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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친일 승려 108인, 끝나지 않은 역사의 물음

친일인명사전+수록대상자+명단.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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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사 신간 보도자료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문발리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514-6 TEL 031)955-4888, FAX 031)955-4848, http://www.ypub.co.kr

 






 임혜봉 지음/148×218/반양장/748쪽/38,000원


1. 친일 역사 청산, 왜 바로 지금인가!


 “친일 문제는 역사이자 현재진행형이다.”라는 지은이의 말에서 우리는 왜 바로 지금 우리가 “친일 역사 청산”의 과제를 실천해야 하는지를 도출해내야 한다.

 독립 이후의 해방 공간에는 이름 없이 사라져간 독립운동 세력들과 더더욱 득세하는 친일 세력이라는 모순의 대한민국이 있었다. 이후 친일 세력은 친미 세력으로, 일제 식민지는 미제 식민지화로 또다시 권력에 머리 숙이는 식민지 역사는 반복되었다. 이뿐이랴. 우리들은 타인을 배반하며 기득권에 기생하고, 권력에 굴하며 약자를 짓밟았을지라도 권력만 쥐면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관례를 만들었고, 또한 그 되풀이를 허용하는 역사를 만들어왔다.

 이는 해방 공간에서 이루지 못한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역사적 심판의 부재라는 원인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6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아무런 반성 없이 수구기득권으로서 기득권 유지만을 위해 투쟁을 일삼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오랫동안 굳어 있었던 “친일 잔재 청산”이라는 영역에 해빙의 빛을 쬐었다. 이는 대한민국이 극심한 진통을 겪더라도 과거의 진실을 규명하고 친일 잔재를 직접 청산해야 함을 의미한다.

 과거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그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정의와 진실의 공감대로서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자, 그 시대를 힘겹게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보상이다. 또한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역사의 과오를 청산하지 않고서는 진보를 향한 단 한 발짝의 걸음도 내딛을 수 없다는 역사의 필연 때문이기도 하다.

  

2. 불교계의 친일 역사를 바로세우다

 이 책은 친일 승려 108인의 친일 행적을 일체의 과장과 왜곡 없이 낱낱이 고발하고 있는 책이다. 당시의 불교 신문과 잡지, 일반 신문 등에 보도된 것과 승려들의 자서전과 전기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그 진상을 밝히고 있다.

 저자는 일제강점기 초, 중일 전쟁기, 대동아 전쟁기로 나누어 시기마다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던 승려들의 친일 행적을 들춰내고, 31대본산 주지들에서 말사 주지들까지, 불교 언론계와 학계의 친일 승려들, 중앙교무원과 총본산의 친일 승려들에 이르기까지 민중을 배반하고 인권을 유린했던 그들의 친일 행적을 다룬다.

 친일 역사는 광복 이후 끊임없이 은폐축소되어왔기 때문에, 저자는 1차 사료를 열람, 발췌, 재정리해서 친일 행위를 들춰내고 진실을 증명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왜곡된 불교계의 친일 역사를 바로잡는 일이다.

 이 책의 저자인 혜봉 스님은 출가한 이래 “불교계의 친일”이란 화두를 들고 수십 년간 불교계의 친일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왔고, 이 책은 바로 그 연구결과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책으로, 불교계의 역사를 바로잡는 데 있어서 그 역할이 클 것이다. 또한 우리의 오랜 과제인 친일 역사 청산을 위한 횃불로서 그 다음 길을 밝혀줄 것이다.

3. 108인의 친일 행적을 고발한다

108인의 친일 행적 범주들
이 책에서 친일 승려 108인의 행적은 약 7가지 범주로 나뉜다. 주로 구체적인 친일 행적들의 종류에 따라 그 범주가 결정되며, “독립운동에서 변절하여 부일협력한 자”나 “일제 통치 기구의 각종 외각 단체 간부와 직원” 등의 범주를 포함하고 있다.


 그 범주는 다음과 같다.

