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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김정희

천축국에 대하여 상고하다[天竺攷]

다산정약용.  1762-1836.    74세 죽음

추사김정희. 1786-1856.     71세 죽음.  29세에 초의를 만남
초의의순.     1786-1866.     81세 죽음.  29세에 추사를 만남
흥선대원군. 1821~ 1898. 재위기간은 1864년 1월~1873년 11월.  77세 죽음

현장법사.   602 ~ 664.  현장 이후 번역을 신역(新譯)이라고 부르고 중국 불교의 법상종,구사종(俱舍宗)의 개조

세종대왕. 1397 ~1450. 향년 52세

 

천축국에 대하여 상고하다[天竺攷]

[DCI]ITKC_BT_0614A_0020_010_0080_2000_001_XML DCI복사 URL복사

 

 

오늘날에는 오천축(五天竺)이 서로 통하지 못하는 곳이 없다. 운남성(雲南省)으로부터 월주(越州)를 지나 동천축(東天竺)을 경유하여 중천축(中天竺)에 도달하는데, 만일 곧은 길로 계산한다면 19백 리에 불과할 정도로 가깝다. 남천축(南天竺)은 조금 한쪽으로 치우쳐 먼데 지세(地勢)가 뚝 떨어져 바다로 굽어 들어가서 마치 키의 혓바닥과 같이 생기었다.

여기에는 바로 아직도 보타락가산(普陁洛迦山)ㆍ관음석(觀音石)ㆍ천궁전(天宮殿) 등의 구적(舊蹟)이 있고, 서이(西夷) 각국의 크고 작은 상선(商船)들이 월성(粤省)으로 들어오는 데 있어 반드시 경유하는 문호의 지역이 되어 있으며, 중국 사람들도 선박을 타고 마치 내지(內地)처럼 왕래하고 있다.

능가산(楞伽山) 또한 남천축에 있는데 여기가 곧 여래(如來)능가경(楞伽經)을 설법하던 곳으로서 바로 옛 사자국(師子國)이다. 옛날에 듣기만 하여 전혀 속을 몰랐던 곳이 이제는 눈으로 보아 환히 알게 되어 마치 손안에 든 암라과(菴羅果)와 같아서 속일 수 없게 되었다. 사자국에는 불당산(佛堂山)이 있고 산 아래 불사(佛寺)에는 와상 위에 옆으로 누워있는 석가(釋迦)의 진신(眞身)이 지금까지 보존되었고, 오조(五祖)ㆍ육조(六祖)의 육신(肉身)도 파괴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곳이 석가가 열반했던 곳이라고 전한다.

() 나라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1403~1424)의 연간에 정화(鄭和)가 서양(西洋)에 사신으로 가서 사자국에서 불아(佛牙)를 취하여 중국에 들여왔는데, 이때에 석가의 진신을 똑똑히 보고 돌아왔다. 명사(明史)에도 석가의 진신이 와상 위에 옆으로 누워있는 한 가지 사실을 석란산전(錫蘭山傳) 가운데 밝게 기재하였다. 석란산은 곧 사자국인데 지금은 석란산이라 일컫고 있으니, 이는 국호(國號)와 지명(地名)이 고금이 서로 달라진 것이다.

지금 선가(禪家)에서 말하는 석가의 열반은 곧 열반경(涅槃經)으로 구실을 삼고 있다. 그런데 경()에는 이르기를 불신(佛身)을 첩면(氎綿)으로 겹겹이 감아서 금관(金棺) 속에 장치했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가섭(迦葉)이 불신을 보기를 청하자, 아난(阿難)이 보기 어렵다고 대답했는데, 부처의 시신이 겹겹의 관곽 속으로 두 발을 밖으로 내밀고 있으므로, 가섭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예를 행했다.”고 하였다. ()은 두 가지 본()이 있어 자상함과 간략함의 구별이 있기는 하나, 관곽 속으로부터 두 발등을 내보인 한 가지 사실만은 결코 깨뜨릴 수 없는 것으로서 이것이 마침내 삼처전심(三處傳心)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석란산에 있는 석가의 진신을 가지고 본다면 경의 말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진신이 아직 있다면 누가 곽() 속에 그 진신을 넣어두었단 말인가? 그리고 옆으로 누워있다고 하였고 보면, 그가 열반한 뒤로 아직껏 감히 변동시키지 못한 것인데, 누가 첩면으로 겹겹이 쌌단 말인가? 성화(聖火)가 절로 불태워서 사리(舍利)가 팔곡 사두(八斛 四斗)나 나왔다.”고 하였는데, 그의 진신이 아직까지 있다면 그 사리는 어디서 나왔단 말인가? 그러나 부처의 사리는 중국에 흘러 들어와서 우리 동방에까지 들어왔으니, 이는 또 무슨 일인가?

