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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나무와 숲

나무와 숲

 

시민과 국가, 수행자와 승가, 개인과 가족은 각각 개인과 전체를 보는 관점들이다. 나무와 숲은 불리되어 있지도 않고 불리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나무와 숲은 개별적인 존재와 전체적인 존재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나무가 개별적인 별업(別業)이라면 숲은 공동체가 만들어가는 공업(共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나무는 인연닿는 곳에 씨앗이 떨어져서 자라나게 되면 생명을 다할 때까지 한 자리에서 자라고 죽는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대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움직이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하고 파괴하는 특별한 성질이 있다. 더욱이 인간이 집단을 이루어 살아가는 곳에는 사회가 운영되는 규칙등 알아야하고 배워야 하는 것들이 있다.

 

수행자와 승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수행자가 존중 받으면 불법(佛法)이 존중받고(僧重則法重) 수행자가 천시받으면 불법(佛法)이 천대 받는다(僧輕則法輕)라는 치문(緇門)의 구절은 각 수행자의 태도를 강조하는 것이다. 반대로 여섯가지로 승가의 화합하는 원리를 제시하는 육화경(六和敬)은 공동체의 화합을 강조하고 있다. 한국불교가 개인의 태도를 더 강조하고 있는 듯이 보여지는 것은 한문으로 불교를 공부해왔고, 율장을 소홀하게 취급해온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대한불교조계종은 4인 이상의 구성원을 승가라고 한다는 원칙을 무시하고 승가를 단순히 스님들이라고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다. 포살을 할 때도 사분율이나 빠알리율이 아닌 대승범망경을 교재로 하는 보살계 포살을 시행하고 있어 구족계를 받은 승려들이 계목에 맞는 점검을 하지 못하고 있다.

 

1960년대에 대처승들에 대한 정화운동이 있었다. 강경파 승려들이 정화운동을 주도함으로 나타난 정화운동의 부작용을 지금도 겪고 있다. 1994년도 종단개혁도 민주적인 승가운영에 대한 열망의 결과였다. 그때 만든 새로운 종헌종법이 현재 종단을 운영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율장을 가르치지 않는 시대상황에서 만들어진 종헌종법은 25년이 흐른 지금에는 많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종헌종법의 내용이 부처님의 가르침과 너무 멀고 허술한 것이 승단을 혼란스럽게 하는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 한국불교는 정보통신의 발달로 초기불교와 티벳불교등 거의 모든 종파의 불교가 유입되어 혼합불교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한문으로 쓰여진 기존의 교과과목은 가치 절하되고 새로운 불교를 배우기에는 너무 늙어버린 수행자들은 어정쩡한 상태에 머물러 있다. 사찰은 국립공원, 도립공원, 전통사찰이 되어 국고보조비, 템플스테이 보조비, 문화재관람료, 주차료, 임대료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부잣집이 망해도 3년간다는 말처럼 사찰들이 문화재와 사찰이 소유한 넓은 임야 덕에 근근히 유지되고 있다. 그나마 수입이 괜찮은 유서깊은 사찰들은 몇몇 권승이 차지하여 그들의 배를 채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욕망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 4차 산업시대에 통섭적으로 사고하는 수행자가 절실하다. 개인적인 수행을 하면서도 승가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 ‘누구라도 할 일이면 내가 하자라는 교훈으로 승단의 불합리한 운영과 정의롭지 않은 일 처리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나무가 아닌 숲을 보려면 승단이 운영되는 제도에도 관심을 갖어야 한다. 개인과 승가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미치고 있고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가 중생이 아프기에 내가 아프다는 자비를 내세우고 법회때마다 사홍서원을 염하는 대승불교라면 더욱더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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