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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법보신문-니까야 친설 논쟁 +평가(11개의 논문)

 

법보신문---니까야 친설 논쟁정리 (11개의 논문) + 2개의 종합평가

 

 

글의 순서는

제1.권오민-제2.마성-제3.권오민-제4.마성-제5.권오민-제6.전재성-제7.권오민-제8.황순일-제9.권오민-제10.조성택-제11.안성두

 

 

 

논쟁에 대한 법보신문 설명

 

초기불교 경전이라는 아함이나 니까야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의 주장과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의 반론이 본지에 이어지면서 교계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최근 남방불교 경전인 니까야와 남방수행법인 위빠사나가 국내에 급격히 확산되는 가운데 이번 논쟁이 단순한 ‘경전관’을 넘어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논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이들 두 학자의 주장과 반론을 게재하고 있는 법보신문 홈페이지(www.beopbo.com)에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다양한 댓글들이 잇따르고 있다. 또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지지 및 견해차가 뚜렷이 나뉘고 있어, 두 사람의 논쟁이 향후 불교학계 전반으로 확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번 논쟁의 시작은 권오민 교수가 「문학/사학/철학」(여름 제17호)에 발표한 「불설과 비불설」 논문이 본지에 소개되면서부터다. 권 교수는 논문에서 부파시대 때 오고갔던 다양한 불설/비불설 논쟁을 소개한 후 대승경전을 불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사상사에 대한 무지와 폐쇄적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 교학적·역사적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대승경전이 불설이 아니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이나 니까야 또한 불설이 아니다”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본지 1008호 1면)

이에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본지를 통해 즉각 반론을 펼쳤다. 대승경전은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해 불설로 가탁한 것으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친설이 담긴 니까야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 비록 대승경전에 서술된 내용이 초기 붓다의 가르침과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으로 인정되지만 대승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친설이 아님은 명명백백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함이나 니까야도 변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불설이 아니라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라는 게 스님의 비판이었다.(본지 1009호 19면)

권오민 교수는 다시 마성 스님의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니까야는 상좌부에 의해, 잡아함과 중아함은 설일체유부에 의해 승인된 경전이듯 ‘아함’이나 ‘니까야’는 특정의 경명(經名)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 ‘상좌부 전통에서 정법을 유지하기 위해 결집했다’고 할 때 ‘정법’은 불교보편의 정법인가, 아니면 상좌부 전통에서의 정법인가를 되물은 뒤 설일체유부 등 상좌부 이외의 부파에서 결집한 불설을 법이 아닌 것처럼 얘기하는 것은 지극히 독선적이라고 꼬집었다.(본지 1010호 19면)

이러한 권 교수의 반박에 마성 스님이 다시 맞섰다. 니까야를 부정하는 것은 상좌부의 전통성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니까야는 상좌부에서 2500년간 계승해 온 경전이라는 것. 따라서 현존하는 니까야가 불설이 아니라고 단언적으로 선언한 학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며 논자 스스로 논리의 함정에 빠진 것이라고 반박했다.(본지 1011호 19면)

이에 대해 권 교수는 상좌부가 전승한 니까야만이 불설이고 정법이며, 정통불교라고 하는 것은 맹목의 폐쇄적 신념일 뿐으로 스님이야말로 새로운 (상좌부)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다시 강하게 비판하고 나섰다.(본지 19면 참조)

이처럼 두 학자의 치열한 논쟁이 계속 이어지면서 불교학자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나오고 있다. “니까야는 붓다가 말씀했던 경전들을 각 지역에서 수집해 결집한 것으로 누군가의 저술인 대승경전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 “부파불교를 배제하고 니까야를 이해할 수는 없다. 상좌부만이 정통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한 잘못이다.”(임승택 경북대 교수), “니까야와 대승경전은 그 전승 과정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니까야가 대승경전보다 붓다의 친설에 가깝다는 것은 문헌학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증명된 엄연한 사실이다.”(황순일 동국대 교수)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 취지를 파악하려면 초기불전을, 부처님 가르침대로 우리의 심성을 변화시키려면 대승경전이 훨씬 효과적이다. 초기불전과 대승경전은 대립적인 관계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김성철 동국대 교수)

이러한 논쟁 자체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잇따르고 있다. 특히 이번 학술적인 논쟁이 침체된 불교학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뿐 아니라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신규탁 연세대 교수는 “두 분 모두 열심히 공부하는 학자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며 “두 분의 논쟁은 우리 불교학이 딱딱한 논문 안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성큼 다가가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1012호 [2009년 08월 31일 15:21

 

 

 

 

 

 

 

 

 

 

 

제1 권오민 경상대 교수, “대승 불설 부정은 ‘무지’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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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대 권오민 교수, ‘문사철’서 주장

“아함경·니카야도 붓다 친설 아니다”

부파 시대에도 진위논쟁 끊이지 않아

불설 기준은 역사․전통 넘어선 ‘法性’

기사등록일 [2009년 07월 27일 17:31 월요일]

 

 

최근 아함경과 니카야를 부처님이 직접 설한 경전으로 간주하거나 이들 경전을 근거로 초기불교로 돌아가자는 얘기들이 공공연히 나오는 가운데 아함경과 니카야도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또 대승경전을 불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사상사에 대한 무지와 폐쇄적인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 교학적·역사적 ‘진실’이 아니라는 지적도 함께 제기됐다.

 

부파불교 전공자인 권오민 경상대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 게재된‘불설(佛說)과비불설(非佛說)’이란 논문에서 ‘비불설 논쟁’이 대승과 소승 사이에서만 일어난 특수한 논쟁이 결코 아니라 각 부파 간에 빈번하게 다뤄졌던 일반적인 논쟁이었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규명했다. 특히 오늘날 붓다의 친설로 여겨지는 한역 아함경과 남방불교의 니카야도 당시 설일체유부 상좌부 등 각 부파의 교학적 견해에 따라 취사선택되고 때론 불설의 내용까지 바꾸면서까지 새롭게 편찬한 경전들로 대승경전의 편찬방식과 전혀 다르지 않음을 조목조목 밝혔다.

 

이 논문에 따르면 부파불교 시대에도 불설의 진위 논쟁은 끊이질 않았고 그런 과정을 통해 “경에 포함되고 율에 나타나면 불설이다”라는『대반열반경』의 정의에 “법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이라는 이론이 등장했다. 그리고 마침내 “불타가 설한 것이든 제자가 설한 것이든 법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로 수지할 수 있다”(『대비바사론』) “ 불법은 오로지 불타의 입으로 설해진 것만이 아니라 일체 세간의 진실하고 좋은 말은 다 불법이다.”(『대지도론』『성실론』)라는 견해가 불설을 판정하는 교파 간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정착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각 부파의 불설론이 경전 편찬의 이론적 근거가 됐던 까닭에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아함경과 니카야를 곧이곧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대승경전이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과 니카야 또한 비불설이며 대승경전이 대승론자에 의해 찬술 결집된 것이라면 아함경과 니카야 역시 부파의 논사들에 의해취사 선택되고 찬술 결집된 경전들로 그 당시조차 비불설로 비판 받았을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비구의 복색을 한 마구니 설’이라고까지 아비달마불교를 비난했던 대승의 찬술자들도 아비달마의 불설론 전통을 ‘계승’해 경전을 편찬하고 당위성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권 교수는 소승이나 대승 등 종파적 입장에 근거한 오늘날의 비불설 논쟁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논쟁은 구호나 선전에 근거한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것일뿐더러 폐쇄적 신념에 기초한 것으로 ‘맹목의 논쟁’일 따름이다. 불설과 비불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불교의 개방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깨달음은 누구에게도 열려 있었으며 진실(법성)은 누구에 의해서도 토론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 교수는 “전통이라는 권위에 의지하지 말고 진실에 의지하라는 것이 대소승의 공통된 불설관이었다”며 “요즘 일각에서 아함경이나 니카야만을 올바른 붓다의 가르침으로 주장하거나 거꾸로 아함경이나 니카야를 초심자를 위한 경전쯤으로 얕잡아 보는 것은 큰 문제”라고지적했다. 특히 권 교수는 “오늘 우리가 시비 결택해야 할것은 종파에 따른 혹은 역사와 전통에 따른 불설·비불설이 아니라 ‘진실’ 바로 그것”이라며 “대승이 그러했듯 이제 바야흐로 오늘의 진실을 오늘의 언어형식으로 결집하고 그것의 불설과 비불설을 시비해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재형기자 mitra@beopbocom

 

 

1008호 [2009년 07월 27일 17:31]

 

 

 

 

 

 

 

 

 

제2-마성 스님, 권오민 교수 “아함도 비불설” 주장 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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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친설 담긴 아함과 대승경전은 ‘딴판’

기사등록일 [2009년 08월 10일 11:53 월요일]

 

대승경전은 붓다 가르침 재해석해 불설 가탁

대승의 아함 비난은 가짜가 원조 주장하는 격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 한국불교사연구소 발행)에서 대승경전을 불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사상사에 대한 무지와 폐쇄적인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 교학적·역사적 ‘진실’이 아니며, 아함경과 니카야 또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본지 1008호 1면) 이런 가운데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권오민 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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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상대 권오민 교수는 「문학/사학/철학」 제17호에 ‘불설과 비불설’이라는 논문에서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 또한 비불설이다”(p.179)라는 핵폭탄과 같은 주장을 펼쳤다. 방대한 분량의 논문을 단 몇 문장으로 논평한다는 자체가 예의가 아닌 줄 알지만, 워낙 충격적인 주장이기에 우선 몇 가지 문제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현존하는 아함이나 니까야도 전승되는 과정에서 개변(改變)·증광(增廣)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학계의 정설이다. 아함이나 니까야 속에는 전승과정에서 불설이 아닌 내용도 많이 포함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함이나 니까야가 붓다의 친설이 아니라는 극단적인 주장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아함이나 니까야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붓다에서부터 비롯된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논자는 불설과 비불설의 논쟁은 부파불교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종파적 입장에 근거한 불설/비불설 논쟁은 맹목의 논쟁일 뿐이다”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 비교는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각 부파 간에 있었던 불설/비불설 논쟁은 붓다의 법과 율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로 말미암아 생긴 논쟁이었다. 그러나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이 찬술한 대승경전을 부파교단에서 비불설이라고 비판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불멸후 승단이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붓다의 법과 율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부파들 간에는 끊임없이 불설과 비불설의 논쟁이 있었다. 논자는 설일체유부(이하 유부로 약칭함)가 당시 분별설부로 알려져 있던 상좌부를 공격하던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특히 유부와 상좌부는 상반되는 교리가 많았기 때문에 논쟁이 치열했다. 현존하는 유부의 논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상좌부의 니까야나 아비담마에서는 그러한 부분을 찾아보기 어렵다.

 

원래 가짜가 진짜 혹은 원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짜는 자기가 진짜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무시하면 된다. 이러한 사례는 대승경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대승경전에서는 부파교단의 가르침을 ‘비구의 복색을 한 악마’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상좌부의 삼장에는 이에 대한 반응이 전혀 없다. 전통을 계승한 쪽에서는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상좌부 전통에서는 정법을 유지 전승하기 위해 결집을 통해 비불교적 요소를 하나하나 배제시켜 나갔다.

 

그런데 자기 부파가 전통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불설과 비불설을 구분하는 잣대를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대반열반경』에 언급된 ‘사대교법(四大敎法)’에는 그 기준을 ‘법과 율에 합치하느냐?’로 판가름했다. 그러나 유부를 비롯한 다른 부파에서는 거기에 ‘법성(法性, dharmata-)’ 혹은 정리(正理, 올바른 이치)를 삽입함으로써 자기 부파의 설이 불설임을 증명해 나갔다. 특히 논자는 유부의 설이 정설인양 대변하고 있지만, 결국 유부는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논자는 결론적으로 아함이나 니까야도 부파불교 시대에 취사선택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대승경전도 그런 측면에서 보면 불설이라고 할 수 있다는 논지를 전개하고 있다. 특히 유부의 전통을 계승한 비바사사(毘婆娑師)의 논증을 끌어들여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논증하고 있다. 그러나 대승경전은 후대의 대승불교도들이 붓다의 가르침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여 불설로 가탁한 것이다.

 

대승경전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의 친설이 아님은 명명백백하다. 다만 대승경전에 서술된 내용이 초기 붓다의 가르침과 위배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붓다의 친설은 아니라 할지라도 ‘깨달은 자’ 즉 제불(諸佛)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붓다의 가르침’, 즉 불교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아함이나 니까야도 변화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불설이 아니라는 주장은 지나친 비약이다.

 

마성 스님(팔리문헌연구소장)

 

 

1009호 [2009년 08월 10일 11:53]

 

 

 

 

 

 

 

 

 

 

 

제3- 권오민 교수, “아함도 부파가 승인한 불설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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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 스님 논평 조목조목 반박

니카야는 상좌부-잡·중아함은 유부 경전

마성 스님 비평은 학문보다 상식 기댄 것

기사등록일 [2009년 08월 17일 11:50 월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 한국불교사연구소 발행)에서 대승경전을 불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불교사상사에 대한 무지와 폐쇄적인 신념에 기초한 것일 뿐 교학적·역사적 ‘진실’이 아니며, 아함경과 니카야 또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본지 1008호 1면) 이런 가운데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이란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불설로 가탁한 것으로 붓다의 친설이 담긴 아함과 대승경전은 전혀 다르다고 비판했다.(본지 1009호 19면) 이에 권오민 교수가 다시 마성 스님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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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이 성립되기 전에는 부처님의 모습 대신 법륜, 보리수,불족석(佛足石) 등으로 부처님을 표현했다. 사진은 인도 보드가야에 남아 있는 불족석.

마성 스님이 논평에서 ‘충격적’이라고 하였듯이 필자 역시 그러하였으며, 문제의 논문(「佛說과 非佛說」,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도 ‘놀라운 일’임을 거듭 밝혔다. 그러니 초기불교 전공자나 테라와다 불교에 신념을 두고 있는 이라면 말해 무엇 할 것인가. 마음에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하다는 말씀부터 올린다.

 

한정된 지면 때문이기도 하였겠지만, 마성 스님의 논평은 필자가 제시한 논거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어야 함에도 다만 개론서에 나옴직한 상식과 정의(情意)에 기댄 것이어서 반론할 성질의 것이 되지 못한다고 여겼지만, 논쟁을 ‘종파적 대결’로 몰아가는 점만은 묵과할 수 없어 반론의 글을 쓰게 되었다.

 

필자는 처음부터 그것을 경계하였으며, 그래서 논문 서두에서 대·소승 제 학파의 학설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만 오늘의 우리보다는 경전성립시기에 훨씬 가까웠을 시대(대략 2~6세기)의 문헌상의 증거로만 이야기하겠다고 하였다.

 

필자는 제 부파 사이의 비불설의 사례를 20가지 이상 들었다. “어떤 성문의 부파에서 전승한 경은 다만 성문이 설한 것일 뿐이다”는 『성실론』에서의 문제제기는 물론이고, 독자부(정량부를 포함하여)에서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는 무아에 관한 제경(예컨대 잡아함 제303경 등)을 불설로 인정하지 않았다거나, 경량부가 눈 등의 5근과 색 등의 5경이 4대와 4대소조라고 설한 경(잡아함 제322경)을 유부에서 독자적으로 편찬한 것이라고 비판한 것은 필자에게도 충격이었다. 더욱이 경량부는 경(經)을 지식의 표준(量)으로 삼는다고 표방한 부파였다.

 

그렇다고 필자는 승의의 자아(pudgala)를 인정하는 독자부와 정량부를 부법장(付法藏) 외도로 비판할 생각은 없다. 또한 그것이 역사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정법이 아니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불교는 역사주의가 아니다. 유가행파(법상종)는 비록 역사상에서 사라졌지만 여래장이나 화엄을 통해 존속되고 있으며, 유부의 제법분별 또한 이후 불교교학의 토대가 되었다. ‘구사8년 유식3년’이란 말이 생겨난 까닭도 이 때문이다.