법현(法顯)ㆍ혜생(惠生)ㆍ현장(玄奘) 등의 여러 기록을 가지고 상고하건대, 그들이 불적(佛蹟)을 기록하는 데 있어 어느 곳이나 눈으로 본 것은 거의 언급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리하여 가섭(迦葉)의 불사리탑(佛舍利塔), 아난(阿難)의 반신사리탑(半身舍利塔), 벽지불탑(辟支佛搭) 같은 것과 심지어는 불발(佛鉢)ㆍ불타호(佛唾壺) 등속까지도 만나는 대로 상세히 기재하였으나, 유독 석가사리탑(釋迦舍利塔)만은 기재해 놓은 것을 보지 못하겠다. 즉 석가의 경행(經行)하던 곳, 좌선(坐禪)하던 곳, 도인(度人)하던 곳 등에는 모두 탑()을 세워서 그곳을 표하였는데, 유독 그의 사리에 대해서만은 탑을 세운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천축 안에 결국 석가사리탑이란 것은 하나도 없으니, 이것은 또 무슨 일인가? 팔곡 사두나 되는 그 사리는 도대체 어느 곳에 흩어져 있고, 오천축 안에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또 법현의 기록에 이르기를 가라위성(迦羅衛城)에는 곧 백정반왕(白淨飯王)의 고궁(故宮)이 있는데, 부처가 태자(太子)로 출가(出家)하던 곳 및 다시 돌아와 부왕(父王)을 알현하던 곳에 각각 탑을 세워 그 사실을 표하였고, 여기에서 동쪽으로 17 유연(由延)을 가서 쌍수림(雙樹林) 사이 희련하(希連河)의 세존(世尊)이 열반했던 곳에 이르니 이곳은 인적이 매우 드물었으며, 세존이 열반한 곳은 정반왕의 고궁 정도뿐만이 아니었다.”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인적이 매우 드물었다고만 말하고, 탑을 세운 표적(表蹟)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만일 여기에 탑이 있었다면 응당 열반한 곳에만 유독 생략하지 않았을 것이니, 역시 탑이 없었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또 여기가 과연 세존이 열반한 곳이라면 어찌하여 탑을 세우지 않았단 말인가?

법현의 기록에 또 이르기를 부처가 열반한 이후로는 오직 사대탑(四大塔)이 있는 곳에만 불법(佛法)이 서로 이어져서 끊이지 않고 있다. 사대탑이란 부처가 태어난 곳[佛生處], 도를 깨친 곳[得道處], 교법을 설하던 곳[轉法輪處], 열반하던 곳[泥洹處]에 세워진 탑을 말한다.” 하였다. 그런데 부처가 태어난 곳이란 바로 가라위성에 있는 정반왕의 고궁인 바, 여기에 대해서는 법현의 기록에서 성중(城中)이 매우 쓸쓸하여 중승(衆僧)과 민호(民戶) 수십 가만이 있을 뿐이다.” 하였고, 부처가 도를 깨친 곳과 교법을 설한 곳에 이르러서는 그 수를 서넛으로 헤아릴 수가 없다. 그리고 열반한 곳이란 바로 희련하(希連河)인데, 이곳 또한 인적이 매우 드물고 또 탑을 세운 자취도 없다는데 무슨 불법이 서로 이어질 리가 있겠는가. 앞뒤가 서로 모순이 되니, 이는 모두 전해 듣는 과정에서 말이 서로 달라진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한 곳은 의당 별도로 다른 곳이 있을 것이니, 희련하를 사대탑 가운데 하나로 소속시킬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사대탑이라고 한 것 또한 참으로 탑이 있어서 탑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네 곳을 범범히 일컬어 사대탑이라고 한 것이다. 범어(梵語)를 당어(唐語)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모두 적합한 표현이 없어, 이를테면 탑()을 부도(浮圖)라 하고, 부도(浮圖)를 다시 부도(浮屠) 또는 불도(佛圖)라고도 하며, 또는 도() 자를 생략하여 홑으로 불()이라고만 일컫기도 하는데, 지금은 선문(禪門)을 통괄하여 부도(浮屠)라고 일컫고 있다. 그렇다면 사대탑은 곧 사선문(四禪門)이란 말과 같은 것이니, 꼭 탑이 있어서 탑이라고 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증명할 수 있다.

