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에서 공과 공성의 차이
현재까지 반야심경의 한역본은 일곱 개가 존재한다. 구마라즙과 현장스님만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으로 번역하였지만 다른 번역가들은 모두 조견오온자성개공(照見五蘊自性皆空)으로 번역하였다. 원문 그대로 스와바하(svabhāva)를 자성(自性) 혹은 체성(體性)으로 번역한 것이다. 스와바와(svabhāva)는 ‘sva(스스로) + bhāva(존재)’의 합성어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 ‘단독적인 존재’라는 뜻이다. 수박이 공하다는 것과 수박에 씨가 공하다는 것이 다르듯 오온이 공하다라는 것과 오온의 자성(svabhāva)이 공하다(śūnya)라는 것은 매우 다르다. 원문에 자성(svabhāva) 공하다(śūnya)라고 되어있다는 것을 안다면 반야심경이 어렵지 않게 이해 될 것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무아경의 설명방식에서 유래하고 있다. 무아경(S22:59)에는 다음과 같이 무아를 표현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몸은 자아(atta)가 아니다. 만일 몸이 자아라면 이 몸은 고통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몸에 대해서 ‘나의 몸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몸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면 그대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몸은 자아가 아니기 때문에 몸에는 고통이 따른다. 그리고 몸에 대해서 ‘나의 몸은 이와 같이 되기를. 나의 몸은 이와 같이 되지 않기를.’이라고 하더라도 그대로 되지 않는다....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아니며,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아야 한다.”
초기경에는 몸이나 느낌들이 나라면 내가 통제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들을 통제할 수 없으므로 ‘몸은 자아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아따(자아)라는 용어로 실체를 부정하고 있다면 오백년이 흐른뒤 반야심경에서는 스와바하(자성)라는 용어로 실체를 부정하고 있다. 반야심경에는 무아경처럼 ‘~가 없는 상태’라는 아공(我空)의 표현이 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야심경에서 명사 공성(suññatā)과 형용사 공(śūnya)을 다같이 공(空)이라고 번역해 놓았다. 형용사 공(śūnya, P.suññā)은 ‘~이 공하다’ ‘~이 비었다’는 뜻이다. 오온에 자성이 공함을 확실히 보았다가 그런 표현이다. 니까야에서도 형용사 공은 ‘이것은 자아나 자아에 속한 것이 공하다’ ‘이 확고부동한 마음의 해탈은 탐욕이 공하고 성냄이 공하고 어리석음이 공하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형용사 공(空)과 불공(不空)은 없다, 있다의 의미로 사용된다. 소공경에서는 “그는 거기에 없는 것(na hoti)은 공하다(suññaṃ)고 관찰하고 거기에 남아있는 것(avasiṭṭhaṃ)은 존재하므로 이것은 있다(atthī)라고 꿰뚫어 안다.”라고 설명한다. 있다(atthī), 없다(natthī)라는 일상적인 용어로 궁극의 목표와 수행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세상에서 현자들이 없다(natthī)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없다(natthī)고 말하고 세상에서 현자들이 있다(atthī)고 동의하는 것을 나도 역시 있다(atthī)고 말한다.’고 말하는 꽃경(S22:94)의 표현과 같다.
부처님은 당신이 깨달은 심오한 법을 설명할 때 있다,없다는 세상의 어법에 따르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유무는 상견과 단견에 떨어지는 것과 다르다. 상견과 단견은 동사 있다(atthī)와 없다(natthī)가 명사 있음(atthitā)와 없음(natthitā)이 될 때 나타난다. 동사가 명사가되어 사용될 때 상견단견의 표현이 된다는 것은 깊이 음미해야 할 대목이다. 깟짜야나곳따 경에서는 있음(atthitā)와 없음(natthitā)을 극복하여 중으로(majjhena) 법을 설한다고 나타나는데 이때의 있음과 없음은 존재성(存在性)과 비존재성(非存在性)의 뜻이다.
