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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이 마음은 빛난다pabhassaram idaṃ cittaṃ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 마음은 객으로 온 번뇌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비구들이여, 이 마음은 빛난다. 그 마음은 객으로 온 번뇌들로부터 벗어났다.A1.10, “pabhassaram 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 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n ti. pabhassaram 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 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vippamuttan ti].”

 

[주석]이 가르침은 대승불교에서 「능가경」 이나 대승 「열반경」 등 여러 경과 논서들을 통해서 객진번뇌(客塵煩惱)로 정착이 되었다. 특히 「능가경」 에서 "以如來藏是淸淨相 客塵煩惱垢染不淨(여래장은 청정한 것이지만 객으로 온 번뇌에 오염되어서 깨끗하지 못하다.)"이라고 하였듯이 특히 여래장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이다. 그리고 홍미로운 것은 赤沼智善(아까누마 치젠)의 「한파사부사아함호조 록」(漢巴四部四阿含互照錄)에 의하면 한역 아함부 경들에는 객진번뇌를 말하고 있는 경들은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본자청정 객진번뇌의 가르침이 초기불교의 빠알리 삼장 가운데는 오직 본서의 이 부분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이것을 두고 초기경들에서도 부처님께서는 본자청정한 '영원불멸하는' 마음을 설하신 것 으로 확대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곤란하다. 초기경들 전반에서 예외없이 마음은 항상 연기적 존재이고 조건발생이고 연이생(緣以生) 일 뿐이라서 이러한 마음은 대상 없이는 일어나지 못하는 조건생 · 조건멸이고, 찰나생 찰나멸이다. 그래서 바로 위의 경에서 마음은 너무나 빨리 변하기 때문에 비유를 들 수조차 없다고 하셨다. 마음을 불변하는 그 무엇으로 상정해버리면 그것은 즉시에 외도의 자아이론과 같 아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벗어났다( vippamutta)'는 것은 속행의 순간에 욕망이. 없고 포악하지 않고 미혹하지 않은 [불탐 · 부진 불치의] 세 가지 원인을 가진 지혜와 함께한 유익한 마음이 일어날 때 [바왕가의] 마음은 객으로 온 오염원들로 부터 벗어났다는 뜻이다. 마치 계를 지키고 바른 행실을 갖춘 아들 등 때문에 어머니 등이 잘 공부시키고 훈계하고 교계했다고 명성을 얻는 것과 같다. 즉 속행의 순간에 일어난 유익한 마음으로 인해 이 바왕가의 마음은 객으로 온 오염원들로부터 벗어났다고 설하시는 것이다."(AA.i.61) 

 

  * 빛난다(pabhassara)'는 것은 창백하다(pandara), 깨끗하다(parisud dha)는 뜻이다."(AA.i.60) 

 

"객으로 온 것들(agantuka)'이란 함께 생기지 않고(asahajata) 나중에 속행의 순간(javanakkhana)에 생긴 것들이다.' 

"오염원(upakkilesa)들'이란 욕망 등에 의해서 오염되었기 때문에 오염 된 것이라 불린다.

 

 

[마성스님]  두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구절은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의 원형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이른바 ‘심성본정心性本淨 객진번뇌客塵煩惱’라는 경전적 근거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중요한 내용이 한역 아함경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심성본정설은 테라와다(Theravāda, 上座部)와 마하상기까(Mahāsaṃghika, 大衆部)에서 주장했던 사상이다. 사르와스띠와다(Sarvāstivāda, 說一切有部)를 비롯한 다른 부파에서는 반대로 ‘심성본부정설心性本不淨說’을 주장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이 사상을 적극 수용하고 확대 해석하여 불성佛性・여래장如來藏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위에서 인용한 빨리어 빠밧사라pabhassara는 ‘빛나는, 매우 밝고 깨끗한, 청정한’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마음은 빛난다’ 혹은 ‘이 마음은 청정하다’고 번역한다. 주석서에서는 이 마음을 ‘바왕가의 마음(bhavaṅga-citta, 有分心)’이라고 해석한다. 즉 마음에는 색깔이 없고, 색깔이 없기 때문에 깨끗하여 빛난다는 것이다.

 

 

 

  한편 부파불교 시대의 논사들은 심성이 본래 청정한가에 대해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부종륜론異部宗輪論』에 의하면 대중부에서는 “심성心性은 본래 청정한데 객진客塵의 수번뇌隨煩惱에 섞여 물들게 되어 부정不淨하게 된다고 설한다(T49, p.15c).” 이것은 중생들의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지만, 객진의 수번뇌에 섞여 물들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앙굿따라 니까야』(AN1:5:1)의 내용과 일치한다.

