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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

대당서역기 마가다국 8권~9권

 

 

마가다국8~9

 

대당서역기 제 8

현장 한역

변기 찬록

이미령 번역

 

9. 중인도[1개국]

 

1) 마게타국(摩揭陀國)

마게타국1)의 둘레는 5천여 리에 달한다. 성에는 살고 있는 사람이 적고 성 밖의 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이 처마를 잇대고 살고 있다. 토지는 비옥하고 곡식이 풍성하다. 특이한 벼 품종이 있는데 낱알이 아주 크고 향기와 맛은 뛰어나며 광택과 색이 매우 특이하다. 이 나라의 사람들은 이 쌀을 가리켜서 '대인에게 공양 올리는 쌀[供大人米]'2)이라고 부른다. 토지는 늪지이며 마을은 고원에 자리 잡고 있다. 한 여름부터 중추(仲秋) 전까지는 평지에 물이 흘러 배를 띄울 수 있다. 풍속은 순박하고 질박하며 기후는 온화하고 덥다. 학문을 높이 숭상하고 불법을 존경하고 있다. 절은 50여 곳 있으며 승도들은 1만여 명 남짓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대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천사 (天祠)는 수십 곳 있으며 이교도들도 매우 많다.

1) 범어로는 mag dha이며 마갈(摩竭마게(摩揭마가타(摩訶陀묵갈타(默竭陀) 등으로도 음사하며, 무해(無害무뇌해(無惱害불악처(不惡處치감로처(致甘露處선승(善勝총혜(聰惠천라(天羅) 등으로 번역한다. 고대 인도 16대국 가운데 하나이다. 대체로 지금의 비하르(Bih r)주의 가야(Gay )현과 파트나(Patna)현을 중심으로 하는 갠지스강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i un ga왕조(기원전 600기원전 3 60)의 빈비사라왕과 그 아들인 아사세왕은 불교와 쟈이나교의 개조와 동시대 인물이며 이 두 종교는 그 왕조의 보호 아래에서 발전하였다.

2) 이 쌀은 오직 국왕이나 대덕에게만 바치는 것이었으며, 지금도 파트나 지방의 쌀은 현재 인도에서도 가장 우수한 품종으로 여겨지고 있다.

 

긍가하 남쪽에 옛 성이 있는데 둘레는 70여 리이다. 황폐해진 지 오래되었지만 그 터는 여전히 남아있다. 옛날 사람들의 수명이 무량세(無量歲)이었을 때 이 성은 구소마보라성(拘蘇摩補羅城)3)[당나라 말로는 향화궁성(香化宮城)이라고 한다]이라고 불렀다. 왕궁에 꽃이 많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로부터 인간의 수명이 수천 세가 되었을 때에 이 성은 다시 파타리자성(波吒釐子城)4)[구역에서는 파련불읍(巴連弗邑)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이라고 불렸다.

3) 본문 권5에 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4) 범어로는 p ali이며 원래는 나무 이름이다. 파라리불다라(波羅利弗多羅), 파라리불(巴羅利弗), 파린(巴隣), 파라리(波羅梨) 등으로도 음사한다. 이 도시 이름은 서방 문헌에 Palibothra라고 기록되어 있다. 옛 도시의 유적은 지금의 파트나로부터 서북쪽의 Dinapore에 이르는 길에 있다.

 

옛날에 어떤 바라문이 있었는데 그는 재주가 뛰어나고 박학한 사람이었다. 수천 명의 문인들이 그에게서 배우고 있었으며 여러 학도들이 함께 와서 노닐고 배웠다. 이 때 서생(書生) 한 사람이 온종일 서성이며 근심에 사로잡혀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동료들이 물었다.

"무엇을 그리 근심하는가?"

그가 답하였다.

"아직 한창의 나이에 멀리 유학 와서 혼자 고민하여 왔네. 세월이 오래 지났지만 학업과 기예에서 이룬 것이 없어 이것을 생각해보고 말을 하자니 울적한 마음이 더욱 심해질 뿐이네."

그러자 학도들이 장난삼아 그에게 말하였다.

"이제 보니 그대는 배우자를 찾고 있었구나."

그리하여 그 자리에서 장난삼아 세 사람을 세워서 남자쪽 부모로 삼고, 두 사람을 세워 여자쪽 부모로 삼은 뒤 그를 타리수(吒釐樹) 아래에 앉혀 놓고는 '너는 이제 이 나무의 사위가 됐어'라고 하면서 과일을 따오고 맑은 물을 떠서 혼인의 순서를 말하고 짝을 맺을 시기를 청하였다. 이 때 거짓으로 꾸민 여자의 아버지가 꽃가지를 잡고 서생에게 주면서 말하였다.

"이것은 아름다운 배필이다. 부디 거절하지 말아라."

서생은 몹시 기뻐하여 스스로 만족하였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 학도들이 돌아가자고 말하였지만 서생은 연정을 품고서 꼼짝하지 않았다. 학도들이 말하였다.

"앞서 한 말은 장난이었으니 부디 함께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숲 속에 맹수들이 있어 해를 당할지도 모르네."

그러나 서생은 끝내 남아 나무 주위를 맴돌았다. 어느덧 석양이 졌고 문득 기이한 빛이 들판을 비추더니 청아한 음악소리가 울리면서 휘장이 길게 펼쳐졌다. 그리고 홀연히 노인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지팡이를 짚고 다가와 위로의 말을 던졌으며 또다시 노파가 소녀를 데리고 왔다. 길을 가득 메운 하객들은 화려한 성장을 하였으며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이 때 노인이 소녀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이 아이는 그대의 나이 어린 아내이다."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즐기는 가운데 연회가 7일이나 계속되었다.

한편 학도들은 서생이 맹수에게 해를 당하지나 않았을까 걱정이 되어 그 나무 아래로 와서 그를 찾아보았다. 그런데 서생은 홀로 나무 그늘에 앉아서 마치 귀한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하고 있었다. 학도들은 함께 돌아가자고 말하였지만 서생은 거절하고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후 스스로 성 안으로 들어가서 친척들을 찾아가 이 일의 자초지종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너무나 놀라서 여러 친구들과 함께 숲 속으로 가보았다. 그들은 모두 다 꽃나무가 하나의 큰 집으로 변하고 하인과 몸종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가운데 그 노인이 조용히 접대하며 음식들을 내어놓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손님을 맞는 예를 갖추는 광경을 보았다. 친구들은 성으로 돌아가서 4방에 이 일을 낱낱이 알렸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나 사내아이를 낳은 뒤 그 서생은 아내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돌아가고 싶지만 그대와 헤어질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 없소. 그러나 가지 않고 이곳에 머물러 있다 해도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 이리저리 방랑하게 될 것이오."

그의 아내는 이 말을 듣고 나서 자신의 아버지인 노인에게 자세하게 이야 기하였다. 그러자 노인이 서생에게 말하였다.

"인생의 즐거움이 어찌 고향에만 있겠는가? 이제 집을 지어줄 것이니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일을 시켰는데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완성되었다. 나아가 예전의 향화성(香花城)을 이 마을로 옮겼고, 그 아이로 말미암아 신()이 성을 지었다고 하여 이후로는 파타리자성(波吒釐子城)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옛 왕궁의 북쪽에 돌기둥이 있는데 높이는 수십 척에 달한다. 이것은 무우왕이 지옥을 만든 곳이다. 석가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백년 째 되던 해에 아수가(阿輸迦)5)[당나라에서는 무우(無憂)라 하고 구역에서는 아육(阿育)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왕이 나왔는데 그는 빈비사라(頻毘娑羅)[당나라에서는 영견(影堅)이라 하고 구역에서는 빈바사라(頻婆娑羅)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왕의 증손(曾孫)6)이다

5) 본서 권1의 무우왕 주 160) 참고.

6) 무우왕은 빈두사라(頻頭娑羅)의 아들이며, 왕조의 시조인 찬드라굽타의 자손이므로 현장의 이러한 내용은 잘못된 것이다. 빈비사라왕은 i un ga왕조 제5세이며 불교와 쟈이나교의 조사들과 동시대인이고 그 아들인 아사세왕에게 살해되었다.

 

아수가왕은 왕사성에서 파타리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외곽을 쌓아서 옛 성을 에워쌌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다만 옛 성의 터만 남았다. 가람과 천사와 솔도파의 남아있는 터는 수백 개이지만 지금 현존하고 있는 것은 두세 개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옛 궁의 북쪽, 긍가하에 임해 있는 곳의 작은 성 안에 천여 채의 집이 있다.

 

처음에 무우왕이 왕위를 이은 뒤 그 행동거지가 매우 잔혹하여, 곧 지옥을 세워서 온갖 중생들의 목숨을 해쳤다. 지옥의 주위를 둘러싼 울타리는 몹시 높고 험하며 망루가 불쑥 솟아있는 가운데 그 속에는 맹렬한 불길이 타오르는 커다란 화로와 쟁기, 날카로운 칼 등 온갖 고문하는 기구들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저승처럼 꾸며 놓고서 흉악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 지옥을 담당하도록 맡겼다. 처음에 나라의 법을 어긴 죄인들은 그 죄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도탄에 빠뜨렸다. 그 후 옥에서 고통을 겪도록 하고서 다시 구금한 뒤에 살육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번 이곳에 온 자는 모두 죽여 버렸으니, 그들은 그대로 입을 다물게 된 거나 마찬가지여서 옥의 상황이 새어나가지 않았다.

 

그 당시 어떤 사문이 불법을 따르는 승가 대중[法衆]에 들어온 지 오래지 않아서 마을을 다니며 걸식을 하다가 우연히 옥문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자 흉악한 옥리가 그를 붙잡아다가 잔혹하게 죽이려고 하였다. 사문은 놀라 두려움에 떨면서 부처님께 예경하고 참회할 수 있기를 청하였다. 그러다 문득 어떤 사람이 묶인 채로 옥에 끌려와서 손발이 잘리고 사지가 찢겨 순식간에 온몸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보고 말았다. 사문은 이런 광경을 보고 나서 깊은 슬픔 과 애도하는 마음이 일어 무상관(無常觀)을 이루고 무학과(無學果)를 증득하였다.

이 때 옥졸이 말하였다.

"이젠 네놈이 죽을 차례다."

사문은 성과(聖果)를 증득한 뒤라 마음이 삶과 죽음에 대해 평온해졌으므로 끓어오르는 가마 속에 들어가도 마치 맑은 못 속에 있는 커다란 연꽃 위에 앉은 듯하였다. 이 모습을 본 감옥의 주인이 크게 놀라 심부름꾼을 보내어 이 일을 왕에게 아뢰었다. 그러자 왕도 몸소 그 모습을 보려고 달려와서 신령스러운 조화를 깊이 찬탄하였다. 이 때 감옥의 주인이 왕에게 말하였다.

"왕께서도 이제 죽으셔야 합니다."

왕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왕께서 일찍이 형옥(刑獄)을 감독하게 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감옥의 담 안으로 들어온 자는 누구든지 죽여야 한다'고 명하셨습니다. 설사 왕이 들어오셨다고 하여도 홀로 죽음을 벗어나는 일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왕이 말하였다.

"법이란 일단 한번 정해졌으면 다시 고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일찍이 내린 영이 어찌 너라고 거기서 벗어나겠느냐? 너는 오래 전부터 생명을 마구 다루었으니, 그것은 도리어 나의 허물이다."

그리고 나서 옥졸에게 명하여 그를 커다란 화로 속으로 던져 넣게 하였다. 옥의 책임자가 죽자 왕은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이에 울타리를 허물고 구덩이를 메웠으며 감옥을 폐쇄하고 형벌을 관대하게 적용시켰다.

 

감옥의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그 기단은 기울고 허물어졌으며 오직 복발(覆鉢)의 형세만이 남았다. 옆의 장식은 보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난간은 돌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이 바로 847) 탑 가운데 하나이다. 무우왕이 사람들을 시켜서 궁을 만들고서 그 속에 여래 사리 1[]을 안치하였는데 신령스러운 기적이 이따금 일어났으며 신비한 빛이 간간이 비쳤다. 무우왕은 감옥을 폐쇄한 뒤 근호(近護)대아라한을 만났다. 아라한은 왕의 근기에 따라 방편으로 잘 이끌었다. 왕이 나한에게 말하였다.

"다행히 지난 세상의 복업으로 인하여 인간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탄스럽게도 이처럼 장애에 얽혀서 부처님의 교화를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여러 탑들을 중수하여 여래의 유신(遺身) 사리를 모시고자 합니다."

나한이 말하였다.

"대왕께서 복덕의 힘으로 보이지 않은 수많은 정령들을 부리고 널리 바라는 마음으로 3보를 두루 보호하려는 것은 바로 내가 원하는 바였으며, 이제 바야흐로 그 때가 왔습니다."

그리하여 이로 인하여 널리 헌토(獻土)의 인연과 여래께서 무우왕이 크게 불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별하신 일 등을 설하였다. 무우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귀신들을 불러 모아서 영을 내렸다.

"법왕께서 공덕으로 중생들을 이롭게 하시고 인도하심은 경사스러운 일이다. 나는 지난 세상의 선업으로 인하여 인간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으니, 여래의 유신 사리(遺身)를 거듭 공양하고자 한다. 이제 너희 귀신들은 한마음으로 힘을 모아 섬부주의 끝까지 수많은 사람[拘胝]으로 집을 채운 곳에는 부처님의 사리로써 탑을 세워야 한다. 그러니 나와 함께 마음을 다하여 이 일을 이룬다면 그 공은 너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뛰어난 복의 이익을 어찌 혼자 갖고자 하겠느냐? 따라서 각각 일을 한 후에 명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귀신들이 명을 받고서 자신들의 거처에 크게 불사를 일으켰다. 불사를 끝낸 뒤에 모두 와서 왕의 명을 청하였다. 무우왕은 이미 여덟 나라에서 세워진 솔도파들을 열고서 그 속에 들어있는 사리를 나누어 귀신들에게 부탁하였다.

그리고 나한에게 말하였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 곳에 동시에 사리를 안장하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바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일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나한이 말하였다.

"왕께서 귀신에게 명하신 기약한 날이 되면 해가 가려지는데, 마치 그 모습이 손바닥과 같을 것입니다. 이 때 사리를 안치하게 하면 될 것입니다."

왕이 이 뜻을 받들어서 귀신들에게 자세하게 알려주었다. 그 날이 되자 무우왕은 해가 비치는 광경을 자세하게 관찰하였다. 정오가 되자 나한이 신통력으로 손을 뻗쳐 해를 가렸다. 그러자 귀신들이 불사를 이룬 곳에서 모두 우러러본 뒤에 동시에 일을 마쳤다.

7) 실제로 팔만 사천 가지의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수를 나타내는 인도의 표현법이다.

 

솔도파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정사가 있는데, 그 속에 큰 돌이 있다. 여래께서 발로 밟으신 두 발자국은 또렷이 남아있는데 그 길이는 18, 너비는 6촌 남짓하다. 두 발자국에는 모두 바퀴무늬가 있으며 열 개의 발가락에는 모두 꽃무늬가 들어있다. 물고기 모양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으며 광명이 이따금 비춘다.

 

옛날 여래께서 적멸에 드시고자 북쪽 구시나성으로 가시면서 남쪽으로 마게타국을 돌아보셨는데, 이 돌을 밟고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이 발자국을 남긴다. 적멸을 앞두고 마게타를 돌아보는 것이니라. 백 년 뒤에 무우왕이라는 이가 있어서 세상을 다스리며 군림할 터인데 이 땅에 도읍을 세울 것이다. 그는 3보를 널리 보호하며 수많은 귀신을 부릴 것이다."

 

무우왕이 왕위를 계승한 뒤 도읍을 옮기고 마을을 축조하여 부처님께서 족적(足迹)을 남기신 바위를 에워쌌다. 그리고 궁성과 가까운 위치였으므로 언제나 가까이하며 공양을 올렸다. 후에 여러 나라의 왕들이 앞다투어 이 돌 을 가지고 가려고 하였는데, 비록 크지 않은 돌이었지만 사람들이 움직이지 못하였다. 근래에는 설상가왕이 불법을 파괴하면서 마침내 돌이 있는 곳까지 와서 성스러운 족적을 파괴하고자 구멍을 뚫었다. 그러나 돌은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고 무늬도 예전 그대로를 띠고 있었다. 이에 이 돌을 긍가하 에 던져버렸지만 이내 다시 본래의 곳으로 돌아왔다. 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이다.

 

부처님께서 족적을 남기신 정사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돌기둥이 있는데 높이는 30여 척이고, 그곳에 쓰여진 기록들은 이지러져서 내용이 많이 빠져있다. 대충 살펴보면 "무우왕의 믿음의 뿌리는 굳고 올곧아서 섬부주를 세 번이나 불··승에게 보시하였고, 세 번 온갖 진귀한 보배로 값을 치른 뒤에 다시 스스로 되샀다"라고 하는데 거기에서 말하고 있는 대략은 이와 같다.

 

옛 궁의 북쪽에 커다란 석실이 있는데 외부는 마치 숭산(崇山)과 같고 안의 너비는 수 길[]에 달한다. 이것은 무우왕이 출가한 동생을 위해 귀신을 시켜서 세운 것이다. 본래 무우왕에게는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생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마혜인타라(摩醯因陀羅)8)[당나라 말로는 대제(大帝)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귀족 출신이면서 건방지게 왕의 격식에 맞추어 옷을 입었고 호화스럽고 사치스러우며 방자하고 난폭하였기 때문에 많 은 백성들이 그에게 원한을 품었다. 국사를 보필하는 원로들과 신하들은 왕에게 나아가 이 일을 간하였다.

"왕의 교만한 동생이 위엄을 부리는 것이 매우 극심합니다. 무릇 평등하게 다스리면 곧 국가는 통치되고 사람들이 화합하면 곧 군주가 평안합니다. 이것은 예로부터 전해 내려온 밝은 가르침으로 그 유래는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부디 국법에 의거하여 법을 집행하여 주소서."

그러자 무우왕이 울면서 동생에게 말하였다.

"나는 선조의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모든 중생들을 보살피고 있다. 하물며 너는 나와 한 어머니에서 태어난 형제인데 어찌 은혜를 잊겠느냐? 일찍이 너를 바로 이끌지 않아서 이제 형법의 나락으로 너를 빠뜨리게 되었구나. 위로는 조상의 영혼에게 송구한 일이요, 아래로는 대중들의 뜻에 쫓기고 있다."

그러자 마혜인타라는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며 말하였다.

"제 스스로 근신하여 행동하지 않은 까닭에 감히 나라의 법을 어겼습니다. 부디 재생의 기회를 베풀어 앞으로 7일간 여유를 주소서."

이에 깊은 방에 안치시키고 엄중하게 그를 지키게 하고 맛좋고 진귀한 음식을 넣어주고 그를 받드는 일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하였다. 그를 지키는 사람은 큰소리로 왕의 동생에게 일러주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이제 6일이 남았습니다."

엿새째가 되자 마혜인타라는 깊은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거듭 온몸과 마음을 쏟아 마침내 과증(果證)을 얻었다. 그리하여 허공으로 날아올라 신령스러운 자취를 나타내며 이내 세속을 벗어나 멀리 깊은 계곡에 은거하였다. 그러자 무우왕이 몸소 그곳으로 찾아가서 말하였다.

"예전에는 나라의 법을 어겨서 엄한 형벌에 처하고자 하였는데, 이렇게 그 마음을 맑게 하여 허공으로 날아올라 성과(聖果)를 증득하였구나. 이제 죄 지은 것도 없어졌으니 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

동생이 말하였다.

"예전에는 애욕의 그물에 끌려 다니고 마음은 풍류와 여색을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이제 위태로운 성을 나오게 되었으니, 마음은 산의 계곡에서 즐겁게 노닐고 있습니다. 원하오니 인간 세상을 버리고 오래도록 골짜기에서 지내게 하여 주소서."

왕이 말하였다.

"마음의 근심을 가라앉히는 것이 어찌 반드시 깊은 바위에서만 가능하겠느냐? 나는 너의 뜻에 따라 너를 위해 네 거처를 지어주리라."

그리고 나서 여러 귀신들에게 명을 내렸다.

"나는 훗날 널리 진귀한 음식을 준비하고자 한다. 너희들은 모두 함께 내가 베푸는 잔치에 오도록 하라. 그 때 각자 음식을 받을 상과 자리로 삼을 큰 돌을 가지고 와야 한다."

명을 받은 여러 신들은 약속한 날이 되자 모두 몰려들었다. 대중들이 모인 뒤에 왕이 신들에게 말하였다.

"석좌(石座)를 종횡으로 쌓아올려라. 그러면 이 일로 말미암아 힘들이지 않고도 석실을 만들 수 있으리라."

이에 신들이 명을 받들었는데 하루도 되지 않아 일을 모두 마쳤다. 그러자 무우왕이 몸소 그곳으로 나아가 맞이하여 마혜인타라를 이 산 암자에 머물도록 청하였다.

8) 범어로는 mah ndra이며 남전(南傳)에서는 마힌다(mahinda)라고 하며 아육왕의 동생으로서 세일론섬에 불교를 전한 인물이다.

 

옛 궁의 북쪽, 지옥의 남쪽에는 커다란 석조(石槽)가 있다. 이것은 무우왕이 귀신들을 시켜서 만들어 놓은 그릇인데 승가 대중에게 밥을 보시할 때 음식을 넣었던 것이다.

 

옛 궁의 서남쪽에 작은 돌산이 있는데 바위 계곡 주위로 수십 개의 석실이 있다. 이것은 무우왕의 근호 등 여러 아라한들을 위하여 귀신들을 시켜서 지었다. 곁에는 오래된 대()가 있는데 돌을 쌓아서 만든 기단이 지금도 남아있다. 찰랑거리는 연못의 물은 드맑고 눈부시며 거울처럼 깨끗하다. 이웃하는 나라나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 물을 성수(聖水)로 여기고 있어서 만일 이 물을 마시거나 이 물에 몸을 씻으면 죄와 번뇌가 사라진다고 한다.

 

산의 서남쪽에 다섯 개의 솔도파가 있다. 기단은 이미 무너졌지만 남은 터는 여전히 높다. 멀리서 이것을 바라보면 우뚝 솟은 것이 마치 구릉과도 같다. 한 면()이 각각 수백 보()에 달하며 훗날의 사람은 이 위에 다시 작은 솔도파를 세웠다.

 

인도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옛날 무우왕이 84천 기의 솔도파를 세운 뒤에도 닷 되[]의 여래 사리가 남았으므로 따로 다섯 기의 솔도파를 세웠다. 그 모양은 다른 불솔도파에 비해 특이한데 신이한 기적이 간간이 일어나며 이 불솔도파는 여래의 오분법신(五分法身)9)을 상징한다그런데 믿음이 없는 무리들이 그것을 훔치려고 서로 의논하며 말하였다.

"옛날에 난타왕(難陀王)10)이 이 다섯 개의 보물 창고를 세워 7보를 저장 해두었다."

그 후 어떤 왕이 있었는데 그도 역시 돈독한 믿음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가 앞서 사람들이 의논하는 말을 듣고서 욕심이 극에 달하여 군사들을 일으켜서 몸소 그곳으로 가서 발굴하고자 하였다. 이 때 지진이 일어나 산이 기울고 구름이 뒤덮여 해를 가렸다. 그리고 솔도파 속에서 커다란 소리가 뇌성처럼 울렸다. 그러자 병졸들은 쓰러졌고 코끼리와 말들은 놀라서 달아나 버렸다. 이후부터 함부로 훔치려고 덤벼드는 일이 없어졌다.

9) 부처와 아라한이 갖추는 다섯 가지 공덕, 즉 계신(戒身정신(定身혜신(慧身해탈신(解脫身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이다.

10) 마우리야왕조 이전의 난타(Nanda)왕조의 군주라는 의미로 보인다. 난타왕조는 거대한 군사력과 그것을 유지하기에 족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대중들의 의견이 분분하였지만 아직 확실하게 단정을 내릴 수는 없다"고 말한다. 옛날에 기록된 것에 의거하면 그 진실한 점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옛 성의 동남쪽에 굴타아람마(屈居勿反吒阿濫摩)[당나라 말로는 계원(鷄園)이라고 한다]승가람11)이 있는데 이것도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무우왕이 처음 불법을 믿으면서 모든 법도에 맞추어 이 절을 건립하고 선()의 종자를 심기 위해 천 명의 승려를 불러 모으고 성속(聖俗)의 두 무리에게 네 가지 물건을 널리 공양하고 생활도구들을 두루 베풀었다고 한다. 기울고 훼손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기단의 터는 여전히 남아있다

11) 범어로는 kurku a- r ma이며 계원(鷄園계림원(鷄林園계림정사(鷄林精舍) 등으로 번역한다. 잡아함경23에 의하면 아육왕이 우파굴다(優波崛多)를 이 절로 맞아들여서 공양 예배하며 불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 절을 건립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또한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2 등의 상좌부 계통의 남전(南傳)에서는 아육승가람(阿育僧伽藍)에서 아육왕의 관정(灌頂) 즉위 16년째에 제3결집을 행하였다고 하지만 대중부 계통의 북전(北傳)에서는 이 결집을 전하고 있지 않으며 오늘날 역사적으로도 이 결집을 부정하고 있다.

 

절 옆에 커다란 솔도파가 있는데 이름은 아마락가(阿摩落伽)라고 하며 이것은 인도에서 나는 약과(藥果)의 이름이다. 무우왕이 병에 걸린 지 오래되어 이제 더 이상 목숨을 보존하기 어려움을 알고서 진귀한 재보를 널리 베풀어 복전을 닦고자 하였다. 그런데 정치를 맡은 권신들이 경계하면서 왕의 뜻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그 후 식사를 할 때 아마락과(阿摩落果)를 먹지 않고 남겨두고서 이것을 가지고 만지작거리다 보니 반쯤 물러 터졌다. 왕은 그 열매를 손에 쥐고 길게 탄식하면서 신하들에게 물었다.

"섬부주의 주인은 지금 누구인가?"

신하들이 답하였다.

"오직 대왕뿐이십니다."

왕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나는 이제 군주가 아니다. 오직 이 반만 남은 과일 정도를 마음대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아아, 세간의 부귀는 무너지기 쉬우니 마치 바람 앞의 등불보다도 더 위태롭다. 나의 지위가 온 세상의 위에 있고 높은 명성이 널리 알려져 있다 하여도 이렇게 목숨을 마칠 때가 되니 가난해지고 세력 있는 신하들의 핍박을 당하게 되었다. 천하는 나의 것이 아니고 이 반쪽의 열매만이 내게 남아있구나."

그리고 나서 곧 신하들에게 명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이 반쪽 열매를 저 계원(鷄園)으로 가지고 가서 여러 승가 대중에게 보시하여라. 그리고 '옛날에는 섬부주의 주인이었지만 지금은 반쪽 아마락의 왕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 대덕 스님들에게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리나이다. 부디 최후의 보시를 받아주십시오. 제가 가졌던 모든 것은 이미 잃어버렸고 오직 이 열매 반만을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의 가난함을 가엾게 여기시어 복의 종자를 널리 증장시켜 주소서'라고 말씀 올려라."

사신으로부터 이 말을 전해 듣자 스님들 가운데 상좌 스님이 말하였다.

"무우대왕은 과거에 널리 제도할 것을 기약하였지만 학질에 걸리게 되었다. 간악한 신하들은 제멋대로 명을 주무르고, 쌓아두었던 보배도 이제 더 이상 왕의 소유가 아니다. 그리하여 반만 남은 과일을 보시하였으니 왕의 명을 받들어 널리 승가 대중에게 보시하여라."

그리하여 왕이 말한 대로 말하며 곧바로 전사(典事)를 불러서 국을 끓일 때 그 속에 넣어 끓이도록 시켰다. 그리고 그 열매의 씨를 거두어서 솔도파를 세웠다. 왕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이로써 왕의 유언을 널리 세상에 알렸던 것이다.

 

아마락가 솔도파의 서북쪽으로 오래된 절이 있는데 그 속에 있는 솔도파는 건건치성(建揵稚聲)이라고 한다. 처음에 이 성 안에는 가람이 백여 곳 있었고 승도들은 온화하고 고요하였으며 학업이 맑고 높아 외도 학인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 후에 승도들이 차츰 세상을 떠나고 그 뒤를 잇는 후진들은 선배들의 수행을 잇지 못하였다. 반면에 외도들의 사자(師資:스승과 제자) 관계는 잘 이어졌고 수행도 잘 이루어졌다. 이에 외도들 수천 수만 명이 승방으로 몰려가서 큰 소리로 말하였다.

"건치(揵稚)를 두드려서 학인들을 불러 모으시오."

그러나 승방에는 어리석은 자들이 무리를 이루어 함께 살고 있었으므로 외도의 말을 듣고 그릇되게 건치를 두드리는 자가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었다.

"우열을 가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외도들의 스승들은 재주가 뛰어나고 학업도 정통해 있었다. 반면 승려들은 비록 무리를 이루고 있었으나 그들의 말과 논리는 볼품없고 천박하였다. 그러자 외도들이 말하였다.

"우리의 이론이 뛰어나다. 그러니 지금부터 모든 승가람에서는 대중들을 불러모을 때 건치를 두드려서는 안 된다."

왕은 앞의 논변규칙에 의거하여 그들의 청을 허락하였다. 승도들은 수치를 당하고 모욕을 감수하면서 물러났다. 그리하여 12년 동안 건치를 울리지 않았다.

그러다 당시 남인도 나가알랄수나(那伽閼剌樹那)보살[당나라 말로는 용맹(龍猛)이라고 하고 구역에서는 용수(龍樹)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12)이 있었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이름을 날렸으며 자라서도 고명(高名)을 널리 날렸다. 애욕을 떨치고 출가하여 수학하다가 미묘한 이치를 깊이 논구하여 초지(初地)에 올랐다. 그에게 큰 제자가 있었는데 이름은 제바(提婆)라고 하였다. 이 사람은 지혜롭고 명민하였으며 기지가 있고 총명하여 그 사물에 대한 깨달음이 뛰어났다. 그가 자신의 스승에게 말하였다.

"파타리성의 여러 학인들은 외도들과의 논쟁에서 패하여 건치를 두드리지 못한 지 1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제 제가 감히 삿된 견해의 산을 쳐부수고 정법의 횃불을 밝히고자 합니다."

그러자 용맹이 말하였다.

"파타리성의 외도들은 박학하니 네가 그들을 상대할 수는 없다. 그러니 내가 가겠다."

제바가 말하였다.

"썩은 풀을 베어내는데 어찌 산을 기울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가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 이학(異學)들을 몰아내겠습니다. 이제 스승께서 외도의 논리를 내세워 보신다면 제가 한 구절을 한 문장마다 낱낱이 논파하고 분석하여 그 우열을 가린 후에 그곳으로 가겠습니다."

용맹이 이에 외도들의 뜻을 내세우자 제바는 그 이치를 차례로 논파하였다. 그러기를 7일이 지나자 용맹은 더 내세울 외도의 이론의 근본을 잃어버렸으며 이에 감탄하며 말하였다.

"그릇된 말은 쉽게 잃게 되며, 삿된 이치는 버티기 어렵도다. 너는 그곳으로 가라. 반드시 그들을 논파할 것이다."

제바보살은 일찍부터 고명(高名)을 날렸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파타리성의 외도들도 그에 관한 명성은 익히 들어왔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왕에게 몰려가서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옛날에 굽어살피시어 사문들에게 건치를 울리지 못하게 막으셨습니다. 부디 다시 명을 내리셔서 모든 문지기들에게 주변 국가의 낯선 승려를 성 안으로 들이지 말도록 하여주소서. 그들이 서로 무리를 지어서 앞서 제정하셨던 법을 함부로 고칠까 두렵습니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허락하여 더욱 엄중하게 수비를 보도록 하였다. 제바가 도착하였으나 성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왕이 영을 내렸다는 소문을 듣고 다시 옷을 바꿔 입었다. 승가지(僧加胝)를 개어서 풀로 덮어 가리고서 어깨에 짊어진 뒤에 아랫도리를 걷고서 재빨리 뛰어 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성 안에 도착한 뒤에 풀을 털어 버리고 옷을 입었다. 가람에 도착한 그는 잠시 숨을 돌리고자 하였으나 가람에는 그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으므로 묵을 방을 얻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건치가 걸려 있는 대() 위에서 묵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문득 건치가 크게 울렸다. 승가 대중들이 이 소리를 듣고 살펴보니 낯선 비구가 있었다. 다른 승가람도 이 소리에 답하여 건치를 두드리니 그 소리가 메아리쳤다. 왕이 이 소리를 듣고 조사하고 물어보았지만 가장 먼저 소리를 울린 사람을 찾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가람에 도착하여 보니 그곳에는 제바가 있었다. 제바가 말하였다.

"무릇 건치의 역할은 그것을 울려서 대중들을 모으게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나 있어도 사용하지 않는다면 걸어둔들 무엇하겠습니까?"

왕의 사신이 이에 답하였다.

"예전에 승가 대중들이 논쟁에서 패배한 뒤로 법으로 정하여 건치를 울리지 못하게 한 지 이미 12년이나 지났습니다."

제바가 말하였다.

"그랬었군요. 내가 오늘 다시 법고(法鼓)를 울리겠습니다."

사신이 이 일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낯선 사문이 예전의 치욕을 설욕하고자 합니다."

왕은 이에 학인들을 불러 모아서 다음과 같이 규정을 내세웠다.

"논쟁에서 자신의 종지를 잃게 되면 목숨을 걸고 그 죄 값을 치러야 한다."

이에 외도들이 앞다투어 논쟁에 가서 자신들의 온갖 논리를 늘어놓으며 각자 사변(辭辯)의 창을 번득이자 제바보살은 곧바로 논좌(論座)에 올라 그들의 논리의 앞머리만을 듣고도 그들의 이치에 따라 이것을 논파하였다. 그리하여 12일이 채 지나기도 전에 모든 외도들을 물리쳤다. 국왕과 대신들 모두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신령스러운 솔도파를 세워서 그 지극한 덕을 널리 알렸다.

12) 범어로는 n ga-arjuna이며 23세기에 생존하였던 남인도 바라문 종족으로 대승불교를 인도에 성행시킨 인물이다. 인도에서는 중관파(中觀派)의 조사로 여겨지고 있으며 또한 부법장(付法藏) 13조이다.

 

건치를 두드렸던 솔도파의 북쪽에 오래된 기단이 있다. 옛날 귀변(鬼辯)바라문이 살던 곳이다. 처음에 이 성 안에 살고 있던 바라문이 깊은 숲 속에 집을 짓고 세속의 사람들과 교유하지 않으며 지냈다. 그는 귀신을 모시고 복을 구하면서 도깨비들과 의지하며 살았다. 사람들과 드높은 논의와 빼어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훌륭한 말이 메아리에 응하여 입에서 나왔다. 이것에 대해 논란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장막을 드리우고 상대를 대하였다. 기존의 학문이 높고 비범한 재주를 지닌 자들도 그보다 더 뛰어날 수가 없었으며 따라서 세속에서는 이 바라문을 한결같이 성인인양 우러러보았다.

 

한편 당시에는 아습박구사(阿濕縛窶沙)13)[당나라 말로는 마명(馬鳴)이라고 한다]보살이 있었는데, 그의 지혜로움은 만물에 두루 정통하였고 그의 도()3승에 고루 퍼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이 바라문의 학업은 스승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고 그의 기예는 뿌리도 없는 것이다. 깊고 한적한 곳에 머물면서도 홀로 높은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귀신들과 서로 의지하거나 요괴들이 도와주지 않고서야 이와 같은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무릇 그런 말솜씨는 귀신의 전수를 받은 것이어서 사람을 상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사설(辭說)이라면 한 번은 들을 수 있지만 반복해서는 능히 다시 말하지 못한다. 나는 이제 그에게로 가서 그의 행동거지를 관찰하고 자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암자에 도착하여 말하였다.

"그대의 성스러운 덕을 우러르고 흠모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부디 휘장을 걷어 올려주소서. 오래 전부터 품어왔던 저의 뜻을 감히 아뢰고 싶습니다."

그러나 바라문은 여전히 오만을 부리며 휘장을 드리운 채 그를 대하였을 뿐 결코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마명은 마음속으로 귀신이나 도깨비들이 대단히 거만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마친 뒤에 물러 나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이제 알았으니 반드시 그를 논파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왕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부디 저 거사와 더불어 논전을 벌일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그러자 왕이 이 말을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만일 3()을 증득하지 못하고 6()을 얻지 못한 자라면 어찌 그를 상대해 논쟁을 벌일 수 있겠느냐?"

