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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김정희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편지

 

다산정약용.  1762-1836.    74세 죽음

추사김정희. 1786-1856.     71세 죽음.  29세에 초의를 만남
초의의순.     1786-1866.     81세 죽음.  29세에 추사를 만남
흥선대원군. 1821~ 1898. 재위기간은 1864년 1월~1873년 11월.  77세 죽음

 

초의의 〈해붕대사화상찬발(海鵬大師畵像贊跋)〉에서 “옛날 을유(1815)에 해붕 노화상을 모시고, 수락산 학림암에서 겨울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는 추사가 눈길을 헤치고 노스님을 찾아와, 공각(空覺)의 능소생(能所生)에 대해 깊이 토론하고, 하룻밤을 학림암에서 보내고 돌아갔다.(昔在乙酉 陪老和尙結臘於水落山 鶴林菴 一日阮堂披雪委訪 與老師大論空覺能所生 經宿臨歸)”고 하여, 이들의 첫 해후시기를 정확히 밝혔다.


초의에게 주다[與草衣]

 
 
 
산중에서 하룻밤을 묵고 나니 마치 중생계(諸有)를 벗어나 삼매(三昧)의 경지로 들어선 것 같았소. 다만 꿈속의 잠꼬대가 많이도 스님들에게 괴이한 꼴을 보였으니 행여 산이 조롱하고 숲이 꾸지람하는 일이나 없었는지요. 바로 곧 편지(梵椷)를 받아보니 자못 못 마친 인연을 다시 잇는 듯하여 기쁨과 칭송이 어울리는구려.
해사(海師)는 한결같이 맑고도 왕성한지요. 정근(情根)이 얽히고 맺히어 끊어 없애자도 아니 되외다.
속인은 따분한 일들이 여전히 덮치고 덮치니 족히 스님의 마음(梵聽)에 누를 끼칠 게 없고 말고요.
염주(珠串)는 이 편에 보내는데 원래는 마흔두 알로서 사십이장(四十二章)의 수에 응한 것이었으나 둘은 깨어져 없어졌으니 한스럽지만 어쩌겠소.
 
一宿山中。若可以超諸有入三昧。第夢中妄說。多爲師輩見恠。能無山嘲林誚否。卽枉梵椷。可續未了之緣。且欣且頌。海師一味淸旺。結成情根。不可斷除也。俗人塵事。依舊相仍。無足爲累於梵聽也。珠串玆以奉呈。而原爲四十二顆。以應四十二章之數。二則見壞。可恨奈何。
 
산중에서 하루 밤을 묵으니 마치 제유(諸有)를 벗어나 삼매에 들어 간 듯합니다. 다만 몽중의 망설이 많아서 스님들에게 괴이하고 무능함을 보였으니 산이 조롱하고 숲이 꾸짖을 일은 아닌지요. 곧 스님의 편지를 받고 보니 끊어지지 않는 인연이 이어진듯하여 기쁘기도 하고, 또 기려집니다. 해 스님의 한결같은 맑고 아름다운 마음은 질박한 마음에서 생긴 정이니 끊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속인의 속된 일은 옛일에서 이어진 것이니 노스님의 마음(梵聽)에 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염주를 이 인편에 보냅니다. 원래 (이 염주는)42 알로 만들어 42장경의 숫자에 맞춘 것입니다만 두 개가 깨져 한스럽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기이(其二)