 

  『성실론成實論』에 “따라서 심성은 본래 청정하지 않고 객진번뇌 때문에 깨끗하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부처는 중생을 위해 이른바 마음은 항상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객진번뇌에 물들면 그 마음은 깨끗하지 않다고 설한다. 또한 부처는 나태한 중생들을 위함이다. 만약 마음이 본래 청정하지 않다고 들으면, 다시 심성을 개조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며, 따라서 깨끗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심성은 본래 청정하다고 설한다(T32, p.258c).” 이와 같이 『성실론』에서는 마음이 본래 청정하지 않다고 하면 깨끗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심성본정설을 설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 권상卷上에 “어찌하여 더러움에 물든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만약 이 마음이 없다면 독행무명獨行無明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오식五識과 더불어 비슷한 이 법法은 당연히 없다. 왜냐하면 이 오식은 공통적으로 일시에 스스로의 의지가 있으니, 안眼 등은 안근眼根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의명意名은 당연히 의義가 없어야 한다(T31, p.114a).”고 설해져 있다. 이것은 본래 청정한 마음이 없다면 더러움에 물든 마음[有染汚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섭대승론』에서도 심성이 본래 청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 이후 대승불교의 경전과 논서에서는 이 심성본정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에서는 끝까지 ‘심성본부정설心性本不淨說’을 주장했다. 심성본부정설은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 아니라는 설이다.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 권27에 의하면, 설일체유부에서는 “간혹 어떤 사람은 ‘심성은 본래부터 청정하다’고 집착하는데, 마치 분별론자分別論者와 같다. 그들은 ‘마음의 본성은 청정한 것인데 객진번뇌에 더러워졌기 때문에 모양이 청정하지 않다’고 한다. 그들의 그러한 집착을 중지시키고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 아니며, 객진번뇌에 더러워졌기 때문에 모양이 청정하지 않은 것이 아님을 드러내 보이기 위함이다(T27, p.140b).”고 주장했다. 이것은 설일체유부에서 대중부와 분별론자들이 주장하는 심성본정설을 비판한 것이다. 그러면 설일체유부에서는 어떤 논리적 근거로 심성心性의 불청정설不淸淨說을 주장하게 되었는가? 『대비바사론』 권27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만일 마음의 본성이 청정한 것인데 객진번뇌에 더러워졌기 때문에 모양이 청정하지 않다고 한다면 어째서 객진번뇌의 본성이 더러운 것이 본성이 청정한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에 그 모양이 청정해지지 않는 것인가? 만일 객진번뇌의 본성이 더러운 것이 비록 본성이 청정한 마음과 상응한다 하더라도 모양이 청정해지지 않는다면 역시 마음의 본성이 청정한 것은 객진번뇌의 모양이 청정하지 않은 것을 말미암지 않을 것이니, 뜻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T27, p.140bc)

 

  위 인용문에서는 두 가지 근거로 ‘심성본정설’이 잘못된 주장임을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청정한 마음이 객진번뇌에 의해 더러워졌다면, ‘왜 객진번뇌는 청정한 마음과 같이 깨끗해지지 않는가?’라고 반문하고 있다. 둘째는 객진번뇌가 청정한 마음과 상응하여 청정해지지 않는다면 객진번뇌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성은 본래 청정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대비바사론』 권27은 계속해 분별론자의 심성본정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또한 이 본성이 청정한 마음은 객진번뇌보다 먼저 생긴 것인가 같은 때에 생긴 것인가? 만일 먼저 생겼다면 마음은 생긴 뒤에 머물러서 번뇌를 기다려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두 찰나[二刹那]를 지나며 머물러야 하므로 종(宗)을 어긴다는 허물이 있다. 만일 같은 때에 생겼다 하면 어떻게 마음의 본성이 본래 청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종은 미래의 마음은 본래 청정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다른 종의 바르지 못한 집착을 중지시키고 자기 종의 올바른 도리를 드러내기 위해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T27, p.140c)

 

  위 인용문은 설일체유부에서 대중부와 분별론자들이 주장하는 ‘심성본정설’이 허구임을 논증한 것이다. 즉 설일체유부에서는 ‘본성정심本性淨心이 객진번뇌보다 먼저 생긴 것인가? 아니면 동시에 생긴 것인가?’라고 묻고, 분별론자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논증하고 있다. 첫째는 본성정심이 객진번뇌보다 먼저 생겼다고 한다면 뒤따라오는 번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러면 마음이 두 찰나[二刹那] 동안 머물러야 한다는 모순이 생기게 된다. 둘째는 본성정심이 객진번뇌와 동시에 생겼다고 한다면 마음의 본성이 본래부터 청정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설일체유부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심성본정설’을 거부하고, ‘심성비본청정설心性非本淸淨說’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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