그리고 나서 가마를 준비하도록 명하고 몸소 그곳으로 가서 논쟁을 벌이는 것을 자세하게 보았다. 이 때 마명은 3()의 미묘한 말을 논하고 5명대의(明大義)를 설하였는데 그의 미묘한 말솜씨는 종횡으로 거침없었고 고론(高論)은 맑고 이치가 깊었다. 그런데 그 바라문이 자신의 논리를 펼치며 말을 끝내자 마명이 다시 말하였다.

"그대는 내 말의 본지를 잘못 받아들이고 있소. 다시 한번 그것을 말해주시오."

그러자 바라문은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마명은 질책하며 말하였다.

"어찌하여 나의 논란에 대해 해명하지 않는가? 그대가 섬기는 귀신과 도깨비들이 그대에게 어서 빨리 대답을 내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나서 재빨리 휘장을 걷어올리고 그 괴이한 자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바라문은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말하였다.

"멈추시오, 멈추시오."

마명이 물러나면서 말하였다.

"이 자의 명성은 이제부터 땅에 떨어질 것이다. 거짓 명성은 오래가지 못한다더니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왕이 말하였다.

"무릇 높은 덕을 지니지 않고서야 누가 삿된 가르침을 감별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알아보는 철인은 일찍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나라에는 항상된 법도가 있으니 모름지기 그 높은 덕을 표창해야 할 것이다."

13) 범어로는 a vagho a이며 마명(馬鳴) 또는 공승(功勝)이라고도 불린다. 가니색가왕과 동시대인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불멸 후 약 6백 년, 2세기 무렵의 사람으로 생각된다. 사위국의 keta() 사람이며 처음에는 외도와 교유하며 논의를 하였지만 협 존자에게 논파당하자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두루 3장을 익혀서 대중의 공격을 받았다.

 

성의 서남쪽으로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가람의 유적지가 있는데 그 곁에는 솔도파가 있다. 신비로운 빛이 이따금 비치고 상서로운 징후들이 간간이 일어났다. 그래서 4방의 모든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와 기도하고 소원을 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곳은 바로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이다.

 

옛 가람의 서남쪽으로 백여 리를 가다 보면 제라택가(鞮羅擇迦)가람14) 이른다. 뜰을 갖춘 건물이 4채이며. 관각(觀閣)3층이다. 높은 누대는 몇 인()이나 되고, 몇 겹으로 된 문은 환히 열려있다. 빈비사라왕의 먼 후대 자손이 세운 곳이다. 뛰어난 재주와 빼어난 덕을 지닌 이를 두루 불러 모으자 이역(異域)의 학인들과 먼 곳에 사는 인재들이 함께 무리를 지어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몰려들었다. 승도들은 천여 명을 헤아리는데, 그들은 모두 대승을 익히고 있다. 중문(中門)에서 길에 이르는 곳 사이에 정사가 셋 있는데 위로는 윤상(輪相)을 설치해두고 풍경은 허공에 매달려 있으며 아래로는 몇 층의 기단을 세우고 난간이 둘레에 줄지어 있다. 문과 창문, 용마루와 기둥, 울타리, 계단은 모두 금과 구리를 새겨서 화려한 장식을 섞어 넣었다. 가운데 정사에는 부처님의 입상(立像)이 있는데 높이는 3()이다. 왼쪽에는 다라(多羅)보살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관자재(觀自在)보살상이 있다. 이 세 개의 불보살상은 모두 유석으로 주조되어 있는데, 위엄이 있고 신비 로우며 엄숙한 느낌이 들고 눈에 보이지 않는 가호가 멀리까지 미친다. 정사 속에는 각각 사리가 한 되 들어 있는데 신령스러운 광채가 이따금 비치며 기적이 간간이 일어난다.15)

14) 범어로는 tel d aka이며 나란타에서 서쪽으로 21마일 떨어진, 현재 Till ra라 불리는 땅이 이곳에 해당하며 이 지명도 이 절의 이름이 변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15) 자은전3·4권에 의하면 현장은 가고 오는 길에 모두 이 절에 들렀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2개월간 머물면서 반야발타라(Prajna-bhadra)에게 나아가 유부(有部)3장과 성명(聲明인명(因明) 등을 배웠다고 한다.

 

제라택가가람의 서남쪽으로 90여 리를 가다 보면 거대한 산16)에 도착한다. 바라바르동굴-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암석이 늘어선 것이 마치 신선들이 기거한 곳과 같다. 독사와 포악한 용이 덤불 속 굴에 살고 있으며 사납고 거친 금수들이 그 숲 속에서 둥지를 틀고 있다.

16) 이 산은 붓다가야의 북쪽 1516마일의 Bar bar Hill(범어로는 pravaragiri)로 추정되고 있다. 이 산에는 굴원(窟院)이 있고 아육왕의 비문이 발견되고 있다.

 

산 정상에는 커다란 반석이 있는데 그 위에 솔도파가 세워져 있다. 그 솔도파의 높이는 10여 척에 달하는데 이곳은 부처님께서 선정에 드신 곳이다. 옛날 여래께서 아래 세상으로 내려오셔서 이곳에 머무셨는데 이 반석에 앉으셔서 멸진정(滅盡定)에 드셨다. 그리하여 하룻밤이 지나자 모든 천신들과 신선들과 성현들이 여래를 공양하여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고 하늘의 꽃을 비처럼 뿌렸다 그리고 여래께서 선정에서 나오시자 모든 천신들은 감동하고 이를 기려서 금은 보화로 솔도파를 세웠다.

 

부처님께서 떠나시고 오랜 세월이 지나자 보석은 변하여 돌이 되었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곳에 온 사람들이 없으며, 높은 산에 올라 아득하게 바라보면 곧 이류(異類)들이 보인다. 구렁이나 맹수들이 무리를 지어서 오른쪽으로 돌고 하늘과 신선들과 성현들이 서로서로 이 솔도파를 찬미하고 예경한다.

산의 동쪽 구릉에 솔도파가 있는데 옛날 여래께서 마게타국을 돌아보시기 위해 이곳에 멈춰 서서 밟으신 곳이다.

 

산의 서북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산기슭에 가람이 있는데 산봉우리를 등지고 기초를 높이 세웠고 벼랑을 깎아 갈라서 전각들을 우뚝 세웠다. 승도들은 50여 명이 살고 있으며 이들은 모두 대승법의 가르침을 배우고 있다. 이곳은 구나말저(瞿那末底)17)[당나라 말로는 덕혜(德慧)이다]보살이 외도를 항복시킨 곳이다. 본래 이 산 속에는 마답파(摩沓婆)라는 외도가 살고 있었는데 승거(僧佉)의 법18)을 섬기면서 도를 닦고 있었다. 그의 학문은 불법과 외도에 두루 통하였고 공유(空有)의 이치를 환히 꿰뚫었다. 그의 명성은 선대의 사람들보다 높았고 그의 덕은 당시 사람들에게 칭송받고 있었다. 군왕도 그를 극진하게 공경하면서 그 를 가리켜서 나라의 보배라고 말하였다. 신하들과 백성들도 높이 우러르면서 모두들 집안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주변 국가의 학인들도 그의 학풍을 이어받고 덕을 우러르면서 그를 선배처럼 따랐으니 실로 그는 박학다식하였다. 나라에서는 그에게 두 성()을 식읍(食邑)으로 내려주었고 그는 나라로부터 받은 토지를 두루 다니며 지냈다.

17) 범어로는 gu a-mati이며 구나말저(窶拏末底구나마저(求那摩底)로도 음사한다. 남인도인이며 유식 10대 논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후에 나란타사에 살면서 그 높은 명성을 날렸다.

 

당시 남인도의 덕혜보살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슬기로웠으며 일찍이 이치를 꿰뚫는 예리한 눈을 지녀 학업은 3장에 정통하였고 4()의 이치를 환히 이해하였다. 그는 마답파의 논리가 심원한 경지에 도달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예기(銳氣)를 꺾고 싶어했다. 그리하여 문하의 사람에게 명하여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삼가 여쭙나니 마답파께서는 평안히 잘 지내시는지요? 이제 귀하께서는 마땅히 피로함을 잊고 옛적에 배웠던 학문을 정성을 다해 익히시기를 바라옵니다. 3년이 지난 후에 제가 그대의 높은 명성을 꺾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다음해와 그 다음해에 언제나 심부름꾼을 보내어 알렸으며 마침내 3년이 되어 출발하려 할 때 다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기한이 다 되었습니다. 그 동안의 학업은 어떠하십니까? 내가 이제 그곳에 가려고 하니 그대에게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마답파는 매우 당황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문하의 사람들과 자기 영지의 사람들에게 당부하여 지금부터 사문 이도(異道)를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명령을 널리 알려서 실수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를 하였다.

마침내 덕혜보살이 지팡이를 짚고 마답파의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약속을 지키느라 머물 곳을 내주지 않았다. 모든 바라문들이 덕혜보살을 욕하였다.

"머리를 자르고 이상한 옷을 입었으니 이 무슨 괴이한 사람이냐?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덕혜보살은 이교도를 꺾기 위하여 그 마을에 머물기를 바랐으므로 자비로운 마음과 겸손한 말씨로 그들에게 인사하며 말하였다.

"그대들은 세제(世諦)19)의 정행(淨行:수행자)이고 나는 또한 승의제(勝義諦)20)의 정행입니다. 정행인 점에서 서로 같은데 어찌하여 거부한단 말입니까?"

그러나 바라문들은 상대하지 않고 오직 그를 내쫓으려고 하였다. 그리하 여 보살은 마침내 마을에서 쫓겨나 커다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 속에는 맹수들이 무리지어 포악한 짓을 일삼고 있었다. 이 때 믿음을 지닌 자가 덕혜보살이 맹수들의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횃불을 들고 지팡이를 짚고서 보살을 찾아와 말하였다.

"남인도에 덕혜보살이라는 분이 계신데, 그분의 명성에 관해서는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소문이 자자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찾아와서 논쟁을 벌이고자 하시니, 그런 까닭에 이 마을의 주인은 자신의 명성이 실추될 것이 두려워 사문을 머물게 하지 못하도록 거듭 엄중하게 당부하셨습니다. 짐승들의 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도와드리려고 이렇게 왔으니 어서 가십시오. 그리고 안심하시고 다른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덕혜가 말하였다.

"신심이 있는 그대에게 진실을 알리겠으니 바로 내가 덕혜요."

그 사람은 이 말을 듣자 더욱 깊이 공경심을 내면서 덕혜에게 말하였다.

"참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다면 어서 빨리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곧 깊은 숲을 빠져 나와 툭 트인 풀밭에 이르러서야 숨을 돌렸다. 재가신자가 불을 피우고 활을 들고서 보살의 주위를 돌아다녔다. 밤이 다 지나자 덕혜에게 말하였다.

"이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이 소식을 알고 쫓아와서 해를 입힐까 두렵습니다."

덕혜가 고마워하며 말하였다.

"그대의 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이에 그대로 길을 떠나 왕궁에 도착하였다. 보살은 문지기에게 말하였다.

"지금 사문이 먼 곳에서 와 있으니 부디 왕께서는 마답파와 논쟁을 벌일 것을 허락해주소서."

왕이 이 말을 전해 듣고 놀라서 말하였다.

"이 무슨 방자한 사람인가?"

그리하여 사신에게 명하여 마답파의 처소로 가서 왕의 뜻을 전하게 하였다.

"낯선 사문이 와서 그대와 변론하기를 청하고 있소. 이미 논의를 벌일 곳 을 청소하고 멀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렸소. 그대가 오기를 목을 늘이고 기다리고 있으니 부디 이곳으로 왕림해주기를 바라오."

마답파가 왕의 사신에게 물었다.

"혹시 남인도의 덕혜논사가 아니던가?"

사신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마답파의 마음은 매우 어지러워졌다. 그는 더 이상 사양하기가 어려웠으므로 결국 논쟁을 벌일 장소로 나아갔다. 그 자리에는 국왕과 대신, 백성들이나 호족들이 모두 다 몰려와 그들의 불꽃 튀길 논쟁을 듣고자 하였다. 덕혜가 먼저 자신의 종지를 내세우기 시작하였는데 해가 저물도록 그의 논리는 이어졌다. 이어서 마답파가 자신은 나이 들고 지혜도 어두워져 민첩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까닭에 돌아가서 고요히 사유한 뒤에 와서 그의 의문에 해답을 주겠노라고 청하였다. 매번 돌아가서 생각해보고 답하겠다고 말하였지만 다음날 아침이 되어 논좌(論座)에 오르면 언제나 별다른 논리를 펴지 못하였다. 그렇게 엿새째가 되자 그는 마침내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그는 숨을 거두면서 아내에게 명하였다.

"그대는 재주가 뛰어나니 내가 받은 치욕을 잊어서는 안 되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마답파는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가 죽은 사실을 숨기고 상을 치르지 않았다. 도리어 화려한 옷을 입고서 논쟁을 벌이는 곳에 왔다. 이것을 본 대중들은 모두 다 소란을 피우며 떠들썩하게 말하였다.

"마답파는 제 스스로 높은 재주를 자랑하더니 덕혜에게 치욕을 당하고서 아내를 보내어 우열을 가리게 하는구나."

덕혜보살이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

"그대를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자를 나는 이미 제압하였소."

마답파의 아내는 이 말을 듣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을 알고서 물러났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어떤 비밀스러운 말을 하였기에 마답파의 아내가 묵묵부답이오?"

덕혜가 말하였다.

"애석하게도 마답파는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가 와서 저와 논쟁을 벌이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왕이 물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주겠소?"

그러자 그가 답하였다.

"그의 부인이 왔는데 그녀의 얼굴에는 상을 당한 기색이 역력하고 음성에는 원한의 기운을 띠었습니다. 이로써 마답파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충분히 그대를 제압할 수 있는 자'란 바로 그의 남편을 가리킨 말이었습니다.

왕이 사신에게 명하여 가서 보게 하니 과연 덕혜의 말과 같았다. 이에 왕이 인사를 하며 말하였다.

"부처님의 법은 깊고도 미묘하며 빼어난 현자(賢者)들이 그 뒤를 잇고 있습니다. 무위(無爲)로써 도()를 지키고 중생은 그 교화에 몸을 적셨습니다. 이전의 국법에 의거하면 이런 분의 덕을 기리는 것이 상례입니다."

덕혜가 말하였다.

"우매한 저는 도를 체득하여 뜻을 굽히지 않으며 만족하면서 만물을 평등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차 중생을 인도하고 부처님의 법을 널리 펼치고자 하여 먼저 오만한 자를 꺾었던 것입니다. 방편으로 거두어 교화한다는 것은 바로 지금의 일을 말합니다. 원하옵건대 대왕이시여, 마답파의 읍호와 자손들을 영원토록 승가람의 사람에게 충당하여 주십시오. 그리하면 후세에까지 그 훈계가 드리워지며 아름다운 일이 영원히 이어질 것입니다. 다만 저를 보호하여 주었던 그 재가신자만큼은 천 년의 세월 동안 복을 누리게 해주시며 그에게 음식과 일용품들을 승려들과 똑같이 제공해 주십시오. 이로써 사람들에게 깨끗한 믿음을 권하며 또한 그로써 두터운 덕을 기리고자 합니다."

이에 이 가람을 세워서 보살의 훌륭한 업적을 기렸다. 처음 마답파가 논쟁에서 패한 후 십수 명의 정행(淨行)들이 난을 피하여 이웃 나라로 도망쳤다. 그리하여 여러 외도들에게 이런 치욕스러운 일을 알리고 빼어난 인재들을 불러 모아서 앞서 당하였던 치욕을 갚고자 몰려왔다.

한편 왕은 이미 덕혜를 극진하게 공경하고 있었으므로 직접 덕혜의 처소로 와서 청하였다.

"지금 외도들이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리들을 결성하여 떼지어 몰려와서 감히 논고(論鼓)를 울리고 있습니다. 원하오니 대사께서는 여러 이교도들을 물리쳐 주소서."

덕혜가 말하였다.

"논쟁하려는 자를 불러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외도 학인들은 기뻐하며 서로 위로하면서 말하였다.

"우리는 오늘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리하여 외도들이 뜻과 이치를 널리 펼치고 나자 덕혜보살이 말하였다.

"지금 외도들은 난을 피하여 멀리 달아났다. 왕이 앞서 제정한 법률에 의하면 이들은 모두가 천인(賤人)들이다. 그런데 내가 지금 어떻게 그런 자들과 논쟁할 수 있겠는가?"

덕혜에게는 자리를 짊어지고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그는 평소 덕혜의 여러 논의를 듣고서 자못 그 미묘한 논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는데, 덕혜를 곁에서 모시고 서서 온갖 난해한 논쟁들을 두루 들었기 때문에 덕혜가 논석(論席)을 두드리면서 말하였다.

"자리에 앉아서 네가 논해보아라."

대중들은 모두 다 덕혜의 심상치 않은 명령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리를 짊어지고 다니던 아이가 곧바로 논란을 시작하자 깊은 이치가 용솟음쳤으며 맑은 말솜씨가 널리 메아리쳤다. 세 번 반복한 후에 외도들은 자신의 본지를 잃고 말았다. 그들은 거듭 그 예기가 꺾였고 다시금 날개가 부러진 꼴이었다. 그리하여 논쟁에서 패배한 이래 이곳은 가람의 읍호가 되었다.

18) 범어로는 s khya이며 승기야(僧企野)라고도 하며 상키야학파를 말한다.

19) 진제(眞諦)의 반대어이다. 속제(俗諦세속제(世俗諦복속제(覆俗諦)라고도 한다

20) 진제(眞諦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도 한다. 승의란 뛰어난 지혜의 대경(對鏡), 제는 변함이 없는 진리, 진실한 것, 있는 그대로의 진상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덕혜의 가람에서 서남쪽으로 20여 리를 가다 보면 외딴 산에 이른다. 이곳에 가람이 있는데, 시라발타라(尸羅跋陀羅)[당나라 말로는 계현(戒賢)이라고 한다]논사21)가 논쟁에서 이긴 뒤에 마을의 보시를 받아서 세운 곳이다. 높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솔도파 같으며 그 속에 부처님의 사리를 안치해두고 있다.

21) 범어로는 ila-bhadra이며 자은전에 의하면 현장이 인도를 방문하였을 때 이 논사는 나란타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106세의 고령이었으며 대중들이 정법장(正法藏)이라고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장은 이 논사로부터 나란타에서 유가론을 수학하였는데 현장이 인도를 떠나자 곧 입적하였다.

 

논사는 삼마달타국(三摩呾吒國)의 왕족으로 바라문에 속한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높은 지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인도 여러 나라를 다니며 지혜로운 이들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이 나라의 나란타승가람에 이르러 호법보살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로부터 법을 듣고 믿음을 일으켰으며 깨달음을 열게 되자 간절히 청하여 출가를 하게 되었다. 그 후 궁극의 이치와 해탈에 이르는 길을 물었으며 마침내 지극한 이치를 궁구하고 또한 미묘한 언사를 두 루 탐구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은 당시에 널리 퍼졌고 이역만리에까지 높이 드날렸다.

 

한편, 당시 남인도에는 어떤 외도가 살고 있었는데 그는 심오하고도 난해한 이치를 구하여 깊이 파고들어 그윽하고 미세한 경지에 통달하여 있었다. 그런 외도가 호법의 높은 명성을 듣자 오만한 마음과 질투심이 일었다. 그리하여 산천이 가로막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찾아가 북을 두드리면서 논쟁 벌이기를 청하였다.

외도가 말하였다.

"나는 남인도 사람입니다. 왕의 나라에 위대한 논사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비록 내가 영리하지 못하여도 그와 더불어 자세하게 논의를 벌이고 싶습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논사가 있으니, 그대의 말과 같다."

그리고 나서 사신에게 명하여 호법을 청하도록 하였다.

"남인도의 외도가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와서 논쟁을 벌일 것을 청하고 있으니 원하옵건대 토론장으로 발길을 옮겨주소서."

호법이 이 말을 듣고 채비를 차리고 그곳으로 가려고 하였다.

이 때 제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계현이 앞으로 나아가 호법에게 여쭈었다.

"어디를 그리 급히 가시려 하십니까?"

호법이 말하였다.

"지혜의 태양이 그 빛을 감춘 이래로 법을 전하는 등불의 빛이 약해지자 외도들이 개미떼처럼 몰려들고 이학(異學)들이 벌떼처럼 달려들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제 그들의 논리를 깨부수고자 한다."

계현이 말하였다.

"삼가 지금껏 선생님의 강론을 들어왔으니 제가 이교도들을 논파해 보고자 합니다."

호법은 그의 인물됨을 알고 있었으므로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 때 계현의 나이가 겨우 30세였으므로 대중은 그가 나이 어리다고 가볍게 보아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우려하였다. 그러자 호법은 대중들이 마음속으로 계현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을 알고서 이것을 해소하고자 말하였다.

"덕이 높고 밝은 것을 존중한다면 나이를 논하지 말라. 이제 그를 보건대 틀림없이 외도들을 논파할 수 있을 것이다."

논쟁을 벌일 날이 다가오자 멀고 가까운 곳에 사는 남녀노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빽빽하게 몰려들었다. 외도들은 자신들의 대강의 논지를 널리 천명하고 그 깊고 세밀한 이치를 자세히 설명하였다. 계현은 논리에 따라서 진실을 규명하였는데 깊고 그윽한 경계를 다하였다. 외도들은 말이 막히자 수치심을 무릅쓰고 물러났다. 왕은 이로써 그의 덕에 상응하는 대가로 이 읍성(邑城)을 내려주었다 논사가 그것을 사양하며 말하였다.

"물든 옷을 입은 선비는 지족(知足)을 행하며 청정하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데 마을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왕이 말하였다.

"법왕(法王)께서 자취를 감춘 뒤 지혜의 배도 뒤따라 침몰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덕을 널리 드러내어 표창하지 않으면 후학들을 격려할 수 없습니다. 정법을 널리 퍼뜨리기 위하여 부디 가엾게 여기셔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논사가 거절하다가 하는 수없이 이 마을을 받았다. 그리하여 곧 가람을 세웠는데 모든 법도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게 하였다. 그는 마을에서 걷는 세금을 가람에 모두 바쳐 법식에 맞게 공양을 올렸다.

 

계현의 가람에서 서남쪽으로 4050리를 가다 보면 니련선하를 건너서 가야(伽耶城)22)에 이르게 된다. 성은 몹시 험하고도 견고하며 살고 있는 사람도 적다. 바라문들만이 천여 가구 살고 있는데 이들은 대선인(大仙人)의 자손들로서, 왕은 그들을 신하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들도 왕에게 상당한 존경을 표할 뿐이다. 성의 북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맑은 샘[淸泉]이 있다. 인도에서는 이곳을 성수(聖水)라고 부른다. 이 물 을 마시거나 몸을 씻으면 죄와 번뇌가 소멸된다고 한다.

22) 오늘날에는 가야성을 브라흐마가야(Brahma-Gay )라고 부르며 붓다가야(Buddha- Gay )와 구분하고 있다. 중허마하제경(衆許摩訶帝經)6에 의하면, 이 지명의 유래는 대선인(大仙人) 가야(伽耶)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마하바라타와 여러 Pur a에서는 '성스러운 도시'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성지이다.

 

성의 서남쪽으로 56리를 가면 가야산에 이른다. 계곡이 깊고 그윽하여 산봉우리와 바위가 험하게 솟아있다. 인도에서는 이 산을 일컬어 영산(靈山)이라고 부른다. 예로부터 군주가 왕위를 계승하여 천하를 통치하고 덕화(德化)가 먼 곳의 사람들에게까지 두루 미치며 전대의 왕들보다 덕을 더 높이기 위해 이 산에 올라 봉사(封祀)23)하며 자신들이 이룩한 공업을 고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산 정상에는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는데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하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신령스러운 기운이 눈에 보이지 않게 흐르고 신비한 빛이 이따금 비추는데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서 보운경(寶雲經)등을 설하셨다.

23) 높은 꼭대기에 흙을 쌓아 단을 만들어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으로 천자(天子)가 즉위할 때에 행한다.

 

가야산의 동남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가섭파가 태어난 마을이다. 그 남쪽에 솔도파 두 기가 있는데 이것은 가야가섭파(伽耶迦葉波)와 날지가섭파(捺地迦葉波)[구역에서는 나제가섭(那提迦葉)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 그 외의 모든 가섭(迦葉)에 파()라는 글자가 없는데 이것은 생략된 것이다]가 불을 섬기던 곳이다. 가야가섭파가 불을 섬기던 곳에서 동쪽으로 큰 강을 건너면 발라급보리산(鉢羅笈菩提山)24)[당나라 말로는 전정각산(前 正覺山)이라고 한다. 여래께서 장차 정각(正覺)을 증득하시려 할 때 먼저 이 산에 올랐으므로 전정각(前正覺)이라고 한다]에 도착한다.

24) 범어로는 pr g-bodhi이며 붓다가야의 동북쪽 약 3마일 떨어진 지점인 니련선하의 동안(東岸)에 위치한 Mora산이라고 한다.

 

여래께서 정진하시며 6년 동안 깨달음을 구하셨지만 정각을 이루지 못하시자 그 뒤로 고행을 버리고 우유죽을 받아서 마셨다. 그리고 나서 동북쪽으로부터 올라가서 이 산을 두루 관찰하니 고요하고 그윽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하여 정각을 증득할 자리를 찾기 위해 동북쪽 언덕으로부터 산을 올라 정상에 이르자 대지가 진동하고 산도 기울고 흔들렸다

산신이 놀라고 당황하여 보살에게 고하였다.

"이 산은 정각을 이룰 만한 복 있는 땅이 아닙니다. 만일 이곳에 머물면서 금강정(金剛定)에 드신다면 땅이 진동하고 함몰하며 산도 기울어지고 말 것입니다."

보살이 서남쪽으로 내려가 산 중턱의 낭떠러지에서 바위를 등지고 깊은 계곡을 바라보니 거대한 석실이 있었다. 보살이 이곳에 머물면서 가부좌하시니 땅이 다시 진동하고 산이 기울어졌다.

이 때 정거천(淨居天)이 공중에서 소리 높여 말하였다.

"이곳은 여래께서 정각을 이루실 곳이 못 됩니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415리를 가시면 고행처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비발라수(卑鉢羅樹)가 있는데, 그 아래에 금강좌(金剛座)가 있습니다.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한결같이 그 자리에서 정각을 이루셨습니다. 부디 그곳으로 나아가소서."

보살이 막 일어나려 하자 석실에 있던 용이 말하였다.

"이 방은 청정하고 훌륭해서 성인의 경지를 증득할 만합니다. 부디 자비를 베푸시어 이곳을 버리지 말아주소서."

보살은 이미 그곳이 정각을 얻을 곳이 아님을 아셨으나 용의 마음을 헤아려 그림자를 남겨두시고 떠나가셨다[그림자는 옛날에는 남아있어서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간에 누구라도 그것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어쩌다 볼 수 있을 뿐이다]. 보살은 여러 천신들이 앞에서 인도하는 가운데 보리수로 나아가셨다.

 

무우왕은 왕위에 오르자 보살이 산을 오르내린 유적지에는 모두 표식을 세워 두고서 솔도파를 건립하였다. 솔도파의 크기는 비록 달랐지만 신령스러운 감응에는 차이가 없었다. 어떤 때는 하늘의 꽃이 공중에서 비처럼 쏟아졌고 어떤 때는 광명이 깊은 계곡을 비추었다. 해마다 안거를 마치는 날에는 4방에서 출가인과 재가인이 이곳에 올라 공양을 올렸으며 이틀 밤을 묵은 뒤에 돌아갔다.

 

전정각산의 서남쪽으로 1415리를 가다 보면 보리수에 이른다. 둘레는 벽돌을 쌓아서 울타리를 만들었는데 높고도 견고하며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둘레는 5백여 걸음에 달하는데 기묘한 나무와 빼어난 꽃들이 그늘을 연이어 만들고 있으며 그림자가 서로 잇닿아 있다. 고운 모래가 깔려 있고 기이한 낯선 풀과, 녹음으로 덮여있다.

 

정문은 동쪽을 향해 열려 니련선하를 대하고 있으며 남문은 대화지(大花池)에 접하고 있고 서쪽은 좁고 험하며 견고하고 북문은 대가람으로 통하고 있다. 울타리 안쪽의 땅에는 성스러운 유적이 서로 이웃하고 있는데 솔도파나 또 다른 정사가 있어서 이들은 모두 섬부주 여러 나라의 군왕과 대신과 호족들이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우러르고 흠모하여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보리수로 둘러친 울타리 한 가운데에 금강좌(金剛座)가 있다. 이 금강좌는 옛날 현겁(賢劫)이 처음으로 열릴 때 대지와 함께 솟아난 것으로 삼천대천세계의 중간에 거처하고 있는데 아래로는 금륜(金輪)에 닿아있고 위로는 지면으로 솟아있으며, 금강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레는 백여 걸음에 달한다. 현겁의 천 분의 부처님께서 이 자리에 앉으셔서 금강정(金剛定)에 드셨으므로 금강좌라고 한다. 또한 성도(聖道)를 증득하신 곳이므로 도량(道場)이라고도 부른다.

 

대지가 진동하였지만 이 자리만이 홀로 흔들리거나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 장차 정각을 증득하시려 할 때 이 네 귀퉁이를 두루 밟으셨는데 땅이 모두 기울었지만 그런 뒤에 이 자리에 이르시자 안정되었고 기울지 않았다. 말겁(末劫)에 들고서부터 정법이 차츰 가라앉고 힘을 잃어 가면서 모래와 흙이 가득 덮여서 다시는 볼 수 없어졌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 여러 나라의 군왕들이 부처님께서 금강좌의 크기를 설하셨다는 것을 전해 듣 고 2()의 관자재보살상을 남북으로 나누어서 동쪽을 향해 앉도록 모셨다. 여러 장로들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였다.

"이 보살상의 몸이 가라앉아 보이지 않으면 부처님의 법도 다 사라질 것이다."

지금은 남쪽 보살의 가슴 부분 위까지 가라앉아 있다.

 

금강좌 위의 보리수는 바로 필발라(畢鉢羅)나무이다. 옛날 부처님 재세시에는 이 나무의 높이가 수백 척에 달하였는데 여러 차례 베어졌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높이는 45[]이다. 부처님께서 그 아래에 앉으셔서 등정각을 이루셨으므로 이 나무를 보리수라고 부른다. 줄기는 황백색이고 가지와 잎은 짙푸른 녹색이다. 겨울과 여름에도 시들지 않으며 빛깔은 변함없이 선명하다. 매년 여래의 열반일이 되면 잎은 모두 시들어 떨어지지만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다 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이 날에는 여러 나라의 군왕들과 4방의 출가 승려와 재가 속인들 수천 수만 명이 부르지 않아도 몰려와서 향수와 향기 나는 우유를 나무에 붓고 씻긴다. 이 때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줄지어 향과 꽃과 등불과 횃불을 올리는데 이렇게 연일 앞다투어 공양 올린다.

 

여래께서 입적하신 뒤 무우왕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삿된 도를 믿고 있었으므로 부처님의 유적을 훼손하였다. 그는 병사들을 일으켜서 몸소 이 보리수를 베어버리려고 나섰다. 그리하여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을 베어낸 뒤에 서쪽으로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쌓아두고서 불을 섬기는 바라문에게 명하여 이 가지들을 불태워 하늘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그러나 연기와 불꽃이 미처 가라앉기도 전에 홀연히 두 그루의 나무가 생겨났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무성한 잎은 푸른 비취색을 머금었는데 이 일로 인해 이 나무를 회보리수(灰菩提樹)라고 부른다. 무우왕은 이 같은 신기한 일을 보고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향기 나는 우유를 남은 뿌리에 부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나무는 본래대로 되살아났다. 왕은 이 같은 신령스럽고 괴이한 일을 보고는 더욱 크게 기뻐하여 몸소 공양을 올렸으며 즐거움에 취한 나머지 돌아가기를 잊었다

 

한편 평소 외도를 믿고 있었던 왕비는 은밀히 사람을 시켜서 한밤중에 다시 이 나무를 베어버리게 하였다. 무우왕이 아침에 예경을 드리려고 하다가 잘려진 그루터기만 보였기 때문에 크게 슬퍼하고 개탄하였다. 그리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간절히 기도하면서 향기 나는 우유를 부었더니 하루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살아났다. 왕은 더욱 경이로운 일이라고 여기며 돌을 쌓아서 울타리를 쳤다. 그 울타리의 높이는 10여 척에 달하며 지금도 남아있다.

 

근래의 설상가왕도 외도를 신봉하던 사람으로서 부처님 법을 질투하여 훼손하고 승가람을 파괴하였는데 그도 이 보리수를 베어버렸다. 그리하여 밑동을 파 내려가 샘물에 이르자 그 물이 뿌리에 닿지 못하게 한 뒤에 불을 놓아 태워버렸다. 그리고 사탕수수 즙을 부어서 그 나무를 말라죽게 만들어서 남아있는 싹마저도 완전히 없애버리려고 하였다. 몇 개월이 지난 뒤 무우왕의 후대 자손인 마게타국의 보랄나벌마왕(補剌拏伐摩王)25)[당나라 말 로는 만주(滿胄)라고 한다]이 소식을 듣고서 탄식하며 말하였다.

"혜일(慧日)이 숨은 뒤에 오직 이 불수(佛樹)만이 남았거늘 이제 다시 잔혹하게 베어버렸으니 조상들을 어찌 뵐 수 있으랴."

그러면서 자신의 몸을 땅에 내던지며 슬퍼하니 그의 애통함이 천지를 감동시켰다. 그가 수천 마리 소의 우유를 짜서 그 나무에 부으니, 그 날 밤이 지나 나무는 다시 살아났는데 높이는 1장 남짓하였다. 그 후 다시 누가 벨까 두려워하여 주변에 높이 돌담을 쌓았는데 담의 높이는 24척에 달하였다. 지금의 보리수는 석벽에 가려져 있으며 1장 남짓 밖으로 나와 있다.

25) 범어로는 p r a-varman이며 아육왕의 마우리야왕조는 기원전 2세기에 멸하였는데 그 후예들은 서부인도와 마게타 지방에 미약하게나마 존속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설상가왕의 폐불은 7세기 초엽의 일이므로, 이 왕의 연대도 그 무렵으로 추측할 수 있다.

 

보리수의 동쪽에 정사26)가 있는데 높이는 160170여 척에 달한다. 아래 기단의 너비와 면적은 20여 걸음에 달한다. 푸른 벽돌을 쌓았고 석회를 발랐다. 층층으로 이루어진 감실에는 모두 금상(金像)이 있고 4면의 벽은 빼어난 솜씨로 조각되어 있는데 구슬의 형상이 잇따라 새겨져 있거나 천인과 선인(仙人)의 상이 있다. 위에는 금동으로 만들어진 아마락가과(阿摩落迦果)[또는 보병(寶甁)이라고 하거나 보호(寶壺)라고 한다] 놓여있다. 동쪽으로 높다란 누각이 이어져 있고 처마는 특별히 3층으로 솟아있고, 서까래·기둥·마룻대·들보·문과 문짝·창문 등에는 금은을 새겨서 장식했으며, 진주와 보배구슬 등이 서로 뒤섞여 그것을 메우고 있다. 내부의 방은 매우 깊고 그 문은 3중으로 되어있다. 바깥문의 좌우에는 각각 감실(龕室)이 있는데, 왼쪽에는 관자재보살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자씨보살상이 있다. 이들은 모두 백은(白銀)으로 만들어졌고 높이는 10여 척이다.

26) 이것이 붓다가야 대솔도파[大塔]인데 사리를 넣은 솔도파가 아니라 불전(佛殿)이다. 외관은 9층의 높은 솔도파인데 내부는 2층이다.

 

본래 이 정사가 있던 땅에는 무우왕이 먼저 작은 정사를 세웠는데, 후에 어떤 바라문이 이것을 더 넓혀서 지었다고 한다. 처음에 이 바라문은 부처님의 법을 믿지 않고 대자재천을 섬기고 있었다. 그는 천신이 설산에 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마침내 동생과 함께 그곳으로 가서 자기의 소원을 빌었다. 그러자 천신이 말하였다.

"원하고 구하는 모든 것들은 복을 닦으면 결국 이루어진다. 네가 기도한다고 해서 얻어질 것도 아니고 내가 능히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라문이 물었다.

"어떤 복을 닦아야 소원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하늘이 말하였다.

"()의 씨앗을 뿌려서 뛰어난 복전을 구하고자 한다면 보리수가 바로 불과(佛果)를 증득하는 곳이니, 어서 빨리 그곳으로 가서 큰 정사를 짓고 커다란 못을 파라. 그리하여 온갖 공양을 성대하게 올린다면 네가 원하는 것은 마땅히 이루어지리라."