 

앞서 필자는 ‘불설/비불설’의 논쟁이 종파적 대결로 번지는 것을 경계한다고 하였는데, 마성 스님은 필자의 논문을 그렇게 읽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왜곡하고 있다. 필자는 “유부의 학설이 정설인양 대변”한 적이 없으며, “비바사사(毘婆沙師)의 논증을 끌어들여 대승경전이 불설임을 논증”한 적도 없다.

 

다만 어느 시기 『대반열반경』의 ‘4대교법’에 근거하여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이에 따를 경우 說者는 중요하지 않다)는 등의 4의설(依說)과 “경과 율에 나타나고 법성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 불설이다”는 불설의 정의가 확립되었고(문헌상으로는 유부에 의해), 그것이 무착, 세친, 청변 등의 대승논사를 비롯한 하리발마, 중현 등의 소승논사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수용되었으며, 경전 또한 이에 기초하여 제작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을 뿐이다.

 

또한 유부가 당시 분별설부로 알려져 있던 상좌부를 공격하던 내용을 ‘자세히’는 고사하고 한 번도 소개한 적이 없다. 아마 마성 스님은 상좌 슈리라타를 상좌부로 오인한 모양인데, 여기서 상좌는 『구사론』 상에서 ‘경량부’로 일컬어진 논사로서 세친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자이다. 그리고 공격(비판)하였던 것은 상좌 슈리라타였지 유부가 아니었다.

주지하듯이 ‘아함’이나 ‘니카야’는 특정의 경명(經名)이 아니라 부파에 의해 결집 전승된 일군의 경전을 총칭하는 말로, 아함이 아함경으로 불려지게 된 것은 중국에 이르러서였다. 청변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전통’과 ‘진실’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렇다. 스님의 말대로 “상좌부 전통에서는 정법을 유지 전승하기 위해 결집했다.”

 

그렇다면 이 때 ‘정법’은 불교보편의 정법인가, 상좌부 전통에서의 정법인가. 스님은 계속하여 “이를 통해 비불교적 요소를 하나하나 배제시켜 나갔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상좌부 이외 부파, “유부를 비롯한 다른 부파에서 ‘법성(진실)’이나 ‘정리(正理)’라는 이름 하에 결집한 불설”은 비법(非法)이라는 말인가. 오늘날에 있어 이 같은 독선적 발언이 어떻게 가능한가. 묻고 싶다. 대저 아함과 니카야는 초기경전인가, 유부 혹은 상좌부 경전인가.

 

결코 말꼬리를 잡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마성 스님은 “아함이나 니카야도 개변 증광되었고 전승과정에서 불설이 아닌 내용도 많이 포함되었지만,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붓다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비롯되었다’는 말과 ‘친설’은 분명 그 의미가 다르다. 필자는 논문에서 “대승경전이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 비불설이라면, 아함이나 니카야 또한 친설이라 말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불설이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제 논사들은 ‘불설(buddha vacana)’과 부파에 의해 결집된 ‘성교(聖敎, buddha ´Sa-sana 즉 아함과 니카야)’를 엄격히 구분하였다. 성교는 말하자면 불설의 정의에 따라 각 부파에 의해 불법(佛法)으로 승인된 불설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아함이나 니카야는 불타친설이라기 보다는 유부나 상좌부에 의해 불법으로서 취사선택되고 편찬 결집된 불설로서, 제 부파간의 불설/비불설의 논쟁 또한 이에 따른 것이었다.

 

한편 마성 스님은 이러한 부파 간의 비불설 논쟁과 부파교단에서 비판한 대승 비불설론(실제 소승 논서에서는 발견되고 있지 않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에 양자의 단순비교는 큰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필자로서는 잘 납득되지 않는다. 추측컨대 스님은 개론서에서의 진술처럼 대승과 소승을 칼로 무 자르듯이 시기적으로나 사상적으로, 혹은 교단 상으로 완전히 별개의 그룹으로 간주한 것 같다.

 

유부와 상좌부는 원래 동일계통이었기에 교학상의 크나큰 차이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부 계통이나 정량부는 이들과는 교학체계 자체가 다르며, 유부 계통으로 알려진 경량부조차 유부와는 전혀 다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당시 불교를 전공한다는 필자도 그들의 논서(예컨대 삼미저부론, 성실론)를 읽어내기 어렵다. 유부교설(우리가 익히 아는 ‘불교기초교리’는 대개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며,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들 부파의 학설은 비법인가. 그러나 현장의 『대당서역기』에 의하면, 당시 대중부와 정량부는 상좌부 유부와 더불어 가장 볼륨이 컸던 불교교단이었으며, 정량부가 특히 그러하였다. 그들 역시 삼장을 갖고 있었지만(현장은 그것을 갖고 오기도 하였다), 오늘날 전하지 않는다. 순전히 짐작이지만, 그들의 경전이 존재하였다면 대승경전에 대해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함에서 설한 18계의 ‘법계’와 여래장불교 계통의 ‘법계’는 그 자체만으로는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지만, 경량부(상좌 슈리라타)를 통하면 ‘전혀 다른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중부에 의하는 한, 여래는 항상 선정에 머물기 때문에 일생토록 한 말씀도 한 적이 없지만 중생들이 설하였다고 여겨 환희용약하며, 보살은 중생의 요익을 위해 스스로 악취에 태어난다. 이러한 불타관과 보살관은 유부나 상좌부의 그것과는 완전히 차원을 달리한다. 해서 다만 현존의 아함경과 니카야에 근거하여 대승경전을 딴판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표를 던져 결정할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나아가 세친도, 청변도, 중현도 제1결집은 모두 산실되었다고 전하며, 그 이후로도 무량의 경전이 은몰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이는 필경 ‘정법의 소멸’과 관계 있다)

 제1결집 또한 순탄한 것만도 아니었다. 교범파제는 율장을 결집할만한 이로 추천되었지만 이를 거절하였고(『대지도론』), 흔히 설법제일로 알려진 부루나는 결집의 추인을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들은 것만을 전승하였으며(남전 율장 소품), 가섭 주도의 결집과는 별도로 대결집이 단행되기도 하였다.(『대당서역기』)

 

사실 제1결집에서 송출된 법 즉 경의 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존의 아함과 니카야로 발전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문자로 작성되기(기원전 1세기 무렵?)까지 300여 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자 아무도 없다. 그 때는 이미 대승경전도 편찬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온갖 한계를 간과한 채 다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불교를 주어진 대로 해석하는 것은 불교학자의 소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정의(情意)와 신념에 의탁하여 당시 논사들의 증언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1010호 [2009년 08월 17일 11:50]

 

 

 

 

 

 

 

 

 

 

 

제4- “니까야 부정은 곧 불교사 몰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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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 스님, 권오민 교수에 재반론

니까야는 상좌부서 2500년 간 계승한 경전

계율과 교단사 외면해 스스로 모순에 봉착

기사등록일 [2009년 08월 21일 23:13 금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본지 1008호 1면) 이런 가운데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이란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불설로 가탁한 것으로 붓다의 친설이 담긴 아함과 대승경전은 전혀 다르다고 비판했다.(본지 1009호 19면) 이에 권오민 교수는 다시 아함과 니까야 또한 설일체유부 등 부파에 의해 승인할 불설일 뿐이라고 반박했다.(본지 1010호 10면) 이에 마성 스님이 다시 권 교수의 주장을 비판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필자의 반론문에 대한 권오민 교수님의 성실한 답변에 감사드리며, 평소 학문하는 자세나 열정과 성실함을 잘 알고 있기에 존경의 뜻을 표한다. 그리고 심혈을 기울려 작성한 논문을 필자가 오독한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스럽게 생각한다. 문제의 논문이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급히 읽고 반론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임을 인정한다.

 

이 논문의 가치는 불설/비불설 혹은 요의/불요의(유부와 대승)의 논쟁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막연히 각 부파간은 물론 대·소승 간에 불설에 관한 논쟁이 있었다고만 알고 있었는데, 이 논문에서 유부의 불설론은 물론 하리발마나 슈리라타 및 무착·세친·청변의 불설론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밝힌 점은 높이 평가한다. 만일 여기서 논문을 끝내고 사족을 덧붙이지 않았더라면 필자가 반론을 제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논자는 반론문에서도 이 논문이 ‘종파적 논쟁’이 아니라고 극구 부인한다. 그러나 논자의 주장 자체가 종파적 논쟁이다. 오늘날 학자들의 논문도 넓은 의미에서 보면 불설/비불설을 간택하는 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온갖 학문적 방법론을 동원해 붓다의 바른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규명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다만 불설/비불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이 논문에서 불설/비불설이란 용어를 사용한 이상, 이 문제는 결국 종파적 신념을 초월할 수 없다.

 

논자는 반론문에서 역사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붓다의 가르침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지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승단에서는 법맥이 어떻게 전승되었는가에 따라 정통성을 인정받기 때문에 생명줄과 같다. 현재 상좌불교에서 단절된 비구니 승가를 복구하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교단사를 무시한 연구는 철학적으로나 사상사적으로는 중요할지 모르나, 승단의 전승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승단이 단절되면 종교로서의 불교는 소멸되고 말기 때문이다.

 

논자는 “당시 논사들의 증언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들이 불설이라고 주장했던 논리적 근거는 타당했는가. 전통을 계승한 상좌부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이 불설의 근거로 삼았던 잣대 자체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두 가지 잣대만 제시하고 있지만, 후술할 세 번째 잣대는 전통성에 대한 기준이 된다.

 

첫째, 불설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는 원래의 잣대는 ‘사대교법(Mahāpadesa)’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사의(四依)를 추가함으로써 기준이 되는 잣대를 변경시켰다. 그래야 불설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팔리본 『대반열반경』에서는 ‘경에 포함되고 율을 드러내면 불설이다’였지만, 유부 『대반열반경』에서는 ‘경에 포함되고 율을 드러내며 법성에 위배되지 않으면 불설이다’로 잣대를 약간 수정한다. 나중에는 다시 이를 근거로 사의를 추가하게 되었다.

 

둘째, 상좌부를 제외한 제 부파와 대승에서는 ‘불설(佛說)과 성교(聖敎)’를 엄격히 구분했다. 이것도 앞의 경우와 동일하다. 그래야 이를 근거로 법성과 정리에 합치하기 때문에 불설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좌부에서는 처음부터 ‘불설과 불교’를 구분하지 않았다. 팔리어 ‘붓다와짜나(Buddha-vacana)’는 ‘붓다의 말씀’(佛說, the word of the Buddha)이고, ‘붓다사사나(Buddha-sāsana)’는 ‘붓다의 가르침’(佛敎, the teaching of the Buddha)이다. 즉 불설이 곧 불교라는 뜻이다.

 

그런데 후대에 Buddha-sāsana(佛敎)를 성교(聖敎, Skt. buddha-śāsana)로 변경시키고, 여기에 아함이나 니까야를 포함시킨다. 팔리어 대문자 Buddha는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불을 뜻하지만, 소문자 buddha는 ‘깨달은 자’를 의미한다. 그러나 상좌부 전통에 의하면, “붓다 재세시 그의 가르침은 Buddha-vacana, Buddha-sāsana, Satthu-sāsana(스승의 가르침), Sāsana, Dhamma와 같이 여러 가지로 알려져 있었다.” (Walpola Rahula, 『One Vehicle for Peace』 참조) 이와 같이 ‘붓다와짜나’와 ‘붓다사사나’는 원래 같은 의미로 쓰였다. 상좌불교에서는 지금도 불교를 ‘붓다사사나’로 부르고 있다. ‘불설과 성교’를 구분한 자체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재의 상좌불교에서는 팔리문헌을 정전(正典)과 비정전(非正典)으로 구분하고 있다. 정전(canon)은 붓다로부터 전승된 정법이라는 뜻이고, 비정전은 불제자들이 불설을 재해석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은 결집과 마찬가지로 정법을 고스란히 전승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교단사적으로는 파승(破僧, sanghabheda)의 정의가 잣대가 된다. 파승은 승단의 분열을 말한다. 붓다는 파승을 오역죄에 포함시켰다. 승단의 분열은 정법의 소멸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원래의 상좌부를 제외한 다른 부파에서는 교리적 논쟁보다도 오히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분열의 명분 혹은 파승의 정당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첫째와 둘째의 잣대는 불설/비불설 혹은 정법/비법에 관한 논쟁이었다면, 셋째의 파승은 전통/비전통의 논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단사적으로는 세 번째 잣대가 가장 중요하다.

 

‘테라와다(Theravāda, 上座部)’는 글자 그대로 ‘장로들의 정교(正敎)’라는 뜻이다. 즉 불멸 후 제1결집을 주도했던 500명의 장로들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스스로 ‘붓다의 적자’임을 자부하고, 2,500년 동안 단절 없이 전통을 계승해왔다. 그들은 파승으로 떨어져 나간 다른 부파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결코 상좌부가 부파들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상좌부 장로들은 그러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전통을 고수했다. 역사적으로 상좌부의 계맥이 단절되었을 때, 다른 나라의 장로를 초빙하여 계단을 복구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소승 논사들은 상좌부를 여러 부파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다. 자기 부파나 대승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전통을 계승한 쪽에서는 이에 대해 전혀 반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반론 자체가 없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전통을 고수한 원래의 상좌부만 살아남고, 다른 부파들은 모두 소멸되었다. 따라서 니까야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상좌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논자는 ‘아가마(Āgama, 阿含)’와 ‘니까야(Nikāya, 部)’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 같다. 엄격히 말해서 ‘아가마’와 ‘니까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니까야는 상좌부에서 전승한 것이고, 아가마는 유부를 비롯한 다른 부파에서 전승한 것이다. 부파 간에 불설/비불설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아가마와 니까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자는 아가마와 니까야를 같은 분류에 놓고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그 자체가 상좌부의 전통성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논자는 필자가 대승을 모른다고 혹평하고 있지만, 대승의 근원은 붓다에까지 소급된다. 붓다의 ‘전도선언’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라는 대목은 대승의 이념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교단사적으로 말하는 대승교단(보살가나)는 부파교단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불교였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부파교단 내에서의 불설/비불설의 논쟁과 부파교단과 보살가나와의 논쟁은 또 다른 차원이었다는 것이다. 비유하면 현재의 조계종은 상좌부에, 군소종단은 부파교단, 전통과는 계통이 다른 원불교는 대승교단(보살가나)에 해당될 것이다.

 

끝으로 논자가 반론문에서 지적했듯이 초기경전의 전승과정에 대해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그리고 대승불교와 대승경전의 성립 과정에 대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논자는 그러한 결론을 단정적으로 내릴 수 있는가. 정말 납득하기 어렵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나 현존하는 니까야가 불설이 아니라고 단언적으로 선언한 학자는 아직 보지 못했다. 논자 스스로 논리의 함정에 빠진 것 같다.

 

팔리문헌연구소장

 

 

1011호 [2009년 08월 21일 23:13]

 

 

 

 

 

 

 

 

 

 

 

제5- 권오민 교수, “니카야만 불설 주장은 맹목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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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민 교수 마성 스님에 다시 반론

사람에 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는 게 불교

니카야가 곧 부파…상좌부 사대주의 버려야

기사등록일 [2009년 08월 27일 11:13 목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는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카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런 가운데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은 대승경전이란 붓다의 가르침을 재해석해 불설로 가탁한 것으로 붓다의 친설이 담긴 아함과 대승경전은 전혀 다르다고 비판했다.

 

이에 권오민 교수는 다시 아함과 니카야 또한 설일체유부 등 부파에 의해 승인할 불설일 뿐이라고 반박했고, 이에 마성 스님이 다시 권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상좌부에 대한 이해부족서 비롯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가운데 권오민 교수가 또다시 마성 스님의 반론을 비판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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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명색이 학자라는 이가 이런 식의 논쟁에 명함을 내밀어야 하는지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역사와 전통이라는 권위를 빌려 다만 그럴 듯한 말로써 독자를 현혹하고 있다는 생각에 마성 스님의 반론에 다시 재반론한다.