 ① 독립운동에서 변절하여 부일협력한 자
 ② 학병, 지원병, 징병, 징용, 공출을 권유하거나 강요한 자
 ③ 창씨개명을 수창하거나 권유한 자
 ④ 언론, 예술, 학교, 종교, 문학 기타 각종 문화 기관을 통하여 일제 통치를 찬양하고, 독립 (민족해방)운동을
 방해하고, 내선융화, 황민화운동을 추진시키고, 일제 전쟁에 협력한 자
 ⑤ 일제 전쟁을 돕는 군수품을 생산하고 자원을 제공한 자 및 거액의 금품과 비행기 등을 헌납한 자
 ⑥ 일본 정부, 일본 군부, 조선총독부로부터 포상 또는 훈공을 받은 자
 ⑦ 일제 통치 기구의 각종 외곽 단체 간부와 직원


 각계 친일 인사들의 친일 행적 양상
 중일 전쟁 이래로 중앙교무원과 조계종 총본산은 이미 친일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고 친일을 적극적으로 시행했다. 그래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간에 그곳에서 소임을 맡은 자들은 친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각 본말사 주지들은 조선총독부의 허가로 주지가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지들이 친일 행적을 남겼다.  


언론계와 학계에서도 친일 인물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기관지 《불교》와 《불교시보》를 발행하여 친일에 필요한 내용들을 게재하였으며, 친일 선동의 무기로 삼았다. 김경주의 경우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 학감이자 교장으로 친일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들은 지식인으로서 진실을 위해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보다는 기회주의적 태도로 일제에 봉사하였다. 이는 지금도 권력에 기생하는 우리 사회 지식인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식인의 뿌리에 해당하는 모습으로, 이들에 대한 진실을 증명해 올바른 역사 정립에 기여하는 것은 현재 지식인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수위가 높아졌던 친일 행적들 
일제강점기 초기를 지나 중일 전쟁기와 대동아 전쟁기에 이르면서 친일 행적의 수위는 높아만 갔다. 해방 공간에서도 역시 반성 없이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역사 왜곡을 일삼았다.


 -일제강점기 초 

한일병합이 되던 시기 온 국민이 슬픔에 휩싸인 동안에도 불교계의 최취허, 이보담, 이회명, 이회광, 김용태 등은 자진해서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했다. 최취허는 1911년에 일본 왕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의 식민 통치를 “성덕명정(聖德明政)”이라 찬탄하였다. 다른 이들은 메이지가 죽었을 때 메이지를 애도하는 추모 의식을 행하였고, 메이지의 비 쇼켄이 죽자 쇼켄의 봉도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조선불교 개혁이라는 미명 아래 일선융화를 표방한 불교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의 친일 행적은 온 국토가 망국의 비탄에 싸여 있을 때, 더구나 일제 측의 어떤 지시나 강요도 없는 상황에서, 자진하여 행한 적극적인 친일이었기에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한다.

 -중일 전쟁기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한국을 병참기지로 삼아 군수 물자와 인적 자원을 동원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수탈을 자행했고, 노골적으로 친일을 강요했다. 불교계에서는 이 움직임에 따르는 자들이 아주 많았다.

 근로보국으로 일제에 노동력을 제공했고, 탁발보국으로 군수품 구입에 필요한 돈을 헌납하였다. 심전개발 순회강연을 통해서 일제의 심전개발 운동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일본 군부에 군용 비행기를 헌납하였다. 또한 1938년부터는 회가 거듭될 때마다 중일전쟁 발발 기념식을 열어 일본군 위령제를 열거나 위문금을 헌납하였다. 또한 1940년부터 실시된 창씨개명에 호응하였다.

 그들은 어떤 명분이든 찾아내어 적극적으로 친일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했고, 권력의 중심부로 다가갔다. 1941년 7월에는 드디어 친일 승려들과 조선총독부의 야합으로 적극적인 친일 종단인 조선불교 조계종을 설립하였다.

 그들의 친일 행적은 또한 부정부패로 이어졌다. 그들의 부도덕하고 간교한 친일 행동들은 비단 민족과 민중을 배반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인권유린이라는 점에서 범죄자로서 단죄해야 할 행동들이다.  