바라문은 하늘의 명을 받고 크게 믿음을 일으켜서 동생과 함께 되돌아갔다. 그리하여 형은 정사를 세우고 동생은 못을 팠으며 이에 널리 공양을 베풀고 마음속 소원을 열심히 구하였다. 이후에 마침내 과보가 이루어졌으니, 이 바라문은 왕의 대신이 되었고 자신이 얻은 모든 복록을 전부 보시하였다.

 

정사가 완성되자 바라문은 장인(匠人)을 불러 모아 여래께서 처음으로 성불하는 모습을 그리게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무도 그리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게 한참을 지난 뒤 어떤 바라문이 와서 승가 대중에게 고하였다.

"내가 능히 여래의 미묘한 모습을 그려낼 수 있소."

그러자 승가 대중이 말하였다.

"불상을 만들려면 어떤 것이 필요하겠습니까?"

그가 말하였다.

"향기 나는 진흙만 있으면 되오. 그것을 정사 안에 넣어 두고 등불 하나를 비추시오. 내가 정사 안에 들어간 뒤에 문을 단단히 폐쇄해야 하오. 6개월이 지나면 그 때는 열어도 좋소."

그러자 여러 승가 대중은 모두 그의 명을 따랐다.

6개월이 4일 앞으로 다가왔을 때 대중들은 모두가 괴이한 느낌이 들어서 문을 열고 안을 바라보았다. 정사 안에는 불상이 엄숙하게 결가부좌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불상은 오른발을 위로 올리고 왼손을 안으로 거두고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뜨렸으며 동쪽을 향하여 앉아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숙연하였다. 좌대의 높이는 42, 너비는 125, 불상의 높이는 115촌이고 양 무릎 사이는 88촌 떨어져 있으며 양어깨 는 62촌이었다. 상호를 모두 갖춘 자애로운 얼굴은 진짜로 살아있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오른쪽 가슴 윗부분만이 미처 다 완성되지 못한 채, 작업을 하던 사람은 보이지 않고, 신령스러운 조짐만이 감돌고 있었다. 대중들은 모두 다 슬퍼하면서 간절하게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자 하였다. 이 때 이전부터 마음이 순박하고 곧은 사문 한 사람이 그의 꿈에 예전의 그 바라문이 나타나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바로 자씨보살이다. 그 아무리 뛰어난 장인이라 하여도 부처님의 위용을 가늠하지 못할 것 같아 그것을 우려하여 내가 몸소 이곳으로 와서 불상을 그려내었던 것이다. 오른손을 늘어뜨린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옛날 여래께서 장차 불과(佛果)를 증득하시려 할 때 천마(天魔)들이 와서 훼방을 놓으려 하자 지신(地神)이 와서 이 일을 고하며 그 중 한 명이 앞장서 나아가 부처님을 도와 악마를 항복시키고자 하였다.

이 때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인욕의 힘으로 저들을 틀림없이 항복받을 것이다.'

마왕이 말하였다.

'누가 그것을 증명하겠습니까?'

이 때 여래께서 손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이 땅이 증명할 것이다.'

이 때 두 번째 지신이 땅에서 솟아 나와서 증인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지금의 불상의 손은 그 때 아래로 내려뜨렸던 모습을 본뜬 것이다."

대중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서 한결같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가슴 부분이 채 마무리되지 않았으므로 그곳을 온갖 보배들로 메웠는데, 진주와 보배 구슬 등이 박힌 보석 왕관 등 진귀한 보석들로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한편 설상가왕은 보리수를 베고 난 뒤에 이 불상까지도 훼손하려 하였지만 그 자비한 상호를 보자 마음이 불안하여 견딜 수 없었다. 그리하여 가마를 돌려 돌아가면서 재상들에게 명하였다.

"이 불상을 없애고 대자재천의 형상을 안치하라."

재상들은 왕의 명을 받자 두려워하며 탄식하였다.

"불상을 훼손하자니 여러 겁에 걸친 재앙을 불러올까 두렵고, 왕의 명을 거역하자니 이 몸을 다치고 가문마저 멸할까 두렵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장차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들은 궁리하다가 마침내 믿음이 깊은 자를 고용하여 불상 앞에 벽돌을 가로질러 쌓아 벽을 만들었다. 그러나 불상이 어둠 속에 있게 될까 염려하여 등불을 밝혀 놓았다. 그리고 그 벽 앞에 대자재천을 그린 뒤에 공사가 끝났다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이 보고를 받았지만 몹시 두려웠다. 과연 온몸이 짓무르고 피부가 터지더니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재상과 대신들은 황급히 그곳으로 달려가서 불상 앞을 가로막았던 벽을 허물었 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났지만 등불은 여전히 꺼져 있지 않았다. 불상은 지금도 남아있으며 빼어난 조각도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불상은 깊은 방에 안치되어 있어 등불을 잇달아 켜 부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뵙고자 하여도 자세하게 관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른 아침에 커다란 거울을 가지고 가서 햇빛을 받아 안을 비추면 그제야 상서로운 모습을 볼 수가 있 다. 부처님의 상호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 저절로 감격해 마지않는다

 

여래께서는 인도의 달력으로 폐사거월(吠舍佉月) 후반 8일에 등정각을 이루셨는데 이 날은 당나라의 38일에 해당한다. 상좌부측에서는 폐사거월 후반 15일에 등정각을 이루셨다고 하는데 이 날은 당나라의 315일에 해당한다. 이 때 여래의 나이 30세이셨는데 어떤 이는 35세라고 한다.

 

보리수의 북쪽에 부처님께서 거니셨던 곳이 있다. 여래께서 정각을 이루신 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7일 동안 고요히 선정에 들어 계셨다. 그리고 나서 일어나신 뒤 보리수의 북쪽에 도착하시어 7일 동안 거니셨는데, ·서쪽 방향으로 다니셨다. 그런데 걸으신 10여 걸음에는 기이한 꽃들이 발자국마다 18송이씩 피어났다. 후세 사람들이 여기에 벽돌을 쌓아서 기단을 만들었는데 높이는 3척 남짓하다. 옛 선현들의 말에 의하면 이 성스러운 유적지의 기단은 사람들의 수명의 길고 짧은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먼저 정성스럽게 기원한 뒤에 그 크기를 헤아리면 수명이 길고 짧은 사람에 따라 그 수치에 증감이 있다.

 

거니셨던 기단의 북쪽 길 왼편에 반석이 있는데 그 위에 커다란 정사를 지었으며 그 속에는 불상이 있다. 불상은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서 7일 동안 보리수를 바라보셨는데 잠시도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고 나무의 은혜를 보답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취하고 계신다.

 

보리수의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큰 정사가 있는데 그 속에 유석(鍮石)으로 만들어진 불상이 있다. 매우 진귀한 보배로 장식되어 있으며 동쪽을 향하여 서 계신다. 앞에는 푸른 돌이 있는데 그 무늬가 매우 기이하고 이채롭다. 이것은 옛날 여래께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시자 범왕(梵王)7보당(寶堂)을 일으키고 제석이 7보좌(寶座)를 세웠는데 부처님께서 그 위에서 7일 동산 사유하신 곳이다. 이 때 기이한 광명으로 보리수를 비추셨다고 한다. 성현께 서 떠나가신 지 세월이 오래 지나자 보석은 변하여 돌이 되었다.

 

보리수의 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다.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하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보살이 니련하(尼連河)에서 목욕하신 뒤에 보리수로 나아가시다가 잠시 무엇으로 자리를 삼아야 할지 홀로 생각에 잠기셨 다. 그러다가 깨끗한 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다. 이 때 제석천이 풀 베는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어 풀을 짊어지고 길을 걸어갔다. 보살이 말하였다.

"짊어지고 있는 풀을 베풀어주지 않겠소?"

사람의 모습으로 변한 제석천은 보살의 명을 듣고 공손히 풀을 바치니, 보살은 풀을 받아 들고 앞으로 나아가셨다.

 

풀을 받아 든 곳에서 동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보살께서 장차 불과(佛果)를 증득하려 하시자 푸른 공작과 사슴떼들이 나타나 상서로운 징조를 띠던 곳이다. 인도에서 길조를 상징할 때 이런 경사스러운 징조가 일어난다. 따라서 정거천(淨居天)27)은 세간의 풍속에 따라 무리지어 다니거나 날거나 맴돌며 신령스럽고 미묘하게 신성함을 나타내었다.

27) 무번천(無煩天무열천(無熱天선현천(善現天선견천(善見天색구경천(色究竟天)5천을 5정거천(淨居天)이라 한다. 곧 색계(色界)의 제4선천(禪天)을 가리키며, 불환과(不還果)를 증득한 성인이 이 하늘에 난다고 한다

 

보리수 동쪽 큰 길의 좌우에는 각각 솔도파가 하나씩 있는데, 이것은 마왕이 보살을 훼방 놓던 곳이다. 보살이 장차 불과를 증득하려 하자 마왕은 보살을 찾아가서 전륜성왕의 자리를 이어받도록 청하며 달래고 권하였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크게 근심하면서 돌아갔다. 이번에는 마왕의 딸들이 스스로 나서서 보살을 유혹하였다. 그러나 보살의 신령스런 위엄으로 예쁜 얼굴이 노쇠한 모습으로 변하자 쇠약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여 서로 부축하고 떠나갔다.

 

보리수의 서북쪽에 정사가 있는데 그 속에는 가섭파 불상이 있다. 이 불상은 영묘하고 신성한 불상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이따금 광명을 비춘다. 옛 기록[先記]에 의하면 만일 어떤 사람이 지성으로 기도하며 이 불상을 일곱 바퀴 돌면 태어나는 곳마다 숙명지(宿命智)28)를 얻는다고 한다.

28) 숙명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가섭파불 정사의 서북쪽에는 벽돌로 지어진 방[]이 두 개 있는데, 이곳에는 각각 지신(地神)의 상이 있다. 옛날 여래께서 정각을 이루려 하실 때에 지신 한 명은 마왕이 오고 있음을 알렸고, 또 다른 지신은 부처님을 위하여 증인이 되었다. 후세 사람이 이 공덕을 기리기 위해 상을 세우고 그 덕을 

높이 세웠다.

 

보리수 울타리의 서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른바 울금향(鬱金香)이라고 한다. 높이는 40여 척에 달하며, 조구타국(漕矩吒國)에 사는 장사치가 세웠다.

 

옛날 조구타국에 아주 세력이 큰 상인이 살고 있었다. 그는 천신(天神)을 모시고 복과 이익을 기도하고 구하였으며, 부처님의 법을 멸시하고 인과의 이치를 믿지 않았다. 그 후 여러 상인들과 함께 교역을 하기 위해 남해(南海)로 배를 띄웠는데 우연히 거센 바람을 만나 항로를 잃어버리고 풍랑에 떠다니며 3년의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그러는 동안 가지고 있던 식량은 모두 바닥이 나버려 입에 풀칠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함께 배에 탄 사람들은 아침이면 그 날 저녁의 일을 기약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힘을 모으고 뜻을 합하여 자신들이 섬기던 하늘에 염원하였지만 마음은 이미 고달파졌고 신의 도움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 때 문득 큰 산이 보였는데 몹시 가파르고 험준한 봉우리가 솟아있고 두 개의 태양이 나란히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러자 상인들은 저마다 서로 위로하며 말하였다.

"우리는 복이 있어서 큰 산을 만나게 되었소. 이제 저 가운데 배를 멈추고 쉴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상인의 우두머리가 말하였다.

"저것은 산이 아니라 마갈어(摩竭魚)일 뿐이오. 매우 가파르고 높이 치솟은 봉우리로 보이는 것은 물고기의 수염과 옆 지느러미이고. 두 개의 해가 나란히 빛을 내뿜는 것은 바로 물고기의 눈빛이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배의 돛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러자 상인의 우두머리가 동료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관자재보살이 위험과 재난에 빠진 중생에게 능히 안락함을 베풀어주신다고 들었소. 그러니 각자 지성껏 보살님을 부르는 것이 좋겠소."

그리하여 마침내 모두들 한 목소리로 관자재보살에 의지해 그 이름을 부르며 계속 되뇌었다. 그러자 높은 산이 사라지고 두 개의 해도 사라졌다. 그런데 홀연히 몸가짐이 반듯하고 위엄에 넘치는 어떤 사문이 나타났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허공을 타고 와서 물에 빠질 뻔한 그들을 건져준 뒤에 순식간 에 본국으로 데려다 주었다. 이로 인하여 그의 믿음은 굳고 곧아졌으며 복을 구하게 되었고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그는 솔도파를 세우고 법답게 공양을 올렸는데 울금향 진흙으로 솔도파의 위아래를 두루 발랐다. 그리고 믿음을 일으켜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몸소 부처님의 유적지를 참배하고 보리수를 둘러보았는데, 돌아가자고 말할 틈도 없이 어느새 몇 개월이 지났다. 상인들은 함께 다니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산천은 아득하게 떨어졌고 고국도 멀리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곳에 있으니 옛날에 세워진 솔도파를 누가 청소하고 소제해줄 것인가?"

그들이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 돌면서 이곳에 이르자 홀연히 솔도파가 나타났다. 난데없이 솟아난 솔도파에 다들 놀라면서 다가가 살펴보니 그것은 바로 자신들의 나라에 세웠던 솔도파였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인도에서는 이 솔도파를 울금(鬱金)이라고 이름짓게 되었다.

 

보리수의 울타리에서 동남쪽에 있는 니구율수(尼拘律樹)의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그 곁에 정사가 있으며 정사 안에는 부처님의 좌상(坐像)이 있다. 옛날 여래께서 처음으로 불과를 증득하시자 대범천왕이 이곳에서 부처님께 미묘한 법의 바퀴를 굴리시도록 권하고 청하였던 곳이다.

 

보리수 울타리 안의 네 귀퉁이에는 각각 커다란 솔도파가 있다. 옛날 여래께서 길상초(吉祥草)를 받아 들고 보리수로 나아가셔서 먼저 네 귀퉁이를 차례로 거치셨다. 이 때 대지가 진동하였지만 여래께서 금강좌에 이르자 그제야 안정을 되찾았다. 나무의 울타리 안에는 부처님의 유적이 연이어 너무도 많은데 일일이 모두 들어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이다.

 

보리수 울타리 밖의 서남쪽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우유죽을 바쳤던 소 치던 두 여인의 옛 집이다. 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소 치던 여인이 이곳에서 죽을 끓인 다음 이 솔도파에서 여래께 우유죽을 바쳤던 곳이다.

 

보리수 울타리의 남문 밖에는 큰 못이 있는데 둘레가 7백여 걸음이 된다. 맑은 물결이 일렁이고 거울같이 맑으며, 용과 물고기들이 숨어 살고 있는 이 못은 바라문 형제들이 대자재천의 명을 받아서 판 것이다. 이어서 남쪽에 있는 또 다른 못은 옛날 여래께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신 뒤 옷을 빨려고 하시자 제석천이 부처님을 위하여 못으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서쪽에 커다란 돌은 부처님께서 옷을 빠신 뒤 말리려 하시자 제석천이 대설산으로부터 가지고 온 것이다. 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여래께서 이곳에서 낡은 옷을 입으셨다. 이어서 남쪽의 숲 속에도 솔도파가 있는데 여래께서 가난한 늙은 아낙이 보시한 낡은 옷을 받으셨던 곳이다.

 

제석천이 못을 만든 곳으로부터 동쪽의 숲 속에는 목지린타용지(目支隣陀龍池)가 있다. 그 물은 검푸른데 물맛이 감미롭다. 못의 서쪽 기슭에는 작은 정사가 있는데 그 속에 불상이 있다. 옛날 여래께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신 뒤 이곳에서 좌선하시며 7일 동안 선정에 잠기신 채 지내셨다. 이 때 용왕이 여래를 호위하였는데 자신의 몸으로 부처님을 일곱 겹 감고 여러 개의 머리를 만들어 아래로 숙여서 덮개를 만들어드렸다. 옛 못의 동쪽 기슭에는 부처님께서 선정에 드셨던 방이 있다.

 

목지린타용지에서 동쪽 숲 속에 정사가 있는데 이곳에는 야위고 지친 모습의 불상이 있다. 그 옆에 거니시던 곳이 있는데 길이는 70여 걸음이다. 남북에는 각각 필발라수(畢鉢羅樹)가 있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풍속으로는 병에 걸린 사람 누구나 향유를 불상에 바르면 대부분이 치유될 수 있다고 한다. 이곳은 보살이 고행을 닦던 곳이다. 여래께서 외도를 항복시키기 위해 그리고 악마의 청을 받아들여 이곳에서 6년간 고행을 하셨다. 하루에 한 톨의 참 깨와 한 톨의 보리를 잡수셨으므로 그 모습은 초췌하고 피부와 온몸이 야위고 수척해지셨다. 거니시거나 오가실 때에는 나뭇가지를 잡은 뒤에야 일어나셨다.

52目支隣陀龍池東林中精舍有佛羸瘦之像其側有經行之所長七十餘步南北各有卑鉢羅樹故今土俗諸有嬰疾香油塗像多蒙除差是菩薩修苦行處如來為伏外道又受魔請於是苦行六年日食一麻一麥形容憔悴膚體羸瘠經行往來攀樹後起

 

 

 

 

 

보살이 고행하던 필발라수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아야교진여 등의 다섯 사람이 머물던 곳이다. 처음에 태자가 출가해 산과 들을 방황하며 숲이나 연못가에서 기거하시자 정반왕이 다섯 사람에게 명하여 태자를 모시고 보살피며 시중들게 하였다. 태자가 고행을 닦자 교진여 등도 정진하였다. 교진여 등 다섯 사람이 머물던 곳에서 동남쪽으로 솔도파가 있다. 보살이 니련선나하에 들어가셔서 목욕하시던 곳이다. 강 옆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보살이 우유죽을 받아 드셨다

菩薩苦行卑鉢羅樹側有窣堵波是阿若憍陳如等五人住處太子之捨家也彷徨山澤棲息林泉時淨飯王乃命五人隨瞻侍焉太子既修苦行憍陳如等亦即勤求憍陳如等住處東南有窣堵波菩薩入尼連禪那河沐浴之處河側不遠菩薩於此受食乳糜

 

그 옆에 있는 솔도파는 두 명의 장자가 부처님께 꿀에 탄 보릿가루를 바쳤던 곳이다. 부처님께서 나무 아래 에서 결가부좌하시고 고요히 선정에 잠기셔서 7일 동안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신 뒤에 비로소 선정에서 일어나셨다. 이 때 상인의 우두머리 두 사람이 숲 밖으로 행차하였는데, 그 숲의 신이 이들에게 일러주었다. "석가 종족의 태자가 지금 막 불과(佛果)를 증득하시어 마음이 적정(寂定)에 머물고 계신다. 49일 동안 아무 것도 드시지 못하셨으니, 너희들이 가진 것을 받들어 올리면 크고 좋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자 두 사람이 각자 지니고 있던 꾸러미에서 꿀을 섞은 보릿가루를 꺼내어 부처님께 올리자 세존께서 그것을 받으셨다.

其側窣堵波二長者獻麨蜜處佛在樹下結加趺坐寂然宴默受解脫樂過七日後方從定起時二商主行次林外而彼林神告商主曰:「釋種太子今在此中初證佛果心凝寂定四十九日未有所食隨有奉上獲大善利。」時二商主各持行資麨蜜奉上世尊納受

 

 

장자가 보릿가루를 바친 곳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사천왕이 발우를 바친 곳이다. 상인의 우두머리가 꿀을 섞은 보릿가루를 바치자 세존께서는 어떤 그릇에 이것을 받아야 할까를 생각하셨다. 이 때 사천왕이 4방에서 다가와 각자 지니고 있던 금발우를 올렸다. 세존께서 묵묵히 계시면서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금발우는 출가한 자에게 적당하지 않은 그릇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사천왕이 금발우를 버려두고 은발우를 올렸다. 이어서 파지·유리·마노 ·차거·진주 등으로 만든 발우를 올렸으나 세존께서는 이런 것을 하나도 받지 않으셨다. 마침내 사천왕은 각자 궁으로 돌아가서 돌로 만든 발우를 가지고 왔다. 이 발우는 감청색이 영롱하게 비치는 것으로 사천왕이 다시 이것을 가지고 와서 바치니, 세존께서는 그들의 것을 사양하지 않고 모두 받으셨다. 그리고 차례로 포개니 그것은 하나의 발우가 되었다. 따라서 바깥쪽에서 보면 네 개의 테두리가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천왕이 발우를 바친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여래께서 어머니를 위하여 법을 설하셨던 곳이다. 여래께서 정각을 이루신 뒤 천상과 인간의 스승으로 일컬어지자 그 어머니인 마야가 천궁에서 이곳으로 내려왔다. 그러자 세존께서는 마야의 근기에 따라서 법을 가르치고 보여주며 이익되게 하고 기쁨을 주었다. 그 옆에는 말라버린 못이 있는데 언덕에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옛날 여래께서 여러 신통변화를 보이면서 인연이 있는 중생들을 교화하 시던 곳이다. 신통변화를 나타내셨던 곳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우루빈라가섭파(優樓頻螺迦葉波) 세 형제와 그들의 천 명의 문도들을 제도하셨던 곳이다.

 

여래께서는 바야흐로 진리를 베푸시고 근기에 따라서 중생들을 제도하시고 계실 때였다. 이 때 우루빈라가섭파의 문도 5백 명이 가섭파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자고 청하였다. 그러자 그가 말하였다.

"나 또한 그대들과 함께 미혹된 길을 되풀이하였소."

이에 서로 격려하면서 부처님 계신 곳에 도착하였다.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사슴가죽 옷을 벗고 불을 제사지내던 도구들을 버려라."

그러자 범지들은 공손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입고 있던 옷과 도구들을 니련하에 버렸다. 한편 날지가섭파(捺地迦葉波)는 여러 제기(祭器)들이 물에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자기 문도들과 함께 형의 동정을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형이 이전의 사상을 버리고 부처님의 제자가 된 사실을 알고 자신도 따라서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가야가섭파(伽耶迦葉波)와 그의 문도 2백 명도 자신의 형들이 지금까지 고수하던 사상을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부처님의 처소 에 가서 범행(梵行)을 닦기를 청하였다.

 

가섭파 형제를 제도한 곳에서 서북쪽으로 가면 솔도파가 있다. 이곳은 여래께서 가섭파가 섬기던 화룡(火龍)을 제도하신 곳이다. 여래께서 그 사람들을 교화하실 즈음 먼저 그들이 섬기던 대상을 항복시키고자 하셨다. 그리하여 범지가 섬기던 화룡이 사는 방에 들어가 머무셨다. 밤이 깊어지자 용은 화염을 내뿜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도 선정에 드셔서 불빛을 일으키시니 그 방은 불빛으로 환해졌으며 불꽃이 맹렬하게 솟아올랐다. 범지들은 부처님께서 해를 당하실까 두려워하였으나 감히 달려 들어가지 못하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을 가엾게 여기고 애석해 하였다.

그런데 이 때 우루빈라가섭파가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볼 때 분명히 불에 타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틀림없이 이 사문은 화룡을 항복시키셨을 것이다."

과연 여래께서는 화룡을 발우 속에 담아들고 다음날 아침 외도의 문인들에게 가지고 와서 보여주셨다. 그 옆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5백 명의 독각(獨覺)이 함께 열반에 든 곳이다.

 

목지린타용지에서 남쪽으로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가섭파가 여래께서 물에 빠질 것을 염려해 구하려 했던 곳이다. 가섭 형제들은 당시 신통력을 지녔으므로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면 누구나 그의 덕을 우러르고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한편 세존께서는 바야흐로 미망에 빠진 자들을 인도하시고 위대한 방편으로 그들을 거두고 교화하시고자 하여 짙은 구름들을 모아서 하늘에 가득 펼치시고 폭우가 쏟아지게 하셨다. 비는 부처님의 주위를 에워싸고 내렸지만 부처님 계신 곳은 전혀 비에 젖지 않았다. 이 때 가섭이 멀리서 이 구름과 비를 보고 문하의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사문께서 계시는 곳이 물에 떠내려가서는 안 된다."

그리고 나서 배를 타고 부처님을 구하러 나섰다. 그런데 세존께서는 마치 대지를 밟고 계신 것처럼 물 위를 밟고 계셨으며, 강의 한복판을 밟자 물이 나뉘어져 모래가 드러났다. 가섭이 이런 광경을 보고 마음으로 깊이 감복하고서 물러갔다.

 

보리수 울타리의 동문 밖으로 23리를 가다 보면 앞 못 보는 용의 방이 있다. 이 용은 지난 세상에 쌓은 악업으로 인하여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하였다. 여래께서 전정각산으로부터 보리수를 향하여 차츰 나아가시다가 이 방 옆에 도착하시자 용의 눈이 홀연히 광명을 찾았다. 이에 용은 불수(佛樹)29)로 가려하시는 보살의 모습을 보고 말하였다.

"그대는 이제 오래지 않아 정각을 이루실 것입니다. 저의 눈은 앞을 못본 지 이미 오래였으나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시게 되니, 저의 눈이 문득 광명을 찾았습니다. 현겁 중에 과거 세 분의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을 때도 밝은 시력을 회복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대가 이곳에 이르시자 저의 눈이 갑자기 앞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대가 장차 성불하실 것을 저는 압니다."

29) 보리수를 말한다. 석가모니께서 이 나무 아래서 성도하셨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도수(道樹)라고도 한다

 

보리수 울타리의 동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마왕이 보살을 두려워하던 곳이다. 처음에 마왕은 보살이 장차 정각을 이룰 것을 알고 그를 유혹하고 어지럽히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득을 얻지 못하여 근심하고 당황하다가 여러 신들을 불러 모으고 마군(魔軍)을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마군들을 이끌고 세력을 휘두르며 보살을 위협하고자 바람과 비를 퍼부었고 어둠 속에서 천둥과 번개를 일으켰다. 불을 놓고 연기를 피우며 모래를 일으키고 돌을 뿌렸으며 창과 방패들을 갖추고 온갖 활과 화살을 모조리 동원하였다. 그러나 보살이 대자정(大慈定)30)에 들어가자 모든 병기와 무기들이 연꽃으로 변하였으며, 이 광경을 본 마군이 크게 놀라 황망하게 달아났다. 그 옆으로 멀지 않은 곳에 두 기의 솔도파가 있는데 제석천과 범왕이 세운 것이다.

30) 자정은 범어로 maitri라고 하며 모든 중생에 대하여 자비의 생각에 머물도록 하는 선정을 말한다

 

보리수의 북문 밖에는 마하보리(摩訶菩提)승가람이 있다. 이것은 본래 승가라(僧伽羅) 국왕이 세운 것이다. 뜻을 갖춘 건축물 6()이 이어져 있고 관각(觀閣)3층이며, 둘레에 쳐진 울타리는 높이가 34[]에 달한다. 장인의 미묘한 솜씨는 극에 달하였고 단청의 장식도 그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불상은 금은으로 주조하였고 진귀한 보배를 함께 어울려 장엄하게 만들었다. 모든 솔도파는 높고 넓으며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데, 그 속에는 여 래의 사리가 들어있다. 골사리(骨舍利)의 크기는 손가락 마디 만한데 빛이 나고 윤기가 돌며 선명한 흰색이고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육사리(肉舍利)는 커다란 진주와도 같은 크기인데 색은 붉은 색과 담청색을 띠고 있다. 해마다 여래대신변월만(如來大神變月滿)의 날31)[이 날은 인도의 달력으로는 1230일이며, 중국 당나라의 정월 15일에 해당한다]이 되면 이것을 꺼내어 대중들에게 보여준다. 이 때에는 이따금 빛을 발하 거나 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도 한다. 승도들은 1천 명이 채 못 되는데 그들은 모두 대승 상좌부(上座部)의 법을 익히고 있다. 율의(律儀)는 엄숙하고 청정하게 지키고 있으며 계행(戒行)이 곧고 밝다

31) 신변월(神變月)은 신족월(神足月)이라고도 하며 정월·5·9월의 삼장재월(三長齋月:특히 1개월의 긴 시간에 걸쳐서 제를 지내는 달이라는 뜻)을 말한다. 이 달에는 제불(諸佛)과 제천(諸天)이 신족(神足)으로 사천하를 다니면서 선악을 자세하게 기록한다고 한다

 

옛날 남해(南海) 승가라국의 왕은 부처님의 법을 독실하게 믿고 있었는 데, 그 마음이 천성적으로 그러하였다. 그에게 출가한 종족의 형제가 있었는데 그 출가한 동생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유적을 생각하며 멀리 인도를 유람하게 되었다. 그런데 가람에 잠시 머물렀는데 그곳 사람들은 그가 변방에서 왔다고 하여 천시하고 경멸하였다. 마침내 그는 본국으로 돌아왔고, 왕은 몸소 먼 곳까지 나가서 그를 맞아들였다. 사문은 왕을 보자 흐느껴 울며 말을 잇지 못하였다. 왕이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을 당하였기에 이토록 슬퍼하시오?"

사문이 말하였다.

"나라의 위력을 믿고 의지하며 4방을 돌아다니면서 도를 묻고 이역의 땅을 두루 다녔습니다. 그런데 가는 곳마다 추위와 더위에 고생하였고 몸을 움직이면 업신여김을 당하였고 말을 하면 나무람과 꾸짖음을 당하였습니다. 이 같은 고생과 수치를 당하였거늘 어찌 마음이 즐거울 수 있겠습니까?"

왕이 물었다.

"어찌하여 그와 같은 일을 당하였단 말이오?"

그가 말하였다.

"간절히 바라오니 대왕께서는 복전이 되실 것을 마음에 두시고 인도에 가람을 세워주소서. 그렇게 하면 부처님의 유적을 드날리는 일이 될 것이고 또한 대왕의 덕 높은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선왕들의 복을 빌어주는 일도 되며 후손들에게까지 그 은혜가 미칠 것입니다."

왕이 말하였다.

"참으로 훌륭한 일이오. 이런 좋은 충고를 듣고 어찌 머뭇거릴 수 있겠소?"

이에 왕은 나라에 있는 보배를 인도의 왕에게 바쳤다. 인도의 왕은 그 공물을 받아들이고서 먼 곳에 있는 왕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사신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내가 이제 어떤 것으로 귀국(貴國)에 보답해야겠는가?"

사신이 말하였다.

"승가라왕은 인도의 대길상왕(大吉祥王)에게 머리 조아려 절을 올리나이다. 대왕의 위덕은 먼 곳까지 두루 미치고 대왕의 은혜는 아득한 곳에까지 두루 미칩니다. 저의 나라의 사문이 대왕의 나라의 풍속을 흠모하고 덕화를 사모하여 감히 귀국을 두루 다니며 부처님의 유적을 유람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람에서 머물렀을 때 그곳의 대중들이 저의 나라의 사문에게 숙소를 마련해 주지 않아 우리 사문은 온갖 고통을 겪고 수치를 당하고서 귀국하였습니다. 이에 장래의 일을 생각하여 후손들에게 모범을 남기기 위해 인도 여러 땅에 가람을 짓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객승이나 유행승들이 피로를 풀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바라며, 양국이 우호를 나누고 두 나라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변함

없이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왕이 말하였다.

"여래의 감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유풍(遺風)은 이렇게 남아있도다. 부처님의 유적지 가운데 마음대로 한 곳을 택하도록 하라."

이에 사신은 왕의 말을 받들고 본국으로 돌아가 보고하였다. 그러자 군신들이 매우 경사스러운 일이라 하며 기뻐하였다. 마침내 사문들을 불러모아서 어느 곳에 가람을 세워야 할지 의견을 들어보았다. 이 때 사문이 말하였다.

"보리수는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한결같이 그 성스러움을 증명하신 곳입니다."

다른 의견을 들어보았지만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었으므로 나라의 모든 진귀한 보배를 희사하여 이 가람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 나라의 승려들이 공양을 올렸으니 이에 동판에 새겨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무릇 모든 부처님의 지극한 가르침은 두루 베푸심에 사사로움이 없으며, 인연 있는 자들을 은혜롭게 구제하는 것이 성왕의 명백한 가르침이었다. 이제 못난 나는 왕업을 훌륭하게 이어받아서 가람을 세워 이로써 부처님의 유적을 널리 드러내나니, 이것은 조상들의 복을 빌고 백성들에게 부처님의 은혜가 미치게 하기 위함이다. 오직 우리 나라의 승려들만이 자유롭게 이 가람을 이용할 수 있으며, 우리 나라 사람들도 승려의 경우와 똑같이 사용할 수 있다. 이로써 후손들에게 전하나니 영원토록 끊임이 없을 지어다."

그런 까닭에 이 가람에는 집사자국(執師子國) 승려들이 많다.32)

32) 여기에 현장이 기록한 전설은 대략 360년 무렵, 굽타왕조의 Samudragupta왕과 세일론의 Siri Meghavana왕과의 사이에 일어났던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보리수의 남쪽으로 10여 리에 달하는 거리에는 부처님의 유적이 연이어 있어 하나하나 들어서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해마다 비구가 안거를 해제하면 4방의 출가자나 재가자들 수백 수천 수만 명이 몰려와 7일 밤낮을 향과 꽃을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며 숲 속을 돌아다니면서 예배하고 공양을 올린다.

 

인도의 승려들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에 의거하여 모두 다 실라벌나월(室羅伐拏月) 전반(前半) 초하루에 우안거(雨安居)에 들어가는데, 이 날은 당나라의 516일에 해당한다. 그리고 알습박유사월(頞濕縛庾闍月) 후반(後半) 15일에 우안거를 해제하는데, 이 날은 당나라의 815일에 해당한다. 인도의 월명(月名)은 별자리에 의거하여 이름 붙여진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바뀌지 않고 있으며 여러 부파에도 차이는 없다. 실로 중국과 인도의 말이 달 라 번역하는 데에 오류가 생기게 되었으며 시()를 나누고 달[]을 헤아리는 데에 이 같은 차이가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서는 416일에 안거에 들어가서 715일에 안거를 해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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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서역기 제 9

현장 한역

변기 찬록

이미령 번역

 

9. 중인도

 

1) 마게타국[摩伽陀國]

보리수의 동쪽으로 니련선나하를 건너면 큰 숲 속에 솔도파가 있다. 그 북쪽에 못이 있는데 향상(香象)1)이 어미를 모시던 곳이다. 옛날 여래께서 보살행을 닦으실 때에 향상의 새끼로 태어나셨는데 북산(北山)에 살면서 이 못 가로 놀러 나왔다. 그런데 그 어미가 앞을 못 보았으므로 연뿌리를 캐고 맑은 물을 길어 올리는 등 공손히 어미를 받들어 모시며 지극한 효행을 하였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숲에 놀러 나왔다가 길을 잃었다. 그는 슬피 울부짖으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는데 마침 새끼 코끼리가 그 울음 소리를 듣고 불쌍하게 생각하여 그를 인도해주었다. 이 사람은 코끼리의 안내를 받아서 무사히 숲을 나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왕에게 가서 고하였다.

"저는 향상이 노닐며 머무는 숲이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다. 향상은 진귀한 보물이니 그곳으로 가서 붙잡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병사들을 이끌고 코끼리를 사로잡으러 나갔다. 그 사람은 앞장서서 군대를 이끌고 가다 코끼리가 있는 곳을 왕에게 가리켰다. 그런 데 가리키는 그 순간 두 팔이 마치 칼로 잘린 것처럼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왕이 이 기이한 일을 보고 놀라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새끼 코끼리를 붙잡아서 궁으로 돌아왔다. 새끼 코끼리는 붙잡힌 지 여러 날이 흘렀지만 물과 풀을 먹지 않았다. 코끼리를 보살피던 사람이 이 일을 왕에게 보고하자 왕은 친히 와서 그 까닭을 물었다. 그러자 새끼 코끼리가 말하였다.

"저의 어미는 앞을 못 보기 때문에 며칠 동안 굶주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제가 갇히고 말았으니 무슨 마음으로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겠습니까?"

왕이 그 사정을 듣고 불쌍하게 여겨서 코끼리를 풀어주었다.

1) 범어로는 gandha-hastin이고 향기를 풍기는 용맹한 코끼리이다.

 

그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앞에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다. 이것은 옛날 가섭파불이 이 자리에서 선정에 잠기셨던 곳이다. 그 옆은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이다.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곳에서 동쪽으로 막가하(莫訶河)를 건너면 큰 숲에 이르는데 그곳에는 돌기둥이 있다. 이것은 외도가 선정에 들어서 사악한 소원을 일으켰던 곳이다.

 

옛날 외도 울두람자는 세속에서 벗어나 은거하기로 마음을 먹고 숲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리하여 법림(法林)에 정신을 깃들이고 자취를 감추자 5신통(神通)2)을 갖추고 제1유정(第一有定)을 얻게 되었다. 마게타왕이 특별히 그를 깊이 존중하고 따르면서 언제나 점심식사 시간이 되면 그에게 궁중 음식을 드시도록 청하였다. 그러면 울두람자는 허공을 타고 날아서 왕래하였는데 한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마게타왕은 그가 올 때가 되면 멀리서 우러러보며 기다린 뒤에 그가 도착하면 공손히 맞아들여서 자리로 안내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왕이 출타하게 되었으므로 이 일을 맡길 사람이 필요하여 그는 궁에서 사람을 물색해보았으나 명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그의 어린 딸이 행동도 조심스럽고 진지하며 다정다감하고 아름다우며 현명하여 그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 마게타왕이 딸을 불러서 명하였다.

