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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인도네팔 순례기’

 

 

인도네팔 순례기중에서

 

각전스님의 인도네팔 순례기중에서 카필라바스투 위치에 대한 이설들 (565~571p)을 설명하고 있는데 정작 결정을 못하고 있다.

 

 

카필라성의 위치에 대하여 1858년 이래 100년 이상에 걸쳐 많은 고 고학자들이 참여하였지만 의견이 엇갈리고있다. ()틸라우라코트Tilaurakor , ()피프라하와Piprahawa-간와리아Ganwaria , 그리고 ()두 개의 카필라바스투 설이 그것이다. 그 원인은 지금까지 많은 불교 성지 유적을 밝히는 데 주요한 근거가 되어 온 법현 스님과 현장 스님의 기록에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법현 스님은 카필라성 동쪽 50여리에 룸비니가 있으며, 현장 스님은 성의 동남쪽 30여 리에 있는 화살샘(箭泉)의 동북쪽 80~90여 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피프라하와는 룸비니에서 직선거리로 약 15km(38)이며, 틸라우라코트는 룸비니에서 29.3km(75) 거 리이다. 먼저 우리가 순례하려는 틸라우라코트가 카필라성이라는 틸라우라 코트 설을 살펴보자. 틸라우라코트는 네팔의 타울리하와Taulihawa 마을 (인구약 3만여 명, 2011)의 버스정류장에서 북쪽 4.4km 지점의 반강가강 동쪽 언덕에 있는 작은 마을(인구 약 5700, 1991)이다. 룸비니 서쪽으로 약 29.3km(90) 지점에 위치한다.

 

이 설을 지지하는 것은 첫째, 여기서 발굴된 성채의 장벽과 경계가 분명하다는 점과 석가족들이 여기에 오랜 세월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 여러 유물들이 발굴되었다는 점, 둘째 주변과의 지리적 위치 관계, 셋째 경전이나 기록상의 역사적 장소들이 발견된다는 점, 넷째 현장스님이 기록한 룸비니와의 거리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틸라우라코트Tilaurakor

 

첫 번째 사항을 보면, 이곳에는 남북 500m, 동서 450m의 누벽으로 이루어진 성곽 안에 왕궁 건물로 추정되는 큰 건축물의 흔적이 남아 있 으며, 성벽 4면에서 거대한 문의 조형물의 흔적들과 수문실守門室, 그리고 많은 수레바퀴의 흔적들, 대형 스투파들이 발견되었다. 이들이 B.C.E. 8세기 초엽부터 C.E. 2세기 말기에 이르는 문화유산 흔적임이 밝혀졌다." 특히 숭가 시대(B.C.E. 185~73)와 쿠산 시대(C.E. 30~375) 의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또한 정반왕의 본궁터로 추정되는 곳에서 'Sa-Ka-na-sya'라 표기된 테라코타 인장印章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C.E. 1세기에서 2세기에 이르기까지 석가족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고 한다.

 

둘째, 주변과의 지리적 위치 관계를 살펴보자. 틸라우라코트 주변으로 로히니강과 반강가강이 흐르고 있다. 로히니강은 틸라우라코트에서 동쪽으로 직선거리로 50km 정도 떨어져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강이다. 이 강은 콜리야족의 중심지이며, 한때 가뭄이 들어서 석가족과 강물을 놓고 분쟁이 일어나자 부처님께서 중재하신 바로 그 강이다. 지금도 여전히 같은 이름을 가지고 흐르고 있다. 반강가 강은 틸라우라코트의 서쪽을 인접해서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비스듬히 흐르고 있다.