 

먼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필자는 문제의 논문(「불설과 비불설」, 『문학/역사/철학』 제17호)을 아함과 니카야가 비불설임을 밝히기 위해 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불설’이 아니라고 단정한 일도 없다. 필자가 그 논문을 쓰게 된 동기는 불교사에서 사라진 논사인 경량부의 상좌 슈리라타(Śrīlāta)의 학설을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중현의 『순정리론』을 통해 재구하는 중에 그가 설일체유부에서 제시한 아함경설에 대해 빈번히 비불설론을 제기하였음을 알게 되었고, 이에 대한 유부 측의 대응을 탐색하던 중에 다양한 문헌적 변천과정을 거쳐 불설의 정의와 4의설(依說)이 생산되고, 이에 근거하여 불설의 취사(取捨) 개폐(開閉)와 더불어 새로운 경전이 찬술되었으며, 나아가 대․소승의 여러 논사들의 불설론의 초석이 되었음을 알게 된데서 비롯되었다.

 

즉 필자는 평소 “역사적으로는 비불설이지만 사상적으로 진정한 불설”이라는 우리학계의 대승 불설론의 논거가 너무나 허약하다고 생각하였기에(이를 역으로 말하면 “소승경은 역사적으로는 불설이지만 사상적으로 비불설”이라는 이상한 판단으로 변질될뿐더러 소승에서는 대승의 사상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족(蛇足)’에서 단 한번 “대승경이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 또한 친설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비불설이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필자는 계속하여 말하였다. “종파적 입장에 근거한 불설/비불설 논쟁은 맹목의 논쟁일 뿐이다. 그러한 논쟁은 구호나 선전에 근거한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것일뿐더러 폐쇄적 신념에 기초한 것이다. 불설/비불설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불교의 개방성에 기인한다. 불교는 결코 교조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누구에게도 열려있었으며, 진실(법성)은 누구에 의해서도 토론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중략)--그들은 결코 ‘역사’에 근거하여 불설/비불설을 논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불설/비불설의 기준은 정리(正理)였고 법성이었다. 아함(āgama, ‘전승되어 온 것’이라는 뜻)은 전통이었지만, 역사적 사실로서의 ‘불설(즉 친설)’은 아니었다. 이는 당시 초기 부파불교에서도 인정한 바였다.”

 

예컨대 중현은 “상좌 슈리라타는 잡아함 제322경을 [불설로]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결집에 포함된 것(혹은 聖敎=아함)이라는 사실마저 부정해서는 안 된다”거나 “전승한 교법에 따라 서로의 경을 부정하게 되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하리발마는 “어떤 성문의 부파에서 [전승한] 경은 다만 성문이 설하였을 뿐이다”는 물음에 대해 “무슨 소리냐?”고 펄쩍 뛰지도 않았으며, “그렇다. 저들의 경은 모두 가짜이다”고 부화뇌동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러한 법의 근본은 다 불타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그들은 모두 불타의 말씀을 전하였을 뿐이다”고 말하고서 비나야 즉 율장을 논거로 제시하였으며, 『대지도론』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 비록 어투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현존 팔리율을 비롯한 거의 모든 율장에서 불설에는 불타가 설한 것뿐만 아니라 성문․선인․천․변화인이 설한 것도 있음을 전하고 있다.

 

헌데 마성 스님은 상좌부의 니카야는 아함을 포함한 저들의 경전과는 위상이 다르다고 말한다. 아니 상좌부는 ‘부파’가 아니라고 말한다. 상좌부는 교단사적으로 정통이기 때문에 성교(Buddha sasana=니카야)가 바로 불설(Buddha vacana)이고, 정법이라고 말한다. 아함과 니카야를 동류로 취급하는 것 자체가 상좌부의 전통성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테라와다(上座部)는 글자 그대로 ‘장로들의 정교(正敎)’로서 불멸 후 제1결집을 주도했던 500명의 장로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고서 “이들은 스스로 ‘붓다의 적자’임을 자부하고, 2,500년 동안 단절 없이 전통을 계승해왔다”고 단정짓고 있다.

 

상좌불교의 전도용 팜플렛에나 나옴직한 이 같은 말이 어떤 인도불교사에 기술되어 있는지 정말 궁금하다. 이러한 발언은, “여호와의 말씀만이 진리이고, 다른 종교는 모두 사교이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에 대한 이해부족’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면 참으로 무례한 발언인가? 비록 댓글이기는 하지만 ‘대승경전을 모아 불지를 것’이라는 극단적이고도 독선적인 발언은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도대체 니카야(nikaya)가 무슨 뜻인가? ‘부파’라는 뜻 아닌가? 부파에서 전승한 경전을 의미하지 않는가? 세친은 『구사론』에서 독자부가 전승한 경전을, 『석궤론』에서 18부파나 부파에 의해 결집된 경전을 ‘니카야’라고 부르고 있다. 니카야는 각각의 부파에 의해 불법(buddha sasana, 교법)으로 승인된 불설(buddha vacana, 말씀)의 모음집으로(팔리어에 대문자 소문자가 있다는 말도 금시초문이다) 각 부파의 그것은 다를 수밖에 없으며, 어떤 부파든 자신들이 채택한 불설을 정법이라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혹여 독자들께서는 ‘불설(혹은 불교)’이나 ‘불법’은 다 그게 그것이지 무슨 말장난하고 있느냐고 힐난할지도 모르겠다. 불법은 부파에 의해 규정된 교리나 신조(sasana)이기 때문에 다만 불타의 말씀을 의미하는 ‘불설’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 두 말의 차이를 간과한다면 앞의 중현의 말도, 『대지도론』의 “그대들이 들은 것은 불법도 아니고 불교도 아니다”고 비난한 비구 복색의 마구니의 말도 이해할 수 없다. 여기서 ‘불법’은 마구니가 채택한 교리이고, ‘불교’는 통상의 불타의 말씀이다.

 

그렇다면 각각의 부파에서 전승한 ‘불설’은 어떤 것인가? 『대반열반경』에서는 이렇게 설하고 있다. “어떤 비구가 어떤 법문(경․율․교법)을 ① 불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② 대다수 박식한 장로들로 구성된 승가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③ 경과 율과 논모(論母, 주석)를 지닌 다수의 비구로부터, ④ 혹은 그러한 한 명의 비구로부터 직접들은 것이라고 말할 경우, 그의 말을 잘 듣고 단어와 문장을 잘 파악한 다음 경에 포함되어 있는지 율에 나타나는지를 검토하여,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불설로 판단하여 버려야 하고, 그러하다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각묵 스님 역, 『디가니까야』2에서 발췌)

 

이른바 4대교법(大敎法,mahā apadesa)이라 일컬어진 이 법문은 이후 개개인에 의해 수지 전승된 스승의 교법을 불설로 확정짓는 기초가 되지만, 이에 따르는 한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은 것도 경과 율에 부합하면 불설로 취해야 하고, 불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 것조차 비불설로 배척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설자(說者)가 아니라 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범본 『대반열반경』이나 『유부비나야잡사』에는 이 법문에 앞서 “경에 의지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라”는 말이 설해지며, 마침내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밖으로 드러난 말에 의지하지 말고 거기에 담긴 뜻에 의지하라, 언어를 매개로 한 상대적 인식(識)에 의지하지 말고 통찰의 직관지(智)에 의지하라, 그 뜻이 애매하거나 부실한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고 요의경에 의지하라”는 4의(依)가 성립한다.

 

헌대 마성 스님은 상좌부에서는 4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비담마를 승법(勝法,dhammavisesa)으로 이해하는 상좌부에서. 그렇다면 4대교법은 어찌 인정하는가? 불설의 취사선택과 편찬은 부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유부비나야잡사』에는 “[각각이 전승한] 교법에는 진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며, 『대비바사론』에는 “불멸 후 어떤 이들은 수트라(經) 중에 거짓된 수트라를 안치하였다”고도 하였다.

 

파승(破僧)에 관한 언급 또한 반론은커녕 자신의 주장을 부정하는 논거로 사용될 수 있다. 최근의 한 연구(佐々木閑, 이자랑 역, 『인도불교의 변천』)에 따르면, 파승의 정의가 어떤 시기 어떤 사건을 계기로 법륜(정법)의 파괴(破法輪僧)에서 갈마의 파괴(破羯磨僧, 동일교구 안에서 2部의 승가가 포살과 갈마를 별도로 시행하는 것)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교리를 달리하는 각각의 부파가 갈마를 함께 시행함으로써 하나의 불교승단이라는 공통의 인식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바야흐로 부파불교가 성립할 수 있었고, 대승불교 또한 이 같은 계기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로지 자신들만이 정통이라 주장하는 상좌부에서의 파승의 정의는 무엇인가?(스님은 ‘승가의 분열’로 정의한다. 咄!) 과연 상좌부에서는 스님의 말처럼 파승으로 떨어져나간 다른 부파를 인정하지 않았던가? 정말 그러하였다면 상좌부는 대단히 고립적이고 독선적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앞의 연구에 의하면 그 반대이다.

 

헌데 “비유하면 조계종은 상좌부에, 군소종단은 부파교단에, 전통과는 계통이 다른 원불교는 대승교단(보살가나)에 해당된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무슨 근거로 그같이 말한 것인지 참으로 신통하기도 하고 의아스럽기도 하다. 부파(성문)교단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보살가나’라고 하는 것도 히라카와(平川彰)가 제시한 개념으로 생각되는데, 이 또한 앞의 사사키 시즈카를 비롯한 수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다.

 

아마도 상좌부가 전승한 니카야만이 불설이고 정법이며, 정통불교라는 맹목의 폐쇄적 신념에 기초하는 한 당시 제 논사들의 불설론도, 필자의 ‘사족’ 한 마디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마성 스님의 재반론의 핵심은 “필자의 논의가 상좌부의 정통성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인데, 필자는 전도사도 종파주의자도 아니기에 어떤 ‘논리의 함정’에 어떻게 빠졌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스님이야말로 새로운 사대주의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구호’나 ‘선전’은 현실의 불교에서 전도를 위해 응당 필요한 것이겠지만, 그것이 불교학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근간 『불교학과 불교』에서 누차 강조하였지만, 이와 더불어 불교학도의 글 쓰기 문제점이나 인도불교사에 관한 몇 가지 근원적이고도 강고한 선입견, 사료를 취급하고 획득하는 방법 등 못다 한 이야기는 다른 지면을 통해 밝힐 것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1012호 [2009년 08월 27일 11:13]

 

 

 

 

 

 

 

 

 

 

 

 

제6-전재성 회장 “니까야는 창작 아닌 ‘리얼리티’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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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성 회장 권오민 교수 비판고고학․문헌학적 입증 사실까지 부정해선 안 돼法性만을 고집할 경우 ‘명심보감’도 불설이 될판

기사등록일 [2009년 09월 04일 11:16 금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고, 이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이 이를 비판하고 권 교수가 이를 다시 반박하는 논쟁이 오고갔다.(본지 1008호~1012호) 이런 가운데 이번에는 지난 80년대 말부터 니까야를 우리말로 번역해오고 있는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이 마성 스님의 입장을 지지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인도 굽타시대 조성된 초전법륜상(5세기).

 

최근에 법보신문에서 권오민교수와 마성스님 사이에 대승불교 경전과 초기경전인 아함과 니까야 사이의 불설비불설 논쟁이 뜨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래 대승비불설 논쟁은 테라바다 불교권이나 니까야 연구자들에 의해서 제기된 것이 아니라 대승불교권 자체 내에서 제기된 것이다. 도미나가 나카모도(富永仲基, 1715~1746)가 북전의 한역 팔만대장경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출정후어(出定後語)」라는 책을 출간, 일체경은 불설이라 일컬어지지만 대승은 불설이 아니고 대승의 경전은 모두 후인(後人)의 가탁이라고 했다. 그의 대승비불설론은 일본불교계에 심대한 충격을 던져주었다. 그는 한역경전 가운데 오히려 소승이라고 여겨졌던 아함 경전류야말로 유일한 불설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일본불교계는 대승불교권의 중현이나 세친 등의 아비달마논서를 연구하여 대승불설론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도미나가 나카모토의 대승비불설이라는 것이 너무도 충격적인 주장이고 극단적인 것이었다면, 그에 대한 반론으로서 권오민 교수가 ‘대승경이 비불설이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이나 니까야도 비불설이다.’라는 주장도 너무나 극단적인 주장임에는 틀림없다. 이 논리는 마치 까마귀의 살이 검은 색이 아니므로 까마귀의 뼈도 검은 색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실제로 너무 거칠고 무의미한 말이다.

여기에 마성스님이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여 대승불교의 경전을 두고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가짜가 진짜 혹은 원조라고 주장한다.’라고 원색적으로 표현한 것은 너무 극단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미타경과 같은 대승경전에서도 극락조가 부르는 노래는 “무상‧고‧무아”-아함‧니까야의 핵심되는 부처님의 가르침-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심지어 천수경의 다라니인 신묘장구다라니의 핵심 사상은 탐진치의 소멸-아함‧니까야의 핵심되는 열반에 대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대승불교를 비불설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권 교수의 말대로 한편 대승불설론의 모든 아비달마적 이론은 아함의 한 경전인 『대반열반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가르침에 의지하라, 말에 의지하지 말고 뜻에 의지하라. 생각에 의지하지 말고 지혜에 의지하라. 명료하지 않은 경(不了義經)에 의지하지 말고 명료한 경(了義經)에 의지하라.’라는 네 가지 의지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승불교 논사들은 아함에 의거하여 대승불설론을 합리화했다는 역사적 근거가 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아함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하나의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바로 그 역사성을 무시한다면, 적어도 대승아비달마 논사들이 불멸후 천년 경에 단지 주어진 경과 율에 나타나고 법성(法性)이나 정리(定離)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 대승도 불설임을 입증했다는 권 교수의 주장에 아무도 반론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성스님은 대승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부처님의 친설이 아님은 명백하다고 주장한 것은 지나친 표현이 있지만, 형이상학적인 논쟁으로 해결되지 않는 논쟁의 핵심에 역사성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권 교수의 주장에 대한 탁월한 반론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 논쟁은 각 부파나 아비달마 논사의 입장이나 견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경전성립의 역사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권오민 교수는 ‘사실 제1결집에서 송출된 법 즉, 경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현존의 아함과 니까야로 발전했는지 기원전 1세기까지 300여 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때에 이미 대승경전이 편찬되기 시작한다.’라고 주장했다. 과연 그럴까? 권오민 교수는 위의 주장에서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 사이에 대승경전의 편찬이 아함‧니까야 보다는 신층인 것임을 암시하면서도 애써 부정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아함‧니까야가 대승경전 보다도 고층의 경전임을 암시하는 역사적인 결정적 증거가 있다.  아함‧니까야와 대승경전의 불설비불설논쟁은 관점에 따라 상대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좀 다른 관점 역사적인 고층‧신층의 문헌문제로 대체하여 접근 할 수 있다. 

인도에서 아직까지 해독 가능한 가장 오래된 문자의 기록은 아쇼카 왕의 비문이다. 인도에서 오래된 고층의 문헌이라면 당연히 아쇼카 왕의 비문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되게 마련이다. 아쇼카 왕(대략 B.C. 268~232년)은 그의 캘컷타 바이라트(Calcutta-Bairāṭ) 비문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모두 선설하신 것으로 그 선법이 오래 지속하도록 하기 위하여 빠알리 니까야의 여러 경들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비문을 완역하면 아래와 같다.

