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공덕의 차이>
법구경 106번 게송
백년동안 다달이 천 번씩 제사를 지내기보다는
단 한순간이라도 진정한 수행자를 돕는 것이 뛰어난 일이다.
천 가지 갖가지로 백 년이나 다달이 제사를 지내는 것보다
잠시라도 한분의 수행자에게 공양하면 그 한번 공양이 백 년 제사보다 낫다.
月千反祠 終身不輟 不如復臾 一心念法 一念造福 勝彼終身
월천반사 종신불철 불여부유 일심념법 일념조복 승피종신
月月投千供犧牲百年,不如須臾間,供養修己者,彼如是供養,勝祭祀百年。
Māse māse sahassena, yo yajetha sataṃ samaṃ;
Ekañca bhāvitattānaṃ, muhuttamapi pūjaye;
Sāyeva pūjanā seyyo, yañce vassasataṃ hutaṃ.
If a man month after month for a hundred years should sacrifice with a thousand (sacrifices), and if he but for one moment pay homage to a man whose self is grounded in knowledge, better is that homage than what is sacrificed for a hundred years.
[인연담]
부처님께서 웰루와나(죽림정사)에 계시던 어느 때 사리뿟따 비구의 외숙부에게 당신은 어떤 공덕행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었다. 그는 자기가 매일 일천 까하빠나에 해당하는 물품을 니간타 고행자들에게 헌납한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사리뿟따 비구가 말했다.
"외숙의 스승은 외삼촌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주어 외숙으로 하여금 그릇된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니간타들은 자기 자신도 어떻게 브라흐마 천(天)에 태어날지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울 천상에 태어나게 해 줄 수 있겠습니까?“
사리뿟따 비구는 이렇게 외숙부의 잘못된 믿음을 지적한 뒤에 부처님께 외숙이 브라흐마 천에 확실하게 태어날 수있는 가르침을 설해 주시길 청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브라흐민이여, 마음 집중법을 바르게 수행하는 비구에게 한 주걱의 밥을 공양하는 것이 일천 까하빠나를 그대의 스승에게 올리는 것보다 나으니라." 부처님은 다음 게송을 읊었다.
매달마다 백 년 걸쳐
평범한 사람에게 일천 냥을 주는 것보다
신에게 백 년 동안 제사 지내는 것보다
일념으로 마음 집중을 수행하는 비구를 찾아가
잠깐 동안 존경의 예를 표하는 것이 훨씬 낫다.
부처님의 이 설법 끝에 그 브라흐민은 곧 예류과를 성취하였다.
[해설]
여기서도 웰라마 경(A9:20)에서 설명한 것처럼 얼마나 많은 보시를 하였나보다 어떤 사람에게 보시하였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외도의 수행자에게 많은 양을 보시하는 것보다는 사향사과와 부처님과 승가라는 대상에 보시하는 공덕이 제일 크다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와 다른 사상과 차이가 극명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요즘 종교간의 소통을 강조하는 승려들은 종교간의 동질성을 강조하다보니 이러한 차이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21세기 종교평화선언인 “아소까선언”에 대한 논쟁이었다.
깃발경(S11:3)에서 신들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기도하면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지만 불법승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기도하면 두려움이 사라진다고 말한다.그것은 정등각자는 탐진치를 완전히 벗어났기 때문이다. 공덕을 지은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공덕과 더불어 번뇌를 완전히 없애버린 부처님 같은 성자는 만나기 힘들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신의 왕 삭까의 깃발을 올려다보거나 신의 왕 빠자빠띠의 깃발을 올려다보거나 신의 왕 와루나의 깃발을 올려다보거나 신의 왕 이사나의 깃발을 올려다보면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이 없어지기도 하고 없어지지 않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신의 왕 삭까는 탐욕을 제거하지 못했고 성냄을 제거하지 못했고 어리석음을 제거하지 못했고,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끼고 떨면서 도망갈 수 있기 때문이다.”
“비구들이여, 붓다와 담마와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해라. 비구들이여, 그대들이 붓다 담마 승가를 계속해서 생각하면 두려움과 공포와 털끝이 곤두섬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비구들이여, 여래. 아라한. 정등각자는 탐욕을 제거했고, 성냄을 제거했고, 어리석음을 제거했고, 두려워하지 않고 공포를 느끼지 않고 떨지 않고 도망가지 않기 때문이다.”
법정스님은 “백년동안 다달이 천 번씩 제사를 지내는”것으로 번역했으나 인연담에서는 “매일 일천 까하빠나에 해당하는 물품”을 보시했다는 것으로 보아 “많은 양의 보시”를 의미한다. 전재성은 “천 가지 갖가지로 제사를 지내는”것이라고 번역했는데 “천가지”라는 번역도 “많은 양의 보시”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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