"내가 지금 잠시 먼 곳으로 가야 하니, 너에게 일을 맡기려고 한다. 너는 지극한 마음으로 신중하게 이 일을 해야 할 것이다. 저 울두람선인은 예전부터 내가 공경하고 받들어온 분이다. 때가 되어 오시면 음식을 내어 드리고 내가 한 것처럼 그분을 모셔야 한다."

이렇게 당부하여 명을 내린 뒤에 곧 순행(巡行)하기 위해 궁을 나섰다. 소녀는 명을 받들어 왕이 하던 의식대로 선인이 오기를 우러러 기다렸고 선인이 도착하자 받들어 모시면서 자리로 안내하였다. 그런데 울두람자는 여인을 만나는 순간 욕계의 염착심이 일어나 신통력을 잃고 말았다. 식사를 마친 뒤에 돌아가려고 하였지만 예전처럼 허공을 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어 소녀에게 이렇게 거짓말하였다.

"나는 언제나 도업(道業)을 닦고 정()에 들어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그런데 이 나라 사람들이 나를 보기를 원한다고 들은 지 이미 오래이나 허공을 타고 오가느라 틈을 내지 못하였다. 선현들께서도 가르치시기를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으라고 가르치셨다. 어찌 홀로 좋은 것만을 고수하느라 중생들을 두루 구제하는 것을 잊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 나는 이제 성문으로 나가서 땅을 밟으며 가겠다. 그런데 이런 나의 모습을 보는 자들로 하여 금 모두 복과 이익을 얻게 하겠다."

왕의 딸이 이 말을 듣고 4방에 이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앞다투어 달려나와 거리를 청소하고 길을 지켰다. 수많은 대중들이 선인이 오는 모습을 기다리며 우두커니 서있는 가운데 울두람자는 걸어서 왕궁에서 나와 자신의 법림(法林)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조용히 앉아서 선정에 들어가려 하였지만 마음은 바깥 세상으로 치달렸다. 숲으로 들어가니 온갖 새떼가 시끄럽게 지저귀었고 연못에 나가보아도 물고기와 자라들의 다툼 소리뿐이었다. 뜻이 흩어지고 마음이 어지러워지자 바른 정신을 잃어버렸으며 그는 결국 선정을 그만두었다. 마침내 그는 분노에 차서 사악한 원[惡願]을 일으켰다.

"부디 내가 다음 세상에서는 삵쾡이의 몸에 새의 날개를 지니어 중생들을 잡아먹는 포악한 맹수로 태어나기를 바라옵니다. 몸의 너비는 3천 리에 달 하고 두 날개의 너비는 각각 15백여 리에 달하여서 숲으로 가서 날개 달린 모든 짐승들을 잡아먹고, 물에 들어가서는 물에서 사는 모든 짐승들을 잡아먹기를 바라옵니다."

이렇게 발원하고 나자 치솟아 오르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그리하여 다시 부지런히 정진한 뒤에 본래의 정을 얻었으나 오래지 않아서 목숨을 마치고 제1의 유천(有天)에 났는데 그의 수명은 8만 겁에 달하였다. 여래께서는 그에 대하여, 하늘의 수명이 다하고 난 뒤에 옛날의 그 사악한 원을 낸 과보로 말미암아 이런 흉한 몸을 얻을 것이며 이로부터 악도(惡道)를 전전하는데 벗어날 기약이 없다고 기별하셨다.

2) 무애자재(無礙自在)한 초인간적인 불가사의한 작용을 말한다. 천안통(天眼通천이통(天耳通타심통(他心通숙명통(宿命通신족통(神足通)의 다섯 가지이다.

 

막가하에서 동쪽으로 가면 커다란 임야로 들어가게 되며, 백여 리를 가다 보면 굴굴타파타산(屈屈居勿反吒播陀山)[당나라 말로는 계족(鷄足)이라고 한다]에 이르는데, 이 산은 다른 말로 구로파타산(寠盧播陀山)[당나라 말로 존족(尊足)이라고 한다]이라고도 부른다. 좁고 길게 뻗은 높은 봉우리가 몹시 가팔라서 끝이 보이지 않고 깊은 골짜기는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하다. 산기슭의 골짜기에서는 개울이 흐르고 교목들이 숲을 이루어 계곡을 뒤덮고 있다 . 산봉우리는 우뚝 솟아서 높고 험하고 무성한 풀들이 바위를 덮고 있다. 산봉우리 세 개가 높이 솟아있고 곁에는 절벽이 우뚝 서있는데, 그 기상은 하늘에 닿을 듯하고 모습은 구름과도 같다. 뒤에 존자 대가섭파는 이 산 속에 머물다가 적멸에 들었는데, 감히 이 산을 일컬어 이름을 말하지 못하고 다만 존족(尊足)이라고 말하였다. 마하가섭파는 성문제자인데 6신통3)을 얻고 8해탈4)을 갖추었다

3) 본문 권9 2)5신통에 누진통(漏盡通)이 하나 더 추가된다

4) 여덟 가지의 정()의 힘으로 탐착심을 버리는 것이다. 팔배사(八背捨)라고도 한다.

 

여래께서 중 생을 교화하는 인연이 끝나고 장차 열반에 드시려 할 때 가섭파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부지런히 고행을 닦아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무상법(無上法)5)을 구하였다. 이제 옛날부터 소원하고 약속하였던 일들을 모두 마쳤다. 나는 이제 대열반에 들고자 하나니 모든 법장(法藏)은 너에게 맡긴다. 너는 법을 주지하고 널리 퍼뜨리되 실추시키지는 말아라. 나의 이모가

내게 바친 금실로 짠 가사는 자씨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너에게 모두 맡긴다. 내가 남긴 법 안에서 수행을 하는 모든 자는 비구나 비구니, 오파색가(鄔波索迦)[당나라 말로는 근사남(近事男)이라고 하고, 구역에서는 이포새(伊蒲塞)라고 하고 또는 우파새(優波塞), 우바새(優婆塞)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와 오파사가(鄔波斯迦)[당나라 말로는 근사녀(近事女)라고 하고, 구역에서는 우바사(優婆斯), 또는 우바이(優婆夷)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를 막론하고 그들을 모두 먼저 제도하여 그들이 윤회에서 벗어나게 해야 한다."

5) 열반을 말한다. 일체의 법 가운데 열반보다 나음이 없음을 말한다.

 

가섭파는 부처님의 명을 받고 정법을 주지하고 있었는데 결집을 끝낸 지 20년이 되자 세상의 허무함을 싫어하여 열반에 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계족산(鷄足山)으로 갔다. 산의 북쪽으로 올라가서 산을 돌다가 길을 잡고서 서남쪽 구릉에 이르렀다. 산봉우리는 몹시 험하였고 벼랑을 타고 난 길은 막혀 있었다. 그리하여 지팡이를 가지고 두드리니 베어내듯 갈라졌다. 산 길이 열리고 나자 길을 따라서 앞으로 나아갔는데, 길은 구불구불 구비졌고 빙빙 돌았 으며 이리저리 엇갈리고 기울어져서 통하였다. 마침내 산 정상에 올라 동북쪽을 향하여 나아가 세 봉우리의 가운데로 들어가서 부처님의 가사를 받들고 섰다. 그러자 원력으로 말미암아 봉우리 세 개가 합쳐져서 이것을 거두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산은 등성마루가 세 겹으로 솟아올라 있다.

 

이 산은 장차 자씨세존께서 세상에 나셔서 세 차례의 설법을 마친 후 그래도 여전히 교화되지 못한 한량없는 교만한 중생들을 이끌고 이 산에 오르실 것이다. 그리하여 가섭의 처소에 이르러 자씨가 손가락을 튀기면 산봉우리가 저절로 열리게 된다. 그러면 저 모든 중생들은 가섭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더욱 교만한 마음을 일으킬 것이다. 이 때 대가섭이 옷을 건네고 절을 올리고 예경한 뒤 몸을 허공으로 날려서 여러 가지 신통변화를 보이며 불을 만들어 내어서 몸을 태운 뒤에 적멸에 들어갈 것이다. 대중들은 이 일을 우러러보다가 마침내 교만한 마음을 버리게 되고 이로 인하여 모두가 깨달음을 얻고서 성과(聖果)를 증득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산 위에 솔도파를 세웠다. 고요한 밤에 멀리서 바라보면 어떤 때는 밝은 횃불이 보이기도 하지만 산을 올라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계족산의 동북쪽으로 백여 리를 가다 보면 불타벌나산(佛陀伐那山)6) 이른다. 산봉우리와 절벽이 높이 우뚝 솟아있고 벼랑은 한없이 깊다. 바위 사이에 있는 석실은 부처님께서 일찍이 이곳에 오셔서 머무셨던 곳이다. 곁에 반석이 있는데 제석과 범왕이 우두전단(牛頭栴檀)을 빻아서 여래를 칠하고 장식하였던 곳이다. 지금도 그 돌 위에는 남은 향이 강렬히 풍겨 나오고 있다. 5백 명의 나한들이 이곳에 보이지 않게 깃들어 있는데, 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사람이면 이따금 오백 나한을 보기도 한다. 어느 때는 사미의 모습을 하고 마을로 들어가서 걸식을 하는데, 나타났다가 숨는 그 신비하고 영묘(靈妙)한 자취는 일일이 기술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6) 범어로는 buddha-vana이며 예전에는 계족산(鷄足山)의 북동쪽에 있는 Buddhain산으로 추정했지만, 그 후 여러 자료를 다시 면밀히 검토한 결과 제대로 확정짓고 있지 못하다.

 

제티얀-불타벌나산의 인적이 없는 계곡 속에는 동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열슬지림(洩移結反瑟知林)7)[당나라 말로는 장림(杖林)이라고 한다]에 이르게 된다. 키 크고 단단한 대나무가 숲을 이루어서 산을 덮고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다. 예전에 어떤 바라문이 석가불의 몸길이가 16척이나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언제나 의혹을 품고 있으면서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6척에 달하는 대나무를 가지고 부처님의 몸을 재보려고 하였지만 부처님의 몸은 언제나 장대 끝에서 16척을 벗어나 있었다. 이에 조금씩 높이를 더하여 재보았지만 끝내 실제로 부처님의 몸의 길이가 얼마나 되는지 재지 못하였다. 결국 장대를 내던지고 떠나가 버렸는데 그 장대가 4방으로 뿌리를 내려서 오늘날과 같은 숲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 속에는 커다란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서 7일 동안 여러 천상과 인간들을 위해 위대한 신통력을 나타내 보이시며 깊고 미묘한 법을 설하셨다고 한다.

7) 범어로는 ya i이며 지금의 Jeshtiban으로 추정된다.

 

장림(杖林) 가까운 곳에 오파색가(鄔波索迦)인 사야서나(闍耶犀那)8)[당나라 말로는 승군(勝軍)이라고 한다]라는 이가 있는데, 이 사람은 서인도의 찰제리 종족이다. 그는 번잡하지 않은 것을 높이 샀고 마음은 자연에서 노닐기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환경(幻境)에 머물며 마음은 참다운 경계[眞際]에서 노닐었다. 안팎의 전적들을 읽어 깊고 미묘한 이치를 모두 꿰뚫었으며, 논리와 말솜씨는 청아하고 품격이 있었고, 행동거지는 여유가 있고 아름다웠다. 여러 사문과 바라문이나 외도이학·국왕·대신·장자와 호족들이 모두 그에게 와서 만나기를 청하였고 간절하게 가르침을 받고 이로움을 더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 학업을 받는 문인들은 열여섯 칸의 방을 가득 채웠다. 그도 나이가 70여 세에 달하였지만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다른 기예들은 모두 그만두고 오직 부처님의 경전만을 익히면서 몸과 마음을 다그쳐 밤과 낮을 잊었다.

8) 범어로는 jaya-sena이며 서인도 소랄타국(蘇剌佗國) 사람으로 찰제리종의 집안에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다. 현애(賢愛)에게 인명(因明), 계현(戒賢)에게 유가론, 안혜(安慧:대승불교의 대학자)에게 성명(聲明)과 대소승의 논들을 배웠으며 그밖에 베다나 천문·지리·의술 등에도 박식하였다. 마게타국의 만주왕(滿胄王)이 국사로 모시려 하였지만 고사하였고 계일왕의 초청도 거절한 채 산림에 머물렀다. 현장은 이 스님에게 나아가 2년 동안 유식결택론(唯識決擇論), 의의리론(意義理論), 성무외론(成無畏論), 부주열반(不住涅槃), 십이인연론(十二因緣論), 장엄경론(莊嚴經論)을 배웠으며, 유가와 인명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다.

 

인도의 풍속에는 가루 향을 진흙과 섞어 높이 56촌 정도 되는 작은 솔도파를 만들어서 경전의 문구를 써서 그 속에 넣어 두는데, 이것을 법사리(法舍利)라고 불렀다. 그도 이런 법사리를 만들었는데, 그 수가 차츰 쌓여 커다란 솔도파를 세우게 되었으며, 경문을 쓴 것을 그 속에 모두 거두어 넣고 언제나 공양을 올렸다. 그리고 승군은 이것을 자신의 업으로 삼았다. 입으로는 미묘한 법을 널리 설하고 학인들을 이끌었으며 손으로는 솔도파를 지어서 뛰어난 복을 세웠다. 밤에도 거닐며 예송하였고 고요히 앉아서 사유에 잠기기도 하는 등 잠자거나 먹는 일에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게으름을 피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나이가 백 살이 되었지만 마음으로 지은 그의 업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30년 동안 모두 7구지(拘胝)[당나라에서는 억()이라고 한다]의 법사리 솔도파를 만들었으며, 1구지를 채울 때마다 큰 솔도파를 세워서 그 속에 전부 안치하고 성대한 공양을 올렸다. 그리고 모든 승가 대중을 청하여 법회를 열어서 그것을 경축하였다. 이 때 신령스러운 빛이 환하게 비쳤으며 기이하고 영험스런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 이후에도 이따금 광명을 발하고 있다.

 

장림의 서남쪽으로 10여 리를 가다 보면 큰 산 남쪽에 온천9)이 두 곳 있 는데, 그 물은 매우 뜨겁다. 옛날 여래께서 그 물을 만들어 내신 뒤 그 속에서 목욕을 하셨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있는데, 맑은 물이 조금도 줄지 않아 멀고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와서 목욕을 하고 있으며, 이 물에 목욕하면 고질병이나 열병에 차도를 보이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그 옆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여래께서 거니시던 곳이다

9) 오늘날 Tapoban이라 불리는 온천이 이곳에 해당한다고 한다 .

 

장림의 동남쪽으로 67리를 가다 보면 큰 산10)에 이르는데 가로질러 있는 산마루 앞에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다. 옛날 여래께서 우기(雨期) 석 달 동안 여러 인간과 하늘의 대중들을 위하여 이곳에서 법을 설하셨을 때 빈비사라왕도 이곳에 와서 법을 듣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산을 헐고 돌을 쌓아서 계단을 만들어 이곳까지 왔는데 계단의 너비는 20여 걸음이고 길이는 34리에 달한다.

10) 이 산은 Handia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큰 산의 북쪽으로 34리 떨어진 곳에 외딴 산이 하나 있다. 옛날 광박(廣博)선인11)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절벽을 파서 석실을 만들었는데, 그 터12)는 지금도 남아있다. 그의 가르침을 전하는 문인들이 있어 그가 떠난 뒤에도 그의 가르침을 여전히 널리 퍼뜨리고 있다

11) 광박은 범어로 vy sa인데, 비야사(毘耶娑)로 음사한다. 이 말은 저작자(著作者편찬자(編纂者)의 일반적인 이름인데 통상 베다를 편찬한 자의 이름으로 삼는다.

12) 광박선인의 거처는 Handia산 서남쪽에 있는 Pansabda의 움푹 들어간 곳으로 추정된다.

 

외딴 산의 동북쪽으로 45리를 가다 보면 작은 외딴 산이 또 하나 있는데, 산벽(山壁) 석실은 매우 넓어서 천여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이다. 옛날 여래께서 재세시 이곳에서 석 달 동안 법을 설하셨다. 석실 위에 커다란 반석이 있는데, 이것은 제석과 범왕이 우두전단을 빻아서 부처님의 몸에 바르고 장식하였던 곳으로 돌에는 남은 향기가 지금도 풍기고 있다.

 

석실의 서남쪽으로 암굴이 있는데, 인도에서는 이것을 아소락(阿素洛)[구역에서는 아수라(阿修羅)라고 하고 또는 아수륜(阿須倫), 또는 아소라(阿蘇羅)라고 하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궁전이라고 한다.

 

옛날에 일을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好事者]이 있었는데, 그는 주술에 깊 이 통달해 있었다. 그를 포함한 열네 명의 동료들이 뜻을 함께 하여 약속을 하고 이 암굴로 들어갔다. 그런데 3040리를 가다 보니 굴 안이 갑자기 크게 밝아지면서 성읍과 누각이 보였는데, 이 모든 것은 금··유리로 만들어졌다. 이 사람들이 그곳에 도착하자 여러 소녀들이 문 옆에서 기다리고 서 있다가 그들을 기쁘게 맞아들이며 융숭한 예로 접대하였다. 이에 점차 앞으로 나아가서 성 안에 이르렀는데, 성문에는 두 명의 하녀가 각자 금쟁반을 받쳐 들고 있었다. 쟁반 위에는 온갖 꽃과 향이 넘치도록 담겨 있었는데, 그들은 이 쟁반을 들고 기다리며 있다가 그들이 도착하자 말하였다.

"연못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시고 향을 바르고 꽃을 머리에 꽂으신 후에 들어가신다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오직 저 술사(術士)만큼은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소서."

그리하여 남은 열세 명이 목욕을 하려고 못에 들어가자 황홀한 기분에 사로잡혀 그대로 마치 모든 것이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듯하였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논 한 가운데에 앉아있는 자신들을 발견하였다. 그곳은 여기서 북쪽으로 곧게 흐르는 강줄기를 따라 3040리쯤 떨어진 곳이었다.

 

석실의 옆으로 잔도(棧道)가 나 있는데 너비는 10여 걸음이 되고 길이는 45리에 달한다. 옛날 빈비사라왕이 부처님 계신 곳에 가려고 돌을 깎고 계곡을 지났으며 바위를 헐고 강을 메워 어떤 때는 돌을 쌓거나 바위를 헐어서 계단을 만들어 부처님의 처소에 도착하였다.

 

이곳으로부터 큰 산 가운데에서 동쪽으로 60여 리를 가다 보면 구사게라보라성(矩奢揭羅補羅城)13)[당나라 말로는 상모궁성(上茅宮城)이라고 한다]에 이른다. 상모궁성은 마게타국의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데 고대 선왕들이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아주 질이 좋고 길상스럽고 향기로운 띠[]가 많이 자라기 때문에 상모성이라고 불렸다. 높은 산이 4방으로 에워싸고 있어서 그것이 바깥의 방어벽이 되어주었고, 서쪽으로는 골짜기를 따라 길이 나있고, 북쪽으로는 산문(山門)이 활짝 열려있다.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으며 둘레는 150여 리에 달한다. 내성(內城)의 남아있는 터는 둘레가 30여 리에 달한다. 갈니가수(羯尼迦樹)가 여러 좁은 길에 가득 심어져 있는데, 꽃은 특이한 향을 머금고 있고 색은 황금색으로 반짝인다. 늦봄의 숲은 온통 황금색이다.

13) 범어로는 ku gra-pura이며 ku a는 제사에 깔개로 쓰이는 풀로서 길상초(吉祥草상모(上茅향모(香茅)로 번역한다. 이 성의 옛 이름은 기리발제(耆梨跋提, girivraja:山城이라는 뜻)이다. 부처님과 동시대 인물이었던 빈비사라왕 시대에 번영하였다.

 

궁성의 북문 밖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제바달다가 미생원왕(未生怨王)과 친구가 되어 호재(護財)라고 하는 술 취한 코끼리를 풀어놓아서 여래를 해치려고 하였던 곳이다. 여래께서 손가락 끝으로 사자 다섯 마리를 만들어내자 술 취한 코끼리는 이내 순해져서 여래 앞으로 와서 엎드리고 말았다.

 

술 취한 코끼리를 항복시킨 곳에서 동북쪽으로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사리자가, 아습바시(阿濕婆恃)[당나라 말로는 마승(馬勝)이라고 한다] 비구14)가 법을 설한 뒤 과위를 증득한 곳이다. 본래 사리자는 출가하기 전부터도 높은 재기와 아량으로 널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리하여 문하의 생도들과 학인들은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고 공부하였다. 어느 날 사리자가 왕사대성(王舍大城)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이 때 마승비구도 걸 식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사리자가 멀리서 마승을 보고 문하의 생도에게 말하였다.

"저기 오고 있는 자는 참으로 우아하다. 성과(聖果)를 증득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토록 감각기관을 고요히 제어할 수 있단 말인가? 잠시 기다리고 서서 저 사문의 행동거지를 관찰해보기로 하자."

이 때 마승 비구는 이미 아라한을 증득하여 마음은 자재로움을 얻었고 용모와 행동거지는 온화하고 품위가 있었다. 그가 석장을 흔들며 다가오자 사리자가 물었다.

"장로께서는 평안하시고 즐거우십니까? 스승은 어떤 분이고 어떤 법을 증득하셨기에 이처럼 기쁨이 넘쳐 계십니까?"

마승이 답하였다.

"그대는 정반왕의 태자가 전륜왕위를 버리고 6()의 중생을 가엾이 여 겨 6년간 고행하신 끝에 삼보리를 증득하시고 일체지를 구족하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하였소? 바로 그분이 나의 스승이시오. 무릇 법이란 있는 것도 아니고 텅 빈 것도 아니니 사리를 갖추어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오. 오직 부처만이 능히 궁극적으로 그에 관해 말씀하실 수 있을 뿐인데, 어찌 나와 같은 어리석은 자가 그 뜻을 자세하게 논할 수 있겠소?"

그리하여 게송을 설하여 부처님의 법을 찬탄하자, 사리자는 그 노래를 듣고 나서 과증(果證)을 얻었다.

14) 범어로는 asvajit이며 마승(馬勝무승(無勝)으로 번역하며 부처님의 초전법륜에 의해 제도된 다섯 비구 가운데 한 사람이다.

(Ye dhammā hetuppabhavā Tesaṃ hetuṃ tathāgato āha

Tesañca yo nirodho Evaṃvādī mahāsamaṇo)

諸法從緣起 如來說是因 彼法因緣盡 是大沙門說

 

(아래 시리굿따와 가라하딘나 두친구 이야기는 제따와나이다. 법구경 게송 5859번을 설하실 때 언급되는데 현장스님의 실수가 아닌가 한다.)

사리자가 과증을 얻은 곳에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크고 깊은 구덩이가 있고 그 옆에는 솔도파가 세워져 있다. 이곳은 실리국다(室利多)[당나라 말로는 승밀(勝密)이라고 한다]가 불구덩이와 독이 든 밥으로 부처님을 살해하려던 곳이다. 승밀은 외도를 믿고 섬겼으며 삿된 견해에 깊이 집착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어느 날 범지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교답마(喬答摩)가 이 나라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니, 그로 인해 끝내 우리는 의지하고 기댈 곳을 잃고 말 것이다. 너는 지금 교답마에게 가서 집에서 잔치를 열겠다고 말하며 초대하라. 그리고 문에는 큰 구덩이를 파서 그 속에 불을 놓은 뒤 그 위에 썩은 나무를 질러놓고 다시 나무판자 위에 마른 흙을 덮어놓아라. 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들에는 전부 독약을 섞어놓아야 한다. 그러면 설령 불구덩이를 피해 들어갔다고 해도 독이 든 음식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승밀은 범지의 명을 받아서 곧 독을 넣은 공양 모임을 마련하였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승밀이 세존을 해치려는 악한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고서 세존께 승밀의 집에 가시지 말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근심하지 말라. 중생은 여래의 몸에 해를 끼칠 수 없다."

그리고 나서 초청을 받아들이시고 그 집으로 가셨다. 그런데 문지방을 밟자 불구덩이가 연못으로 변했는데, 못 속에는 맑은 물결이 찰랑거렸고 물은 거울처럼 맑았으며 연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승밀이 이 광경을 보고 몹시 당황하고 근심하였지만 여전히 해치려는 생각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술수를 써서 불을 벗어났다고 해도 독이 든 음식이 기다리고 있다."

세존께서 공양을 받아 드신 후에 미묘한 법을 설하시자 승밀이 법을 듣고 나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고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승밀의 불구덩이에서 동북쪽으로 있는 산성(山城)의 모퉁이에 솔도파가 있다. 박가(縛迦지와까)[당나라 말로는 기바(耆婆지와까)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라는 뛰어난 의사15)가 있었는데, 그가 이곳에 부처님을 위하여 설법당(說法堂)을 세웠다. 담 둘레로는 갖가지 꽃과 과일나무를 심었는데, 그 터와 나무 그루터기가 지금도 여전히 자취를 남기고 있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이곳에 많이 머무셨다. 그 곁에는 또 박가의 옛 집이 있었는데그 터와 옛 우물의 움푹 패인 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15) 범어로는 j vaka이며 빈비사라왕의 서자라고도 하고, 또는 빈비사라왕의 아들인 무외(無畏)와 창부인 Sal vati 사이에 태어난 서자라고도 한다. 북인도 달차시라국에 가서 의술을 배우기를 7, 후에 부처님의 병을 치료하며 이 인연에 의해서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궁성의 동북쪽으로 1415리를 가다 보면 길률타라구타산(姞栗陀羅矩吒山)16)[당나라 말로는 취봉(鷲峯) 또는 취대(鷲臺)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기사굴산(耆闍崛山영축산)이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에 이른다. 북산(北山)의 남쪽에 접해 홀로 우뚝 높이 솟아있는데 그곳에 수리새가 살고 있다. 또한 이 산은 높은 누대(樓臺)와도 같은데, 울창한 초목의 푸른빛이 서로 비치며 짙고 옅은 녹음이 뒤섞여 있다. 여래께서 50년 동안 세상을 가르치실 때 많은 시간을 이 산에서 머무시며 미묘한 법을 널리 설하셨다. 빈비사라왕이 부처님의 법을 듣고자 사람들에게 권하여 이끌고서 산기슭으로부터 산봉우리에 이르기까지 계곡을 건너고 바위를 타고 돌을 깔아서 계단을 만들었는데, 너비는 10여 걸음이고 길이는 56리이다. 도중에 작은 솔도파가 두 기 있는데 하나는 '하승(下乘)'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즉 왕이 이곳에 이르러서는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앞으로 나아갔다는 표식이며, 또 하나는 '퇴범'(退凡)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즉 이곳에서부터 범부들을 물리치고 함께 오르지 않았다고 하는 표식이다.

16) 범어로는 g dhrak ta이며 취두(鷲頭영취(靈鷲)라고도 번역한다.

 

그 산 정상은 곧 동서로 길고 남북으로 좁다. 낭떠러지의 서쪽 가에는 벽돌로 만든 정사가 있다. 높고 넓으며 신기한 솜씨로 만들어졌는데 동쪽으로 문이 열려져 있다. 여래께서 옛날 재세시에 많은 시간을 이곳에 계시면서 설법을 하셨으므로 지금은 설법하시는 상을 만들어서 안치하였는데, 상의 크기는 여래의 몸과 같다.

 

정사의 동쪽에 긴 바위가 있다. 여래께서 거니시면서 밟으신 곳이다. 곁에는 큰 돌이 있는데 높이는 145()이고 둘레는 30여 걸음에 달한다. 이것은 제바달다가 멀리서 부처님을 향하여 내던졌던 것이다.(지금의 독수리봉 부근) 그 남쪽 벼랑 아래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여래께서 재세시에 법화경을 설하신 곳이다. 정사의 남산(南山) 낭떠러지 옆에 큰 석실이 있는데 여래께서 옛날에 이곳에서 선정에 드셨다.”

 

부처님의 석실에서 서북쪽으로 또 석실이 있는데, 그 앞에는 커다란 반석이 있다. 아난이 마왕으로 인하여 두려움에 떨던 곳이다.

존자 아난이 이곳에서 선정에 들어있었는데, 마왕이 독수리로 모습을 변하여 혹월(黑月) 밤중에 그 큰 돌에 날아와 앉았다. 그리고 사납게 날갯짓을 하며 요란스럽게 울부짖어 존자를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존자는 이 때 너무나도 놀라고 두려워 정신이 없었다. 그러자 여래께서 이런 아난을 내려다보시고 위안을 주시고자 손을 뻗치셨으니, 손은 석벽을 그대로 통과하여 아난의 이마를 어루만지셨다. 그리고 큰 자비로써 말씀하셨다.

"마왕이 모습을 바꾼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아난은 부처님의 위로를 받고 나서 몸과 마음이 편안해졌다. 돌 위에는 독수리의 발자국이 남아있고 벼랑에는 커다란 구멍이 나있는데 세월이 한참 흘러간 지금까지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다.

 

정사 옆에는 몇 칸의 석실이 있는데, 사리자 등 여러 큰 아라한들이 이곳에서 선정에 들었다. 사리자의 석실 앞에 커다란 우물이 하나 있는데, 지금은 말라버려 물이 없고 구덩이만 남아있다.

 

정사의 동북쪽 돌 틈 사이로 시냇물이 흐르는데 그곳에 커다란 반석이 있다. 이것은 여래께서 가사를 빨던 곳이다. 옷의 무늬가 선명하게 남아있어서 마치 조각한 것 같다. 그 옆의 돌 위에는 부처님의 발자국이 있는데, 바퀴 문양은 희미해졌지만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북산(北山) 정상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여래께서 마게타성을 바라보시며 7일 동안 법을 설하셨던 곳이다.

 

산성의 북문 서쪽에 비포라산(毘布羅山vaibhara)17)이 있는데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에 의하면, 옛날 산의 서남쪽에 있는 낭떠러지의 북쪽에 5백 개의 온천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수십 곳만이 남아있는데, 어떤 샘은 찬 물이 솟고 어떤 샘에는 더운물이 솟고 있어서 전부 다 온천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 샘의 발원지는 설산의 남쪽에 위치한 무열뇌지(無熱惱池)인데 땅 밑으로 흘러 내려 이곳에 이른다고 한다. 물은 매우 맑고 물 맛도 좋아 무열뇌지의 물맛과 같다고 한다. 물줄기는 5백 갈래로 나뉘어 소열지옥(小熱地獄)을 거쳐 흘러 그 불의 열기가 그 물을 데우면 이곳에 이르러 물이 뜨거워진다고 한다. 샘의 입구에는 모두 사자나 흰 코끼리의 머리를 돌로 새겨 놓았고 어떤 것은 돌로 대롱을 만들어서 물이 흘러가게 하였으며, 아래에는 돌을 깔아서 연못으로 삼았다. 4방 이역만리의 사람들이 모두 이 연못을 찾아와서 목욕을 하는데, 목욕한 많은 사람들이 질병을 고쳤다고 한다.

17) 범어로는 vipula이며 미포라(尾布羅비부라(毗浮羅) 등으로 음사하기도 한다. 현장은 북쪽문의 '서쪽'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동쪽'을 잘못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왜냐 하면 북문의 북쪽으로 나가서 동쪽으로는 Vipula, 서쪽에는 Baibh r산이 있기 때문이다.

 

온천의 부근에는 여러 솔도파들과 정사의 기단과 터들이 서로 비늘이 이어지듯 연이어 있는데 이것은 모두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이다. 이곳은 숲과 개울이 서로 이어져 있고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 머무는 곳이어서 은둔하는 선비들도 상당히 많이 살고 있다.

 

온천의 서쪽에는 비발라(卑鉢羅핍팔라)석실이 있는데 예전에 세존께서 언제나 이 안에 머무셨다. 후벽의 동굴이 바로 아소락궁(阿素洛宮)이다. 선정을 닦는 비구들이 이 석실에 많이 살고 있는데, 이따금 용이나 뱀, 사자의 형체를 띤 괴이한 짐승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모습을 본 사람은 마음이 미쳐버리거나 혼란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이곳은 성스러운 땅이고 신령스러운 성현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어서 그 자취를 따라 실행하고 그 풍모를 흠모하는 사람 이면 그런 재난이나 화를 잊어버리게 된다.

 

근래에 계행이 정결한 비구가 있었는데 그윽하고 한적한 곳을 즐기는 성품이었기 때문에 이 석실에 들어가 바깥 출입을 끊고 선정을 닦고자 하였다. 그 때 어떤 이가 충고하였다.

"그곳에 가지 말라. 그곳은 기이한 재난이 많이 일어나서 해를 입은 자가 적지 않다. 선정을 닦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몸을 다칠 우려도 있다. 앞서 일어난 일들을 비추어보아 후회될 일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자 비구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 불과(佛果)를 구하고자 뜻을 세웠으며 천마(天魔)에게 굴복시킬 것이다. 그런 위해(危害)야 무슨 말을 할 필요가 있겠소?"

그리고 나서 곧바로 석장을 흔들며 석실로 갔다. 이에 단장(壇場)을 마련하고 주술을 외웠는데 열흘이 지나자 굴에서 한 소녀가 나와 비구에게 말하였다.

"존자께서 가사를 입으시고 계를 지키시니 이것은 중생들을 귀의하게 하시고자 함이요, 지혜를 닦고 선정을 익히시는 것은 중생들을 잘 이끄시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머물면서 우리들을 두렵고 놀라게 하시니 여래의 가르침이 이것이란 말입니까?"

비구가 말하였다.

"나는 깨끗한 계를 지키고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산골에 은거하여 소란스러움을 멀리 떠나있다. 그런데 이런 나에게 홀연히 나타나 이렇게 비난하고 있으니 과연 누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단 말인가?"

소녀가 말하였다.

"존자께서 주술을 외는 소리가 불을 일으켜, 그 불이 밖에서 들어와 내가 살고 있는 석실을 태우고 있으며 나의 권속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부디 가엾게 여기셔서 주술을 외는 일만은 다시 하지 마소서."

비구가 말하였다.

"주술을 외는 것은 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지 중생들을 해치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 옛날 수행하던 사람들은 이 석실에 머물면서 선정을 익히고 성과(聖果)를 얻기를 기약하며 이로써 지옥과 아귀도의 중생들을 제도하고자 하였다가 괴이한 형체를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여 목숨을 잃기까지 하였으니, 이 모든 것은 바로 너희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무슨 말인가?"

소녀가 대답하였다.

"저희들의 죄장(罪障)은 실로 두텁고 지혜도 이렇게 얕습니다. 지금부터 석실에 틀어박혀 분수를 지키겠습니다. 그러니 존자께서도 신주(神呪)를 외지 말아주소서."

이리하여 비구는 선정을 닦을 수 있게 되었으며 본래와 같이 편안하게 지내며 해를 입지 않았다.

 

비포라산(毘布羅山) 毘布羅위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옛날 여래께서 법을 설하시던 곳이다. 지금은 몸을 드러내는 외도들이 이곳에 많이 거주하면서 밤낮으로 게으름을 부리지 않고 고행을 익히고 있으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태양의 운행에 따라 돌면서 해를 관찰하고 있다. 산성의 북문에서 왼쪽에 있는 남쪽 벼랑의 북쪽으로부터 동으로 2, 3리를 가다 보면 커다란 석실에 도착하게 되는데, 이곳은 옛날 제바달다가 선정에 들었던 곳이다.

 

석실의 동쪽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반석이 있는데 그 위에는 얼룩이 있다. 그런데 그 모양이 마치 피로 얼룩진 것과 같다. 옆에는 솔도파가 세워져 있는데 이곳은 선정을 닦던 비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 과위를 증득한 곳이다.

옛날 어떤 비구가 이곳에 은둔하면서 몸과 마음을 다그치고 정진하며 선정을 닦고 있었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성과(聖果)를 증득하지 못하자 물러나 스스로를 탓하였다. 그리고 남몰래 탄식하며 말하였다.

"무학(無學)의 과위는 끝내 얻지 못하겠구나. 번뇌에 얽힌 이 몸뚱이가 무슨 도움이 되랴?"

그리고는 곧 이 돌을 가져다 스스로 자신의 목을 갈랐다. 그 순간 아라한과를 증득하고서 허공으로 날아오르며 신통변화를 나타내 보였고, 불을 만들어 몸을 태운 뒤에 적멸에 들었다. 그의 바른 지조를 아름답게 기려서 솔도파를 세우고 공적을 기록하였다.