현장(玄奘)의 기록에는 이르기를 가비라위국(迦毗羅衛國)의 텅빈 성()이 황량하기 이를 데 없는데, 성 안에는 정반왕(淨飯王)의 정전(正殿)과 마야부인(摩耶夫人)의 침전(寢殿)이 있고, 성 남문(南門) 밖에는 석가태자(釋迦太子)가 출가 수행(出家修行)한 것 및 열반한 것 등의 여러 고적이 있었다.”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또 열반한 곳을 성 남쪽에 같이 있는 것으로 말하였고 희련하(希連河)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모두 보고 들은 바에 따라 말이 서로 달라 열반한 곳이 일정함이 없는 것이니, 이 또한 쌍수림 사이의 희련하로 실증할 수 없는 것이다.

, 여러 설()들이 서로 어긋나는데, 진상(眞相)이 절로 드러나고 혜일(慧日)이 중천에 떠오름으로써 사소하게 반짝이는 반딧불이 빛을 감추게 되는 것은 또한 현회(顯晦)의 시기가 있는 것인가?

대체로 사리(舍利)가 중국에 들어와 우리 동방에까지 오게 된 것은 제불(諸佛)의 사리 또한 많이 있었기 때문이니 모두가 꼭 석가의 사리만은 아닐 것이다. 불정골(佛頂骨)의 경우도 중국에 흘러 들어와 우리 동방에까지 들어왔는데, 오천축 안에 있는 불정골 또한 한두 개가 아니니, 이것이 어찌 다 석가의 정골에만 해당시킬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진신(眞身)이 파괴되지 않은 상황에서 또 어떻게 정골만 따로 전해진단 말인가.

()을 번역하는 데는 매양 전해들은 것에 따라 말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범어를 당어로 번역하는 데 있어 한번 두번 바꾸는 데에 따라 점차로 더욱 오류가 나오게 되는 것은 필연의 이치인 것이니, 달마(達摩)가 이 때문에 일체 다 쓸어버렸던 것이다.

열반경또한 어떻게 번역의 오류가 없을 수 있겠는가. 관곽 속에서 두 발등을 내보였다[槨示雙跗]는 한 가지 안건이 천만 가지 설()들을 일으켜 뭇 장님이 코끼리를 논하는 격이 되었으니, 사람으로 하여금 실소(失笑)를 금치 못하게 한다. 와불(臥佛)의 소상(塑像)은 육조(六朝) 때부터 있었으므로 심지어는 진량(津梁)에 지쳤다는 비유가 있기까지 하였다. 이것은 대개 열반할 때의 상()으로서 아마도 까닭없이 헛되이 만들지는 않은 듯하니, 그 석란산에 있는 석가의 진신이란 것에서 법을 취한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육조 때에 서역의 천축국 사람들이 중국에 많이 들어와 이 진신상(眞身像)을 전함으로써 의당 이런 소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일찍이 계주(薊州) 와불사(臥佛寺)에서 와상에 옆으로 누워있는 와불(臥佛) 1()를 보았었고, 우리 동방에도 와불이 있는데 역시 와상에 옆으로 누워있는 모양을 짓고 있다.

