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와다 전승은 인간적인 부처님이라는 개념을 지키고 있는 반면, 대승(Mahāyāna)학파는 부처님의 신격화라는 개념을 발달시켰습니다. 전형적인 예가 부처님은 3개의 몸(kāyas), 즉 화신(Nirmāṇa-kāya, 우리가 볼 수 있는 늙고 변하는 몸), 보신(Sambhoga-kāya, 다른 세계에서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고 계시는 부처님의 참 몸), 법신(Dharma-kāya, 부처님의 본질)를 갖고 있다는 삼신(Trikāya)이론입니다. 불교철학이라는 말은 넓은 의미로 부처님에 관련된 모든 종류의 연구를 뜻합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는 부처님에 대한 개념의 전개입니다.
후대의 빨리어 주석서에서 우리는 세 종류의 부처님, 즉 성문보살(sāvaka-bodhisatta), 연각보살(pacceka-bodhisatta), 대보살(mahā-bodhisatta, 혹은 전지보살<sabbaññu-bodhisatta>)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정등각자(Sammā-sambuddha)가 되기 위하여, 믿음(saddhā)이 있는 보살(bodhisatta)은 16 아승지(asaṅkheyya, 무수한 시간)를 더한 100,000 겁(kappa, 긴 시간) 동안 생사윤회를 받아야 하며, 힘(viriya)을 가진 보살은 8 아승지(asaṅkheyya)를 더한 100,000 겁(kappa) 동안 생사윤회를 받으며, 지혜(pañña)가 있는 보살은 4 아승지(asaṅkheyya)를 더한 100,000 겁(kappa) 동안 생사윤회를 받는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발달된 이런 종류의 이론의 목적은 분명히 부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려는 목적입니다. 밀린다왕문경(Milindapañha sutta)에 따르면 하나의 우주에 하나의 부처님만이 필요할 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빨리어 불교에서 이런 종류의 보살 이론은 여성의 권리를 차별하기 위하여 이용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태어날 수 없는 18가지 역겨운 상태 중 하나가 여자의 형상(itthibhāva),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여자 노예의 자궁(dāsiyā kucchimhi)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제2차 불교 결집에 관한 것으로 되돌아가겠습니다. 티벳어 자료를 포함하여 북방의 전승 자료에 의하면, 대천(Mahā deva)스님이 제기한 다섯 가지 항목에 관하여 스님들 사이에서 다른 의견이 있었으므로 그 결집이 소집되어야만 했습니다. 테라와다 아라한에 대한 그의 다섯 가지 비판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라한도 유혹당할 수 있다. (atthi arahato rāgo ti).
아라한도 세속에 관해서는 모르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aññāṇaṁ nañāṇa).
아라한도 어떤 일에 관하여 의혹(kaṅkhā)이 생길 수 있다.
아라한은 다른 사람의 도움(paravitāraṇa)으로 아라한과의 자각을 얻는다.
성도의 길은 괴롭다는 놀라움의 외침으로 얻어진다. (aho).
그러므로 북방의 전승에 따르면, 아라한을 다르게 이해하는 이 다섯 항목으로 인해 두 종파의 분열이란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합니다.
반면 테라와다 전승은 비계율적 수행의 10개 항목을 분열의 이유로 삼고 있습니다. 빨리어 전승은 대천에 의해 제기된 도전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북방 전승에서 그 아라한에 대한 것이 상가 분열의 주요 원인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더 나아가 아라한 대신 보살의 개념을 발달시켰습니다.
대천(Mahā deva)의 논쟁은 티벳어와 북방의 자료에서뿐만 아니라, 빨리어 논사 주석서(Kathāvatthu aṭṭakathā)와 같은 빨리어 자료에서도 발견됩니다. 중요한 것은 상가 안에서 이미 한 사람 혹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부처님이 돌아가신 100년 후에 자신들의 이상이었던 아라한에 도전하였다는 것입니다. 대천(Mahā deva)이란 이름으로 대표되는 이 사람들에 따르면 아라한은 완벽한 사람이 아닙니다. 괴로움(dukkha)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3) 심화된 상가의 분열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제2차 불교 결집 후에 상가는 분열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더욱 분열하게 되었고, BC 3세기에는 1개의 청정교단인 테라와다와 17개의 부파가 존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 중에서 두 세 부파만이 불교 경전을 자체적으로 보존하여 전했지만 완전하게 삼장을 갖춘 것은 아니었고, 오직 청정교단인 테라와다에서만 완전한 삼장(Tripitaka)을 갖추고 있습니다.
대중부(Mahāsaṅghika)는 두 개의 모음집(Sutta와 Vinaya)을 보존했습니다. 그러나 율장(Abhidhamma piṭaka)은 편찬하지 못했습니다.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는 부분적으로 완전하지 못한 삼장을 보존했습니다. 반면 테라와다(Theravada)는 경(Sutta), 율(Vinaya) 그리고 논(Abhidhamma)을 완전하게 보존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우리는 공통의 자료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학문에서 경(Sutta)과 율(Vinaya)의 원전이 무슨 언어로 보존되었는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또한 논(Abhidhamma)이 언제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 모릅니다. 다만 BC 3세기에 논사(Kathā vatthu)의 저작을 완성했다는 것을 알 뿐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언어로 경(Sutta)과 율(Vinaya)의 공통 자료에 의거하여 삼장(Tripitaka)의 형식을 합송하여 전하는 구두로 완성시키는데 200년이 걸렸다는 것은 말할 수 있습니다.
상가가 분열하게 되었을 때, 각 부파는 수중에 공통 자료(Sutta와 Vinaya)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것들 중 극히 소수만이 보존되었습니다. 대중부(Mahāsaṅghika)와 S설일체유부(arvāstivāda)는 웨다(Veda) 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그것들을 보존했습니다. 최초의 산스크리트 본이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티벳어와 중국어 자료의 번역본은 아직 보존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Theravada)는 이것을 부처님이 쓰셨던 인도의 방언으로 보존하였습니다. 그 언어가 무엇이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언어학적 노력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사셨던 마가다(Magadha) 지방의 방언인 마가디(Magadhi)어 일수도 있습니다. 현재의 빨리어가 그것과 동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현재의 빨리어는 웃제니(Ujjeni)와 산치(Sañchi)같은 인도의 서쪽 지역의 방언들에 더욱 가깝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이나교(Jaina) 성전을 활자화 하는데 사용된 쁘라끄리뜨(Prakrit)라는 혼합된 방언일 수도 있습니다.
