 두 종류의 병이 있다”353)라고 하였으니, 반드시 그 하나하나를 

모두 뚫어야 한다.

向上一關, 措足無門. 雲門云,“ 光不透脫, 有兩種病;透過法身, 亦有兩種病.” 
須一一透得, 始得.
353)『雲門廣錄』권중 大47 p.558a20에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자기 본래의 광명을
      뚫지 못하면 두 가지 병이 생긴다. 모든 곳에서 면전에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밝게 보지 못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또한 모든 법이 공이라는 도리를 뚫어 보았
      어도 은은하게 어떤 것이라도 남아 있는 듯하면 이 역시 광명을 뚫지 못한 것이
      다. 또한 법신에도 두 가지 병이 있다. 법신에 도달하고도 법에 대한 집착을 잊
      지 못하는 탓에 자기 자신의 견해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법신의 주변에 눌러앉
      는 것이 그 하나이다. 설령 법신을 뚫었더라도 그 상태 그대로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자세히 점검해 보아서 약간의 기미라도 남아 있다면 이 또한 병인 
      것이다.” (光不透脫, 有兩般病. 一切處, 不明面前有物, 是一. 又透得一切法空, 
      隱隱地似有箇物相似, 亦是光不透脫. 又法身, 亦有兩般病. 得到法身 爲法執不忘, 
      己見猶存, 坐在法身邊, 是一. 直饒透得法身去, 放過卽不可, 子細點檢來, 
      有什麽息, 亦是病.)

 

[게송]

방초 우거 길을 지나지 않으면, 무수히 꽃 떨어진 마을에 이르지 

못하리라.

不行芳草路 難至落花村.

 

76.

종사에게도 여러 가지 병통이 있다. 병통이 귀와 눈에 있는 자는 눈썹을 

치켜 올리고 눈을 부릅뜨며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선

(禪)이라 여긴다. 병통이 입과 혀에 있는 자는 전도된 말과 제멋대로 

지르는 할(喝)을 선이라 여긴다. 병통이 손과 발에 있는 자는 앞으로 

아가고 뒤로 물러서며 동쪽을 가리키고 서쪽을 구분 짓는 것을 

선이라 여긴다. 병통이 심장과 배에 있는 자는 깊고 미묘한 이치를 

궁구하고 분별을 넘어서고 견해를 떠나는 것을 선이라 여긴다. 

진실에 근거하여 진다면 병통이 아닌 것이 없다.354)
宗師亦有多病. 病在耳目者, 以瞠眉努目, 側耳點頭爲禪;
病在口舌者, 以顚言倒語, 胡喝亂喝爲禪;病在手足者, 以
進前退後, 指東畵西爲禪;病在心腹者, 以窮玄究妙, 超情
離見爲禪. 據實而論, 無非是病.
354) 심문담분(心聞曇賁)의 설이다.『禪林寶訓』권4 大48 p.1036a21.

 

[평]

부모를 죽인 자는 부처님 앞에 참회라도 하지만, 반야를 비방한 자는 

참회할 길이 없다.355)
殺父母者, 佛前懺悔;謗般若者, 懺悔無路.
355) 운문문언(雲門文偃)의 문답을 응용한 것이다. “‘부모를 죽이면 부처님 앞에서 참
     회라도 하지만 부처와 조사를 죽일 경우 누구에게 참회합니까?’ ‘모조리 드러내
     어라!’”(『雲門廣錄』권상 大47 p.547b28. 問, ‘殺父殺母, 佛前懺悔, 殺佛殺祖, 
     向什麽處懺悔?’ 師云, ‘露!’) 모조리 드러내고 참회하라는 발로참회(發露懺悔)의 
     뜻이지만, 부모도 죽이고 부처와 조사도 죽여야 진실한 참회라는 선지(禪旨)를 
     나타낸다. 또한 ‘로(露)’라는 한 글자 자체가 하나의 화두[一字關]가 되면 위와 
     같은 뜻도 무의미하게 된다.

 

[게송]

허공에서 그림자를 잡아도 묘하지 않거늘, 만물 밖에서 자취를 좇는 

이 어찌 뛰어난 기틀이겠는가!

空中撮影非爲妙, 物外追蹤豈俊機!

 

77. 

본분을 깨우친 종사가 남김없이 제기하는 이 구절356)은 마치 장승이

노래하며 박수치거나 붉게 타는 화로에 떨어진 한 점의 눈송이357)

같으며 또한 부싯돌의 불꽃이나 번갯불358)과 같아서 학인이 참으로 

러니저러니 분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은 스승의 은혜를

알고서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선사(先師)의 도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사가 나에게 불법에 대하여 말해 주지 않은 것을

소중히 여길 뿐이다.”359)
本分宗師, 全提此句, 如木人唱拍, 紅爐點雪, 亦如石火電
光, 學者實不可擬議也. 故古人知師恩曰,“ 不重先師道德, 
只重先師不爲我說破.”
356) 차구(此句). 본분을 드러내는 구절. 어떤 분별의 여지도 없는 화두를 말한다. 본
     분사(本分事)를 ‘이 일’ 곧 차사(此事)라고 하듯이 가장 긴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
     제이므로 곧바로 가리킬 수 있는 ‘이 구절’이라 한 것이다.
357) 눈송이가 화로에 떨어지는 순간 곧바로 녹아버리듯이 화두라는 화로에서 모든
     분별과 번뇌망상뿐만 아니라 조사의 갖가지 수단도 들어설 틈이 없이 사라진다
     는 것을 비유한다. “이 경계에 이르러 방(棒)과 할(喝)이 용납되겠는가? 깊고 미
     묘한 이치의 본질이 들어설 수 있겠는가? 피아와 시비를 가르는 분별이 용납되
     겠는가? 당장에 붉게 타는 화로에 떨어진 한 점의 눈송이와 같이 그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圜悟語錄』 권8 大47 p.749a8. 到箇裏, 還容棒喝麽? 還容
      玄妙理性麽? 還容彼我是非麽? 直下如紅爐上一點雪相似.);“옛날의 악습이 불
     현듯 일어나면 이 또한 억지로 마음을 써서 누르지 말고 다만 일어나려는 순간
     에 ‘개도 불성이 있는가?’ ‘없다’라고 한 화두를 살피십시오. 바로 이러할 때 
     일어나는 생각들은 붉게 타는 화로에 떨어지는 한 점의 눈송이와 같이 붙는 순
     간 사라질 것입니다.” (『書狀』「答劉通判」大47 p.926a26. 忽爾舊習瞥起, 
     亦不着用心按捺, 只就瞥起處, 看箇話頭, 狗子還有佛性也無, 無. 正恁麽時, 如
紅爐上一點雪相似.)
358) 잠시도 분별할 틈이 허용되지 않는 화두의 속성을 비유한다.
359) 운암담성(雲巖曇晟)이 불법에 대하여 어떤 지시도 해주지 않은 것을 소중히 여
     긴다고 한 동산양개(洞山良价)의 말을 가리킨다. “운암의 기일을 맞이하여 동산
     이 제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어떤 학인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운암 문하에서 어
     떤 가르침을 받았습니까?’ ‘비록 그 문하에 있었지만 가르침을 받은 적은 없다.’
     ‘가르침을 받지도 않았으면서 제사를 베푸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어찌 그분의
     뜻을 어기고 등 돌릴 수 있겠는가?’ ‘화상께서는 남전(南泉) 문하에서 공부를 시
     작하였는데, 어째서 운암에게 제사를 베푸십니까?’ ‘나는 선사(운암)의 도덕과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분이 나에게 불법을 말해 주지 않은
     것 소중히 여길 뿐이니라.’ ‘스님께서 선사에게 제사를 베푸는 것은 선사께서
     말씀하지 않았던 뜻을 수긍하는 것인가요?’ ‘반은 수긍하고 반은 수긍하지 않는
     다.’ ‘어째서 전적으로 수긍하지 않으십니까?’ ‘만일 전적으로 수긍한다면 선사
     의 혜를 등지는 것이기 때문이다.’”(『洞山語錄』大47 p.509b17. 雲巖諱日, 
     師營齋, 僧問, ‘和尙於雲巖處, 得何指示?’ 師曰, ‘雖在彼中, 不蒙指示.’ 云, ‘旣
     不蒙指示, 又用設齋, 作甚麽?’ 師曰, ‘爭敢違背他!’ 云, ‘和尙發跡南泉, 爲甚麽
     却與雲巖設齋?’ 師曰, ‘我不重先師道德佛法, 祇重他不爲我說破.’ 僧云, ‘和尙
     爲先師設齋, 還肯先師也無?’ 師曰, ‘半肯半不肯.’ 云, ‘爲甚麽不全肯?’ 師曰, 
     ‘若肯, 卽孤負先師也.’)

 

[평]

말하지 마라, 말하지 마라! 문자에 매달릴까 염려스럽다.360)
不道, 不道! 恐上紙墨.
360) 대양경현(大陽警玄:大陽警延)의 말. “경현이 처음에 정주 양산의 관선사(觀禪
     師)를 친견하고 ‘상(相)이 없는 도량이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자, 관선사가 
     벽에 걸린 관세음보살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은 바로 오처사(吳處事:吳
     道才)가 그린 것이다.’ 경현이 말을 꺼내려고 하자 관선사가 급하게 보살상을 
     가리며 ‘이것도 상이 있는 것이다. 상이 없는 것은 어떤 것일까?’라고 물었다. 
     이 순간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 뜻을 깨닫고 절을 올린 후 경현이 일어나 옆에 
     서자 관선사가 말했다. ‘한 구절을 말해 보지 그러는가?’ ‘말을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에 매달릴까 염려스러울 뿐입니다.’ 관선사가 웃으며 말했다. ‘언
     젠가 바로 이 말이 비(碑)에 새겨질 것이니라.’”(『禪林僧寶傳』권13「大陽
     警玄傳」 卍137p.495b4. 初謁鼎州梁山觀禪師, 問, ‘如何是無相道場?’ 觀指壁
     間觀音像, ‘此是吳處士畫.’ 延擬進語, 觀急索曰, ‘遮箇是有相. 如何是無相底?’ 
     於是, 延悟旨於言下, 拜起而侍. 觀曰, ‘何不道取一句子?’ 延曰, ‘道卽不辭, 恐
     上紙墨.’觀笑曰, ‘他日此語, 上碑去在.’)

[게송]

화살이 강에 비친 달그림자를 뚫으니, 

틀림없이 날아가는 수리도 쏘아 맞히는 사람의 솜씨이리라.

箭穿江月影, 須是射鵰人.

 

각 종파의 법계와 법문의 특징

 

78. 

배우는 자라면 무엇보다 종지에 이르는 길을 상세히 분별해야 한다.

옛날에 마조가 내지른 한 번의 할(喝)에 백장은 귀가 멀었고 황벽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밀었다.361) 이 한 번의 할이 바로 염화(拈花)의 소식이고 

또한 달마가 처음으로 중국에 와서 전했던 면목이기도 하다. 아! 이것이 

임제종의 연원인 것이다.

大抵學者, 先須詳辨宗途. 昔馬祖一喝也, 百丈耳朧, 黃蘗
吐舌. 這一喝, 便是拈花消息, 亦是達摩初來底面目. 旴! 此
臨濟宗之淵源.
361)『선교결』주석19) 참조.

 

[평]

법을 분별하는 자들은 두려워하니, 말이 나오자마자 곧바로 때리는

구나.362)
識法者懼, 和聲便打.
362)『碧巖錄』37則「著語」大48 p.175a14에 동일한 구절이 보인다.

 

[게송]

마디 없는 주장자 한 자루를 은근히 밤길 가는 사람에게 전해 주노라.363)
杖子一枝無節目, 慇懃分付夜行人.
363)법천(法泉)의『證道歌頌』 卍114 p.883a3에 나오는 구절. ‘마디 없는 주장자’는 
      분별할 조목이 없는 속성의 법을 나타내며, 대대로 조사들이 전한 법을 상징한다.

 

[평]

옛날에 마조가 내지른 한 번의 할로 백장은 대기(大機)를 얻었고 황벽은 

대용(大用)을 얻었다. 364) 대기란원만하게 응한다는 뜻이고, 대용이란

곧바로 근원에 이른다는 뜻이다. 자세한 사정은 『전등록』에 나온다.

昔馬祖一喝也, 百丈得大機, 黃蘖得大用. 大機者, 圓應爲義;
大用者, 直截爲義. 事見傳燈錄.

 

 

임제종臨濟宗

본사365)이신 석가모니부처님으로부터 33세366)인 6조 혜능대사가 곧장 

전하여(直傳) 남악회양,367) 마조도일,368) 백장회해,369) 황벽희운,370) 

임제의현,371) 흥화존장,372) 남원도옹,373) 풍혈연소,374) 수산성념,375) 

분양선소,376) 자명초원,377) 양기방회,378) 백운수단,379) 오조법연,380) 

원오극근,381) 경산종고382)등의 선사(禪師)로 이어졌다.