해도일지(海島逸志)에 이르기를 목가(穆迦)는 남해(南海) 가에 위치한 나라인데, 진불(眞佛)이 사는 곳으로 산이 매우 높고 험준하며, 황금미옥(黃金美玉)이 전 지역에 그득하나 온갖 신()들이 수호하고 있으므로 취할 수가 없다. 진실한 수자(修者)는 반드시 목가에 올라 진불에게 예배(禮拜)를 드리고, 재계를 지키고 계()를 받아서 수년 만에 나오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를 노군(老君)이라 일컫는다. 그는 스스로 귀신과 마귀를 굴복시키고 부정한 것을 몰아내고 악귀를 베어 죽이며, 손에는 한 움큼쯤 되는 염주(念珠)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보는 이들은 그가 유도자(有道者)인 줄을 안다.”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한 목가는 곧 낭아(狼牙)ㆍ능가(楞迦)의 전음(轉音)으로서 마치 인도(印度)를 천축(天竺)ㆍ신독(身毒)이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진불이란 곧 석가의 진신이다.

법현과 현장의 기록 가운데서 모든 불()이다, 여래(如來)다라고 칭한 말의 경우, 불은 하나만의 불이 아니고 여래 또한 하나의 여래뿐만이 아닌 것이니, 이 또한 모조리 석가에게만 귀속시켜서는 안 된다.

대체로 석가(釋迦)를 말한 것이 많은데, 이를테면 석가태자(釋迦太子)라든지, 또는 석가약령(釋迦弱齡)이니, 석가츤치(釋迦齔齒)니 하는 등의 곳에서는 모두 석가(釋迦) 두 자를 별도로 일컬어서 구별한 것이니, 이런 경우를 혼동시켜 말해서는 안 된다. 혹 구별하지 않고 함부로 증거를 댈까 염려한 때문에 특별히 이렇게 언급하는 바이다. 그리고 석가츤치 밑에는 여래정골(如來頂骨)이라는 말이 바로 이어졌는데, 이를 만일 구별하지 않고 말한다면, 한 글귀 안에 어찌 다른 글[異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석가란 것은 한 사람에게만 일컫는 말이고 여래란 것은 모두에게 다같이 일컫는 말이므로, 시방여래(十方如來)가 모두 다같은 여래인데, 어떻게 여래란 것을 석가에게만 붙일 수 있겠는가.

석가의 생멸(生滅)의 시기에 대해서는 일정한 논이 없다. 주 장왕(周莊王) 9, 항성(恒星)이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위서(魏書)석로지(釋老志)에 나온 말이다.또는 주 환왕(周桓王) 때에 태어났다고 하기도 하며, 석 도안(釋道安)의 말이다.또는 주 평왕(周平王) 때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법원주림(法苑珠林)에 나온 말이다.또는 주 목왕(周穆王) 때에 태어났다고도 하며, ―《통력(通歷)에 이르기를 효왕(孝王) 원년에 열반(涅槃)했다.”고 하였다.또는 주 소왕(周昭王) 때에 태어났다고도 하고, 첫 번째는 당승(唐僧) 지심(智深)속집고금불도론(續集古今佛道論)에서 나왔고, 두 번째는 법원주림에서 나왔고, 세 번째는 송승(宋僧) 계숭(契嵩)전법정종(傳法正宗)에서 나왔다.또는 은() 나라 말엽에 태어났다고도 하며, () 나라 법현(法顯)이 불()의 열반 시기를 주 성왕(周成王) 때에 해당시켰고 보면, 그가 태어난 시기는 의당 은() 나라 무을(武乙) 때에 해당한다.또는 하() 나라 때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 나라 도선(道宣)의 말로 감통기(感通記)에 나온다. 몽고원류(蒙古源流)에 또 이르기를 원 태조(元太祖)가 부처의 열반 때와의 차이는 33백여 년이 된다.” 하였으니, 이로 본다면 의당 하 나라 초기에 태어난 것이다.

당 나라 현장은 말하기를 부처가 입멸(入滅)한 해에 대하여 제부(諸部)의 말이 각각 달라서, 부처가 입멸한 때로부터 당 나라 용삭(龍朔 당 고종의 연호 661~663) 3년까지가 12백 년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13백 년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15백 년이 되었다고도 하고, 혹은 천 년이 다 안 되었다고도 한다.” 하였고, 또 도가(道家)노자(老子)가 호왕(胡王)을 교화하여 성불(成佛)하게 했다는 설에 의하면 부처가 주 경왕(周敬王) 2년에 태어나 주 고왕(周考王) 3년에 입멸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부처의 생멸 시기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알 수가 없는데, 더구나 열반한 지역이며, 열반할 때의 사실에 대해서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이는 모두 불()로 불을 공격하는 뜻에서 한 말이니, 만일 부처에게 아첨하는 뜻으로 지었다고 한다면 나의 본의가 아니다.

