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경에 나타나는 지혜에 속하는 술어들은 다음과 같다. 냐나(ñāṇa, 지혜), 빤냐(paññā, 통찰지), 아빈냐(abhiññā, 초월지), 빠린냐(pariññā, 통달지), 안냐(aññā, 구경지)이다.
① 냐나(ñāṇa)는 지혜를 나타내는 가장 보편적인 술어이다. ñāṇa는 지혜가 아닌 일반적인 앎이나 지식을 나타내는 경우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전문술어로 사용될 때는 예외 없이 지혜를 뜻한다. 그래서 본서에서는 모두 ‘지혜’로 옮기고 있다. 초기경에서도 예를 들면 둑케 냐나(dukkhe ñāṇa, 괴로움에 대한 지혜)등으로 나타나며 이는 장부 상기띠숫따(D33)와 다숫따라 숫따(D34)에서는 10가지 지혜로 정착이 되었다. 무애해도에서는 73가지 지혜가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 술어로 사용되며 본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tassa me evaṃ jānato evaṃ passato kāmāsavāpi cittaṃ vimuccittha bhavāsavāpi cittaṃ vimuccittha avijjāsavāpi cittaṃ vimuccittha. vimuttasmiṃ vimuttamiti ñāṇaṃ ahos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abbhaññāsiṃ.
*ñāṇanti tisso vijjā. dassananti yaṃ ñāṇaṃ taṃ dassanaṃ. yaṃ dassanaṃ taṃ ñāṇaṃ.
*avijjāpaccayā saṅkhārāti ñāṇaṃ, asati avijjāya natthi saṅkhārāti ñāṇaṃ
② 빤냐(paññā)는 pra(앞으로)+√jñā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반야로 음역하고 있으며 지혜를 나타내는 술어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술어이다. 이 빤냐는 냐나와 거의 동의어라고 봐도 무방하지만 냐나가 지혜일반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빤냐는 통찰해서 아는 조금 특수한 영역을 나타내는 술어라고 봐야한다. 이것의 동사 빠자나띠(pahānāti)도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본서에서는 모두 ‘통찰지’로 옮겼다.
문자적으로 보면 그냥 피상적으로 대상을 분별해서 알거나(vijānāti, 위자나띠, 分知 ⇒ viññāṇa, 識) 뭉뚱그려 아는 것(sañjānā, 산자나띠, 합지 ⇒ saññā, 想)을 넘어서서 ‘앞으로 더 나아가서(pra-) 아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반야의 가장 초보적인 의미라 하겠다. 그래서 꽃들이 있구나(산자나띠)라거나 장미, 백합, 라일락이 있구나(위자나띠)라고 대상을 그냥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저 대상을 변하는 것으로(無常, anatta)알고, 그러기에 필경에는 고(苦, dukkha)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알며, 그러기에 어떤 불변하는 실체가 없는 것으로 (無我, anatta) 아는 것을 pajānāti라고 한다.
그 외에도 사제(四諦)를 안다든지 특히 긴 념처경(大念處經, D22)에서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알고(pajānāti) ∙∙∙’ 등의 공부짓는 과정에 중요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가장 눈여겨봐야 할 점은 ‘해탈했으면 해탈했다고 안다(pajānāti)’, 그리고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 옮기는 ‘yathābhūtaṃ pajānāti’ 등으로 초기경에서는 대단히 중요하게 쓰이고 있다.역자는 ‘통찰지’로 옮기고 있으며 ‘pajānāti’는 ‘꿰뚫어 안다’로 옮기고 있다. 이 술어는 빠띠웨다(paṭivedha, 통찰) – 빠띠윗자띠(paṭivijjati, 통찰하다)라는 단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만 봐도 통찰 혹은 꿰뚫음의 의미가 강하다.
*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tisso paññā — sekkhā paññā, asekkhā paññā, nevasekkhānāsekkhā paññā.
* “aparāpi tisso paññā — cintāmayā paññā, sutamayā paññā, bhāvanāmayā paññā.
*세 가지 통찰지[般若, paññā] - 유학의 통찰지, 무학의 통찰지, 유학도 아니고 무학도 아닌 자의 통찰지
*세 가지 통찰지 [般若, paññā] ― 생각으로 얻은 통찰지, 들어서 얻은 통찰지, 수행으로 얻은 통찰지
*Idaṃ dukkhaṃ ariyasaccanti me, bhikkhave, pubbe ananussutesu dhammesu cakkhuṃ udapādi, ñāṇaṃ udapādi, paññā udapādi, vijjā udapādi, āloko udapādi.