本師釋迦佛, 至三十三世, 六祖慧能大師下直傳, 曰南嶽懷讓, 
曰馬祖道一, 曰百丈懷海, 曰黃蘗希運, 曰臨濟義玄, 曰興化存
奬, 曰南院道顒, 曰風穴延沼, 曰首山省念, 曰汾陽善昭, 曰慈
明椘圓, 曰楊歧方會, 曰白雲守端, 曰五祖法演, 曰圓悟克勤,
曰徑山宗杲禪師等.
365) 本師. 본보기가 되는 스승. 근본으로 이끄는 교사(敎師). 본연도사(本緣導師)· 본
     종사(本從師)·본사화상(本師和尙) 등과 같은 말이다. 특히 석가모니불을 가리키며, 
     교주(主)·본주(本主)·본불(本佛) 등과 같은 뜻으로 쓰인다.
366) 가섭을 초조로 하는 선종의 법계상, 중국의 초조인 달마대사는 28조이며 중국
     선종 6조인 혜능은 33조에 해당한다. 가섭을 초조(初祖)로 교외별전의 선법(禪
     法)이 보리달마에 이르기까지 28대에 걸쳐 이어졌다는 조통설(祖統說)은 801년 
     (정원17) 성립된 선종 최초의 전등록인『寶林傳』에서 완성되었고, 그 뒤의 전
     등록에서도 대체로 이 설을 따르고 있다.
367) 南嶽懷讓(677~744). 금주안강(金州安康:山東省) 출신으로 속성은 두(杜)씨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처음에는 율장(律藏)을 익혔다. 후에 숭산(嵩山)으로 가 혜안
     (慧安)을 친견하고 그의 추천으로 6조 혜능(638~713)을 참례하고 수제자가 되어 
     15년간 시봉하였다. 713년(선천2) 6조가 입적하자 호남의 남악 반야사(般若寺) 
     관음당(觀音堂)의 주지가 되어 혜능의 도를 선양하였다.
368) 馬祖道一(709~788). 조사선의 비조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한주(漢州:四川廣漢)
     출신으로 속성이 마(馬)씨여서 마대사(馬大師)라고도 한다. 즉심시불(卽心是佛)·
     비심비불(非心非佛)·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등의 화두로 선풍을 크게 떨쳤다.
369) 百丈懷海(720~814). 복주(福州) 장락(長樂) 출신으로 속성은 왕(王)씨이다. 황
     (黃)씨라는 설도 있다. 백장산에서 선원(禪院)을 세우고 청규를 제정하여 대중을 
     이끌고 농사와 선수행을 병행하며 대중을 이끌었다.
370) 黃蘗希運(?~850). 복건성 복주(福州) 민현(閩縣) 출신이다. 문인인 상국(相國)
     배휴(裵休)가 집록한 『傳心法要』가 유명하다.
371) 臨濟義玄(?~867). 임제종의 개조. 하남성 조주 남화(南華) 출신으로 속성은 형
     (邢)씨이다. 할(喝)을 쓴 것으로 유명하다. 사빈주(四賓主)·사할(四喝)·삼현삼요
     (三玄三要) 등의 선법을 펼쳤다.
372) 興化存獎(830~888). 임제의현의 제자. 산동성 출신으로 속성은 공(孔)씨이다. 
     임제가 입적한 후에는 삼성혜연(三聖慧然) 회하에서 수좌로 있었다. 위부(魏府)의
     화사(興化寺)에서 임제종풍을 크게 선양했다.
373) 南院道顒(860~930). 하남성 여주(汝州) 출신이다. 혜옹(慧顒) 또는 보응(寶應)
     이고도 불린다.
374) 風穴延沼(896~973). 항주(杭州) 출신으로 속성은 유(劉)씨이다. 출가 초기에는
     천태종을 수학하다가 남원도옹에게서 참학한 뒤 여주 풍혈사(風穴寺)를 창건하고 
     임제종풍을 선양했다.
375) 首山省念(926~993). 내주(萊州) 출신으로 속성은 적(狄)씨이다. 죽비자(竹篦子)
     화두가 알려져 있다.
376) 汾陽善昭(947~1024). 산서성 태원(太原) 출신으로 속성은 유(兪)씨이다. 부모가
     연이어 세상을 떠나자 14세 때 출가하였으며 71명의 선지식을 역참하고 최후에
     수산성념 문하에서 참학하고 법을 이었다.
377) 慈明椘圓(986~1040). 자명은 시호. 석상초원(石霜楚圓)이라고도 한다. 전주(全
     州)신으로 속성은 이(李)씨이다. 초원의 문하에서 양기방회(楊岐方會)와 황룡
     혜남(黃龍慧南)이 나와 각각 임제종 양기파와 황룡파로 분파되어 임제종의 전등
     을 이었다.
378) 楊岐方會(996~1049). 산서성 원주(袁州) 출신으로 속성은 냉(冷)씨이다.
379) 白雲守端(1025~1072). 호남성 형양(衡陽) 출신으로 속성은 갈(葛)씨이다.
380) 五祖法演(1024~1104). 사천성 면주(綿州) 출신으로 속성은 등(鄧)씨이다. 35세
     에 출가하였다. 조주(趙州)의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화두에 대한 참구법을 간
     화선(看話禪)의 방법으로 제시한 최초의 선사이다.
381) 圜悟克懃(1063~1135). 사천성 팽주(彭州) 출신으로 속성은 낙(氏)씨이다. 저술
     에 『碧巖錄』이 있다.
382) 徑山宗杲(1089~1163). 안휘성 선주(宣州) 영국(寧國) 출신으로 속성은 해(奚)씨이
     다. 대혜종고(大慧宗杲)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간화선의 대성자이다.

 

조동종曹洞宗
육조혜능이 방계(傍系)로 전하여 청원행사,383) 석두희천,384) 약산유엄,385) 
운암담성,386) 동산양개,387) 조산탐장,388) 운거도응389) 등의 선사로 
이어졌다.
六祖下傍傳, 曰靑原行思, 曰石頭希遷, 曰藥山惟儼, 曰雲巖曇
晟, 曰洞山良价, 曰曹山耽章, 曰雲居道膺禪師等.
383) 靑原行思(?~740). 강서성(江西省) 길주(吉州) 안성(安城) 출신으로 속성은 유
     (劉)씨이다. 문하에서 조동종·법안종·운문종이 갈라져 나왔다.

384) 石頭希遷(700~790). 광동성 단주(端州) 출신으로 속성은 진(陳)씨이다. 처음에 
     6조 혜능에게 득도했으나 혜능이 얼마 되지 않아 입적하자 청원행사에게서 참학
     하고 인가를 받았다. 당시 ‘강서마조(江西馬祖) 호남석두(湖南石頭)’라고 불리며 
     마조도일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385) 藥山惟儼(745~828). 산서성 강주(絳州) 출신으로 속성은 한(韓)씨이다.
386) 雲巖曇晟(782~841). 강서성 종릉(鍾陵) 출신으로 속성은 왕(王)씨이다. 16세에
     출가하여 수년 동안 백장회해의 문하에 있다가 백장이 입적하자 약산유엄에게
     참학하고 법을 이었다.
387) 洞山良价(807~869). 조동종의 시조이다. 절강성 월주(越州) 회계(會稽) 출신으
     로 속성은 유(兪)씨이다. 제방을 참방하던 중 운암담성에게 가서 무정설법(無情
     說法)의 뜻을 묻고 돌아오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 
     조동오위(曹洞五位)의 실마리가 된 「五位頌」을 지었다.
388) 曹山耽章(839~901). 복건성 고전현(古田縣) 출신으로 속성은 황(黃)씨이다. 보
     통 본적(本寂)이라는 법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동산양개가 제시한 오위(五位)
     의 법문을 정리하여 선풍을 진작시켰는데, 이로써 조동종이 종파로서 성립하기에
     이르렀다.
389) 雲居道膺(?~902). 하북성 옥전현(玉田縣) 출신으로 속성은 왕(王)씨이다.

운문종雲門宗

마조도일이 방계로 전하여 천왕도오,390) 용담숭신,391) 덕산선감,392) 

설봉의존,393) 운문문언,394) 설두중현,395) 천의의회396) 등의 선사로 

이어졌다.

馬祖傍傳, 曰天王道悟, 曰龍潭崇信, 曰德山宣鑑, 曰雪峯義
存, 曰雲門文偃, 曰雪竇重顯, 曰天衣義懷禪師等.
390) 天王道悟(738~819). 호북성 강릉(江陵) 저궁(渚宮) 출신으로 속성은 최(崔)씨이
     다. 제방을 두루 역참하다가 마조도일의 법문을 듣고 단박에 깨쳤다. 저궁으로 
     돌아가 전법했다. 동시대의 천황도오(天皇道悟 748~807)와 구별하기 위하여 
     후세에 천왕도오(天王道悟)로 불렀다. 법통은 용담(龍潭)·덕산(德山)·설봉(雪
     峰)등으로 이어지며 덕산 문하에서 운문종(雲門宗)과 법안종(法眼宗)이 배출
     되었다. 그런데 천황도오와 천왕도오의 법통에 대한 여러 선문헌의 기록이 상
     이여 아직까지 정론이 없다. 이는 운문종과 임제종이 서로 혜능의 법맥을 
     잇는 적통이라 주장하여 무리하게 법맥을 정리한 것에 기인한다.
391) 龍潭崇信(782?~865?). 저궁(渚宮) 출신. 천황사(天皇寺) 인근에서 떡 장사를 했
     는데, 떡을 공양한 것을 인연으로 출가하여 법을 이어받았다.
392) 德山宣鑑(780~865). 사천성 검남(劍南) 출신으로. 속성은 주(周)씨이다. 어릴 때
     출가하였으며 대·소승 경전에 모두 통달하였다. 특히 항상 『金剛般若經』을 강
     의하였으므로 당시에 주금강(周金剛)이라 일컬어졌다. 남방에서 불립문자(不立
     文字)의 선법이 풍미한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하여 이들을 논파하려고 『金剛經
     疏鈔』를 지니고 용담숭신을 찾아가 문답하던 중 깨닫고서는 바로 『金剛經疏
     鈔』를 태워버리고 선종에 귀의하였다. 항상 주장자[棒]로 학인을 때리는 엄정
     한 가풍을 떨쳐서 덕산방(德山棒)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393) 雪峯義存(822~908). 복건성 남안현(南安縣) 출신으로 속성은 증(曾)씨이다. 동
     산양개 문하에 있으며 참학했으나 소식이 없자 동산양개의 권유로 덕산선감(德
     山宣鑑)을 찾아가 참학하고 법을 이었다.
394) 雲門文偃(864~949). 운문종의 개조. 절강성 가흥(嘉興) 출신으로 속성은 장(張)
     씨이다. 출가하여 여러 경론을 섭렵하였는데, 특히『四分律』을 깊이 연구했다.
     설봉의존을 친견하여 3년 동안 공부하고 그의 종지를 전수받았다. 그 후 제방의
     선지식을 참방하였으며 923년에는 운문산에서 광태선원(光泰禪院)을 창건하고
     선풍을 드날렸다.
395) 雪竇重顯(980~1052). 사천성 수령현(遂寧縣) 출신으로 속성은 이(李)씨이다. 
     『碧巖錄』의 모태가 된 『雪竇頌古』를 짓는 등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396) 天衣義懷(989~1060). 절강성 낙청현(樂淸縣) 출신으로 속성은 진(陳)씨이다.

 

위앙종 仰宗

백장회해가 방계로 전하여 위산영우,397) 앙산혜적,398) 향엄지한,399)

남탑광용,400) 파초혜청,401) 곽산경통,402) 무착문희403) 등의 선사로 

이어졌다.

百丈傍傳, 曰潙山靈祐, 曰仰山慧寂, 曰香嚴智閑, 曰南塔光
涌, 曰芭蕉慧淸, 曰霍山景通, 曰無著文喜禪師等.
397) 潙山靈祐(771~853). 위앙종의 개조. 복건성 장경(長慶) 출신으로 속성은 조(趙)
     씨이다. 호남성 담주 대위산(大潙山)에서 종풍을 선양했다.
398) 仰山慧寂(803~887). 광동성 회화현(懷化縣) 출신으로 속성은 섭(葉)씨이다. 부
     모가 출가를 반대하자 손가락 두 개를 자르고 서원을 세워 17세에 출가했다. 강서성 
     원주(袁州) 앙산(仰山)에서 선풍을 진작시켰다. 스승인 위산영우와 함께 위앙종의 
     개조로 일컬어진다.
399) 香嚴智閑(?~898). 청주(靑州) 출신으로 속성은 유(劉)씨이다. 위산영우와 부모
     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화두로 문답했으나 꿰뚫지 못했다. 그 후
     무당산(武當山)에 들어가 암자를 짓고 수행하다가 돌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
     를 듣고 대오(大悟)했다는 기연이 유명하다.
400) 南塔光涌(850~938). 강서성 예장풍성(豫章豊城) 출신으로 속성은 장(章)씨이다.
     앙산혜적을 친견하고 심인(心印)을 얻었다.
401) 芭蕉慧淸(?~?). 신라 출신. 남탑광용의 법을 이었다. 영주(郢州) 파초산에 주석
     했다. 파초주장(芭蕉拄杖) 공안이 전한다.
402) 霍山景通(?~?). 출신행적 미상. 앙상혜적의 제자로 귀종지상(歸宗智常)의 제자
     인 지통(智通)과 함께 2대선불(大禪佛)로 일컬어졌다.
403) 無著文喜(811~900). 절강성 가화(嘉禾) 출신으로. 속성은 주(朱)씨이다. 앙산
     혜적의 가르침을 받고 깨쳤다고 전한다.

 

 법안法眼宗

설봉의존이 방계로 전하여 현사사비,404) 지장계침,405) 법안문익,406) 

천태덕소 ,407) 영명연수,408) 용제소수,409) 남대수안410) 등의선사로 

이어졌다.

