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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작은 목소리가 필요하다

작은 목소리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매일매일 갈등과 고통속에서 살고 있다. 왜 고통스러운지 이유도 모르고 해결방법도 모르는 사람들이 아우성치고 있다. 쉽게 이해되는 갈등과 고통도 있지만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고통도 있다. 나만의 고통도 있지만 가족, 마을등 공동체가 겪는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는 그런 고통도 있다. 어떤 고통은 육체적이며 어떤 고통은 정신적이다. 어떤 고통은 독립되어 있으며 어떤 고통은 연결되어 있다. 고통에 대한 세심한 자각이 필요한 것은 고통을 알아야 고통의 원인을 소멸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는 동안 행복하게, 만족스럽게 살고싶다. 행복하게만족스럽게가 매순간 내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 어떤 행동을 취하게 할런지는 알 수 없다. 행복하게만족스럽게가 나에게 또 다른 고통의 원인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오히려 삶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기에 고통을 인내하며 살겠다는 각오로 사는 것이 행복만족에 더 가까운 지혜로운 태도일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인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 인내하는 자가 도달해야 하는 이해의 단계가 있다. 부처님이 고통을 중심에 놓은 사성제라는 가르침을 펴신 것은 불교라는 종교가 결코 삶을 떠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내일을 위하여 오늘을 저당 잡히지 말며, 과거를 회상하느라 오늘을 흘려보내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고통은 현재에서 발생한다. 고통은 지금 여기의 이야기이다. 고통은 관념이 아니다. 이해하는 만치 느끼는 만치 고통은 다가온다. 업을 성찰하려고 할 때 부처님도 심사숙고 하셨다고 전해오듯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려는 것은 깊은 지혜로운 성찰이 요구된다. 일부 불교인들은 세상의 모든 고통을 개인의 고통으로 축소하고 단일화하여 집착을 줄이는 것으로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현재 실업자가 300만 명에 육박하고 청년의 절반이 백수이며 청년 자살율이 세계최고인 우리의 현실을 진단할 때 불교에서 집착을 줄이라는 것으로 그들에게 대답이 될 수 있을까? 우리의 불교는 자본주의에서 세계최대의 기업, 세계최고의 기술을 꿈꾸는 기업인들에게 어떻게 집착을 줄여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의 성취를 위하여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욕망의 소멸을 이야기하는 불교의 목소리는 작기만하다. 물론 만족을 말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불교의 궁극의 지혜이다. 그러나 더 좋은 것, 더 빠른 것, 더 편리한 것을 우리 눈앞에 매일매일 보여주는 현재의 자본주의에서 만족은 순간순간의 투쟁속에서 간신히 성취된다. 자신의 욕망을 보는 이에게, 그 욕망이 어떻게 고통의 결과로 나타나며 어떻게 고통의 원인으로 작동하는지를 알아채는 이에게 간신히 만족이 당도한다. 불교는 이제 자본주의불교다.

 

나라가 혼란스럽다. 정확히 말하면 나라가 혼란스럽다한다. 여기저기에서 박근혜, 최순실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그들과 같이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고 그들과 잠이든다. 경이롭다. 한반도에 사는 우리의 특성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매일매일 어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티비와 종편의 속성에 우리가 끌려다니는 것인가? 대통령이 알아야하는 일을 국민개개인이 다 알고 있는 시대다. 이렇게 정보가 일사분란하게 공유되고 평등하게 소비되는 시대는 축복일 수 있겠다. 누구와도 토론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토론이 여기저기에서 벌어지고 있다. 문제는 너무나 큰 이슈가 개인의 삶을 덮어버리고 언론이 내보내는 이슈에 속수무책으로 따라다니며 금붕어처럼 입을 헐떡이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 목소리가 필요하다. 우리의 목소리가 필요하다. 사회의 부조리를 질타하는 큰 목소리도 필요하지만 우리 불교 내부 문제를 잘 해결하려는 작은 목소리가 더 절실하다. 사람들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서도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결해야 한다. 행복과 만족은 우리 승가의 생활태도이다. 그 누구에게 가르치고 알려주기 전에 우리가 그런 생활을 영위해야한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되지 못하고 있다. 자본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이윤 추구하는 하나의 집단이 되어 있다. 백번양보하여 이윤추구하는 집단이라 하더라도 그 이윤을 공적으로 사용하면 이것이 곧 우리의 행복과 만족을 위한 일이 된다. 승가전통을 계승하고 부처님의 유지를 실현하는 일이 된다. 그러나 승가가 그렇게 운영되지 않고 있기에 세상에 행복과 만족을 가르쳐주지 못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해야할 작은 이야기는 총무원장 직선제이다. 우리가 이 일을 성취하지 못하고 박근혜와 최순실을 논할 자격이 없다. 불교안의 박근혜와 최순실은 널리고 널렸다.

물론제도의 개선 만으로 승가공동체가 회복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직선제를 최고의 이상제도라고 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승가대중이 원하고 있는 제도이고, 승가의 부익부빈익빈의 구조를 개선할 수 있는 제도이다. 대중의 손으로 뽑힌 사람이 그나마 현실의 잘못된 주조를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직선제를 주장하는 것이다. 승가 화합을 위해서 직선제가 되어야 한다. 이익의 균등한 분배를 위해서, 유능한 승가교육을 위해서, 토론문화의 부활을 위해서, 사회민주주의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궁극적으로 세상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서 우리에게 직선제가 필요하다. 우리의 작은 이야기가 사실은 세상을 변화시킬 큰 이야기이다.

 

대통령이 퇴진한다 하더라도, 얼굴의 교체만으로 끝날 수 있다. 박근혜도, 최순실로 상징되는 부패기득권은 자본-정권-사법부-보수언론-종교지도자-어용지식등 어디에서나 다시 부활할 것이다. 아니 그들은 한번도 죽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들을 몰아내고 제거하려는 시도는 생각속에서나 가능하다. 우리가 제거해야할 기득권은 때론 우리의 선배, 후배, 아버지, 삼촌, 조카일 수 있으며 은사스님, 사형과 사제일 수가 있다. 심지어 나 자신일 수가 있다. 그러므로 나와 우리부터 시작하는 작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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