[-D001] 오천축(五天竺) :

고대(古代)에 인도(印度)를 동()ㆍ서(西)ㆍ남()ㆍ북()ㆍ중()의 다섯으로 구획하여 일컫던 말이다.

[-D002] 손안에 …… 같아서 :

손 안에 든 과실이라는 뜻으로 일목요연하게 알 수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암라과(菴羅果)는 서역(西域)에서 나는 과실로 마치 오얏[]처럼 생겼다고 한다.

[-D003] 오조(五祖)ㆍ육조(六祖) :

선종(禪宗)의 여섯 조사(祖師) 가운데, 제오조(第五祖)인 홍인(弘忍)과 제육조인 혜능(慧能)을 말한다.

[-D004] 삼처전심(三處傳心) :

석가(釋迦)가 세 곳에서 제자인 가섭(迦葉)에게 심인(心印)을 전했다는 말. 첫째는 석가가 연꽃을 손에 쥐고 제자들에게 보였을 때 유독 가섭만이 그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는 즉 염화미소(拈花微笑)이고, 두 번째는 석가가 다자탑(多子塔)에 앉아서 가섭을 돌아보며 그에게 반좌(半座)를 나눠주어 앉게 하였던 일이고, 세 번째는 석가가 열반한 뒤 쌍림수(雙林樹) 아래 관() 속으로부터 가섭에게 두 발을 내보인 것을 가리킨다.

[-D005] 법현(法顯) …… 현장(玄奘) :

법현은 진() 나라 때의 고승(高僧)으로 일찍이 서역(西域)에 들어가 천축국과 사자국을 15년 동안이나 두루 유력(遊歷)한 다음 불경(佛經)을 중국에 들여왔고, 불국기(佛國記)를 저술하였다. 혜생(惠生)은 후위(後魏) 때의 고승으로 역시 서역 천축국에 갔다 돌아오면서 대승경전(大乘經典)을 얻어왔고, 사서역기(使西域記)를 저술하였다. 현장은 당() 나라 때의 고승으로 일찍부터 천축국에 들어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불교의 교리를 배우고, 뒤에 많은 불경을 가지고 중국에 들어와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를 저술하고, 대반야경(大般若經)등을 번역하였다.

[-D006] 경행(經行) :

선가(禪家)에서 좌선(坐禪)할 때에 수면(睡眠)을 막기 위하여 몸을 일으켜 일정한 지역을 조용히 걸어서 왕래하는 것을 말한다.

[-D007] 도인(度人) :

()은 곧 중생(衆生)을 의미하는 것으로, 즉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말한다.

[-D008] 백정반왕(白淨飯王) :

중인도(中印度) 가비라국(迦毗羅國)의 임금으로 즉 석가(釋迦)의 부친이다. 정반왕이라고도 한다.

[-D009] 유연(由延) :

유순(由旬)과 같은 뜻으로 인도(印度)에서 말하는 이수(里數)의 단위인데, 그 거리에 대해서는 30, 혹은 40리라는 설 이외에도 수많은 설이 있다.

[-D010] 혜일(慧日) :

()의 뛰어난 지광(智光)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곧 뛰어난 지혜를 비 유한 것이다.

[-D011] 현회(顯晦) :

여기서는 어떤 사실이 진면목대로 환하게 밝혀지는 것과 그렇지 못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D012] 달마(達摩)…… :

달마는 원래 남인도(南印度) 사람으로 중국에 들어와 선종(禪宗)의 초조(初祖)가 된 사람으로서 그는 좌선(坐禪)만을 중시(重視)하고 경문(經文)은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D013] 진량(津梁)에 지쳤다 :

진량은 물을 건너고 육지를 다니는 것을 이른 말로 즉 바쁘게 동분서주한 것을 뜻하는데, () 나라 때 유량(庾亮)이 일찍이 절[]에 들어가 와불(臥佛)의 소상(塑像)을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이 진량에 지쳤다.[此子疲於津梁]”고 한 데서 온 말이다. 世說新語 言語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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