 -대동아 전쟁기

 1941년 대동아 전쟁이 발발하자 친일 승려들은 징병제를 옹호하였고, 적극 홍보하였다. 1942년에는 1월 용산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사령부를 방문하여 비행기 기금과 국방헌금을 헌납하였다. 그들은 1943년 10월 일제가 학도병 징집을 공포하자 학도병들에게 “역사적 사명”이라는 말로 “제 발로 걸아 나가 죽는 것이 조선 청년 승려들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강변했다. 또한 해군기 헌납을 위해 고액의 국방헌금을 헌납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친일 역사 왜곡이 심각한 승려들
 친일 승려 108인 중에는 해방 공간에서 자신들의 역사를 왜곡하고 은폐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곡 정도가 심각한 승려들로, 차상명, 최범술, 허영호, 박영희, 이종욱 등이 있다. 이들은 한때 항일투사였지만 모두 변절하였다. 그런데 그 항일 기록 때문에 친일 행적이 모두 은폐되어 항일투사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역사 기록의 왜곡 정도는 “국가보훈처의 애국지사 인정”이라는 매우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


 차상명은 건국공로 대통령표창과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최범술은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허영호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박영희는 독립운동 유공자가 되어 대통령표창과 건국공로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박영희는 죽은 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종욱은 불교계 최고의 친일 인물로, 일제와 야합해 조선불교 조계종을 만든 장본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국훈장 국민장을 서훈받았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더구나 이종욱 연구회가 설립되어 연구기금조성, 장학회 조성, 학술세미나 등을 통해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업보로밖에 볼 수가 없다.

 무엇보다 이런 경우에 가장 심각한 건 그 역사를 재검증하려고 하지 않는 소극적이고 무심하기까지 한 역사의식이다. 이에 관해서는 명백한 증거를 바탕으로 재검토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4. 불교계의 이단아, 한 사람의 역사가 혜봉 스님

 유독 친일 역사에 대한 반성을 엿볼 수 없고,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이 적은 불교계, 이런 불교계의 보수적 성향에 도전하는 승려가 바로 혜봉 스님이다. 그는 불교계의 이단아이자 우리 역사 바로세우기에 꼭 필요한 불교 역사가이기도 하다. 현재 그처럼 성실하게 불자의 마음으로 역사를 염려하는 이가 어디 있을까?

 이미 1993년 출간된 《친일불교론》(상, 하)은 불교 근현대사 연구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고, 이번에 출간된 《친일 승려 108인-끝나지 않은 역사의 물음》은 불교계의 친일 역사에  커다란 반성을 유도해낼 것이다.

 과거 청산을 위한 움직임들이 “처벌”보다는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에 있기에 혜봉 스님 역시 친일 승려들을 판단하고 평가하기보다는 잘못되어 있는 기록을 들춰내고 재정립하려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그래서 이 책은 과거청산을 위해 필요한 진실 규명과 역사 바로잡기에 귀중한 자료로서 손색이 없다.

 5. 《친일 승려 108인-끝나지 않은 역사의 물음》의 의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특별법”이 통과되어 오랫동안 박제화되어 있던 친일 역사 청산이라는 과제가 올해 들어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때를 같이 하여 출간된 《친일 승려 108인-끝나지 않은 역사의 물음》은 물꼬를 트기 시작한 친일 역사 바로잡기의 움직임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또한 유독 친일 행적에 대한 반성과 역사 바로잡기에 대한 움직임이 부족한 불교계에서 이 책은 그 반성의 계기가 될 것이며, 또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물론 친일 승려 108인이 살았던 시기는 연명하는 것조차 힘겨웠던 시기였음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 양심과 지조로 일관한 한용운 같은 승려를 알고 있으며, 반대로 남을 짓밟고 서서 자신의 위치를 다졌던 친일 승려들을 안다. 또한 그러한 친일파의 후손들이 득세하고 있는 이상한 세상임을 안다.

 그들의 피할 수 없었던 운명의 시대를 마주하면서 우리 역시 이 역사를 청산하지 않고는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운명을 감지한다. 과거는 미래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진통을 겪더라도 그 매듭을 풀지 않으면 더더욱 꼬이기 마련이다.

 혜봉 스님은 친일 1세대는 죽었지만 그 다음 세대들이 그 과오를 반복하지 않기를 원했다. 이 책은 친일 카르마를 끊고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불교계가 진심으로 참회한다면 한국불교사에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것과 더불어 친일 과거 청산이라는 과제의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6. 지은이 소개

 지은이 임혜봉(林慧峰)은 경북 안동(安東)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임명삼(林明三)이고 혜봉은 법명이다. 안동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와 청각장애자학교에서 어린이를 가르치다가 출가했다. 출가 후 불교계의 왜곡된 친일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애써왔고, 1993년 출간된 《친일불교론》(상, 하)은 불교 근현대사 연구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현재 경기도 설봉산 지족암 주지로 있으면서 불교 근현대사와 차 문화에 대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고 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윤회의 실상》《사랑하며 영원을 살며》《일제하 불교계 항일 운동》《다성(茶聖) 초의선사와 대둔사의 다맥》《불교사 100장면》《그 누가 큰 꿈을 깨었나》(정종열전 1)《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처럼》(정종열전 2)《이천(利川) 불교문화》 등이 있다. 











