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희(妙喜)가 편집한《정법안장(正法眼藏)》과환기(幻寄)가 각(刻)한《지월록(指月錄)》의 이 두 서는 약간의 법칙이 되는 공안(公案)을 채취하여 후학들에게 보여준 것인데, 다만 어구(語句)가 첨신(尖新)하고 기봉(機鋒)이 민첩한 것만을 숭상하였으며 관문을 뚫는 안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염제(拈提)한 것이 스스로 먼저 잇점을 상실하여진종(眞宗)에 합치되지 못한 것이다.
무릇 이불료(不了)의 언구(言句)에 대하여 역대의 명안(明眼)과 선지식(善知識)들은 그것이 제일의 의체(義諦)가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혹은 조ㆍ부(祖父)가 물려준 것으로서 단지 전해 내려온 가보로 삼기도 했고 혹은 제방(諸方)의 점검(點撿)으로 인하여 다투는 꼬투리를 일으킬까 해서 곡호(曲互)함이 없지 않으며, 비단 분명히 지척(指斥)하려 들지 않을 뿐 아니라 우선 단점을 버리고 장점만 취하여 부합하고 염제(拈提)하여 방촌(方寸)의 나무를 가져다 솟겨 올려잠루(岑樓)와 높이를 같이한 것이니, 역시 어찌할 수 없어 애오라지 문전(門前)에서 감돌고 선뜻 나가지 못한 것이지 어찌 진실로 조사(祖師)의 전법(傳法)이 이에 있다 여겼으리오.초기(初機)와 후학(後學)들은 사람마다 생지(生知)의 혜안(慧眼)을 갖추지 못했은즉 사람을 그르치는 일도 없지 않았다. 이를테면부대사(傅大士)라든가대주해(大珠海)라든가단하천연(丹霞天然)이라든가영운근(靈雲勤)이라든가덕산감(德山鑒)이라든가흥화장(興化獎)이라든가장경릉(長慶綾)이라든가풍혈소(風穴沼)라든가분양소(汾陽昭)라든가단사자(端師子)라든가 대혜종고(大慧宗杲)라든가홍각범(弘覺範)이라든가고봉묘(高峯妙)같은 이들은 다 종문(宗門)에서 역대로 추앙하여 후학을 제지(提持)하는 종장(宗匠)으로 삼았는데도 어쩐지 그기연(機緣)과 시어(示語)가 하나도 뽑을 만한 것이 없다.
애오라지 두어 끝을 들어 그 지(旨)를 보이는 바이다. 부대사의 이른바,
밤마다 부처를 안고 졸며 / 夜夜抱佛眠 아침이면 도로 함께 일어나곤 하네 / 朝朝還共起 일어나나 앉으나 늘 서로 따르며 / 起坐鎭相隨 말을 하건 안하건 거처를 함께 하네 / 語黙同居止 능히 만상의 주가 되고 / 能爲萬象主 사시를 따라 시들지 아니하네 / 不逐四時凋
의 글귀들이며, 장경릉이 당(堂)에 올라 말하기를 “도반(道伴)을 붙들어 어깨를 어울리고 일생을 지내며 학에 참(參)하는 일을 끝마쳤다.” 한 것과 중[僧]이 흥화장에게 묻되 “사방 팔면에서 올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흥화는“중간을 타(打)한다.”라 한 이와 같은 어구는 모두 단지 한낱 조조(照照)하고 영령(靈靈)함을 해득했을 뿐이다. 곧 부대사가 이른바,
빈 손으로 호미를 쥐고 / 空手把鉏頭 걸어가며 수우를 탔네 / 步行騎水牛 사람은 다리 위에서 지나가니 / 人從橋上過 다리는 흘러도 물은 흐르지 않네 / 橋流水不流
라는 것도 역시 범정(凡情)의 집착한 소견을 벗어나는 데 도달했을 따름이며,보화(普化)같은 이는 “밝은 데로부터 오면 밝은 데를 향하고 어두운 데로부터 오면 어두운 데를 향하고 사방 팔면으로부터 오면 선풍(旋風)을 향하고 허공으로부터 오면 연가(連架)로 향한다.” 했는데, 이 말은 비록 구경(究竟)은 아니나 흥화의 “중간으로 향한다.”는 말에 비교하면 하늘과 땅뿐이겠으며방거사(龐居士)의 “한 입으로 서강(西江)의 물을 다 들이마신다. [一口吸盡西江水]”와 같은 것은 바로 종래에 전해 내려 극칙(極則)으로 삼은 자가 많으나 다만 한낱 “빛이 만 형상을 삼킨다. “는 것을 알았을 따름이며 어찌 일찍이 발뿌리가 땅에 붙었겠는가. 때문에 오조(五祖)는 부연한 바,
한 입으로 서강 물을 다 들이마시니 / 一口吸盡西江水 만 길의 깊은 못이 다 되어 바닥이 났네 / 萬丈深潭窮到底 약약하여 조주의 교와 같지 않으니 / 略約不似趙州橋 밝은 달 맑은 바람에 어찌 비할까본가 / 明月淸風安可比
라고 한 이 송(頌)은 가위 방온(龐縕)의 결함을 보충했다 할 것이며, 방파(龐婆)의 “백초의 머리 가에 조사의 뜻[百草頭邊祖師意]”이라는 글귀는 더욱 추솔(粗率)하고 천박한데 무지(無知) 광참(狂參)들은 일컬어 구경(究竟)의 설로 삼고 있다. 분양소(汾陽昭) 같은 이도십지동진(十智同眞)을 제외하면 기타의 어구(語句)는 하나도 취할 만한 것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견지라면 십지동진의 설도 역시 해로(解路) 속에서부터 얻어 온 것이라 할 수 밖에 없다. 만약 이와 같이 추연(推演)하고 부포(敷布)하려 한다면 어찌 한정이 있겠으며, 십지동진이라는 것도 역시 무엇이 그다지 중하다 하리오. 만약 초학의 의심나는 점을 열어주기로 한다면 어찌 꼭 이와 같이 말이 많아야 하겠는가. 한갓 진참(眞參)과 실오(實悟)의 사람으로 하여금 견련(牽連)되어 해로(解路)로 들어가게 할 뿐이다.