③ 아빈냐(abhiññā)는 abhi(향하여, 위로, 넘어서)+√jñā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불교에서 만들어진 술어 가운데서 접두어 ‘abhi’는 대부분 ‘수승한’의 의미가 있고 그래서 한문으로 勝을 써서 번역하고 있다.(예를 들면 Abhidhamma를 勝法으로 옮김) 문자적인 의미로 본다면 ‘위로 초월하여 안다’는 뜻이다.
아빈냐(abhiññā)는 일반적으로는 모든 종류의 신통을 나타낸다. 특히 찰아빈냐(chaḷabhi-ññā, 여섯 가지 초월지)는 육신통(六神通)으로 한역된 술어이다. 그러나 역자는 일반적으로 신통으로 옮기고 있는 ‘iddhi’와 구분짓기 위해서 아빈냐를 ‘초월지’로 옮기고, 잇디(iddhi)는 ‘신통’으로 옮긴다.
『아비담마 길라잡이』 에서는 ‘abhiññā’를 ‘신통지’로 옮겼다. 그러나 아빈냐는 신통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본서에서 “처음 禪을 닦는 것부터 시작하여 그 禪의 근접삼매가 일어날 때까지 계속되는 삼매의 수행을 도닦음(paṭipadā)이라 한다. 근접삼매부터 시작하여 본삼매까지 계속되는 통찰지를 초월지(abhiññā)라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것은 본삼매에서 생기는 지혜이므로 초월적이다. 서양의 ‘transcendental’과도 통하는 의미이다. 삼매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초월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신통이란 것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초월지’라 옮겼다. 물론 이 초월지에는 여러 가지 신통들도 다 포함된다.
④ 빠린냐(pariññā)가 있다. 이것은 pari(둘레에, 원만히)+√jñā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문자적인 의미대로 무엇을 ‘완전히, 철저히, 원만히 안다’는 뜻이다. 경에서 ‘모든 취착을 철저히 안다는 말(sabbupādāna – pariññā – vādā)’이라는 등으로 나타난다. 반야를 통해서 성취되는 지혜이다. 본서에서는 ‘통달지’로 옮기고 있다. 중부의 M43에 “빤냐(통찰지)는 무엇을 목적으로 합니까”라는 질문에 대해서 “빤냐(통찰지)는 아빈냐(초월지)를 목적으로 하고 빠린냐(통달지)를 목적으로 하고 빠하나(버림)을 목적으로 합니다.”라고 나타난다. 이처럼 아빈냐(초월지)와 빠린냐(통달지)는 빤냐(통찰지)가 있어야 개발되는 지혜라 할 수 있다.
*다음의 세 가지 통달지를 설명하고 있다.
“안 것의 통찰지(ñātapariññā, 知遍知) 조사의 통달지(tīraṇapariññā, 審察遍知) 버림의 통달지(pahānapariññā, 斷遍知)가 있다. 물질은 변하는 특징을 가지고, 느낌은 느껴진 특징을 가진다고 이와 같이 그 법들의 개별적인 특징을 조사함으로써 생기는 통찰지가 안 것의 통찰지이다.
물질은 무상하고 느낌은 무상하다는 방법으로 그 법들에게서 보편적인 특징을 제기한 뒤 생기는 보편적인 특징을 대상으로 가지는 위빳사나의 통찰지가 조사의 통달지이다. 이런 법들에서 영원하다는 인식 등을 버림으로써 생긴 특징을 대상으로 가진 위빳사나의 통찰지가 버림의 통찰지이다.”
그리고 이것의 동사 빠리자나띠(parijānāti)는 ‘철저히 안다’로 옮기고 있다.
⑤ 안냐(aññā)는 ā(이리로, 넘어서)+√jñā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경에서는 모든 번뇌를 멸한 구경의 경지를 나타내는 술어로 나타난다. 그래서 본서에서는 ‘구경지’ 혹은 ‘구경의 지혜’로 옮겼다. 즉 “생은 멸했다. 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바를 모두 다했다. 이제 이 이후에 다신 존재하지 않는다고 꿰뚫어 안다.”는 것을 경에서는 안냐(aññā)라고 부르고 있다. 그 외에도 동사 아자나띠(ājānāti)는 제자들이 세존의 법문을 ‘원숙하게 완전히 다 안다’고 할 때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탐욕은 마음의 오염원이다. 증오는 마음의 오염원이다. 미혹은 마음의 오염원이다’라고 오랜 세월을 이런 법을 설하셨습니다. [이것을] 저는 완전히 알고 있습니다.(M14/i.91)”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abbhaññāsi.