 

비구가 아라한과를 증득한 곳에서 동쪽 절벽 위에 돌로 만들어진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선정을 익히던 비구가 벼랑 아래로 몸을 던져 과위를 증 득한 곳이다

옛날 부처님 재세시에 어떤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과정(果定)을 증득하기 위해 산림에서 고요히 참선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랜 세월을 정진하여도 과증(果證)을 얻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는 밤낮으로 생각에 잠기면서 고요한 선정을 잊지 않았다. 이 때 여래께서는 그의 근기가 무르익어 장차 발휘될 것임을 아시고 그에게 가서 깨달음을 이루도록 도우셨다. 즉 죽림원에서부터 산의 벼랑 아래에 가셔서 손가락을 튀겨 그를 부른 뒤 멈춰 서 서 기다리셨다. 이 때 비구는 멀리서 성스러운 승가 대중을 본 순간 몸과 마음에 기쁨이 용솟음쳐 벼랑 아래로 몸을 던졌다. 몸을 던지면서도 그의 깨끗한 마음은 부처님의 말씀을 존경하며 깊게 믿었다. 몸이 땅에 채 닿기도 전에 아라한과를 얻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허공으로 올라가 신통변화를 일으켜 보이시면서 이로써 그의 깨끗한 믿음을 널리 기리셨으니 이에 솔도파를 세워 기념하였다.

 

산성의 북문에서 1리 정도 가다 보면 가란타죽원(迦蘭陀竹園죽림정사)에 도착하게 된다. 지금은 정사가 있는데 돌로 만든 기단과 벽돌로 만들어진 방이 있고 그 문은 동쪽으로 열려있다. 여래 재세시에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머무시면서 설법하고 교화하시며 모든 범부들을 이끄시고 세속인들을 구제하셨다. 그래서 지금은 여래의 몸을 만들어두었다.

 

본래 이 성에는 대장자(大長者)인 가란타(迦蘭陀)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당시 부유한 귀족으로 널리 이름을 날렸던 그는 일찍이 넓은 대나무 동산을 외도들에게 보시하였다. 그러다가 여래를 뵙고 법을 들은 뒤에 깨끗한 믿음을 일으켰다. 그는 대나무 동산에 저 이교도들을 살게 하여 지금 천인사(天人師)는 머무르실 집마저 없는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이 때 여러 신들과 귀신들이 그의 진실한 마음에 감동을 받아 외도들을 쫓아내며 이렇게 말하였다.

"장자 가란타는 대나무 동산에 부처님의 정사를 세워야 한다. 그러나 너희들은 재난을 면하려면 어서 빨리 이곳에서 떠나가라."

외도들이 이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분노를 품은 채 떠나갔다. 그 후 장자는 이 자리에 정사를 세우고 공사를 마친 뒤 몸소 부처님께 가서 이곳으 로 오시기를 청하였다. 여래께서도 이 때 그의 보시를 받으셨다.

 

가란타죽원의 동쪽에 솔도파가 있으니, 아사다설돌로왕(阿闍多設咄路王)18)[당나라 말로는 미생원(未生怨)이라고 하며, 구역에서는 아사세(阿闍世)라고 하는데 잘못 되었다]이 세운 것이다.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여러 왕들이 함께 사리를 나누어 가졌는데 미생원왕도 사리를 얻은 뒤 이것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솔도파를 세워서 공양을 올렸다.19) 뒤에 무우왕이 믿음을 일으켜서 솔도파를 열고 사리를 꺼내어 따로 솔도파를 세웠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 있어서 이따금 빛을 발한다.

18) 범어로는 aj ta atru이며 빈비사라왕과 위제희(韋提希) 부인과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ai un ga왕조 제6세이며 기원전 554년 무렵에 즉위하였다.

19) 이 사리솔도파는 현재 길의 동쪽에 있는 조금 높은 장소로서 회교의 묘지가 되어있는 곳으로 보인다.

 

미생원왕의 솔도파에는 존자 아난의 반신(半身) 사리가 있다.(웨살리에는 중각강당옆에 있는데...) 옛날 존자가 적멸에 들고자 마게타국을 떠나 폐사리성으로 갔다. 이 때 양국은 전쟁중이어서 존자의 사리를 갖고자 또다시 병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존자는 이것을 가엾게 여겨서 결국 자신의 몸을 나누었다. 마게타왕이 반신사리를 가지고 돌아가서 공양을 올렸는데, 즉 바로 경치가 빼어난 이곳에 경건하게 솔도파를 세웠던 것이다. 그 옆에는 여래께서 거니시던 곳이 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사리자와 몰특가라자(沒特伽羅子:목련) 등이 안거하던 곳이다.

 

죽림원에서 서남쪽으로 56리를 가면 남산20)의 북쪽 기슭 커다란 대나무 숲 속에 커다란 석실이 있다. 존자 마하가섭이 이곳에 있으면서 990명의 큰 아라한들21)과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3장을 결집하던 곳이다. 앞에는 옛 터가 있는데 미생원왕이 여러 아라한들의 결집을 위해 강당을 세웠 던 곳이다.

본래 대가섭은 산림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광명이 비치더니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가 말하였다.

"어떤 예사롭지 않은 변고가 있으려고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가?"

그리하여 천안으로 살피다가 불세존께서 쌍수림(雙樹林) 사이에서 열반에 드시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이에 그를 따르던 무리들에게 명하여 이들을 이끌고 구시성으로 나아갔다. 도중에 바라문을 만났는데, 그는 하늘의 꽃을 들고 있었다. 가섭이 물었다.

"그대는 어디에서 오는 길이오? 혹시 나의 스승께서 지금 어느 곳에 계시는지 알고 있소?"

바라문이 답하였다.

"나는 마침 저 구시성에서 오는 길이오. 당신의 스승께서는 이미 열반에 드셨는데 하늘과 인간의 대중들이 모두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보았소. 내가 들고 있는 이 꽃도 그곳에서 얻은 것이오."

가섭이 이 말을 듣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지혜의 태양이 이제 빛을 잃었으니 세계는 암혹 속에 빠지고 말겠구나. 우리를 이끄시던 스승께서 이 세상을 멀리 떠나가셨으니 이제 중생들은 추락하게 되었구나."

이 때 게으른 어떤 비구가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여래께서 적멸에 드셨으니 이제 우리는 편안하게 되었다. 만일 우리가 계를 범하여도 누가 감히 꾸짖고 제지할 수 있겠는가?"

가섭은 이 말을 듣고 깊은 시름에 잠겼다. 그리하여 법장을 모으고 가르침에 의거하여 계를 범하는 자를 다스리고자 마음먹었다. 마침내 쌍수(雙樹)에 이르러 부처님을 뵙고 예를 올렸다. 이미 법왕께서도 세상을 떠나셨으므로 인간과 하늘은 자신을 이끌어 줄 스승을 잃게 되었으며, 여러 큰 아라한들 또한 멸도(滅度)에 들었다. 그래서 더욱 더 대가섭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법장을 모아야겠다'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소미로산(蘇迷盧山)에 올라 커다란 건치를 두드리면서 이렇게 외쳤다.

"지금 왕사성에서 법사(法事)가 있을 예정이니 아라한과를 증득한 사람들은 어서 빨리 모이시오."

건치 소리 속에 가섭의 가르침이 전해져 삼천대천세계에 널리 퍼졌다. 그러자 신통력을 얻은 사람들은 모두 이 소리를 듣고 모여들었다. 이 때 가섭이 대중들에게 고하였다.

"여래께서 적멸에 드셔서 세계는 지금 텅 비고 말았소. 우리는 법장을 모아 그것으로써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만 할 것이오. 이제 장차 법을 결집하면서 간결하면서도 조용하게 진행하고자 하오. 어찌 무리지어 사는 일만을 믿고서 위대한 업을 이루지 않을 수 있겠소? 이제 3()을 갖추고 6()을 얻었으며, 부처님의 교법을 듣고 지킴에 그릇되지 않은 자, 변재(辯才)에 걸림이 없는 자는 이 자리에 남아있으시오. 이와 같은 뛰어난 사람은 결집을 해야 마땅하오. 그러나 스스로가 아직 과학(果學)의 자리에 남아있는 사람은 각자의 거처로 돌아가시오."

그러자 990명의 사람이 자리에 남아있었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사람 가운데 아난만이 아직도 학지(學地)에 머물러 있었다. 대가섭이 그를 불러서 말하였다.

"그대는 아직 번뇌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이 성스러운 대중들로부터 나가는 것이 마땅하오."

아난이 말하였다.

"나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여래를 모시고 따라 다녔습니다. 법에 관한 논의가 있을 때마다 한번도 그 자리에서 내쫓긴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결집을 하려는 마당에 나를 쫓아내려 하시는군요. 법왕께서 적멸에 드신 지금 나는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가섭이 말하였다.

"걱정하지 마시오. 그대는 직접 부처님을 모셨고 게다가 참으로 많은 법을 들어왔소. 그런데 당신은 아직 애욕을 아직 다 없애지 못하였고 번뇌도 아직 다 끊지 못하였소."

아난이 이 말을 듣고 자신의 뜻을 굽히고 물러나 텅 비고 한적한 곳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무학(無學)을 증득하고자 부지런히 정진하였지만 이룰 수 없었다. 이미 몸도 지쳤던 터라 그는 잠시 누우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때 머리가 채 베개에 닿기도 전에 그는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집하는 장소로 가서 문을 두드리며 자신이 다시 왔음을 알렸다.

가섭이 그에게 물었다.

"그대는 번뇌를 모두 다하였는가? 그렇다면 신통력을 이용해서 문을 통하지 않고도 들어와야 할 것이오."

아난이 명을 받고 자물쇠 틈으로 들어와서 승가 대중들에게 절을 한 뒤에 물러나 앉았다. 이 날이 안거의 첫 보름날이었다.

이 때 가섭이 소리 높여 말하였다.

"잘 기억하고 잘 들으십시오. 아난이 법을 잘 듣고 기억하고 있는 점은 여래께서도 칭찬하신 바이니 그가 소달람장(素呾纜藏)[구역에서는 수다라(修多羅)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결집하고, 우파리(優波釐)가 율()을 잘 지켜 밝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대중들도 잘 아시는 바이니 그대가 비나야장(毘奈耶藏)[구역에서는 비나야(毘那耶)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을 결집하시오. 그리고 나 가섭파는 아비달마장(阿毘達磨藏)을 결집하겠소."

그리하여 우안거 석 달 동안 꼬박 3장의 결집을 하여 마쳤는데 이 때 대가섭이 승가 대중의 상좌가 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이것을 상좌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20) 범어로 dak in-agir 이다. 신왕사성(新王舍城)의 남쪽에 있으므로 남산(南山)이라 불린다. 지금의 Baibh ra산이다. 이곳에 있는 결집석실(結集石室)은 남전(南傳)에서는 칠엽굴(七葉窟)이라 부르며 법현전에는 차제석실(車帝石室:七葉樹)이라 부른다.

21) 현장은 아마 대지도론2권의 설에 의거하여 아난을 포함한 천 명의 아라한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밖의 수많은 경전에서는 모두 5백 아라한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따라서 이것을 5백인 결집(五百人結集)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대가섭파가 결집한 곳에서 서북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아난이 승가로부터 질책을 받고서 결집에 참가하지 못하자 여기에 와서 고요히 좌정하고 아라한과를 증득하였던 곳이다. 그는 아라한과를 증득한 뒤에 비로소 결집에 참여하게 되었다.

 

아난이 아라한과를 증득한 곳에서 서쪽으로 20여 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으로 대중부가 결집한 장소이다. 학위(學位)나 무학위(無學位)에 있던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은 대가섭이 주도하는 결집에 참여하지 못하자 이곳으로 와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같은 스승을 모시고 공부하였습니다. 그런데 법왕께서 적멸에 드시자 우리들을 차별하는군요.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우리들도 마땅히 법장을 모아야 합니다."

이에 범부와 성인들이 모두 모여 왔고 온갖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들이 몰려들어 다시금 소달람장과 비나야장, 아비달마장 그리고 잡집장(雜集藏)과 금주장(禁呪藏)22)을 결집하여 따로 5()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결집은 범부와 성인들이 함께 모여 이룬 것이므로 대중부(大衆部)라 불리게 되었다.

22) 잡집장(雜集藏)은 여러 가지 경전들을 수용한 부문(部門)이고, 금주장(禁呪藏)은 여러 다라니를 수용한 부문이다. 대중부(大衆部)가 이 5()을 결집하였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내용에 관해서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자세하게 알 수 없다.

 

죽림정사의 북쪽으로 2백여 걸음 가다 보면 가란타 못에 이른다.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 머무시면서 많은 설법을 하셨다. 물이 드맑아서 여덟 가지 공덕을 갖추고 있는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로 물이 말라버려 남아있지 않다.

 

가란타 못에서 서북쪽으로 23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으로 높이는 60여 척이다. 곁에는 돌기둥이 있는데 솔도파를 세운 인연담이 새겨져 있으며 높이는 50여 척이고 위에는 코끼리 형상을 만들어 놓았다.

 

돌기둥의 동북쪽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갈라사길리희성(曷羅闍姞利呬城)23)[당나라 말로는 왕사(王舍)라고 한다]이 있다. 외곽은 이미 허물어져서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내성(內城)은 비록 허물어졌지만 그 터는 여전히 높게 남아있다. 둘레는 20여 리에 달하며 각 면에 문이 하나씩 있다.

23) 범어로는 r jag hi이며 왕사성을 가리킨다. 지금의 비하르(Bih r)의 남서쪽 약 23킬로미터 정도에 있는 Rajgir의 평원에 그 유적이 있다.

 

본래 빈비사라왕의 수도는 상궁성(上宮城)에 있었는데,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의 집이 빈번하게 화재를 당하였다. 한 집이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4방의 이웃으로 불길이 번졌다. 그들은 불을 막느라 여념이 없었고 모든 재산도 다 날리고 일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백성들의 원성이 점점 높아졌으며 살아가는 것이 불안해졌다.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내가 덕이 없어서 백성들이 우환을 당하게 되었구나. 장차 어떤 복업을 닦아야 이 재난을 달랠 수 있을 것인가?"

그러자 군신들이 말하였다.

"대왕의 덕의 감화는 백성들을 온화하게 어루만지셨고 정교(政敎)도 밝게 살피셨습니다. 지금은 백성들이 조심하지 않아서 화재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엄한 벌을 정하셔서 이로써 다시 불을 내는 일이 없도록 다스리셔야 옳은 줄로 압니다. 이제부터는 만일 불이 나면 제일 처음 불이 난 곳을 세밀하게 조사하여 불을 놓은 사악한 자를 벌하셔서 한림(寒林)으로 내쫓아야 할 것입니다. 한림이란 바로 시체를 버리는 곳으로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상서롭지 못한 땅 이라고 여기고 발길조차 향하지 않습니다. 그곳으로 내치신다면 그것은 시체를 버리는 일과도 같습니다. 그러면 그런 비천한 곳에서 지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스스로 조심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좋다. 성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일을 두루 알리도록 하라."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궁중에서 먼저 불이 나게 되었다. 그러자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그곳으로 옮겨가겠다."

그리하여 곧 태자에게 뒷일을 잘 다스리도록 명하고서 자신은 국법을 지키기 위해 거처를 옮겼던 것이다.

 

이 때 폐사리왕은 빈비사라왕이 한림에서 지낸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들을 불러모아 기습을 감행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변방을 지키던 파수꾼이 이 소식을 보고하자 성읍을 세워 왕이 먼저 이곳에 거처한 까닭에 왕사성(王舍城)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뒤를 따라서 관리나 백성들도 모두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살게 되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미생원왕에 이르러서 이 성을 쌓았는데 미생원왕의 태자가 왕위에 오른 뒤에야 이곳을 수도로 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무우 왕에 이르러 파타리(波吒釐)성으로 천도하게 되었는데 왕사성은 바라문에게 보시하였으므로 지금 성 안에는 평민들을 다시 볼 수 없게 되었고 오직 바라문이 천여 가구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가 살고 있는 것이다.

 

궁성의 서남쪽에 두 기의 작은 가람이 있는데, 여러 나라의 객승들이 오가면서 이곳에 머문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옛날에 설법을 하시던 곳이다. 이어 서 그 서북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주지색가(珠底色迦)[당나라 말로는 성력(星曆)이라고 하고, 구역에서는 수제가(樹提伽)라고 하는데 잘못된 것이다]장자24)가 태어난 고향이다.

24) 범어로는 jyoti ka이며 수제(樹提수제(殊提수제가(樹提伽) 등으로 음사하며 화생(火生광명(光明)으로 번역한다. 이 장자는 왕사성의 장자 선현(善賢)의 아들이었는데, 그 출생과 성장에는 기적이 있었다. 그가 집안의 가장이 되었을 때에는 아사세왕까지도 그의 재산을 부러워하였을 정도였다. 그는 그 재산을 구제사업과 가족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부처님께 나아가 출가하였다고 한다.

 

성의 남문 밖 길 왼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여래께서 이곳에서 법을 설하셔서 라호라를 제도하셨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나란타(那爛陀)[당나라 말로는 시무염(施無厭)이라고 한다]승가람25)에 이르게 된다. 옛 노인들의 말에 의하면, 이 가람의 남쪽 암몰라 숲에 못이 있는데, 그 못에 사는 용의 이름이 나란타였다. 그 옆에 가람을 세웠으므로 용의 이름을 따서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라고 한다.

25) 범어로는 n landa이며 나란타는 파트나의 남동쪽 약 55마일, R jgir의 북쪽 약 7마일 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 Bargaon 부근에 있다. 1861Cunningham이 발견하여 조금 발굴하였다. 1915년 이후 인도 고고국(考古局)에 의한 발굴조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유적은 남북으로 6백 미터, 동서로 2백 미터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에, 동쪽과 남쪽에 약 12개의 승원, 서쪽에 불솔도파와 불전이 있었다. 이곳에서 출토품들은 5세기12, 3세기의 것이며 13세기 이후에 이슬람과 힌두교도에 의해서 소실되었다. 현장은 인도에 다시없는 이 학사(學舍)에서 약 5년간 '제부(諸部)를 연찬하고 범서(梵書)를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본래의 뜻에 의하면, 여래께서 옛날 보살행을 닦으실 때 대국의 왕이 되셔서 이 땅에 도읍을 세우셨다. 보살은 중생을 가엾게 여기며 즐겨 널리 베풀었으므로 세상에서는 그 덕을 기려서 '하염없이 베푸는 분[施無厭]'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가람은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그 땅은 본래 암몰라 동산이었는데 5백 명의 상인들이 10억의 금전으로 이 동산을 사서 부처님께 보시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이곳에서 3개월간 법을 설하셨는 데, 여러 상인들이 법을 듣고서 똑같이 성과(聖果)를 증득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지 오래지 않아 이 나라의 선왕(先王)이었던 삭가라아일다(鑠迦羅阿逸多)26)[당나라 말로는 제일(帝日)이라고 한다]는 일승(一 乘)을 높이 공경하고 3보를 존숭하여 이곳을 복된 땅으로 정하고 이 가람을 세웠다.

26) 범어로는 akr ditya이며 이 왕은 굽타 왕조 제4대인 쿠마라굽타 1(415455)이다.

 

그런데 막 공사를 시작할 때 용의 몸에 상처를 내고 말았다. 이 때 점을 잘치는 니건외도(尼乾外道)가 이 광경을 보고 이렇게 예언하였다.

"이곳은 빼어난 땅이니 이 땅에 가람을 건립하면 반드시 창성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5인도의 모범을 이룰 것이며 천 년의 세월이 지나도 더욱 융성해질 것이요, 후대의 학자들이 이로써 학업을 손쉽게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용을 다치게 하였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피를 토하게 되리라."

 

그 아들인 불타국다왕(佛陀多王)27)[당나라 말로는 각호(覺護)라고 한다]이 왕위를 이어받아 선왕의 뛰어난 업을 지켜나가 이곳에 이어서 남쪽에 또 가람을 세웠다. 달타게다국다왕(呾他揭多多王)28)[당나라 말로 는 여래(如來)라고 한다]은 전대의 업적을 더욱 착실하게 이어받아 이곳에 이어 동쪽에 또다시 가람을 세웠다. 파라아질다왕(婆羅阿迭多王)[당나라 말로는 유일(幼日)이라고 한다]이 왕위를 잇자 이곳에 이어 동북쪽에 또 가람을 세웠다. 공사를 끝낸 뒤 크게 잔치를 열어서 경축하였는데, 왕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정성을 다하였고 보통 사람들과 성현들 모두를 청하였다. 그 연회에는 5인도의 승려들이 멀리서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대중들이 좌 정하고 난 뒤에 두 명의 스님이 뒤늦게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을 3층의 누각으로 올라가도록 인도하였다. 그러자 어떤 이가 물었다.

"왕께서 연회를 마련하시려고 하여 먼저 스님을 초청하였는데, 대덕께서는 어찌하여 가장 늦게 오셨습니까?"

그가 답하였다.

"나는 지나국(支那國)에서 왔습니다. 화상(和尙)께서 병에 걸리셨기 때문에 식사를 도와드린 뒤에 출발하였습니다. 멀리서 왕의 청을 받았으므로 이렇게 일부러 온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이 크게 놀라서 황급히 왕에게 이 일을 아뢰었다. 왕은 이 사람들이 성현임을 알고 몸소 그에게 가서 질문하고자 높은 누각으로 올라가 보았다. 하지만 이미 두 사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에 왕은 깊은 믿음을 일으켜서 나라를 버리고 출가하였다. 출가한 뒤에 승가 대중의 말석에 자리잡았지만 마음은 언제나 '나는 예전에 왕의 신분으로 가장 으뜸가는 존귀한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출가한 신분이 되자 비천하게 대중의 끝자리 에 앉게 되었다'라고 생각하며 마땅찮아 하였고 스스로 편안해 하지 못했다.

이에 직접 승가 대중에게 자신의 심정을 알렸다. 그리하여 승가 대중은 함께 의논을 한 뒤에 아직 계를 받지 못한 자는 나이로써 순서를 정하게 하였다. 이 제도는 이 가람만이 지니고 있는 제도였다.

27) 범어로는 buddha-gupta이며 하지만 Buddha-gupta왕이라는 이름은 당시의 역사상에는 나오지 않으며 아마 쿠마라굽타 2(473년 무렵의 짧은 시기 동안 재위)의 뒤를 이은 붓다굽타(Buddha-gupta:477497년 무렵)일 것으로 생각된다.

28) 범어로는 tath gata-gupta이며 이 왕에 대한 기록은 본서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왕의 아들인 대사라(代闍羅)[당나라 말로는 금강(金剛)이라고 한다]가 왕위를 이은 뒤 믿음이 곧고 굳어 이 가람의 서쪽에 또다시 가람을 세웠다. 그 뒤 중인도의 왕29)이 이곳의 북쪽에 또다시 커다란 가람을 세웠다. 그 가람들에 드높은 울타리들을 둘러치고 하나의 문을 사용하도록 되어있다. 이미 역대의 군왕들이 대대로 가람을 일으켜 세웠는데, 그 조각 솜씨는 극치를 이루어 실로 장관이다. 제일왕(帝日王)의 대가람에는 오늘 날 불상을 안치해두었는데 승가 대중에서 날마다 40명의 스님을 뽑아 이곳에서 공양을 대접하며 이로써 시주(施主)의 은혜에 보답하고 있다.

29) 계일왕(戒日王)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왕은 나란타사와 그 승려들을 숭배하는 일이 매우 두터웠다.

 

지금 천 명에 달하는 승도들은 모두 걸출하고 재기가 넘치며 높은 학문을 닦은 자들이다. 덕이 두터워서 당시 그들의 명성을 듣고 이역만리에서 그들에게 도를 배우려고 온 자들이 수백 명이 넘는다. 스님들의 계행이 맑고 깨끗하며 율의(律儀)는 순수하다. 스님들 사이에는 엄격한 규칙이 있으며 대중들은 모두가 올곧고 바르다. 인도 여러 나라들은 모두가 이들을 우러러보며 모범으로 삼고 있을 정도이다. 그들은 가르침을 청하고 깊은 이치를 토론하면서 온종일을 다 소비해도 부족하였고 아침부터 밤까지 서로를 일깨우고 가르쳤으며 젊은이나 나이든 이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 3장의 깊은 이치를 말하지 않는 자는 곧 제 스스로 그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이다

 

그러므로 이역의 학인들도 그 명성을 널리 날리고 싶어하는 자는 모두 다 이곳으로 와서 의문을 제기하고 생각함으로써 그 아름다운 명성을 널리 날리게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다만 이곳에 유학한다는 이름만을 내걸고 노닐어도 모두 다 정중한 예를 받게 된다. 이곳의 논의의 마당에 끼고 싶어 다른 나라나 이역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해 굴복하고 돌아가는 자도 많으니, 예나 지금이나 학문에 깊이 통달해 있는 사람이어야 비로소 입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유학하러 왔던 젊은 학자들로서 학문에 관해 상세하게 논하지만 그 자리에서 물러나 돌아가고 마는 사람도 실로 열 명 가운데에 78명은 된다. 나머지 23명도 세상 이치에 환하다 할지라도 대중들 속에서 차례로 질문을 주고받다 보면 그 예리함이 꺾이고 그 명성이 퇴색당하지 않는 자가 없다.30)

30) 자은전3권에 당시 나란타사 교학(敎學)의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만일 재기가 높고 세상 이치를 두루 알며 기억력이 뛰어나고 재능이 넘쳐나며 덕이 높은 철인들이라면 빛나는 대열에 들어 전통을 잇게 된다. 예를 들면 호법(護法)31)이나 호월(護月)32)과 같은 사람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훌륭한 업적을 떨치게 되며 덕혜(德慧)33)나 견혜(堅慧)34)와 같은 사람은 그 명성이 드높아 당시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숭배를 받았으 며 광우(光友)35)의 청아한 논의나 승우(勝友)36)의 고명한 담론, 나아가 지월(智月)37)은 식견이 탁월하고 명민하며 계현(戒賢)은 덕이 높고 진지하다. 이와 같이 뛰어난 사람들은 대중들이 알아보고 숭배하고 있으며, 그들의 덕은 여러 선배들보다도 높고 그 학문은 과거의 전적에 통달해 있으며 경전에 주석을 단 논서들도 각각 수십 부에 달하는데 이 저술들은 모두 세상에 널리 유포되어 당시에 매우 존중받고 있었다. 가람의 주위에는 부처님의 유적이 백 곳도 넘게 있는데 그 몇 가지를 들어서 간단하게 말해보기로 한다.

31) 호법 범어로는 Dharmap la이며 유식 10대 논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남인도 달라비다국(達羅毗茶國) 건지보라성(建志補羅城) 대신의 아들로 어린 시절부터 이름을 널리 날렸지만 불과 30세에 세상을 떠났다.

32) 호월 범어로는 Candra-gupta이며 또는 월장(月藏)이라고도 한다. 호법과 동시대 인물인데 일찍이 변중변론(辯中邊論)의 주석을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전하고 있지 않다. 그의 사적에 대해서도 알 수 없다.

33) 덕혜 범어로는 Gu amati이며 유식 10대 논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남인도 사람이며 5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생존했던 인물이다.

34) 견혜 범어로는 S ramati이며 불멸 7백 년 뒤에 중인도에서 태어났으며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법계무차별론(法界無差別論)등을 지었다고 한다.

35) 광우 범어로는 Prabh mitra이지만 이 사람의 사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36) 승우 범어로는 Vi e a-mitra이며 유식 10대 논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호법의 문인(門人)이다. 그러나 이 사람의 사적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37) 지월 범어로는 J na-candra이며 유식 10대 논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호법의 문인이다.

 

가람의 서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정사가 있는데, 이곳은 옛날 여래께서 석 달 동안 이곳에 머무시며 여러 천상과 인간들을 위해 미묘한 법을 널리 설하셨다. 남쪽으로 백여 걸음 가다 보면 작은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먼 곳에서 온 비구들이 부처님을 만나 뵙던 곳이다.

옛날 어떤 비구가 먼 곳으로부터 와서 우연히 여래와 성스러운 비구 대중을 만나보고는 존경하는 마음이 일어 오체투지한 뒤에 곧 전륜왕의 자리를 구하고자 발원하였다. 여래께서 이 모습을 보시고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저 비구는 참으로 가엾고 안타깝도다. 복덕이 깊고 믿음이 굳으므로 만일 불과(佛果)를 원한다면 오래지 않아 얻을 것인데, 지금 그는 전륜왕이 되기를 발원하고 있으니 다음 생에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게 될 것이다. 그가 오체투지한 곳에서 금륜(金輪)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 있는 모든 헤아릴 수 없는 수의 하나하나의 티끌이 모두 전륜왕의 과보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미 세상의 쾌락에 탐닉해 있으면서 성스러운 과보를 멀리하는구나."

 

그곳에서 남쪽으로는 관자재보살의 입상(立像)이 있는데38) 이따금 보살의 입상이 향로를 들고서 부처님의 정사로 가서 그 둘레를 오른쪽으로 도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38) 이것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굽타 시기에는 관음보살이 널리 신앙되었고 그 보살상은 어느 곳에서나 출토되고 있다.

 

관자재보살상의 남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그 속에는 여래께서 석 달 동안 머무시며 깎으신 머리카락과 손톱이 있다. 병에 걸린 사람이 이 솔도파를 돌면 대부분 낫는다고 한다

 

그 서쪽 울타리 밖의 못 옆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외도가 참새를 잡아서 부처님께 그 생사에 관한 일을 물어보았던 곳이다.

 

이어서 동남쪽 울타리 안으로 50여 걸음 가다 보면 기이한 나무가 있는 데 높이는 89척에 달한다. 그 줄기는 양쪽으로 나뉘어서 자라나고 있다. 이곳은 옛날 여래께서 양지(楊枝)를 씹고서 땅에 버린 곳인데 이로 인하여 그 양지가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세월이 비록 오래 흘렀지만 나무는 처음과 똑같아서 조금도 증감이 없다.

 

이어서 동쪽에는 큰 정사가 있는데 높이는 2백여 척에 달한다. 여래께서 옛날 넉 달 동안 온갖 미묘한 법을 설하셨던 곳이다

 

이어서 북쪽으로 백여 걸음 더 가면 정사가 있는데 관자재보살상이 그 속에 있다. 믿음이 돈독한 무리들이 공양을 올릴 때면 보살상을 보는 사람마다 저마다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되며 그 장소도 일정하지 않다. 어떤 때는 문 옆에 서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처마 앞으로 나와있기도 하다. 여러 나라의 속가인이나 출가인들이 모두 와 서 이 보살상에 공양을 올린다.

 

관자재보살의 정사에서 북쪽으로 커다란 정사가 있다. 높이는 3백여 척에 달하며 파라아질다왕이 세운 것이다. 정사의 장식과 그 크기, 속에 안치된 불상은 보리수 아래에 있는 큰 정사의 안과 똑같다.

 

그 동북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옛날 여래께서 이곳에서 7일 동안 미묘한 법을 널리 설하셨던 곳이다. 서북쪽에는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곳이다. 그 남쪽에는 유석(鍮石)으로 만든 정사가 있는데 계일왕이 건립한 것이다. 공사는 아직 끝내지 못하였지만 그 크기가 10()에 달하며 이후에 완성될 예정이다

 

다시 동쪽으로 2백여 걸음 가다 보면 울타리 밖에 동으로 만든 부처님의 입상이 모셔져 있다. 높이는 80여 척이고 누각은 6층인 데 가까스로 이 입상을 덮을 수 있을 정도다. 옛날 만주왕(滿胄王)이 만든 것이다.

 

만주왕의 동불상에서 북쪽으로 23리를 가다 보면 벽돌로 만든 정사가 있는데 그 속에 다라보살상(多羅菩薩像)이 안치되어 있다. 그 크기는 아주 높고 신령스러운 감응이 현저하게 나타난다. 매년 새해 첫날에는 성대하게 공양을 올리며 인근 국가의 국왕이나 대신, 호족들도 미묘한 향과 꽃을 가져오고 보배 깃발과 일산을 들고서 경()이나 종 등을 번갈아 치고 두드리며 거문고나 비파·피리 등과 같은 온갖 종류의 악기를 연주하는 가운데 7일 안에 이같 은 법회를 연다.

 

그 울타리 남문 안에는 커다란 우물이 있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아주 세력이 큰 상인 일행이 더위와 목마름에 고생하면서 부처님 계신 곳에 오게 되었다. 세존께서 그 땅을 가리키시자 물이 생겨나게 되었다. 상인의 우두머리는 이에 수레 축으로 땅을 받치고 있었는데 땅에 구멍이 나자 물은 결국 샘처럼 솟게 되었다. 그들은 이 물을 마시고 난 뒤에 법을 듣고 모두 다 성스러운 과위를 얻게 되었다.

 

가람의 서남쪽으로 89리를 가다 보면 구리가읍(拘理迦邑)39)에 이른다. 그 속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이곳은 존자 몰특가라자(沒特伽羅子목갈라나)가 태어난 마을이다. 곁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존자가 이곳에서 무여열반에 드셨다. 솔도파 속에는 존자의 유신(遺身) 사리가 들어있다. 존자는 대바라문 종족이었는데, 사리자와는 어려서부터 친구였다. 사리자는 재능이 있고 영리하여 사람들이 존경하였는데, 존자도 뛰어난 견 식을 지녀 세간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두 사람의 재기와 지혜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으며 언제나 행동을 함께 하였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기로 약속하였고 어느 곳으로 가든지 함께 행동하기로 하였다. 이 두 사람은 똑같이 세속을 싫어하게 되어 함께 집을 버리고 도를 구하기로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산사야(珊闍耶)를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

39) 범어로는 kolika이며 구리가(拘離迦)라고도 음사한다.

 

어느 날 사리자가 마승(馬勝)아라한을 우연히 만나 그로부터 법을 듣고 성스러운 경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돌아가 존자에게 이 일을 거듭 말해주니, 존자도 이 말을 듣고 법을 깨닫고 마침내 초과(初果)를 증득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을 따르던 무리 250명과 함께 부처님 계신 곳으로 향하였다. 세존께서는 그들이 오는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시더니 대중들에게 그들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셨다.

"저기 오는 자가 나의 제자 가운데 신통제일[神足第一]이 될 것이다."

그들이 부처님의 처소에 도착한 뒤 불법에 입문할 것을 청하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잘 왔다. 비구야, 깨끗하게 범행을 닦아 괴로움의 경계를 벗어나거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머리카락과 수염이 떨어져 나갔고 세속의 옷이 저절로 변하여 법의(法衣)를 입게 되었다. 그리하여 계품(戒品)을 청결하게 지키고 행동거지를 단정하고도 부드럽게 갖추었으며 7일이 지나자 번뇌가 다하여 아라한과를 증득하였고 신통력을 얻게 되었다.

 

몰특가라자의 고향에서 동쪽으로 34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빈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만나뵙던 곳이다. 여래께서 처음 불과(佛果)를 증득하신 뒤 마게타국 사람들이 간절하게 뵙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알고 빈비사라왕의 청을 받아들이셨다. 그리하여 이른 아침에 옷을 입고 발우를 들고 천 명의 비구들에게 좌우로 둘러싸인 채 성으로 들어가셨다. 천 명의 비구들은 모두 다 덕이 높은 장로들이었고 본래는 상투를 틀었던 바라문들이었다. 그런데 법을 흠모하여 물들인 옷을 입고서 부처님의 앞뒤에서 모시고 따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그렇게 왕사성으로 들어가자, 이 때 제석천왕이 마나파(摩那婆)40)로 모습을 바꾸어 머리에는 상투[螺髻]를 얹고 왼손에는 금으로 만든 병을 들고 오른손에는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었는데, 그는 땅으로부터 네 손가락 마디만큼 떨어진 허공을 밟고 있었다. 그런 모습으로 대중들 가운데에 있으면서 부처님의 길을 앞에서 인도하였다. 이 때 마게타국 의 빈비사라왕은 그 나라의 모든 바라문과 장자(長者거사 등 수만 명의 무리들과 함께 앞뒤로 둘러싸여 호위를 받으며 왕사성을 나와서 성스러운 대중들을 맞이하고자 하였다.

40) 구역(舊譯)의 어휘이다. 범어로는 m nava이며 나이 어린 사람이란 뜻의 유동(儒童)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바라문 청년의 모습으로 변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빈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맞이한 곳에서 동남쪽으로 20여 리를 가다 보면 가라비라가읍(迦羅臂拏迦邑)41)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이곳은 존자 사리자(사리불)가 태어난 고향이다. 우물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는데, 그 옆에는 솔도파가 있다. 존자가 이곳에서 적멸에 드셨다. 그 솔도파 속에는 유신(遺身)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41) K lapin ka인 듯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존자는 대바라문 종족으로서 그의 아버지는 덕이 높고 재능이 있으며 박식하고 사물의 정밀한 이치까지도 깊이 사유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모든 전 적을 두루 익히고 그 궁극적인 부분까지 탐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의 아내가 어느 날 꿈을 꾼 뒤 남편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젯밤 잠을 자는데 꿈에서 낯선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갑옷을 입고 손에는 금강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모든 산들을 부수었습니다. 그러더니 물러나서 어느 산 아래에 우뚝 섰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말하였다.

