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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백장암석탑 역사

1980년 2월2일 새벽. 어둠에 잠긴 남원 실상사 백장암에 수상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눈보라를 동반한 강풍이 불어오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 속에서도 움직임은 신속하고 치밀했다. 그림자의 움직임에 따라 2m 넘는 각목들이 하늘거렸다. 이윽고 백장암을 빠져나온 그림자들은 대나무숲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검은 움직임들이 멈춘 곳은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 앞. 달빛을 받은 각목이 번뜩이며 하늘을 갈랐다. 기단부를 제외한 2·3층 탑신 전체가 산산조각 나며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보륜(寶輪) 3개 중 2개가 깨졌다. 옥개석은 눈 속에 파묻혔다. 대한민국 국보 10호가 무참히 파괴됐다. 야음 틈타 괴한들 침입해 각목을 휘둘러 탑신 파괴 보륜·옥개석 무너지고 깨져 9년 뒤 석등 또다시 침탈 그날 새벽, 백장암을 방문했던 실상사 스님이 포행을 하던 중 이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온갖 부침을 겪으면서도 1000년 세월 동안 온전한 모습을 지켜왔던 백장암 삼층석탑이 처참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탑이라고 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기단부 정도밖에 없었다. 탐욕으로 얼룩진 파괴의 흔적들은 새벽 내 내린 눈에 덮여있었다. 스님은 백장암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주지스님의 얼굴이 굳어졌다. 수사관들이 백장암에 모여들었다. 당시 백장암에는 수행하기 위해 들른 이들을 포함해 9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에게서 당일 새벽 1시20분경 삼층석탑 방향에서 덜컹이는 소리를 들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그는 소리를 듣고 예불이 시작된 것으로 생각해 방을 나가려다 시간을 확인한 뒤 다시 자리에 누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에 범행이 진행된 것으로 추정했다. 또 각목을 휘둘러 석탑을 부셨다는 점으로 미뤄보아 전문도굴꾼이 아닌 불량배들의 소행인 것으로 판단했다. 범인들이 국보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면서까지 얻으려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백장암은 1972년 2층 옥개석을 보수하기 위해 탑을 해체했다. 이 과정에서 사리를 넣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 속 사리는 어느 순간 보물로 둔갑했을 것이고, 욕망에 눈이 먼 몇몇이 각목을 준비해 백장암에 잠입했을 것이다. 그들에겐 삼층석탑이 국보도, 불자들의 예경 대상도 아닌 그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파괴해야 하는 돌덩어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꼭 6개월 뒤, 백장암 삼층석탑이 파손된 채 방치되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출입금지 경고판을 세운 것 외에 산산조각 난 탑신이 그대로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변한 것은 수북하게 덮여있던 눈이 사라졌다는 사실뿐이었다. 이에 대해 담당자는 파손부위에 사용할 스위스제 접착제를 구하지 못해 착공이 늦어지고 있다는 해명을 했다. 한동안 복원작업이 시행되지 않은 백장암 삼층석탑은 장마철 장대비가 균열부위에 스며들어 풍화작용이 우려되는 등 2차 피해가 진행되고 있었다. 탐욕과 무관심이 남긴 국보의 수난이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80년 사건 당시 범인들은 삼층석탑 곁에 있던 보물 40호 백장암 석등도 완전히 무너뜨렸는데, 1989년 10월5일 또 다시 절도범이 침입해 보주를 훔쳐 달아났다. 석등은 이번에도 파괴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리고 2014년, 문화재청은 전국 지자체와 함께 주요 문화재들을 조사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백장암 삼층석탑은 보수 정비가 필요한 D등급을 받았다. 탑신부 상륜부 파손된 부위가 심하게 부식돼 보존 방안 수립이 시급한 상황이었다. 선조들의 얼과 혼, 신심이 빚은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다. 그날 새벽, 백장암 삼층석탑에 각목을 휘두른 건 범인들이었다. 이후 무관심의 각목을 손에 쥐었던 것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 아니었을까. [1350호 / 2016년 7월 6일자 / 법보신문

 

 

수려한 조각으로 탑장엄 주악상 새겨 부처님 찬탄 목조건축 양식 표방해 통일신라 연구에 유용 최초의 불탑은 부처님 열반 직후 생겨났다. 2500여년 전 부처님이 쿠시나가라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자 사람들은 부처님의 유해를 다비했다. 다비 후에 나온 부처님 사리는 8개 부족이 나눠가진 뒤 각각 탑에 모셨다. 이와 함께 사리를 모셨던 항아리와 다비할 때의 재(灰)를 봉안한 탑이 세워지면서, 최초의 탑은 모두 10기가 됐다. 이후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 왕이 부처님 사리를 분배해 곳곳에 8만4000기의 탑을 세움으로써 탑은 많은 사람들에게 귀의의 대상이 되고, 출.재가를 막론하고 탑을 보면 공양을 올렸다. 탑이 곧 부처님을 상징하게 된 것이다. <사진설명: 국보10호 백장암 삼층석탑> 우리나라 역시 중국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가사와 사리를 받은 신라의 자장율사(590~658)가 귀국해 세운 황룡사 9층 목탑을 비롯해 수많은 탑을 세워왔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의 전탑이나 일본의 목탑과 달리 석탑이 주를 이뤘으며 이후 석조각이 발달하면서 독창적인 양식으로 탑을 장엄하게 된다. 이런 흐름 속에서 태어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남원 실상사 백장암 삼층석탑이다.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탑은 화려한 조각장식이 특징이다. 탑 전체가 조각으로 돼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탑신(塔身)에서 지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각이 나타난다. 우선 탑신의 1층에는 보살상과 신장상(神將像)이 각각 2구씩 조각됐다. 또 2층에는 음악을 연주하는 천인상(天人像)이 있고, 3층 4면에는 천인좌상(天人坐像)이 1구씩 새겨져 있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백장암 삼층석탑은 탑에 주악상을 새긴 대표적인 예로, 탑신부 2층에 새겨진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상(奏樂天人像)’이 특히 유명하다. 각 면에 2구씩 양각돼 있는데, 각각 공후.생황.비파.장구.배소.나각.젓대.피리 등을 연주하고 있다. 이들은 부처님께 음악공양을 올리는 존재로, 대각을 이룬 부처님에 대한 찬탄과 공경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백장암 삼층석탑 탑신부 전체 4면을 장엄한 다양한 조각은 섬세함은 물론, 목조건축의 양식을 표방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목조건축이 남아있지 않은 오늘날 당시의 목조건축양식을 연구할 수 있는 좋은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탑은 구조가 특이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탑신부에 있어서 아래층 탑신은 폭에 비해 높이가 높은 것도 일반적인 형태와 다르며, 일반적인 탑은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와 높이가 줄어드는데 비해 이 탑은 너비가 거의 일정하고, 2층과 3층은 높이도 비슷하다. 특히 통일신라 일반석탑의 기단부가 이중인 것과는 달리 백장암 탑은 기단부가 없이 지대석 위에 바로 탑신이 있어 이형(異形)석탑으로도 잘 알려졌다. 그러나 본지(2052호 참조)가 2004년에 백장암 삼층탑 주변을 조사하면서 기단부로 추정되는 부재 9점이 발굴된 것을 원광대가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백장암 석탑은 어느 때 무너진 것을 기단부 없이 복원해서 현재까지 내려온 것”이 밝혀졌다. 어현경 기자 eonald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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