상가 분열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이해로부터,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무슨 근거로 우리는 테라와다 전승이 불교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대부분의 학자들은 테라와다가 불교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순수한 형태라고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테라와다는 그들의 전승 안에 가장 오래된 교리들, 체계적이고 완전한 삼장(Tripiṭaka)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빨리 율장과 주석서를 참조하여 제2차 결집 기사의 구성을 정리해 보면,
① 부처님 입멸 백년 후 시수나가(Sisunāga) 왕조의 깔라소까(Kālāsoka) 왕 제위시에 웨살리의 왓지족 출신(왓지뿟따까) 비구들이 10가지 항목들에 대해 자유롭게 행하게 됩니다. 야사 장로(Yasa)가 웨살리에 갔다가 포살일에 그곳 비구들이 대중들 한 가운데 물을 가득 채운 발우를 놓아두고 재가자들에게 상가의 필수품을 구입하는 데 쓰기 위해 금·은을 그곳에 넣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② 계율에 철저한 서인도 출신의 야사 장로는 왓지족 출신 비구들이 재가자에게 금·은의 보시를 받는 것을 보고 그것을 부정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재가자들을 독려하며 금·은의 보시를 계속 받게 됩니다.
③ 야사 장로가 재가자에게 금·은을 보시하는 것을 비판하자,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그에게 하의갈마(paṭisāraṇiya kamma, 출가자가 재가자에게 참회를 구하는 의식)을 요구했습니다. 야사 장로는 그들에게 계율상 하의갈마를 받은 비구는 수반(隨伴) 비구(anudhuta bhikkhu)를 동행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들어 자신에게 수반 비구를 보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④ 야사 장로는 수반 비구와 함께 웨살리에 들어가 재가자에게 자신은 “비법을 비법이라고 말하고, 법을 법이라고 말한다. 비율을 비율이라고 말하고, 율을 율이라고 말한다.”라고 하며, 금은에 대한 비법을 설명하였습니다. 그런 후 부처님 생전시의 네 가지 화제를 예로 들면서 일찍이 부처님은 ”사문이나 붓다의 제자들이 금·은을 받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고 말한 것을 웨살리의 재가자에게 전합니다. 이에 재가자들은 웨살리의 왓지족 출신 비구들보다는 야사 장로의 진정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⑤ 웨살리의 재가자는 야사 장로를 「석가모니의 출가 제자」라고 인정하고,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그렇지 않다고 알게 됩니다.
이와 같이 결과적으로 야사 장로는 하의갈마를 행하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의 정당성을 재가자에게 주장한 것이 됩니다. 즉 이 행위는 그들이 속한 상가에서 보면, 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되고, 상가의 결정에 불복한 것이 됩니다. 「탁마건도」에 의하면, 그러한 비구는 거죄갈마(ukkhepaniyakamma)를 실시해 상가와 불공수(asambhoga, 다른 스님들과 같이 식사할 수도, 잠잘 수도 없는 것)하도록 하는 벌을 내릴 것을 율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⑥ 수반 비구에게 그러한 자초지종을 들은 웨살리의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이번에는 비구들을 소집하여 놓고 야사 장로에게 거죄갈마(ukkhepaniya-kamma)를 행하라고 다그칩니다.
그러자 야사 장로는 신통으로 허공으로 올라 꼬삼비에 가서, 다른 지역에 있는 비구들에게 사자후를 토하듯이 도움을 요청합니다. “존자들이여! 이리로 모여 주십시오. 이 논쟁(adhikaraṇa)에 참가해 주십시오. 이미 비법이 빛나고 바른 법이 배제되었습니다. 비율이 빛나고 바른 율이 배제되었습니다. 이미 비법을 말하는 사람이 힘을 가지고, 바른 법을 말하는 사람이 약해졌습니다. 비율을 말하는 사람이 힘을 가지고, 바른 율을 말하는 사람이 약해졌습니다.”
야사 장로는 다문이며, 전승자이며, 지법자이며, 지율자이며, 현자였기 때문에 많은 지지자가 나타났습니다.
⑦ 야사 장로는 아호강가(Ahogaṅga) 산에 머무르고 있는 삼부따 사나와시(Sambhūta Sānavāsi) 장로를 방문하여 웨살리에서 행해지고 있는 비계율적인 10가지 항목에 관하여 상세하게 전합니다. 삼부따 사나바시 장로도 이것들이 비법이라는데 동의하였습니다. 그 때 빠테이야(Pātheyya, 서쪽 인도)로부터 60명의 비구들이 아호강가 산에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모두 삼림거주자(森林居住者)이며, 걸식자이며, 분소의자(糞掃衣者)이며, 삼의자(三衣者)이며, 아라한이었습니다. 아완띠(Avanti)와 닥키나빠타(데칸 남로) 지방으로부터도 88명의 비구들이 아호강가 산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 장로들은 소레이야(Soreyya: 마투라의 동쪽 지방)에 거주하고 있던 레와따(Revata) 대장로를 떠올립니다.
⑧ 그 때 소레이야에 거주하고 있던 레와따 대장로는 천이통으로 장로들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논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을 피해서 여러 곳으로 이동하다가, 사하자띠(Sahajāti)에서 장로들과 만나게 됩니다.
⑨ 야사는 레와따 대장로에게 열 가지 항목의 합법성에 대해 질문했습니다. 레와따는 열 가지 항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들어본 뒤, 단호하게 그것을 비난하고, 논쟁에 참가하겠다고 약속합니다.
⑩ 한편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이 논쟁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버려서 귀찮은 생각이 들어 레와따 대장로에게 사태의 수습과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동의를 위해 출가자의 필수품을 준비해서 대표단을 보냅니다.
⑪ 그때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살하(Sālha) 장로는 선정 중에 “빠찌나(Pācīna, 동쪽 인도)의 비구들은 비법설자이며, 빠테이야(Pātheyya, 서쪽 인도)의 비구들이야말로 여법설자이다.”라고 생각하며, 정거천 신들과 대화하고, 신들도 그의 생각에 동의를 표시합니다. 그러나 적당한 때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합니다.