 

마가다의 왕 쁘리야닷씨는 승단의 수행승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그들에게 건강과 매사의 안녕을 기원하며,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합니다. 존자들이여, 얼마나 짐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참모임에 존경과 신뢰를 펼쳐나가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어떠한 가르침이던지 그것은 훌륭하게 설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존자들이여, 진정한 가르침이 어떻게든 오랜 기간 존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길에 관하여 나에게 떠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존자들이여, 짐은 수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이 다음과 같은 가르침의 경들을 항상 배우고 사유하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① ‘제어에 대한 선양(Vinayasamukkasse)’, ② ‘고귀한 삶(Aliyavasāni)’, ③ ‘미래에 대한 두려움(Anāgatabhayāni)’, ④ ‘성자의 노래(Munigāthā)’, ⑤ ‘성자의 삶에 대한 법문(Moneyasūtte)’, ⑥ ‘우빠띠싸의 질문(Upatissapasine)’, ⑦ ‘라훌라에 대한 교훈(Lāghulovāde)’.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재가의 남녀 신도들도 이 성스러운 경들을 듣고 사유하여야 합니다. 존자들이여, 이 기록은 이와 같은 목적 즉 백성들이 짐의 의도를 알도록 하게 하기 위해 쓰여진 것입니다.

 

위와 같이 아쇼카 왕의 비문에는 일곱 경이 인용되어있다. 리스 데이비드에 의하면, 그 가운데 ④ ‘성자의 노래’는 이 숫타니파타의 ‘성자의 경(Stn. 207~221)’을 말하고, 꼬삼비나 빈터닛쯔에 의하면, 그 가운데 ⑤ ‘성자의 삶에 대한 법문’은 숫타니파타의 ‘날라까의 경’의 후반부(Stn. 699~723)를 말한다. 찰머에 의하면, 날라까 경은 실제로 ‘성자의 삶에 대한 경(Moneyyasutta)’이라고도 불리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꼬쌈비에 의하면, ⑥ ‘우빠띠샤에 대한 질문’은 숫타니파타의 ‘싸리뿟따의 경’을 말한다. 우빠띠샤는 싸리뿟따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⑦ ‘라훌라에 대한 교훈’은 자야비끄라마에 의하면, 숫타니파타의 ‘라훌라의 경’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도 있으나, 일반적인 학설로는 맛지마니까야의 ‘라훌라에 대한 교훈의 작은 경(MN. 147: Cūlarāhulaovādasutta)’을 의미할 가능성이 더 크다. 또한 ① ‘제어에 대한 선양’은 자야비끄라마에 의하면, 숫타니파타의 ‘올바른 유행의 경’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고, ‘서두름의 경’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그러나 제어라는 말의 어원인 비나야로 보면, 율장과 관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무라카미 신칸(村上眞完)에 의하면 초전법륜을 의미하는 것이다. 율장의 초전법륜에 나타나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대한 가르침이야말로 최상의 계율이기 때문이다. ② ‘고귀한 삶’에 대해서는 디가니까야(DN. III. 269~271)에 나오는 ‘열 가지 성스러운 삶(dasa ariyavāsā: 十賢聖居)’ 또는  앙굿따라니까야(AN. II. 27~28)에 나오는 ‘네 가지 성스러운 전통(四聖種: cattāro ariyavamsā)’과 일치한다. ③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앙굿따라니까야(AN. III. 100~110)의 ‘다섯 가지 미래에 대한 두려움(五種怖畏: pañcanaṃ anāgatabhayam)’을 말한다. 따라서 아쇼카왕의 캘컷타 바이라뜨 비문에 언급된 일곱 경들 가운데 적게는 세 경, 많게는 다섯 경이 숫타니파타에서 유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대승불교 경전에서 극찬해 마지않는 아쇼카 왕의 비문에 직접 언급된 유일한 불교의 가르침들은 모두 니까야에 현존하는 것들이다. 이것을 두고 권오민 교수가 불멸후 300년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른다고 할 수 있을까? 대승경전들이 당시에 존재했다면, 전세계에 불교를 홍포하려고 심혈을 기울였던 아쇼카왕의 비문에 어떻게든 경명이라도 언급이 되었을 것이다. 대승아비달마논사들은 경전만을 접하고 불설비불설 문제를 다루었을 뿐 이러한 역사적 고고학적 사실을 접하지 못했다. 세친이나 청변, 중현이 제일결집은 모두 산실되었고 그 후 무량의 경전이 은몰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은몰된 무량의 경전이 아쇼카 재위시까지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는 말인가?

 

지금 인도에서 고대사로서 정통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은 고고학적 발굴과 아쇼카왕의 비문과 니까야에 등장하는 제왕들의 통치와 사회문화적인 현상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니까야는 단순히 편집되거나 편찬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을 가정하지 않으면, 서술할 수 없는 있는 그대로의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구성을 통해 수집된 자료로 가득 차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은 고고학적 발굴로 대부분 입증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아함‧니까야가 후대에 편찬된 대승불교의 경전보다 오리지널하고 고층적인 것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권 교수는 아함이나 니까야도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고 설일체유부나 상좌부에서 취사선택 편찬결집된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니까야에 나타나는 구전을 수집하였다는 객관적인 증거를 무시하거나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무시하는 발언이다.

부파불교의 역사를 살펴보더라도 테라바다의 전승은 단지 상좌부라는 부파의 전승만은 아닌 것을 살펴 볼 수 있다. 불멸후에 불교는 수많은 부파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아쇼카 왕은 불법에 귀의한 뒤에 수행승의 교단을 만들었는데, 그 수행승들-수많은 부파불교의 교단에 속한-가운데는 잘못된 가르침을 받아들여 ‘어떤 자들은 불을 숭배하고, 어떤 자들은 고행에 열중했다. 어떤 자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고, 어떤 자들은 법과 율을 파괴하고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수행승들 가운데는 포살과 안거를 거부하는 자들도 있었다. 아쇼카 왕은 이러한 스캔들을 궁극적으로 끝내기위해 장로 목갈리뿟따 딧싸(Moggalliputta-Tissa)로 하여금 교단을 정화하는 차원에서 부파불교의 수행승들의 잘못된 교리 즉, 영원주의(sassatavāda)와 허무주의(ucchedavāda)를 세심하게 배제하여 제일결집이후에서 전승되어 내려오던 빠알리 니까야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인 사업을 단지 존재하지도 않거나 역사적으로 단명했던 다른 부파의 사적인 소의경전들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아함은 원래가 범어로 쓰여졌고, 설일체유부의 것이라고는 하나 빠알리 니까야와 3분의 2가 일치하고 나머지도 유사한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아 경전 가운데 니까야와 함께 고층에 속하는 것이다.

더구나 빠알리 니까야의 게송언어는 언어학적으로도 베다어에까지 소급하는 경전으로 가장 고층에 속하는 경전임이 입증된지 오래되었다.

 

아비달마 논사들의 주장대로 법성을 불설의 준거로 삼는다면, 극단적으로 『명심보감』에 법성이 있다면, 그것도 불설일 것이다. 오늘날 누가 과연 법성이 무엇인가를 제시할 수 있겠는가? 불교에는 대소승을 합하여 방대한 경전 군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신층과 고층을 역사적으로 고고학적으로 구분하여. 아함‧니까야와 다른 경전으로 구분한다면, 확실히 아함‧니까야가 고층에 속하며, 다른 논서나 대승경전은 그것을 토대로 성립되었거나 아함‧니까야의 본래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취지에서 생겨난 신층의 경전임이 자명하다. 단지 아함‧니까야는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이 담긴 고층의 경전이고, 대승경전은 역사적 부처님의 친설과 깨달은 제불의 가르침을 담은 신층의 경전이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

1013호 [2009년 09월 04일 11:16]

 

 

 

 

 

 

 

 

 

 

 

 

 

 

 

 

제7-역사성 운운은 사실성 무시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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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민 교수, 전재성 회장에 재반론‘디파밤사’ 1차 사료 부적합은 학계 정설“니까야 고층-대승경전 신층” 금시초문

기사등록일 [2009년 09월 11일 10:31 금요일]

 

 

 

 

론자가 바뀌었지만 반론의 내용은 역시 놀랍다. 우리나라 불교학에서 ‘신학문’이라고도 할 수 있을 초기불교 연구자조차 이토록 경직된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 유연성[調柔]은 불타의 7선(善) 중의 하나라는데. 필자의 명색의 전공은 아비달마불교이다. 아비달마는 아함과 니카야로 대변되는 초기경전의 일차적인 해석체계이다.

필자는 지난 삼십 년 간 이 불교를 포함하여 이른바 ‘소승’으로 일컬어진 초기불교에 대한 부정적 편견과 구호로 점철된 우리 불교학계의 경직된 사고에 대해 비판해왔다. 허나 거기에는 아무런 메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최근 그러한 내용의 몇 편의 글을 책으로 묶어내면서 ‘투정’이라 자조하였다. 헌대 거의 모든 인도불교사에 기술된 ‘니카야는 상좌부에서 편찬 전승한 경전’이라는 이 말 한마디를 소화해낼 수 없는 지경이라니.

거듭 말하건대, 필자는 문제의 논문(「불설과 비불설」) 사족에서 “대승경이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 비불설이라면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 또한 친설로 볼 수 없기 때문에 비불설이다”고 말하였음에도 반론자마다 그것을 “대승경이 비불설이라면 아함과 니카야도 비불설이다”고 오독하여 필자를 물귀신(Lokāyata의 vitandā sattha)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혹여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힐난할까 두렵다. 딴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불설=친설’이라는 맹목의 신념이 두려운 것이다.

‘친설이 아니기 때문에’라는 한정사는 불설의 기준이 ‘친설’이 될 수 없음을 지시하는 매우 중요한 말로서, 필자는 오로지 이를 밝히기 위해 4백 매에 달하는 논문에서 이와 관련된 논거만도 30여 종의 대․소승의 경론 상에서 200개 이상을 제시하였다.

전재성 회장은 필자가 어떠한 근거에서 “오늘 우리가 접하는 아함을 친설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는지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알고 있다면 ‘명심보감 운운’하며 희화할 것이 아니라 필자가 제시한 논거를 비판했어야 하였다. 필자는 이미 논문의 본문에서 “베단타의 말일지라도 법성에 부합하면 불설이다”는 중관학파의 대표논사인 청변의 말을 인용하였었다.

 

또한 “도미나가의 대승비불설 충격으로 인해 일본불교계는 대승불교권의 중현이나 세친 등의 아비달마논서를 연구하여 대승불설론을 정당화하였다”고 하여 필자의 논문을 그것의 아류로 여기고 있지만, 중현은 대승불교권도 아닐 뿐더러 일본의 어떤 이가 소승의 아비달마논서를 이용해 대승불설론을 펼쳤는지 밝혀주기 바란다.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문제의 논문에서 소승의 부파들 사이에서 왕성하게 일어난 불설/비불설론을 통해 ‘불설=친설’이라는 종래의 상식을 비판하고 대‧소승이 다같이 수용한 불설론의 자취를 탐구하였다. 헌대 전 회장은 엉뚱하게도 여기에 고층/신층의 문제를 개입시키고 있다. 불설/비불설(혹은 친설/비친설)과 이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아쇼카왕 비문에 기록된 7가지 경설을 통해 볼 때 아함․니카야는 고층임이 명백하다”고 하였는데, 이 때 ‘고층’은 친설을 의미하는가?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논리인가?(『쌍윳따』 하나만 해도 경의 수는 3천에 이른다) ‘까마귀 운운’의 로타야타와 무엇이 다른가? 게다가 초기경전이나 『숫타니파타』 안에서 고층과 신층을 나눈다는 말은 들어보았어도 “아함‧니카야는 고층, 대승경전은 신층”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금시초문이다.

 

한편 전 회장은 『아미타경』도 무상․고․무아를 설하기 때문에, 신묘장구대라니도 탐진치의 소멸이기 때문에 비불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아를 설하고, 번뇌소멸만 설하면 불설(=친설)인가? 무아설 등이 불설의 기준인가? 그러나 독자부나 정량부에서는 무아를 설하는 제경을 불설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교가 아니다”고 한다면 필자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지만, 현장이 인도에 체류할 무렵 유부에 버금가는 세력의 부파였다.

 

또한 4의설(依說) 자체가 아함의 정통성을 보증하는 증거라고 하였지만(4의설은 아함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상좌부에서는 4의설을 인정하는가?(마성 스님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혹은 “불타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한 것도 경과 율에 위배되면 비불설로 버려야 하고, 경과 율과 논모를 지닌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었다고 한 것도 이에 부합하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반열반경』의 4대교법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무엇이 중요한가? 다만 설한 사람인가, 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인가?

전 회장은 이에 따라(다시 말해 부파마다 불설/비불설의 입장을 달리할 수도 있기 때문에) 경전 성립의 역사성을 살펴보아야 하며, 그런 점에서 마성 스님의 반론은 탁월하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경전 성립의 역사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실성(史實性)’을 무시한 태도라 할 수 있다. 필자도 일찍이 『인도불교사』(1985, 경서원)라는 제목의 책을 번역 출판한 적이 있지만, 거기서는 대개 경전성립에 관해 불멸 직후 마하가섭 주도의 제1결집(밧지 비구들의 10사 비법(非法)에 따른 제2결집과 상좌부/대중부의 근본분열) 아쇼카왕 시대 목갈리풋타 팃사 주도의 제3결집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인가? 이는 모두 남방 상좌부 전승에 따른 것으로, 결집과 분파에 관한 한 제 전승은 어떠한 경우에도 일치하지 않는다.

제2결집의 경우, 우리는 대개 장로 야사가 밧지 비구들이 행한 금은수납 등의 열 가지 일을 비법으로 지적하자 도리어 거갈마(擧羯磨, 교단에서 일시축출)에 처함에 따라 이를 서방의 장로들에게 알려 이른바 제2결집을 단행하였고, 이에 불만을 품은 밧지 비구들도 대결집을 단행함으로써 불교교단은 상좌부와 대중부로 근본분열하고 이후 18개 부파로 지말분열하였다고 이해하는데, 그렇다면 대중부의 율장인 『마하승기율』에서는 금은수납을 정법(淨法)으로 인정하는가? 아니다. 역시 비법으로 배척한다. 그렇다면 근본분열에서의 ‘대중부’ 정체는 무엇인가?

제2결집을 근본분열과 관련시키고 있는 것은 오로지 4~5세기에 편찬된 스리랑카의 사서 『디파밤사』뿐이다. 여기서는 계속하여 불멸 100년과 136년 포살을 행하지 않는 6만의 외도 적주(賊住)를 물리치고 상좌부의 분별설을 선양하기 위해 목갈리풋타가 제3결집을 단행하고 『카타밧투(Kathāvatthu)』를 지었으며, 불멸 236년에도 다시 제3결집을 단행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마성 스님도, 전 회장도 이에 근거하여 상좌부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인정하라고 말한다. 니카야를 친설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불교사에 대한 몰이해라고 비난한다.

“아쇼카왕에 의해 이루어진 국가적 사업(제3결집)을 존재하지도 않거나 역사적으로 단명한 다른 부파의 사적인 경전과 비교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훈계하였는데, 불교의 전승 상에 도대체 몇 명의 아쇼카왕이 등장하는지 알고 한 말인지, 무슨 근거에서 ‘사적 경전 운운’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아쇼카왕 때 대천(大天)의 5사송에 의한 근본분열이나 카니시카왕의 후원으로 실행된 유부의 결집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5사송 또한 대천과 관련지어 설한 것은 오로지 『이부종륜론』뿐이다. 『디파밤사』든 『이부종륜론』이든 일차사료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이 분야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우리나라의 법경 스님도 “가상적 사서인 『디파밤사』를 역사적 증언으로 수용하는데는 문제가 있다”고 하였으며, 라모트 같은 이는 “결집의 전승은 성전문헌과 그 후의 여러 부파의 성전들(양자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 오래된 것이고 진짜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하였을 것이다”고 말한다. 최근 우리 학계에 자주 회자되었던 사사키 시즈카는 부파분열을 비롯한 초기불교 교단사에 관한 한 서로 상충되는 거의 모든 정설(定說)은 후대 개변되거나 가탁되었을 것이라는 전제 하에 그의 연구를 시작한다.