 
해와 달이 흘러흘러 세상에는 또 한 해의 봄 가을이 지났구려. 사의 무리들은 마땅히 영원토록 윤겁(輪劫)을 벗어나 굴러가지 않는 땅에 처하고 싶을 거요.
그러나 평이한 데 거하여 운명을 기다리며 사는 것은 순리요 죽는 것은 편안이라 여기는 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들의 하고 싶어하는 짓이 왜 그리 가쁘고 가쁘지요. 도리어 일이 많은 게 아니겠소.
일부러 찾아 주었는데 만나지 못하여 자못 서글프고 허전하더니 뒤를 이어 선함(禪椷)이 손 에 들어오니 글자 글자가 혜주(慧珠)마냥 온 방을 밝게 비추어 너무도 피상(皮相)적인 언어로서 반나절의 한가를 빼앗는 그러한 비교가 아니다마다요. 반가운 나머지 칭송이 뒤따르외다.
해로사(海老師)도 무양한지요. 밥을 먹을 적마다 잊혀지지 않는데 그 늙은이는 반드시 나를 잊은 지가 오래일 거요. 무아무인(無我無人)이란 네 글자를 대예(大隷)로 써서 보내니 행여 나를 위해 전달해 주면 어떻겠소. 이미 없을진대 잊음 역시 붙을 데 없을 게 아니오. 이 때문에 무망(無忘)이 아니겠소. 이 뜻으로서 고증(叩證)하여 노사에게 전하여 한번 웃게 하는 것도 무방하지 않은가요. 운백복(運百福)의 세 대자는 사 자신이 거두어 갖도록 하오. 스스로 운전하고 또 남을 운전하는 것을 간절히 비는 바외다. 열 꼭지의 향을 아울러 보내니 청공(淸供)에 대비하기 바라며 하인을 세워놓고서 간신히 적으외다.
 
日月滔滔。世間又過一春秋。宜師輩之欲永脫輪刦。處不轉之地。然以居易俟命存順沒寧者觀之。師輩之所欲爲者。寧不勞勞而反復多事耶。委存失奉。殊覺悵惘。續枉禪緘。字字慧珠。燭照一室。大非皮相言語半日偸閒之比。以欣以頌。海老師亦無恙否。每飯不可忘。此老則必忘之久矣。以無我無人四大隸字寄送。幸爲我轉致何如。旣無矣。忘亦無着。是所以無忘也。以是叩證。聊傳老師一粲無妨。運百福三大字。師自收之。自運而運人。是切禱。十瓣香幷呈。以備淸供。立伻艱草。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 세간에도 또 한 해가 지나가는구려. 그대들은 영원히 윤회를 벗어나 윤회가 없는 곳에 머물려고 하지만 그러나 평범하게 살면서 천명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순리요, 죽는 것이 평안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대들이 하려는 것은 애만 많이 쓰고, 번번이 반복되는 일은 아닐는지요. 天命에 맡기고 순리로 보존되는 것인데도 없는 것을 받들고 있으니 매우 슬프고 멍합니다.

이어 스님의 편지를 받으니 글자 글자마다 지혜의 구슬이 온 방을 (등불처럼)밝게 비춰 피상적인 말로 반나절 한가로움을 빼앗은 것과는 비교 되지 않습니다. 기쁘고 기려집니다. 海 스님도 무탈하신가요. 매번 밥을 먹을 때에도 잊지를 못하는데, 해 스님은 오히려 잊은 지가 오래 되었겠지요.

‘無我無人’이라 예서로 쓴 큰 글씨를 보냈는데, 행여 나를 위해 돌려보내는 것이 어떨지요. 이미 없어졌다면 잊어버리는 것도 집착이 없는 것이지요. 이는 無忘으로 이를 증명하는 것이니 老師에게 전해 한 바탕 웃음거리로 삼는 것도 무방할 듯합니다. ‘運百福’라고 쓴 큰 글자는 스님이 거두시어 스님에도 모든 복이 들어오시게 하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복들이 들어오시게 하십시오. 이는 간절히 바라는 것입니다. 열 꼭지의 판향을 함께 보내 청공으로 올립니다. 하인을 세워 놓고 근근이 적습니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기삼(其三)