◎ 이 책의 차례

지은이의 말: 친일 문제는 역사이자 현재진행형이다

제1장 일제 초의 친일 승려들
김지순│최취허│이회명│김용태│곽법경│이회광│이보담│김상숙│김용곡│김정해│이혼성│김구하│
강대련  


제2장 중일전쟁기 본산 주지들의 친일 행적 
박영희│변설호│강성인│정병헌│강재원│이병호│김경림│윤상범│심보연│박도수│김영호│차상명│
박찬범│김보련│김재홍│박병운│장석상│안향덕│김탄월│김청암│정창윤│정충의│김진월│유재환│
김정섭│이명교│김송월│신윤영│황벽응  


제3장 말사 주지와 포교사의 친일 행적
제1절 친일 행적이 다대한 주요 친일 승려들
박대륜│이덕진│이철허│이동석│최범술│김상철│이용조│이태준│민동선  

제2절 매스컴에 보도된 극성스러운 친일 승려들
이태전│김상렬│김응성│이진학│조만해│양경수│임욱순│김홍경│김경해│김허옹│이연응│김호산│
이춘산│김용묵│장경화│김창련│김교은│최남진│박설은│서만준│기산옥│이학암│이일선│김성수│
최성수│송덕윤│김청하


제4장 불교 언론계와 학계의 친일 승려들
김경주│김동화│김삼도│김영수│박윤진│장도환│허영호│김태흡│권상로


제5장 중앙교무원과 총본산의 친일 승려들
김상호│황금봉│박성권│김설암│이부열│한성훈│이갑득│최학연│김낙순│김법룡│박원찬│임석진│
이종욱

제6장 대동아전쟁기의 친일 승려들
홍태욱│손계조│이석두│김한송│곽기종│신태호│최상문│에모토 쇼오슈


일제시대 31대본산 주지 명단

후주

 

 

 

 

 

태고종 부석암 임혜봉 주지 스님 인터뷰

 

/ “불교계, 땅 많지만 쓸만한 건 별로 없어”

 
임혜봉 스님은 불교계의 친일 행위를 고발하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아왔다. 그가 저술한 <친일불교론>과 <친일 승려 108인> 등은 불교계의 친일 행적을 낱낱이 고발하고 있다. 지난 4월22일 경기도 이천 부석암에서 스님과 일문일답을 나누었다.
전국에 있는 사찰 땅을 합치면 엄청나다.
불교계가 가지고 있는 땅은 오랜 역사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다. 오늘날 신흥 부자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과는 소유 개념이 다르다. 1949년 토지 분배 때 불교계가 소유하고 있던 논밭을 소작인들에게 많이 나누어주었다. 이때 임야도 일부가 분배되었다. 1954년 불교 정화운동 때는 비구승측과 대처승측이 서로 송사를 벌이면서 재판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땅을 많이 팔았다.

불교의 기본 교리는 ‘무소유’다. 특정 종단이 지나치게 많은 땅을 소유한 것은 교리에 어긋난 것 아닌가?
고대 인도에서 불교가 발생하던 때와는 ‘무소유’ 개념이 다르다. 종교도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한다. 당시에는 자본주의가 없었지만 지금은 자본주의 사회 아닌가. 사찰에서 소유하고 있는 땅은 개인 소유가 아니다. 수행과 신행 공간으로서 공적인 개념으로 공유한다. 일부 스님들 중에는 개인적으로 땅을 소유하고 있지만 종단의 제재를 받는다.

수행과 신행 공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아닌가?
불교계가 소유한 땅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쓸모있는 땅은 그리 많지 않다. 경치는 좋지만 이익을 목적으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수행 공간에 필요한 땅까지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 다만 수행 공간 이상의 토지에 대해서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 공익적으로 쓰임새를 정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정부가 국립공원 입장료를 폐지했는데 사찰이 문화재 관람료란 명목으로 다시 징수하면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국립공원을 찾는 사람 중 사찰 땅을 일부 밟는다고 해도 돈을 받을 필요는 없다. 만약에 문화재 관람료를 꼭 받아야 한다면 사찰 경내에 있는 문화재에 한정하면 된다.