"참으로 좋은 꿈이구려. 그대는 이제 아들을 낳을 것이오. 그 아이는 모든 학문에 통달하고 세상의 이치에 환하여 모든 논사들을 논파하고 그들의 주된 논점을 깰 것이나 오직 한 사람에게만은 그러지 못할 것이고 그의 제자가 될 것이오."

그 후에 과연 아내는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임신을 하자 그녀는 갑자기 총명해졌으며 논리가 정연하며 품위 있는 말을 하게 되었고, 말을 할 때 머뭇거리거나 남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존자의 나이가 여덟 살 되었을 때 이미 그의 이름은 4방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성품은 순박하고 어질었으며 마음은 자비에 넘쳤다. 번뇌를 부수고 지혜를 이루었으며 몰특가라자와 어려서부터 서로 친구가 되었다. 그들은 세속을 너무도 싫어하게 되었으나 아직 어 느 스승에게 귀의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에 몰특가라자와 함께 산사야 외도에게 가서 그곳에서 수행을 하였다. 그러면서 함께 이야기하였다.

"이것은 궁극의 이치가 아니고 괴로움의 경계를 능히 다하지 못한다. 각자 지혜를 인도할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먼저 감로를 맛보게 되면 반드시 그 맛을 함께 나누기로 하자."

이 때 대아라한인 마승이 발우[應器]를 들고 걸식을 하러 성에 들어왔다. 사리자가 평온하고 품위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서 그에게 가서 물었다.

"그대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그가 답하였다.

"석가족의 태자로서 세속을 싫어하여 집을 떠나서 등정각을 이루신 분이 바로 나의 스승입니다."

사리자가 말하였다.

"어떤 법을 설하셨는지 제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가 답하였다.

"나는 이제 막 가르침을 받은 터라 아직 깊은 이치에 도달하지 못하였습니다."

사리자가 말하였다.

"부디 스승으로부터 들은 것을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마승은 자신이 아는 대로 사리자에게 설해주었다. 사리자는 그 말을 듣고 이미 초과(初果)를 증득하였다. 이에 자신을 따르던 250명을 데리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갔는데, 세존께서는 멀리서 그를 바라보시더니 대중들에게 그를 가리키시며 말씀하셨다.

"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지혜로운 자[智慧第一]가 될 것이다."

그가 부처님께 이르러서 정수리를 발에 대고 절을 올린 다음에 부처님의 법을 따르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잘 왔다. 비구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계품(戒品)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 보름이 지나 부처님께서 장조범지(長爪梵志)42)를 위해 법을 설하셨는데, 사리자는 그 법을 듣다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라한과를 증득하게 되었다. 그 뒤에 아난이 부처님께서 적멸에 드실 시기를 일러주시는 말씀을 듣게 되자, 그들은 이 말을 서로 전하며 깊은 슬픔에 잠겼다. 부처님에 대한 사리자의 존경과 연모의 마음이 더욱 깊어지자 그는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는 모습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세존에게 자신이 먼저 적멸에 드는 것을 허락해 주십사 청하였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지금이 그 때임을 알아라."

그리하여 사람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자신이 태어난 마을로 향하였다. 그의 시자인 사미가 이 사실을 성읍에 두루 고하자, 미생원왕과 그 나라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둘러 달려왔고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사리자가 그들을 위해 자세하게 법을 설하니 법을 듣고 난 뒤 그들은 떠나갔다. 그 후 늦은 밤이 되자 바른 생각에 마음을 집중하고 멸진정에 들었으며 선정에서 일어난 뒤에 적멸에 들어갔다.

42) 장조(長爪)란 범어로 d rgha-nakha이며 사리자의 숙부이다.

 

가라비라가읍에서 동남쪽으로 45리를 가다 보면 솔도파가 있는데, 이곳은 존자 사리자의 문인(門人)이 열반에 든 곳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말하기를, 가섭파부처 재세시에 3구지(拘胝)[구지(拘胝)란 당나라 말로 억()이라고 한다]의 대아라한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나란히 이 땅에서 무여적멸에 들었던 곳이라고 한다.

 

인다살라구하-사리자의 문인을 위한 솔도파에서 동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인타라세라구하산(因陀羅勢羅寠訶山)43)[당나라 말로는 제석굴(帝釋窟)이라고 한다]에 도착한다. 이 산은 암석이 높고 계곡은 몹시 깊으며 꽃나무 숲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산마루에는 봉우리가 둘 있는데 우뚝 솟아있다. 서쪽 봉우리에 있는 남쪽의 바위 사이에 커다란 석실이 있는데 넓지만 그다지 높지는 않다. 옛날 여래께서 일찍이 이곳에 머무셨는데 이따금 제석천이 마흔두 가지의 의문 나는 일을 돌에 써서 부처님께 여쭈었다.44)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하여 널리 설명하여 주셨는데 그 자취가 지금도 남아있다. 지금은 이렇게 불상을 만들어서 옛날 부처님의 성스럽던 위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 속에 들어가서 절을 올리는 자는 누구라도 숙연해지고 삼가고 존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43) 범어로는 indra- aila-guh 이며 이 산은 왕사성 가까운 암몰라 마을에 있으며 이 동굴 앞에 인다살라 나무가 자라있으므로 이런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R jgir에서 6마일 떨어진 Giriyek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44) 제석천이 제석굴에서 부처님께 질문을 하였다는 이야기는 장아함경10권 등에 나온다. 하지만 마흔두 가지란 숫자는 보이지 않는다. 이 설화는 불교미술의 소재로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산봉우리 위에는 과거 네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거니시던 유적지가 있다. 동쪽 봉우리 위에 가람이 있는데 그 지방에서 전하는 기록들에 의하면, 그곳에 사는 승가 대중들이 이따금 한밤중에 서쪽 봉우리를 바라보면 석실의 불상 앞에 언제나 등불이 켜 있으며 항상 밝게 빛나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고 말한다.

 

인타라세라구하산 동쪽 봉우리의 가람 앞에 솔도파가 있는데, 이것은 흥사(亘許贈反娑)[당나라 말로는 안()이라고 한다]라고 불린다. 옛날 이 가람은 '점진적인 가르침[漸敎]'을 말하는 소승을 익히고 있었다. 그러므로 3정식 (淨食)을 시행하고 있었으며 그 제도를 준수하고 어기지 않았다. 그 후에는 3()을 구하여도 적당한 때에 얻지 못하는 일이 생겼다. 어느 날 비구가 산책을 하다가 홀연히 기러기 떼가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서 농담 삼아 말하였다.

"오늘 승가 대중의 식사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러니 마하살타는 지금이 바로 그 때임을 아셔야 합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러기 한 마리가 떨어져 그 스님 앞에 자신의 몸을 던져 숨을 끊었다. 비구가 이 광경을 보고서 승가 대중에게 낱낱이 알렸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모두가 슬퍼하며 서로 말하였다.

"여래께서 법을 마련하시어 중생들을 근기에 따라 이끌고 권하셨는데, 우리들은 어리석음을 고수하여 점교를 지키고 행하였다. 그런데 실상은 대승이 올바른 이치이다. 그러니 먼저 집착하였던 가르침을 고쳐서 부처님의 성스러운 뜻을 따르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이 기러기는 우리에게 부처님의 경계를 내려주어 참으로 지혜롭게 인도해주었다. 이제 그의 두터운 덕을 기려서 이 일을 기록하여 영원히 전하여야겠다."

그리하여 솔도파를 세워서 그 훌륭한 공적을 후세에 알리게 하였다. 그리고 죽은 기러기를 그 아래에 묻었던 것이다.

 

인타라세라구하산의 동북쪽으로 150160리를 가면 가포덕가(迦布德迦)[당나라 말로는 합(鴿)이다]가람45)에 도착한다. 이곳의 승도들은 2백여 명 되고 설일체유부를 익히고 있다. 가람의 동쪽에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45) 범어로는 kapotaka이며 작은 비둘기라는 뜻이다. 이 가람의 소재지는 본문의 제석산으로부터 동북쪽으로 150160리라고 하는 것을 5060리로 정정해서 지금의 Bih r라고 추정하고 있다. 비하르는 다음의 내용에서 보게 되는 관자재보살을 제사지내는 Vih ra(의 뜻)에서 온 지명이라고 한다.

 

옛날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여러 대중들을 위하여 하룻밤을 묵으시며 법을 설하셨다. 이 때 새를 잡는 사냥꾼이 숲 속에서 그물을 펼쳐놓고 새를 잡으려고 하였다. 그 날 그는 새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자 마침내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박복하여 언제나 일이 꼬이는 것이다."

그리고는 부처님 계신 곳에 가서 이렇게 소리내어 말하였다.

"오늘 여래께서 이곳에서 법을 설하시는 바람에 저의 그물에 새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제 아내와 자식들은 굶주리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여래께서 말씀하셨다.

"불을 피우면 너에게 음식을 줄 것이다."

여래께서 이 때 커다란 비둘기로 모습을 바꾸어 불 속에 뛰어들어 숨을 거두었다. 그리하여 새 사냥꾼은 그 새를 들고 돌아가서 식구들과 함께 그것을 먹었다. 그 뒤에 다시 부처님 처소에 가니 여래께서는 방편으로 그를 교화하셨다. 새 사냥꾼은 법을 듣고 잘못을 깨닫고 스스로 새로워졌다. 그리하여 집을 버리고 수행하며 학업을 닦아서 마침내 성과(聖果)를 증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비둘기[鴿]가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가포덕가가람에서 남쪽으로 23리 가다 보면 외딴 산에 이르게 된다. 그 산은 매우 험준하며 수목과 숲들이 울창하다. 빼어난 꽃이 벼랑을 뒤덮은 채 피어있고 맑은 물이 계곡을 따라 흐르고 있다. 위에는 수많은 정사와 영묘(靈廟)가 있는데 그 조각의 솜씨는 극치에 달해 있다. 한가운데에 있는 정사에는 관자재보살상이 안치되어 있다. 보살상이 크기는 비록 작지만 위엄이 넘쳐 나서 그 앞에 서면 숙연해진다. 손에는 연꽃을 들고 있으며 정수리에 불상을 이고 있는 모습이다. 언제나 사람들 몇 명이 그곳에서 단식하면서 마음을 기울여 보살을 뵙기를 구하고 있다. 7일이나 27, 또는 한 달에 이르도록 기도를 올리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은 관자재보살이 미묘한 얼굴과 위엄에 넘친 모습으로 찬란하게 빛을 내면서 불상으로부터 나와서 그 사람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는 모습을 보고 감동하기도 한다.46)

46) 이 내용에 관해서는 자은전3권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옛날 남해의 승가라국왕이 맑게 갠 날 아침에 거울을 꺼내어 얼굴을 비추었지만 자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갑자기 그 거울을 통해 섬부주 마게타국의 다라숲 속의 낮은 산 정상에 이 보살상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왕은 깊이 감복하고 그 보살상을 그림으로 그려서 찾으러 다녔다. 마침내 이 산에 도착하였는데 그림과 아주 닮은 보살상이 있었다. 그리하여 정사를 세우고 온갖 공양을 올렸다. 그 후에 여러 왕들이 그 유풍(遺風)을 높이 기려서 마침내 그 옆에 정사와 영묘를 건립하고 온갖 향과 꽃과 음악으로 끊임없는 공양을 올렸다.

 

외딴 산에 모셔진 관자재보살상에서 동남쪽으로 40여 리를 가다 보면 가람 한 곳에 도착한다.47) 승도들은 50여 명 있는데 그들은 모두 소승법의 가르침을 익히고 있다. 가람 앞에는 커다란 솔도파가 있는데 신기한 기적이 많이 일어난다. 부처님께서 옛날 이곳에서 범천왕 등을 위하여 7일간 법을 설하셨다고 한다. 그 옆에는 과거 세 분의 부처님께서 앉거나 산책하시던 유적지가 있다

47) 비하르로부터 동남쪽으로 7마일 떨어진 지점에 Titar wa의 유적지가 있다. 그곳에는 사원의 폐허로 여겨지는 장소가 있으며 바로 이곳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후에 40리를 4리로 정정하여 Aphsar가 이에 해당한다고 보고 있다.

 

가람의 동북쪽으로 70여 리 '48)를 가다 보면 긍가하 남쪽에 위치한 커다란 마을에 도착하게 된다. 사람들은 매우 많으며 천사(天祠)가 몇 곳 있는데 모두 더할 나위 없는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48) 현장의 이 기록에 따라서 가보면 아무런 유적지도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170여 리로 정정하여 갠지스 강으로부터 20마일 떨어진 지점의 Shekhpur로 추정할 수 있다.

 

이곳에서 동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커다란 솔도파가 있는데 부처님께서 옛날 이곳에서 하루를 묵으시며 법을 설하셨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가면 산림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백여 리를 가다보면 낙반니라(洛般膩羅) 마을49)에 도착하게 된다. 가람 앞에는 커다란 솔도파가 있는데 무우왕이 세운 것이다. 부처님께서 옛날 이곳에서 석 달 동안 법을 설하셨다

49) 정확한 원음(原音)이나 위치에 대해서는 미상(未詳)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23리 떨어진 곳에 커다란 못이 있는데, 둘레는 30여 리에 달하며 네 가지 색의 연꽃이 사시사철 피어난다. 이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커다란 숲 속으로 들어가게 되 는데 2백여 리를 가다 보면 이란나발벌다국(伊爛拏鉢伐多國)[중인도의 경계]에 도착하게 된다.

 

 

大唐西域記卷第八(一國)

 

 

1. 摩揭陀國上

 

1   摩揭陀國周五千餘里城少居人邑多編戶地沃壤滋稼穡有異稻種其粒麁大香味殊越光色特甚彼俗謂之供大人米土地墊濕邑居高原孟夏之後仲秋之前平居流水可以泛舟風俗淳質氣序溫暑崇重志學遵敬佛法伽藍五十餘所僧徒萬有餘人並多宗習大乘法教天祠數十異道寔多

 

2   殑伽河南有故城周七十餘里荒蕪雖久基址尚在昔者人壽無量歲時號拘蘇摩補羅城(唐言香花宮城)王宮多花故以名焉逮乎人壽數千歲更名波吒釐子城(舊曰巴連弗邑訛也)

 

3   有婆羅門高才博學門人數千傳以受業諸學徒相從遊觀有一書生俳佪悵望同儔謂曰:「夫何憂乎?」:「盛色方剛羈遊履影歲月已積藝業無成顧此為言憂心彌劇。」於是學徒戲言之曰:「今將子求娉婚親。」乃假立二人為男父母二人為女父母遂坐波吒釐樹女聲樹也。」採時果酌清流陳婚姻之緒請好合之期時假女父攀花枝以授書生曰:「斯嘉偶也幸無辭焉。」書生之心欣然自得日暮言歸懷戀而止學徒曰:「前言戲耳幸可同歸林中猛獸恐相殘害。」書生遂留往來樹側景夕之後異光燭野管絃清雅帷帳陳列俄見老翁策杖來慰復有一嫗携引少女並賓從盈路袨服奏樂翁乃指少女曰:「此君之弱室也。」酣歌樂宴經七日焉學徒疑為獸害往而求之乃見獨坐樹陰若對上客告與同歸辭不從命後自入城拜謁親故說其始末聞者驚駭與諸友人同往林中咸見花樹是一大第僮僕役使驅馳往來而彼老翁從容接對陳饌奏樂賓主禮備諸友還城具告遠近朞歲之後生一子男謂其妻曰:「吾今欲歸未忍離阻適復留止棲寄飄露。」其妻既聞具以白父翁謂書生曰:「人生行樂詎必故鄉今將築室宜無異志。」於是役使之徒功成不日香花舊城遷都此邑由彼子故神為築城自爾之後因名波吒釐子城焉

 

4   王故宮北有石柱高數十尺是無憂王作地獄處釋迦如來涅槃之後第一百年有阿輸迦(唐言無憂舊曰阿育訛也)王者頻毘婆羅(唐言影堅舊曰頻婆娑訛也)王之曾孫也自王舍城遷都波吒釐築外郭周於故城年代浸遠唯餘故基伽藍天祠及窣堵波餘址數百存者二三唯故宮北臨殑伽河小城中有千餘家

 

5   無憂王嗣位之後舉措苛暴乃立地獄作害生靈周垣峻峙隅樓特起猛焰洪鑪銛鋒利刃備諸苦具擬像幽塗招募凶人立為獄主初以國中犯法罪人無挍輕重總入塗炭後以行經獄次擒以誅戮至者皆死遂滅口焉時有沙門初入法眾巡里乞食遇至獄門獄吏凶人擒欲殘害沙門惶怖請得禮懺俄見一人縛來入獄斬截手足磔裂形骸俯仰之間支體糜散沙門見已深增悲悼成無常觀證無學果獄卒曰:「可以死矣。」沙門既證聖果心夷生死雖入鑊湯若在清池有大蓮花而為之座獄主驚駭馳使白王王遂躬觀深讚靈祐獄主曰:「大王當死。」王曰:「。」對曰:「王先垂命令監刑獄凡至獄垣皆從殺害不云王入而獨免死。」王曰:「法已一定理無再變我先垂令豈除汝身汝久濫生我之咎也。」即命獄卒投之洪鑪獄主既死王乃得出於是頹牆堙塹廢獄寬刑

 

6   地獄南不遠有窣堵波基址傾陷唯餘覆鉢之勢寶為廁飾石作欄檻即八萬四千之一也無憂王以人功建於宮焉中有如來舍利一斗靈鑒間起神光時燭無憂王廢獄之後遇近護大阿羅漢方便善誘隨機導化王謂羅漢曰:「幸以宿福位據人尊慨茲障累不遭佛化今者如來遺身舍利欲重修建諸窣堵波。」羅漢曰:「大王以福德力役使百靈以弘誓心匡護三寶是所願也今其時矣。」因為廣說獻土之因如來懸記興建之功無憂王聞以慶悅召集鬼神而令之曰:「法王導利含靈有慶我資宿善尊極人中如來遺身重修供養今爾鬼神勠力同心境極贍部戶滿拘胝以佛舍利起窣堵波心發於我功成於汝勝福之利非欲獨有宜各營搆待後告命。」鬼神受旨在所興功功既成已咸來請命無憂王既開八國所建諸窣堵波分其舍利付鬼神已謂羅漢曰:「我心所欲諸處同時藏下舍利心雖此冀事未從欲。」羅漢曰:「王命神鬼至所期日日有隱蔽其狀如手此時也宜下舍利。」王承此旨宣告鬼神逮乎期日無憂王觀候光景日正中時羅漢以神通力申手蔽日營建之所咸皆瞻仰同於此時功績咸畢

 

7   窣堵波側不遠精舍中有大石如來所履雙迹猶存其長尺有八寸廣餘六寸矣兩迹俱有輪相十指皆帶花文魚形映起光明時照昔者如來將取寂滅北趣拘尸那城南顧摩揭陀國蹈此石上告阿難曰:「吾今最後留此足迹將入寂滅顧摩揭陀也百歲之後有無憂王命世君臨建都此地匡護三寶役使百神。」及無憂王之嗣位也遷都築邑掩周迹石既近宮城恒親供養後諸國王競欲舉歸石雖不大眾莫能轉近者設賞迦王毀壞佛法遂即石所欲滅聖迹鑿已還平文彩如故於是捐棄殑伽河流尋復本處其側窣堵波即過去四佛坐及經行遺迹之所

 

8   佛迹精舍側不遠有大石柱高三十餘尺書記殘缺其大略曰:「無憂王信根貞固三以贍部洲施佛三以諸珍寶重自酬贖。」其辭云大略斯在

 

9   故宮北有大石室外若崇山內廣數丈是無憂王為出家弟役使神鬼之所建也無憂王有同母弟名摩醯因陀羅(唐言大帝)生自貴族服僣王制奢侈縱暴眾庶懷怨國輔老臣進諫王曰:「驕弟作威亦已太甚夫政平則國治人和則主安古之則訓由來久矣願存國典收付執法。」無憂王泣謂弟曰:「吾承基緒覆燾生靈況爾同胞豈忘惠愛不先匡導已陷刑法上懼先靈下迫眾議。」摩醯因陀羅稽首謝曰:「不自謹行敢干國憲願賜再生更寬七日。」於是置諸幽室嚴加守衛珍羞上饌進奉無虧守者唱曰:「已過一日餘有六日。」至第六日已既深憂懼更勵身心便獲果證昇虛空示神迹尋出塵俗遠棲巖谷無憂王躬往謂曰:「昔拘國制欲致嚴刑豈意清昇取證聖果既無滯累可以還國。」弟曰:「昔羈愛網心馳聲色今出危城志悅山谷願棄人間長從丘壑。」王曰:「欲靜心慮豈必幽巖吾從爾志當為崇樹。」遂召命鬼神而告之曰:「吾於後日廣備珍羞爾曹相率來集我會各持大石自為床座。」諸神受命至期畢萃眾會既已王告神曰:「石座從橫宜自積聚因功不勞壘為虛室。」諸神受命不日而成無憂王躬往迎請止此山廬

 

10   故宮北地獄南有大石槽是無憂王匠役神功作為此器飯僧之時以儲食也

 

11   故宮西南有小石山周巖谷間數十石室無憂王為近護等諸阿羅漢役使鬼神之所建立傍有故臺餘基積石池沼漣漪清瀾澄鑒隣國遠人謂之聖水若有飲濯罪垢消滅

 

12   山西南有五窣堵波崇基已陷餘址尚高遠而望之欝若山阜面各數百步後人於上重更修建小窣堵波。《印度記:「昔無憂王建八萬四千窣堵波已尚餘五斗舍利故別崇建五窣堵波制奇諸處靈異間起以表如來五分法身薄信之徒竊相評議云是昔者難陀王建此藏以儲七寶其後有王不甚淳信聞先疑議肆其貪求興動軍師躬臨發掘地震山傾雲昏日翳窣堵波中大聲雷震士卒僵仆象馬驚奔自茲已降無敢覬覦。」或曰:「眾議雖多未為確論循古所記信得其實。」

 

13   故城東南有屈(居勿反)吒阿濫摩(唐言鷄園)僧伽藍無憂王之所建焉無憂王初信佛法也式遵崇建修殖善種召集千僧聖兩眾四事供養什物周給頹毀已久基址尚在

 

14   伽藍側有大窣堵波名阿摩落伽者印度藥果之名也無憂王搆疾彌留知命不濟欲捨珍寶崇樹福田權臣執政誡勿從欲其後因食留阿摩落果玩之半爛握果長息問諸臣曰:「贍部洲主今是何人?」諸臣對曰:「唯獨大王。」王曰:「不然我今非主唯此半果而得自在嗟乎世間富貴危甚風燭位據區宇名高稱謂臨終匱乏見逼強臣天下非己半果斯在!」乃命侍臣而告之曰:「持此半果詣彼雞園施諸眾僧作如是說:『昔一贍部洲主今半阿摩落王稽首大德僧前願受最後之施凡諸所有皆已喪失唯斯半果得少自在哀愍貧乏增長福種。』」僧中上座作如是言:「無憂大王宿期弘濟瘧疾在躬姦臣擅命積寶非己半果為施承王來命普施眾僧。」即召典事羹中總煮收其果核起窣堵波既荷厚恩遂旌顧命

 

15   阿摩落伽窣堵波西北故伽藍中有窣堵波謂建揵稚聲

 

16   此城內伽藍百數僧徒肅穆學業清高外道學人銷聲緘口其後僧徒相次徂落而諸後進莫繼前修外道師資傅訓成藝於是命儔召侶千計萬數來集僧坊揚言唱曰:「夫擊揵稚招集學人!」群愚同止謬有扣擊遂白王請挍優劣外道諸師高才達學僧徒雖眾辭論膚淺外道曰:「我論勝自今已後諸僧伽藍不得擊揵稚以集眾也。」王允其請依先論制僧徒受恥忍詬而退十二年間不擊揵稚時南印度那伽閼剌樹那菩薩(唐言龍猛舊譯曰龍樹非也)幼傳雅譽長擅高名捨離欲愛出家修學深究妙理位登初地有大弟子提婆者智慧明敏機神警悟白其師曰:「波吒釐城諸學人等辭屈外道不擊揵稚日月驟移十二年矣敢欲摧邪見山然正法炬。」龍猛曰:「波吒釐城外道博學爾非其儔吾今行矣。」提婆曰:「欲摧腐草詎必傾山敢承指誨黜諸異學大師立外道義而我隨文破析詳其優劣然後圖行。」龍猛乃扶立外義提婆隨破其理七日之後龍猛失宗已而歎曰:「謬辭易失邪義難扶爾其行矣摧彼必矣!」提婆菩薩夙擅高名波吒釐城外道之聞也即相召集馳白王曰:「大王昔紆聽覽制諸沙門不擊揵稚願垂告命令諸門候隣境異僧勿使入城恐相黨援輕改先制。」王允其言嚴加伺候提婆既至不得入城聞其制令便易衣服疊僧加胝置草束中褰裳疾驅負戴而入既至城中棄草披衣至此伽藍欲求止息知人既寡莫有相舍遂宿揵稚臺上於晨朝時便大振擊眾聞伺察乃客遊比丘諸僧伽藍傳聲響應王聞究問莫得其先至此伽藍咸推提婆提婆曰:「夫揵稚者擊以集眾有而不用懸之何為?」王人報曰:「先時僧眾論議墮負制之不擊已十二年。」提婆曰:「有是乎吾於今日重聲法鼓。」使報王曰:「有異沙門欲雪前恥。」王乃召集學人而定制曰:「論失本宗殺身以謝。」於是外道競陳旗鼓諠談異義各曜辭鋒提婆菩薩既昇論座聽其先說隨義析破曾不浹辰摧諸異道國王大臣莫不慶悅建此靈基以旌至德

 

17   建擊揵稚窣堵波北有故基昔鬼辯婆羅門所居處也

 

18   此城中有婆羅門葺宇荒藪不交世路祠鬼求福魍魎相依高論劇談雅辭響應人或激難垂帷以對舊學高才無出其右士庶翕然仰之猶聖有阿濕縛窶沙(唐言馬鳴)菩薩者智周萬物道播三乘每謂人曰:「此婆羅門學不師受藝無稽古屏居幽寂獨擅高名將非神鬼相依妖魅所附何能若是者乎夫辯資鬼授言不對人辭說一聞莫能再述吾今往彼觀其舉措。」遂即其廬而謂之曰:「仰欽盛德為日已久幸願褰帷敢申宿志。」而婆羅門居然簡傲垂帷以對終不面談馬鳴心知鬼魅情甚自負辭畢而退謂諸人曰:「吾已知矣摧彼必矣。」尋往白王:「唯願垂許與彼居士較論劇談。」王聞駭曰:「斯何人哉若不證三明具六通何能與彼論乎?」命駕躬臨詳鑒辯論是時馬鳴論三藏微言述五明大義妙辯縱橫高論清遠而婆羅門既述辭已馬鳴重曰:「失吾旨矣宜重述之。」時婆羅門默然杜口馬鳴叱曰:「何不釋難所事鬼魅宜速授辭!」疾褰其帷視占其怪婆羅門惶遽而曰:「!」馬鳴退而言曰:「此子今晨聲問失墜虛名非久斯之謂也。」王曰:「非夫盛德誰鑒左道知人之哲絕後光前國有常典宜旌茂實。」

 

19   城西南隅二百餘里有伽藍餘跡其傍有窣堵波神光時燭靈瑞間發近遠眾庶莫不祈請是過去四佛坐及經行遺迹之所

 

20   故伽藍西南行百餘里至鞮羅釋迦伽藍庭宇四院觀閣三層崇臺累仞重門洞啟頻毘娑羅王末孫之所建也旌召高才廣延俊德異域學人遠方髦彥同類相趨肩隨戾止僧徒千數並學大乘中門當塗有三精舍上置輪相鈴鐸虛懸下建層基軒檻周列戶牖棟梁壖垣階陛金銅隱起廁間莊嚴中精舍佛立像高三丈左多羅菩薩像右觀自在菩薩像凡斯三像鍮石鑄成威神肅然冥鑒遠矣精舍中各有舍利一升靈光或照奇瑞間起

 

21   鞮羅釋迦伽藍西南九十餘里至大山雲石幽蔚靈僊攸舍毒蛇暴龍窟穴其藪猛獸鷙鳥棲伏其林山頂有大盤石上建窣堵波其高十餘尺是佛入定處也昔者如來降神止此坐斯磐石入滅盡定時經宿焉諸天靈聖供養如來鼓天樂雨天花如來出定諸天感慕以寶金銀起窣堵波去聖逾邈寶變為石自古迄今人未有至遙望高山乃見異類長蛇猛獸群從右旋天仙靈聖肩隨讚禮

 

22   山東岡有窣堵波在昔如來佇觀摩揭陀國所履之處也

 

23   山西北三十餘里山阿有伽藍負嶺崇基疎崖峙閣僧徒五十餘人並習大乘法教瞿那末底(唐言德慧)菩薩伏外道之處

 

24   此山中有外道摩沓婆者祖僧佉之法而習道焉學窮內外言極空有名高前列德重當時君王珍敬謂之國寶臣庶宗仰咸曰家師隣國學人承風仰德儔之先進誠博達也食邑二城環居封建時南印度德慧菩薩幼而敏達早擅精微學通三藏理窮四諦聞摩沓婆論極幽微有懷挫銳命一門人裁書謂曰:「敬問摩沓婆善安樂也宜忘勞弊精習舊學三年之後摧汝嘉聲。」如是第二第三年中每發使報及將發迹重裁書曰:「年期已極學業何如吾今至矣汝宜知之。」摩沓婆甚懷惶懼誡諸門人及以邑戶:「自今之後不得居止沙門異道遞相宣告勿有犯違。」時德慧菩薩杖錫而來至摩沓婆邑人守約莫有相舍諸婆羅門更詈之曰:「斷髮殊服何異人乎宜時速去勿此止也!」德慧菩薩欲摧異道冀宿其邑因以慈心卑辭謝曰:「爾曹世諦之淨行我又勝義諦之淨行淨行既同何為見拒?」婆羅門因不與言但事驅逐逐出邑外入大林中林中猛獸群行為暴有淨信者恐為獸害乃束蘊持仗謂菩薩曰:「南印度有德慧菩薩者遠傳聲問欲來論議故此邑主懼墜嘉聲重垂嚴制勿止沙門恐為物害故來相援行矣自安勿有他慮。」德慧曰:「良告淨信德慧者我是也。」淨信聞已更深恭敬謂德慧曰:「誠如所告宜可速行。」即出深林止息空澤淨信縱火持弓周旋左右夜分已盡謂德慧曰:「可以行矣恐人知聞來相圖害。」德慧謝曰:「不敢忘德。」於是遂行至王宮謂門者曰:「今有沙門自遠而至願王垂許與摩沓婆論。」王聞驚曰:「此妄人耳。」即命使臣往摩沓婆所宣王旨曰:「有異沙門來求談論今已瑩灑論場宣告遠近佇望來儀願垂降趾。」摩沓婆問王使曰:「豈非南印度德慧論師乎?」:「。」摩沓婆聞心甚不悅事難辭免遂至論場國王大臣豪族咸皆集會欲聽高談德慧先立宗義洎乎景落摩沓婆辭以年衰智惛捷對請歸靜思方酬來難每事言歸及旦昇座竟無異論至第六日歐血而死其將終也顧命妻曰:「爾有高才無忘所恥!」摩沓婆死匿不發喪更服鮮綺來至論會眾咸諠譁更相謂曰:「摩沓婆自負才高恥對德慧故遣婦來優劣明矣。」德慧菩薩謂其妻曰:「能制汝者我已制之。」摩沓婆妻知難而退王曰:「何言之密彼便默然?」德慧曰:「惜哉摩沓婆死矣其妻欲來與我論耳。」王曰:「何以知之願垂指告。」德慧曰:「其妻之來也面有死喪之色言含哀怨之聲以故知之沓婆死矣能制汝者謂其夫也。」王命使往觀果如所議王乃謝曰:「佛法玄妙英賢繼軌無為守道含識霑化依先國典褒德有常。」德慧曰:「苟以愚昧體道居貞存正足論濟物將弘汲引先摧傲慢方便攝化今其時矣唯願大王以摩沓婆邑戶子孫千代常充僧伽藍人則垂誡來葉流美無窮唯彼淨信見匡護者福延于世食用同僧以勸清信以褒厚德。」於是建此伽藍式旌勝迹

 

25   摩沓婆論敗之後十數淨行逃難隣國告諸外道恥辱之事招募英俊來雪前恥王既珍敬德慧躬往請曰:「今諸外道不自量力結黨連群敢聲論鼓唯願大師摧諸異道。」德慧曰:「宜集論者。」於是外道學人欣然相慰:「我曹今日勝其必矣。」時諸外道闡揚義理德慧菩薩曰:「今諸外道逃難遠遊如王先制皆是賤人我今如何與彼對論?」德慧有負座竪素聞餘論頗閑微旨侍立於側聽諸高談德慧拊其座而言曰:「汝可論。」眾咸驚駭異其所命時負座竪便即發難深義泉涌清辯響應三復之後外道失宗重挫其銳再折其翮自伏論已來立為伽藍邑戶

 

26   德慧伽藍西南二十餘里至孤山有伽藍尸羅跋陀羅(唐言戒賢)論師論義得勝捨邑建焉竦一危峯如窣堵波置佛舍利

 

27   論師三摩呾吒國之王族婆羅門之種也少好學有風操遊諸印度詢求明哲至此國那爛陀僧伽藍遇護法菩薩聞法信悟請服染衣諮以究竟之致問以解脫之路既窮至理亦究微言名擅當時聲高異域南印度有外道探賾索隱窮幽洞微聞護法高名起我慢深嫉不阻山川擊鼓求論:「南印度之人也承王國內有大論師我雖不敏願與詳議。」王曰:「有之誠如議也。」乃命使臣請護法曰:「南印度有外道不遠千里來求較論唯願降跡赴集論場。」護法聞已攝衣將往門人戒賢者後進之翹楚也前進請曰:「何遽行乎?」護法曰:「自慧日潛暉傳燈寂照外道蟻聚異學蜂飛故我今者將摧彼論。」戒賢曰:「恭聞餘論敢摧異道。」護法知其俊也因而允焉是時戒賢年甫三十眾輕其少恐難獨任護法知眾心之不平乃解之曰:「有貴高明無云齒歲以今觀之破彼必矣。」逮乎集論之日遠近相趨少長咸萃外道弘闡大猷盡其幽致戒賢循理責實深極幽玄外道辭窮蒙恥而退王用酬德封此邑城論師辭曰:「染衣之士事資知足清淨自守何以邑為?」王曰:「法王晦迹智舟淪湑不有旌別無勵後學為弘正法願垂哀納。」論師辭不獲已受此邑焉便建伽藍窮諸規矩捨其邑戶式修供養

 

28   戒賢伽藍西南行四五十里渡尼連禪河至伽耶城甚險固少居人唯婆羅門有千餘家大仙人祚胤也王所不臣眾咸宗敬城北三十餘里有清泉印度相傳謂之聖水凡有飲濯罪垢消除

 

29   城西南五六里至伽耶山谿谷杳冥峯巖危險印度國俗稱曰靈山自昔君王馭宇承統化洽遠人德隆前代莫不登封而告成功山頂上有石窣堵波高百餘尺無憂王之所建也靈鑒潛被神光時燭昔如來於此演說寶雲等經

 

30   伽耶山東南有窣堵波迦葉波本生邑也其南有二窣堵波則伽耶迦葉波捺地迦葉波(舊曰那提迦葉訛也洎諸迦葉例無波字略也)事火之處

 

31   伽耶迦葉波事火東渡大河至鉢羅笈菩提山(唐言前正覺山如來將證正覺先登此山故云前正覺也)如來勤求六歲未成正覺後捨苦行示受乳糜行自東北遊目此山有懷幽寂欲證正覺自東北岡登以至頂地既震動山又傾搖山神惶懼告菩薩曰:「此山者非成正覺之福地也若止於此入金剛定地當震陷山亦傾覆。」菩薩下自西南山半崖中背巖面澗有大石室菩薩即之加趺坐焉地又震動山復傾搖時淨居天空中唱曰:「此非如來成正覺處自此西南十四五里去苦行處不遠有卑鉢羅樹下有金剛座去來諸佛咸於此座而成正覺願當就彼。」菩薩方起室中龍曰:「斯室清勝可以證聖唯願慈悲勿有遺棄。」菩薩既知非取證所為遂龍意留影而去(影在昔日賢愚咸覩洎於今時或有得見)諸天前導往菩提樹逮乎無憂王之興也菩薩登山上下之迹皆樹旌表建窣堵波度量雖殊靈應莫異或天花雨空中或光照幽谷每歲罷安居日異方法俗登修供養信宿乃還