10가지 항목의 논쟁을 동쪽의 비구와 서쪽의 비구의 분쟁으로 2분화해서, 동쪽의 비구가 비법을 말하고, 서쪽의 비구가 여법을 말한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의 단계에서 야사 장로 측과 왓지족 출신 비구들과의 대립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돌연 여법설자 측과 비법설자 측의 대립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상가가 동쪽과 서쪽으로 갈라져 동쪽의 비구들이 비법설자라고 결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⑫ 웨살리의 밧지족 출신의 비구들은 레와따 장로를 찾아가 준비해 온 출가자의 필수품을 건네주려고 하지만 거절당합니다. 그래서 웨살리의 비구들은 레와따 장로의 제자인 웃따라(Uttara) 비구에게 출가자의 필수품을 건네줍니다. 웃따라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그들의 권유를 못 이기고는 한 벌의 가사를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비구들은 웃따라 비구에게 “모든 부처님(佛世尊)은 동방의 국토에서 태어나셨다. 동쪽의 비구들이야말로 여법설자이며, 서쪽의 비구들은 비법설자이다.”라고 레와따 장로가 말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⑬ 웃따라 비구는 레와따 장로에게 이 말을 전하지만, 레와따 장로는 「너는 나에게 비법을 재촉했다」라고 하며 웃따라 비구를 떠나게 합니다. 웃따라 비구는 그 말을 왓지족 출신 비구들에게 전하자, 하는 수없이 왓지족 출신 비구들은 웃따라 비구를 스승으로 받들기로 합니다.
⑭ 이후로 갈라진 양자를 화합시키는 절차를 행하게 됩니다.
상가는 레와따 장로의 제의로 그 논쟁의 판결을 내리기 위해 웨살리로 갔습니다.
상가 대중들이 모이자 레와따 장로는 곧바로 논쟁에 대한 판결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⑮ 그때 삽바까미(Sabbakāmi)라는 대장로가 웨살리에 있었는데, 이 대장로는 아난다의 제자로 법랍이 120년이었습니다. 레와따 장로는 먼저 삽바까미 대장로를 찾아갑니다. 뒤따라 아호강가 산에 머물던 삼부따 사나와시(Sambhūta Sānavāsi) 장로도 그곳에 방문합니다.
⑯ 삼부따 사나와시 장로가 문제점들을 삽바까미 대장로에게 설명하자, 삽바까미 대장로는 “동쪽의 비구들은 비법설자이며, 서쪽의 비구들이 여법설자이다.”라고 판정합니다. 이에 삼부따 사나와시 장로도 동의를 표합니다.
드디어 10가지 항목을 둘러싼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비구들이 다 모였습니다.
⑰ 상가는 논쟁에 대한 판결을 내리려고 모였지만, 끝없는 논의가 되풀이 됩니다. 그래서 레와따 장로는 단사인(ubbahika, 斷事人, 분쟁을 조정해 화해시키는 직무를 행하는 자, 중재위원)을 선출해서, 논쟁을 진정시킬 것을 제안합니다. 그렇게 해서 동쪽과 서쪽 비구들로부터 네 사람씩 총 8명의 단사인이 선출됩니다.
율장의 건도부에는 이와 같이 끝없는 논의(anaggani bhassani)가 생길 경우에, 단사인을 선출하는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가가 분열 상태에 있는 것을 화합시키는 경우에는 통상의 다수결보다 단사인 선출로 전원 일치의 결론으로 상가의 화합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⑱ 즉, 8명은 삽바까미(Sabbakāmi), 살하(Sālha), 쿳자소비따(Khujjasobhita), 와사바가미까(Vāsabhagāmika), 레와따(Revata), 삼부따 사나와시(Sambhūta Sānavāsin), 야사(Yasa), 수마나(Sumana), 그리고 좌석 배정의 책임을 맡은 아지따(Ajita) 등으로 구성된 단사인에게 이 논쟁의 판결을 위임했습니다. 그리고 700명의 비구들은 웨살리에 있는 왈리까라마(Vālikārāma)가 이 논쟁을 진정시키는 장소로 적당하다고 하여 그곳으로 모두 갔습니다.
레와따 장로의 사회로 갈마가 이루어졌습니다. 레와따 장로가 10가지의 항목 하나 하나를 물으면, 삽바까미 대장로가 그것들을 빠띠목카(Pātimokkha, 戒本)의 조항과 대조하면서 대답하는 형식이었습니다.
⑲ 삽바까미 대장로는 각 항목의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한 율에 근거하는지를 설명한 후에, 그에 대한 정(淨)·부정(不淨)을 가렸습니다. 단사인들의 합의를 거쳐 이러한 것들을 재가하게 되고, 의장인 레와따 장로는 비법, 비율이라고 결정 난 것을 최종적으로 젓가락을 던져(salakaṁ nikkhipami) 확정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열 가지 항목에 대한 모든 판정이 행하여졌습니다. 상법정(常法淨) 이외의 9가지 항목이 모두 율에 저촉되는 행위로 판정됩니다. 상법정은 경우에 따라 인정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이들 열 가지 항목은 상가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들은 모두 비법(邪法)이며, 비율(邪律)이며 스승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라고 하며 열 가지 항목에 대한 모든 심의가 끝납니다.
⑳ 마지막에 레와따 장로는 10가지 항목의 결착을 선언합니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논쟁(adhikarana)을 진정시키는 것이 빨리율 주석서에서 설명하는 제2차 결집의 목적이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상가 분쟁은 있어도 결론을 도출시켜 분쟁을 진정시킬 수 있었기에 파상가는 되지 않도록 노력한 것입니다.
부처님 없는 상가의 자주적 운영에서 부처님의 법과 율을 둘러싼 분쟁은 불가피하지만, 상가 내의 분쟁의 진압과 파상가의 회피를 통해서 부처님이 없어도 상가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보여줍니다.
㉑ 이 논쟁을 계기로 웨살리에 운집해있던 700명의 장로들은 경과 율의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결집을 다시 실시했던 것입니다. 이 제2차 결집은 제1차 결집 때 확정된 부처님의 담마(Dhamma)와 위나야(Vinaya)를 다시 확인하고 확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롭게 경전이나 율장을 만든 수도 없고, 경도 율도 결코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재확인했습니다.
이 결집은 깔라소까(Kālāsoka) 왕의 재위 10년, 기원전 386년에 8개월 동안 행해졌고, 700명의 장로들이 모여서 행한 결집이기에 칠백결집이라고도 부릅니다.