사실 인도불교사에 대한 약간의 상식이 있는 이라면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의 유래를 동일선상에서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 또한 이에 관한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불교를 시대적으로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로 구분하고, 부파불교가 일어나면서 초기불교가 끝나고,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부파불교가 끝난 것으로 여긴다. 혹자는 여기에 불타 재세시의 불교라는 뜻의 ‘근본불교’라는 말까지 더하고 있다. 그러나 초기불교든 근본불교든 그것을 전하는 텍스트가 언제 어떻게 성립하였지 반문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니카야는 기원전 1세기 무렵 문자로 작성되며, 스리랑카에서는 기원 후 5세기까지도 팔리어 삼장의 분류와 구성에 대해 논란을 벌인다. 황순일 교수는 곰브리치 교수의 불교학 방법론을 전하면서 “우리는 팔리 니카야 또는 한역 아함이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문헌일 것이란 환상에서 일단 벗어나야 하며,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그리고 교리적 영향 아래서 오랜 시간에 걸쳐 변형 또는 발전해 온 것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라모트 역시 말하였다. 모든 성전들이 부파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초기불교시대에 이미 고정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그렇지만 제1결집 이래 3~4백여 년 간 면면히 구전되어 왔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 사자상승의 계보도 전할뿐더러 경은 송경자(誦經者, sūtrāntika)라 불린 전문집단에 의해 전승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른바 율상수나 법사들의 계보는 부파마다 다를뿐더러 후대 작성된 것이다. 송경자 또한 다수의 부파에서 그 존재가 확인된다. 그들에 의한 의도적 개변도 확인된다.

그런데 왜 송경자가 필요하였을까? 다만 경을 암송하는데 전문적 능력이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인가? 필자는 이들이 정법의 소멸과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잡아함』제640경을 비롯한 다수의 전승에서는 샤카․야바나 등 서방에서 침입한 왕들의 무자비한 파불(破佛)과 불교 내부의 분쟁으로 인한 정법의 멸진을 전하고 있으며, 논서에서는 “불타 교법은 누구에 의해 유지 전승되는가?”라고 끊임없이 묻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불교에 누가 될지라도 불교학은 그것이 ‘학’인 이상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시작해야 한다. 전 회장은 니카야는 아무런 단절 없이 전승되었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목갈리풋타가 비판하였던 이설자는 누구인가?

『디파밤사』에서는 외도 적주라고 하였지만, 리스 데이비드 부인은 『카타밧투』의 이설자로서 독자부, 정량부, 설일체유부, 대중부, 안다카, 계윤부 등을 열거하고 있다. 그들은 왜 외도 적주로 불렸을까? 그들은 상좌부의 무엇을 비판하였고, 이에 대한 상좌부의 대응논리는 무엇이었던가? 상좌부는 그들을 끝끝내 배척하여 불교교단에서 몰아내었던가?

이상과 같은 학적 이해가 선행되지 않는 한 오로지 상좌부 전승의 니카야만이 불설(=친설)이라는 맹목의 주장만을 되풀이하게 될 것으로, 이를 상대로 논쟁은 이루어질 수 없다. 논쟁의 생명은 모름지기 논거의 제시와 상대방 논거(또한 비유)의 비판적 검토에 있기 때문이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1014호 [2009년 09월 11일 10:31]

 

 

 

 

 

 

 

 

 

 

 

 

 

 

제8-니까야 체계적 전승…‘친설’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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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대 황순일 교수 ‘불설/비불설’ 기고대승경은 개개인 사경…가감 가능성도 커‘친설’ 잣대로 동일선상 놓고 볼 수는 없어

기사등록일 [2009년 09월 18일 09:41 금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후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이 권오민 교수의 주장을 강하게 반박하면서 치열한 논쟁이 오갔다.(본지 1008호~1014호) 이런 가운데 황순일<사진>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가 권오민 교수와는 다른 견해의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부처님이 어머니를 위해 도솔천에 올라가 설법했다는 ‘상카시야 전설’을 조각한 인도 바르후트 탑. 상좌부 전통에서는 아비담마도 이때 설해졌다고 본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불설’이란 의미로 사용하는 빨리어는 buddha-vacana이다. 인도유럽어에서 복합어 앞자리에 오는 용어는 단수로도 복수로도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buddha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이 용어는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를 단수 고유명사로 본다면 buddha-vacana는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이란 의미를 가지며 ‘친설’이라고 할 수 있고, 복수 일반명사로 본다면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의 말씀’이란 의미를 가지며 보다 폭넓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지게 된다. 불설과 친설은 모두다 buddha-vacana에 해당되는 한문용어로 볼 수 있지만, 그 외연은 친설보다 불설이 훨씬 더 넓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불교는 양자 중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종교로서 받아들여졌을까? 불교가 일반적으로 Buddhism으로 영역된다면, 라이벌 종교였던 자이나교는 Jainism으로 영역된다. 자이나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Jina 즉 승리자로 불린다. Jaina는 Jina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승리자들에 속하는’이란 의미를 지니다.

따라서 자이나교는 한사람의 승리자(Jina)의 가르침이 아니라 복수의 승리자들의 교리체계란 의미를 지니게 된다. 불교가 결코 Baudhism으로 지칭되지 않았다는 점은 불교가 전통적으로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고따마 붓다의 교리체계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번이라도 초기경전을 조심스럽게 분석하고 다른 번역본들과 대조하면서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과연 내가 지금 읽고 있는 이야기들이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고따마 붓다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옮겨놓은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 동일한 경의 이본들 사이에서 쉽게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점들이 발견되기도 하고, 동일한 내용의 가르침이 다른 경들에서 때로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되기도 하며, 교리적으로 수행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들이 초기경전의 도처에서 혼재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실상 남방불교 테라와다(Theravāda)전통의 마하비하라(Mahāvihāra)교단은 빨리 삼장(tipitaka)을 이러한 수많은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부처님의 말씀(buddha-vacana) 즉 친설 로서 받아들인다. 이들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해설서로서 확실히 붓다 이후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빨리 아비담마(abhidhamma) 문헌들까지도 부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기 위해서 상카시야(Sāmkāsya)와 관련된 전설까지 동원하고 있을 정도로 빨리삼장의 정통성을 부처님의 말씀 즉 친설에서 찾으려고 노력해왔다. 

하지만 불교가 학문적으로 연구된 이래에 남방불교 교단의 이러한 주장은 여지없이 깨져버렸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빨리어 문헌은 네팔 카트만두에서 발견된 8세기경의 필사본으로, 남방불교 국가에서 발견된 오래된 필사본들은 거의 대부분이 17~18세기경의 문헌으로 추정될 뿐이다.

특히 스리랑카의 경우 15세기 이래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의 식민통치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필사본들이 소실되어 버렸고, 12세기 미얀마 문법학자들에 의해서 음운체계가 대대적으로 수정된 필사본들이 미얀마와 태국을 통해 17세기 이후에 역수입된 것들만 남아있다. 빨리경전협회(PTS)에서 출판된 빨리 삼장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역수입된 문헌들에 기초하여 편집되고 로마자화 되어서 출판된 것에 불과하다.

 

언어적으로 보았을 때 남방불교 테라와다 전통은 빨리어(Pāli)를 마가다어(Māgadhī)라고 주장한다. 고따마 붓다가 자신이 활동했던 마가다 지역의 방언을 사용했을 것임으로, 빨리어가 마가다어라는 것은 빨리삼장의 언어가 고따마 붓다의 언어라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하지만 인도전역에서 그 지역의 방언으로 기록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 아쇼까왕 비문석주의 언어들과 빨리어를 비교해보면 빨리어는 마가다 지역이 있는 동인도 지역의 방언들보다는 서인도 지역의 방언들과 더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빨리어는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언어일 가능성 또한 거의 없어 보인다.

 

한역 아함경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중기인도어인 프라끄릿어 (Prakrit)로 문자화 되어 최종적으로 중국에서 한역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들이 마치 단일한 부파에 속하는 것처럼 모여 있지만, 장아함은 법장부, 중아함과 잡아함은 설일체유부, 그리고 증일아함은 대중부에 속하는 문헌으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최근에 북서인도에서 발견되어 독일과 영국에서 편집되고 있는 싼스끄릿어(Sanskrit) 근본설일체유부 장아함경이 한역 장함경에 비해서 크기가 거의 두 배에 이르고 중아함에 있는 몇몇 경전들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금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한역 4아함이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외형적으로 보았을 때 빨리 니까야도 한역 아함경도 현재의 형태로서는 역사적으로 실재했었던 부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있는 문헌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란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구전전통의 측면이 강한 초기경전과 문자전통이 강한 대승경전은 경전의 성립과 전승이란 측면에서 많은 차이를 가지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초기경전은 최초에 성립된 후 적어도 200~300여 년간 구전으로 전승되다가 점차적으로 문자화 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불멸직후 라자가하(Rājagaha)에서 있었던 제1결집에서 경․율․론의 삼장이 합송되었다는 율장의 기록을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하지만 고따마 붓다의 사후에 그 직계 제자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스승의 가르침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을 것이라는 것 또한 가능성이 매우 낮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율장에서 나타나는 제1결집과 같은 규모로 500여명의 아라한들이 모이는 거대한 결집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을지라도, 스승의 가르침과 승단의 규칙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승단 차원에서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추고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암송에 의존한 구전의 경우 인간 기억의 한계 때문에 훨씬 더 쉽게 변형되고 다른 이야기들이 쉽게 삽입될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초기경전은 구전으로 전승되던 시기에 문자로 기록되어 전승된 시기보다 훨씬 더 적게 변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초기경전은 한명의 승려에 의해서 암송된 것이 아니라 율장 암송자(vinaya-dhara), 가르침 암송자(dhamma-dhara), 아비담마 목록 암송자(mātikā-dhara) 등으로 표현되는 암송전문승려집단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전승되었기 때문이다. 테라와다 주석전통은 여기에 더해서 디가 합송자(Dīgha-bhānaka) 맛지마 합송자(Majjhima-bhānaks) 등으로 이러한 역할이 점차적으로 더욱더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초기경전이 일정한 숫자의 전문가집단에 의해서 집단적으로 암송되었다는 것은 개인의 기억의 한계에 기인한 실수가 전체 승려들의 합송을 통해서 보안되고 정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인적 차원의 단순한 오기와 의도적인 가감이 은밀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문자에 의한 전승보다도 구전의 경우에 변형이 훨씬 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인도불교의 승단들이 몇몇 거점 지역을 중심으로 점차적으로 거대한 사원군을 형성하게 된 배경에는 많은 수의 암송전문승려들을 조직화하여 체계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보존하려는 노력이 숨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초기경전은 이 시기에 이미 변형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동일한 집단 내부에서는 합송을 통해 변형의 가능성을 줄일 수 있었지만, 승단이 지리적으로 광범위한 지역으로 퍼져나가고 점차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사상적 배경에 노출되면서 서로 왕래가 부족했던 집단들 사이에서 합송을 통해 변형을 줄이고 부족한 부분을 보안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기경전의 다양한 판본들을 조사했던 랑스카진이 「빨리구전문학」이란 논문에서 주장했듯이 부파를 달리하는 개별적인 판본들 사이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은 경이 설해진 장소, 등장인물, 상황전개순서 등과 같은 사소한 것으로서, 교리적 부파적 차이에 기인한 차이는 아주 드물게 발견될 뿐이다.

한편 대승경전은 체계화 분업화된 승단에서 조직적으로 성립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리처드 곰브리치, 폴 윌리엄스와 같은 서구의 많은 학자들은 대승불교의 탄생을 경전의 문자화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다. 비록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새롭게 발견된 대승불교 필사본의 연대가 기원전 1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인도의 중심부에서 대승불교의 흔적은 기원후 400년 이전에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부파불교와 같은 체계화되고 분업화된 승단조직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다양한 대승불교의 경전들을 고립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문자라는 새로운 도구를 통해서 대승불교는 개개인의 생각과 개개인의 체험이 자유롭게 표현될 수 있는 전혀 새로운 환경을 만난 것이다. 구전 전통에서 승단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을 포함하는 경전은 합송을 통해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하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어떤 자유로운 생각이나 개인적인 견해가 이미 문자화되어 경전의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경전이 소실되거나 파괴되지 않는 한 이러한 생각과 견해는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승경전이 개개인에 의해 사경될 때, 사경자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오기와 은밀한 가감이 이루어질 수 있는 여건이 문자의 도입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배경에서 반야경 계열의 초기대승불교 경전들은 판본을 달리하면서 점차적으로 분량이 많아지고 많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추가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서구의 학계에서는 초기경전이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구전전통에 기인한 부파불교의 경전전승전통의 체계로부터 일정 정도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비록 필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만을 불교로 보려는 교조주의적인 사고에 젖어있지는 않지만, 필자는 초기․부파불교 전공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어떻게 보면 거의 불가능한 소망을 하나 가지고 있다. 장구한 세월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변형되고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사상적 배경에 노출되면서 많은 외적 영향을 흡수하면서 번잡해져버린 초기경전에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고따마 붓다의 말씀(친설)을 정말 한번 추려내어 보고 싶다.

황순일 동국대 불교학부 교수

1015호 [2009년 09월 18일 09:41]

 

 

 

 

 

 

제9-‘하나만 진실’은 다양성시대에 역행

 
권오민 교수, ‘불설/비불설’ 기고
“초기불전이 부파 소산이듯 대승도 부파에서 비롯”
‘초기불교-부파불교-대승불교’ 도식적 이해는 잘못
기사등록일 [2009년 09월 25일 10:12 금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최근 「문학/사학/철학」(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전재성 회장이 이를 반박하면서 서로 논쟁이 이어졌고, 황순일 동국대 교수도 최근 권 교수와는 다른 입장을 표명했다.(본지 1008~1015) 이런 가운데 권 교수가 다시 황순일 교수의 견해를 반박하는 글을 보내와 이를 게재한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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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룸비니의 붓다 탄생상.
(1)

이제 이 논쟁을 마무리할 시점이 된 것 같다. 그동안 대다수의 독자들께서는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두고 서로가 불설이 아니라고 하니, 도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구차스럽게 다시 변명하자면, 필자는 초기든 대승이든 혹은 위경이든 불설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초기경전은 친설이지만 후대 찬술인 대승경전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비불설이다”고 한다면, 아함 또한 친설로 보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없으며, 그럼에도 그렇게 말한다면 아함 역시 비불설이라 해야 한다고 말하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상좌불교에 새로이 신념을 갖게 된 분들께는 초기불교와 대승을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당혹스럽고 마음에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학자’라는 이름 하에 행해진 구업에 죄송하다는 말씀 다시 올린다.

그러나 거듭 말하지만 이미 부파불교 당시에도 ‘친설’과 ‘불설’을 구분하고 있었다. 아함과 니카야는 부파에 의해 찬집(纂集)된 불설로서, ‘불설’이 오로지 불타의 금구언설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논쟁에 참여한 일련의 ‘니카야=친설’ 논자는 “한 명의 비구로부터 들은 것도 경에 포함되고 율을 드러내는 것이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는 『대반열반경』의 말이나, “불설에는 불타가 설한 것뿐만 아니라 성문․선인․천․변화인이 설한 것도 있다”는 팔리율장의 말에 대해 왜 해명하지 않는 것인가? 현존하는 초기경전도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헌대 황순일 교수는 “초기경전이 고타마 붓다의 말씀을 가감 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구전이라는 부파불교의 경전전승의 전통으로 볼 때 어느 정도 붓다의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이고도 원론적인 말을 서구학계라는 권위를 끌어들여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이미 지난 호에서 이를 전제로 “왜 전문 암송집단이 필요하였고, 부파마다 그러한 집단이 존재한 까닭은 무엇이며, 그들에 의한 의도적 개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고 물었으므로 황 교수는 이에 답했어야 하였다. 그들은 다만 불설(=친설)을 정확하고 한결같이 전승하기 위한 암송집단이었던가? 이 또한 지극히 순진한 생각이다.

a라는 부파와 b라는 부파가 전승한 경이 다를 경우, 어느 부파의 경이 진실의 불설인가? 이에 따라 제 부파 사이에 불설/비불설 논쟁이 일어났고, 그래서 마련된 것이 불설의 정의였으며, 이는 대․소승 모두에 의해 암묵적으로 승인되었다. 그것은 불타 교법(경)을 관통하는 정신 즉 법성(진실)이었다. 독자들께서는 대승과 소승뿐만 아니라 그들 내부에서조차 법성을 달리 이해하였는데 그것이 어떻게 불설의 기준이 될 수 있는가? 라고 의심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불타의 정법을 추구한다’는 공동의 인식이 있었다. 이에 따르는 한 비록 경전의 전승과 주장을 달리할지라도, 그리하여 극도의 비난을 가할지라도 불교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4-5세기 유부논사 중현은 말하였다. “전승한 교법에 따라 서로의 경을 부정하게 되면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2)

황순일 교수는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친설이라는 잣대를 통해 동일선상에 놓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라 하였다. 필자 또한 양자를 동일선상에서 놓고 이야기할만한 분명한 근거를 갖고 있지 않다고 이미 말하였다. 그러나 곰브리치 등의 서구학자의 견해를 인용하여 말한 “대승경전은 문자라는 도구를 통한 자유로운 생각이나 개인적 견해”라는 주장(이 또한 우리의 불교개론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목이고 마성 스님 역시 누차 강조하였지만)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이제 근대불교학 시대에 형성된 이와 같은 다수의 미확인 명제들을 전면적으로 검토해 볼 때가 되지 않았을까?

