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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부처님위에 무심도인이 있다고?

부처님위에 무심도인이 있다고?

 

 

부처님을 교주로 하기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라는 뜻에서 불교(佛敎)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부처님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고 그분에게 공양하는 것이 더 큰 공덕이 있다면 그 종교는 어떤 것일까? 지금도 부처님보다 더 높은 경지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종정 진제스님이시다. 해운정사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와 있다.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보면, .......'사바세계의 모든 중생에게 공양(供養)을 베푸는 것보다 소승(小乘)의 진리를 깨달은 한 아라한(阿羅漢)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더 복()이 많고, 일체의 아라한에게 공양 올리는 것보다 대승(大乘)의 진리를 깨달은 한 보살(菩薩)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더 수승(殊勝)하며, 일체의 보살에게 공양 올리는 것보다 부처님의 경계를 깨달은 한 분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더 수승한 복을 짓는 일이다. 그러나 일체의 제불(諸佛)에게 공양 올리는 것보다 무심(無心)의 경계를 수용한 한 분의 무심도인(無心道人)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이 더없이 수승한 일이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리법에는 이렇게 소승의 경지, 대승의 경지, 부처님의 경지, 그리고 부처님의 경지 위에 다시 무심도인의 경지가 있는 것입니다.“

 

사십이장경을 인용하며 "부처님 위에 무심도인의 경지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불교가 아니라 무심도인교라고 불러야 하고 삼귀의도 거룩한 무심도인께 귀의합니다라고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종정스님은 국민이나 불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말을 하며 무심도인에게 공양할 것을 권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무심도인은 누구인가?

 

 

사십이장경은 불교가 중국에 전해지고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최초로 번역한 경전으로 그 내용이 간결하고 부피가 작아서 불교 입문서로서 불자들이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다. 그런데 사십이장경 11장에는 천억의 삼세제불(諸佛)에게 공양 올리는 것보다 무념(無念)무주(無住) 무수(無修) 무증(無證之者)한 자에게 공양을 올리는 것만 같지 못하다.(飯千億三世諸佛不如飯一無念無住無修無證之者)라는 구절이 실제로 등장한다. 이것을 보고 종정스님도 부처님의 경지 위에 다시 무심도인의 경지가 있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佛言飯惡人百不如飯一善人飯善人千不如飯一持五戒者飯五戒者萬不如飯一須陀洹飯百萬須陀洹不如飯一斯陀含飯千萬斯陀含不如飯一阿那含飯一億阿那含不如飯一阿羅漢飯十億阿羅漢不如飯一辟支佛飯百億辟支佛不如飯一三世諸佛飯千億三世諸佛不如飯一無念無住無修無證之者 -사십이장경 11-

 

 

   해운정사 홈페이지(http://www.seon.or.kr/work/annae/annae.php)에서 퍼옴

 

그러나 사십이장경 11장의 내용에 대응하는 경을 니까야에서 찾아 비교해보면 한문번역에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십이장경에는 공양함만 같지 못하다라는 불여반(不如飯)이라는 표현이 9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 공양이라는 말이 반복되어 나오다보니까 마지막에도 기계적으로 불여반(不如飯)을 붙인것이 화근이다. 보시공덕을 설명할 때는 공양한다는 반()자를 붙여야 하지만 수행공덕을 말할때는 공양한다는 반()자를 붙여야 빼야한다. ()자를 빼면 천억의 삼세제불(諸佛)에게 공양 올리는 것보다 무념,무주,무수,무증한 자와 같지 않다(不如一無念無住無修無證之者)”라는 문장이 되어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보시공덕보다 스스로 수행해서 무심도인이 되는 것이 더 수승하다는 내용이 된다. 보시공덕보다 수행공덕이 수승하다는 설명은 부처님이 경을 설한 본래 취지이다. 앙굿따라니까야 웰라마 경(A9:20)에서는 보시공덕의 차이를 보시받는 대상에 따라 설명하다가 보시공덕보다는 수행공덕이 훨씬 수승함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장자여, 웰라마 바라문이 큰 보시를 했지만 견해를 구족한 한 사람을 공양한다면, 이것은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견해를 구족한 백 명의 사람들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일래자를 공양한다면...백 명의 일래자를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불환자를 공양한다면 백 명의 불환자를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아라한을 공양한다면 백 명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벽지불을 공양한다면 백 명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여래ㆍ아라한ㆍ정등각을 공양한다면 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승가를 공양한다면 사방 승가를 위하여 승원을 짓는다면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한다면 청정한 마음으로 학습계목을 받아 지녀서 생명을 죽이는 것을 멀리 여의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는 것을 멀리 여의고, 삿된 음행을 멀리 여의고, 거짓말을 멀리 여의고, 방일하는 근본이 되는 술과 중독성 물질을 멀리 여읜다면 소젖을 한번 짜는 동안만큼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다면 손가락을 튀기는 순간만큼이라도 무상이라는 인식을 닦는다면, 이것이 이전 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웰라마경(A9:20)