雪峯傍傳, 曰玄沙師備, 曰地藏桂琛, 曰法眼文益, 曰天台德
韶, 曰永明延壽, 曰龍濟紹修, 曰南臺守安禪師等.
404) 玄沙師備(835~908). 복건성 민현(閩縣) 출신으로 속성은 사(謝)씨이다. 사씨 집
     안의 셋째 아들이라는 뜻에서 사삼랑(謝三郞)이라고도 불린다. 30세에 출가했는
     데, 출가하기 전 직업은 어부였다.
405) 地藏桂琛(867~928). 절강성 상산(常山) 출신으로 속성은 이(李)씨이다. 나한계
     침(羅漢桂琛)이라고도 불린다. 현사사비의 법을 이었다.
406) 法眼文益(885~958). 법안종의 개조. 절강성 여항(餘杭) 출신으로 속성은 노(魯)
     씨이다. 7세 때 출가하였고, 지장계침의 법을 이었다. 선교 융합에 힘썼다.
407) 天台德韶(891~972). 처주(處州) 용천(龍泉) 출신으로 속성은 진(陳)씨이다. 법안
     종(法眼宗)의 제2조로 법안문익의 법을 이었다. 천태산에 들어가 지의(智顗)의
     유적을 탐방했다. 당시 천태산의 나계의적(螺溪義寂)이 천태종 서적이 소실되
     었음을 한탄하자 고려에 서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오월왕 전홍숙에게 요청하여
     관련 서적을 들여왔으며 수십 곳에 도량을 세웠다.
408) 永明延壽(904~975). 절강성 여항(餘杭) 출신으로 속성은 왕(王)씨이다. 어렸을
     때에 출가에 뜻을 두고『法華經』을 탐독했다. 관리에 등용된 후에 세금을 백성
     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28세 때 출가하여 천태덕소의 법을 이었다. 선과 염
     불을 겸수했는데, 정토종의 조사로 추앙받기도 했으며 자씨보살로 여겨지기
     지 했다. 고려에서 영명연수의 학덕을 존숭하여 36명의 스님을 유학시켰는데,
     이로써 송나라 이후 쇠퇴하던 법안종이 고려에 성행하게 되었다.『宗鏡錄』100
     권을 편집하였으며, 『萬善同歸集』 등의 저술을 남겼다.
409) 龍濟紹修(?~?). 출신행적 미상. 법안문익과 지장계침에게 참학했다.
410) 南臺守安(?~?). 출신행적 미상. 지장계침의 법을 이었다.

 

임제가풍臨濟家風

맨손에 칼 한 자루 들고서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인다.411) 삼현(三玄)·

삼요(三要)412)로써 고금의 진실을 판별하고 사빈주(四賓主)로써 용과 

413)을 가려낸다. 금강보검을 쥐고서 나무에 붙어사는 귀신[竹木精靈]을 

쓸어 없애고, 사자의 온전한 위세를 떨치며 여우의 간담을 찢는다. 임제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마른하늘에 벼락치고 펀펀한 땅에 물결을 

으킨다.414)
赤手單刀, 殺佛殺祖. 辨古今於玄要, 驗龍蛇於主賓. 操金剛寶
劒, 掃除竹木精靈, 奮獅子全威, 震裂狐狸心膽. 要識臨濟宗
麽? 靑天轟霹靂, 平地起波濤.
411) “그대들이 법과 어긋나지 않는 견해를 얻고자 한다면, 다만 남들에게 미혹당하
     지만 말라. 안으로나 밖으로나 무엇이건 만나기만 하면 곧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
     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며, 친속을 만나면 친속을 죽여야 비로소
     해탈을 얻어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모든 것을 뚫고 벗어나 자재하게 될
     것이다.”(『臨濟語錄』 大47 p.500b21. 爾欲得如法見解, 但莫受人惑. 向裏向外, 
     逢著便殺. 逢佛殺佛, 逢祖殺祖, 逢羅漢殺羅漢, 逢父母殺父母, 逢親眷殺親眷, 始
     得解脫, 不與物拘, 透脫自在.)
412) 제의현(臨濟義玄)이 학인을 지도하기 위한 방법으로 설한 것. 삼현은 체중현
    (體中玄:조금의 꾸밈도 없이 본체 그대로의 깊은 도리를 나타내는 구절)·구중현
    (句中玄:언어에 구속되지 않으면서 그 속에 담긴 현묘(玄妙)한 뜻을 나타내는 
     구절)·현중현(玄中玄:모든 상대적 논리와 어구에서 벗어난 구절)을 말한다. 분
     양선소(汾陽善昭 947~1024)에 의하면 삼요 가운데 제1요는 분별하거나 조작
     하지 않은 언어, 제2요는 있는 그대로 현요(玄要)에 들어가는 것, 제3요는 언
     어문자를 떠난 것을 말한다. “임제에게는 4빈주·4료간·4할·3현·3요 등의 선
     법이 있다.” (『五家語錄』 「序」 卍119 p.1007a18. 臨濟, 有四賓主, 四料
     揀, 四喝, 三玄, 三要.)
413) 탁월한 자와 평범한 자.
414)『人天眼目』권2「臨濟門庭」大48 p.311b8~c3 및「要訣」p.311c5~c18 
      참조.

 

조동가풍曹洞家風

방편으로 오위설(五位說)415)을 열어 상·중·하 세 근기에 적절하게 응대하며, 

보검을 마음대로 빼어들고 무수한 무명의 견해416)들을 베어버리고, 본분에 

잘 맞추어 널리 통하게 하며 갖가지 실마리를 가지고 파고드는 온갖 분별

[穿鑿]을 끊어버린다.417) 위음왕불도 출현하기 이전에 눈앞 가득히 펼쳐진 

가물가물한 광경이며, 공겁 이전의 호리병 속 풍경이로다. 조동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부처와 조사가 태어나기 이전의 공겁까지 벗어난 소식이니, 

정위나 편위 중 어디에도 떨어지지 않고 유와 무를 자유롭게 오가는 

기틀이다.418)
權開五位, 善接三根, 橫抽寶劒, 斬諸見稠林, 妙恊弘通, 截萬

機穿鑿. 威音那畔, 滿目烟光, 空劫已前, 一壺風月. 要識曹洞
宗麽? 佛祖未生空劫外, 正偏不落有無機.
415)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가 학인을 가르치기 위해 제창한 설. 조산본적(曹山
     本寂 840~901)이 동산의 이 오위설을 이어받아 새로운 비유로써 다시 밝힘으로써 
     조동종의 표준이 되었다. 오위에는 정편오위(正偏五位)와 공훈오위(功勳五位)가 있
     는데, 정편오위는 정중편(正中偏)·편중정(偏中正)·정중래(正中來)·편중지(偏中至)·
     겸중도(兼中到) 등의 다섯 가지이다. 정(正)은 음(陰)으로서 진여의 본체 또는 무
     차별·평등·정(靜)·공(空)·이(理) 등을 가리키며, 편(偏)은 양(陽)으로서 차별·동(動)
     ·용(用)·색(色)·사(事)·생멸의 현상 등을 나타낸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의지하며 지
     위를 바꾸어 다섯 가지의 조합을 만들어낸다. 공훈오위란 향(向)·봉(奉)·공(功)·공
     공(共功)·공공(功功) 등인데, 중생에게 본래부터 불성이 갖추어져 있음을 알고서 
     그 불성을 사무쳐 통달하고자 하며[向],그 불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
     야 하며[奉], 불성을 깨닫고[功], 불성이라는 무차별의 평등과 함께 차별의 세
     계를 인정하며[共功], 다시 그것까지 넘어서 차별된 색 그대로 모든 것에 자재한 
     평등의 경지[功功]를 말한다.
416) 조림(稠林).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우거진 숲이란 뜻으로 사견(邪見)·번뇌 등
     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417) “방편으로 오위설을 열어 상·중·하 세 가지 근기에 적절하게 응대하고, 하나의 
     소리를 크게 떨쳐 널리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이끌었다. 보검을 마음대로 뽑아
     들고 모든 무명의 견해들을 베어버리고, 본분에 잘 맞추어 널리 통하게 하며 
     갖가지 실마리를 가지고 파고드는 온갖 분별[穿鑿]을 끊어버렸다. 또한 조산
     본적을 제자로 얻으니 그가 종지를 깊이 밝혀 아름다운 불도를 묘하게 드러
     내었다. 그 도는 군신(君臣)의 관계와 일치하였고, 편과 정이 서로 지위를 바
     꾸며 의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동산의 현묘한 선풍이 세상에 퍼지게 되었으
     므로 제방의 종장들이 모두 함께 그들을 추존하여 조동종이라 하였다.”(『禪
     宗正脉』권7洞山良价章」卍146 p.215b17. 權開五位, 善接三根, 大闡一音, 
     廣弘萬品. 橫抽寶劒, 剪諸見之稠林, 妙叶玄通, 截萬端之穿鑿. 又得曹山, 深明
     的旨, 妙唱嘉猷. 道合君臣, 偏正回互. 由是, 洞上玄風, 播於天下, 故諸方宗匠, 
     咸共推尊之, 曰曹洞宗.)
418)『洞山良价語錄』大47 p.520b7~b12,『人天眼目』권3「曹洞宗」大48 
     p.313c8~c15『五家宗旨纂要』권중 卍114 p.529b7~b12,『禪宗正脉』권7 
    「洞山良介章」卍146 p.215b17 이하 참조.

 

운문가풍雲門家風

칼끝에 오히려 살아날 길이 있고 철벽에는 파고들어갈 문이 없다.419) 

잡하게 얽히고설킨 말들을 뒤집어엎어 드러내고 고착된 범상한 

견해들을 여지없이 잘라내 버린다.420) 번개같이 빨라서 사량 분별로는 

미칠 수 없고, 불길처럼 거세게 타오르니 어찌 한곳에 안주하는 것을 

용납하겠는가! 운문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주장자는 하늘 높이 

뛰어오르고 잔 속에서는 여러 부처가 설법한다.421)
劒鋒有路, 鐵壁無門. 掀翻露布葛藤, 剪却常情見解. 迅電不及
思量, 烈焰寧容湊泊! 要識雲門宗麽? 柱杖子跳上天, 盞子
裏諸佛說法
419)『人天眼目』권2 大48 p.313b11. 판본에 따라서는 ‘劒’자가 화살 ‘전(箭)’자로 된
     곳도 있다.
420) “비은통용(費隱通容)이 말했다. ‘목주가 은산철벽의 경계에서 운문을 쥐어틀어
     뚫고 들어가도록 했기 때문에 운문은 기상을 얻었는데 왕과 같이 자유자재하여
     비교할 상대가 없었으며, 몸은 북두(北斗)에 숨기고 홀로 동산을 거니는 듯한
     경지였다. 또한 사람들을 대하여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말들을 뒤집어엎어 드러
     내고 고착된 범상한 견해들을 여지없이 잘라내 버렸다. 격외의 경지에서 풀어
     줬다 사로잡았다 하고 말을 내뱉기도 전에 바로 빼앗으니 상근기의 날카로운 
     그릇이 아니면 누구도 그와 비슷한 경계조차 엿볼 수가 없었다. 진실로 목주의 
     독기를 깊이 받았기 때문에 남들을 가르치는 수단도 대단히 매서웠다.’”(『祖
     庭鉗鎚錄』卍114 p.760b11. 通容曰, ‘睦州向銀山鐵壁, 令雲門拶入, 故雲門得, 
     氣宇如王, 自在無比, 藏身北斗, 獨步東山. 乃至爲人, 打翻露布葛藤, 剪却常情
     見解. 格外縱擒, 言前定奪, 非上根利器, 莫能窺其彷彿. 眞爲受睦州毒氣深, 而
     爲人手段辣也.’)
421)『人天眼目』권2「雲門門庭」大48 p.313b3.

 

위앙가풍 仰家風

스승이 부르고 제자가 화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일가를 이룬 격이다.422) 

옆구리에는 글자를 새기고423) 머리에는 뿔이 높이 솟아났으며,424) 

방안425)에서 학인을 점검하면426) 사자의 허리마저도 끊어진다.427) 