이미 밝힌 대로 필자는 예컨대 『잡아함』제322경이 유부 찬술임을 인정한 중현의 말에 충격을 받았지만, 부파의 찬술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경에 포함되고 율을 드러내는 것’ 즉 기존의 경전에서 파생된 것일뿐더러 ‘결집’이라는 형식의 교단의 확인절차를 거친 것이지 하늘에서 떨어진 것과 같은 독단적인 것은 아니었다.

대승경전 또한 그러하였을 것이다. ‘대승경전은 개인 견해(혹은 작품)’라는 추측성의 주장보다 훨씬 설득력을 갖는 논거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잠시 밝혔지만, 우리는 대개 서구의 근대불교학에 따라 불교를 초기불교-부파(아비달마)불교-대승불교로 도식화하고 이를 실체화하여 부파불교가 생겨나면서 초기불교가 끝나고, 대승불교가 생겨나면서 부파불교가 끝난 것으로 여긴다. 초기불교를 전하는 텍스트가 부파의 산물이라는 것은 이미 밝힌 바지만, 대승 또한 부파와는 독립된 별도의 실체로 보기 어렵다.

삼장의 요지를 해설하고 있는 『유가사지론』「섭사분」에서는 경을 크게 별해탈경(戒經)․경(4아함)․성문과 관계하는 경(12분교 중 방광을 제외한 것)․대승과 관계하는 경(12분교 중 방광)으로 나누고서 성교(聖敎)를 세상에 오래 머물게 하기 위해 결집자들이 지은 섭송(攝頌, Uddāna)의 해설에 거의 모든 지면(권85-98)을 할애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아함에 관한 것이다. 『대지도론』에서도 역시 대승경은 취지(大事)가 다르기 때문에 아함 중에 안치하지 않았을 뿐이라 하여 아함을 전제로 한다.

우리는 여전히 대승불교는 기존의 부파교단과는 관계없는 보살(재가)교단에서 기원한다는 히라카와 아키라의 가설을 불교의 상식처럼 여기지만, 이에 비판적인 G. 쇼펜, J. 실크, P. 해리슨, 사사키 시즈카, 시모다 마사히로 등의 학자는 대승의 기원을 부파불교의 연장선상에서 찾고있다. 시모다는 “처음에는 대․소승의 구분이 없었지만, 전통적인 부파교단에서 발생하고 발전한 지속적인 경전제작 운동을 통해 대승불교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하며, 사사키는 “파승(破僧)의 정의가 어떤 시기 법륜(정법)의 파괴에서 갈마의 파괴로 바뀌었고, 이에 따라 교리를 달리하는 각각의 부파가 갈마를 함께 시행함으로써 하나의 불교승단이라는 공통의 인식이 생겨났으며,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부파불교가 성립할 수 있었고, 대승 또한 이 같은 계기에서 나타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마하승기율』에 의하면 데바닷타는 정법을 파괴해서가 아니라 포살을 함께 하지 않아 파승자였기 때문이다. 필자의 문제의 논문에 따르면, 유부에 의해 불설의 기준이 마련됨으로써 대승경전이 찬술될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대승경전이 기존의 부파불교와 무관한 개인 견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대승의 기원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하여 근대불교학에서 제시한 막연한 가설에 따라 대승경전을 초기경전과 별개의 것으로 여기고 그같이 단언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이다. 더욱이 현존하는 양 경전은 편찬시기(BC.1-AD.5)가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선상에 놓고 이야기할 여지는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3)

지난 6백년 이래 우리의 불교는 굴절되었으며, 불교학은 그보다 더 오랜 세월 단절되었다. 김동화 박사는 고려의 불교를 의천과 지눌에 의한 일시적 재흥(再興)이 있었을지라도 다만 제불보살께 국가의 안태를 기원하는 타면적(惰眠的) 불교, 조선의 불교를 억불에 따른 은둔의 불교로 규정하였다. 개화이래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도 결코 정상적이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오랜 세월 불교는 민간신앙으로서만 역할하였다. 혹자는 그나마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 한다. 정말로 그럴 것이다. 5백여 년의 탄압에도 살아남은 것은 세계종교사에 유례가 없는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헌대 어느 시기 대중들의 학력도 눈도 높아졌고, 더 이상 민간신앙 형태의 불교에 만족하지 못하였으며, 그런 와중에 개방화에 힘입어 라즈니쉬 등의 명상법과 함께 위빠사나 수행법이 들어왔고, 니카야도 뒤따라 들어왔다. 기존의 불자들에게 이는 분명 신선한 것이었다. 이것은 물론 중국의 불교 초전(初傳)시기에 이미 들어왔고 비담종이라는 이름의 종파도 형성하였지만, 분석론적 성향의 이 불교는 동아시아의 사유에 맞지 않았고, 해서 다만 소승의 관법선, 어리석은 이들이 닦는 선법으로 폄하되었으며, 사라졌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영향 미친 불교는 미타신앙과 화엄 그리고 간화선이지만, 조선의 불교는 간화선을 통해 명맥을 유지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승려들이 경을 읽게 된 것은 숙종 이후부터이다. 그나마 어느 때부터인가 교학은 ‘알음알이’ 운운하며 타기의 대상이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수미산보다 더 큰 볼륨의 불교학에서 우리의 불교이해는 황무지나 다름없으며, 그것조차 종파적 입장의 구호와 선전의 단계를 넘지 못한다. 여전히 “아비달마는 난삽하며 치심의 사견만을 더하는 불교”라고 말한다.

팔만대장경은 세계의 보물이지만, 우리에게는 다만 문화재로서의 보물일 따름이다. 한글대장경은 서가의 성물일 뿐이다. 불교철학의 핵심이라 할 논서의 경우 이성적인 머리로는 한 줄도 읽을 수 없다. 과연 우리의 능력으로 그것의 번역이 가능한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현대불교학’이라 하면 문헌학 운운하며 불교학의 이방으로 간주한다. 또한 그러면서도 외국의 불교학자들을 초빙하는데 열과 성을 다하지만 “한국은 불교전통이 살아있다”는 그들 말에 흡족해 할 뿐 그들의 불교학 방법론에는 귀기울이지 않는다.

필자는 초기불교 신봉자들의 말과 생각을 잘 이해하고 있다. 필자도 말하자면 초기불교 전공자이다.(우리나라에서 ‘초기불교’라는 말이 언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살펴주었으면 좋겠다. 그전에는 ‘원시불교’였다) 어떤 이는 초기불교를 공부한 이가 무엇 때문에 대승불설론을 옹호하느냐고 물었다. 대승을 위해, 한국불교를 위해 옹호한 것 아니다. 대승에 의해 ‘악마의 설’로 불린 유부 아비달마를 통해 그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이지만, 적어도 필자는 그것이 진실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법성은 ‘하나’라는 획일적 사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하여 오로지 ‘진여일심’만을 외친다. 그러나 아비달마에는 아비달마의 법성이 있고, 중관과 유식에는 그 나름의 법성이 있으며, 진여일심도 이에 기반한 것이다. 그리고 ‘글자’로 이루어진 그러한 온갖 법성을 한데 모은 것이 대장경이다. 만약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중현이 말하였듯이 남아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팔리 니카야를 진실로 여겼다면 그렇게 여기면 된다.

그러나 그것만이 진실(친설=불설)이고 다른 불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는 대승의 경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악마든 패종(敗種)이든 소승이든, 이는 그 때의 이야기임에도 우리의 대승교가들은 지금 자신의 말로 이야기하면서도 대승의 진실은 자신의 말로 보여주지 못한다. 다만 ‘전통’이라는 권위에 기대어 말할 뿐이다.

오늘날은 더 이상 교조적 획일화시대가 아니며, ‘믿어라’해서 믿는 세상도 아니다. 심증이 아니라 구체적 논거로써 니카야의 경전사적 정통성을 의심하였음에도 불교사에 무지하다거나 극단적 궤변론자(Lokāyata)로 치부하는 것은 논쟁의 도리도 아닐뿐더러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제 바야흐로 불교교양대학과는 다른 차원의 불교계몽의 시대를 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불교도의 지적수준이 고양되지 않으면 안 된다. 구호와 선전의 불교학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된다. 독선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1016호 [2009년 09월 25일 10:12] 

 

 

 

제10-최초 경전 편찬은 문자의 영향

고려대 조성택 교수 ‘불설/비불설’ 기고
근대학자들, 인도 구전전통 불교에 무분별 적용
초기-대승 경전 동시대 편찬…‘기억’ 방식 차이뿐
기사등록일 [2009년 09월 30일 12:39 수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문학/사학/철학」(여름 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경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는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후 “니까야에는 ‘친설’이 담겨있다”는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을 비롯해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 황순일 동국대 교수 등과 권오민 교수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갔다. 이런 가운데 조성택〈사진〉  고려대 교수가 이번 논쟁 주제와 관련해 최근 발간된 「초기불교사 ‘재구성’에 관한 검토」(불교학연구 제23호)란 논문 내용을 정리한 기고문을 본지에 보내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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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사를 재구성하는데 적용되었던 유럽 근대불교학의 암묵적 전제들을 재검토하고 불교의 종교적 사상적 특징에 입각한 새로운 재구성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이러한 모색이 문헌학적 방법론의 한계를 넘어 고대불교를 ‘상상’하는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고대불교사의 전체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문제는 짧은 글 한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필자의 능력 밖의 일이다. 이 글은 다만 공고해 보이는 ‘고대불교사’라는 근대유럽 불교학의 ‘구성물’에서 발견되는 조그만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놓기 위한 것이다.

근대불교학은 원산지인 인도에서의 ‘불교의 부재’라는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였다. 당시 발달하였던 유럽의 문헌학은 이러한 상황을 헤쳐 나가는데 아주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경전의 언어학적 계통을 구분하고 상호 관련성은 물론 여러 이본(異本)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경전 성립의 역사를 파악하는데 문헌 비평적 접근은 매우 유효하였다. 근대불교학이 재구성한 불교사의 기본 골격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1. [불교는 본래] 하나의 교단에서 출발하여 역사적 과정 속에서 여러 교단으로 분열되었다.
2. 현존하는 초기 경전(주로 팔리 경전과 아함경)간의 내용적 차이는 본래의 동일성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근대불교학이 도달한 결론이지만 어쩌면 근대불교학이 그 출발에서부터 이미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근대불교학의 관점에서는 이 두 가지 전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의 교단’이라는 전제는 당연히 ‘본래 동일한’ 텍스트, 즉 현존 경전들의 모본(母本, Ur-text)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며, ‘본래 동일한’ 텍스트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교단’이라고 하는 제도적 뒷받침이 있어야 하며 그것도  여럿이 아닌 반드시 ‘하나’의 교단이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불교학의 이러한 전제는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어느 것도 역사적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막연한 추측과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근대불교학은, 면밀한 검토나 구체적 증거도 없이, 거의 무의식적으로 브라흐마니즘(Brahmanism)의 구전 전통이 초기불교의 경우에도 그대로 ‘재현’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두 가지 점에서 이러한 ‘믿음’에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브라흐마니즘의 구전 전통이 가능하기 위한 몇 가지 선결 조건들이 초기불교에는 없었다는 점이며, 다른 하나는 브라흐만적 구전전통은 초기불교에서 이미 직접적으로 비판할 만큼 비불교적일 뿐 아니라 불교 교리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점이다. 브라흐만 전통과 불교는 ‘텍스트’에 대한 관념이 전혀 달랐다. 브라흐만 전통에서 베다 문헌은 신성한(sacred) 기원과 신성한 힘을 가진 것이지만, 초기불교 전통에서 텍스트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불교가, 적어도 초기불교 전통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을 ‘보존’ 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하는 ‘성전(聖典)의 종교’가 아니라,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 실천하는 ‘체험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초기불교를 재구성하는데 있어 불교의 이러한 특징은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되며, 이는 초기불교의 성격을 이해하는 기본 전제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불교 경전을 편찬 전승하는 일은 초기불교, 적어도 붓다 입멸 당시의 1차적 관심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 현존하는 엄청난 분량의 불교 경전은 언제 만들어진 것들인가? 현존하는 대부분의 경전들은 초기불교 경전이든 대승경전이든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 후 5세기 사이에 편찬된 것들이다. 앞서 언급하대로 근대불교학은 이 경전들의 모본(母本) 텍스트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모본의 시기는 빠르게는 붓다 입멸 후 100년경을 기준으로 그 직전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하거나 또는 늦어도 2차 결집 당시에는 성립되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언급한대로 우리는 모본(母本) 텍스트의 존재를 증명해 줄 역사적 자료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간접적으로 인정할 만한 불교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나 정황적 증거도 없다.

붓다는 80세로 입멸할 때까지 약 35년간 설법을 하였다고 한다. 성도 직후의 전법과 붓다의 마지막 몇 달을 전하고 있는 텍스트를 제외하면 나머지 어떤 경전들에서도, 심지어 대승경전에서도 35년 기간 내에서 시간의 경과를 전혀 감지할 수 없다. 과연 당시 붓다가 몇 세인지, 성도 후 얼마나 경과한 때인지 등을 전혀 느낄 수 없다. 모든 시간은 ‘한 때’일뿐 세월의 흐름에 따른 붓다 설법의 내용이나 어투의 변화 등을 전혀 읽을 수 없다. 물론 대승경전과 초기 경전은 확실히 다르다. 그러나 그 다름은 내용과 서술방식과 내러티브의 전개방식에서 오는 차이일 뿐 두 경전 간에 실제적 시간의 경과는 아니다. 즉 팔리경이나 아함경을 먼저 설한 뒤 나중에 설했다는 그러한 시간의 경과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불교 전통’에서는 이러한 것을 두고 붓다 가르침의 ‘영원성’ 혹은 ‘초역사성’을 역설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교 경전을 하나의 ‘텍스트’라는 입장에서 보면 불교 경전에서 ‘시간’은 멈춰 있고 시간의 경과를 찾아 볼 수 없다. 붓다가 이 모든 것들을 어느 날 ‘하루’에 설법한 것이라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이 텍스트들이 비슷한 시기에 편찬되었기 때문이라는 추정도 전혀 무리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나는, 물론 더 많은 사료 분석과 텍스트간의 비교연구가 필요하지만, 일단 현존 경전이 불교 최초의 경전편찬의 결과물과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의 것들이라고 가정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서 현존하는 여러 경전들은 기원전 1세기와 기원 후 5세기 어느 시기에  비로소 편찬되기 시작하였으며 짧게는 1세기 길게는 3~4세기를 거치면서 지금의 경전으로 ‘고정’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초의 편찬은 유럽의 근대불교학자들이 추정하였던 구술에 의한 편찬이 아니라 ‘문자’에 의한 편찬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당시 편찬의 자료가 되었던 ‘텍스트’들은 그 언어나 체계, 내용 등이 각 지역별로 워낙 다양했기 때문에 ‘구술’에 의해 일관성 있는 ‘정전’(正典) 체계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최초로 불교 경전이 편찬되기 시작한 것이 기원전 1세기경 그리고 그 이후라면 이 시기는 곧 대승경전이 ‘만들어 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승경전이 만들어지는 시기와 초기경전이 편찬되었던 시기는 거의 동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리차드 곰브리치(Richard Gombrich) 등이 주장하고 있듯이 불교 경전에 있어 ‘문자’ 사용은 대승경전의 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초기불교 경전의 편찬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앞서 간략하게 언급하였지만, 붓다 입멸 후 각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붓다에 대한 다양한 ‘기억’들이 초기불교 경전들을 편찬하는 기본 원천 자료(source materials)들이었을 것이다. 세대를 걸친 전승의 과정에서 그 기억의 내용, 순서는 물론 디테일에 있어 많은 차이가 생겼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각 지방 속어의 언어학적 차이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을 것이다.

