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10가지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
그분 고따마 존자에게는 이러한 좋은 명성이 따릅니다. ‘이런 [이유로]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応供]이시며,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覚]이시며, 영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明行足]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시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이시며, 가장 높은 분[無上士]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시며, 부처님[仏]이시며, 세존(世尊)이시다.’라고.소나단다경(D4)
‘itipi so bhagavā arahaṁ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ṁ buddho bhagavā’.
부처님의 열 가지 명호(이름)은 불자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경에서는 부처님 당시 바라문들이 부처님의 10가지 명호를 모두 알고 그것을 말하고 있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부처님의 10가지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곳은 율장 대품이다.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이 천명의 가섭삼형제와 함께 라자가하로 들어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때 부처님의 10가지 명호를 나열하고 있다. 부처님의 10가지 이름에는 부처님의 지혜와 지비 덕성과 능력등이 나타나있다. 실제로 부처님을 지칭하는 이름들은 이 밖에도 사람인 용왕(Manussanāgo), 선인(isi), 앙기라사(aṅgīrasa), 위대한 사문(mahāsamaṇa), 브라흐마나(brāhmaṇa)등 다양하게 불리우고 있다. 그런데 이 열가지 이름은 누가 만들었을까? 어떤 학자들은 10개가 넘는 부처님 이름은 후대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부처님이 10가지 이름을 가진 것도 신격화 된 것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이들은 부처님이 행하신 신통력이나 마야부인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탄생했다는 우협출생 이야기, 태어나자 마자 걸으면서 탄생게를 읊었다는 이야기등을 거론하며 경에서 나타나는 신통과 이적들을 신격화라며 거부한다. 여기에 부처님을 뜻하는 10호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러나 부처님의 10호는 다양한 경에서 등장한다. 10호는 모든 과거의 부처님들이 사용했던 이름들이며 당연히 고따마 부처님도 사용했다는 것이다. 대전기경(D14)에서 부처님은 91겁전에 나타났던 윗빠시 부처님등을 기억하며 각 부처님들을 세존ㆍ아라한ㆍ정등각이라고 부르고 있다.
“비구들이여, 91겁 이전에 위빳시 세존ㆍ아라한ㆍ정등각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 비구들이여, 31겁 이전에는 시키 세존ㆍ아라한ㆍ정등각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은 31겁 이전에 웻사부 세존ㆍ아라한ㆍ정등각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 비구들이여, 현재의 행운의 겁 동안에 까꾸산다 세존ㆍ아라한ㆍ정등각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 비구들이여, 이 행운의 겁 동안에 꼬나가마나 세존ㆍ아라한ㆍ정등각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 비구들이여, 이 행운의 겁 동안에 깟사빠 세존ㆍ아라한ㆍ정등각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다. 비구들이여, 바로 이 행운의 겁 동안에 지금의 아라한ㆍ정등각인 내가 세상에 출현하였다.”
대전기경에 비추어 보면 과거에 나타났던 부처님들이 항상 같은 이름들로 불리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고따마 부처님은 미래부처인 미륵불도 지금과 같이 똑같이 10가지 이름으로 불리울 것이라고 예언한다.
“비구들이여, 인간들이 8만 살의 수명을 가질 때에 멧떼야(미륵)라는 세존이 세상에 출현할 것이다. 그는 아라한[応供]이시며, 완전히 깨달은 분[正等覚]이시며, 영지와 실천이 구족한 분[明行足]이시며, 피안으로 잘 가신 분[善逝]이시며,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世間解]이시며, 가장 높은 분[無上士]이시며,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調御丈夫]이시며, 하늘과 인간의 스승[天人師]이시며, 부처님[仏]이시며, 세존(世尊)이시다. 전륜성왕 사자후경(D26)
이러한 경을 보면 부처님의 10호는 부처님이 다른 부처님들이 사용하던 것임을 기억해내고 당신도 마땅히 이렇게 불려야한다고 생각하고 제자들에게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제자들이 부처님 10가지 명호를 기억하여 여러사람들에게 알려주었고 급기야는 부처님을 모르거나 싫어하는 이들조차 부처님의 10호를 열거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한다. 부처님은 자신의 10호를 가르쳤을 뿐만아니라 부처님 명호를 지속적으로 념하면 큰 공덕이 된다고 가르쳤다. 이런 부처님이 거만하고 잘난체 하는 것일까?