사구(四句)도 여의고 백비(百非)428)의 방법도 버리고 한 방으로 모두 

부숴버리며, 두 개의 입에 혀 하나도 없이429) 굽이굽이 구슬을 잘도 

꿴다. 위앙의 종지를알고자 하는가? 조각 난 비석은 옛길에 나뒹굴고, 

무쇠소는 소실에서 잠을 잔다.430)
師資唱和, 父子一家. 脇下書字, 頭角崢嶸, 室中驗人, 獅子腰
折. 離四句絶百非, 一搥粉碎, 有兩口無一舌, 九曲珠通. 要識
潙仰宗麽? 斷碑橫古路, 鐵牛眠少室.
422) 위앙부자(潙仰父子). 위산(潙山)과 앙산(仰山)은 부자와 같이 친밀한 사제의 관
     계로 가르침을 주고받았기에 이렇게 부른다. “스승이 부르고 제자가 화답하여
     아버지와 아들이 일가를 이룬 격이다. 밝음과 어둠 그 어디로나 걸림 없이 통
     하지만 말로도 침묵으로도 드러내지 않는다〈위앙의 가풍〉.”(『人天眼目』 
     권6 大48 p.331a21. 師資唱和, 父子一家. 明暗交馳, 語默不露 〈潙仰〉.);
     “위앙종풍은 아버지와 아들이 일가를 이루듯이 스승이 부르고 제자가 화답하
     였다. 말로도 침묵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밝음과 어둠 어디로나 자재하게 
     통하고, 체와 용을 모두 드러낸다. 혀 없는 사람이 종지를 드러내려 하니 원
     상을 그려 밝히는구나.”(『五家宗旨纂要』 권하 卍114 p.549a14. 潙仰宗風, 
     父子一家, 師資唱和. 語默不露 , 明暗交馳, 體用雙彰. 無舌人爲宗, 圓相明之.)
423) 위산영우(潙山靈祐)가 입적한 뒤 ‘위산승모갑(潙山僧某甲)’이라는 다섯 글자를
     새기고 물소로 태어나 이류중행(異類中行)을 실천할 것이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 
     “위산이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노승은 백 년 뒤에 산 아래에서 한 마리 물소
      로 태어날 것이다. 왼쪽 옆구리에는 「위산승모갑(潙山僧某甲)」이라는 다섯
     자가 씌어 있을 것이다. 그때에 「위산스님!」 하고 부르면 「물소요」라고 답
     할 것이요,「물소야!」 하고 부르면 「위산 스님 아무개」라 답할 것이다. 말해 
     보라, 무엇이라고 불러야 하겠는가?’ 앙산이 나와서 절을 올리고 나갔다.”
     (『潙山靈祐語錄』大47 p.581c25. 師上堂云, ‘老僧百年後, 向山下, 作一頭水
     牯牛. 左脇下書五字云, 潙山僧某甲. 當恁麽時, 喚作潙山僧, 又是水牯牛, 喚作
     水牯牛, 又是潙山僧. 畢竟喚作甚麽卽得?’ 仰山出禮拜而退.)
424) 두각쟁영(頭角崢嶸). 뿔이 두드러지게 높이 솟아났다는 말. 뛰어난 인물 또는 영
     웅호걸을 비유하기도 한다.
425) 실중(室中). 선문(禪門)에서 법을 전하고 받을 때 스승의 방에서 스승과 제자가
      직접 마주하고 불법의 비결(秘訣)을 은밀히 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426) 실중험인(室中驗人). “‘위앙의 종지는 어떤 것입니까?’ ‘위앙의 가풍은 기용(機用)
     이 원융하고 스승의 방 안에서 스승이 제자를 직접 마주하고 점검하여 비결을 전
     하니 그 비결의 구절은 호랑이를 함정에 빠뜨릴 만하다.’”(『萬法歸心錄』권하
     卍114 p.832a16. 問, ‘如何是潙仰宗?’ 答曰, ‘潙仰家風, 機用圓融, 室中驗人, 
     句能陷虎.)
427) 사자요절(獅子腰折). 위산과 앙산의 다음 문답에 근거한 말이다. “앙산이 위산 
     문하에서 수행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척천태상좌가 물었다. ‘터럭 한 끝에 사
     자가 나타난다는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습니다. 백억 개의 터럭 끝에 백억의
     사자가 나타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앙산이 곧바로 소를 타고 돌아가 버
     렸다. 위산을 모시고 있던 차에 전날의 이 이야기를 여쭙기를 막 마치자 태상
     좌가 오는 것이 보였다. 앙산이 말했다. ‘바로 저 상좌입니다.’ 위산이 마침내 
     물었다. ‘백억 개의 터럭 끝에서 백억의 사자가 나타난다는 말뜻을 물은 사람
     이 상좌가 아닌가?’ ‘맞습니다.’ ‘바로 이렇게 나타났을 때는 터럭 전에 나타
     난 것인
     할 수 없습니다.’ 위산이 크게 웃었다. 앙산이 ‘사자의 허리가 끊어졌구나’라 
     하고 곧장 내려와 떠났다.”(『仰山慧寂語錄』 大47 p.582c9. 師在潙山, 牧牛
     時. 踢天泰上座問云, ‘一毛頭師子現卽不問. 百億毛頭, 百億師子現, 又作麽生?’ 
     師便騎牛歸. 侍立潙山次, 擧前話方了, 却見泰來. 師云, ‘便是這箇上座.’ 潙山
     遂問, ‘百億毛頭, 百億師子現, 豈不是上座道?’ 泰云, ‘是.’ 師云, ‘正當現時, 
     毛前現毛後現?’ 泰云, ‘現時不說前後.’ 潙山大笑. 師云, ‘師子腰折也.’ 便下去.)
428) 모든 부정적 형식의 언어 또는 사유분별을 가리킨다. 또는 무한부정(無限否定)
     을 나타내기도 한다. 사구백비(四句百非) 또는 이사구절백비(離四句絶百非) 
     과 같이 사구와 짝이 되어 쓰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비에 대하여 이렇게 일
     (一)·이(異)·유(有)·무(無) 등의 네 글자를 소재로 밝히면 다음과 같다. 일(一)·
     비일(非一)·역일역비일(亦一亦非一)·비일비비일(非一非非一) 등이 첫 번째 사
     구이며, 이(異) 등 나머지 세 글자도 이 예를 따르면 모두 16구절이 된다. 여
     기에 다시 과거·현재·미래가 각각 16구절이 되므로 모두 48구절을 이룬다. 
     또한 이미 일어난 것과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 각각 48구절이 되어 모두 
     96구절을 이룬다. 아울러 근본의 사구를 합하면 모두 백비를 이룬다. 그러나 
     지나치면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총괄해서 말하면 일·이·유·무 등 사구
     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간략하게 이것으로써 백비를 밝힌 것이다.”
     (『起信論疏筆削記』 권4 大44 p.318b6. 百非者, 此於一異有無等, 四字上明之. 
     謂一非一, 亦一亦非一, 非一非非一, 爲一四句, 異等, 例此共成十六. 又過現未來, 
     各有十六, 成四十八. 又已起未起, 各四十八, 共成九十六. 幷根本之四, 都成百非. 
     然, 過雖無量, 總而言之, 不出一異等四. 是故, 約此以明百非.)
429) 양구무일설(兩口無一舌). 양구일무설(兩口一無舌)이라고도 한다. 말을 주고받
     는 두 사람의 입 어느 쪽에도 혀가 없다는 뜻으로서 서로의 뜻을 주고받는 데 
     말이 어떤 도움도 되지 않으며, 또한 두 사람의 물음과 대답이 말을 넘어서서 
     하나가 되어 있음을 뜻한다. 양구일설(兩口一舌)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두 
     람이 하고 있는 말은 달라도 그 뜻은 같다는 뜻이다. “앙산은 사람과 상황에 
     적절하게 대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종문의 표준으로 삼았다. 다시 
     동평산(東平山)으로 거처를 옮겨 입적하려 할 즈음에 몇몇 학인이 곁에서 
     시봉하고 있었다. 그때 앙산이 게송으로 읊었다. ‘여러 제자들이여, 똑바로 
     보고 다시 우러러 살펴라. 입은 둘이나 혀는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의 
     종지이다.’”(『仰山慧寂語錄』大47 p.588a11. 師, 接機利物, 爲宗門標準. 
     再遷東平, 將順寂, 數僧侍立. 師以偈示之云, ‘一二二三子, 平目復仰視. 兩
     口一無舌, 卽是吾宗旨.’)
430) 위앙에 대한 오조법연(五祖法演)과 설당도행(雪堂道行)의 평가를 취한 말.
     “위앙종:오조는 ‘조각 난 비석이 옛길에 나뒹군다’고 하였고, 수산(首山)은 
     ‘서로의 기틀이 암암리에 원만하게 합하였다’고 하였고, 정당(正堂)은 ‘눈앞에 
     다른 길은 없다’라 하였고, 호국(護國)은 ‘앞으로 밀지도 않지만 뒤로 물러나
     지도 않는다’고 하였고, 설당은 ‘뿔 없는 무쇠소가 소실에서 잠을 잔다’고 하
     였다.” (『人天眼目』 권6 「五宗問答」 大48 p.330c14. 潙仰宗:祖云, ‘斷
     碑橫古路.’ 山云, ‘暗機圓合.’ 堂云, ‘目前無異路.’ 國云, ‘推不向前, 約不退後.’ 
     雪云, ‘無角鐵牛眠少室.’)

 

법안가풍法眼家風

말 속에 여운이 남아 있고, 구절 속에 칼날이 감추어져 있다.431) 청정한 

의식[髑髏]432)으로써 항상 세계와 접하고, 코로 가풍을 모색한다.433)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달빛 드리운 물결에 이르기까지 그 모두가 

진심(眞心)을 드러내고, 푸른 대나무와 노란 꽃도 미묘한 진리를 

분명하게 나타낸다. 법안의 종지를 알고자 하는가? 바람은 조각구름을 

불어 산 너머로 돌려보내고, 달은 흐르는 물에 섞여 다리 아래를 지나네.

言中有響, 句裏藏鋒. 髑髏常干世界, 鼻孔磨觸家風. 風柯月
渚, 顯露眞心, 翠竹黃花, 宣明妙法. 要識法眼宗麽? 風送斷
雲歸嶺去 月和流水過橋來.
431)“소리를 듣고 도를 깨닫고 색을 보고 마음을 밝힌다. 구절 속에 칼날이 감추어
     져 있고 말 속에 여운이 남아 있다.〈법안의 가풍〉”(『人天眼目』 권6 「圓悟
     五家宗要」大48 p.331a23. 聞聲悟道, 見色明心. 句裏藏鋒, 言中有響.〈法眼〉)
432) 촉루(髑髏)는 해골이란 뜻인데 여기서는 현상과 접하면서도 번뇌의 물이 바싹
     메마르고[乾] 망상의 때가 깨끗이 씻겨나간 청정한 법신(法身)을 뜻한다. 해골
     의 눈·귀·손발에 대한 세 가지 문답으로 조동종의 종지를 드러낸 ‘동종삼문답’
     에 촉루의 뜻이 잘 드러나 있다. “동종삼문답:‘해골의 눈이란 무엇을 말합니
     까?’ ‘눈을 깜박여 보지 않아도 사방의 세계가 온통 밝게 빛난다.’ ‘해골의 귀
     란 무엇을 말합니까?’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원만한 음성이 또렷하다.’ ‘해골
     의 수족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팔을 흔들지 않아도 허공을 흔들어 부수고, 
     다리를 움직이지 않아도 사해(四海)·오악(五嶽)을 차서 뒤집는다.’ 해골이란
     메마르고 청정한 몸이니 법신의 일을 밝히는 것이다. 대답한 뜻은 어떤 것인
     가? 비록 모든 것에 집착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타파한다는 뜻이다.”(『五家
     宗旨纂要』 권중 卍114 p.543a8. 洞宗三問答:‘如何是髑髏眼?’ 答云, ‘目不
     瞬四維洞照.’ ‘如何是髑髏耳?’ 答云, ‘耳不側圓音歷歷.’ ‘如何是髑髏手足?’ 
     答云, ‘臂不掉摵碎虛空, 脚不動踏翻海嶽.’ 髑髏者, 乾淨之體, 明法身邊事也. 
     答意如何? 謂雖不著一切, 而能破一切也.)
433) 콧구멍(본분)으로 호흡을 하며 냄새를 맡듯이 가풍을 모색한다는 말. 『景德
     傳燈錄』권21 「白龍道希傳」大51 p.373b10, 『雪竇語錄』 권4 大47 p.693c3 
     등에 나오는 말.

 

별명임제종(別明臨濟宗旨)

대체로 한 구절 중에 삼현을 갖추고 하나의 현 중에 삼요를 갖추고 

으니, 한 구절은 무늬가 없는 도장434)이요 삼현과 삼요는 무늬가 

있는 도장이다. 방편[權]과 실상[實]은 현(玄)이요, 비춤과 작용은 

요(要)이다.

大凡, 一句中具三玄, 一玄中具三要, 一句, 無文綵印, 三玄
三要, 有文綵印. 權實玄照用要.
434) 무문채인(無文綵印). 무문인(無文印)·무자인(無字印)·불조심인(佛祖心印)이라고도 
     한다. 문양이 없는 도장을 말한다. 곧 언어문자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심인
     (心印)을 가리킨다.

 

삼구三句435)

제1구는 몸을 상하게 하고 목숨을 잃는 구절436)이며, 제2구는 입을 

열기도 전에 잘못되는 구절437)이고, 제3구는 오물을 까부르는 

키요 쓸어 없애는 빗자루와 같은 구절이다.

第一句, 喪身失命;第二句, 未開口錯;第三句, 糞箕掃箒.
435) 임제삼구(臨濟三句). “법좌에 오르자 학인이 물었다. ‘제1구는 어떤 것입니까?’
     ‘3요의 도장을 찍고 떼니 붉은 무늬점이 분명하고, 말도 꺼내기 전에 주객이 나
     뉜다.’ ‘제2구는 어떤 것입니까?’ ‘문수보살이 어찌 무착선사의 물음을 용납하
     겠냐마는, 방편을 펼치는 것이 어찌 망상을 끊어버린 상근기와 모순되겠는가!’ 
     ‘제3구는 어떤 것입니까?’ ‘무대에서 꼭두각시를 희롱하는 것을 보라. 밀고 당
     기는 것이 모두 그 배후에서 조작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 임제선사는 또 말
     했다. ‘1구의 말에는 모름지기 3현문을 갖추어야 하고, 1현문에는 3요를 갖추
     어야 한다. 여기에 방편도 있고 작용도 있으니 그대들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臨濟錄』大47 p.497a15. 上堂, 僧問, ‘如何是第一句?’ 師云, ‘三要印開朱點側, 
     未容擬議主賓分.’問, ‘如何是第二句?’ 師云, ‘妙解豈容無著問, 漚和爭負截流機!’ 
     問, ‘如何是第三句?’ 師云, ‘看取棚頭弄傀儡. 抽牽都來裏有人.’ 師, 又云, ‘一句語
     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用, 汝等諸人, 作麽生會?’)
436) 상신실명(喪身失命). 몸과 마음이 모두 탈락하여 어떤 기능도 발휘할 수 없는 
     경계를 묘사한다.
437) 미개구착(未開口錯). 어떤 말이나 분별도 통하지 않는 경지를 나타낸다.