 
서찰을 받아 쌍으로 펼치니 쌍으로 반갑구려. 하물며 돌아간 뒤의 첫 소식이라 어찌 마음이 흐뭇하여 풀리지 않으리오.
더구나 초사(草師)의 글 뜻은 이 시끄러운 티끌을 벗어나 저 정계(淨界)를 점령함으로써 자못 자유자재한 기쁜 얼굴빛과 시원스러운 눈매를 내보이고 있으니 진실로 하례할 만하구려.
다만 이 강상(江上)의 종종물(種種物)이 정계와 통하고 있는 것을 사람으로 하여금 확실히 싫증나게 할 거요.
그러나 초사의 복중(腹中)에도 역시 일종의 물(物)을 갖추어서 비록 아승겁(阿僧劫)이라도 초사가 있을 때는 이 일종의 물을 녹여 내지는 못할 거요. 그렇다면 강상이나 복중이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요.
만약 그것이 다르다 할진대 금강신(金剛神)이 멀리 남산의 율사(律師)를 피하지는 않을 것 같고 그것이 같다 할진대 어찌 또 강상만 유독 더럽고 복중만 스스로 향기롭겠소. 복중은 생각하지 아니하고 단지 강상만 책한다면 자못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구려.
무주(無住)로부터 보여준 세 조항은 매우 좋아서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오.
이를테면 조문도(朝聞道)의 한 조항은 비유하자면 사(師)들의 늘 쓰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의 문(聞)과 같이 여길 따름인데, 만약 우리 성인의 도를 들으면 비록 저녁에 죽는다 해도 가할 것이니 도란 것은 곧 성인의 도를 이름이요 만약 성인의 도가 아니라면 도가 아닌 것이외다.
무은(無隱)의 한 조항은 성인의 도가 방책(方冊)에 널려 있어 해가 중천에 솟아 오른 것 같으니 어찌 일찍이 유(儒)에는 사(私)를 두고 선(禪)에는 숨김이 있겠는가.
독수화발(獨樹花發)의 글귀 같은 것에 이르러는 본시 사인(詞人)의 경(景)을 그린 말에 지나지 아니하니 어찌 성인의 대도에 관계되리오. 진실로 성인의 도를 인촉(引觸)하고자 하면 곧 이와 같이 분명한 것이니 무어라 이를지 모르겠구려. 의당 나를 호변(好辯)이라 이르겠지만 부득불 변을 해야 하기 때문이라오.
만상주일(萬象主一)의 조항은 당구(當句)의 안에는 말하지 아니했으나 이것이 어찌 족히 큰 도에 비겨 의논할 수 있으랴. 그 물(物)이라 상(象)이라 이른 것은 우리 도 가운데의 말과 같기도 한데 우리 도 가운데는 본래 이러한 등속의 구절이나 말은 없으며 만약에 선가의 비묘(祕妙)라고 여긴다면 물과 상은 본래 반드시 뽑아 올 것은 아니니 이는 반은 올라가고 반은 떨어지며 동쪽이 희미하고 서쪽이 막힌 격이라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못 견딜 지경이오.
사들이 단지 그 말이 옛 선덕(禪德)에게서 나온 줄로만 알고서 이 말은 반드시 ‘명(命)을 잇고 골수를 전하는 묘체’라 이르며 그것을 참고하여 구명도 아니하고 차츰차츰 얼크러져 결국 그에 감싸인 바 되어 스스로 새까만 귀굴(鬼窟)로 들어가면서 남에게만 와지(㘞地)의 한 소리를 바라고자 하니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사가 만약 이에서 활연히 깨쳐 통한다면 이것이 바로 와지의 광경이니 모름지기 스스로 와지의 제집 계획을 찾기에도 겨를이 없을 텐데 어떻게 남에게 미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다 정진문(精進門) 속의 여러 가지 사업으로 한 걸음에 한 걸음을 나아가는 곳이라오. 내 비록 멀리 천리의 밖에 있지만 귀뿌리는 막힘이 없으니 두 사를 위하여 와지의 한 소리를 기다리겠소. 따라서 범송(梵誦)의 청가(淸佳)를 빌며 쌍수(雙修)는 구함(具椷). 우(右)는 겸하여 무주선사(無住先師)에게 답함.
書來。雙披雙慰。况歸後初信。安得不欣釋。第草師書意。祛此塵囂。占彼淨界。頗有得得自在底色喜眉夬。固可賀也。但此江上種種淨通。令人固可厭。然草師腹中。亦具一種物。雖阿僧刦。草師在時。銷不得此一種物未知江上腹中。同歟異歟。若其異也。金剛神似不遠避於南山律師。若其同也。寧復江上獨穢。腹中自香。不念腹中。只責江上。殊未覺其可也。無住三案之示甚善。便不難知。如朝聞道一案。譬如師輩。只是如是我聞之聞而已。若聞我聖人之道。雖夕死可矣。道者卽聖人之道。若非聖人之道。非道也。無隱一案。聖人之道。布在方册。如日中天。何甞有私於儒而隱於禪也。至如獨樹花發之句。是不過詞人寫景語。何關於聖人大道也。苟欲引觸聖人之道。卽如是分明耳。未知謂何。當謂我好辯而不得不辯也。萬象主一案。當句內不說去。是何足擬議於大道耶。其云物也象也。有似乎吾道中語。而吾道中本無此等句語。若以爲禪家秘妙也。則物與象本不必拈來。是半上落下。迷東碍西。不覺噴筍滿案。師輩只知其出於古禪德。而謂此語之必續命傳髓之妙諦也。不以參究轉轉膠葛。爲其纏繞。自入於黑暗鬼窟。欲望人㘞地一聲。有是理乎。師若於此。豁然悟徹此是㘞地光景。須自討於㘞地家計之不暇。何以及人爲也。皆精進門中種種事業。一步進一步處。吾雖遠在千里之外。耳根無礙。爲俟夫兩師㘞地。一聲順叩。梵佳雙修。具椷。右兼答無住禪師。
 
