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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토마스 머튼의 수행과 만남’을 읽고

‘토마스 머튼의 수행과 만남’을 읽고
 
 
얼마전 수사님의 초청으로 베네딕토회 수도회를 방문하여 수사,수녀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로서는 처음 가져보는 수사,수녀님들과의 모임이었는데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친구를 만난 것 같이 반갑고 즐거웠다. 평생을 기도와 자아성찰을 하며 살아가는 수도자들이었기에 더욱 동질감을 느낀게 아니었나 생각한다. 모임을 마치고 책 한권을 받았는데 그 책이 ‘토마스 머튼의 수행과 만남’이다. 토머스 머튼(1915년~1968년)은 수도사이자 문필가로, 칠층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콜럼비아 대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1941년 켄터키 겟세마니 수도원에 가입해 수도생활을 시작하였고 종교간의 대화를 추구하다가 1968년 태국에서 감전사고로 사망하였다.
 
토마스 머튼은 달라이라마를 찾아가 문답을 나누고 일본 불교학자 스즈키의 책을 탐독하고 스리랑카, 태국을 방문하는등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특히 선불교에 관심이 많았는데 ‘선(禪)과 그리스도교가 미래다’라고 말할 정도 였다고 한다. 머튼의 이 말을 저자는 "선(禪)은 지성적이든 신앙적이든 궁극적 실재를 개념화하는 일을 피하기에 머튼은 단 하나의 선(禪)을 언급했지만 사실상 두 종교 모두를 포함한다.”라고 멋지게 해석한다. 저자가 이러한 입장에서 앞으로 종교간의 대화를 추진 한다면 앞으로 많은 성취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진도가 쉽게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 있었다. 토마스 머튼이 사용한 영어 Contemplation은 일반적으로 명상(瞑想), 묵상(默想)으로 번역하는데 여기서는 관상(觀想)으로 번역하였다. 저자가 관상, 관상적인, 관상가라고 번역한 이유가 있겠지만 불교인의 입장에서는 어색하게 느껴졌다. 관상(觀想)이라는 단어는 마음속에 특정 이미지를 떠올리는 집중수행법으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가 책의 말미에 "관상은 종교 간 대화의 미래다!"라거나 ”모든 종교간 대화의 중심에는 반드시 '관상적 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할 때에도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모든 종교간 대화의 중심에는 반드시 '명상을 통한 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면 더 전달력이 있었을 것이다.
 
 
 
머튼은 “열반은 궁극적 존재 자체의 폭넓은 개방이며, 순수한 존재는 무한한 증여라는 것, 또는 절대적 비움은 절대적 자비라는 깨달음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들은 머튼이 두 종교간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긍정적인 시도라고 보여지면서도 어떤 불교인들에게는 거부감을 주기도 할것이다. 이원론적인 함정에 걸려들기를 싫어하는 불자들은 궁극적 존재, 순수한 존재, 절대적 비움, 절대적 자비라는 표현들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래와 같은 문장도 오해의 소지가 있다. "주체와 객체, 자아와 비자아를 분리하는 한계들을 초월할 때, 아트만(Atman), 공(空),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 파나와 바카(수피즘의 소멸과 환생)와 같이 다른 종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묘사하는 전체성에 도달합니다.” 위 문장은 힌두교,불교,기독교,수피즘에서 사용하는 표현의 차이를 나열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힌두교의 아트만(Atman), 불교의 공(空)’으로 정확하게 설명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상호의존,연기(綠起)는 모든 것과 사건들이 상호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공동생성되고(co-created), 공동존재한다(co-existent)는 것을 의미한다.”라는 문장도 “조건적으로 생성되고(co-created), 조건적으로 존재한다(co-existent)”라고 해석하였으면 좋았을 것이다. 공동생성, 공동존재라는 표현은 연기적 발생과 소멸의 즉각성, 동시성, 순차성을 포괄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불자들에게 고통(苦,dukkha)은 해탈하기 위해 극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실재인 반면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의 현실을 끌어안는) 십자가는 구원의 길이다."라는 표현은 두 종교의 특징을 잘 표현 한 것이다. 불교에서 고의 원인이 탐진치(貪瞋癡)이기에 고통을 극복하라고 한 것이고 고통을 끌어 안는 십자가의 길이 탐진치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기에 끌어 안아야 한다는 한 것이다. 이처럼 내 안의 탐진치가 기준이라면 어느 종교와도 만날 수 있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도 견해도 벗어놓고 '그대 괜찮아?'라고 스스로 묻고 상대방에 물어주는 것이면 충분하다. 천주교 수도자들과 불교의 수행자들이 자주 서로의 수행처소를 방문하고, 공통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같이 모여 명상한다면 머튼이 열어놓은 종교간의 대화는 더욱 발전하고 풍요로울 것이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만날 수 있다. 다름에도 불구하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모범들이 여기저기에서 만들어지면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도 신자들도 여유로워 질 것이다. 이 여유로움을 가지게 되면 다른 종교시설 마당에 와서 땅밟기 하는 것도 사찰에 들어가 불상의 목을 치거나 방화를 하는 등의 사건도 줄어들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이 회의는 정말 부럽고 놀라운 것이었다. 이 회의에서 발표된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에는 힌두교, 불교 등 다른 종교의 관행을 존중하고 인정한다고 밝히고 있다. 아울러 이슬람, 유대교 등과의 관계 개선도 천명하고 있다. 이 선언의 영향으로 ‘교황청 종교간 대화 평의회’가 설립되었고 머튼도 이러한 영향으로 종교간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3년간 준비기간을 거쳐 1962년 10월 11일부터 1965년 9월 14일까지 4회기 동안 로마에서 개최되었다. 매회 1달에서 3달동안 열렸던 회의는 매회 2000명 이상이 참석하여 진행되었다니 그 끈기와 집중력에 놀라울 뿐이다. 저런 것이 유발하라리가 말한 호모사피엔스의 가장 탁월한 장점인 '집단지성'일 것이다.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개최한 업적만으로도 기적심사를 면제받아 성인품에 올랐는데 이것은 가톨릭 내부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얼마나 중대한 사건이었는지를 인정한 것이다. 이런 공의회가 우리 불교의 승가에서도 열릴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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