따라서 편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기억들은 ‘단편적’이거나, 다른 기억들과 ‘불일치’ ‘상충’되는 것이 다반사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의 일관된 내러티브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단편적 이야기를 다른 자료를 통해 ‘보충’하거나, 때로는 ‘삭제’ 혹은 ‘창작’하는 등 소위 ‘편집 재량권’(editorial discretion)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피 했을 것이다.

근대불교학은 현존 경전에서 발견되는 여러 ‘기억 장치’(mnemonic device)들, 즉 ‘정형구’ ‘통일적 체제’ ‘반복’ 등을 모본(母本)텍스트로부터의 구전 전승의 흔적 혹은 증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구전 전승’을 설득력 있게 입증할 만한 뚜렷한 증거나 단서가 없는 상황에서 ‘기억 장치’의 존재만을 가지고 곧 ‘모본의 구전’을 언급하는 것은 별 설득력이 없다.

나는 현존 텍스트의 ‘기억 장치’들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장치들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불교인들은 ‘붓다의 가르침’과 ‘붓다의 기억’을 처음으로 편집, 편찬하는 경전화의 과정에서 비로소 전승의 문제를 고민하게 되고, 이를 위해 베다문헌 등에서 ‘정확한 저장기억’을 위해 전통적으로 활용되어 온 여러 ‘기억 장치’들을 활용하였던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이러한 경전화/정전화의 작업은, ‘기억’의 관점에서 보면 ‘활력으로서의 기억’을 ‘저장기억’으로 전환하는 작업이라는 의미가 있다. ‘활력적 기억’이 있는 한 붓다는 ‘과거’의 경험이 아니라 ‘현재’적 경험이지만 저장 기억이 되는 순간 붓다는 과거의 경험이 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팔리 경전 등 초기경전의 편찬자들의 태도와 대승 경전 편찬자/창작자들의 태도는 크게 대조된다. 초기경전 편찬자들이 붓다를 ‘과거’의 기억으로 ‘저장’함으로서 붓다는 일정한 모습으로 ‘고정’되게 된다.

그러나 대승경전의 편찬자/창작자들은 여전히 붓다를 ‘활력적’으로 기억하고자 하였으며 따라서 붓다는 현재적 경험이 된다. ‘반주삼매’와 ‘염불삼매’ 등은 그 대표적인 현재적 경험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붓다는 ‘활력적 기억’을 통해 ‘항상 현현(顯現)’하는, 다시 말해서 ‘영원한’ ‘상주’(常主)하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불신(佛身)에 관한 이론적 고찰의 과정이 비록 없었다 하더라도 색신, 응신, 법신의 삼신(三身)은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였을 것이다.

이와 같이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의 등장을 교단사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붓다에 대한 ‘기억’ 방식의 차이, 즉 ‘저장 기억’이냐 ‘활력적 기억’이냐의 차이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 방식은 그레고리 쇼펜(Gregory Schopen)이 대승불교의 기원과 관련하여 이미 지적한 교단사와 사상사의 ‘불일치’에 대한 또 다른 해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려대 철학과 교수

 

 

 


 

 

제11-“토론문화 드문 불교학계의 이변”

서울대 철학과 안성두 교수 기고
부파 불설논쟁 조명으로 불교학 ‘업그레이드’
대승불교 기원 논의 지평 확장하는 촉매제 될 것
기사등록일 [2009년 10월 09일 11:25 금요일]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가 「문학/사학/철학」(여름 제17호)에서 초기경전으로 일컬어지는 아함과 니까야 또한 대승경전과 마찬가지로 붓다의 ‘친설’로는 볼 수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이후 “니까야에는 ‘친설’이 담겨있다”는 팔리문헌연구소장 마성 스님을 비롯해 전재성 한국빠알리성전협회장, 황순일 동국대 교수 등과 권오민 교수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오고 갔으며, 조성택 고려대 교수도 “최초 경전 편찬은 구술이 아닌 문자에 의해 성립됐다”는 주장을 펼쳤다. 이런 가운데 이번에는 안성두<사진> 서울대 교수가 이번 논쟁에 대한 평가 등을 정리한 기고문을 보내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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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민 교수(이하 논자)의 「불설과 비불설」이란 논문을 둘러싸고 지난 두어 달간 법보신문의 지면을 통해 벌어진 불교학자들 간의 논쟁은 참으로 직접적인 논쟁문화가 드문 불교학계에서 하나의 이변으로 받아들여져도 좋을 것이다. 이 논쟁의 경과를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보면서 필자가 받은 인상은 우리 학계가 얼마나 이런 종류의 진지한 문제제기와 이를 둘러싼 토론을 갈구해 왔는가 하는 점이다.

사실 토론에 있어 질문 자체가 갖는 보다 긍정적 역할은 대답을 이끌어내고 이를 통해 또 다른 질문을 유도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이번 논쟁과정에서 누구의 입장이 옳은가 하는 것은 부차적이며, 중요한 점은 이 논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각자의 견해를 그것이 논자의 입장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든 또는 확장된 이해에 의거하든 거리낌 없이 드러내는 풍토를 마련했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필자가 뒤늦게 이 논쟁에 대해 끼어든 이유는 논자의 문제제기에 대해 적어도 당시의 대승불교를 전공한 학도의 일인으로서 옳건 그르건 어떤 반응이라도 보이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전에 다시금 「불설과 비불설」을 몇 차례 반복해서 읽으면서, 재삼 논자의 원전읽기의 깊이와 이차문헌에 대한 폭넓은 독서에 대해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실로 이 논문은 아비달마에 대한 논자의 오랜 학문적 연찬의 저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역작으로서, 「경량부와 비유자의 의미와 관계」(2008), 「구사론에서의 경량부 (I)+(II)」(2009) 등의 논문에서 행했던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불설(佛說, buddha-vacana)이 논서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명쾌하게 논의하고 있다.

논자는 이제까지 그 난해함과 방대함으로 인해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텍스트의 하나로 간주되어 왔던 중현의 『순정리론』을 지렛대로 삼아 이전 시기에서 행해진 불설에 대한 논의가 가진 해석학적 함의를 풀어내고 있는데, 이런 과정에서 논자가 보여준 원전자료의 섭렵과 비판적 논의는 한국불교학계의 수준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켰다고 해도 과찬은 아닐 것이다.

 

「불설과 비불설」의 논의를 통해 필자가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불설의 논의가 오로지 대승불교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부파 내부에 있어서도 뜨거운 쟁점이 되었다고 하는 논자의 지적이다. 논자가 말하고 있듯이 이 문제는 대승의 기원과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시사를 준다. 대승의 기원이 대승경전의 편찬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면 불설로서의 ‘경(經)’을 ‘창작’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내부자적 시각에서 핵심적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논자의 주장은 대승의 기원과 관련해 논의지평을 확장하는 촉매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중복되는 점은 있겠지만 이 논문의 가치와 논점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도 먼저 논자의 설명을 간략히 요약하겠다.

 

필자가 논문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논자의 주장의 핵심은 세 가지 점에 있다.
(1)불설은 석가모니불의 친설(親說)뿐 아니라 법성(法性)에 부합되는 가르침도 포함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불설이란 법성/도리에 부합되는 ‘잘 설해진 것(subhāsita)’의 측면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에게 전승된 체계로서의 아함이나 니카야는 특정한 학파소속성을 떠나서는 생각될 수 없다. 즉 각 학파에 의해 도리에 부합되는 것으로서 수용된 것이다.

 

(2)이러한 전승된 ‘성교(聖敎)’와 불설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이미 부파불교시기에 확정되었다. 양자의 차이는 이미 이종철 교수 등에 의해 지적되었지만, 상기논문의 가치는 이를 여러 텍스트 개소의 인용을 통해, 특히 세친과 동시대인인 중현의 『순정리론』을 통해 제시하고 증명하고 있다는 데 있다. 논자에 따르면 불설은 『대반열반경』에서의 네 가지 ‘위대한 교설’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후 경과 율에 따른다는 규정을 넘어 법성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새로운 기준을 도입함에 의해 주로 유부의 문헌에서 인(人)·문(文)·미요의경(未了義經)·지(知) 대신에 법(法)·의(義)·요의경(了義經)·지(智)에 의지해야 한다는 4의(四依)의 해석학적 작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불설의 내용과 진리성은 역사적 붓다로서의 석가모니의 친설 여부가 아니라 그의 언어적 교설이 붓다의 원의도와 의미를 반영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그런 한에 있어 불설의 확정기준은 올바른 논리와 부합되는 것이다. 논자는 이 차이가 이미 유부아비달마 문헌에서도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고 있었고, 대승의 선구자들도 이런 구별에 기본적으로 입각해서 대승불설론을 주창하고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3) 이러한 중현의 유연한 입장과 대비되는 인물이 경량부의 조사 슈리라타이다. 논자에 따르면 슈리라타는 “부파에 의해 결집 전승된 성교(聖敎, āgama) 중에서 불타가 직접 설한 것만을 경(불설)으로 인정하였으며, 이에 따라 스스로 경량부라 호칭했을 것이다.” 『순정리론』의 진술에 의거해 경량부는 일종의 경전근본주의자의 관점을 가진 학파로 간주하면서 여기서 이 학파의 명칭도 나왔을 것이라고 보는 논자의 해석은 기존의 연구를 뛰어넘는 매우 창의적인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이 논문의 위험성(?)은 읽어가면서 너무나 논지가 뚜렷하기 때문에 원전과 비교해 논문의 내용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가지 않는 한 거의 논자의 주장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 있다. 논자의 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그가 인용하는 여러 자료들, 특히 『순정리론』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지만, 범본이나 티베트역이 없는 이 논서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 때문에 이제껏 이 책을 들출 엄두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하겠다.

사실 그것이 어찌 필자뿐이겠는가? 논자가 지적하듯 이 시기의 아비달마사상을 전공한 학자들에게 있어서조차 이 논서를 본격적으로 연구에 반영한 이는 아마 오래전 타계한 사사키 겐쥰(佐佐木現順) 교수나 이 책의 심불상응법에 대해 연구했던 콕스(C. Cox)를 제외하고는 드물 것이다. 논자의 『순정리론』번역이 빨리 출간되기만을 학수고대할 뿐이다. 이하는 위의 세 가지 점과 관련해 논자와는 약간 다른 관점에서의 문제제기이다. 

논자는 『대반열반경』의 이본(異本) 중에서 “법상 중에 있는 것” 또는 “아비담과 상응해야 한다”는 규정을 첨가한 이본의 편찬연대가 후대일 경우라고 추정한다.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의 진행은 일반적이기 때문에 그의 추정에는 일면 타당성도 있지만, 법성이나 법상 등의 추가가 이본들의 학파소속성에서 유래한 것은 아닌가의 여부도 검토할 소지는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법성이나 법상 등과 부합된다고 할 때 그것은 후대에 편찬된 아비달마문헌의 내용과의 일치성을 말하기보다는 논모(論母, mātṛkā)의 내용과의 일치성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인다. 경장의 편찬이 최초기 논모의 성립시기보다 시기적으로 앞선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자는 도리 혹은 정리(yukti)를 법성의 동의어로 간주하지만 과연 이것이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이것은 불설의 확대된 정의에 포함되는 “법성에 위배되지 않는” 것으로서의 불설의 기준을 청변의 『중관심송』의 설명과 관련시켜 ‘도리=법성’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데에서 두드러진다. 법성을 표현하는 정형구는 “붓다가 세상에 나건 나지 않건 그러한 것”이지만, 그러나 청변이 제시하고 있는 반대론자의 대승비불설의 근거는 “다른 도리를 설하기 때문”이다.

논자는 “청변이 불설/비불설의 판정기준으로 삼은 것은 정리(正理, yukti, nyāya)와 추론(anumāna)”이었고, 이를 다시 『중관심송』의 구절에 따라 부연설명하면서 “성전이 성전일 수 있는 것은 다만 ‘전해져 온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이론적 타당성을 갖는가, 갖지 않는가, 진실지와 해탈을 지향하는 논리적 사고와 상응하는가, 상응하지 않는가에 달려 있고” 이를 검토하는 방법이 추론이라고 말한다. 이런 논리에 따라 “잘 설해진 것이 불설”이라는 유부와 유식에서 확립된 경전관이 청변에게도 타당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따라서 “대승은 정리에 따른 성전과 모순되지 않기에 불설”이며, 따라서 “베단타의 말일지라도 올바르게 설해진 것은 모두 불설”인 것이다.

청변이 정리와 추론을 같은 차원에서 하나의 인식수단(量)으로 언급한 것은 전통적으로 인식수단을 직접지각(現量)과 추리 또는 성언량을 포함시켜 설명하는 방식에서 볼 때 분류상 조금 문제가 있다고 보이지만, 여기서 필자의 문제제기는 논자가 제시하는 ‘도리=법성’의 등식이 아니라 도리(道理, yukti)라는 단어의 의미 내지 외연이다.

 

유식학파에 따르면 도리는 법성과 동의어가 아니라 법성은 4종 도리의 하나에 포함될 뿐이다. 4종 도리란 관대(觀待)도리, 작용(作用)도리, 증성(證成)도리, 법이(法爾)도리로서, 마지막 법이도리가 즉 법성으로서의 이치를 말한다. 이 4종의 도리는 성문지를 위시한 여러 유식문헌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여기서 도리란 제법을 관찰하는 방법(yoga), 방편(upāya)으로 풀이되고 있다. 반면 도리가 추론과 같은 논증수단의 의미에서 사용되는 것은 세 번째 증성도리에 국한되고 있는데 그 의미는 ‘논거에 의해 증명하는 도리’이다. 성문지에 따르면 증성도리는 제법의 무상성 등의 불교적 진리를 신뢰할만한 전승을 얻은 사람, 직접지각, 추론의 세 가지 인식수단을 논거로 해서 논리적 증명을 행하는 것이다. 반면 법이도리란 “제법의 진실성을 [세간에서] 인정된 사물의 성질(법성)로서, 불가사의한 법성으로서, [수행자가] 안주하는 법성으로서 믿는 것‘이다.

이와 같이 ‘도리=법성’의 등식은 외연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이며, 다만 이런 추론 등의 인식수단을 논거로 해서 법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중관학파에 속하는 청변의 경우 유식학파가 사용하는 도리의 개념을 달리 이해하고 사용했을 수도 있겠지만 논자가 인용하는 청변의 문장은 법이도리의 맥락이 아니라 증성도리의 맥락에서 불설의 진리성을 확정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논문의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가장 독창적 부분은 경량부의 상좌 슈리라타의 성전관과 유부의 그것과의 용해할 수 없는 차이점을 보여주면서 논자가 슈리라타를 경전근본주의자로 해석하는 점이다. 그렇지만 떠오르는 의문은 논자의 해석이 옳다면 그러한 경량부적인 엄격한 경전관으로부터 어떻게 ‘종자설’과 같은 ‘새로운’ 이론이 제안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더구나 경량부도 ‘독립된’ 학파로서 삼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무엇에 의거해서 논장의 진리성을 확립할 수 있는지의 문제도 제기된다.