 

삼요三要438)

첫 번째 요(要)는 비춤[照]이 곧 대기(大機)이고, 두 번째 요는 비춤이 

곧 대용(大用)이며, 세 번째 요는 비춤과 작용[用]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一要, 照卽大機;二要, 照卽大用;三要, 照用同時.
438) “제1. 비춤을 먼저하고 작용을 뒤에 하는 것○:예컨대 학인이 찾아 왔을 때 선
     주(禪主)가 먼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거나 혹은 ‘그대의 스승은 어떤 언구로
     가르치는가?’라고 묻고, 학인이 그에 대한 여러 답변을 하면, 선주가 ‘어떻게 생
     각하는가?’라고 반문하는 것 등을 말한다. 이러한 격식을 가리켜 옛사람이 마지
     못해 이름을 붙여 조요(照要)라고 한 것이다. 제2.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뒤에 
     하는 것:예컨대 학인이 찾아와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나 불법의 대의를 묻거
     나 ‘학인의 본래면목은 어떤 것입니까?’ 혹은 ‘구경(究竟)의 진리를 담고 있는 본
     분사[極則事]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선주가 불자를 들어 보이거나 혹은 주
     장자로 바로 때리거나 혹은 선상을 뒤집거나 혹은 원상을 그려 보이거나 혹은 
     기틀의 핵심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기틀에 따라 
     학인을 제접하는 방식을 가리켜 옛사람이 마지못해 이름을 붙여 용요(用要)라고 
     한 것이다. 제3.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는 것◑:예컨대 학인이 찾아와 어떤 
     단서가 되는 물음을 제기하면 선주가 불자를 꼿꼿이 세우고서 ‘다른 곳에도 이
     것이 있는가?’라고 묻거나 혹은 허공을 가리키며 ‘알겠는가?’라고 묻는 방식, 
     또는 학인이 꼿꼿이 세워 보인 불자를 보고 곧바로 절을 올리면 선주가 ‘이 둔
     한 놈아!’라고 하는 방식, 또는 학인이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면 선주가 노주를 
     가리키며 ‘이것은 알겠는가?’라고 묻는 방식, 또는 학인이 좌구를 펼치거나 주
     먹이나 손바닥을 보이면 선주가 ‘쓸데없이 헛짓하는 놈이로다’라고 하는 방식 
     등을 말한다. 이와 같은 식으로 기틀에 따라 학인을 제접하는 방식을 가리켜 옛
     사람이 마지못해 이름을 붙여 조용동시요(照用同時要)라 한 것이다.”(『宗門玄
     鑑圖』 卍112 p.932a8. 第一. 先照後用者○:如學人來時, 禪主先問, ‘從甚麽
     處來?’ 或云, ‘彼師有何言句指示?’ 學人種種言句, 禪主反問云, ‘作麽生會?’ 據
     斯體例, 古人亦強名照要也. 第二. 先用後照者:如學人來問祖師西來意, 或問
     佛法大意, 或問, ‘如何是學人本來面目?’ 或問, ‘如何是極則事?’ 禪主擧起拂子, 
     或以拄杖便打, 或下禪床立, 或畫圓相, 或呈機要. 據斯接機, 古人亦強名用要也. 
     第三. 照用同時者◑:如學人來發問端, 禪主或竪起拂子云, ‘諸方還有這箇麽?’ 
     或指空云, ‘會麽?’ 或學人見竪起拂子便禮拜, 禪主云, ‘這鈍漢.’ 或云, ‘學人不
     會.’ 禪主指露柱云, ‘這箇却會麽?’ 學人, 或展坐具, 或竪起拳掌, 主云, ‘這弄
     精魂漢!’ 據斯接機, 古人亦強名照用同時要也.)

 

삼현三玄

체중현은 삼세가 곧 일념439)이라는 것 등이고, 구중현은 경절언구440) 

이고, 현중현은 양구(良久)나 방(棒)·할(喝) 등과 같은 것이다.

體中玄, 三世一念等;句中玄, 徑截言句等;玄中玄, 良久棒
喝等.
439) 삼세일념(三世一念). “초발심인 10주(住)의 첫머리에서부터 삼매의 힘으로 단번
     에 삼계 전체를 도장 찍듯이 마음에 새기니 삼세가 하나의 경계이며 모든 법이 한
     맛[一味]이며, 해탈과 열반이 항상 적멸한 맛이다. 또한 처음과 끝이 없고, 인과가 
     하나의 경계이며, 모든 성품이 하나의 성품이고, 모든 지혜가 하나의 지혜이며, 
     모든 상이 하나의 상이고, 모든 행이 하나의 행이며, 삼세가 일념이고, 일념이 
     삼세요 십세이니, 이와 같은 모든 법이 자재하고 걸림이 없는 것이다. 이 경의 
     법문이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이 같은 속성을 가리켜 항상 법의 바퀴를 굴린다는 
     뜻에서 상전법륜(常轉法輪)이라 한다.”(『新華嚴經論』 권3 大36 p.737a14.
     從初發心十住之首 以三昧力, 頓印三界, 三世一際, 諸法一味, 解脫涅槃, 常寂滅味. 
     更無始終, 因果一際, 諸性一性, 諸智一智, 諸相一相, 諸行一行, 三世一念, 一念三世,
     乃至十, 如是等法, 自在無礙. 此經法門, 無始無終, 名爲常轉法輪.)
440) 徑截言句. 말이나 구절 등의 무수한 우회의 방편을 다 끊어버리고 근원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간명하며 적절한 방법이라는 뜻. ‘경절’은 직절(直截)·첩경
     (捷徑:지름길) 등과 같은 뜻이다.

 

사료간四料揀441)

사람을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 것은 하근기를 대하는 방법이고, 

계를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 것은 중근기를 대하는 방법이며,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는 것은 상근기를 대하는 방법이고,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 것은 격(格)을 벗어난 이를 대하는 방법이다.

奪人不奪境, 待下根;奪境不奪人, 待中根;人境兩俱奪, 待
上根;人境俱不奪, 待出格人.
441) 임제사료간(臨濟四料揀). 임제의현이 주관인 사람[人]과 대상 경계[境]에 대하
     여 빼앗지 않는 긍정[不奪]과 빼앗는 부정[奪]의 방식에 따라 네 가지 핵심이 
     되는 형식을 간략하게 추출해 낸 것. 종사는 상대의 조건과 상황에 따라 유효
     적절하게 네 가지 중 하나를 구사하며 지도하는 수단으로 삼는다. ‘요간’이란 
     잘 헤아려 중요한 요점을 분간해 내는 것 또는 시비와 선악 등을 가려낸다는 
     뜻이다. “그때 학인이 물었다. ‘사람을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봄날 만물이 움트니 비단을 땅에 펼친 듯하고 어린아이가 
     머리칼을 드리우니 명주실같이 빛이 번득인다.’ ‘경계를 빼앗고 사람은 빼앗
     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왕의 명령이 이미 시행되어 천하에 골고
     루 펼쳐지고, 장군은 국경에서 전란에 휘말릴 일이 전혀 없다.’ ‘사람과 경계
     를 모두 빼앗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병주와 분주는 서로 소식을 끊고 
     각각 한 지방을 차지하였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왕은 보배궁전에 오르고, 촌노인은 태평가를 부른다.’”(『臨濟語
     錄』 大47 p.497a23. 時有僧問, ‘如何是奪人不奪境?’ 師云, ‘煦日發生鋪地錦, 
     嬰孩垂髮白如絲.’ 僧云, ‘如何是奪境不奪人?’ 師云, ‘王令已行天下遍, 將軍塞
     外絕烟塵.’ 僧云, ‘如何是人境兩俱奪?’ 師云, ‘并汾絕信, 獨處一方.’ 僧云, ‘如
     何是人境俱不奪?’ 師云, ‘王登寶殿, 野老謳歌.’)

 

사빈주四賓主442)

손님 중의 손님이란 학인이 본분을 깨닫지 못하여 진실이 없는 질문과 

대답만 다는 뜻이다. 손님 중의 주인이란 학인이 본분을 깨달아서 

주인도 있고 법도 있다는 뜻이다. 주인 중의 손님이란 종사가 본분을 

깨닫지 못하 학인의 질문만 있을 뿐 올바른 대답이 없다는 뜻이다. 

주인 중의 주인이란 종사가 본분을 깨달아서 어떤 점에서나 매우 

기특하다443)는 뜻이다.

賓中賓, 學人無鼻孔, 有問有答;賓中主, 學人有鼻孔, 有主有
法;主中賓, 師家無鼻孔, 有問在;主中主, 師家有鼻孔, 不妨
奇特.
442) 임제사빈주(臨濟四賓主). 객간주(客看主):손님이 주인을 간파한다는 뜻. 학인
     이 스승의 마음을 간파한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서 빈중주(賓中主)와 상통한다. 
     객간객(客看客):손님이 손님을 간파한다는 뜻. 학인이나 스승 모두 견성(見性)
     하지 못한 경우를 말하는 것으로서 빈중빈(賓中賓)과 상통한다. 주간객(主看客):
     주인이 손님을 간파한다는 뜻. 주중빈(主中賓)과 상통한다. 주간주(主看主):
     주인과 손님이 모두 대등한 선기(禪機)나 선안(禪眼)을 갖추고 있다는 뜻. 주
     중주(主中主)와 상통한다. “도를 깨친 진정한 학인이 할을 내지르면서 끈적한 
     아교단지 같은 말을 한마디 하면 선지식은 이것이 경계인 줄 모르고 그 경계 
     위에서 갖가지 분별의 틀을 조작한다. 학인이 할을 내지르면 앞의 선지식은 
     이 경계를 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고질병으로 의사도 고치지 못한다. 
     이것을 손님이 주인을 간파한다고 한다. 혹은 선지식이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다가 학인이 질문하려고 한 것을 곧장 빼앗아버리면, 학인은 빼앗기고는 
     필사적으로 놓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을 주인이 손님을 간파한다고 한다. 
     혹은 학인이 청정한 경계를 한 가지 가지고 선지식 앞에 나타나면, 선지식은 
     그 경계를 분별해 내고는 그를 잡아 구덩이로 던져버린다. 그러면 그 학인은
     ‘대단하신 선지식입니다’라 하고, 선지식은 곧바로 ‘아, 좋은 것과 나쁜 것도 
     구별할 줄 모르는 놈이로다’라고 하며 학인은 곧장 절을 올린다. 이것을 주
     인이 주인을 간파한다고 한다. 어떤 학인이 얽매이고 집착된 상태로 선지식 
     앞에 나타나면 선지식은 거기다족쇄(그릇된 지식)를 한 겹 덧붙이는데 학인
     은 기뻐한다. 학인과 스승이 피차 분별하지 못하므로 이것을 일러 손님이 손
     님을 간파한다고 한다.”(『臨濟語錄』 大47 p.501a5. 如有眞正學人, 便喝先, 
     拈出一箇膠盆子, 善知識, 不辨是境, 便上他境上, 作模作樣. 學人便喝, 前人
     不肯放. 此是膏肓之病, 不堪醫. 喚作客看主. 或是善知識, 不拈出物, 隨學人
     問處卽奪. 學人被奪抵死不放. 此是主看客. 或有學人, 應一箇淸淨境, 出善
     知識前, 善知識辨得是境, 把得拋向坑裏. 學人言, ‘大好善知識.’ 卽云, ‘咄哉, 
     不識好惡.’ 學人便禮拜. 此喚作主看主. 或有學人, 披枷帶鎖, 出善知識前, 
     善知識,更與安一重枷鎖, 學人歡喜. 彼此不辨, 呼爲客看客.)
443) 불방기특(不妨奇特). ‘매우 기특하다’ 또는 ‘참으로 기특하다’라는 말이다. 
     불방은 매우 ~하다, 틀림없이 ~하다,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괜
     찮다 등의 뜻이다.

 

사조용四照用444)

비춤을 먼저하고 작용을 나중에 하는 것은 사람이 있는 것이고,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나중에 하는 것은 법이 있는 것이고, 비춤과 작용을 

시에 하는 것은 밭가는 농부의 소를 몰아가고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는 방식이고,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는 것은 물음도 두고 

대답도 두는 방식이다.

先照後用, 有人在;先用後照, 有法在;照用同時, 驅耕奪食;
照用不同時, 有問有答.
444) 임제사조용(臨濟四照用). “임제선사가 하루는 대중들에게 말했다. ‘나는 어떤 때
     는 비춤[照]을 먼저하고 작용[用]을 나중에 하며, 어떤 때는 작용을 먼저하고 비
     춤을 나중에 하며, 어떤 때는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며, 어떤 때는 비춤과 작용
     을 동시에 하지 않는다. 비춤을 먼저하고 작용을 나중에 하는 것은 사람이 있는 
     것이고, 작용을 먼저하고 비춤을 나중에 하는 것은 법이 있는 것이고, 비춤과 작
     용을 동시에 하는 것은 밭가는 농부의 소를 몰아가고 배고픈 사람의 밥을 빼앗는 
     방식이며 뼈를 두드려 골수를 취하고 바늘과 송곳으로 아프게 찌르는 것과 같고,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는 것은 물음도 두고 대답도 두며 주인도 세우고 
     손님도 세우며 물과 진흙을 뒤섞은 듯하며 기틀에 따라 사물을 응대하는 방식이
     다. 헤아림을 넘어선 사람이라면 미처 들어 보이기도 전에 일어나곧바로 갈 것
     이니, 그래도 조금 낫다.’”(『人天眼目』 권1 「四照用」 大48 p.304a11. 師,
     一日, 示衆云, ‘我有時先照後用, 有時先用後照, 有時照用同時, 有時照用不同時. 
     先照後用有人在, 先用後照有法在, 照用同時, 驅耕夫之牛, 奪饑人之食, 敲骨取
     髓, 痛下針錐, 照用不同時, 有問有答, 立主立賓, 合水和泥, 應機接物. 若是過量
     人, 向未擧時, 撩起便行, 猶較些子.)

 

사대식四大式445)

바른 이익을 얻은 본보기는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9년간 면벽하였던 것,446) 

평상의 도리를 지켰던 본보기는 화산(禾山)이 ‘북을 칠 줄 안다’447)고 한 것, 

본분을 지켰던 본보기는 6조 혜능이 ‘산승은 불법을 모른다’448)고 한 것, 

진실과 방편을 나누어 펼친 본보기는 달마가 ‘알지 못한다’449)고 한 것 

등과 같은 네 가지를 말한다.