 
 
기사(其四)
 
잘라놓은 듯이 오래 막혔으니 선미(禪味)와 세취(世趣)가 길고 짧은 것을 비교할 때, 어느 쪽이 나은지요. 단지 마음속엔 흰 구름만 일삼을 따름이지 강상의 내음 나는 티끌에는 생각이 미칠 까닭이 없겠지요. 속인은 매양 옛날의 상상을 선뜻 끊어버리지 못하니 그 끌리고 얽히는 것은 가증스럽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신세라오. 지난날 청탁한 칠불(七佛)의 편서(扁書)는 상기도 요량에 들어오지 못했으며 조사(祖師)의 상본(像本)은 이제 겨우 이모(移摹)하기로 하니 모(摹)가 완성되는 대로 의당 부송(付送)하겠으나, 만일 대은(大隱)이 몸소 와서 가져 간다면 또 다른 건(件)의 좋은 일이 있으니 시험삼아 계획해 보도록 하여 주게. 사배(師輩)들은 마음과 생각이 늘 서천(西天)에 있으면서도 마침내 서천이 여기 있는 줄을 알지 못하고, 곁으로 구하며 밖으로 찾고, 남으로 헤매며 북으로 달리니, 진실로 한탄스러운 일이로세. 두 자루 부채를 부쳐 보내며, 병침(病枕)에 간신히 적으오. 불식(不式).
截然阻久。禪味世趣。較長爭短。未知何居。只是心事白雲而已。無有念及於江上臭塵歟。俗人每不能斷送舊日想。其牽纏可惡。亦不得不如是耳頃託七彿扁書。尙未入量。祖師像本。才擬移摹。摹完當付送。而如大隱躬來取去。則又有他件件好事。試使圖之也。師輩心心念念在西天。竟不知西天之在此。旁求外覓。南鶩北走。良可嘆可咄。二扇寄去。病枕艱草。不式。
 