 

셋째. 경전이나 기록상의 역사적 장소들이란 화살샘, 니그로다 숭원, 석가족이 몰살당한 호수, 구류손불과 구나함모니불의 탄생지에 세워진 아소카왕석주 등이다. 화살샘은 부처님이 쏜 화살이 맞은 곳에서 솟아 난 샘을 말한다. 틸라우라코트의 서남쪽 11.8km(30)* 지점의 바르다하와Bandahawa에 있는 쿠나운Kunaun 연못이 현재 화살샘이라 불리고 있다. 이를 현장 스님은 성의 동남쪽 30여 리라고 기록했다. 니그로다 승원은 정반왕이 부처님을 상봉한 자리에 세워진 사원이다. 이 사원의 유적이 틸라우라코트 남쪽 6.4km(16) 지점인 쿠단Kudan 마 올에서 발견되었다. <대당서역기>"성의 남쪽 3~4리에 니그로다 스투파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석가족이 몰살당한 호수가 틸라우라코트의 북쪽 인근 사가르하와 Sagarhawa 숲에서 발견되었다. 이 숲 안에 있는 람부 사가르Lambu Sagar(길 다란 연못)라는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에서 많은 유골, 유물이 발견된 것 이다. 구류손불의 탄생지에 대해서 현장 스님은 "(카필라)성의 남쪽으로 50 여리를 가다보면 옛 성에 이른다. 그곳에는 스투파가 있는데 가라가 촌타불(구류손불)이 태어나셨던 곳이다. 성의 동남쪽에 있는 스투파에는 가라가촌타불의 유신사리가 있다. 그 앞에는 높이가 30여 척에 달하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그 기둥 위에는 사자의 상이 새겨져 있는데 아소카왕이 세운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틸라우라코트의 남서쪽 7.9km(20) 지점의 고티하와Gotihawa에서 아소카왕석주가 발견되었다. 이를 고티하와 석주라고 한다. 명문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구류손불의 스투파 앞에 있던 아소카왕석주라고 본다. 구나함모니불의 탄생지에 대해서 현장 스님은 "가라가촌타불의 성에 서 동북쪽으로 30여 리를 가다 보면 오래된 거대한 성에 이르게 된다. 이 성에는 스투파가 있는데 가낙가모니불(구나할도니를)께서 태어나신 성으로 북쪽에 스투파가 있는데 이곳에는 그 여래의 유신사리가 있 다. 앞에는 높이가 20여 척에 달하는 돌기둥이 세워져 있으며 위에는 돌 사자의 상이 새겨져 있다. 아소카왕이 세운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또 하나의 아소카왕석주가 딜라우라코트 북동쪽 7km 지점의 니글 리-사가르Niglisagar라는 연못가에서 두 부분으로 절단되어 발견되었다. 이를 니글리하와 석주라고 한다. 두 장소 간의 거리도 13km(33)로 현 장 스님의 기록에 거의 일치한다. 석주에서 명문이 발견되어 구나함모니 불의 수투파 앞에 세워졌던 아소카왕석주임이 증명되었다. 이 두 주의 석주가 발견됨으로써 카필라성 근처에 있다고 하는 기록 상의 구류손불과 구나함모니불의 탄생지가 입증된 셈이다.

 

넷째 현장 스님이 기록한 룸비니와의 거리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현장 스님은 "(카필라)성의 동남쪽 30여 리에 화살샘이 있고 화살샘의 동북 쪽으로 80~90리를 가면 룸비니 숲에 이르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화살샘이 있다고 알려진 바르다하와 룸비니와의 거리(33.4km, 85)가 이 기록에 근접하고 있다. 방향은 동북쪽이라기보다는 동쪽이다. 이상의 주장들은 틸라우라코트가 카필라바스투일 가능성을 높여 주고 있지만, 틸라우라코트가 카필라바스투임을 증명하는 명문이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피프라하와Piprahawa-간와리아Ganwaria