正利, 少林面壁類;平常, 禾山打鼓類;本分, 山僧不會類;
貢450)假, 達摩不識類.
445) 수행의 본보기가 되는 조사들의 기연을 네 가지로 분류한 것. 정리(正利)대식·
     평등(平等)대식·진가(眞假)대식·본분(本分)대식 등 네 가지를 말한다. 식(式)
     은 법식(法式)·표준·모범의 뜻이다.『宗門玄鑑圖』에는 다음과 같이 조금 다르
     게 서술되어 있다. “‘삼현삼요 외에 저희들에게 말씀해주실 다른 법이 또 있습
     니까?’ ‘사대식이 있다. 첫째 정리대식이니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면벽했던 것
     이 그 부류이다. 둘째 평등대식이니 화산이「북을 칠 줄 안다」라고 한 말과 같은
     부류이다. 셋째 진가대식이니 앞의 두 가지 대식을 아울러 포함하는 것이 그 부
     류이다. 넷째 본분대식이니 달마대사가 양무제를 보았을 때「모르겠습니다」라
     고 답한 말과 같은 부류가 그것이다.’”(『宗門玄鑑圖』「四大式論」卍112 p.
     932b6. 問曰, ‘三玄三要之外, 更有何法示徒?’ 答曰, ‘有四大式. 第一, 正利大式, 
     如初祖在少林等, 是也. 第二, 平等大式, 如禾山打鼓, 是也. 第三, 眞假大式, 通
     取前二式, 是也. 第四, 本分大式, 如初祖, 見梁武帝時云, 不識, 是也.’)
446) 달마벽(達磨面壁). 2조 혜가(慧可)가 법을 물었을 때 달마대사가 시종 침묵하
     며 면벽하고 있었던 고사를 가리킨다. “달마대사가 9년 동안 면벽한 것은 정체
     가 탄로나 훔친 물건과 함께 붙잡힌 격이며, 6조 혜능이 글자를 몰랐다는 것은
     몸을 숨기려 했지만 꼬리가 드러난 것과 같다.”(『松源崇岳禪師語』 續古尊宿
     語要4 卍119 p.41a1. 達磨九年面壁, 和贓捉敗;盧行者不識字, 露出尾巴.);
     “법좌에 오르자 어떤 학인이 물었다. ‘달마가 면벽하고 있었던 뜻은 어떤 것입
     니까?’ ‘분별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五祖法演語錄』 고존숙어
     록21 卍118 p.427a1. 上堂, 僧問, ‘達磨面壁時, 如何?’ 師云, ‘計較未成.’);
     “그대가 약간의 도리를 알아차렸다고 해도 마음에 속하는 법[心所法]을 얻은 
     것에 불과하며, 선도(禪道)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 까닭에 달마는 면벽을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는 단서가 전혀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
     므로 ‘마음의 작용을 잊는 것이 불도(佛道)요, 분별은 마구니의 경계이다’라고 
     한다.”(『宛陵錄』 大48 p.386c29. 任汝會得少許道理, 秖得箇心所法, 禪道總
     沒交涉. 所以達磨面壁, 都不令人有見處. 故云, ‘忘機是佛道, 分別是魔境.’)
447) 화산타고(禾山打鼓). ‘대오대철(大悟大徹)한 사람은 어떠합니까?’, ‘진제(眞諦)
     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에 대해서는 여쭙지 않겠습니다. 마음
     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향상인이 찾아오면 어떻
     게 대하시겠습니까?’라는 네 차례의 물음에 대해 화산이 한결같이 ‘북을 두드릴 
     줄 안다’(解打鼓)고 답한 일화에서 나온 말. 원오극근은 이 문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물음도 맛이 없고 답도 맛이 없다. 이 공안을 밝히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향상한 사람이라야 이 말이 이치와도 아무 관계가 없고 의론할 여지도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곧바로 알아차려서 마치 밑이 빠진 통과 같이 되는 
     바로 이때라야 납승이 편안히 거처할 경계요,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에 딱 들어
     맞게 될 것이다.”(『碧巖錄』 44則 大48 「評唱」 p.181a9. 所謂言無味語無味. 
     欲明這箇公案, 須是向上人, 方能見此語, 不涉理性, 亦無議論處. 直下便會, 如桶
     底脫相似, 方是衲僧安穩處, 始契得祖師西來意.) 또 운문(雲門)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설봉이 공을 굴린 일[輥毬], 화산이 북을 두드릴 줄 안다고 한 말
     [打鼔], 남양혜충(南陽慧忠)국사의 물그릇[水碗], 조주가 차나 마시라고 한 말
     [喫茶]은 모두 향상의 본분을 들어 보인 것이다.”(같은 책 44則 「評唱」 大48 
     p.181a13. 雪峯輥毬, 禾山打鼓, 國師水碗, 趙州喫茶, 盡是向上拈提.)
448) 불회(不會). 조계불회(曹溪不會)라고도 한다. “어떤 학인이 혜능에게 물었다. 
     ‘5조 홍인의 종지는 누가 얻었습니까?’ ‘불법을 아는 사람이 얻었다.’ ‘스님께
     서는 얻었습니까?’ ‘나는 불법을 모른다.’”(宗寶本 『壇經』 大48 p.358a10. 
     一僧問師云, ‘黃梅意旨, 甚麽人得?’ 師云, ‘會佛法人得.’ 僧云, ‘和尙還得否?’ 
     師云, ‘我不會佛法.’);“5조 홍인 회하의 499명의 학인들이 모두 불법을 이해
     했지만 오직 노행자 한 사람만은 불법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도를 알
     았을 뿐 별다른 일을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南泉普願語要』 古尊宿語錄
     12 卍118 p.297a2. 只如五祖會下, 四百九十九人, 盡會佛法, 惟有盧行者一人, 
     不會佛法. 只會道, 不會別事.)
449) 달마불식(達磨不識). 달마와 양무제(梁武帝)가 나눈 세 가지 문답 중 하나. 불식
     이란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뜻도 아니고 망상분별이 없다는 뜻도 아니며,
     어떤 인식의 틀로도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화두로 간주된다. “양무제가 ‘짐의 
     앞에서 말하고 있는 이는 누구입니까?’〈얼굴 전체에 부끄럽고 당황한 빛이 
     도는데 억지로 멀쩡한 척하는구나. 결국은 찾지 못했다.〉 ‘모르겠소.’〈돌! 
     다시 찾아온들 반푼의 가치도 없겠군.〉”(『碧巖錄』 1則 「本則」 大48 p.
     140a19. 帝曰, ‘對朕者誰?’〈滿面慚惶, 强惺惺. 果然摸索不著.〉 磨云,
     ‘不識.’〈咄! 再來不直半文錢.〉)
450) 공(貢)은 진(眞)의 오식(誤植).

 

사할四喝451)

‘금강왕의 보검과 같은 할’은 일체의 정해(情解)를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이고, ‘땅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금털 사자와 같은 할’은 말을 

꺼내거나 숨소리만 토해내도 모든 마군의 뇌가 찢어지는 것이며, 

‘물고기를 유인하는 미끼와 같은 할’은 스승이 이어받은 본분을 

제대로 지니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며, ‘할로서의 작용을 억지로 하지 

않는 할’은 앞에서 말한 삼현(三玄)과 사빈주(四賓主) 같은 것을 다 

갖추고 있는 것이다.

金剛王寶劒, 一刀揮斷, 一切情解;踞地獅子, 發言吐氣, 衆魔
腦裂;探竿影草, 探其有無, 師承鼻孔;一喝不作一喝用, 具
上三玄四賓主等.
451) 임제종에서 말하는 네 종류의 할. 종사가 학인을 교화하기 위해 행하는 것으로
     서 분별하기 이전의 경지에 근거하여 때와 수행자의 근기에 따라 여러 가지 방
     편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임제가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어떤 때의 할은
     금강왕의 보검과 같고, 어떤 때의 할은 바닥에 웅크린 금털 사자와 같으며, 어
     떤 때의 할은 물고기를 유인하는 수단과 같고, 어떤 때의 할은 할로서의 작용
     을 억지로 하지 않는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학인이 머뭇거리자 
     임제가 바로 할을 내질렀다.”(『臨濟語錄』「勘辨」大47 p.504a26. 師問
     僧, ‘有時一喝, 如金剛王寶劍;有時一喝, 如踞地金毛獅子;有時一喝, 如探
     竿影草;有時一喝, 不作一喝用. 汝作麽生會?’ 僧擬議, 師便喝.)

 

팔방八棒452)

종사가 내린 법령을 접하고 그것을 깊은 뜻으로 잘못 되돌리므로 내리는 방453)· 

바른 이치를 기준으로 하여 잘못된 견해를 쓸어버리는방454)·

은 뜻에 의지하다가 정도를 망치는 것을 질타하는 방455)·

어리석음을 꾸짖는 방456) 등은 ‘벌방(罰棒)’이고, 

종지에 순응하므로 내리는 방457)은 ‘상방(賞棒)’이며,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어 점검하는 방458)은 ‘변방(辨棒)’이며,

별다른 이유 없이 맹목적으로 휘두르는 방459)·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분별을 모두 쓸어버리는 방460)은 ‘정방(正棒)’이다.

觸令返玄·接掃從正·靠玄傷正·苦責, 罰棒;順宗旨, 賞棒;
有虛實, 辨棒;盲枷瞎棒·掃除凡聖, 正棒.
452) 팔방에 대한 내용은 임제의 어록에 보이지 않는다. 후인들이 임제종의 종지
     에 입각하여 방을 해석하면서 부가한 말이다.『五家宗旨纂要』권상「濟
     宗八棒」卍114 p.517b6에는 촉령지현방(觸令支玄棒), 접기종정방(接機從
     正棒), 고현상정방(靠玄傷正棒), 인순종지방(印順宗旨棒), 취험허실방(取驗
     虛實棒), 맹가할방(盲枷瞎棒), 고책우치방(苦責愚癡棒), 소제범성방(埽除凡
     聖棒) 등,『宗門玄鑑圖』「八棒論」卍112 p.932b12에서는 촉령지현방
     (觸令支玄棒), 접기종정방(接機從正棒), 변기제정방(辯機提正棒), 고현상정
     방(靠玄傷正棒), 인순종승방(印順宗乘棒), 맹가할련방(盲枷瞎煉棒), 고험허
     실방(考驗虛實棒), 소제범성방(掃除凡聖棒) 등,『萬法歸心錄』권하 卍114 
     p.828a13에서는 상방(賞棒), 벌방(罰棒), 종방(縱棒), 탈방(奪棒), 우치방
     (愚癡棒), 항마방(降魔棒), 소적방(掃跡棒), 무정방(無情棒) 등으로 분류하여
     제시되어 있다. 아래 주석에서는『五家宗旨纂要』의 팔방과 위 본문에서 서
     산이 제시한 팔방을 대대하여 비교한다. 서산은 팔방을 벌방(罰棒)·상방(賞
     棒)·변방(辨棒)·정방(正棒)의 네 범주로 묶어서 요약했다.
453) 촉령반현(觸令返玄). 촉령지현방(觸令支玄棒)과 같다. “첫째, 촉령지현방. 삼산
     등래(三山燈來 1614~1685)가 말하였다. ‘가령 종사가 내린 하나의 법령에 대해
     학인이 그것을 알지 못하고 회피하여 눈앞에 드러난 소식과 멀어진 채로 지루하
     게 깊은 뜻을 늘어놓을 때 종사가 바로 때리는 방이다. 이것은 벌방이다.’”(一, 
     觸令支玄棒. 三山來云, ‘如宗師置下一令, 學人不知迴避, 觸犯當頭, 支離玄旨, 宗
     師便打. 此是罰棒.’)
454) 접소종정(接掃從正). 접기종정방(接機從正棒)과 같다. “둘째, 접기종정방. 삼산
     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종사가 학인을 응대하여 그 학인의 근기에 따라 때릴 만
     하면 때리는 방을 말하니, 이것을 가리켜 바른 이치에 따른다고 한다. 이것은 
     상벌의 분류에 속하지 않는다.’”(二, 接機從正棒. 三山來云, ‘如宗師應接學人, 
     順其來機, 當打而打, 謂之從正. 此不在賞罰之類.’)
455) 고현상정(靠玄傷正). “셋째, 고현상정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학인이 찾
     아와 참문하면 종사는 오로지 도리를 기특하게 조작하는 데 힘쓴다. 이때 학인이 
     깊고 미묘한 뜻에 의지하여 (조작한 도리를) 헤아리다가 도리어 바른 이치를 망
     치는 경우가 있는데 종사는 곧장 때려서 학인을 그대로 놓아주지 않는다. 이것은 
     벌방이다.’”(三, 靠玄傷正棒. 三山來云, ‘如學人來見, 宗師專務, 奇特造作. 倚靠玄
     妙, 反傷正理, 宗師直下便打, 不肯放過. 此亦是罰棒.’)
456) 고책(苦責). “일곱째, 고책우치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학인이 이 본분사
     에 대해 조금도 이해하는 것이 없다면 그 자질과 견지가 아주 어리석어 진전하기 
     힘드니, 종사가 있는 힘껏 때려준다. 이것을 고책우치방이라고 하는데 상벌과는 
     관계없는 것이다.’”(七, 苦責愚癡棒. 三山來云, ‘如學人於此事, 不曾分曉, 其資質
     見地, 十分癡愚, 不堪策進, 宗師勉強打他. 是謂苦責愚癡, 亦不在賞罰之類.’)
457) 순종지(順宗旨). “넷째, 인순종지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학인과 만나 종
     사가 종지를 들어 보였을 때 학인이 종지를 알아차리고 대답도 상응하므로 종사가 
     바로 때리는 방이다. 이는 학인의 기틀을 인정한 것이니 상방이라 한다.’”(四, 印
     順宗旨棒. 三山來云, ‘如學人相見, 宗師拈示宗旨, 彼能領會, 答得相應, 宗師便打. 
     此是印證來機, 名爲賞棒.’)
458) 유허실(有虛實). “다섯째, 취험허실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학인이 방문
     하자마자 사가 곧바로 때리는 경우와 혹은 학인이 다가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종사가 또한 때리는 경우 등을 말한다. 이것은 학인의 허와 실을 분별하여 점검하
     기 위한 방법이니, 그에게 바른 견해가 있는지 없는지 살펴보는 방으로서 칭찬하
     거나 벌을 주기 위한 종류는 아니다.’”(五, 取驗虛實棒. 三山來云. ‘如學人纔到, 
     宗師便打, 或進有語句, 宗師亦打. 此是辨驗學人虛實, 看他有見無見, 亦不在賞罰
     之類.’)
459) 맹가할방(盲枷瞎棒). 굴방(屈棒)이라고도 한다. “여섯째, 맹가할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종사가 학인을 접하면서 학인의 근기는 분별하지도 못하고서
     일방적으로 마구 맹목적으로 때리지만 눈 속에는 진주(참된 안목)가 없으므로
     맹할(盲瞎)이라 한다. 이것은 가르치는 스승에게 허물이 있는 것이며 학인의 일
     과는 상관없다.’”(六, 盲枷瞎棒. 三山來云, ‘如宗師接待學人, 不辨學人來機, 一
     味亂打, 眼裏無珠, 謂之盲瞎. 此師家之過, 不干學人事.’)
460) 소제범성(掃除凡聖). “여덟째, 소제범성방. 삼산등래가 말하였다. ‘가령 종사가
     학인을 접하면서 미세한 망념에도 떨어지지 않고 조금의 머뭇거림도 허용하지 
     않으면서 범부니 성인이니 하는 분별을 일시에 쓸어버리며 말을 제대로 해도 
     때리고 말을 하지 못해도 때리며 말을 제대로 하거나 하지 못하거나 간에 때리
     며 학인으로 하여금 명근도 끊어버리며 지엽에조차도 머물지 않게 하는 방이다. 
     이는 최상으로 제기하는 방편으로서 팔방 가운데 가장 묘하게 발휘하는 방이니 
     정방이라고 한다.’”(八, 埽除凡聖棒. 三山來云, ‘如宗師家, 接待往來, 不落廉纖,
     不容擬議, 將彼凡情聖解一竝埽除, 道得也打, 道不得也打, 道得道不得也打, 直
     令學人, 斷却命根, 不存枝葉. 乃上上提持, 八棒中之用得最妙者, 此則名爲正棒.’)