확연히 갈라놓은 듯, 소식이 막힌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선미와 세상맛의 길고 짧음을 비교하면 어느 곳이 나은지 모르겠습니다만 마음속이 백운처럼 자유로울 뿐이니 (스님의) 생각은 江上의 티끌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인가요. 나는 매양 옛날 보냈던 마음을 끊을 수 없으니 그 끌리고 얽힘이 싫어지기도 합니다만 또한 이와 같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 ‘七彿’ 현판 글씨를 부탁했는데 아직 어찌해야할지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조사의 상은 겨우 성의를 다해 본을 떠 다 그리면 보내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대은 스님이 친히 와서 가져간다면 또한 다른 것도 좋을 일이니 도모해 보십시오. 그대들은 마음과 생각이 서방정토에 있으면서도 마침내 서방정토가 여기인 줄도 모르고, 곁에서 구하고 밖에서 찾으니 남쪽의 오리가 북쪽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진실로 탄식할 만하고 애석합니다. 부채 두 자루를 보냅니다. 병으로 간신히 적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기오(其五)

 
풀옷 입고 나무열매 먹으며 또 한 해를 지나고 보니 자갑(雌甲) 역시 오십이 꽉 찼소그려.
사(師)는 응당 주름살지지 않는 방법이 있겠지만, 나 같은 유전(流轉)의 신세는 이는 성글어 쑤시개를 못 이기고 머리털은 빗을 넘치지 못하여 오늘은 어제와도 달라만 가니 족히 한탄스러울 뿐이라오.
한번 갈린 뒤로 소식을 둘이 다 잊었으니 두륜산(頭輪山) 마루턱이 야마도리(夜摩忉利)보다 더하여 성문(聲聞)이 제접(梯接)할 곳이 아니란 말인가. 향포(香蒲)의 공양은 해 바뀐 뒤에 다시 어떠한지요.
속인은 쓰라림을 안고 궁산(窮山)에 묻혀 있으니 온갖 생각이 더욱 사위어지는데, 다만 노친께서 그 사이 은서(恩敍)를 입사와 느꺼움을 얹고 경사를 밟게 되니 천지 이 세상에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사외다.
사(師)는 비록 세상 밖에 자취를 감추고 숲 사이에 그림자를 숨겼다 할지라도 산이건 바다이건 슬픈 생각은 이치상 정이 마찬가지일 터이니 한번 와서 분부(奔赴)의 의(義)를 다하고 싶지 않은지요. 모름지기 도모해 주었으면 하오. 마침 들으니 저편(邸便)이 매우 안전하다 하기에 대략 두어 글자를 부치는 것이며, 또한 돌아오는 이 편에 답을 부쳐 주길 바라오.
철선(鐵船)은 무양한지요. 각장의 편지를 못하니 돌려서 보는 것도 역시 좋을 거요. 모두는 뒤로 미루고 불선.
 
草衣木食。又經一臘。雌甲亦滿五十。師當有不皺者在。顧此流轉。齒不勝刺。髮未盈梳。今日之日。不如昨日之日亦足浩歎。一別之後。消息兩忘。頭輪山頂。甚於夜摩忉利。非聲聞所可梯接歟。香蒲供養。年後更如何。俗人抱痛窮山。萬念尤灰。惟老親間蒙恩叙。感戴蹈慶。不知塵刹何以報答也。雖遁跡世外。戢影林間。山哀浦思。理當同情。不欲一來以効奔赴之義耶。須圖之也。適聞邸便甚妥。畧付數字。亦望寄答於此回也。鐵船無恙耶。無以各幅。輪照亦佳。留不宣。
 
 
 
 
 

기육(其六)

 
 