*aññā):f. [Sk. ājñā] 了知,完全智,開悟,已知. -citta 知解心,了知心. aññindriya 已知根.
*abhijānāti:[abhi-jānāti] 証知する,自証する. opt. abhijāneyya,abhijaññā; aor. abhiññāsi,abhijānissaṃ; ger. abhijānitvā,abhiññāya,abhiññā; grd. abhiññeyya; ppr. nom. sg. abhijānaṃ; pp. abhiññāta.
* 사전에서 앙냐(aññā)를 완전지라고 설명한다. 전재성도 앙냐(aññā)를 궁극적인 앎이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문맥적으로 적절치 않다. 만약 꼰단냐가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면 부처님은 꼰단냐에게 "그대는 괴로움의 종식을 위해 청정한 삶을 살아라!"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어로는 "understood"로 번역하였다.
*ājānāti:[ā-jānāti] 了知,很了解. = āññati. opt. ājāneyyuṃ; pp. aññāta.
* yadā bhagavā aññāsi kūṭadantaṃ brāhmaṇaṃ kallacittaṃ muducittaṃ vinīvaraṇacittaṃ udaggacittaṃ pasannacittaṃ,
*이 때 세존께서는 감흥어린 말로 이와 같이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 꼰당냐는 궁극적인 앎을 얻었다.'라고 읊으셨다. 그래서 존자 꼰당냐는 앙냐 꼰당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Atha kho bhagavā imaṃ udānaṃ udānesi—“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 aññāsi vata bho koṇḍañño”ti. Iti hidaṃ āyasmato koṇḍaññassa “aññāsikoṇḍañño” tveva nāmaṃ ahosi.
⑥ 이러한 특별한 영역의 지혜에는 포함시킬 수 없지만 주석서에서 지혜로 취급하고 있는 √jñā에서 파생된 중요한 술어로 삼빠자나(sampaññā)를 들 수 있다.
먼저 이것의 동사 삼빠자나띠(sampajānāti)부터 살펴보자.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빠자나띠(pajānāti)에다 다시 접두어 saṃ(함께)을 더 첨가한 것이다. 이것의 중성 명사형인 삼빠자나(sampajāna)는 sati(念)와 함께 쓰여서 사띠삼빠자나(sati – sampajāna)로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正念正知로 번역하고 있듯이 마음챙김의 공부에서 중요한 술어로 쓰이고 있다. 본서에서는 ‘분명하게 알아차림’으로 옮겼다. 특히 「긴 념처경」 에 “비구는 나아갈 때에도 물러날 때에도 분명하게 알면서(正知) 행한다(sampajāna – kāri).” 등으로 나타난다. 특히 율장에서 쓰여서 예를 들면 삼빠자나 무사와다(sampajānā – musā – vādā)라 하면 잘 알고 있으면서 고의로 거짓말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삼빠자나띠는 충분히 잘 아는 것, 고의성이 짙을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것을 뜻한다 하겠다. 이를 통해서 「긴 념처경」에 나타나는 알아차림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긴 념처경」 등에 나타나는 삼빠자나(sampajāna, 분명하게 알아차림)를 다시 주석서에서는 여성형 추상명사인 삼빠잔냐(sampajaññā)로 표기하여 위의 여러 추상명사와 동일한 계열로 표기하여 이를 지혜(ñāṇa)라고 설명하고 있다. 본서에서는 이를 ‘분명한 지혜’로 옮긴다.
이제 √jñā가 지혜가 아닌 일반적인 앎의 뜻으로 나타나는 술어들을 살펴보자.
⑦ 먼저 인식으로 옮기고 있는 산냐(saññā)는 saṃ(함께)+√jñā에서 파생된 여성명사이다. 이것의 동사 산자나띠(sañjānāti)는 일반적으로 ‘인식하다’는 의미인데 예를 들면 여러 다른 종류의 꽃들을 ‘꽃’이라고 합쳐서(saṃ) 인식하는 것, 즉 표상(表象)하고 지각하는 것을 뜻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식에는 소위 말하는 계열화작업이 들어가는데 수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해서 A1, A2, A3 등을 보고 우선 일차적으로 A라고 인식하고 지각하는 작용을 생각하면 접두어 saṃ(함께, together)이 쓰인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경과 주석서에서는 단순한 지각이나 표상작용만이 아닌 더 갚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니밋따(nimitta, 표상)나 빤냣띠(paññatti, 개념) 등과도 또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⑧ 알음알이로 옮기는 윈냐나(viññāṇa)는 vi(분리해서)+√jñā에서 파생된 중성명사이다. 중성명사형 어미 ‘-na’는 모두 진행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앞으로 나온 여러 단어들이 여성형 추상명사인데 반해서 윈냐나는 진행을 나타나는 중성명사형 어미 ‘-na’를 붙여서 만든 단어라는 것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동사형 위자나띠(vijānāti)는 문자 그대로 ‘분별해서 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면 한 곳에 놓인 여러 가지 꽃들을 보고 장미, 백합, 카네이션, 튤립 등으로 분리해서(vi-) 아는 것을 말한다 하겠다. 물론 장미니 백합이니 하고 인식하는 것 자체는 산냐이지만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는 말이다.