수행에 필요한 땅을 제외하고 국가에 헌납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현재 수행 공간으로 사용하는 땅을 국가에 헌납할 필요는 없다. 국방상의 목적으로 사용한다고 해도 소속 종단의 이해를 구해야 한다. 또 도로가 나거나 문화 공간 등 공익적인 목적으로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해도 헌납한다거나 헐값으로 매도하는 것은 종단에서 결정해야 할 일이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불교계에 토지를 불하했다. 사실상 친일의 대가가 아닌가. 이런 점에서 보면 땅의 소유권에 대한 정통성이 없는 것 아닌가?
조선 시대까지 사찰에게 소유권은 없었으나 관리권은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관리권을 소유권으로 바꿔준 것이다. 전통적인 소유권을 합법화한 것이지 불하한 것은 아니다. 일부 사찰은 행정 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조선총독부에 땅을 빼앗기기도 했다.

불교계의 친일 행위와 관련이 없다는 말인가?
사례별로 다 다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불교계는 친일 행위에 대해 교단 차원에서 반성을 했는가?
아직까지 안 했다. 친일 잔재가 청산되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국 불교는 국가와 민족 앞에 사죄해야 한다. 민족과 조국에 반역한 것을 뼈저리게 참회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호국 불교’는 임진왜란 때가 마지막이다. 일제 시대는 친일 불교였고, 해방 후 군사 정권 때까지는 정권과 야합했다. 호국불교라는 이름을 빌려서 정권과 결탁한 것이다. 지금은 정권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지만 정통성을 회복한 것은 아니다.


 

불교계 이완용으로 불린 원종 종정 이회광

 
왼쪽부터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을 꾀한 이회광, 황도불교 건설 찬양한 이종욱, 명고축출 당했던 강대련, 친일서적 ‘임전의 조선불교’ 발간 권상로.

역사가 단절되고 민족의 정통성마저 뿌리째 뽑혀버린 일제시대 삶의 모습은 친일과 항일, 그리고 침묵이었다. 불교계 역시 대부분이 침묵으로 굴종의 시기를 버텨낸 가운데 만해 등 적극적으로 일제에 맞섰던 항일인사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일제에 빌붙어 친일행각을 일삼으며 개인의 영달을 도모했던 인물 또한 적지 않았다.

불교계 친일행각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과 동시에 시작됐다. 한일합방 이후 온 나라가 분노와 슬픔에 휩싸여 있을 때 이회광을 비롯한 최취허, 이보담, 이회명, 김용태 등은 자진해서 친일에 나섰다. 이들 중 한일합방 초기 불교계의 대표적 친일 인물로 꼽히는 이가 바로 근현대 한국불교 최초 종단인 원종의 종정 이회광이다.

이회광은 『동사열전』에서 ‘조선왕조 마지막 대강백’으로 기록할 만큼 뛰어난 학승이었으나, 권승으로 전락해 조선불교를 일본불교에 종속시키려는 친일행각을 함으로써 ‘불교계 이완용’이라는 극단적 비난까지 받았다. 이회광은 화계사 홍월초·봉원사 이보담과 인연을 맺으면서 나락의 길로 들어섰다. 홍월초·이보담은 자신들이 조직한 불교연구회가 일본 정토종과의 관계 때문에 친일 논란에 휩싸이자 비난을 피하기 위해 1908년 6월 원종을 만들고, 이회광을 종정으로 추대해 이미지 탈색을 꾀했다.

이때 원종은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추천으로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를 고문으로 추대했고, 다케다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지자 원종과 조동종의 연합을 적극 추진했다. 이에 이회광은 다케다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0월 6일 조선불교 원종과 일본불교 조동종이 연합하는 맹약을 체결했다. 나라가 강제로 합병된 후 불과 45일만에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조선불교가 일본불교에 병합된 셈이다.