부처님이 10호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 증거를 율장대품에서 찾는다. 율장대품에서는 자신을 다른 비구들과 같이 아라한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붓다가 오비구를 제도하고 난 뒤 “이 세상에는 이로써 세상에 여섯 명의 아라한이 생겨났다.”(Tena kho pana samayena cha loke arahanto honti.)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붓다의 말이 아니라 니까야를 편집한 사람의 말이다. 많은 분들이 편집자의 설명을 붓다의 말이라고 착각하고 붓다가 자신을 오비구와 똑같은 아라한이라고 생각했다는 증거로 내세운다. 붓다는 아라한인 것을 인정했지만 10가지 다른 이름도 인정하였다. 그러나 수 많은 붓다의 제자들이 아라한 이외에 부처님과 같은 10가지 명호로 불리운 적이 없다.
그러므로 “초기에는 부처님이나 제자가 똑같이 아라한으로 불렸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부처님이 신격화되어 10가지 명호로 불리우기 시작했다,”는 일부 개론서들의 설명은 사실이라고 볼 수 없다. 붓다는 스승없이 깨달았다. 이 세상에 누구도 자신을 인정해 주는 이가 없고 자신의 경지를 추측하는 이 조차 없었다. 그런 사람이 끝까지 겸손해 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말하지 않았어야 했을까? 붓다가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길에서 만난 우빠까 유행자에게 나는 일체를 이긴자(sabbābhibhū)요 일체를 아는 자(sabbavidū)라고 말했다. 붓다는 이런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는가?
물론 이 글을 쓰는 사람도 ‘수행본기경’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기가 마야부인 오른쪽 옆구리로 나와서 두루 사방을 둘러보고 손을 들어 '천상과 천하에서 오직 내가 가장 존귀하다. 중생의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제도하려 하노라.'(天上天下 唯我爲尊 要度衆生 生老病死)라고 외쳤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하나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디가니까야 대전기경에서는 오른쪽 옆구리에서 나왔다는 표현은 없다. “보살은 태어나면 두 발로 가지런히 땅에 서서 북쪽을 향해 일곱 발자국을 걸어간다. 하얀 일산이 펴질 때 모든 방향을 굽어 살펴보고 ‘나는 세상에서 최상이요, 나는 세상에서 제일 어른이요, 나는 세상에서 으뜸이다. 이것이 마지막 생이다. 더 이상 다시 태어남[再生]은 없다.’라고 대장부다운 말을 한다.”
아함에는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니까야에는 그런 표현이 없으니 더 합리적인 경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이런 표현이 고따마붓다의 모습이 아니라 위빳시 부처님이 태어나는 모습이 이렇게 표현되고 그 후로 모든 부처님들의 탄생을 이렇게 공통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본다면 부처님들이 이 세상에 오는 이유를 나타내려는 상징으로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이해되지 않는 몇몇 부분들을 근거로 니까야에 나타나는 신비한 내용을 모두 인정치 않으려는 태도이다. 인간적인 붓다의 모습을 찾는 사람들은 니까야에 나타난 붓다의 말보다는 비판적으로 불교를 바라보는 서양학자들의 말을 더 존중하고 따른다. 서양에서 불교를 연구 했다는 사람들은 카톨릭 신부가 많고 이들은 불교를 종교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서양학자들의 영향으로 부처님 10가지 명호, 여섯가지 신통지, 율장과 니까야에 나타나는 갖가지 기적등을 믿지 않는 이들이 많아졌다. 심지어 정말 소수이기는 하지만 출가자면서 4향4과의 수행단계나, 윤회까지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경향은 대승불교권에서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여진다. 대승불교 화엄경등에서 나타난 부처님이 너무 신격화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는 반대로 너무나 인간적인 붓다의 모습만을 인정하려는 태도가 나타난 것이다. 니까야의 어느 부분을 인정하고 어느 부분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신이 과연 그것을 판단할 만한 능력이 있는가를 자문해야 한다. 그럴 능력이 없는데도 그렇게 행동하고 심지어 남에게 전파하려 한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악업을 짓는 길이 될 것이다. 차라리 판단중지하고 이해되는 부분만을 말하는 것이 현명하다. 이해되는 부분만 파고들어 공부하는 것만으로도 일평생 공부하기에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생, 윤회를 말하는 다양한 경전들: https://whoami555.tistory.com/13742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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