윈냐나(識)는 서양학자들이 ‘mere awareness’라고 이해하고 있듯이 개념작용(notion, 산냐)이 생기기 이전의 단계로 매찰나 대상을 접하는 순간순간 생기는(생겼다가는 멸하고 또 다시 다른 조건에 의해서 생겼다가는 멸하고를 반복하는) 그런 알음알이 작용(consciousness)을 뜻한다고 하겠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이것은 항상 찟따(citta, 마음, 心)와 동의어로 간주되며 감각기능과 감각대상과 더불어 찰나생∙찰나멸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동사로써 경에 많이 나타나는 산자나띠(sañjānāti)와 위자나띠(vijānāti)를 굳이 분별해서 말해본다면 어떤 대상들을 보고 저게 꽃이라고 인식하면 그것은 산자나띠라 할 수 있겠고, 저것은 장미꽃, 저것은 무슨 꽃이라고 분별해서 안다면 그것은 위자나띠라고 할 수 있겠다. 산자나띠와 위자나띠는 이처럼 서로 반대되는 기능을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산자나띠와 위자나띠 두 가지는 우리가 보통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표현한 말이라 보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본서 XIV. §§3-6에서 붓다고사 스님은 ‘sañjānāti – vijānāti – pajānāti’라는 의미를 중심으로 ‘saññā - viññāṇa – paññā’의 의미를 비유와 함께 설명하고 있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⑨ 그리고 아비담마에서 아주 중요하게 등장하는 빤냣띠(paññatti, 개념)도 이 어근에서 파생된 술어이다. 이것은 빠자나띠(pajānāti)의 사역형태인 빤냐빼띠(paññāpeti)에서 파생된 명사로 ‘알게하다, 선언하다, 지적하다, 인정하다, 정의하다’ 등의 뜻에서 ‘알게하는 것 = 개념, 정의, 이름’ 등을 뜻하며 아비담마에서는 82가지 법을 제외한 우리가 개념짓고 이름 붙여 아는 모든 것을 빤냣띠라고 한다. 마음과 마음부수들과 대상의 역동적인 관계를 통해서 산출된 것으로써 예를 들면 ‘자아, 인간, 컴퓨터, 책상, 산하대지, 꽃’등 우리가 이름붙여 아는 수많은 것들을 개념(빤냣띠)들이라 이해하면 된다.
⑩ 이와 유사한 술어로 윈냣띠(viññatti)가 있다. 같은 방법으로 이것은 위자나띠(vijānāti)의 사역동사인 윈냐빼띠(viññāpeti)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아비담마에서는 까야 윈냣띠(kāya – viññatti)와 와찌 윈냣띠(vaci – viññatti)로 정착되었다. 중국에서는 각각 信表와 言表로 옮겼으며 역자는 ‘몸의 암시’와 ‘말의 암시’로 옮겼다. 이는 각각 몸의 업(身業)과 말의 업(口業)과 연결된 중요한 술어이다.\
⑪ 그리고 본서에서는 아눈냐(anuññā)도 제법 나타나는데 부처님께서 사용해도 좋다고 허락하신 네 가지 필수품과 관련된 문맥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허용, 허락’ 등으로 옮겼다.
⑫ 그 외에 빠띤냐(paṭiññā)도 나타나는데 이는 ‘명제, 맹세, 약속, 서원’등으로 문맥에 따라 옮겼다.