 

이와 같은 법은 비단 임제의 종지일 뿐만 아니라 위로는 모든 부처님

로부터 아래로는 중생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본분에 갖추고 있는 것이니, 

이것을 벗어나 법을 설하면 모두 망령된 말일 뿐이다.

此等法, 非特臨濟宗風, 上自諸佛, 下至衆生, 皆分上事, 若離
此說法, 皆是妄語.

 

 방(棒)과 할(喝)의 본질

 

79. 

임제의 할(喝)과 덕산의 방(棒)은 모두 무생(無生)의 이치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철저하게 증명해 보인 것으로 ‘근본적인 기틀을 남김없이 

활용할 뿐’[大機大用] 정해진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발휘된다. 온몸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본분사를 궁구하다가461) 물러나서 문수보살이나 보현보살과 

같은 대인(大人)의 경계를 지킨다. 그러나 진실에 따라 말하자면, 

임제와 덕산 이 두 선사도 도적질하는 마음을 가진 귀신462)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463)
臨濟喝, 德山棒, 皆徹證無生, 透頂透底, 大機大用, 自在無
方. 全身出沒, 全身擔荷, 退守文殊普賢大人境界. 然據實
而論, 此二師, 亦不免偸心鬼子.
461) 담하(擔荷). ‘짐을 지다’ 또는 ‘본분사를 공부하다’는 뜻. “이 일(본분사)을 짊어
     지려면 다만 확고한 뜻을 갖추어 몽둥이로 때려도 고개조차 돌려보지 말고 한결
     같이 매진하는 자라야 한다.”(『大慧語錄』 권20 「示空慧道人」 大47 p.895c15. 
     擔荷此事, 直是具決定志, 一棒打不回頭底.)
462) 투심귀자(偸心鬼子). 도적질하는 마음을 가진 귀신이라는 말로서 학인의 숨은
     마음을 잘 밝혀내는 뛰어난 안목을 지닌 스승을 일컫기도 한다. “어떤 학인이
     물었다. ‘제가 오늘밤 대중들의 위세를 대신하여 질문 하나를 특별히 내놓아도
     되겠습니까?’ ‘도적질하는 마음을 가진 귀신은 남들의 미움을 산다.’ 그 학인이
     할을 하자 허당이 ‘예상했던 대로군’이라 대답했고, 그 학인은 절을 올렸다.”
     (『虛堂語錄』 권3 大47 p.1011a14. 僧云, ‘學人今夜, 借大衆威光, 別置一問, 
     得麽?’ 答云, ‘偸心鬼子, 得人憎.’ 僧便喝, 答云, ‘果然.’ 僧禮拜.)
463) 방과 할 자체도 그때마다 상대의 마음을 잘 읽어내어 발휘되는 작용이었다는
     뜻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평]

시퍼렇게 날선 취모검이로다. 그 칼날 범하지 마라.464)
凜凜吹毛. 不犯鋒鋩.
464) 칼을 써도 칼날은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대상에 응하여 활발하게
     작용을 펼치면서도 그것에 얽매이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고 자유자재한 것을 
     가리킨다.

[게송]

반짝반짝 맑게 빛나는 구슬 물속에서 아른거리고, 드넓은 허공 흩어진 

구름 사이로 달이 떠가네.

爍爍寒光珠媚水, 寥寥雲散月行天.

 

맺음

 

80. 

대장부는 부처나 조사 보기를 마치 원수를 보듯이 한다.465) 부처에 

착하여 구하면 부처에 얽매이고 조사에 집착하여 구하면 조사에 

얽매이게 될 것이니, 구하는 것은 무엇이나 괴로움이 되고 말기에 

아무 일 없는 것만 못하다.466)
大丈夫, 見佛見祖如寃家. 若著佛求, 被佛縛;若著祖求, 
被祖縛, 有求皆苦, 不如無事.
465) 원오극근(圜悟克勤)은 이 구절을 동산(洞山)의 말로 인용한다. 『圜悟語錄』 권13
     大47 p.773c10.
466) 임제의 말에 근거한 구절. “그대가 만일 부처를 구한다면 부처라는 마구니에 사
     로잡힐 것이고, 만일 조사를 구한다면 조사라는 마구니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대
     가 구하는 일이 있기만 하면 무엇이나 괴로움이 되고 말기에 아무 일도 없는 것만 
     못하다.”(『臨濟語錄』 大47 p.499c21. 爾若求佛, 卽被佛魔攝;爾若求祖, 卽被
     祖魔縛. 爾若有求皆苦, 不如無事.)

[평]

부처나 조사 보기를 마치 원수를 보듯이 하라는 구절은 앞에서 ‘바람도 

없는데 물결을 일으킨 격[無風起浪]’이라고 한 말을 맺은 것이다. 구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괴로움이 된다는 구절은 앞에서 ‘있는 그대로 옳다

[當體便是]’라고 한 말을 맺은 것이다. 아무 일 없는 것만 못하다고 한 

구절은 앞에서 ‘생각을 일으켜 분별하는 즉시 어긋나버린다[動念卽乖]’고 

한 말을 맺은 말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면 세상 모든 사람의 혓바닥을 

깔고 앉을 수 있고, 생과 사의 빠른 수레바퀴를 멈추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위기를 떠받쳐 살리고 혼란을 평정한 예로서, 단하가 목불을 불태워버린 

일,467) 운문이 개의 먹이로 주겠다고 한 말,468) 한 노파가 부처님을 보지 
않겠다고 한 말469) 등
을 들 수 있으니, 이 모두가 삿된 주장을 꺾어버리고 

바른 도리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그렇다면 그 궁극적인 뜻은 무엇일까?

佛祖如寃者, 結上無風起浪也. 有求皆苦者, 結上當體便是也. 
不如無事者, 結上動念卽乖也. 到此, 坐斷天下人舌頭, 生死迅
輪, 庶幾停息也. 扶危定亂, 如丹霞燒木佛, 雲門喫狗子, 老母
不見佛, 皆是摧邪顯正底手段. 然畢竟如何?
467)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이 목불(木佛)을 땔감으로 쓴 인연에서 비롯한 공안. 
     『五燈會元』권5「丹霞天然章」卍138 pp.166c18~167a3,『禪門拈頌說話』 
     321則  韓5 pp.276b21~278b13 등 참조.
468) 부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일곱 걸음 걷고서 사방을 둘러본 후 한 손으로는 하
     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할 뿐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대해 운문문언(雲門文偃)이 “내가 당시
     에 그 광경을 보았다면, 한 방에 때려죽이고 개에게 먹이로 주어서 천하의 태평
     을 도모했을 것이다.”(我當時若見, 一棒打殺, 與狗子喫却, 媿圖天下大平.)라고 
     한 말을 가리키다.『禪門拈頌說話』2則 韓5 p.7c12~c15 참조.
469) 부처님과 같은 시기에 태어난 한 늙은 여인이 있었는데 부처님을 보지 않으려고
     자리를 피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하였으나 가린 손에 부처님이 나타
     나셨다고 한다.『五燈會元』권1「釋迦牟尼佛」卍138 p.6b10~b12,『祖庭
     指南』권상 卍148 p.391a2~a4 등 참조.

 

[게송]

항상 강남의 3월 풍경을 기억하노라면,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이 

향기롭더라.470)
常憶江南三月裏, 鷓鴣啼處百花香.
470) 자고새의 울음에 꽃이 향기로 화답하고 꽃의 향기에 응하여 자고새가 우는 모
     습으로써 모든 존재가 차별 그대로 존재하면서도 서로 어울려 있는 모습을 형
     상화한 말이다.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풍혈
     (風穴)이 말한다. ‘항상 강남의 3월 풍경을 기억하노라면, 자고새 우는 곳에 온
     갖 꽃이 향기롭더라.’”(『人天眼目』 권1 大48 p.301a22. 如何是人境俱不奪?
     穴云, ‘帝憶江南三月裏, 鷓鴣啼處百花香.’)

 

81. 

신령한 광명이 어둡지 않으니 이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道)이다. 이 선문(禪門)에 들어온 이상 지해(知解)를 두지 마라.471)
神光不昧, 萬古徽猷. 入此門來, 莫存知解.
471) 평전보안(平田普岸)의 말. ‘휘유(徽猷)’는 아름다운 도 또는 근본적인 진리, 영원히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도(道)를 뜻한다.『景德傳燈錄』권9「平田普岸傳」大51
     p.267a20 참조.

 

[평]

신령한 광명이 어둡지 않다는 말은 앞에서 ‘밝디밝으며 신령스럽고 

령스럽다[昭昭靈靈]’고 한 말을 결론지은 것이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아름다운 도라고 한 말은 앞에서 ‘본래 생성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本不生滅]’고 한 말을 결론지은 것이다. 지해를 두지 말라고 

한 것은 앞에서 ‘그 이름을 고수하며 지해를 일으키지 말라[不可守名生解]’고 

한 말을 결론지은 것이다. 문이란 범부나 성인이나 모두 드나든다는 

뜻이 있으니, 예컨대 하택신회가 “지(知)라는 한 글자는 모든 현묘한 

이치가 나오는 문”472)이라고 한 것과 같다. 아!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을 그릴 수도 없다는 것에서 뜻을 일으켜 지해를 두지 마라는 

말로써 결론을 지었으니, 이한 책의 언어문자를 한마디 말로 모두 

부수었도다. 그러나 하나의 이해로 시종일관하면서 중간 중간 만행

(萬行)을 들어 보였으니, 세전(世典)의 삼의(三義)와 같다.473) 지(知)와

해(解)라는 두 글자는 불법에 큰 해가 되기 때문에 특별히 들어서 

마무리한 것이니, 하택신회선사가 조계의 적자가 되지 못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뜻에서 게송으로 읊는다. “이와 같이 

종지를 제기하여 밝혔다면, 서쪽에서 온 벽안의 스님에게 크게

비웃음을 샀으리라.”474)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어떠한 뜻일까?

神光不昧者, 結上昭昭靈靈也. 萬古徽猷者, 結上本不生滅也. 
莫存知解者, 結上不可守名生解也. 門者, 有凡聖出入義, 如荷
澤, 所謂知之一字, 衆妙之門也. 吁! 起於名狀不得, 結於莫存
知解, 一篇葛藤, 一句都破也. 然始終一解, 中擧萬行, 如世典
之三義也. 知解二字, 佛法之大害故, 特擧而終之, 荷澤神會禪
師, 不得爲曹溪嫡子者, 以此也. 因而頌曰, “如斯擧唱明宗旨, 
笑殺西來碧眼僧.” 然畢竟如何?
472)『金剛經纂要刊定記』권1 大33 p.171c19,『都序』권상 大48 p.405b12~b16 등 참조.
473) 세전이란, 세간에 전해지는 경전 등 각종 전적(典籍)을 가리키기도 하고, 불가
     에서 특별히 불교경전 외의 서적을 뜻하기도 한다. 삼의는 경서(經書)의 내용이
     시(始)·중(中)·말(末)로 전개됨을 말한다.『中庸』「序」에서 정자(程子)가 다
     음과 같이 한 말에서 비롯된다. “그 책은 처음 하나의 이치를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중간에 수많은 사항으로 나누어 설명하다가 끝에는 다시 하나의 이치로 
     합해진다.”(其書始言一理, 中散爲萬事, 末復合爲一理.)
474)『證道歌頌』卍114 p.888a4.

 

[게송]

밝은 달이 홀로 비추니 강산은 고요한데, 자신도 모르게 웃는 한 소리에

천지가 놀라네.475
孤輪獨照江山靜, 自笑一聲天地驚
475)『臨濟錄』大47 p.506b16.