 

부처님이 아직 깨닫지 못한 보살이었을 때 웰라마라는 이름의 바라문으로 살았다. 그때는 웰라마 바라문은 보시를 많이 했지만 공덕이 적었다. 깨닫고 보니 보시를 하더라도 정신적인 수준에 따라서 공덕의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보시공덕의 차이는 수다함-사다함-아나함-아라한-벽지불-부처님-부처님의 승가-사방승가를 위해 승원을 보시하는 것 순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보시를 하더라도 보시공덕보다는 수행공덕에 미치지 못한다. 수행의 출발은 삼귀의를 하는 것이다. 스스로 청정한 마음으로 부처님과 법과 승가에 귀의하고 학습계목을 받아 지녀서 계를 잘 지키고 자애관 무상관을 닦는 수행공덕은 보시공덕에 비교할수 없을 만큼 무량하다. 보시공덕의 차이를 설명하면서도 수행의 중요성을 잘 드러내고있는 것이 사십이장경11장과 웰라마경인 것이다. 사십이장경에는 승가(사방승가)에 보시하는 것과 삼귀의 하는 것등이 생략되었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웰라마경에서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최고의 보시공덕임을 설명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현재 조계종에서는 승가에 귀의합니다(buddhaṃ saraṇaṃ gacchāmi)를 스님들께 귀의합니다(bhikkhū saraṇaṃ gacchāmi)로 만들어 놓고 있는데 이것은 승가의 의미를 크게 훼손한 것이다.   

 

웰라마경과 대응하는 中阿含 155 須達哆經에서도 웰라마경처럼 사방승가를 위해 승원을 지어보시하는 것보다 스스로 환희심으로 삼보에 귀의하고 계를 받는 것이 더 수승하다고 설명하고 있다. (若梵志隨藍行如是大施及施滿閻浮場凡夫人食施百須陀洹百斯陀含百阿那含百阿羅訶百辟支佛食作房舍施四方比丘眾若有歡喜心歸命三尊佛法比丘眾及受戒者此於彼施為最勝也). 불설장자보시경(T74佛說長者施報經)에서도 정견인(正見人)-사다함-아나함-아라한-연각-부처님-승가-사방승가의 순서로 보시공덕을 설명하고 있는데 불여시(不如施)라는 문장이 14번 반복해서 나타난. 그리고 바로 삼귀의 하는 수행공덕이 설명된다(施四方一切持鉢僧食不如施四方一切僧園林施四方一切僧園林不如施四方一切僧精舍施四方一切僧精舍不如盡形志心歸依佛僧)

 

 

 

 