덕산(德山) 같은 이는 바로 종래 역대의 추숭(推崇)하는 고추(古錐)이지만 자세히 수구(搜求)하여 보면 수시(垂示)한 기연(機緣)은 도리어 한 칙(則)도 채택할 만한 것이 없고 한낱 ‘본래 언설이 없다[本無言說]’는 이치를 획득한 데 지나지 아니하며, 천하의 늙은 화상(和尙)들의 혀 끝으로 지위를 속이는 일을 입지 않았을 뿐이요, 향상의 일착(一着)은 밟아 가지 못했던 것이다. 때문에위산(潙山)의 말이 진흙 속에 가시가 있어 “덕산(德山)이 뒤로 고봉정상(孤峯頂上)을 향하여 초막을 얽어놓고 부처를 비웃고 조(祖)를 꾸짖으러 갔다.”라 하였으니, 가위 덕산을 들어 두어 마디 말로 판가름을 다한 것이다. 그탁발(托鉢)의 공안같은 것은 역시 초학의 의심난 점을 계발(啓發)할 만한 정도이며 본분(本分)과 더불어는 털끝만큼도 교섭(交涉)이 없는데 하물며 무슨 기이하고 특별한 것이 있어서 곧장 수백천년의 제창(提唱)을 얻었겠는가. 자못 이해가 되지 않으며 암두(巖頭)ㆍ설봉(雪峯) 같은 이는 실로 사(師)에 비해 나은 점을 보였지만 그러나 역시 원통(圓通)의 곳에는 이르지 못하여 그 법사(法嗣)현사(玄沙)와 비교하면 오히려 백 보나 모자란다. 대주해(大珠海)의 돈오입도요문론(頓悟入道要門論) 같은 것은 초기(初機)를 제창한 것에 불과하며 오로지 정문(頂門)의 정안(正眼)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그 마조(馬祖)의 상탄(賞歎)하였다는 말은 반드시 확실한 것이 아니다. 묘희(妙喜) 같은 이는 바로 수백 년 동안 명망이 해내(海內)에 중했던 사람이지만 그 《무고전록(武庫全錄)》은 상세히 뒤져보니 그 시어(示語) 기연(機緣) 속에서는 한 가지도 취할 만한 것이 없으며, 그 고덕(古德)을 염제(拈提)한 것도 또한 간간이 투탈(透脫)의 논은 있으나 지리(支離)하고 오류(誤謬)한 곳이 매우 많은 것을 보면 참다운 지견을 갖춘 자는 아니고 역시 한낱 본래의 미광(微光)을 인식하여 식해(識解)와 학문을 써서 면강(勉强)하고 확충한 소치이며 실지로 관을 뚫은 반려(伴侶)는 아니다.