발跋 1_사명유정 지음

이 글은 조계의 노화상 퇴은(退隱) 큰스님1)께서 지으셨다. 아! 이백여

년 전부터 사법(師法)의 도가 더욱 상실되어 선(禪)과 교(敎)의 무리들이 

제각각 다른 견해를 내게 되었다. 교(敎)를 종지로 하는 이들은 술지게미 

같은 교리에 취해 모래알을 세듯 헛된 수고만 할 뿐 오교(五敎)2) 자체에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스스로 깨달아 들어가게 하는 문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선(禪)을 종지로 하는 이들은 천진(天眞)하게 타고난 성품만 

믿을 뿐 수행하여 증득하는 도리는 완전히 부정한다. 그들은 돈오(頓悟)

한 후에 바로 발심하여 만행(萬行)을 닦고 익혀야 한다는 뜻을 알지 못하

는 것이다. 이처럼 선과 교가 마구 뒤섞여 끝내 모래와 금을 구분할 수 없

는 지경이 되었다.『원각경』에서 “본래 그대로가 성불한 상태”3)라고 한 말

을 듣고서 본래부터 미혹과 깨달음의 차별이 없다는 뜻으로 오해하여 인

과의 도리를 부정한다면 그릇된 견해가 되고, 또한 “무명을 닦아 익힌다”

는 말을 듣고서 진여가 망념을 일으키는 것이라 생각하여 진실하고 변함

없는 본성을 잃어버린다면 이 또한 그릇된 견해가 된다는 말이 바로 그 

뜻이다.

右編, 乃曹溪老和尙, 退隱師翁所著也. 噫! 二百年來, 師法益
喪, 禪敎之徒, 各生異見. 宗敎者, 唯耽糟粕, 徒自算沙, 不知
五敎上, 有直指人心, 使自悟入之門;宗禪者, 自恃天眞, 撥
無修證. 不知頓悟後, 始卽發心, 修習萬行之意. 禪敎混濫, 沙
金罔分, 圓覺所謂, 聞說本來成佛, 謂本無迷悟, 撥置因果, 則
便成邪見, 又聞修習無明, 謂眞能生妄, 失眞常性, 則亦成邪見
者, 是也.
1) 사옹(師翁). 스승을 높여 부르는 말 중 하나. 사장(師匠)과 같은 뜻이다. 또는 스
  승의 스승으로 사조(師祖) 곧 법계상의 조부(祖父)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2)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 얕고 간단한 교설로부터 차례대로 
  깊은 교설로 분류하여 각 단계의 교의를 설명하는 교판(敎判) 중 하나이다.
  그 분류는 시대에 따라, 이론가에 따라 여러 가지 차이가 있는데 당나라의 법장
  (法藏)이 설한 소승교(小乘敎)·대승시교(大乘始敎)·대승종교(大乘終敎)·돈교
  (頓敎)·원교(圓敎), 제(齊)나라 때 호신사(護身寺)의 자궤(自軌)가 설한 인연종
  (因緣宗)·가명종(假名宗)·부진종(不眞宗)·진종(眞宗)·법계종(法界宗), 융통염
  불종(融通念佛宗)에서 나눈 인천교(人天敎)·소승교·돈교·원교·점교(漸敎) 등
  의 5교가 있다.
3) “중생이 본래 그대로 성불한 상태요, 생사와 열반이 어느 것이나 꿈과 같다.”
   (『圓覺經』 大17 p.915a20. 衆生本來成佛, 生死涅槃, 猶如昨夢.)

 

아아, 위태롭도다! 이 도가 전해지지 못한 것이 어찌 이토록 심한 지경

이 되었단 말인가. 명주실처럼 가늘디가늘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는 것

이 마치 한 올의 머리카락으로 천 균(鈞)의 무거운 무게를 지탱하는 것과 

같으니, 거의 땅에 떨어져 자취조차 사라질 지경이로다. 다행스런 일은 

리 큰스님께서 묘향산(妙香山)에 머무셨던 10여 년 동안, 수행하시는 

틈이 50권의 경론과 어록들을 보시고 일상생활 하는 중에 간간이 요긴한

구절들을 참구하고 결단하시어 그때마다 기록해 두셨던 것이다. 이것을 

그때마다 문하의 제자들에게 거듭하여 자세히 가르쳐 주셨으니, 마치 양을 

기르는 방법과 같이 지나치는 자는 억눌러 주고 뒤처진 자는 채찍질하여 

크게 깨치는 문으로 몰아넣으셨으니, 남김없이 다하는 노파심이 이처럼 

간절하셨다. 그러나 근기가 둔한 이들은 도리어 법문이 너무 높고 어려운 

것이 흠이라고 여겼다. 스님께서는 어리석음에 덮여 있는 그들을 연민

하여 각각의 구절마다 주석을 달아 풀이하시고 차례대로 엮어 뜻이 통

하게 하셨다. 그 결과로 쇄골이 상속하여 고리처럼 이어지고 혈맥이 

상통하여 팔만대장경의 요체와 다섯 종파4)의 본원이 여기에 온전히 

갖추어져 말씀마다 불법의 요체가 드러나고 구절마다 종지(宗旨)로 돌아

가게 되었다. 이전에 치우쳤던 사람은 원만하게 되고 막혔던 사람은 통하

게 될 것이니 선(禪)과 교(敎)의 귀감이요 이해와 실천을 돕는 뛰어난 약

이라 할 만하다.

嗚呼殆哉! 斯道之不傳, 何若是其甚也. 綿綿涓涓, 如一髮引
千鈞, 幾乎落地無從矣. 賴我師翁, 住西山一十年, 鞭牛有暇, 
覽五十本經論語錄, 間有日用中, 參決要切之語句, 則輒錄之. 
時與室中二三子, 詢詢然誨之, 一如牧羊之法, 過者抑之, 後者
鞭之, 驅入於大覺之門, 老婆心得徹困, 若是其切也. 奈二三子
鈍根也, 返以法門之高峻爲病焉. 師翁愍其迷蒙, 各就語句下, 
入註而解之, 編次而繹之. 鉤鎖連環, 血脈相通, 萬藏之要, 五
宗之源, 極備於此, 言言見諦, 句句朝宗. 向之偏者圓之, 滯者
通之, 可謂禪敎之龜鑑, 解行之良藥也.
4)『선가귀감』 말미에 임제종·조동종·운문종·위앙종·법안종 각각의 법맥과 
   가풍을 밝힌 것을 말한다.

 

그러나 큰스님께서는 항상 이런 종류의 일에 대하여 비록 한 마디 말이나 

반 구절을 말씀해 주실지라도 마치 칼날을 다루는 일과 같이 엄하게 여기

시어 행여 종이에 먹칠이나 하는 꼴5)이 아닌지 걱정하셨으니, 어찌 이 

책을 세상에 유통시켜 당신의 능력을 자랑하고자 하셨겠는가! 문인 백운

선사(白雲禪師) 보원(普願)이 정사(淨寫)하고, 문인 벽천선덕(碧泉禪德) 

의천(義天)이 교감하였다. 문인 대선사(大禪師) 정원(淨源)과 문인 대선사 

태상(太常)과 문인 청하도인(靑霞道人) 법융(法融) 등은 머리를 조아리고

재배하며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라 감탄한 끝에 마침내 뜻을 함께하는 

예닐곱 사람들과 함께 바랑을 털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모아 판각하고 

통케 함으로써 큰스님께서 가르쳐주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였다.

然, 師翁, 常與論這般事, 雖一言半句, 如弄金6)刃上事, 恐上
紙墨, 豈欲以此流通方外, 誇衒己能也哉! 門人白雲禪師普願
寫之, 門人碧泉禪德義天校之. 門人大禪師淨源, 門人大禪師
太常, 門人靑霞道人法融等, 稽首再拜曰, “未曾有也.” 遂與同
志六七人, 傾鉢囊中所儲, 入梓流通, 以報師翁訓蒙之恩也.
5) 공상지묵(恐上紙墨). 보통 ‘道卽不辭’와 짝을 이루어 ‘말을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종이에 먹칠을 할까 걱정스럽다’라는 말로 쓰인다. ‘공상지필(恐上紙筆)’이라고도 
   다.

 

크나큰 기틀을 담고 있는 용궁의 장경(대장경)은 심연의 바다와 같이 

없이 넓고 아득히 깊어 비록 (그것을 궁구하는 공부가) 용의 구슬을 

찾고 산호를 캐는 일과 같다고 말은 하지만 무엇을 따라 구할 것인가! 

바다에 들어가는 것을 육지 걷듯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니었다면 저 

드넓은 바다 끝만을 바라보며 탄식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처럼 요체를 가려내신 공덕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해주신 은혜는 

산과 같이 높고 바다와 같이 깊으니, 설령 만 명의 뼈를 부수고 천 명의 

몸뚱이를 가루로 만든다고 한들 터럭만큼이라도 갚을 수 있겠는가! 

천 리 밖에서 보거나 듣고서 이상타 여기지도 않고 의심하지도 

않으며 공경하는 마음을 품고 읽으면서 보배로 삼는다면 진실로 

‘천 년이 지나 그 뜻을 알아주는 한 사람’7)이라 할 것이다.

大機龍藏, 汪洋渺若淵海, 雖言探龍珠采珊瑚者, 孰從而求之! 非入海如陸之手段, 
頗不免望涯之歎. 然則撮要之功, 發蒙之惠, 如山之高, 若海之深, 說若碎萬骨粉千命, 
如何報得一毫哉! 千里之外, 有見之聞之, 不驚不疑, 敬之讀之, 以爲寶玩, 
則眞所謂千歲之下一子雲耳.
7) 전한 말의 학자 겸 문인인 자운(子雲 B.C.53~A.D.18:揚雄의 자)이 자신의 글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언젠가는 알아주는 이가 나타나리
   라고 생각한 일화에 따른다. 한유(韓愈)가 지은「與馮宿」에 “양자운이『태현경』
   을 지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으나, 자운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
   아도 마음이 상할 것이 없다. 후세에 다시 나 같은 사람이 나타나 반드시 좋아해 
   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자운이 죽고 근 천여 년이 지났으나 양자운과 같은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으니안타까운 일이다.”(揚子雲, 著太玄, 人皆笑之, 子雲
   曰, ‘世不我知無害也. 後世復有揚子雲, 必好之矣.’ 子雲死, 近千載竟, 未有揚子雲, 
   可嘆也.)라는 글이 전한다.

 

 만력 기묘년(1579:선조12) 봄에 조계종 후손 사명종봉(四溟鍾峯) 유정이 

선사의 구결(口訣)에 두 손 모아 예배하고8) 이어 삼가 발문을 쓰다.

時萬曆己卯春節, 曹溪宗遂, 四溟隱9)峰惟政, 拜手口訣, 因爲謹跋.
8) 배수(拜手). 머리를 손이 있는 곳까지 숙이고 인사를 올리는 것. 공수배(空首拜)
   라고도 한다.
9) 隱은 鍾의 오식(誤植). 종봉(鍾峯)은 사명유정의 별호이다.

 

발跋 2_보원 지음

서산 큰스님께서는 문하의 제자들이 선과 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관행(觀行)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부처님과 조사가 제시한 마음의 요체 중 

날마다 활용하기에 적절한 수백 구절의 말씀을 손수 가려 뽑았으니 이를 

‘선가귀감’이라 한다. 제자 이환(離幻) 사명당(四溟堂)이 그대로 이어받아 

밝히고, 학사 이수륜(李秀倫)이 필사하고 책으로 엮어 세상에 드러냈으며, 

시은(市隱) 김수향(金守香)은 목판에 새겨 보관했으니, 이들은 모두 한 분의 

사를 모시는 무리이다. 아, 이 한 권을 펴내어 배우는 이들이 애써 

대장경을 찾아보지 않고도 조사의 심인(心印)을 곧바로 몸에 지닐 수 있게 

다면, 법유1)로 길러주신 넓고 깊은 은혜의 바다를 이렇게 유통한 공덕에 

따라 갚고도 남았다고 할 만하도다!

西大師翁, 愍室中二三子輩, 迷禪敎, 失觀行, 手抄佛祖心
要, 切於日用者數百語, 名曰, 禪家龜鑑. 弟子離幻, 信之受而
昭焉, 學士李秀倫, 筆之書而景焉, 市隱金守香, 鋟之木而甲
焉, 所謂一宗之族也. 吁, 展此一卷, 學者不勞涉龍藏, 而直佩
祖師之心印, 則其法乳恩海, 流通功德, 可勝報也哉!

 

만력 계미년(1583:선조16) 봄에 제자 보원이 두 손 모아 예배 올리고

삼가 발문을 짓다.

萬曆癸未春, 弟子普願, 拜手敬跋.

 

발跋 3_충허성정 지음

귀감이라고 한 이유는 선과 교에서 날마다 활용하는 요체가 되는 문이기 

때문이다. 부처마다 조사마다 모두 이로써 지극한 도리에 이르셨으니 

수행할 때에 이것을 버리고서야 어떻게 통할 수 있겠는가! 새긴 지 오랜 

세월이 흘러 판본이 마멸되어 만세의 귀감으로 전해지지 못할 듯하므로 

자응신화1)가 힘들여 모화(募化)하여 다시 간행하기 위해 애를 썼으니 

두타2)가 다시 태어났다고 할 만하다. 이에 이 일을 경축하며 문인 

충허성정이 쓰다.

龜鑑者, 乃禪敎日用之要門也. 佛佛祖祖, 皆以此臻極, 而凡修
行之隊,3) 捨此奚通! 盖鋟鏤累稔, 板本磨滅, 未爲萬世之龜鑑, 
故慈應信和, 力募方板, 黽勵改刊, 可謂黑頭陀之重腹者也. 仍
玆祝之, 門人冲虛性正書.
1) 자응신화(慈應信和 1658~1737). 10세에 출가하여 벽운(碧雲)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 뒤 불경을 깊이 공부하여 묘리(妙理)를 얻고 추붕(秋鵬)의 법맥(法脈)을 이어받았다
2) 黑頭陀. 혜소(慧昭 774~850)의 별칭. 얼굴이 검어 흑두타로 불렸으며, 동방성인
   (東方聖人)이라고도 하였다. 31세 때 당나라 창주(滄州)에 가서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인 신감(神鑒)으로부터 심인을 얻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어산범패(魚山梵唄)를 
   도입하여 널리 보급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호는 진감(眞鑑)이고, 탑호는
   대공영탑(大空靈塔)이다. 경상남도 하동군 쌍계사에 남아 있는 비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었으며, 비명은 「眞鑑國師碑」이다.
3) 隊는 際자의 오식(誤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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