(3) 견해(diṭṭhi)와 관련된 술어 및 단어들
초기경에서 자나띠(jānāti, 알다)라는 동사와 밀접한 관계로 나타나는 동사가 빳사띠(passati, 보다)다. 이런 자나띠 – 빳사띠(jānāti – passati)의 구문은 수행과 관련해서 아주 많이 나타나며 이 경우에는 예외 없이 향상 ‘자나띠 – 빳사띠(안다 – 본다)’의 순서로 나타나고 이것이 명사화되면 냐나닷사나(ñāṇa – dassana, 지와 견, 知見)로 정착이 되면 이것은 본서의 핵심인 다섯 가지 청정의 마지막 세 가지를 나타내는 술어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 상식으로는 먼저 보고(빳사띠, passati) 그 다음에 아는(자나띠 jānāti) 것이 순서일 것 같지만 경에서는 반드시 알고(jānāti) 본다(jānāti)는 순서로 나타남을 명심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경우 빳사띠(passati, 보다)와 닷사나(dassana, 견해, 확정적 견해)는 모두 지혜로 통찰한 것을 직접[눈으로]확인한다는 의미가 아주 강하게 내포되어있다. 그래서 알고 보는 구문으로 정착이 되고 지와 견으로 또 지견으로 정착이 된 것이다. 이것은 초기불교를 이해하는 생명줄과도 같은 술어이다. 그래서 5청정에서도 지견이라는 술어가 그렇게 강조되어 등장하고 있다.
빳사띠(passati)에다 접두어 vi(분리해서)를 붙인 위빳사띠(vipassati)도 경에 나타나며 이것의 명사형인 위빳사나(vipassana)는 우리가 잘 아는 술어이다. 위빳사나는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나의 다섯 무더기 안에서 [무상∙고∙무아인 법의 특징을] 뼈시리게 직접 체험, 확인, 체득한다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있다. 역자는 위빳사나의 의미를 살려 ‘위빳사나 한다’로 옮겼다.
「긴 념처경」 등 수행에 관계되는 경에서 나타나는 아누빳사띠(anupassati, 관찰하다, 隨觀하다)도 몸 느낌 마음 법을 바로 지금 여기서 직접 알고 체험한다는 뜻이다. 역자는 ‘관찰하다’로 옮기고 있다. 사마누빳사띠(samanupassati)라는 또 다른 술어가 있다. 더 면밀히 더 세밀히 관찰한다는 의미에서 역자는 ‘면밀하게 관찰하다’로 옮겼다.
한편 빳사띠(passati)의 명사로는 경과 주석서에 두 가지로 나타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딧티(diṭṭhi)와 닷사나(dassana)이다. 경에서는 닷사나(dassana)라는 단어는 냐나 – 닷사나(ñāṇa – dassana)의 구문 외에는 그렇게 많이 나타나지 않고 주석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면 딧티(diṭṭhi)와 닷사나(dassana)의 차이는 무엇일까? 딧티(diṭṭhi)는 단독으로 쓰이면 거의 대부분 잘못된 견해(邪見)를 나타낸다. 물론 여기에 삼마(sammā)라는 접두어가 붙으면 삼마딧티(sammā – diṭṭhi) 즉 바른 견해(正見)라는 의미가 된다. 특히 가따(gata, 간)라는 어미가 첨가되어 딧티가따(diṭṭhi – gata)로 나타날 경우 ‘사견에 빠진’이란 의미를 내포한다.
그러나 닷사나(dassana)는 불교에서는 대부분 ‘바른 견해, 확정된 견해, 분명한 견해’를 뜻하고 다른 외도를 지칭하면서 사용될 경우는 그들의 확정된 사상이나 철학적 견해라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현대 인도에서 닷사나의 산스끄리뜨인 다르샤나(darśana)는 철학(philosophy)으로 옮기고 잇다. 자이나에서는 그들의 제일 신조인 ‘바른 다르샤나(sammā – darśana, Pāli. sammā – dassna)’를 ‘바른 믿음(right belief)’으로 옮기기도 않다. 이와 같이 닷사나는 단순한 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 신조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본서에서는 dassana를 문맥에 따라 ‘봄, 확고한 견해’ 등으로 옮기지만 봄은 단순한 봄이 아니라 바른 믿음, 확고한 견해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냐나닷사나는 ‘지견(知見)’ 혹은 ‘지와 견’으로 옮긴다.
우선 지혜와 견해에 대한 술어를 이만큼이라도 이해해두자. 초기경을 보는 시야가 넓어지리라 확신하며 초기불교 수행을 접하는 우리의 태도도 더 깊어질 것이다.
한편 ‘안다’는 동사로 √vid(to know)를 빼놓을 수 없는데 불교에서는 웨다나(vedanā, 느낌, 受)가 이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며 무명으로 옮기는 아윗자(avijjā)와 영지로 옮긴 윗자(vijjā, 明)도 이것에서 파생되었다. 또한 기술이나 지식으로 옮기는 vijjā도 여기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처럼 √vid는 안다기보다는 직접 ‘경험한다, 체험한다’는 의미가 강하다 하겠다. 그러나 √vid에서 파생된 단어들은 √jñā의 경우처럼 전체적인 통일 속에서 특별한 전문적인 술어로 정착된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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