제 3차 불교 결집
모처럼 빈틈없이 확정한 성전도 바꾸려고 하고 자신들의 주장대로 펼쳐 나가려고 하면서 제2차 결집으로부터 아소까왕이 나올 때까지의 근 백년간 부파의 분열은 원래대로 돌아가기는커녕 더욱 더 분열해 버렸습니다. 대중부는 한층 더 몇 개의 부파로 분열되고, 북서 인도에서는 설일체유부가 생겨나 남서 인도의 원 줄기인 테라와다로부터 분리되어 헤어져 버렸습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원래의 테라와다란 한 줄기로부터 17개의 부파로 분리된 것입니다. 디빠왕사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테라와다는 거대한 니그로다 나무와 같이 가장 뛰어나다. 모자라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은 최고의 승리자의 가르침이다. 마치 나무에 있는 가시와 같이 나머지 17개 부파들이 생겨난 것일 뿐이다.”
중요한 부파의 이름이 몇 개 있습니다. Sarvāstivāda(설일체유부), Sautrāntika(경량부), Śalia(산주부), Prajñāptivāda(설가부), Vetulya(Vedula, Vedala, 방광부)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 만의 경전을 갖고 있는 부파들입니다. 테라와다는 유일하게 암송에 의해 전승돼 온 빨리어 경전 삼장 전체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부파들은 산스크리트어로 경전을 보존하고 다른 언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빨리어, 산스크리트어, 티벳어, 중국어 같은 5, 6개의 다른 언어로 된 율장과 경들이 현재 존재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입멸 218년 후에 즉위한 아소까 왕은 갠지스와 인더스의 양대 강을 포함한 인도 북부를 정복하고 마우리야 왕조의 제3대 왕이 되어 데칸 산맥의 인도 남부까지 정복하여 인도 전 국토를 지배했습니다. 아소까 왕의 시대는 정치, 사회, 경제적인 면에서 비교적 안정되었던 시기여서, 이것이 종교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상가의 구성원들은 함께 지켜야 할 오직 하나의 율장이 존재하는데, 출가자는 이 공통의 율을 지키는 것으로 같은 소속감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역적인 확장에 의한 지방적 특성이나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어난 현실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각각의 지역에서 각각의 율장을 가지게 되면서, 각기 다른 부파로서의 자각을 갖게 되고, 다른 집단으로서 독립된 행위를 하는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즉,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끼리 각 지역을 중심으로 상가를 구성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분열하지 않은 하나의 테라와다와 제각기 분열한 17개의 분파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소까왕은 스스로 깊이 불교에 귀의하였지만 교단이 점점 부파로 분열하고, 많은 부파에서 경이나 율이 자의적으로 편찬되어, 불교가 서서히 쇠퇴해 가는 상태를 걱정하여 마우리야 왕조의 수도 빠딸리뿟따에서 부처님의 바른 말씀을 따르는 종파를 찾아내기 위하여 BC 3세기에 제3차 결집을 소집할 것을 상가에 권유하였습니다.
제3차 결집은 불교교단 내부의 교리적 분쟁을 원인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불교교단 내부에 들어온 외도들에 의해 생겨난 혼란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즉 아소까 왕의 불교귀의 이후 왕가의 후원이 불교에 집중되자 많은 외도들이 왕가의 후원을 얻기 위해 불교에 귀의하게 되면서 교단에 내부적으로 교리적 계율적 혼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바른 빅쿠들은 승려인 척 행동하는 외도들과 함께 포살하는 것을 거부하게 되어 7년 동안 아소까라마(Asokārāma) 사원 등에서는 포살이 중단되었습니다.
이에 장로들은 아소까왕의 이 권유가 시기에 맞고 이치에 맞아, 적어도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는 제3차 결집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의 사서에 이 제3차 결집의 기사가 자세히 기록됩니다.
대조적으로 대중부를 비롯한 부파 계통의 사서에는 제2차 결집의 기사는 실려 있지만, 이 제3차 결집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을 바꾸고 불교의 정신과 빅쿠의 출가 생활을 어지럽혀 아소까왕의 권유와 후원에 의해 실시된 제3차 결집에서 배척되어 버렸기에 나쁜 것을 기록하고 싶지 않았던지, 대중부계를 비롯한 각각의 부파가 이 후에 급속히 쇠약해져서 기록하는 여력조차 없어졌든지 이 3차 결집이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소까왕 시대에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에서 분열했던 북서 인도의 설일체유부도 자파의 사서에 아소까왕의 사적을 많이 싣고 있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니라 앞의 제2차 결집과 아소까왕의 제3차 결집을 함께 적어 「불멸 백년 후 아소까왕의 시대에 제2차 결집을 실시하여 테라와다와 대중부의 2개파로 분열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설일체유부도 아소까왕과 견해가 맞지 않았던 것인지 기록의 실수인지 설일체유부가 없어진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붓다왕사(Buddhavaṁsa, 불종성경)와 마하왕사(Mahāvaṁsa, 대사, 대왕통사)에 의하면, 아소까 왕은 당대의 가장 탁월한 빅쿠 스님인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에게 자문을 구했습니다.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왕에게 상가의 이상적인 형태로서 위밧자와다(Vibhajjavāda)라는 분별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기준점으로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은 각 부파의 대표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부처님은 어떻게 담마를 설하였는가를 물어, 부처님은 담마를 분별하여 가르친 분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 질문을 했습니다. 예라고 답한 사람들만 교단에 머물게 하고, 그렇지 못하고 단멸론이나 상주설 등 삿된 견해를 지니고 이설을 주장하는 자에게는 빅쿠가 아니라고 선언한 후 흰옷을 입혀 환속시켰습니다. 그 수가 무려 6만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교단은 다시금 통합되고 교설은 청정해지게 되었기에 상가는 모여서 포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이렇게 승인된 수많은 빅쿠 중에서 오랜 경험으로 확신에 차있고, 여섯 종류의 신통력을 갖추었으며, 삼장에 능통하고, 무애해도를 갖추고, 삼명을 구족한 천명의 빅쿠들을 선발하여 법과 율을 다시 확인하고, 모든 이설을 까타왓투(Kathāvatthu)라는 논서를 설하여 논파하고 청정하게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천명의 빅쿠들에 의해 빠딸리뿟따의 아소까라마에서 불멸 후 236년 음력 9월 보름 안거해제일인 자자(Pavāraṇā)날까지 9개월에 걸쳐 법의 결집을 행하였습니다. 이 결집을 제3차 결집이라고 합니다.