피프라하와-간와리아 설은 피프라하와가 석가족의 승가람이 있던 곳의 유적이며, 간와리아가 궁성터라는 주장이다. 순례 첫날 델 리 박물관에서 진신사리를 친견하는 곳에서 언급했듯이, 인도-네팔 국경 남쪽 1km 지점의 인도영역 안에 위치하고 있는 피프라하와의 대형 불탑(아래쪽 직경이 약 35m, 높이가 약 6.5m)에서, 1898년 윌리엄 펩페William Peppe가 이 불탑이 근본불탑 중 하나이며 동시에 이곳이 카필라성임을 주장할 만한 명문이 새겨진 사리용기를 찾아냈다. 중앙 스투파의 정상에서 약 3m, 5.4m 되는 위치에서 각각 동석개(soapstone)으로 만들어진 사리기 두 점이 발견되었는데, 이 사리용기의 뚜껑 표면에서 브라흐미 문자로 "이것은 석가족 불세존佛世尊의 유골이 담긴 용기이며, 명예로운 형제· 자매· 처자들이 모신 것이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 설에 힘을 싣는 두 번째 유물은 스투파 동쪽 승원 유적에서 출토 된 40여 개의 테라코타제 인장이다. 여기에서 1~2세기경의 브라흐미 문 자로 "옴 데바푸트라 승원 카필라바스투 비구 상가(Om Devaputra Vihara Kapilavastu Bhikkhu Sanghas)"라는 글자가 정확히 판독되었다. 데바푸트라 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쿠산 왕조의 카니슈카왕(대략 C.E. 78~144) 에 의해 사용된 칭호이다. 이 설의 마지막 근거는 그 위치가 법현 스님이 기록한 카필라바스투 와 방향 및 거리상의 일치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룸비니는 피프라하와 동쪽 14. 5km(40)의 거리에 있는데, 법현스님은 동쪽 50리라고 기록 하고 있다. 다음 간와리아를 살펴보자. 간와리아는 피프라하와 남쪽 약 800m 되는 지점에 위치하며, 비교적 큰 규모의 승원 건축 유지 2기로 이루어진 유적이다. 하나는 각 변이 약 30m의 정방형 평면에 사방 26개의 승방이 배열되어 있는 건물 유적이며, 여기서 다시 북동쪽으로 30m 떨어진 곳에 각 변이 26m, 21개의 승방을 가진 건물 유적이 있다. 여기에 서 B.C.E. 800년에서 C.E. 4세기에 이르는 광범위한 시대의 유적들이 출토되었다.

 

 

법현 스님과 현장 스님의 기록에 의하면, 카필라바스투의 왕궁이 허 물어진 뒤에 그 위에 정사를 지었다고 한다. 이 기록에 의거해서 간와리아의 두 건물 유지를 정반왕의 정전 위에 지어진 정사와 마야부인의 침전 위에 지어진 정사로 추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성벽의 유지가 발굴되지 않았으며, 피프라하와의 거대한 스투파에 대해서 법현 스님이나 현장 스님 모두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또 현장 스님이 기록한 화살샘과 룸비니와의 거리인 80~90 여 리와도 부합하지 않는다.

 

()두 개의 카필라바스투 설

두 개의 카필라바스투 설은 고대의 카필라바스투는 틸라 우라코트에 있었으며, 코살라 비루다카왕에게 멸망당하고 난 뒤에 잔존 한 석가족들에 의해 새롭게 세워진 곳이 피프라하와-간와리아라는 주장(T.W. Davids)이다. 비루다카왕에 의해서 석가족이 멸망한 뒤에 세존께서 열반하셨고, 그때 석가족들 역시 쿠시나가르에 와서 여래의 사리를 8분해 갔으므로 석가족들은 비루다카왕에 의한 멸망 이후에도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3가지 설을 제시하고 있지만 결론을 못 내리고 있다. 특히 ()틸라우라코트Tilaurakor 설은 정말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결론이 없다. 이 것은 카필라바스투와 카필라바스투 왕궁을 구분하지 못하여 일어난 실수이다.

틸라우라 코트가 왕궁인 이유는 모든 왕궁들이 강옆에 위치하듯 여기 왕궁 옆에도 반가강이 흐르고 있고, 유적지가 왕궁처럼 생겼으며, 부처님이 왕궁을 방문할 때 머물던 니그로다 승원이 옆에 있고, 정반왕의 무덤이 있고, 왕궁 동쪽문앞에 칸다카의 무덤이 있고, 생활거주형 유물들이 나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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