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옷을 입은 바히야 다루찌리야>
법구경 101번 게송
쓸모 없는 구절을 모아 엮어 놓은 천 편의 시보다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는 한 편의 시가 훨씬 뛰어난 시다.
쓸데없는 천 마디 시구를 외우는 것보다
들어서 안온해지는 한 마디의 시구가 낫다.
雖誦千章 不義何益 不如一義 聞行可度
수송천장 불의하익 불여일의 문행가도
雖誦千句偈,若無義理者,不如一句偈,聞已得寂靜。
Sahassam-api ce gāthā anatthapadasaṁhitā,
ekaṁ gāthāpadaṁ seyyo yaṁ sutvā upasammati
Better than a thousand verses composed of meaningless words is one word of a verse on hearing which one becomes peaceful.
[인연담]
어느 때 장사꾼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항해하다가 도중에 배가 침몰하여 한 사람을 제외하고 배에 탔던 모든 사람이 다 죽은 일이 있었다. 이때 유일한 생존자는 물 위에 나무판자를 붙들고 정처없이 표류하다가 항구에 닿게 되었다. 항구에 도착한 그는, 옷이 없었으므로 나무판자로 자기 몸을 가리고 그릇 하나를 든 채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앉아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에게 쌀이나 죽을 주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혹시 아라한이 아닐까 생각하며 자기네들끼리 그를 칭찬하는 말을 나누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옷을 가져다 주었는데, 그는 자기가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돈이나 음식 따위를 바치지 않으리라 생각하여 옷 입는 것을 거절했다. 이런 일이 계속 되는 동안에 그는 자기가 아라한이라고 착각하게 되었다. 그는 나무껍질 하나로 옷을 대신하여 몸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나무(Dāru)껍질을 가진(cīriya) 사람이라는 뜻이다.
대범천은 과거 전생에 자기 친구였던 바히야가 타락되어 가는 것을 보고 매우 안타깝게 여겨 밤중에 바히야를 찾아가 이렇게 충고했다.
"바히야여, 너는 아라한이 아니지 않은가? 너는 아라한으로서의 자격이 없지 않느냐?" 바히야는 마흐브라흐마를 올려다보면서 자백했다.
"그래, 나는 아라한이 아님을 인정한다. 나는 지금까지 잘못 행동해 왔다는 것도 인정해. 그렇지만 지금 세상 어디에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있을 수 있겠나?"
그 말을 받아 마하브라흐마는 사왓티에 고따마 붓다가 계시는데, 그분은 진정한 아라한이며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신 분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바히야는 자기의 엄청난 죄를 깨닫고 부처님을 만나 뵙기 위해 사왓티로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때 마하브라흐마는 신통력으로서 바히야를 도와 120요자나 거리를 단 하룻밤만에 갈 수 있게 해주었다. 바히야는 아침 일찍이 사왓티에 도착했고, 부처님의 뒤를 따랐다. 그러면서 바히야는 부처님께 담마를 설해 주십사고 청했는데, 부처님은 지금은 탁발 공양을 하는 시간이지 법을 설하는 시간이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바히야는 부처님에게 더욱 가까이 가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 부처님은 제 생명에 위험이 닥쳐오는 것을 모르십니까? 제발 제게 지금 법문을 베풀어 주십시오!"
이때 부처님은 바히야가 120요자나 길을 단숨에 온 것과, 여래를 만나 지나치게 흥분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부처님은 그에게 즉시 법문을 베풀어 주시지 않고 그의 마음이 고요하게 진정되기를 기다리시었다. 바히야는 계속해서 끈덕지게 설법을 애원하였다. 부처님은 하는 수 없이 서신 채로 설법을 하시게 되었다.
"바히야여, 네가 어떤 것을 볼 때 너는 네 마음을 보고 있는 그 자체에 집중하고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여라. 네가 어떤 소리를 들을 때에도 듣는 것에 집중시키고 분명히 그것을 인식하여라. 네가 어떤 냄새를 맡을 때에, 혹은 어떤 음식을 맛볼 때, 무엇을 만질 때, 네가 어떠한 것을 생각할 때에도 너는 항상 그 대상에 마음을 집중시키고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여라. 그렇게 하면서도, 그것들이 다 마음의 대상일 뿐임을 알아 거기에 어떤 분별을 일으키지 말고 집착이나 싫어함도 일으키지 말아야 하느니라.“
위와 같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자마자 바히야는 즉시 아라한과를 성취하였고, 그는 부처님께 비구가 되게 해달라고 청했다. 부처님은 비구가 되고 싶으면 가사와 발우를 비롯한 물품들을 준비해 오라고 이르시었다. 그는 물품을 준비하기 위해 떠났는데, 그와 전생부터 원한 관계를 맺고 있던 소로 변신한 귀신에 밟혀 죽고 말았다.
부처님과 비구들은 탁발을 끝내고 나오시어 승원으로 향하시다가 도중에 바히야가 쓰레기더미 위에 죽어있는 것을 보시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그를 아라한에 합당하게 화장할 것과 그 유골을 탑에 안치 하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그가 법문을 듣고 바로 아라한과를 성취했다고 하였다. 비구들은 어떻게 단 몇 마디의 법문만을 듣고 아라한과를 성취할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에 부처님은 말했다.
"아라한을 이루는 것은 법문을 듣는 횟수와는 관계가 없느니라. 아주 짧은 단 한 차례의 법문일지라도 그것이 유익했다면 그 사실이 중요하니라." 부처님은 다음 게송을 읊었다.
열반을 깨닫는 것과 관련없는
일천 편의 의미없는 게송을 듣기보다는
단 한 편에 지나기 않을지라도
마음을 고요히 해주는 게송을 듣는 편이 훨씬 낫다.
[해설]
다루찌리야는 무역상인이었는데 상선을 타고 장사를 떠났다가 난파를 당해서 수빠라까(Suppāraka) 항구에 도착하였다. 그는 나무(Dāru) 껍질(cīriya)을 옷처럼 걸치고 살았는데 그의 옷을 보고 사람들은 다루찌리야(나무껍질 옷을 입은 자)라고 불렀다. 그는 천신(天神)의 충고를 듣고 즉시 뉘우치고 부처님을 만나러 갔는데 수빠라까에서 사왓띠(Sāvatthi)까지 1300km를 하룻밤 만에 걸어서 도착했다. 탁발하시는 부처님께 다가가서 법문을 청해 듣고는 즉시 깨달았다. 부처님은 그에게 ‘볼 때는 보기만 하고, 들을 때는 듣기만 하라’는 짧은 법문을 하였다. 사리뿟따가 앗사지비구의 게송을 듣고 바로 예류과를 얻은 것처럼. 가장 짧은 법문을 듣고 가장 빨리 깨달았다는 점에서 닮았다. 전재성은 ‘쓸데없는 천 마디 시구를 외우는 것보다’라고 번역했지만 ‘의미없는 게송’이라고 가치중립적인 단어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천개의 게송이 쓸데 없지는 않을 것이고 다만 외우는 사람이 그 게송에서 감동하지 못한 것이다. 천개의 게송이 다 쓸데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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