 

32   前正覺山西南行十四五里至菩提樹周垣壘甎崇峻險固東西長南北狹周五百餘步奇樹名花連陰接影細沙異草彌漫綠被正門東闢對尼連禪河南門接大花池西阨險固北門通大伽藍壖垣內地聖迹相隣或窣堵波或復精舍並贍部洲諸國君王大臣豪族欽承遺教建以記焉

 

33   菩提樹垣正中有金剛座昔賢劫初成與大地俱起據三千大千世界中下極金輪上侵地際金剛所成周百餘步賢劫千佛坐之而入金剛定故曰金剛座焉證聖道所亦曰道場大地震動獨無傾搖是故如來將證正覺也歷此四隅地皆傾動後至此處安靜不傾自入末劫正法浸微沙土彌覆無復得見佛涅槃後諸國君王傳聞佛說金剛座量遂以兩軀觀自在菩薩像南北標界東面而坐聞諸耆舊曰:「此菩薩像身沒不見佛法當盡。」今南隅菩薩沒過胸臆矣

 

34   金剛座上菩提樹者即畢鉢羅之樹也昔佛在世高數百尺屢經殘伐猶高四五丈佛坐其下成等正覺因而謂之菩提樹焉莖幹黃白枝葉青翠冬夏不凋光鮮無變每至如來涅槃之日葉皆凋落頃之復故是日也諸國君王異方法俗數千萬眾不召而集香水香乳以溉以洗於是奏音樂列香花燈炬繼日競修供養如來寂滅之後無憂王之初嗣位也信受邪道毀佛遺迹興發兵徒躬臨剪伐根莖枝葉分寸斬截次西數十步而積聚焉令事火婆羅門燒以祠天煙焰未靜忽生兩樹猛火之中茂葉含翠因而謂之灰菩提樹無憂王覩異悔過以香乳溉餘根洎乎將旦樹生如本王見靈怪重深欣慶躬修供養樂以忘歸王妃素信外道密遣使人夜分之後重伐其樹無憂王旦將禮敬唯見櫱株深增悲慨至誠祈請香乳溉灌不日還生王深敬異壘石周垣其高十餘尺今猶見在近設賞迦王者信受外道毀嫉佛法壞僧伽藍伐菩提樹掘至泉水不盡根柢乃縱火焚燒以甘蔗汁沃之欲其燋爛絕滅遺萌數月後摩揭陀國補剌拏伐摩王(唐言滿胄)無憂王之末孫也聞而歎曰:「慧日已隱唯餘佛樹今復摧殘生靈何覩!」舉身投地哀感動物以數千牛搆乳而溉經夜樹生其高丈餘恐後剪伐周峙石垣高二丈四尺故今菩提樹隱於石壁出一丈餘

 

35   菩提樹東有精舍高百六七十尺下基面廣二十餘步壘以青甎塗以石灰層龕皆有金像四壁鏤作奇製或連珠形或天仙像上置金銅阿摩落迦果(亦謂寶瓶又稱寶臺)東面接為重閣檐宇特起三層榱柱棟梁戶扉寮牖金銀彫鏤以飾之珠玉廁錯以填之奧室邃宇洞戶三重外門左右各有龕室左則觀自在菩薩像右則慈氏菩薩像白銀鑄成高十餘尺

 

36   精舍故地無憂王先建小精舍後有婆羅門更廣建焉有婆羅門不信佛法事大自在天傳聞天神在雪山中遂與其弟往求願焉天曰:「凡諸願求有福方果非汝所祈非我能遂。」婆羅門曰:「修何福可以遂心?」天曰:「欲植善種求勝福田菩提樹者證佛果處也宜時速反往菩提樹建大精舍穿大水池興諸供養所願當遂。」婆羅門受天命發大信心相率而返兄建精舍弟鑿水池於是廣修供養勤求心願後皆果遂為王大臣凡得祿賞皆入檀捨

 

37   精舍既成招募工人欲圖如來初成佛像曠以歲月無人應召久之有婆羅門來告眾曰:「我善圖寫如來妙相。」眾曰:「今將造像夫何所須?」:「香泥耳宜置精舍之中并一燈照我入已堅閉其戶六月後乃可開門。」時諸僧眾皆如其命尚餘四日未滿六月眾咸駭異開以觀之見精舍內佛像儼然結加趺坐右足居上左手斂右手垂東面而坐肅然如在座高四尺二寸廣丈二尺五寸像高丈一尺五寸兩膝相去八尺八寸兩肩六尺二寸相好具足慈顏若真唯右乳上圖瑩未周既不見人方驗神鑒眾咸悲歎慇懃請知有一沙門宿心淳質乃感夢見往婆羅門而告曰:「我是慈氏菩薩恐工人之思不測聖容故我躬來圖寫佛像垂右手者昔如來之將證佛果天魔來嬈地神告至其一先出助佛降魔如來告曰:『汝勿憂怖吾以忍力降彼必矣。』魔王曰:『誰為明證?』如來乃垂手指地:『此有證。』是時第二地神踊出作證故今像手倣昔下垂。」眾知靈鑒莫不悲感於是乳上未周填廁眾寶珠瓔寶冠奇珍交飾設賞迦王伐菩提樹已欲毀此像既覩慈顏心不安忍迴駕將返命宰臣曰:「宜除此佛像置大自在天形。」宰臣受旨懼而歎曰:「毀佛像則歷劫招殃違王命乃喪身滅族進退若此何所宜行!」乃召信心以為役使遂於像前橫壘甎壁心慚冥闇又置明燈甎壁之前畫自在天功成報命王聞心懼舉身生皰肌膚攫裂居未久之便喪沒矣宰臣馳返毀除障壁時經多日燈猶不滅像今尚在神工不虧既處奧室燈炬相繼欲覩慈顏莫由審察必於晨朝持大明鏡引光內照乃覩靈相夫有見者自增悲感

 

38   如來以印度吠舍佉月後半八日成等正覺當此三月八日也上座部則吠舍佉月後半十五日成等正覺當此三月十五日也是時如來年三十矣或曰年三十五矣

 

39   菩提樹北有佛經行之處如來成正覺已不起于座七日寂定其起也至菩提樹北七日經行東西往來行十餘步異華隨迹十有八文後人於此壘甎為基高餘三尺聞諸先志曰此聖迹基表人命之脩短也先發誠願後乃度量隨壽脩短數有增減

 

40   經行基北道右盤石上大精舍中有佛像舉目上望昔者如來於此七日觀菩提樹目不暫捨為報樹恩故此瞻望

 

41   菩提樹西不遠大精舍中有鍮石佛像飾以奇珍東面而立前有青石奇文異采是昔如來初成正覺梵王起七寶堂帝釋建七寶座佛於其上七日思惟放異光明照菩提樹去聖悠遠寶變為石

 

42   菩提樹南不遠有窣堵波高百餘尺無憂王之所建也菩薩既濯尼連河將趣菩提樹竊自思念何以為座尋自發明當須淨草天帝釋化其身為刈草人荷而逐路菩薩謂曰:「所荷之草頗能惠耶?」化人聞命恭以草奉菩薩受已執而前進。  受草東北不遠有窣堵波是菩薩將證佛果青雀群鹿呈祥之處印度休徵斯為嘉應故淨居天隨順世間群從飛繞効靈顯聖

 

43   菩提樹東大路左右各一窣堵波是魔王嬈菩薩處也菩薩將證佛果魔王勸受輪王策說不行殷憂而返魔王之女請往誘焉菩薩威神衰變冶容扶羸策杖相携而退

 

44   菩提樹西北精舍中有迦葉波佛像既稱靈聖時燭光明聞諸先記曰若人至誠旋繞七周在所生處得宿命智

 

45   迦葉波佛精舍西北二甎室各有地神之像昔者如來將成正覺一報魔至一為佛證後人念功圖形旌德

 

46   菩提樹垣西不遠有窣堵波謂欝金香高四十餘尺漕炬吒國商主之所建也昔漕炬吒國有大商主宗事天神祠求福利輕蔑佛法不信因果其後將諸商侶貿遷有無泛舟南海遭風失路波濤飄浪時經三歲資糧罄竭糊口不充同舟之人朝不謀夕勠力同志念所事天心慮已勞冥功不濟俄見大山崇崖峻嶺兩日聯暉重明照朗時諸商侶更相慰曰:「我曹有福過此大山宜於中止得安樂。」商主曰:「非山也乃摩竭魚耳崇崖峻嶺鬚鬣也兩日聯暉眼光也。」言聲未靜舟帆飄湊於是商主告諸侶曰:「我聞觀自在菩薩於諸危厄能施安樂宜各至誠稱其名字。」遂即同聲歸命稱念崇山既隱兩日亦沒俄見沙門威儀庠序杖錫凌虛而來拯溺不踰時而至本國矣因即信心貞固求福不回建窣堵波式修供養以欝金香泥而周塗上下既發信心率其同志躬禮聖迹觀菩提樹未暇言歸已淹晦朔商侶同遊更相謂曰:「山川悠間鄉國遼遠昔所建立窣堵波者我曹在此誰其灑掃?」言訖旋繞至此忽見窣堵波駭其由致即前瞻察乃本國所建窣堵波也故今印度因以欝金為名

 

47   菩提樹垣東南隅尼拘律樹側窣堵波傍有精舍中作佛坐像昔如來初證佛果大梵天王於此勸請轉妙法輪

 

48   菩提樹垣內四隅皆有大窣堵波在昔如來受吉祥草已趣菩提樹先歷四隅大地震動至金剛座方得安靜樹垣之內聖迹鱗次差難遍舉

 

49   菩提樹垣外西南窣堵波奉乳糜二牧女故宅其側窣堵波牧女於此煮糜次此窣堵波如來受糜處也

 

50   菩提樹垣南門外有大池周七百餘步清瀾澄鏡龍魚潛宅婆羅門兄弟承大自在天命之所鑿也次南一池在昔如來初成正覺方欲浣濯天帝釋為佛化成池西有大石佛浣衣已方欲曝曬天帝釋自大雪山持來也其側窣堵波如來於此納故衣次南林中窣堵波如來受貧老母施故衣處

 

51   帝釋化池東林中有目支隣陀龍王池其水清黑其味甘美西岸有小精舍中作佛像昔如來初成正覺於此宴坐七日入定時此龍王警衛如來即以其身繞佛七匝化出多頭俯垂為蓋故池東岸有其室焉

 

52   目支隣陀龍池東林中精舍有佛羸瘦之像其側有經行之所長七十餘步南北各有卑鉢羅樹故今土俗諸有嬰疾香油塗像多蒙除差是菩薩修苦行處如來為伏外道又受魔請於是苦行六年日食一麻一麥形容憔悴膚體羸瘠經行往來攀樹後起

 

53   菩薩苦行卑鉢羅樹側有窣堵波是阿若憍陳如等五人住處太子之捨家也彷徨山澤棲息林泉時淨飯王乃命五人隨瞻侍焉太子既修苦行憍陳如等亦即勤求憍陳如等住處東南有窣堵波菩薩入尼連禪那河沐浴之處河側不遠菩薩於此受食乳糜其側窣堵波二長者獻麨蜜處佛在樹下結加趺坐寂然宴默受解脫樂過七日後方從定起時二商主行次林外而彼林神告商主曰:「釋種太子今在此中初證佛果心凝寂定四十九日未有所食隨有奉上獲大善利。」時二商主各持行資麨蜜奉上世尊納受

 

54   長者獻麨側有窣堵波四天奉鉢處商主既獻麨蜜世尊思以何器受之時四天從四方來各持金鉢而以奉上世尊默然而不納受以為出家不宜此器四天王捨金鉢奉銀鉢乃至頗胝琉璃馬腦車渠真珠等鉢世尊如是皆不為受四天王各還宮奉持石鉢紺青映徹重以進獻世尊斷彼此故而總受之次第重疊按為一鉢故其外則有四隆焉

 

55   四天王獻鉢側不遠有窣堵波如來為母說法處也如來既成正覺稱天人師其母摩耶自天宮降於此處世尊隨機示教利喜其側涸池岸有窣堵波在昔如來見諸神變化有緣處

 

56   現神變側有窣堵波如來度優樓頻螺迦葉波三兄弟及千門人處如來方垂善道隨應降伏時優樓頻螺迦葉波五百門人請受佛教迦葉波曰:「吾亦與爾俱返迷途。」於是相從來至佛所如來告曰:「棄鹿皮衣捨祭火具。」時諸梵志恭承聖教以其服用投尼連河捺地迦葉波見諸祭器隨流漂泛與其門人候兄動靜既見改轍亦隨染衣伽耶迦葉波二百門人聞其兄之捨法也亦至佛所願修梵行

 

57   度迦葉波兄弟西北窣堵波是如來伏迦葉波所事火龍處如來將化其人克伏所宗乃止梵志火龍之室夜分已後龍吐煙焰佛既入定亦起火光其室洞然猛焰炎熾諸梵志師恐火害佛莫不奔赴悲號愍惜優樓頻螺迦葉波謂其徒曰:「以今觀之未必火也當是沙門伏火龍耳。」如來乃以火龍盛置鉢中清旦持示外道門人其側窣堵波五百獨覺同入涅槃處也

 

58   目支隣陀龍池南窣堵波迦葉波救如來溺水處也迦葉兄弟時推神通遠近仰德黎庶歸心世尊方導迷徒大權攝化興布密雲降澍暴雨周佛所居令獨無水迦葉是時見此雲雨謂門人曰:「沙門住處將不漂溺?」泛舟來救乃見世尊履水如地蹈河中流水分沙現迦葉見已心伏而退

 

59   菩提樹垣東門外二三里有盲龍室此龍者殃累宿積報受生盲如來自前正覺山欲趣菩提樹途次室側龍眼忽明乃見菩薩將趣佛樹謂菩薩曰:「仁今不久當成正覺我眼盲冥于茲已久有佛興世我眼輒明賢劫之中過去三佛出興世時已得明視仁今至此我眼忽開以故知之當成佛矣。」

 

60   菩提樹垣東門側有窣堵波魔王怖菩薩之處魔王知菩薩將成正覺也誘亂不遂憂惶無賴集諸神眾齊整魔軍治兵振旅將脅菩薩於是風雨飄注雷電晦冥縱火飛煙揚沙激石備矛楯之具極弦矢之用菩薩於是入大慈定凡厥兵杖變為蓮華魔軍怖駭奔馳退散其側不遠有二窣堵波帝釋梵王之所建也

 

61   菩提樹北門外摩訶菩提僧伽藍其先僧伽羅國王之所建也庭宇六院觀閣三層周堵垣牆高三四丈極工人之妙窮丹青之飾至於佛像鑄以金銀凡厥莊嚴廁以珍寶諸窣堵波高廣妙飾中有如來舍利其骨舍利大如手指節光潤鮮白皎徹中外其肉舍利如大真珠色帶紅縹每歲至如來大神變月滿之日出示眾(即印度十二月三十日當此正月十五日也)此時也或放光或雨花僧徒減千人習學大乘上座部法律儀清肅戒行貞明

 

62   昔者南海僧伽羅國其王淳信佛法發自天然有族弟出家想佛聖迹遠遊印度寓諸伽藍咸輕邊鄙於是返迹本國王躬遠迎沙門悲耿似若不能言王曰:「將何所負若此殷憂?」沙門曰:「憑恃國威遊方問道羈旅異域載罹寒暑動遭凌辱語見譏誚負斯憂恥詎得歡心?」:「若是者何謂也?」:「誠願大王福田為意於諸印度建立伽藍既旌聖迹又擅高名福資先王恩及後嗣。」:「斯事甚美聞之何晚?」於是以國中寶獻印度王王既納貢義存懷遠謂使臣曰:「我今將何持報來命?」使臣曰:「僧伽羅王稽首印度大吉祥王威德遠振惠澤遐被下土沙門欽風慕化敢遊上國展敬聖迹寓諸伽藍莫之見館艱辛已極蒙恥而歸竊圖遠謀貽範來葉於諸印度建此伽藍使客遊乞士息肩有所兩國交歡行人無替。」王曰:「如來潛化遺風斯在聖迹之所任取一焉。」使者奉辭報命群臣拜賀遂乃集諸沙門評議建立沙門曰:「菩提樹者去來諸佛咸此證聖考之異議無出此謀。」於是捨國珍寶建此伽藍以其國僧而修供養乃刻銅為記曰:「夫周給無私諸佛至教慧濟有緣先聖明訓今我小子丕承王業式建伽藍用旌聖迹福資祖考惠被黎元唯我國僧而得自在及有國人亦同僧例傳之後嗣永永無窮。」故此伽藍多執師子國僧也

 

63   菩提樹南十餘里聖迹相隣難以備舉每歲比丘解安居四方法俗百千萬眾七日七夜持香花鼓音樂遍遊林中禮拜供養印度僧徒依佛聖教皆以室羅伐拏月前半一日入兩安居當此五月十六日以頞濕縛庾闍月後半十五日解兩安居當此八月十五日印度月名依星而建古今不易諸部無差良以方言未融傳譯有謬分時計月致斯乖異故以四月十六日入安居七月十五日解安居也

 

64 大唐西域記卷第八

 

 

 

 

大唐西域記卷第九(一國)

 

 

1. 摩伽陀國下

 

1   菩提樹東渡尼連禪那河大林中有窣堵波其北有池香象侍母處也如來在昔修菩薩行為香象子居北山中遊此池側其母盲也採藕根汲清水恭行孝養與時推移屬有一人遊林迷路彷徨往來悲號慟哭象子聞而愍焉導之以示歸路是人既還遂白王曰:「我知香象遊舍林藪此奇貨也可往捕之。」王納其言興兵往狩是人前導指象示王即時兩臂墮落若有斬截者其王雖驚此異仍縛象子以歸象子既已維縶多時而不食水草典廐者以聞王遂親問之象子曰:「我母盲冥累日飢餓今見幽厄詎能甘食?」王愍其情也故遂放之

 

2   其側窣堵波前建石柱是昔迦葉波佛於此宴坐其側有過去四佛坐及經行遺迹之所

 

3   四佛坐東渡莫訶河至大林中有石柱是外道入定發惡願處昔有外道欝頭藍子者志逸煙霞身遺草澤於此法林栖神匿迹既具五神通得第一有定摩揭陀王特深宗敬每至中時請就宮食欝頭藍子凌虛履空往來無替摩揭陀王候時瞻望亦既至已捧接置座王將出遊欲委留事簡擢中宮無堪承命有少息女淑慎令儀既親且賢無出其右摩揭陀王召而命曰:「吾方遠遊將有所委爾宜悉心慎終其事彼欝頭藍仙宿所宗敬時至來飯如我所奉。」勅誡既已便即巡覽少女承旨瞻候如儀大仙至已捧而置座欝頭藍子既觸女人起欲界染退失神通飯訖言歸不得虛遊中心愧恥詭謂女曰:「吾比修道業入定怡神凌虛往來略無暇景國人願覩聞之久矣然先達垂訓利物為務豈守獨善忘其兼濟今欲從門而出履地而往使夫覩見之徒咸蒙福利。」王女聞已宣告遠近是時人以馳競灑掃衢路百千萬眾佇望來儀欝頭藍子步自王宮至彼法林宴坐入定心馳外境棲林則烏鳥嚶囀臨池乃魚鼈諠聲情散心亂失神廢定乃生忿恚即發惡願:「願我當來為暴惡獸狸身鳥翼搏食生類身廣三千里兩翅各廣千五百里投林噉諸羽族入流食彼水生。」發願既已忿心漸息勤求頃之復得本定不久命終生第一有天壽八萬劫如來記之天壽畢已當果昔願得此弊身從是流轉惡道未期出離

 

4   莫訶河東入大林野行百餘里至屈屈(居勿反)吒播陀山(唐言雞足)亦謂窶盧播陀山(唐言尊足)高巒陗無極深壑洞無涯山麓谿澗喬林羅谷岡岑嶺嶂繁草被巖峻起三峯傍挺絕崿氣將天接形與雲同其後尊者大迦葉波居中寂滅不敢指言故云尊足摩訶迦葉波者聲聞弟子也得六神通具八解脫如來化緣斯畢垂將涅槃告迦葉波曰:「我於曠劫勤修苦行為諸眾生求無上法昔所願期今已果滿我今將欲入大涅槃以諸法藏囑累於汝住持宣布勿有失墜姨母所獻金縷袈裟慈氏成佛留以傳付我遺法中諸修行者若比丘比丘尼鄔波索迦(唐言近事男舊曰伊蒱塞又曰優波塞又曰優婆塞皆訛也)鄔波斯迦(唐言近事女舊曰優婆斯又曰優婆夷皆訛也)皆先濟渡令離流轉。」迦葉承旨住持正法結集既已至第二十年厭世無常將入寂滅乃往雞足山山陰而上屈盤取路至西南岡山峯險阻崖徑槃薄乃以錫扣剖之如割山徑既開逐路而進槃紆曲折迴互斜通至于山頂東北面出既入三峯之中捧佛袈裟而立以願力故三峯斂覆故今此山三脊隆起當來慈氏世尊之興世也三會說法之後餘有無量憍慢眾生將登此山至迦葉所慈氏彈指山峯自開彼諸眾生既見迦葉更增憍慢時大迦葉授衣致辭禮敬已畢身昇虛空示諸神變化火焚身遂入寂滅時眾瞻仰憍慢心除因而感悟皆證聖果故今山上建窣堵波靜夜遠望或見明炬及有登山遂無所覩

 

5   鷄足山東北行百餘里至佛陀伐那山峯崖崇峻巘崿隱嶙巖間石室佛嘗降止傍有盤石帝釋梵王摩牛頭栴檀塗飾如來今其石上餘香郁烈五百羅漢潛靈於此諸有感遇或得覩見時作沙彌之形入里乞食隱顯靈奇之迹羌難以述佛陀伐那山空谷中東行三十餘里至洩(移結反)瑟知林(唐言杖林)林竹修篠被山滿谷其先有婆羅門聞釋迦佛身長丈六常懷疑惑未之信也乃以丈六竹杖欲量佛身恒於杖端出過丈六如是增高莫能窮實遂投杖而去因植根焉中有大窣堵波無憂王之所建也如來在昔於此七日為諸天人現大神通說深妙法

 

6   杖林中近有鄔波索迦闍耶犀那者(唐言勝軍)西印度剎帝利種也志尚夷簡情悅山林迹居幻境心遊真際內外典籍窮究幽微辭論清高儀範閑雅諸沙門婆羅門外道異學國王大臣長者豪右相趨通謁伏膺請益受業門人十室而六年漸七十耽讀不倦餘藝捐廢唯習佛經策勵身心不舍晝夜印度之法香末為泥作小窣堵波高五六寸書寫經文以置其中謂之法舍利也數漸盈積建大窣堵波總聚於內常修供養故勝軍之為業也口則宣說妙法導誘學人手乃作窣堵波式崇勝福夜又經行禮誦宴坐思惟寢食不遑晝夜無怠年百歲矣志業不衰三十年間凡作七拘胝(唐言億)法舍利窣堵波每滿一拘胝建大窣堵波而總置中盛修供養請諸僧眾法會稱慶其時神光燭曜靈異昭彰自茲厥後時放光明

 

7   杖林西南十餘里大山陽有二溫泉其水甚熱在昔如來化出此水於中浴焉今者尚存清流無減遠近之人皆來就浴沈痾宿疹無不除差其傍則有窣堵波如來經行之處也杖林東南行六七里至大山橫嶺之前有石窣堵波昔如來兩三月為諸人天於此說法時頻毘娑羅王欲來聽法乃疏山積石壘階以進廣二十餘步長三四里

 

8   大山北三四里有孤山昔廣博仙人棲隱於此鑿崖為室餘趾尚存傳教門人遺風猶扇

 

9   孤山東北四五里有小孤山山壁石室廣袤可坐千餘人矣如來在昔於此三月說法石室上有大磐石帝釋梵王摩牛頭栴檀塗飾佛身石上餘香于今郁烈

 

10   石室西南隅有巖岫印度謂之阿素洛(舊曰阿修羅又曰阿須倫又曰阿修羅皆訛也)宮也往有好事者深閑呪術顧儔命侶十有四人約契同志入此巖岫行三四十里廓然大明乃見城邑臺觀皆是金銀琉璃是人至已有諸少女佇立門側歡喜迎接甚加禮遇於是漸進至內城門有二婢使各捧金盤盛滿花香而來迎候謂諸人曰:「宜就池浴塗冠香花已而後入斯為美矣唯彼術士宜時速進。」餘十三人遂即沐浴既入池已恍若有忘乃坐稻田中去此之北平川中已三四十里矣

 

11   石室側有棧道廣十餘步長四五里昔頻毘娑羅王將往佛所乃斬石通谷疏崖填川或壘石或鑿巖作為階級以至佛所從此大山中東行六十餘里至矩奢揭羅補羅城(唐言上茅宮城)上茅宮城摩揭陀國之正中古先君王之所都多出勝上吉祥香茅以故謂之上茅城也崇山四周以為外郭西通峽徑北闢山門東西長南北狹周一百五十餘里內城餘趾周三十餘里羯尼迦樹遍諸蹊徑花含殊馥色爛黃金暮春之月林皆金色

 

12   宮城北門外有窣堵波是提婆達多與未生怨王共為親友乃放護財醉象欲害如來如來指端出五師子醉象於此馴伏而前

 

13   伏醉象東北有窣堵波是舍利子聞阿濕婆恃比丘(唐言馬勝)說法證果之處舍利子在家也高才雅量見重當時門生學徒傳以受業此時將入王舍大城馬勝比丘亦方乞食時舍利子遙見馬勝謂門生曰:「彼來者甚庠序不證聖果豈斯調寂宜少佇待觀其進趣。」馬勝比丘已證羅漢心得自在容止和雅振錫來儀舍利子曰:「長老善安樂耶師何人證何法若此之悅豫乎?」馬勝謂曰:「爾不知耶淨飯王太子捨轉輪王位悲愍六趣苦行六年證三菩提具一切智是吾師也夫法者非有非空難用銓緒唯佛與佛乃能究述豈伊愚昧所能詳議?」因為頌說稱讚佛法舍利子聞已便獲果證

 

14   舍利子證果北不遠有大深坑傍建窣堵波是室利毱多(唐言勝密)以火坑毒飯欲害佛處勝密者宗信外道深著邪見諸梵志曰:「喬答摩國人尊敬遂令我徒無所恃賴汝今可請至家飯會門穿大坑滿中縱火棧以朽木覆以燥土凡諸飲食皆雜毒藥若免火坑當遭毒食。」勝密承命便設毒會城中之人皆知勝密於世尊所起惡害心咸皆勸請願佛勿往世尊告曰:「無得懷憂如來之身物莫能害。」於是受請而往足履門閫火坑成池清瀾澄鑒蓮花彌漫勝密見已憂惶無措謂其徒曰:「以術免火尚有毒食。」世尊飯食已訖為說妙法勝密聞已謝咎歸依

 

15   勝密火坑東北山城之曲有窣堵波是時縛迦大醫(舊曰耆婆訛也)於此為佛建說法堂周其壖垣種植花菓餘趾蘖株尚有遺迹如來在世多於中止其傍復有縛迦故宅餘基舊井墟坎猶存宮城東北行十四五里至姞栗陀羅矩吒山(唐言鷲峯亦謂鷲臺舊曰耆闍崛山訛也)接北山之陽孤摽特起既棲鷲鳥又類高臺空翠相映濃淡分色如來御世垂五十年多居此山廣說妙法頻毘娑羅王為聞法故興發人徒自山麓至峯岑跨谷凌巖編石為階廣十餘步長五六里中路有二小窣堵波一謂下乘即王至此徒行以進一謂退凡即簡凡人不令同往其山頂則東西長南北狹臨崖西埵有甎精舍高廣奇製東闢其戶如來在昔多居說法今作說法之像量等如來之身

 

16   精舍東有長石如來經行所履也傍有大石高丈四五尺周三十餘步是提婆達多遙擲擊佛處也其南崖下有窣堵波在昔如來於此說法花經》。精舍南山崖側有大石室如來在昔於此入定

 

17   佛石室西北石室前有大磐石阿難為魔怖處也尊者阿難於此入定魔王化作鷲鳥於黑月夜分據其大石奮翼驚鳴以怖尊者尊者是時驚懼無措如來鑒見伸手安慰通過石壁摩阿難頂以大慈言而告之曰:「魔所變化宜無怖懼。」阿難蒙慰身心安樂石上鳥迹崖中通穴歲月雖久于今尚存

 

18   精舍側有數石室舍利子等諸大羅漢於此入定舍利子石室前有一大井枯涸無水墟坎猶存

 

19   精舍東北石澗中有大磐石是如來曬袈裟之處衣文明徹皎如彫刻其傍石上有佛脚迹輪文雖暗規摸可察北山頂有窣堵波是如來望摩揭陀城於此七日說法

 

20   山城北門西有毘布羅山聞之土俗曰山西南崖陰昔有五百溫泉今者數十而已然猶有冷有暖未盡溫也其泉源發雪山之南無熱惱池潛流至此水甚清美味同本池流經五百枝小熱地獄火熱上炎致斯溫熱泉流之口並皆彫石或作師子白象之首或作石筒懸流之道下乃編石為池諸方異域咸來此浴浴者宿疾多差溫泉左右諸窣堵波及精舍基址鱗次並是過去四佛坐及經行遺迹之所此處既山水相帶仁智攸居隱淪之士蓋亦多矣

 

21   溫泉西有卑鉢羅石室世尊在昔恒居其中後壁洞穴是阿素洛宮也習定比丘多居此室時出怪異龍師子之形見之者心發狂亂然斯勝地靈聖所止躡迹欽風忘其災禍近有比丘戒行貞潔心樂幽寂欲於此室匿迹習定或有諫曰:「勿往彼也彼多災異為害不少既難取定亦恐喪身宜鑒前事勿貽後悔。」比丘曰:「不然我方志求佛果摧伏天魔若此之害夫何足言?」便即振錫而往室焉於是設壇場誦禁呪旬日之後穴出少女謂比丘曰:「尊者染衣守戒為含識歸依修慧習定作生靈善導而今居此驚懼我曹如來之教豈若是耶?」比丘曰:「我守淨戒遵聖教也匿迹山谷遠諠雜也忽此見譏其咎安在?」對曰:「尊者誦呪聲發火從外入燒我居室苦我枝屬唯願悲愍勿復誦呪。」比丘曰:「誦呪自護非欲害物往者行人居此習定期於聖果以濟幽塗覩怪驚懼喪棄身命汝之辜也其何辭乎?」對曰:「罪障既重智慧斯淺自今已來屏居守分亦願尊者勿誦神呪。」比丘於是修定如初安靜無害

 

22   毘布羅山上有窣堵波昔者如來說法之處今有露形外道多依此住修習苦行夙夜匪懈自旦至昏旋轉觀察山城北門左南崖陰東行二三里至大石室昔提婆達多於此入定

 

23   石室東不遠磐石上有班采狀血染傍建窣堵波是習定比丘自害證果之處昔有比丘勤勵心身屏居修定歲月逾遠不證聖果退而自咎竊復歎曰:「無學之果終不時證有累之身徒生何益!」便就此石自刺其頸是時即證阿羅漢果上昇虛空示現神變化火焚身而入寂滅美其雅操建以記功

 

24   比丘證果東石崖上有石窣堵波習定比丘投崖證果之處昔在佛世有一比丘宴坐山林修證果定精勤已久不得果證晝夜繼念無忘靜定如來知其根機將發也遂往彼而成之自竹林園至山崖下彈指而召佇立以待此比丘遙覩聖眾身意勇悅投崖而下猶其淨心敬信佛語未至于地已獲果證世尊告曰:「宜知是時。」即昇虛空示現神變用彰淨信故斯封記

 

25   山城北門行一里餘至迦蘭陀竹園今有精舍石基甎室東闢其戶如來在世多居此中說法開化導凡拯俗今作如來之身此城中有大長者迦蘭陀時稱豪貴以大竹園施諸外道及見如來聞法淨信追昔竹園居彼異眾今天人師無以館舍時諸神鬼感其誠心斥逐外道而告之曰:「長者迦蘭陀當以竹園起佛精舍汝宜速去得免危厄。」外道憤恚含怒而去長者於此建立精舍功成事畢躬往請佛如來是時遂受其施

 

26   迦蘭陀竹園東有窣堵波阿闍多設咄路王(唐言未生怨舊曰阿闍世訛略也)之所建也如來涅槃之後諸王共分舍利未生怨王得以持歸式遵崇建而修供養無憂王之發信心也開取舍利建窣堵波尚有遺餘時燭光景

 

27   未生怨王窣堵波有尊者阿難半身舍利昔尊者將寂滅也去摩揭陀國趣吠舍釐城兩國交爭欲興兵甲尊者傷愍遂分其身摩揭陀王奉歸供養即斯勝地式修崇建其傍則有如來經行之處次此不遠有窣堵波是舍利子及沒特伽羅子等安居之所

 

28   竹林園西南行五六里南山之陰大竹林中有大石室是尊者摩訶迦葉在此與九百九十大阿羅漢如來涅槃後結集三藏前有故基未生怨王為集法藏諸大羅漢建此堂宇

 

29   大迦葉宴坐山林忽燭光明又覩地震:「是何祥變若此之異?」以天眼觀見佛世尊於雙樹林間入般涅槃尋命徒屬趣拘尸城路逢梵志手執天花迦葉問曰:「汝從何來知我大師今在何處?」梵志對曰:「我適從彼拘尸城來見汝大師已入涅槃人大眾咸興供養我所持花自彼得也。」迦葉聞已謂其徒曰:「慧日淪照世界闇冥善導遐棄眾生顛墜。」懈怠比丘更相賀曰:「如來寂滅我曹安樂若有所犯誰能訶制?」迦葉聞已深更感傷思集法藏據教治犯遂至雙樹觀化禮敬既而法王去世天無導諸大羅漢亦取滅度時大迦葉作是思惟:「承順佛教宜集法藏。」於是登蘇迷盧山擊大揵稚唱如是言:「今王舍城將有法事諸證果人宜時速集!」揵稚聲中傳迦葉教遍至三千大千世界得神通者聞皆集會是時迦葉告諸眾曰:「如來寂滅世界空虛當集法藏用報佛恩今將集法務從簡靜豈恃群居不成勝業其有具三明得六通聞持不謬辯才無礙如斯上人可應結集自餘果學各歸其居。」於是得九百九十人除阿難在學地大迦葉召而謂曰:「汝未盡漏宜出聖眾。」:「隨侍如來多歷年所每有法議曾未棄遺今將結集而見擯斥法王寂滅失所依怙。」迦葉告曰:「勿懷憂惱汝親侍佛誠復多聞然愛惑未盡習結未斷。」阿難辭屈而出至空寂處欲取無學勤求不證既已疲怠便欲假寐未及伏枕遂證羅漢往結集所叩門白至迦葉問曰:「汝結盡耶宜運神通非門而入。」阿難承命從鑰隙入禮僧已畢退而復坐是時安居初十五日也

 

30   於是迦葉揚言曰:「念哉諦聽阿難聞持如來稱讚集素呾纜(舊曰修多羅訛也)優波釐持律明究眾所知識集毘奈耶(舊曰毘那耶訛也)我迦葉波集阿毘達磨藏。」兩三月盡集三藏訖以大迦葉僧中上座因而謂之上座部焉

 

31   大迦葉波結集西北有窣堵波是阿難受僧訶責不預結集至此宴坐證羅漢果證果之後方乃預焉

 

32   阿難證果西行二十餘里有窣堵波無憂王之所建也大眾部結集之處諸學無學數百千人不預大迦葉結集之眾而來至此更相謂曰:「如來在世同一師學法王寂滅簡異我曹欲報佛恩當集法藏。」於是凡聖咸會賢智畢萃復集素呾纜藏毘柰耶藏阿毘達磨藏雜集藏禁呪藏別為五藏而此結集聖同會因而謂之大眾部

 

33   竹林精舍北行二百餘步至迦蘭陀池如來在昔多此說法水既清澄具八功德佛涅槃後枯涸無餘

 

34   迦蘭陀池西北行二三里有窣堵波無憂王所建也高六十餘尺傍有石柱刻記立窣堵波事高五十餘尺上作象形

 

35   石柱東北不遠至曷羅闍姞利呬城(唐言王舍)外郭已壞無復遺堵內城雖毀基址猶峻周二十餘里面有一門

 