병석(甁錫)을 떠나보낸 지도 하마 두 해가 지났는데 잘라놓은 듯 소문이 없으니 정토(淨土)와 범계(凡界)의 갈라짐은 저 은하와 같아서 형세가 제접(梯接)하기 어려워서인가.
심지어 편지를 보내도 답이 없으니 속인(俗人)은 본시 애가 좁은지라 능히 대원융(大圓融)의 경지에 유감이 없을 수 없소.
세상 인연을 잘라 끊어 버리고 솔바람과 물 달 속에 반드시 다시금 정채(精彩)를 더해가는지요. 구구한 이 진환(塵寰) 속에서 목을 늘여 바라보자니 진실로 생각이 끌려 멀리 외곤 하외다.
거사(居士)는 근간에 은명(恩命)을 입어 옛집으로 돌아와 있으며 다시 잠불(簪紱)을 매만지게 되니 감격함이 그지없소. 아무리 수미산(須彌山)으로 먹을 삼아 글을 쓴다 한들 어떻게 이 정곡(情曲)을 다할 수 있겠는가.
철선(鐵禪) 및 여러 노숙(老宿)은 모두가 길하고 상서롭게 잘 있는가. 따로 편지를 갖추지 못하니 부디 이 관곡한 심정을 전달하여 그로 하여금 자관(慈觀)을 돌리고 아울러 먼젓번의 한 말을 실천하여 이 바라는 마음에 부응해 주기를 바라 마지않소. 나머지는 뒤로 미루고 간신히 이만 적으며 불식(不式).
을미(乙未) 납월(臘月) 오일 밤 거사는 이 편지를 쓰는데 이때 수선화가 만개하여 맑은 향기가 벼루에 뜨고 종이에 스며드네.
自送甁錫。已經兩臘。而截然無聞。淨土凡界。判若銀漢。理難梯接。至於有書亦無答。俗人自是腸窄。不能無憾於大圓融之地。斷絶世諦。松風水月。必有更增精彩。區區塵寰中引領瞻望。寔不勝牽想遙誦。居士間蒙恩飭。還處舊第。重理簪紱。感霣靡極。雖須彌爲墨。無以盡此。銕禪諸宿。具吉祥自在否。無以另具。須轉及此欵欵之私。俾回慈觀。並伸前言。以副翹企。爲望爲望。餘歎草不式。乙未臘五夜。居士書時。水仙盛開。淸香泛硏沁紙。
그대를 보낸 지도 이미 두 해가 지냈는데 갈라지듯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정토와 범계의 나누어짐은 마치 은하수와 같아서 사다리로는 닿기가 어려운 듯, 편지가 도착했으련만 답장이 없으시군요. 나는 마음이 좁아서인지 대 원융의 경지에서(보더라도) 서운한 마음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속제를 단절하고, 솔바람과 물에 비친 달을 벗 삼아 거듭 훌륭한 모습으로 발전해 가는 것이겠지요. 어수선한 속세에서 목을 빼고 바라보지만 진실로 생각에 끌려서 한가함을 다 즐길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사이 임금의 은혜를 입어 옛 집으로 돌아왔고, 다시 벼슬에 나아가게 되었으니 임금님의 은혜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설령 수미산으로 먹을 삼는다한들 이 마음을 다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철선 스님과 오랜 인연이 있는 분들도 모두 평안하시고 자재하신지요. 따로 편지를 쓰지 않았으나 나의 간곡한 마음이 전해지게 너그럽게 돌려보십시오. 아울러 전번에 말한 것을 거듭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거듭 바랍니다. 나머지는 편지로 다하기 어렵군요. 이만 줄입니다. 을미(1835)년 섣달 오경.

내가 편지를 쓸 때, 수선화가 만개하여 맑은 향기가 벼루 위에 뜨고 종이에 스며들었다

출처 : 현대불교신문(http://www.hyunbulnews.com)
 
 
 

與草衣[七]

 
 