최취허는 총독의 식민통치 찬탄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 종무대표자와 조인한 조약은 말 그대로 조동종 위주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특히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에서 고문을 비롯해 포교사 약간 명을 초빙해 각 수사(首寺)에 배치하고 일본포교와 청년승려의 교육을 촉탁하는 것은 물론, 조동종 종무원이 필요에 따라 포교사를 파견할 때 조선 원종 종무원은 조동종 종무원이 지정한 지역의 수사나 사원에 숙사(宿舍)를 정하고 일반포교와 청년승려의 교육에 종사케 한다’는 조약 내용은 불교계의 공분을 샀고, 종단을 팔고 조상을 바꾼 ‘매종역조’라는 비판까지 받았다.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맺은 맹약은 조선총독부가 1911년 6월 사찰령을 반포하면서 원종 설립을 인정하지 않아 허사가 됐으나, 이회광은 30본산 중 하나인 해인사의 제1세 주지로 인가 받았다. 그는 1917년 4월 일본에 가서 데라우치 총리에게 그림족자를 선물한데 이어, 1919년 11월 다시 한번 일본 임제종과의 합병을 추진했다. 하지만 일본에 유학중이던 조선승려들과 정적 관계에 있던 강대련을 비롯한 조선승려들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무산됐다. 그리고 1923년 해인사 대중들이 총독부에 그의 사퇴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해 마침내 해인사 주지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의 친일행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역시 본산 주지직이 박탈된 곽법경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일본내각에 구명 로비를 하면서 ‘조선불교 모든 기관을 파괴하고 경성에 조선불교총본산을 설립하는 한편 본산 법당 안에 석가여래와 명치일본왕, 그리고 고종을 한 자리에 안치해 정교일치로 일선융화를 철저히 실천하겠다’는 친일 내용의 건백서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국내 신문에 이같은 사실이 보도되면서 음모는 끝이 났고, 결국 1933년 한강변 견성선원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이회광이 원종과 일본 조동종의 연합을 획책하던 시기에 자발적 친일행각으로 세상의 질타를 받은 또 다른 인물이 최취허다. 그는 1911년 일본 왕과 조선총독 데라우치의 식민통치를 찬양한데 이어 조선불교 개혁이라는 미명아래 일선융화를 표방한 불교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특히 데라우치 조선총독의 식민통치를 ‘성덕명정(聖德明政)’이라고 찬탄해 불교계 안팎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처럼 일제초기 강요가 없는 상황에서 이어진 불교계 인사들의 친일행각은 자못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이어 불교계 친일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이르러 이른바 일제의 친일파 양성책과 맞물려 수많은 대처승이 생겨나는 결과를 초래했고, 이는 훗날 비구·대처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했다.

이후 불교계 친일동향은 1930년대 후반에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선동조론(日鮮同組論)’과 ‘내선일체론(內鮮一體論)’을 내세운 친일행각이 두드러졌고, 심지어 일본 천황의 황은에 보답하겠다는 인사들까지 나타났다.

 
국방자재로 헌납하기 위해 모은 사찰 범종.

또한 친일 승려들은 ‘탁발보국’이라는 명목으로 군수품과 국방 헌금 등을 헌납했으며 비행기 구입 기금을 자진납세하기도 했다. 또 1943년 학도병을 징집하자 “제 발로 걸어 나가 죽는 것이 조선 청년 승려들의 시대적 사명”이라고 강변하기까지 했다. 이 시기부터는 3·1운동을 비롯해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했던 항일인물들의 친일행각도 나타났다. 당시 대표적 친일 인물이 한성임시정부에 불교대표로 참여했던 이종욱이다. 이종욱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기는 하지만, 친일행각을 펼쳤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는 1936년 8월 황민화정책의 사령탑인 미나미가 제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해올 때 종회의장 및 월정사 주지 자격으로 불교계 인사들을 대동하고 경성역으로 마중 나가 환영하는 등 본격적으로 친일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7월 15일 남산에 세워진 신사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비는 기원제에 참석한데 이어, 31본사주지회의 의장 신분을 이용해 전국 사찰에서 기원제를 지내도록 공문을 하달하는 한편 8월 5일에는 개운사에서 직접 기원법회를 열었다.