한편 설일체유부의 승려들은 이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은 과거 현재 미래(sabbaṁ asti; atthi)에 존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테라와다는 현재의 순간만이 존재하는 것을 유일하게 입증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후에 대승불교에서 나가르주나(Nagarjuna, 용수)는 설일체유부의 그릇된 관점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연기법에 뿌리를 둔 공(sunyatā) 사상에서 나가르주나는 아무것도 스스로에 의존해서는 존재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견해의 사람들을 소승(Hinayana)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소승(Hinayana)이라는 말은 설일체유부를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를 주장한 유일한 부파였기 때문입니다.
테라와다의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를 의장으로 한 이 제3차 결집의 특징은 경장과 율장의 재확인뿐만 아니라, 이 때 처음으로 논장 아비담마의 편찬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것은 빨리 아비담마 7론의 마지막 「논사」이므로 이때까지 논장도 거의 정리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빨리 성전의 논장인 아비담마는 경전의 엣센스를 분류하여 집성한 것으로 경전의 가르침을 한 발자국도 바꾸는 것이 아니지만, 주로 제자들의 손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경장이나 율장과 달리 부처님의 직설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면도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 제3차 결집까지는 어느 논장도 이름마저 기록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논사」성립의 사정이 특수하기 때문인지 여기에 이름이 나왔습니다. 이 논장은 부처님 이래의 성전으로부터 빗나간 여러 가지 이견·사악한 견해를 한 개씩 비판하며 논파한 논문입니다. 그 견해의 수가 216가지에 이릅니다. 이것은 불멸이후로부터 2백여년이란 기간 동안 그만큼 많은 이설이 배출되고 성전이 삐뚤어져 제자들이 여러 가지 부파로 분열해 버렸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제2차, 제3차 결집까지 부파가 계속 분열했고, 많은 부파에서 성전도 자의적으로 개편되고 있었기 때문에 「현존하는 빨리 성전도 시대와 함께 상당한 변천을 거쳐 왔을 것이다」라고 학계에서는 잘못되게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해서 기록을 읽어 보면 대부분의 부파가 성전을 개편하는 중에도, 단 1줄도 경장과 율장을 바꾸는 일 없이 완고하게 지켜온 파가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 파는 남서 인도의 테라와다입니다. 그들은 지금도 빨리 성전을 계속 보관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어떠한 개편을 받은 흔적도 없으니 당연히 제3차 결집 때에도 전혀 개편된 것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빨리 성전도 개편되었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어떤 증거에 근거하는 올바른 추측이 아니라 단순한 억측이라는 것이 됩니다.
제3차 결집에서 아소까 왕은 담마를 전 세계에 전파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아소까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앞으로 또 다시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혼란이 없기를 바라며 포교승을 파견할 9개국을 선택하였습니다.
서쪽으로는 요나까(Yonaka, 지금의 그리스 지방) 사람인 담마락키따(Dhammarakkhita) 장로를 아빠란따까(Aparantaka, 인도 서해안) 지역에, 더 아래 서쪽으로는 마하담마락키따(Mahādhammarakkhita) 장로를 마하랏타(Mahāraṭṭha, 데칸산맥 서북부) 지역에, 더 나아간 서쪽으로는 마하락키따(Mahārakkhita) 장로를 요나까 지방(Yonakaloka, 서북쪽 인도 국경지역)에 보내었고,
북쪽으로는 맛지마(Majjhima) 장로를 히마완따(Himavanta, 히말라야 지방인 지금의 네팔) 지역에 보내었고, 동쪽으로는 소나까(Sonaka) 장로와 웃따라(Uttara) 장로를 수완나부미(Suvaṇṇabhūmi, 지금의 캄보디아, 태국, 인도네시아, 버마 남부)에 파견하였습니다.
남쪽으로는 마하데와(Mahādeva) 장로를 마히사까만달라(Mahisakamaṇḍala, 데칸산맥 동남부) 지역에, 더 아래 남쪽으로는 자신의 동주(Saddhivihārika)제자인 마힌다(Mahinda) 장로와 잇디야(Iddhiya) 장로와 웃띠야(Uttiya) 장로와 삼발라(Sambala) 장로와 밧다살라(Bhaddasāla) 장로를 땀바빤니(Tambapaṇṇi, 스리랑카)에 보내었고, 서남쪽으로는 락키따(Rakkhita) 장로를 와나와시(Vanavāsi, 데칸산맥 서남부)지역에, 서북쪽으로는 맛잔띠까(Majjhantika) 장로를 까슈미라 간다라(Kasmīragandhāra, 지금의 페샤와르와 라왈삔디 지역)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립하여 전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의 제안으로 상가에서 결정하여 각 지역에 파견된 장로들은 각각 다른 4명의 동료들과 함께 그곳에 도착하여 중생들의 깨달음을 위하여, 그리고 각 지역에 부처님 가르침의 확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그러므로 제 3차 결집의 중요성은 분열된 상가의 단일 교단으로의 정화와 불교 역사상 처음으로 인도의 영역을 넘어 포교단을 파견한 일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매우 중요합니다.
테라와다라는 말은 제3차 결집 후에 대중적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그렇다고 제3차 결집 이후를 테라와다의 시작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테라와다 사람들은 그들의 기원은 적어도 제2차 결집을 주도했던 Sthaviravāda(장로의 견해)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부처님 시대까지 이른다고 말합니다.
한편 대승불교는 우리가 이용 가능한 어떤 역사적 자료에 의하든, 지금까지 대승(Mahayana)의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북전의 자료에서 설일체유부는 3차 불교 결집 이후 인도의 북쪽 지방을 행동의 중심지로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결국에는 대승(Mahayana)운동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설일체유부는 불교 사상을 확장하고, 마지막으로 대승이 일어난 곳으로 확장하는데 기여했습니다.
불교역사는 이때부터 테라와다의 중심지가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테라와다 불교가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인도에서 고사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전히 인도에 남아 있었습니다.