선탑(禪榻)이라 다연(茶煙)에 또 한 해가 갔소그려. 해가 가고 해가 오는 속에 능히 가도 오도 않는 것이 존재해 있는지요.
그 사이 어홍(魚鴻)의 빗나감은 천리의 먼 길이니 또한 괴이히 여길 것이 없으며 세상 이치와 사람 일도 오히려 이를 빙자하여 먼 마음을 인조(印照)할 수 있으니 사(師)에게는 한번 웃음에도 차지 않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실로 머뭇거리며 서글퍼하지 않을 수 없다오.
곧 보내온 편지를 받아보니 이는 또 내 편지 보내기 이전에 나온 거라 그간 지체없이 잘 받아 보았는지요?
봄바람이 점점 화창한데 선송(禪誦)은 근간 다시 어떠한지, 반려없이 혼자 있는가, 좋은 반려가 있는가?
세상 사이에는 매양 마름처럼 흩어지고 다북처럼 휘날리기가 일쑤인데 능히 차분히 주정(住定)하여 이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면 역시 심히 아름다운 일이겠지요.
천한 이 몸은 여전히 홍진 속에 두 다리를 꽂을 따름이라오.
근자에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을 얻었는데 이는 선장(禪藏)에도 드물게 있는 것이지요. 선가에서 매양 맹봉할갈(盲棒瞎喝)로써 흑산(黑山)의 귀굴(鬼窟)만을 만들어 가고 이러한 무상(無上)의 묘법을 알지 못하니 사람으로 하여금 비민(悲憫)을 느끼게 하는구려.
한스럽게도 사와 같이 천기(天機)가 청묘한 자와 더불어 한번 대증을 하지 못하니 한탄스러운 일이외다.
《유마경(維摩經)》은 철납(鐵衲)이 드디어 식언을 하고 마네그려. 요즈음 사와 더불어 내왕이 없는가? 막연히도 소문이 없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소. 나를 위해 말을 전해주오. 우선 뒤로 미루고 불식.

禪榻茶烟。又是一年。年去年來之中。能有不去來者在否。其間魚鴻之誤。千里遠塗。亦復無怪。世諦人事。尙有藉是而印照遠心。在師不滿一呵。在我寔不勝其低回惆悵也。卽見來椷。又是拙書以前出也。未知卽收耶。春風漸鬯。禪誦近復何如。獨居無伴否。有勝侶否。世間每易萍散蓬轉。有能住定。不爲此障。亦佳甚也。賤狀依舊揷脚於紅塵中而已。近得安般守意經。是禪藏之所希有。禪家每以盲捧瞎喝。做去黑山鬼窟。不知此無上妙諦。令人悲憫。恨不如與師天機淸妙者。一爲對證。可歎。維摩經。鐵衲遂食言耳。比與師無來往否。漠然無聞。何至此甚。爲我轉致也。姑留不式。

 

 

 

 

 

기십(其十)

말제 아우가 어제 돌아와서 대략 성식을 들었는데 곧 또 범함(梵椷)을 얻어 보니 이모저모로 마음이 흐뭇하네.
다만 병발(甁鉢)이 정처없이 허둥댄다니 객지의 고뇌가 어떠한지 민망스러우이.
심지어 내일에 있을 금강의 걸음에도 마침내 나를 보지 않고 떠나는 건가?
둘째 아우의 장천(長川) 걸음도 역시 명일에 지레 출발할 것은 아니니 잠깐 조원(躁猿)을 수습하여 조용히 몇 날을 기다리는 것도 피곤한 몸을 휴식하는 방편이 될 걸세.
혜납(慧衲)의 남은 양식은 어찌 낭비해서 되겠는가. 마땅히 재량해서 방출하도록 하게. 불식.

昨因季歸。畧聞聲信。卽又獲見梵椷。種種慰浣。第甁鉢栖皇客惱。可悶。至於明日金剛之行。遂不見我而去耶。仲之長川行。亦非明日可以經發者。且暫收拾躁猿。靜俟數日。亦爲休憊之方便也。慧衲殘糧。豈可浪費。亦當裁處放下着。不式。

 

 

 

기이십칠(其二十七)

 
지난번에 한 장의 편지와 아울러 주부자(朱夫子 주희(朱熹))의 글씨 목숨 수 자(字) 및 시헌력(時憲曆)을 동봉하여 보냈는데 생각지 않게 배가 바람에 멀리 표류되었다니 편지랑 물건이 전달되지 못한 것은 비록 가석(可惜)한 일이지만 미처 이를 헤아리기도 전에 너무나 놀라서 상기도 정신이 안정되지 않는구려. 배 안의 사람들은 마침내 《관음경(觀音經)》한 구절도 읽을 줄 아는 자가 없었더란 말인가.
봄 일이 날로 화창한데 선안이 길하고 상서로우며 무슨 좋은 일이 서로 들려줄 만한 게 있는지요? 하면(河面)도 능히 주름지지 않는지요?
이 몸은 더욱더 퇴방(頹放)만 하니 산중의 법려(法侶)를 향하여 이야기하기가 자못 부끄러워 낯이 붉을 지경이라오.
날마다 허치에게 시달림을 받아 이 병든 눈과 이 병든 팔을 애써 견디어 가며 만들어 놓은 병(屛)과 첩(帖)이 상자에 차고 바구니에 넘치는데 이는 다 그 그림 빚을 나로 하여금 이와 같이 대신 갚게 하니 도리어 한번 웃을 뿐이외다. 나머지는 뒤로 미루고 불구(不具).