이처럼 니까야의 웰라마경과 수달다경등을 근거로 사십이장경의 번역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무심도인이 부처님보다 높은 경지가 아니다. 사십이장경에서는 마지막에 ()자 한 글자를 실수로 잘못 삽입하는 바람에 부처님보다 높은 경지를 상정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번역자의 실수일 수도 있고 편집과정에서 일어난 착오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번역이 너무 오래동안 전승되어온 까닭에 사십이장경을 인용하여 법을 설하는 많은 선배스님들이 부처님보다 높은 무심도인 타령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십이장경(정우서적)을 해설한 성법스님은 "부처님은 삼세제불보다 더욱 존귀한 무념, 무주, 무수, 무증한 분이 있다고 하셨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송강사 강주를 지낸 지운스님도 "無念 등을 성취한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이 낫다는 말은 공양하는 자의 수행의 경지와 상관관계가 있다. 말하자면 부처님은 보는 사람의 경지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라며 공양하는 사람의 수준을 문제 삼는다. 불학연구소장 정운스님은 무념, 무주, 무수, 무증한 자에게 공양하는 것이 큰 공덕이 된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에 입각해 진정한 수행의 길을 걷고 사람에게 공양을 해야 자타의 공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해석들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구절 즉 잘못 번역된 구절을 보고 어떻게 해서든 이해해 보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이제 한문경전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니까야등 다른 경전들과 상호 비교를 통해서 교정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런면에서 초기불교가 수입된 것은 한문불교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축복이다. 애매한 부분을 바로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스님중에는 삼세제불(諸佛)보다 높은 무심(無心)도인의 경지를 쫓다가 정신이 이상하게 되어 환속한 분도 있다. 사십이장경 11장 부분을 비판하게 된 것도 그 스님을 만나 그 피해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부처님보다 더 높은 무심도인을 말하면서도 종정스님은 당신이 부처님으로 이어지는 법맥의 계승자임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해운정사 홈페이지에는 진제 대선사께서는 경허-혜월-운봉-향곡 선사로 내려오는 부처님의 심인법(心印法)을 이으신 제 79대 법손(法孫)으로서 이 시대의 정안종사(正眼宗師)이십니다.”라고 소개되고 있다. 부처님보다 높은 무심도인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부처님 법맥(法脈)의 전승자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강조하는 것은 모순이다. 더구나 당신이 부처님으로부터 계승된 법맥을 받은 사실을 확인시키기 위하여 부처님, 마하가섭, 아난등과 같은 선상에 종정스님의 석상(石象)을 조상해 놓고 매년 다례재를 올리고 있다. 살아있는 사람이 자신의 동상을 모셔놓고 그곳에 대고 다례재를 지내고 있는 것이다. 주간조선기자는 진제종정스님의 석상을 보고 다음과 같이 기사를 쓰고 있다.

 

 

 

큰법당인 원통보전 서남쪽에 있는 불심인조사전(佛心印祖師殿)’. 석가모니의 법손(法孫)으로 꼽히는 10명의 고승을 커다란 화강석 석상으로 하나하나 조각해 모셔놓은 전각이었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로 초대조인 마하가섭존자(1대조)와 보리달마대사(28대조), 태고보우국사(57대조)를 위시한 국내외 석가모니 법손들의 석상이 늘어서 있었다. 맨 왼쪽 끝자리는 ‘79대조 진제법원선사라는 진제 스님의 석상이 차지하고 있었다. 덕망 높은 고승이라지만 아직 생존해 있는 승려의 석상을 만들어 둘 정도니 그 법력과 수완이 범상치 않은 듯 보였다.“ 주간조선기사(2017.07.31.)

생존해 있는 승려의 석상을 만들어 둘 정도니 그 법력과 수완이 범상치 않은 듯 보였다.“라는 기자의 일침에 조계종에 몸 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어찌 이런 황당한 일이 이 시대에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2019 5회 불조심인전등다례대재에도 많은 내빈이 참석하여 다례재를 봉행하였고 원로의원, 선원장, 그리고 교육원장 진우스님까지 다례재에 참석하고 축사를 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한 대중들은 이런 풍경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걸까? 이 것에 대해서 종도들 중에서는 이의제기 사람이 아무도 없고 정론직필을 해야 할 불교신문, 법보신문, BTN, BBS등도 비판 한마디 없이 공손하게 보도만 할 뿐이다.