인도의 테라와다 사람들의 활동에 대한 증거들은 약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처님 입멸 후 인도에서 쓴 유명한 3권의 책이 기원전 3세기에 스리랑카에 소개되었습니다. 그 책들의 이름은 (1)Nettipakarāṇa(수행 안내서, 指導論) (2)Peṭakopadesa(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입문서, 藏釋論) (3)Milindapañhā(밀린다왕문경)입니다. 이 경전들은 현재 빨리어 문헌에 포함되어 있으며 ‘후 빨리어경전’ 텍스트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처음 두 책은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밀린다왕문경(1~88 pp. PTS본)의 처음 부분 역시 기원전 1세기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반면 그 책의 두 번째 부분(90~420 pp.)은 아마도 기원후 1세기에 테라와다 사람들에 의해 덧붙여졌을 것입니다. 밀린다왕문경의 앞부분은 중국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아소까 왕의 공헌은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에 의해 시작된 포교활동을 후원한 것입니다. 포교단들은 스리랑카, 캄보디아, 버마를 포함하여 9개국에 보내졌습니다. 그 중 가장 성공적인 경우는 스리랑카였습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마하왕사와 붓다왕사 같은 스리랑카 역사의 기술가들은 불교가 스리랑카에서 꽃피우도록 운명 지어진 이유를 입증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마하왕사에 의하면 부처님은 스리랑카를 몸소 3번 방문하셨으며, 제석천(Sakka deva)에게 스리랑카의 Vijayā(승리, 영광)를 지키도록 요청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예지력은 스리랑카라는 땅이 불교의 땅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하왕사에 따르면 부처님 살아계실 때 보리수나무 가지가 스리랑카로 보내졌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연대기의 기술가들이 얼마나 불교와 스리랑카의 연결고리를 확립하려고 했나를 보여줍니다.
테라와다는 제3차 결집 후에 아소까왕의 추천에 따라 왕의 친족인 마힌다 장로를 필두로 불교를 스리랑카에 전하여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3 결집 뒤에 마힌다 장로를 시작으로 테라와다가 스리랑카에서 포교를 시작한 경위는 「디빠왕사(도사)」 「마하왕사(대사)」 등 스리랑카의 사서에 상세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테라와다는 스리랑카에 건너가서는 다른 부파와 거의 관련 없게 되었습니다. 다른 부파가 인도에서 소멸되었어도 테라와다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스스로의 경위를 세세하게 적고 있기 때문에 스리랑카 테라와다의 역사나 사적은 현대의 학계에서도 의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중에 빨리 성전에 관해서는 스리랑카에 건너가고 나서 현재까지 어떤 변경도 없이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학계에서도 거의 이해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의문시되고 있는 것은 「스리랑카에 건너가고 나서나 혹은 남서 인도에 있었을 무렵에 이미 테라와다의 성전이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어로부터 현존하는 빨리어로 번역된 것은 아닌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서 등에 전혀 기록되지 않았는데 이러한 의문이 일어나는 「근거」로 2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인도에 남은 제 부파의 경이나 율이 현지의 방언으로 번역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원본은 이미 없어졌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역된 문헌의 원어가 마가다어 혹은 「빨리어」가 아니라, 예를 들면 북서 인도의 간다라어 등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부터 학계에서는 「역시 제 부파는 성전을 현지의 언어로 번역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빨리어도 그럴 것이다.」라고 추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아무 증거도 없는데 다른 부파의 것이 그렇다고, 어째서 테라와다의 빨리 성전도 그럴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현재의 빨리 성전 언어가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국에서 사용되고 있었을 「반마가다어」라는 것입니다.
「반마가다어」는 부처님과 동시대에 마가다국 등에서 활동하고 있던 자이나교의 조사나 제자들에 의한 문언에 남은 것입니다. 마가다어도 빨리어도 지금은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자이나교의 문헌은 부처님 당시 마가다어의 흔적을 더듬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그러나 「반마가다어」는 「반」이 붙듯이 완전한 마가다어라고 할 수 없는 방언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과 빨리 성전의 언어가 일부 다르다고 해도 빨리어가 완전한 마가다어일 가능성은 당연히 남습니다.
불멸 2백여년 후 아소까 왕에 의한 법칙비문으로부터 빨리 성전의 언어 문제가 추정되고 있습니다. 아소까 왕은 인도 각처에 그 지방의 언어로 비문을 세웠고 테라와다가 활동하고 있던 남서 인도의 피샤체어와 마가다 지방의 「마가다어」로도 법칙문을 새겼습니다.
그렇지만 「빨리어」는 그 어느 쪽과도 조금씩 다릅니다. 「아소까 왕 비문의 「마가다어」와 빨리 성전의 언어가 조금 다르기 때문에 「성전은 마가다어로부터 빨리어로 번역되었을 것이다」라고 학계에서는 말하지만, 부처님의 시대로부터 2백년이나 후의 「마가다어」가 부처님 당시의 마가다어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한글과 현대의 한글을 비교해 보면 상상할 수 있겠지요.
빨리 성전의 언어는 아소까 왕 당시의 남서 인도 피샤체어와도 조금 다르기 때문에 피샤체어이지도 않습니다. 게다가 양자 간에 닮은 점이 있다고 해도 빨리 성전이 남서 인도의 피샤체어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빨리 성전의 언어는 그것을 말하는 장로들과 함께 2백년간이나 그곳 사람들의 종교 생활의 지침이 되고 있었으니까요.
이와 같이 「성전어가 마가다어로부터 빨리어로 번역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언어로부터 살펴봐도, 사서 등의 문헌 자료로부터 살펴봐도, 그 증거는 전혀 없습니다. 다른 부파의 성전은 번역되었을지 모르지만, 빨리 성전만은 어떤 다른 언어로부터 「빨리어」로 번역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빨리 성전은 처음부터 그 언어로 말해졌고 그것이 그대로 어떤 변형도 받지 않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원래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의 성전을 전혀 바꾸지 않고 계속 보관 유지해 온 테라와다가 설혹 어떤 이유가 있어도, 언어가 비슷해도, 그 금언을 다른 현지의 언어로 번역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번역 자체가 성전을 변경하는 큰 문제이기 때문에 변경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테라와다는 스리랑카에서 글로 남길 때에도 빨리 성전을 스리랑카의 싱하라어로 번역하여 적지 않고 빨리어 그대로의 발음을 적었습니다. 빨리 성전은 빨리어인 채입니다.
아소까 왕의 시대에 테라와다는 스리랑카에 전해졌지만, 인도에서는 테라와다가 일정기간 유지되다가 서서히 사라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마힌다 장로의 포교단이 정착한 이후에 서서히 스리랑카로 이동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도에 남은 다른 대중부의 부파도 똑같이 사라져 버립니다. 계율까지 바꾸어 버린 대중부 여러 부파는 아소까 왕에 의해 배척되고 나서 2~3백년 내에 그 성전과 함께 역사의 저 멀리로 사라졌습니다.