頃付一書。並朱夫子書壽字及憲蓂同椷。不料船風遠漂。書物之未達雖可惜。未及計此。驚甚尙不定。船中之人。竟無解讀觀音經一句者歟。春事日鬯。禪安吉羊。有何好事相聞否。河面能不皺否。此狀頹放益甚。向山中法侶說道。殊愧赤耳。日爲許痴所困。强此病眼病腕。所收屛帖。盈箱溢簏。皆其畵債。而使我代償如此。還覺一笑。餘姑不具。那叟。

 

 

 

 

 

기삼십사(其三十四)

 
편지를 보냈지만 한번도 답은 보지 못하니 아마도 산중에는 반드시 바쁜 일이 없을 줄 상상되는데 혹시나 세체(世諦)와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나처럼 간절한 처지인데도 먼저 금강(金剛)을 내려주는 건가.
다만 생각하면 늙어 머리가 하얀 연령에 갑자기 이와 같이 하니 우스운 일이요, 달갑게 둘로 갈라진 사람이 되겠다는 건가. 이것이 과연 선에 맞는 일이란 말인가.
나는 사를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사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 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보낼 필요 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거요.
그렇지 않으면 마조(馬祖)의 갈(喝)과 덕산(德山)의 봉(棒)을 받을 것이니, 이 한 갈과 이 한 봉은 아무리 백 천의 겁(劫)이라도 피할 길이 없을 거외다. 모두 뒤로 미루고 불식.
有書而一不見答。想山中必無忙事。抑不欲交涉世諦。如我之甚切而先以金剛下之耶。第思之。老白首之年。忽作如是可笑。甘做兩截人耶。是果中於禪者耶。吾則不欲見師。亦不欲見師書。唯於茶緣。不忍斷除。不能破壞。又此促茶進不必書。只以兩年積逋並輸。無更遲悞可也。不然。馬祖喝德山棒。尙可承當。此一喝此一棒。雖百千刦。無以避躱耳。都留不式。老迦。
 

 

 

 

기삼십팔(其三十八)

 
함께 산극(山屐)을 다스려 선탑을 계람(溪藍)에 빌렸는데 한 조각의 공산(空山)에 더불어 말할 사람은 없고 감불(龕佛)은 사람을 향해 말을 하려다가 말을 아니하니 이는 유마(維摩) 거사의 말하지 않는 한 법인가.
성각(性覺)은 자못 혜성(慧性)을 지녀서 능히 어산(魚山)의 범창(梵唱)을 불러대어 솔바람 시냇물 소리와 서로 주고받곤 하니 역시 청정의 권속(眷屬)이라 자못 마음에 드는 것인데 한스러운 것은 안반(安般) 능엄(楞嚴)의 일단(一段) 공부를 하지 못하고 필경에는 문사수(聞思修)로 들어가게 되니 말이로세. 산중의 일이라서 다른 들려 줄 만한 것은 없기에 부질없이 미치기를 이와 같이 한다네.同理山屐。借禪榻溪藍。空山一片。無可與語。龕佛向人欲語而不語。是維摩不言一諦耶。性覺一衲。頗有慧性。能作魚山梵唱。與松風澗水聲互答。亦淸淨眷屬。稍可意者。恨不作安楞巖一段工。究竟聞思修入耳。山中事無他可聞。漫及之如此
 
 
 

초의, 학림암서 추사 만난 후 외연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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