중국주석가들에 의해 경량부설로 귀속되는 『유가론』의 여러 이론 중에서 예를 들어 104 번뇌설은 적어도 『유가론』의 설명에 따르는 한 역시 번뇌를 삼계와 사제 및 견소단(見所斷), 수소단(修所斷)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기본적 분류틀은 슈리라타에 의해 부정되지 않았던가? 나아가 종자설이 알라야식 등의 유식학 이론의 발전에 끼친 결정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왜 현장은 슈리라타의 저작은 번역하지 않고 중현의 것을 번역했는가 하는 의문도 남는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논문 전체의 취지에 비하면 극히 지엽적인 것이다. 논자의 불설에 대한 논의는 ‘어떻게 불교는 다양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이해하는데 있어 사사키 시즈카(佐佐木閑)의 교단사적 연구에 못지않은 중요한 포인트를 해명해 주고 있다. 논자가 논문의 ‘사족’에서 말하고 있듯이 ‘불교의 개방성’이야말로 학문적 차원에서는 물론 실천적 차원에서도 우리 시대 불교(학)의 가장 중대한 과제일 것이다. 이에 어떻게 응전하는가에 따라 불교학과 불교계의 앞날이 달려있을 것이다.

안성두 서울대 철학과 교수


1018호 [2009년 10월 09일 11:25] 
 

 

 

 

종합평가 1

‘불설·비불설’ 논쟁을 보는 시각 / 박은정 
박은정 달라이 라마 한국어 통역 담당
 
 [42호] 2010년 03월 18일 (목)  박은정  달라이 라마 한국어 통역 담당 
 
 
인류사에서 다양한 종교가 발생했고 흥망성쇠를 거듭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서 우리는 인간 삶과의 깊은 관계성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종교의 존재 이유에 초점을 맞춰 본다면 어쩌면 종교를 더욱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른지도 모른다.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인가? 뭇 사람들에게 현재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물어보자. 돈, 건강, 성공 등 여러 가지 다양한 대답이 나오겠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행복이란 말로 요약된다. 비록 다양한 형태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우리 모두의 삶의 의미와 이유는 행복에 있다. 이러한 근거로써 종교는 우리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종교 각각의 행복에 대한 방법 제시와 보장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종교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다.

종교가 밝히는 행복은 크게 나눠 보면 세 가지이다. 첫째는 지금 바로 이 삶에서의 행복이다. 두 번째는 이 삶뿐만 아니라 이 삶 이후의 삶에 대한 행복이다. 세 번째는 여기서 더 나아가 궁극 즉 영원한 행복이다. 그리하여 종교는 여기에 대한 나름의 답,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불교 역시 종교 가운데 하나이고 세 가지 행복과 그에 대한 방법론을 얘기하고 있다. 물론 세 가지 행복은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지만 아무튼 이생과 내생의 행복을 위한 방법으로 종교는 선한 삶을 살도록 가르친다. 이것은 비단 불교만의 가르침은 아니다. 선한 삶으로의 교훈은 철학을 가지고 있는 주요 종교 공통의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만이 말하는 행복은 실질적으로 궁극적인 행복, 바로 해탈에 있으며 이는 불교도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궁극적인 행복이 해탈이라면 이러한 해탈 추구에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바로 나 자신의 해탈을 추구하느냐 다수의 해탈을 추구하느냐의 문제 말이다. 여기에서 소위 말하는 대승과 소승의 갈림길이 생긴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생명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 내가 그렇게 행복하기를 바라듯 나와 똑같은 감정을 가진 다른 이들도 행복하길 바라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나 자신의 행복 추구와 더불어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추구하려 한다면 어떠한가? 이런 이들은 반드시 존재한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인 이들을 충족시켜줄 가르침은 없는가, 다시 말해 사랑하는 이들의 해탈을 실현하는 가르침은 어디에 있는가? 종교가 우리의 행복에 대안을 제시할 때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불교 어디에서 이런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이런 행복에 대한 방법을 불교 어디에서 제시하고 있는가?

대승은 중생에 대한 대자대비(大慈大悲)로 중생의 궁극적 행복인 중생 해탈을 책임지기 위한 방법으로서 성불을 지향한다고 한다. 대승이 비록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사회 전반 아니 일체중생의 행복을 생각하고 기여하는 좋은 가르침이니 그저 좀 좋게 보아 주자는 얘기가 아니다.

삼대아승지겁(三大阿僧祗劫)이란 어마어마한 도저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장구한 세월을 수행한 결과로서 붓다의 사십 년 전법륜(轉法輪)이 고작이라면 이런 인과(因果)의 형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부처와 성문·연각 아라한이 다름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출연으로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가르침은 없었는가? 대승은 부처를 초월적인 존재로 만들었다고 비판받는다.

한편으로 일체중생의 모든 근기를 알아 대기설법(對機說法)을 하셨다는 부처님이 일체중생을 해탈케 하고자 당신처럼 성불을 원하는 근기를 위한 법은 정작 설하지 않았다면 부처는 그것만으로 결함이 있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대승은 초기 불교의 사상에서 발전된 형태라고 한다. 한술 더 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보다 더 수승한 법을 설하는 이가 출연했으니 급기야 부처님보다 더 뛰어난 존재가 있음을 인정해야 되는 셈이다. 아무튼 대승이 비불설일 때 이러 저러한 수많은 의문들이 여전히 남는 것이 사실이다.


불법(佛法)은 크게 나누면 교법(敎法)과 증법(證法)이다. 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살아 있지 않다면 불법이 제대로 존속된다고 보기 어렵다. 교법이 사상과 철학을 의미한다면 증법은 바로 깨달음을 의미한다. 불법에 이 두 가지 법이 있으나 자연히 증법으로 무게가 실린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법통과 계보를 따지게 되는 것이다. 아무튼 종국에는 깨달음으로 검증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대승은 불설(佛說)이 아니며 후대에 편찬된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직 학계의 통념이다. 이러한 사실을 밝혀낸 수고를 한 이들은 학자들이며 그것은 철저히 사증(史?)을 바탕으로 한다. 대승이 모두 창작이고 조작이며 한 마디로 거짓이라면 천 년이 넘는 역사 속에 대승의 진리는 수많은 성취자와 수행자의 깨달음으로부터 어떤 검증을 받아 왔는가? 세속의 집을 떠나 아니 삼계(三界)라는 윤회의 집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거짓된 것이라면 진절머리를 내던 이들이 도대체 깨달음을 통해 대승이 진짜가 아니고 가짜라고 양심선언을 할 수 없었단 말인가.

한편으로 제한된 역사적 자료만으로 또 심오하고 방대한 정신세계와 진리는 어디까지 얼마만큼 증명될 수 있는 것인가. 깨달음의 세계나 정신세계를 일반적으로 증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 조작된 것이라 한다면 이는 불교를 한다 하면서 우리가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것만을 인정하려 하는 유물론적인 사고에 젖어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의문은 필자만이 가지고 있는 것일까?

대승이 비불설일 때 결과적으로 우리 불교 전통은 긴 세월 동안 기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닌 대승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대착각하고 그 길을 걸었던 어리석은 자들을 대량 배출한 셈이 된다. 또한 그들은 참으로 어리석어 그 존재 가치까지 평가절하된다. 설사 그것이 우리나라 불교도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존경해 마지않는다는 원효 스님이라도 말이다.

결론적으로 과거에 수행 성취한 스승들의 깨달음을 통한 가르침은 묵살되고 우리는 자료로써 판단하고 인정하는 꼴이 되었다. 나아가 대승법을 수행하고 있지도 않은 보살행을 한 스승들은 이 뻔한 진실을 몰랐으니 한편으로 그들의 오류가 안타깝지만 뒤늦게나마 우리라도 이 진실을 알게 된 것을 다행으로 결론짓는다. 어찌 보면 이러한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갑자기 깨달음의 종교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혼란스러워진다.

헤아릴 수 없는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수행자들이 참구하고 또 참구하여 이타(利他)를 이루는 것이야말로 실로 가치 있는 것이며 진정으로 자신을 위하는 길임을 역설(力說)하며 그 길을 걸었고 또 걷고 있다. 이러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길을 달라이 라마는 현명한 이기주의라고 표현했다. 대승이 비불설이라면 이러한 자리이타의 중생구제가 진정한 행복 구현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방법 제시를 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부처는 물론이고 불교는 반쪽짜리 종교가 된다.

대승은 자격을 갖춘 이들, 근기가 되는 이들에게만 설해졌던 비공개적 가르침이었고 때가 되어 후에 용수가 공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나 용수보살이 용궁에서 대승경전을 모셔왔다는 말을 비웃는 학자라면 일반 범부의 직접 지각으로 인지되지 않는 지옥이나 천상의 세계 역시 비웃음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아니 부처님의 교법을 증득한 증법의 중심에 있는 앞선 스승들의 모든 이야기를 비웃어야 할 것이다.

《아비달마구사론》의 저자 세친 스님(世親, 바수반두)과 그의 친형인 무착 스님(無着, 아상가)과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세친은 제2의 부처라고 일컬어질 만큼 그 학식과 수행이 대단하였고 인도 전역에 그 이름을 떨쳤다. 친형인 무착 보살이 대승법을 수행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형이 대승경전을 읽는 소리가 들리면 귀를 막았고 대승을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비방하였다.

후에 깨달음을 통해 자신의 과오를 알게 되었고 깊이 참회하여 대승을 비방한 자신의 혀를 자르려 했다는 일화가 있다. 참다운 가치와 원대한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왔고 또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우리가 혹 세친과 같은 우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
 


 

 

 

 

종합평가 2


한 여름 더위 식혀준 佛說-非佛說 논쟁
現불교가 성찰할 시대적 과제 제공했다

인문학계간지 ‘문·사·철’, '불설/비불설 논쟁' 정리
조인숙 씨, “권오민·마성·전재성 논쟁 신선”평가 
 
 
지난 여름 불교학계를 달군 논쟁은 ‘불설(佛說)과 비불설(非佛說) 논쟁’이었다. 다시말해 ‘대승경전이 비불설이라면 아함부 경전도 비불설’이라는, 「문학 사학 철학」제17호에 게재된 권오민 교수의 ‘불설과 비불설’ 논문 말미의 한 구절에 대해 아함학자이기도 한 마성 스님이 법보신문에 강한 어조로 비판글을 게재하고 나선 것이 이 논쟁의 발단이었다.

 

법보신문 지면을 통해 이뤄진 이 논쟁은 마성 스님과 권오민 교수 사이의 두 차례에 걸친 반박, 재반박에 이어 전재성 박사가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마성 스님의 편에서 권 교수의 논문을 반박함으로써 확산됐다.

 

이후 이 논쟁은 한 두 차례 더 이어졌고 동국대 황순일 교수까지 가세한 상태다. 아무튼 이 논쟁은 볼만한 논쟁이 거의 사라진 불교학계에서 주목을 끌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논쟁이 감정개입이 아닌 건설적 논쟁이 될 수 있도록 이끈 한 법보신문 학술팀의 역량도 매우 돋보였다.

 

이 논쟁이 발단을 제공했던 최근 발간된「문학 사학 철학」제18호는 조인숙 선생의 기고를 통해 이번 논쟁을 정리하는 논문을 게재했다. 아마도 논쟁의 불씨를 제공한 학술지로서, 논쟁의 성과와 문제점을 정리하자는 차원이겠다.

 

조인숙 선생은 ‘불설과 비불설 논쟁에 관하 소고’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이번 논쟁은) 그 자체로 학문하는 이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무심히 지나칠 수 있는 부분들을 새로운 눈으로 검토할 기회를 제공하며, 특히, 이번 논쟁은 과연 ‘붓다의 가르침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돌아봄으로써, 학문의 토대를 진지하게 반성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었다”고 평가했다.

 

조인숙 선생은 “마성 스님은 불설과 비불설 논쟁을 종파적 관점에서 보고 있으며, 역사주의에 입각해 상좌부를 정통으로 인정하여, 제 논사들 간의 불설과 비불설 논쟁을 정통과 이단 내지는 이단의 자기 합리화의 필요성에 의한 논쟁으로 본다”며 “따라서 불설과 비불설을 판가름하는 정법의 기준 역시 상좌부의 경전이 기준이 되고, 여타 부파의 것은 문제시 된다”고 분석했다.

 

“반면 권오민 교수는 종파적 관점과 역사주의를 거부하고, 상좌부를 정통이 아닌 단지 여러 부파 중의 하나로 보고 있으며, 따라서 불설 비불설의 기준은 전통이 아닌 ‘법성’이 된다”고 밝힌 조인숙 선생은 “권오민 교수에게 있어 정법의 기준은 법성이기 때문에, 아함과 니까야의 차이를 둘 이유도 없어지며 대승과 소승경전 또한 모두 불설을 담고 있는 불교의 경전으로서 같은 위상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조인숙 선생은 “전재성 박사는 역사주의에 입각해 아함의 정통성과 아쇼카왕의 비문을 근거로 니까야가 붓다의 친설임을 주장하고, 권오민 교수가 경전 형성의 역사성을 무시했다고 비판했다”고 요약했다. 또 “전재성 박사는 또 불교 경전이 형성된 시기에 따라 아함과 니까야를 붓다의 친설이 담긴 고층으로, 대승경전을 붓다의 법성이 담긴 신층으로 구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권오민 교수는 고층/신층의 문제는 불설/비불설과 관련이 없으며, 아함과 니카야와 대승경전을 신층/고층으로 나눌 수 없다고 반박했고, 경전의 역사적 성립의 증거를 보여준다는 아쇼카 왕은 한 사람이 아니며, 경전 성립을 위한 결집에 관한 전승도 일치하지 않는다고 반박하고 있다고 그간의 논쟁 경과를 정리했다.

 

권오민 교수와 마성스님, 전재성 박사의 논쟁은 경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라고 지적한 조인숙 박사는 논쟁이 이뤄진 기준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했다.

즉 ▲불설/비불설에 대한 관점의 차이로, 마성 스님은 이 문제 자체가 종파적일 수밖에 없다고 하고, 권 교수는 종파적 관점을 거부한다

▲정법의 기준이 무엇인가의 차이다. 마성스님은 역사적 전통에 입각해 상좌부를 붓다의 정법을 계승한 적자로 보고, 권 교수는 ‘법성’을 기준으로 상좌부 역시 여러 부파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

▲아가마와 니까야를 보는 관점의 차이다. 마성 스님은 후자를 상좌부 전승으로, 전자를 그 이외 부파의 전승으로 보는데 반해, 권 교수는 그 둘을 특정 경전이 아닌 부파에 의해 결집 성립된 일군의 경전의 총칭으로, 전자를 전통으로 후자를 각 부파의 경전으로 보고 있다

제 부파불교 간의 불설/비불설과 대·소승 간의 불설/비불설의 성격에 대한 관점의 차이다. 마성 스님은 전자의 경우는 법과 율의 해석 차이이고, 후자는 친설과 가탁의 차이로 둘 사이에는 성격상 큰 차이가 있다고 보는 반면, 권 교수는 불설의 취사선택과 편찬은 부파마다 다를 수밖에 없고 역사적 한계를 고려하면 전, 후자 간의 성격이 다르지 않다고 보고 있다는 것 등이다.

 

조인숙 선생은 이번 논쟁과 관련하여 “거듭될수록 논자들 간의 입장차이는 고착화되었고, 동어반복적인 표현과 학술적 논쟁에 어울리지 않는 감정적 표현으로 대응하는 부분은 아쉬움이 남지만, 논쟁과정에서 풍부한 학술적 자료들이 소개되고 그에 입각한 이론들이 전개되어 보다 세밀한 논의가 이루어진 점은 성과”라고 평가했다. 조인숙 선생은 특히 최근 한국불교계에 남방불교인 테라와다 불교가 사단법인으로 정식 승인을 받고 활발한 활동을 시작하는 시점에 나온 이번 논쟁은 시대적 당면과제를 성찰할 단초를 학문적으로 제공했다는 점에서 시의적절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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