그 중 설일체유부는 부파 중에서 끝까지 남아 인도 북서부의 바라문교와 대항하면서 기원 전∙후부터의 산스크리트(Sanskrit)어 붐을 타고 자파의 논문(대승의 「논장(아비다르마)」이라고 하는 「불교에 관한 개인의 논문」)을 산스크리트어로 써서 대승불교와 같이 중국이나 티벳으로 이동합니다.
그 후 기원후 3~4 세기에는 설일체유부의 아비다르마와 대승의 「중관파」가 합쳐져서 「유식파」도 나타나면서 그것과 대항하다가 유부 자신도 기원후 7세기 무렵에는 결국 멸망해 버립니다.
이와 같이 원어를 버려 버리고 번역한 것을 포함하여 부처님의 성전을 조금이라도 바꾼 부파는 모두 멸망해 버렸습니다. 제1차 결집으로 확정한 성전을 전혀 바꾸지 않고 그 후에도 계속 보관 유지해온 테라와다만이 스리랑카나 동남아시아를 거쳐 온 세상에 지금도 맥을 같이하며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유일하게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테라와다의 빨리 성전을 최초 결집부터 말도 내용도 변함없이 이어서 전승하여 온 부처님의 말씀(Buddhavacana) 그 자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현존 빨리 성전이 부처님의 가르침 그대로인가를 확실하게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이란 빨리 성전을 스스로 읽고 말해진 내용을 스스로 실천하여 이해하고 확인하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내용에 직접적으로 접하다 보면 그것이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라는 것을 스스로 분명히 압니다.
스스로 깨달아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그것이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인가 하는 것은 거기에 깨달음의 길이 나타나고 있는지 없는지 스스로 확인하면 압니다.
누구에게나 분명하게 나타내 보인 불변의 가르침은 요구하기만 하면 금방 손에 넣을 수가 있습니다. 성전은 지금도 여기에 그대로 있습니다.
제 4차 결집(불교 경전의 문자화)
인도에서 불교는 초기부터 고대 바라문교의 영향인 인도적 사고에 의해 경전의 문자화와 불상의 제작은 오랫동안 터부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의 역사에서 경전의 결집은 중요합니다. 결집 가운데 제3차 결집까지는 기억하고 있는 교법을 함께 합송하는 것이었지만, 제4차 결집은 지금까지 합송으로 전해져 왔던 삼장 및 그 주석서를 문자로 기록한 경전 필사의 결집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경전 성립사의 관점에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기원 전 일세기 무렵에 테라와다의 정통인 마하위하라(Mahāvihāra, 대사)의 빅쿠들은 지금까지 스승으로부터 제자로 구전되어 온 교법을, 처음 문자를 사용하여 필사 하게 됩니다.
디빠왕사와 마하왕사에 의하면, 「이전에는 큰 지혜있는 빅쿠들은 암송에 의해 삼장 경전 및 그 주석서를 미래에 전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이 (교법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을 보고, 빅쿠들이 모여 교법을 오래도록 존속하기 위해서 필사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오래 오래 이 세상에 머물게 하기 위해서 순수하게 전승해온 가르침을 필사하여 패엽경에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문자로 필사하여 패엽경으로 남긴 곳은 스리랑카 고대 도시 아누라다뿌라(Anuradhapura)로부터 백 킬로 정도 떨어진 마탈레(Matale)의 알루위하라(Aluvihara (Alokavihara)) 석굴사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시와(Siva) 장로를 의장으로 한 5백 명의 빅쿠들이 참가해 왕의 후원을 받지 않고 7년에 걸쳐 완수한 대사업이었습니다. 빨리 삼장은 이때 패엽경에 완전하게 필사하였고, 싱할라 주석서는 A.D.I00년경까지 점차적으로 완료하여 기록되게 됩니다.
이것이 인도 불교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를 포함해 성전을 문자로 필사한 최초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필사된 패엽경을 1848년 영국군이 사원을 파괴하면서 소각해 버립니다. 2000년간 지켜온 최초의 필사본과 5세기 붓다고사 스님의 주석서들 모두를 말입니다.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현재 알로까위하라 사원에는 800여 년 전에 제작된 패엽경이 가장 오래된 것입니다.
경전을 필사한 배경 및 원인을 살펴보면,
불교가 정식으로 스리랑카에 전해진 것은 부처님의 입멸 후 236년 지나서 당시의 인도 왕인 아소까 왕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을 때 불교의 제3차 결집이 이루어집니다. 그런 후 제3차 결집의 의장이었던 목갈리뿟따 띳사 장로는 여러 나라에 전도사들을 파견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스리랑카에는 아라한인 마힌다 장로(Arahant Mahinda) 일행에 의해서 불교가 전해졌습니다.
불교가 스리랑카에 전도됐을 때는 데와남삐야 띳사(Devanampiya Tissa) 왕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 섬에는 확립된 기존의 종교는 없었기에 왕을 비롯한 백성들은 이 새로운 가르침이 매우 합리적인 진정한 가르침인 것을 충분히 이해한 다음 불교를 진심으로 맞아들였습니다.
그 이후로 사람들은 이 맑고 깨끗한 가르침을 자유롭게 배우고 실천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고, 또한 기존의 민속신앙이나 전통 등 어떠한 것에도 오염되는 일이 없게끔 모든 수단을 다해 보존했습니다.
불교가 스리랑카에 확립되면서 스리랑카와 인도 사이에는 깊은 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문화나 문명은 인도의 생활양식이나 삶의 방법에 매우 강하게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리랑카의 왕들 중에는 부처님과 같은 석가족 자손의 왕녀들과 결혼한 왕도 있었습니다.
데와남삐야 띳사 왕은 마힌다 장로에 의해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는데, 어느 날 마힌다 장로와 오래도록 이야기 한 후, 왕은 장로에게 불교가 이 나라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는지 어떤지 물었습니다. 장로의 대답은 “아니요! 아직 아닙니다.” 이었습니다. 마힌다 장로는 스리랑카 사람들이 스님이 되어 스스로 계율을 지키기 까지는 불교는 확고히 뿌리를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대답은 마힌다 장로가 불교의 현지화 내지 토착화를 언급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자 왕은 무언가 참배의 대상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소까 왕의 딸이었던 상가밋따(Saṅghamittā) 빅쿠니는 마가다의 부처님 성도지로부터 보리수 가지를 가져와서 이식하였는데 이것이 스리랑카에서 불교 참배의 대상으로서 확실히 정해지게 됩니다. 또한 데와남삐야 띳사 왕은 아누라다뿌라에 마하위하라를 건립하여 스리랑카 사람들이 출가하여 상가를 구성하고, 재가자들에게는 신앙의 거점이 될 여건을 마련하였습니다.