36   頻毘娑羅王都在上宮城也編戶之家頻遭火害一家縱逸四隣罹災防火不暇資產廢業眾庶嗟怨不安其居王曰:「我以不德下民罹患修何德可以禳之?」群臣曰:「大王德化邕穆政教明察今茲細民不謹致此火災宜制嚴科以清後犯若有火起窮究先發罰其首惡遷之寒林寒林者棄屍之所俗謂不祥之地人絕遊往之迹今遷於彼同夫棄屍既恥陋居當自謹護。」王曰:「宜遍宣告居。」頃之王宮中先自失火謂諸臣曰:「我其遷矣。」乃命太子監攝留事欲清國憲故遷居焉時吠舍釐王聞頻毘娑羅王野處寒林整集戎旅欲襲不虞邊候以聞乃建城邑以王先舍於此故稱王舍城也官屬庶咸徙家焉

 

37   或云至未生怨王乃築此城未生怨太子既嗣王位因遂都之逮無憂王遷都波吒釐城以王舍城施婆羅門故今城中無復凡民唯婆羅門減千家耳

 

38   宮城西南隅有二小伽藍諸國客僧往來此止是佛昔日說法之所次此西北有窣堵波珠底色迦(唐言星曆舊曰樹提伽訛也)長者本生故里

 

39   城南門外道左有窣堵波如來於此說法及度羅怙羅從此北行三十餘里至那爛陀(唐言施無厭)僧伽藍聞之耆舊曰此伽藍南菴沒羅林中有池其龍名那爛陀傍建伽藍因取為稱從其實議是如來在昔修菩薩行為大國王建都此地悲愍眾生好樂周給時美其德號施無厭由是伽藍因以為稱其地本菴沒羅園五百商人以十億金錢買以施佛佛於此處三月說法諸商人等亦證聖果

 

40   佛涅槃後未久此國先王鑠迦羅阿逸多(唐言帝日)敬重一乘遵崇三寶式占福地建此伽藍初興功也穿傷龍身時有善占尼乾外道見而記曰:「斯勝地也建立伽藍當必昌盛為五印度之軌則逾千載而彌隆後進學人易以成業然多歐血傷龍故也。」其子佛陀毱多王(唐言覺護)繼體承統聿遵勝業次此之南又建伽藍呾他揭多毱多王(唐言如來)篤修前緒次此之東又建伽藍婆羅阿迭多(唐言幼日)王之嗣位也次此東北又建伽藍功成事畢福會稱慶輸誠幽顯延請凡聖其會也五印度僧萬里雲集眾坐已定二僧後至引上第三重閣或有問曰:「王將設會先請凡聖大德何方最後而至?」:「我至那國也和上嬰疹飯已方行受王遠請故來赴會。」問者驚駭遽以白王王心知聖也躬往問焉遲上重閣莫知所去王更深信捨國出家出家既已位居僧末心常怏怏懷不自安:「我昔為王尊居最上今者出家卑在眾末。」尋往白僧自述情事於是眾僧和合令未受戒者以年齒為次故此伽藍獨有斯制其王之子代闍羅(唐言金剛)嗣位之後信心貞固復於此西建立伽藍其後中印度王此北復建大伽藍於是周垣峻峙同為一門既歷代君王繼世興建窮諸剞劂誠壯觀也

 

41   帝曰本大伽藍者今置佛像眾中日差四十僧就此而食以報施主之恩僧徒數千並俊才高學也德重當時聲馳異域者數百餘矣戒行清白律儀淳粹僧有嚴制眾咸貞素印度諸國皆仰則焉請益談玄竭日不足夙夜警誡少長相成其有不談三藏幽旨者則形影自愧矣故異域學人欲馳聲問咸來稽疑方流雅譽是以竊名而遊咸得禮重殊方異域欲入談議門者詰難多屈而還學深今古乃得入焉於是客遊後進詳論藝能其退飛者固十七八矣二三博物眾中次詰莫不挫其銳頹其名若其高才博物強識多能明德哲人聯暉繼軌至如護法護月振芳塵於遺教德慧堅慧流雅譽於當時光友之清論勝友之高談智月則風鑒明敏戒賢乃至德幽邃若此上人眾所知識德隆先達學貫舊章述作論釋各十數部並盛流通見珍當世伽藍四周聖迹百數舉其二三可略言矣

 

42   伽藍西不遠有精舍在昔如來三月止此為諸天人廣說妙法南百餘步小窣堵波遠方比丘見佛處昔有比丘自遠方來至此遇見如來聖眾內發敬心五體投地便即發願求輪王位如來見已告諸眾曰:「彼比丘者甚可愍惜福德深遠信心堅固若求佛果不久當證今其發願求轉輪王於當來世必受此報身體投地下至金輪其中所有微塵之數一一塵是一輪王報也既耽世樂聖果斯遠。」其南則有觀自在菩薩立像或見執香爐往佛精舍周旋右繞

 

43   觀自在菩薩像南窣堵波中有如來三月之間剃剪髮有嬰疾病旋繞多愈其西垣外池側窣堵波是外道執雀於此問佛死生之事次東南垣內五十餘步有奇樹高八九尺其幹兩披在昔如來嚼楊枝棄地因植根柢歲月雖久初無增減次東大精舍高二百餘尺如來在昔於此四月說諸妙法次北百餘步精舍中有觀自在菩薩像淨信之徒興供養者所見不同莫定其所或立門側或出簷前諸國法俗咸來供養

 

44   觀自在菩薩精舍北有大精舍高三百餘尺婆羅阿迭多王之所建也莊嚴度量及中佛像同菩提樹下大精舍其東北窣堵波在昔如來於此七日演說妙法西北則有過去四佛坐處其南鍮石精舍戒日王之所建立功雖未畢然其圖量十丈而後成之次東二百餘步垣外有銅立佛像高八十餘尺重閣六層乃得彌覆昔滿胄王之所作也

 

45   滿胄王銅佛像北二三里甎精舍中有多羅菩薩像其量既高其靈甚察每歲元日盛興供養隣境國王大臣豪族齎妙香花持寶旛蓋金石遞奏絲竹相和七日之中建斯法會其垣南門內有大井昔在佛世有大商侶熱渴逼迫來至佛所世尊指其地以可得水商主乃以車軸築地地既為陷水遂泉涌飲已聞法皆悟聖果

 

46   伽藍西南行八九里至拘理迦邑中有窣堵波無憂王之所建也是尊者沒特伽羅子本生故里傍有窣堵波尊者於此入無餘涅槃其中則有遺身舍利尊者大婆羅門種與舍利子少為親友舍利子以才明見貴尊者以精鑒延譽才智相比動止必俱結要終始契同去就相與厭俗共求捨家遂師珊闍耶焉舍利子遇馬勝阿羅漢聞法悟聖還為尊者重述聞而悟法遂證初果與其徒二百五十人俱到佛所世尊遙見指告眾曰:「彼來者我弟子中神足第一。」既至佛所請入法中世尊告曰:「善來比丘淨修梵行得離苦際。」聞是語時鬚髮落俗裳變戒品淨威儀調順經七日結漏盡證羅漢果得神通力

 

47   沒特伽羅子故里東行三四里有窣堵波頻毘娑羅王迎見佛處如來初證佛果知摩揭陀國人心渴仰受頻毘娑羅王請於晨朝時著衣持鉢與千比丘左右圍繞皆是耆舊螺髻梵志慕法染衣前後羽從入王舍城時帝釋天王變為摩那婆首冠螺髻左手執金瓶右手持寶杖足蹈空虛離地四指在大眾中前導佛路時摩揭陀國頻毘娑羅王與其國內諸婆羅門長者居士百千萬眾前後導從出王舍城奉迎聖眾頻毘娑羅王迎佛東南行二十餘里至迦羅臂拏迦邑中有窣堵波無憂王之所建也是尊者舍利子本生故里井今尚在傍有窣堵波尊者於此寂滅其中則有遺身舍利

 

48   尊者大婆羅門種其父高才博識深鑒精微凡諸典籍莫不究習其妻感夢具告夫曰:「吾昨宵寐夢感異人身被鎧甲手執金剛摧破諸山退立一山之下。」夫曰:「夢甚善汝當生男達學貫世摧諸論師破其宗致唯不如一人為作弟子。」果而有娠母忽聰明高論劇談言無屈滯尊者年始八歲名擅四方其性淳質其心慈悲朽壞結縛成就智慧與沒特伽羅子少而相友深厭塵俗未有所歸於是與沒特伽羅子於珊闍耶外道所而修習焉乃相謂曰:「斯非究竟之理未能窮苦際也各求明導先嘗甘露必同其味。」時大阿羅漢馬勝執持應器入城乞食舍利子見其威儀閑雅即而問曰:「汝師是誰?」:「釋種太子厭世出家成等正覺是我師也。」舍利子曰:「所說何法可得聞乎?」:「我初受教未達深義。」舍利子曰:「願說所聞。」馬勝乃隨宜演說舍利子聞已即證初果遂與其徒二百五十人往詣佛所世尊遙見指告眾曰:「我弟子中智慧第一。」至已頂禮願從佛法世尊告曰:「善來比丘。」聞是語時戒品具足過半月後聞佛為長爪梵志說法聞餘論而感悟遂證羅漢之果其後阿難承佛告寂滅期展轉相語各懷悲感舍利子深增戀仰不忍見佛入般涅槃遂請世尊先入寂滅世尊告曰:「宜知是時。」告謝門人至本生里侍者沙彌遍告城邑未生怨王及其國人莫不風馳皆悉雲會舍利子廣為說法聞已而去於後夜分正意繫心入滅盡定從定起已而寂滅焉

 

49   迦羅臂挐迦邑東南四五里有窣堵波是尊者舍利子門人入涅槃處或曰迦葉波佛在世時有三拘胝(拘胝者唐言億)大阿羅漢同於此地無餘寂滅

 

50   舍利子門人窣堵波東行三十餘里至因陀羅勢羅窶訶山(唐言帝釋窟)其山巖谷杳冥花林蓊欝嶺有兩峯岌然特起西峯南巖間有大石室廣而不高昔如來嘗於中止時時天帝釋以四十二疑事畫石請問佛為演釋其迹猶在今作此像擬昔聖儀入中禮敬者莫不肅然驚懼山巖上有過去四佛坐及經行遺迹之所東峯上有伽藍聞諸土俗曰其中僧眾或於夜分望見西峯石室佛像前每有燈炬常為照燭

 

51   因陀羅勢羅窶訶山東峯伽藍前有窣堵波謂亘(許贈反)(唐言雁)昔此伽藍習翫小乘小乘漸教也故開三淨之食而此伽藍遵而不墜其後三淨求不時獲有比丘經行忽見群雁飛翔戲言曰:「今日眾僧中食不充摩訶薩埵宜知是時。」言聲未絕一雁退飛當其僧前投身自殞比丘見已具白眾僧聞者悲感咸相謂曰:「如來設法導誘隨機我等守愚遵行漸教大乘者正理也宜改先執務從聖旨此雁垂誡誠為明導宜旌厚德傳記終古。」於是建窣堵波式昭遺烈以彼死雁瘞其下焉

 

52   因陀羅勢羅窶訶山東北行百五六十里至迦布德迦(唐言鴿)伽藍僧徒二百餘人學說一切有部伽藍東有窣堵波無憂王之所建也昔佛於此為諸大眾一宿說法時有羅者於此林中網捕羽族一日不獲遂作是言:「我惟薄福恒為弊事。」來至佛所揚言唱曰:「今日如來於此說法令我網捕都無所得妻孥飢餓其計安出?」如來告曰:「汝應蘊火當與汝食。」如來是時化作大鴿投火而死羅者持歸妻孥共食其後重往佛所如來方便攝化羅者聞法悔過自新捨家修學便證聖果因名所建為鴿伽藍

 

53   迦布德迦伽藍南二三里至孤山其山崇峻樹林欝茂名花清流被崖緣壑上多精舍靈廟頗極剞劂之工正中精舍有觀自在菩薩像軀量雖小威神感肅手執蓮花頂戴佛像常有數人斷食要心求見菩薩七日二七日乃至一月其有感者見觀自在菩薩妙相莊嚴威光赫奕從像中出慰喻其人昔南海僧伽羅國王清旦以鏡照面不見其身乃覩贍部洲摩揭陀國多羅林中小山上有此菩薩像王深感慶圖以營求既至此山寔唯肖似因建精舍興諸供養自後諸王尚想遺風遂於其側建立精舍靈廟香花伎樂供養不絕

 

54   孤山觀自在菩薩像東南行四十餘里至一伽藍僧徒五十餘人並學小乘法教伽藍前有大窣堵波多有靈異佛昔於此為梵天王等七日說法其側則有過去三佛坐及經行遺迹之所

 

55   伽藍東北行七十餘里殑伽河南至大聚落人民殷盛有數天祠並窮彫飾東南不遠有大窣堵波佛昔於此一宿說法

 

56   從此東入山林中行百餘里至落般膩羅聚落伽藍前有大窣堵波無憂王之所建佛昔於此三月說法此北二三里有大池周三十餘里四色蓮花四時開發從此東入大山林中行二百餘里至伊爛拏鉢伐多國(中印度境)

 

57 大唐西域記卷第九

 

 

  1. 1)1) 범어로는 magādha이며 마갈(摩竭)ㆍ마게(摩揭)ㆍ마가타(摩訶陀)ㆍ묵갈타(黙竭陀) 등으로도 음사하며, 무해(無害)ㆍ무뇌해(無惱害)ㆍ불악처(不惡處)ㆍ치감로처(致甘露處)ㆍ선승(善勝)ㆍ총혜(聰惠)ㆍ천라(天羅) 등으로 번역한다. 고대 인도 16대국 가운데 하나이다. 대체로 지금의 비하르(Bihār)주의 가야(Gayā)현과 파트나(Patna)현을 중심으로 하는 갠지스강 남쪽 지역에 해당한다. Śiśunāga왕조(기원전 600~기원전 360)의 빈비사라왕과 그 아들인 아사세왕은 불교와 쟈이나교의 개조와 동시대 인물이며 이 두 종교는 그 왕조의 보호 아래에서 발전하였다.
  2. 2)2) 이 쌀은 오직 국왕이나 대덕에게만 바치는 것이었으며, 지금도 파트나 지방의 쌀은 현재 인도에서도 가장 우수한 품종으로 여겨지고 있다.
  3. 3)3) 본문 권5에 그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4. 4)4) 범어로는 pāṭali이며 원래는 나무 이름이다. 파라리불다라(波羅利弗多羅), 파라리불(巴羅利弗), 파린(巴隣), 파라리(波羅梨) 등으로도 음사한다. 이 도시 이름은 서방 문헌에 Palibothra라고 기록되어 있다. 옛 도시의 유적은 지금의 파트나로부터 서북쪽의 Dinapore에 이르는 길에 있다.
  5. 5)5) 본서 권1의 무우왕 주 160) 참고.
  6. 6)6) 무우왕은 빈두사라(頻頭娑羅)의 아들이며, 왕조의 시조인 찬드라굽타의 자손이므로 현장의 이러한 내용은 잘못된 것이다. 빈비사라왕은 Śiśunāga왕조 제5세이며 불교와 쟈이나교의 조사들과 동시대인이고 그 아들인 아사세왕에게 살해되었다.
  7. 7)7)) 실제로 팔만 사천 가지의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수를 나타내는 인도의 표현법이다.
  8. 8)8) 범어로는 mahêndra이며 남전(南傳)에서는 마힌다(mahinda)라고 하며 아육왕의 동생으로서 세일론섬에 불교를 전한 인물이다.
  9. 9)9) 부처와 아라한이 갖추는 다섯 가지 공덕, 즉 계신(戒身)ㆍ정신(定身)ㆍ혜신(慧身)ㆍ해탈신(解脫身)ㆍ해탈지견신(解脫知見身)이다.
  10. 10)10) 마우리야왕조 이전의 난타(Nanda)왕조의 군주라는 의미로 보인다. 난타왕조는 거대한 군사력과 그것을 유지하기에 족한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11. 11)11) 범어로는 kurkuṭa-ārāma이며 계원(鷄園)ㆍ계림원(鷄林園)ㆍ계림정사(鷄林精舍) 등으로 번역한다. 『잡아함경』 권23에 의하면 아육왕이 우파굴다(優波崛多)를 이 절로 맞아들여서 공양 예배하며 불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이 절을 건립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또한 『선견율비바사(善見律毘婆沙)』 권2 등의 상좌부 계통의 남전(南傳)에서는 아육승가람(阿育僧伽藍)에서 아육왕의 관정(灌頂) 즉위 16년째에 제3결집을 행하였다고 하지만 대중부 계통의 북전(北傳)에서는 이 결집을 전하고 있지 않으며 오늘날 역사적으로도 이 결집을 부정하고 있다.
  12. 12)12) 범어로는 nāga-arjuna이며 2~3세기에 생존하였던 남인도 바라문 종족으로 대승불교를 인도에 성행시킨 인물이다. 인도에서는 중관파(中觀派)의 조사로 여겨지고 있으며 또한 부법장(付法藏) 제13조이다.
  13. 13)13) 범어로는 aśvaghoṣa이며 마명(馬鳴) 또는 공승(功勝)이라고도 불린다. 가니색가왕과 동시대인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불멸 후 약 6백 년, 즉 2세기 무렵의 사람으로 생각된다. 사위국의 Śāketa성(城) 사람이며 처음에는 외도와 교유하며 논의를 하였지만 협 존자에게 논파당하자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그로부터 두루 3장을 익혀서 대중의 공격을 받았다.
  14. 14)14) 범어로는 telādḥaka이며 나란타에서 서쪽으로 21마일 떨어진, 현재 Tillāra라 불리는 땅이 이곳에 해당하며 이 지명도 이 절의 이름이 변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15. 15)15) 『자은전』 3ㆍ4권에 의하면 현장은 가고 오는 길에 모두 이 절에 들렀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2개월간 머물면서 반야발타라(Praja-bhadra)에게 나아가 유부(有部)의 3장과 성명(聲明)ㆍ인명(因明) 등을 배웠다고 한다.
  16. 16)16) 이 산은 붓다가야의 북쪽 15~16마일의 Barābar Hill(범어로는 pravaragiri)로 추정되고 있다. 이 산에는 굴원(窟院)이 있고 아육왕의 비문이 발견되고 있다.
  17. 17)17) 범어로는 guṇa-mati이며 구나말저(窶拏末底)ㆍ구나마저(求那摩底)로도 음사한다. 남인도인이며 유식 10대 논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후에 나란타사에 살면서 그 높은 명성을 날렸다.
  18. 18)18) 범어로는 sāṇkhya이며 승기야(僧企野)라고도 하며 상키야학파를 말한다.
  19. 19)19) 진제(眞諦)의 반대어이다. 속제(俗諦)ㆍ세속제(世俗諦)ㆍ복속제(覆俗諦)라고도 한다.
  20. 20)20) 진제(眞諦)ㆍ제일의제(第一義諦)라고도 한다. 승의란 뛰어난 지혜의 대경(對鏡), 제는 변함이 없는 진리, 진실한 것, 있는 그대로의 진상 등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인다.
  21. 21)21) 범어로는 śila-bhadra이며 『자은전』에 의하면 현장이 인도를 방문하였을 때 이 논사는 나란타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106세의 고령이었으며 대중들이 정법장(正法藏)이라고 존경하고 있었다고 한다. 현장은 이 논사로부터 나란타에서 『유가론』을 수학하였는데 현장이 인도를 떠나자 곧 입적하였다.
  22. 22)22) 오늘날에는 가야성을 브라흐마가야(Brahma-Gayā)라고 부르며 붓다가야(Buddha- Gayā)와 구분하고 있다. 『중허마하제경(衆許摩訶帝經)』 권6에 의하면, 이 지명의 유래는 대선인(大仙人) 가야(伽耶)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마하바라타와 여러 Purāṇa에서는 ‘성스러운 도시’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오는 성지이다.
  23. 23)23) 높은 꼭대기에 흙을 쌓아 단을 만들어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으로 천자(天子)가 즉위할 때에 행한다.
  24. 24)24) 범어로는 prāg-bodhi이며 붓다가야의 동북쪽 약 3마일 떨어진 지점인 니련선하의 동안(東岸)에 위치한 Mora산이라고 한다.
  25. 25)25) 범어로는 pūrṇa-varman이며 아육왕의 마우리야왕조는 기원전 2세기에 멸하였는데 그 후예들은 서부인도와 마게타 지방에 미약하게나마 존속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설상가왕의 폐불은 7세기 초엽의 일이므로, 이 왕의 연대도 그 무렵으로 추측할 수 있다.
  26. 26)26) 이것이 붓다가야 대솔도파[大塔]인데 사리를 넣은 솔도파가 아니라 불전(佛殿)이다. 외관은 9층의 높은 솔도파인데 내부는 2층이다.
  27. 27)27)무번천(無煩天)ㆍ무열천(無熱天)ㆍ선현천(善現天)ㆍ선견천(善見天)ㆍ색구경천(色究竟天)의 5천을 5정거천(淨居天)이라 한다. 곧 색계(色界)의 제4선천(禪天)을 가리키며, 불환과(不還果)를 증득한 성인이 이 하늘에 난다고 한다.
  28. 28)28) 숙명을 아는 지혜를 말한다.
  29. 29)29) 보리수를 말한다. 석가모니께서 이 나무 아래서 성도하셨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도수(道樹)라고도 한다.
  30. 30)30) 자정은 범어로 maitri라고 하며 모든 중생에 대하여 자비의 생각에 머물도록 하는 선정을 말한다.
  31. 31)31) 신변월(神變月)은 신족월(神足月)이라고도 하며 정월ㆍ5월ㆍ9월의 삼장재월(三長齋月:특히 1개월의 긴 시간에 걸쳐서 제를 지내는 달이라는 뜻)을 말한다. 이 달에는 제불(諸佛)과 제천(諸天)이 신족(神足)으로 사천하를 다니면서 선악을 자세하게 기록한다고 한다.
  32. 32)32) 여기에 현장이 기록한 전설은 대략 360년 무렵, 굽타왕조의 Samudragupta왕과 세일론의 Siri Meghavana왕과의 사이에 일어났던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1. 1)1) 범어로는 bārāṇasī, vārāṇasī이며 오늘날의 베나레스(Benares)이다. 이 지역의 옛 이름인 Kāśī는 오늘날에도 독자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또는 Kāśī-Banaras로 불리고 있다. 『법현전』에도 ‘가시국(迦尸國) 파라내성(波羅㮈城)’이라고 하고 있다. 고대 인도의 16대국 가운데 하나로서 중인도에서 수륙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상업무역의 중심지였다.
  2. 2)2) 나라의 도성은 서쪽으로는 긍가하에 임해 있으며, 지금의 베나레스는 갠지스강을 동쪽에 두고 그 서안(西岸)에 위치해 있다.
  3. 3)3) 『석가방지(釋迦方志)』에서 이 나라의 외도에 관한 기록을 보면, “천사는 백여 곳, 외도는 만여 명 있는데 대부분이 대자재천(大自在天)의 근(根)을 섬기고 있다. 큰 성 안에는 천사(天祠)가 20군데 있으며 천근(天根)의 높이는 백여 척에 달한다”라고 하고 있다. 현장이 말하는 대자재천(시바신)의 근이란 남근(男根)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힌두교도들은 이 지역을 오늘날에도 7대 성지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으며 참배객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다.
  4. 4)4) 지금의 베나레스시 동북쪽의 Lat Bhairon에 단편(斷片)이 된 돌기둥이 있다. 지금은 붉게 칠해져서 이슬람교도의 예배소(禮拜所) 가운데에 있지만 이것이 아육왕 석주라는 것은 V.A. Smith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1908년 폭동에 의해 파괴되었다.
  5. 5)5) 지금의 베나레스 북쪽 약 4마일 떨어진 지점, 사르나트(Sārnāth)이다. 옛날 니구율타(尼拘律陀)가 사슴을 위해 보시한 곳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Dhāmekh탑 외에는 눈에 뜨이는 커다란 유적지는 없지만 현장이 기술한 2백여 척이나 되는 거대한 정사의 터나 불전ㆍ탑ㆍ승원 등의 유적과 빼어난 조각이 아주 많이 발견되었다. 굽타시기 불교미술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현장이 다녀갈 당시 가장 성황을 이루었으나 13세기 무렵 외교도의 침입이래 폐허가 되었다.
  6. 6)6) 오늘날 Dharmarājika Stūpa이며 1794년에 발견된 것이다. 처음에 아육왕이 세웠던 것을 여섯 차례에 걸쳐서 수리한 것이며 벽돌로 만들어졌다.
  7. 7)7) 정사의 서쪽에는 현재 18.5미터, 직경 80센티미터의 잘려진 기둥이 있다. 본래는 높이 45.7미터의 것이었다. 기둥 머리 부분의 4두(頭)사자의 장식은 산치와 같은 형태이며 좀더 완전한 것이다. 현재 사르나트 박물관에 있다.
  8. 8)8) 범어로 pratyeka-buddha라고 한다. 홀로 수행해서 깨달음을 열려고 하는 사람이다. 벽지불(辟支佛)이라고도 하고 또는 다른 인연에 의해서 깨닫기 때문에 연각(緣覺)이라고도 한다.
  9. 9)9) 범어로는 maitreya이며 미륵을 말한다.
  10. 10)10)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 화림원(華林園) 안에 있는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세 차례의 법회를 열어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
  11. 11)11) 이 탑이 현재 있는 Dhāmekh탑이라고 한다. 높이는 백여 척, 평면은 원형이고 탑신(塔身)의 상층은 벽돌로 만들었고 하층은 돌로 만들었다. 주벽(周壁)에는 곱고 화려한 모양이 새겨져 있다. 이 지역에 현존하는 유적물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이다.
  12. 12)12) 석가모니부처님과 관련을 맺고 있는 연못은 아마 오늘날의 Naya, Sarang, Candra의 세 곳으로 추측된다.
  13. 13)13) 범어로는 kumbhīra이며, 『현응음의(玄應音義)』 5권에는 “교룡(蛟龍)을 범어로 궁비라(宮毗羅)라고 말한다. 음(音)은 교(交)이다. 비늘이 있는 것을 교룡이라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금비라마갈어야차대장(金毘羅摩竭魚夜叉大將)’이라는 말도 있으므로 어쩌면 악어를 신격화한 것일지도 모른다.
  14. 14)14) 일체의성취(一切義成就)를 말하며, 싣달다태자를 번역한 말이다.
  15. 15)15) 범어로는 nirãnjana이며 니련선나하(尼連禪那河)이다. 불타가야 부근을 흘러서 Phalgu강으로 흘러든다.
  16. 16)16) 범어로 samyaksaṃbuddha이다. 부처님 10호(號)의 하나이다. 삼먁삼불타라고 음역하고 정등각(正等覺)ㆍ정변각(正遍覺)ㆍ정변지(正遍智)라고도 번역한다. 부처님께서는 평등하고 바른 진리를 깨달았으므로 이같이 이름한다.
  17. 17)17) 범어로는 udrakarāmaputra이며 부처님께서 출가한 후 한때 이 사람에게 나아가서 수행하였다.
  18. 18)18) 육사 외도 가운데 한 사람인 Ārāḍa-kālāma이며 부처님의 도를 구하기 위해 제일 처음 나아가서 수행하였던 외도의 선인(仙人)이다.
  19. 19)19) 제사를 지내기 위해 땅을 높게 돋운 곳, 혹은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곳이다.
  20. 20)20) 이 나라 이름은 의역(意譯)한 것이다. 베나레스 동쪽 50마일 지점에 있는 지금의 Ghāzipur가 주도(主都)에 해당한다. 현재 이름은 ‘전(戰)’이라는 뜻을 갖는 Garjan에서 유래하는 이슬람화한 명칭이다.
  21. 21)21) 거리와 방향으로 보아 이 가람의 소재지를 현재의 갠지스강가의 Baliya, Ballia(Gāzipur에서 동쪽으로 약 33마일 지점에 위치)의 부근이라고 볼 수 있으며, Ballia의 동쪽 1마일 떨어진 지점의 작은 마을인 Bikapur가 이에 해당한다.
  22. 22)22) 갠지스강의 남쪽, Patna의 서쪽 약 5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Arrah의 서쪽 6마일 지점에 위치한 지금의 Masār마을로 추정된다.
  23. 23)23) 비슈누신, 크리슈나신과 동일시되며 또한 비슈누신의 권화(權化)로 여겨지는 신이다. 이 천사(天祠)의 위치에 대해서 현장은 명기하고 있지 않지만 Masār의 북쪽 16마일 떨어진 지점은 Gogra강이 갠지스강에 합류하는 Revelganj이며, 힌두교의 성지이고 수많은 힌두사원 건축이 있는 곳이다. 아마 이곳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24. 24)24) 16야차신의 하나이다.
  25. 25)25) 범어로는 vaiśālī이며 벽사리(薜舍離)ㆍ유야리(維耶離) 등으로도 음사하며, 광박(廣博)ㆍ광엄(廣嚴)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지역은 고대 인도 16대국 가운데 하나였으며, 발기(跋祇, Vṛji)종족의 일종인 이차(離車, Licchavi)족이 공화정치를 펼쳤던 곳이다. 부처님 재세시에는 굉장히 번영하여 일찍이 석가모니 자신도 몇 번이나 이 나라의 수도에서 유행하면서 인민들을 교화하였다. 또한 쟈이나교의 개조(開祖)인 마하비라의 탄생지로도 유명하다.
  26. 26)26) 이 위치는 현재의 Gandak강 좌안(左岸) Hājipur의 북쪽으로 18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Muzzaffarpur 지방의 Basāŗh이다. 그곳에서는 지금도 Raja-Bisal-ka-garh (Visala왕의 요새)라 불리는 다 허물어진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27. 27)27)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을 말한다.
  28. 28)28) 이 아육왕 석주는 사자상이 달려 있는 원형 그대로 오직 하반부만 땅 속에 매장된 상태로 현존하고 있다. 이 사자상은 현존하는 사자주두(獅子柱頭) 가운데 가장 오래된 양식의 것이라고 한다.
  29. 29)29) 팔리경율에는 부처님이 폐사리에 머무는 동안에는 대부분 대림(大林, Mahāvana)의 중각강당에 머물고 계셨다고 한다. 한역 『잡아함경』 권3에는 중각강당을 미후지반(獼候池畔)이라고 말하고 있다. 원숭이들이 꿀을 가져다가 바쳤다는 설화는, 부처님께서 비구들과 함께 유행하는 가운데 비구들이 각자의 발우를 노지에 두었다. 부처님께서도 자신의 발우를 그 한가운데에 두었는데 원숭이는 수많은 발우 중에서 부처님의 발우를 가려내어 사라나무 위로 올라가서 꿀을 채취하여 가득 담아서 부처님께 바쳤다는 이야기이다.
  30. 30)30) 범어로는 vimalakīrti이며 ‘더러움이 없는, 순수한’이라는 뜻이며 유마힐을 가리킨다.
  31. 31)31) 폐사리성의 창부(娼婦)로 매우 아름다웠다. 석존에게 귀의하여 자신이 소유하던 암몰라동산을 헌납하였다. 뒤에 스스로 비구니가 되었다.
  32. 32)32)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법현(法顯)이 번역한 『대반열반경』 상(上)의 “세존께서…… 여러 비구들과 건다 마을로 가시는데 비야리성(毗耶離城)을 지나셨다. 이때 세존께서 뒤를 돌아보시며 성을 향하여 웃으셨다. 아난이 곧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대고 절을 올리고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위없는 스승께서 까닭 없이 허망하게 웃는 일은 없으십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내가 지금 성을 향하여 웃는 까닭은 바로 마지막으로 이 성을 보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홀연히 허공에서는 구름도 끼지 않은 채 비가 내렸다. 이에 아난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신기합니다. 허공이 청정하여 조금도 흐린 기색이 없는데 홀연히 이처럼 자욱하게 비가 내립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알아야 한다. 허공의 여러 천신들이 내가 마지막으로 비야리성을 본다고 말하자 그 말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슬퍼하고 흐느끼면서 슬픔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니, 이 비는 바로 천신들의 눈물이지 비가 아닌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33. 33)33) 범어로는 Samantamukha-dhāraṇi일 것으로 추측되나 어떤 경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34. 34)34) 지명을 기록하지 않은 이 옛 성은 폐사리성으로 추정되는 Bisal의 북북서쪽 30마일 떨어진 지점에 있는 폐허 Kesariya로 생각된다. 이 폐허가 된 유적지에는 높은 탑이 있으며 이 지역 사람들은 이것을 Rāja Vena Cakravati와 관계를 짓고 있다. 이 Kesariya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35. 35)35) 앞서 본서 제3권에서도 이 이름이 나왔지만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이 이야기는 바르후트(Bharhut)불탑의 조각에서 볼 수 있다.
  36. 36)36) 불멸 직후의 제1결집 이후 백 년(또는 백십 년) 뒤에 벌어진 제2결집을 말한다.
  37. 37)37) 범어로는 yaśoda이며 명칭(名稱)ㆍ명문(名聞)으로 번역한다. 바라문 종족으로서 출가하여 불교에 귀의하였으며 아라한과를 증득하고 6신통을 얻었다. 열 가지 일이 비법(非法)이라고 주장하였던 까닭에 내쫓겼는데 서인도 리파다(釐波多)로 가서 마침내 제2결집을 여는 계기를 만든 사람이다.
  38. 38)38) 범어로는 sambhoga이다. 보통 제2결집에 참여한 사람으로서는 삼부타(三浮陀:商那和修)를 들고 있다. 왕사성의 장자로서 부처님 입멸 후 아난에게 나아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발기(跋耆) 비구가 열 가지 일의 비법을 자행한다는 소식을 야사타로부터 듣고 리파다와 함께 결집에 참가하였다.
  39. 39)39) 범어로는 revata이며 리파다(離婆多)ㆍ리파다(梨婆多), 예발다(隸跋多)라고도 음사하며 번역하여 금(金)이라고 한다. 구시나게라국의 파파성(波婆城, Pāvā)의 상좌였다. 한약국(韓若國)은 본서 외에 다른 서적에서는 보이지 않아 내용을 잘 알지 못한다.
  40. 40)40) 사류(沙留)ㆍ차루(遮樓)ㆍ사란(沙蘭)이라고도 하고, 사하사저(沙訶闍底, Sahājati)에 사는 장로이다.
  41. 41)41) 범어로는 khubja-sohita이며, 급사소미라(級闍蘇彌羅)ㆍ불사소마(不闍蘇摩)ㆍ불사종(不闍宗)이라고도 음사하고, 곡안(曲安)으로 번역한다. 바라문 종족 사람이며 화자성(華字子城:波吒釐子城, Pāṭaliputra)에서 태어났다. 곱사등이고, Sobhita가 그 이름인 까닭에 Khujja-Sobhita라고 불렸다. 불멸 후 아난에 의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42. 42)42) 범어로는 vṛji이며 불률씨(佛栗氏)ㆍ비리기(毘梨祇)ㆍ발기(跋耆) 등으로도 음사한다. 멀리 북방 네팔에 근접한 지방으로서 지금의 Darbhanga 지역의 북부에 해당한다.
  43. 43)43) 정확한 호칭은 알 수 없다. 범어로는 이 원음을 Caśuna와 같은 것으로 여겨서 이 지방이 Janakapura일 것이라는 설도 있고, 근래에는 Madhubani의 북쪽 약 16마일에 위치한 Bāligar의 허물어진 터라는 설이 강력하다.
  44. 44)44) 범어로는 nepāla이며 니파라(泥婆羅)ㆍ니파라(儞波羅)ㆍ니팔라(尼八剌)라고도 음사한다. 『자은전』에는 등장하지 않으므로 현장이 직접 방문한 나라가 아닐지도 모른다. 당시 니파라국은 토번(吐蕃:西藏)에 예속되어 있었으며 토번과 함께 중국에서 온 사절(使節) 왕현책(王玄策)을 도와서 마게타를 정벌한 일이 있다.
  45. 45)45) 범어로는 jīvajīvaka이며 생생조(生生鳥)ㆍ공명조(共命鳥)라고도 하며 몸 하나에 두 개의 머리를 가졌다는 전설상의 새이다.
  46. 46)46) 범어로는 aṃśu-varman이다. 7세기 초엽에 나온 영주이며 642년 무렵에 사망하였다. Thākuri왕조의 시조이다. 그의 재위 중에 서장(西藏)에 접근하여 자신의 딸 Bhṛkuṭi를 서장국의 왕 Sroṅ-bṫsan sgam-po의 왕비로 보내어서 왕을 불교에 귀의하게 하였다. 중국으로부터 641년에 서장으로 들어간 문성공주(文成公主)는 제2비(妃)이다.
  47. 47)47) 『당서(唐書)』에는 아기파니지(阿耆婆濔池)라고 하며 범어로 ajīva, 즉 ‘죽음’을 의미하므로 사지(死池)라고 해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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