이종욱은 친일승려 1호로 지목

그리고 1941년 조선불교조계종 종무총장 취임사에서 “이조의 압정 하에 근근히 그 명맥을 이어오다가 일한합병 후 일시동인(一視同仁)의 황은(皇恩)에 힘입어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으며, 사찰령에 의하여 조선불교가 발전되었다”면서 총독부의 황도불교(皇道佛敎) 건설을 찬양하고 나섰다. 이후 전쟁이 말기로 치닫자 임시종회를 소집해 국방자재 헌납을 결의하고 사찰의 범종과 쇠붙이로 만든 불구를 거두어 일제 당국에 헌납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친일행위로 인해 해방 이후 종무총장에서 물러나야 했고, 1945년 9월 22일 열린 전국승려대회에서 ‘친일승려 1호’로 지목돼 승권정지 3년의 징계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또 눈에 띄는 친일인물이 바로 강대련이다. 그는 “일본 승려와 조선승려들이 조선 왕족 여자나 양반 딸과도 혼인할 수 있게 한다면 조선동화와 불교 감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해 민족계열 학승들의 반발을 불러오기도 했다. 중일전쟁 이후 8회에 걸쳐 3700여 원이라는 거금을 일본 군부에 헌납하는 등 일제의 종교시책에 적극 협조했고, 데라우치의 추도식에도 참석했다. 강대련은 이런 이유로 조선불교유신회 회원들로부터 ‘명고축출(鳴鼓逐出: 사람의 이름을 써 붙인 북을 치고 다니며 잘못을 널리 알리는 것)’을 당했으나 끝내 참회의 빛을 보이지 않은 인물로도 유명하다.

일제시대 불교계 최고의 문장가이자 학승이었던 권상로 역시 친일행적을 보였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시국인식 친일강연의 연사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할 것을 역설했고, 1943년에는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우리모두의 살길이며 전쟁의 승리는 종교와 모든 윤리도덕에 우선한다”는 내용이 담긴 『임전(臨戰)의 조선불교』라는 친일 일색의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불교계는 이처럼 중일전쟁 시기에 근로보국으로 일제에 노동력을 제공했고, 탁발보국으로 군수품 구입에 필요한 돈을 헌납한데 이어 일제의 심전개발운동을 적극 지지하는 한편 군용비행기를 헌납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1년 대동아전쟁이 발발하자 징병제를 옹호했고, 1943년 학도병 징집을 시작하자 “역사적 사명”이라며 청년승려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다.

이같은 일제시대 불교계 친일인사들의 행각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 신문·잡지 등에 보도된 자료와 승려들의 자서전 및 전기 등의 사료를 바탕으로 친일 승려들의 진상을 파헤쳐 온 임혜봉 스님에 의해 드러났다. 혜봉 스님은 『친일불교론』을 통해 당시 승려들의 친일행각을 알렸고, 『친일승려 108인』에서는 승려 108명의 친일행적을 세세히 밝혔다.

한편 창씨개명을 한 승려 수는 당시 조선총독부가 파악한 전체 승려 6600여 명 가운데 3359명에 달했다. 창씨개명은 완전히 일본식으로 바꾼이들이 있는 반면, 형식상 절반만 일본식으로 바꾼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 가운데 완전하게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꾼 대표적 인물은 명고축출 당했던 강대련으로, 그는 이하라 가오루(渭原螢)로 창씨개명했다. 당시 총본산건설사무소는 창씨개명을 잘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회의를 열어 무료상담소 설치 및 운영과 수속사무 대행을 결의한데 이어 실제로 시행하는 등 창씨개명에 앞장서기도 했다.

비행기 헌납에 창씨개명 앞장도

 
일본에 헌납한 전투기 ‘조선불교호’.

조선총독부가 1939년 11월 법을 개정해 1940년 2월부터 시행하기로 한 창씨개명은 법이 시행되기도 전인 1940년 1월 이미 김경림, 유재환, 변설호, 박찬범, 송구해, 김한송 등의 승려들이 이름을 바꾸며 일제에 유착하는 등 빠르게 진행됐다.

그리고 조선불교조계종 초대종정 한암 스님(야마가와 쥬겡)을 비롯해 종무총장 이종욱(히로다 쇼이꾸), 교무부장 임석진(하야시 겐기찌), 서무부장 김법룡(가가와 호류), 재무부장 박원찬(아라이 엔산) 등이 창씨개명했다. 이어 당시 혜화전문학교 교수였던 권상로(안토 소로우), 중앙불교전문학교 학감 김경주(가네야마 게이쥬) 등 학자들도 창씨개명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당시 창씨개명은 일제시기에 살기 위한 방편이었기 때문에 이름을 바꾼 모두를 친일파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해, 운허, 효당, 백성욱, 김법린 등은 온갖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만해는 오히려 창씨개명 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었다. 
 
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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