기원전 3세기 마힌다 장로에 의해 불교가 전해진 이후 당분간 평화가 계속되어 대대로 왕들은 불교를 보호해서 점차 불교가 활발하게 전파되었습니다. 어쨌든 아소까 왕 당시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사실은 각문 등을 통하여 역사적 사실로서 인정하고 있습니다.
마힌다 장로가 불교를 스리랑카로 들여왔을 때, 경전암송자(Bhānaka, 誦經者) 역시 같이 들어와 마하위하라(Mahāvihāra)의 몇몇 스리랑카 스님들이 송경자(Bhānaka)가 되어 모든 경전들을 암송하여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BC 1세기 경전들이 문자화될 때까지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주었습니다. BC 1세기에 왕은 마하위하라의 몇몇 송경자들에게 담마 보전 보존을 위해 인도로 갈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인 60명은 우리 백성이 아직 고통 받고 있는데 어떻게 인도로 갈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왕의 충고를 거절했습니다. 대신에 그들은 담마를 암기하여 보존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갔습니다. 다른 빅쿠 스님들이 인도에서 돌아 왔을 때, 스리랑카에 남아 있던 스님들을 만나 함께 암송하면서 경전들을 비교하였습니다. 그들은 단 하나의 단어도 없어지거나 빠진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두 송경자 그룹이 단 하나의 단어도 잊어버리지 않고 구두로 경전들을 전승하였습니다.
한편 무외산사(Abhayagiri vihāra, 無畏山寺)라는 새로운 사원이 왓따가미니 아바야(Vaṭṭagāmani Abhaya) 왕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친분으로 마하띳사(Mahātissa) 빅쿠스님에게 주었습니다. 마하띳사 장로는 즉시 그리로 가지 않고 마하위하라 사원에 계속 머물렀습니다. 이 장로는 사교성이 있어서 속인의 집에도 자주 출입했기 때문에 지계 견고한 마하위하라 사원의 빅쿠로부터 배척을 당하였습니다. 마침내 마하위하라의 빅쿠스님들로부터 교단 추방의 처분을 받게 됩니다. 그 처분의 부당을 비난한 마하띳사 장로의 제자인 바할라맛수 띳사(Bahalamassu Tissa)는 그들의 추종자 5백 빅쿠와 함께 마하위하라 사원을 이탈해 독립의 일파를 형성하기에 이릅니다. 당연히 마하위하라 사원에서 쫒겨난 마하띳사 장로는 새로운 사원인 무외산사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곧 그곳은 많은 불교 행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스리랑카의 불교는 정통보수적인 마하위하라(大寺)와 무외산사(無畏山寺)의 둘로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마하위하라 설립 후 대략 118년만에 스리랑카의 교단이 2개로 분열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은 BC 1세기에 일어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 후에도 무외산사파의 계통은 왕의 보호를 두껍게 받으며 법과 율에 이설을 주창하게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에 비하여 마하비하라 사원의 정통파는 점차 쇠락해 갔습니다.
한편 왓따가미니 아바야 왕 재위 동안 큰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굶주려 죽는 사람이 엄청나게 늘어나고 빅쿠들은 산이나 숲으로 피난했습니다. 대사는 버림을 받아 경내에 나무가 어지럽게 뒤엉키고 풀과 이끼로 뒤덮였으며 사원은 방치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계율에 철저한 빅쿠의 엄숙한 길을 실천할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환속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의 다양한 재난은 상가의 생활에 대단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성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다만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되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부처님의 순수한 말씀인 경전을 잘 지킬 필요가 명백하게 있었으므로 빅쿠들은 교법학습(Pariyatti)이 수행실천(Patipatti)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빅쿠들은 「불교의 근본은 빠리얏띠(pariyatti)인가 빠띠빳띠(patipatti)인가」라고 논쟁해, 전자가 승리를 거두어 경(Sutta)과 율(Vinaya)이 손상되지 않으면 실천은 손상되지 않기에, 교법학습이 수행실천을 능가한다는 것이 인정됩니다. 그래서 수행실천(Patipatti)보다 경전의 전승(suttante rakkhite)을 더 중시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행에는 뜻이 없고, 다만 생활을 위해서 출가하는 사람이 증가해 경전을 암송하는 의지가 약해지고, 교단 존속의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지금까지의 암송을 그만두고, 그 경전을 필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미 말한 것처럼 당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 구전으로 전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고 있는 전문적인 송경자 빅쿠들의 죽음이 이어져 상가는 대단한 곤란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위기에 빠진 상가를 구하기 위해서 빅쿠의 지도자들은 소의 성전을 보다 안전하게 전승하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하위하라 사원의 스님들은 만일 이러한 일이 앞으로 다시 일어난다면 담마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담마가 사라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마하위하라 사원의 스님들은 결집을 열고 그들 스스로 삼장과 주석서의 모든 텍스트를 종려나무 잎에 글자로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열린 이 회의가 제4차 결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불교의 텍스트가 이 결집에서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이것은 불교 역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제4차 결집은 지금 알루위하라(Aluvihara)로 알려져 있는 알로까위하라(Ālokavihara, 광명사원)에서 열렸습니다. 당시 알로까위하라에는 패엽경 제작을 위해 조성된 동굴이 14곳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그곳은 현재의 캔디에 가까운 마탈레에 위치한 동굴입니다. 여기서 간단한 의문이 하나 떠오릅니다. 왜 당시의 수도인 아누라다뿌라(Anurādhapura)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결집을 행했을까? 통상적으로 앞서 열린 결집들은 더 좋은 시설들을 이용할 수 있는 큰 도시에서 열렸었습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 열린 제4차 결집은 왜 수도인 아누라다뿌라에서 열리지 않았을까? 우리는 정치적인 이유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왓따가미니 아바야 왕은 마하위하라 사원보다는 아바야기리 사원에 있는 마하띳사 장로를 더 좋아했습니다. 반면 왕비는 마하위하라 사원의 독실한 후원자였습니다. 그래서 마하위하라 사원의 빅쿠 스님들은 왕으로부터 적극적인 후원을 받을 거라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스리랑카의 도처에 마하위하라 사원의 분원들이 이미 설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스님들은 지역의 부호들인 지방귀족들의 후원을 왕의 후원보다 더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결집장소를 수도가 아닌 알로까위하라로 선택한 주된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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