영운근(靈雲勤)의 “청산은 원래 움직이지 않는데 흰 구름은 자유로이 가고 오누나[靑山原不動 白雲任去來]”라는 글귀 같은 것은 역시 일류(一流)에 속하지만 풍혈소(風穴沼)의 기록 속에 기재된 것에 이르러서는 삼현지요(三玄指要)를 묵오(黙悟)한 데에 불과하며, 그 어구로 노승(老僧)ㆍ도리(闍黎)와 조사(祖師)ㆍ교의(敎意) 같은 것은 다 좌우로 양쪽을 치는 설이니 가국(家國)이나 야로(野老)나 노승이나 도리가 어찌 두낱이 있으리오. 비록 좌우 양박(兩拍)을 가져 해로(解路)를 분식(粉飾)하여 같은 속에서도 다른 점이 있고 다른 속에서도 같은 점이 있는 것 같이 하였으나 그 빈축(顰蹙)과 안첩(安貼)이 두 토막으로 이루어졌으니 어떻게 그를 덮어갈 수 있겠는가.수연불변(隨緣不變)을 답(答)하면서는 “도롱이를 펼치고 비스듬히 일천 봉(峯) 밖에 서서 물을 끌어 오로봉(五老峯) 남새밭을 적셔 준다.[披簑側立千峰外 引水澆蔬五老峯]”라는 것이며, 또 이를테면 “벽(壁)이 천 길을 높이 솟으니 뉘 감히 정안(正眼)으로 넘겨다 보랴.”라는 글귀는 현요(玄要)의 속으로부터 지해(知解)하여 온 것임을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으니 비단 제일 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우선 후학과 불법에 그르침을 끼쳐 줄 뿐이어서 털끝만큼도 비익(稗益)될 게 없다. 이 진위(眞僞)의 분변은 만약 눈 밝은 사람을 만난다면 단연코 그림자도 도망하지 못할 것이다.
단하(丹霞)가 목불(木佛)을 태운 것같은 것은 그 어록을 살펴보면 견지(見地)가 단지 무심에 그칠 뿐이니 단하의 소견에 의거하면 목불의 밖에 별도로 부처가 있단 말인가. 단하에 있어서는불견(佛見)을 제외하고서 기(奇)를 세우고 상(相)을 쓸어버렸다 여긴 것이지만 온몸을 통한 흙탕물은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다.
이를테면 한고덕(古德)이 전(殿) 앞에서 부처를 등지고 앉고 또 한 고덕이 전에 들어가 부처를 향해 침을 뱉으니 곁에 중이 말하기를 “왜 부처를 등지고 앉고 부처를 향해 침을 뱉는가? “ 하자, 대답이 “부처 없는 곳에 오면 아무개와 더불어 침을 뱉고 부처 없는 곳을 지적해 오면 아무개와 더불어 등지고 앉는다.”라는 이 등(等)의 견해는 단하와 더불어 마찬가지여서 다만 소월(掃月)하기 이전의 한 상(像)만 알 뿐이요, 도리어 스스로 천상 만상을 잡은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홍각범(弘覺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지월록》 중에서 그 염제를 채택한 곳이 몹시 많은데 그 지리(支離)하고 유망(謬妄)한 곳은 환기(幻寄)와 더불어 동일하여 가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하겠으니 재론(再論)이 필요치 않은 것이다.
심지어 삼끽시자(三喫侍者)파자소암(婆子燒庵)끽유자(喫油糍)야호(野狐)참묘(斬猫)서우선(犀牛扇)대산파자(臺山婆子)자호구(子湖狗)향엄상수(香嚴上樹)운문선자(雲門扇子)와화산고(禾山鼓),그리고자명방(慈明榜)의 등속 같은 공안은 다 예나 이제나 총림(叢林) 속에서 나날이 들어 보여주는 것이니 역시 다 취하지 않는다.
대개 언어로는 말할 수 없다지만 초기(初機)를 계발하는 데 지나지 아니하며 이것이 구경은 아니다. 다만 이 등의 공안으로 해서 오히려 향상의 일로(一路)가 진무(楱蕪)한 데 이르지 않은 것이다.
총이논지(總以論之)하면 이 일은 따가운 해가 빛나는 것 같고 큰 불이 모인 것 같아서 제(提)하면 오로지 제하고 인(印)하면 오로지 인하는데 마침내 너무도 부처의 정지(正旨)를 통달하지 못하고 다 정(精)을 탈롱(奪弄)하는 데에 속하고 말았으니, 그 말이 비록 다 수천백 년 이래에 사람마다 제창하는 바요, 그 사람이 비록 다 수천백 년 이래로 다 추숭(推崇)하는 바이지만 다 두어두고 논하지 않는다.
대개 역대로 그 이름에 떨어서 지적해 낸 사람이 없었는데 후학이 어찌 능히 다 참방(參方)의 안목을 갖추었으리오. 그 눈빛이 팥만한 자는 반드시 금인지 놋쇠인지 구별이 없고 흰지 검은지 분별을 못할 것이며 이 지위에 이르면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미 어떤 고덕의 이르러 간 경지에 이르렀다 하며 망령되이 참학(參學)의 일을 끝냈다고 하니 이 어찌‘구주의 철을 다 모아서 저 하나의 착도를 만들다 못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등의 어구는 비록 초기를 제철(提掇)하고 사람의 정신(淨信)을 일으키는 데에는 당초에 공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러나 그 공이 매우 적어서 능히 진정으로 마음을 일으켜 참학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화성(化城)에 중지하게 하는 것은 허물이 이로 말미암아 만들어진 것이니 그 과실이 너무도 크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