 

 

또한 해운정사에서는 삼재기도를 장려하고 있다. ”삼재란 자신이 무한한 과거생에 가지가지 지은 죄업장의 과보로서, 삼재가 들면 삼 년동안 이런 것들로부터 고통받게 됩니다. 삼재는 12년마다 누구에게나 한 번씩은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삼재가 든 해에는 과거 죄업을 참회하고 불보살님 가피력으로 모든 액난을 소멸하는 삼재기도를 올립니다.“

 

12년마다 누구에게나 한번씩은 돌아오는 액난을 말하는 것이 어찌 불교라고 할 수 있을까? 조계종의 최고 어른이며 가장 모범을 보여야할 종정스님이 주석하는 사찰에서 이렇게 비불교적인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통탄할 일이다. 불의(不義)를 보고도 불의인줄 모르고 비법(非法)을 보고도 비법인줄 모르고 있다. 부처님은 수행자를 판단 할 때 그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어느정도 있는지 면밀히 조사하고 판단하여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치셨다.

여기 비구가 어떤 마을이나 성읍을 의지하여 머무는데장자나 장자의 이들이 그를 찾아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세 가지 법들에 입각해서 그를 조사한다. ‘이 존자는 그의 마음이 탐욕의 법들에 휩싸여 알지 못하면서 나는 안다라고 말하고 보지 못하면서 나는 본다라고 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긴 세월동안 불이익과 고통의 길로 재촉하는 그런 탐욕의 법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그를 조사하여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법들로부터 청정함을 관찰한 후에 그는 그에게 믿음이 생긴다. 믿음이 생긴 자는 그를 친견한다.... 뜻을 자세히 살필 때에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인다. 법을 사유하여 받아들이기 때문에 열의가 생긴다. 열의가 생길 때에 시도한다. 시도할 때 세밀하게 조사한다. 세밀하게 조사한 뒤 노력한다. 노력할 때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실현하고 통찰지로써 그것을 꿰뚫어본다.”(M95)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로 온 국민이 지치고 힘들어하고 있다. 기독교계에서 이단이라 일컽는 신천지를 비롯한 성북구 사랑제일교회에서 많은 감염자를 내고 있어 국민들의 걱정이 늘어만 가고 있다. 종교인들이 세상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인들이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상식적이지 않은 종교, 집단이기주의를 자극하는 종교, 인간의 욕망을 부채질하는 종교는 사라져야한다. 불교계는 몇 년전에 불자가 삼백만명이 줄어들었고 출가자는 급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뼈를 깎는 반성으로 불교가 사회에 무엇을 해줄수 있는지, 사회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살피고 또 살펴야 한다. 해운정사 홈페이지에는 부처님의 경지 위에 다시 무심도인의 경지가 있는 것입니다.“라는 글은 오래전에 보았다. 2년전에는 '조계종은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제목으로 비판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누구하나 문제를 제기하고 바로잡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동안에 종정스님 당신의 석상을 모셔놓고 다례제를 지낸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조계종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종단을 대표하는 종정스님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서 종단의 그 누구도 문제제기하지 않는 상황은 참으로 이상하다. 어른스님이 무슨 말을 하든간에 문제제기를 안하는 것이 어른스님을 잘 모시는 것이라고 착가하고 있는건지 아니면 종정스님이 무슨 말을 하든지 나만 잘살면 된다는 개인주의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종정스님이 대한 비판을 하면 종단으로부터 징계받게 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 때문인지 알수 없다. 만약 이 글이 부처님의 경과율에 맞지 않으면 종정스님을 공개 비판한 죄를 물어 조계종호법부는 나를 징계해야 할 것이다. 2018년에 종단적패청산운동을 했다고 공권정지 3년의 징계를 받고 있는 중이므로 가중처벌도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나의 지적이 맞고 오랫동안 잘못 전하여진 번역의 문제를 바로잡는 계기가 된다면 표창을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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