“깟짜나여, 이 세상은 대부분 두 가지를 의지하고 있나니 그것은 있음(atthitā)과 없음(natthitā)이다. 깟짜나여, 세상의 일어남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사에 대해 없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깟짜나여, 세상의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에게는 세상에 대해 있다는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명사 있음(atthitā)은 본래부터 있음, 영원히 있음의 뜻이 되어 기독교의 절대신, 창조신 브라흐마같은 존재를 인정하는 상견(常見)이 되고 명사 없음(natthitā)은 본래부터 없음, 영원히 없음의 뜻이 되어 단견(斷見)의 입장이 된다. 이러한 상견과 단견을 논파하고자 부처님은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설명하며 중으로(majjhena) 법을 설하시고 후대에 용수보살은 중론에서 깟짜나경을 인용하여 유무중도를 설명한다. 유무중도를 통해서 논파되는 유무는 부처님이 사용하신 일상적인 어법의 있다,없다가 아니다.
역사적으로 고행주의를 추구하는 것은 아뜨만과 브라흐마라는 존재성(atthitā)을 믿는 이들이 추구했으며 쾌락주의는 비존재성(natthitā)이라는 세계관을 가졌던 이들이 추구하였다. 인간의 행위는 그가 가진 세계관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초전법륜경에서 오비구에게 고락중도를 통해서 유무중도를 실천하라고 설명하고 다른곳에서는 유무중도를 통해서 고락중도를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공성의 경지,열반의 경지는 다양하게 표현되는데 무위상윳따에는 33개의 열반의 동의어가 등장하고 우다나 열반경에서는 모든 것이 부정되는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 모든 것을 부정하고나서 ‘이것이야 말로 괴로움의 끝’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완전한 열반에 들어간다는 반야심경의 표현과 비숫하다. 반야심경은 아공의 표현으로 시작해서 법공의 설명으로 끝나는데 이러한 법공의 표현들을 보고나서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이 초기경보다 더 뛰어난 것이라고 오해하게 만든다. 사리뿟따가 관세음 보살에게 질문하는 설정이 그런 착각을 부채질하였고 ‘소승의 경율을 배우지 마라’는 범망경등의 가르침이 대승경전이 우월하다는 확신을 갖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탐진치가 소멸했다’는 표현이나 ‘탐진치가 본래 없다’는 표현은 내용이 같은 것이다. 불멸후 금강경이나 반야심경이 나타날 때에 아공으로 시작해서 법공의 표현방식이 나타나는 것은 그 당시에 법상(法相)에 집착했던 병폐를 치유하기 위함이다. 부처님 시대에는 아공(我空)만을 말해도 폐단이 없었지만 세월이 흘러 법상(法相)에 집착하는 무리들이 생겨나서 법공(法空)의 약이 요구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반야심경은 부처님의 언어표현으로 아공을 설하고 시대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법공을 설하는 것으로 천년의 불교역사를 연결하고 있다. 구마라즙과 현장이 자성을 빼놓고 번역하는 바람에 본래의 취지가 훼손되어 버린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요즘처럼 2600년 불교역사를 꿰뚫는 정보를 공유하는 시대에는 법공의 약은 필요치 않다. 우리가 계속 반야심경에서 강조하는 법공의 약을 복욕한다는 것은 건강한 사람이 약을 먹는 것처럼 불필요하고 번거러운 일이다.
그렇다면 종단에서 반야심경 봉독하는 전통을 버리고 대신에 무아경을 봉독하는 것이 훨씬 장점이 많으리라고 본다. 반야심경에는 드닷없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하여 일체고액을 떠났다고 끝나는 반면 무아경은 왜 몸이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닌지를 남녀노소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자세히 설명한다. 내 맘대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몸에 대한 통제권이 없기에 몸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라는 겁니다. 느낌을 조절할 수 없기에 느낌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무아경의 설명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佛法의 특징과 잘 부합한다. 이러한 점 때문에 반야심경보다는 무아경을 봉독하는 것이 수행과 포교에 효과적일 것이다. 우리의 전통이라고 무조건 신봉할 것이 아니라 불교역사를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무엇이 현 시대에 필요한가를 고민해야 할때이다. 실제로 천장암 주지소임을 볼 때 반야심경 대신 무아경을 봉독하여 보았는데 가르침의 뜻이 쉽고 부처님 육성을 듣는 듯하다고 감동하는 불자님들이 많았다.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일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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