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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붓다는 왜 일체지자(一切知者)인가

 

 

붓다는 왜 일체지자인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마성스님의 붓다는 전지자인가라는 기고글을 발견하였다. 붓다를 일체지자(一切知者) 혹은 전지자(全知者)로 이해하게 되면 붓다는 신과 다를 바 없게 되므로 붓다는 일체지자(一切知者)가 아니다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대하여 권오민교수가 어느 불교도의 일체지에 대한 이해를 보며라는 제목으로 반박을 하였고 마성스님이 댓글로 재반박을 하였는데 댓글이라 잘 읽어보는 이가 드물었다.

 

권오민교수의 반박에 대하여 마성스님은 부파불교 시대에 형성된 십력이나 십팔불공법의 이론으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간붓다를 묘사한 부분을 비판하는 것은 그 잣대가 잘 못되었다.”라고 반박하고 불타관(佛陀觀)이 다른 사람과는 토론이 성립되지 않는다.”라며 토론이 끝났다. 그런데 저도 마성스님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기에 이 글을 쓰게 되었고 되도록 니까야와 아함안에서만 자료를 찾아 반론을 하려고 한다.

 

마성스님은 붓다는 자신이 스스로 일체지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증거를 왓차곳따 삼명경(M71)에서 찾고있다. 그런데 이 경을 읽어봐도 붓다가 스스로 나는 일체지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발견되지 않는다. 이 경은 붓다가 웨살리에 머무실 때 아침 일찍 탁발을 나왔다가 탁발하기에는 이른 것 같아서 근처의 유행자집단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곳에서 왓차곳따라는 유행자는 사람들이 붓다에 대해서 들은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붓다에게 묻는다. 붓다의 대답은 이렇다.

 

왓차곳따여, ‘사문 고따마는 일체를 아는 자이고, 일체를 보는 자이다. 그는 완전한 앎과 봄을 선언하여 나는 걸을 때도 서 있을 때도 잠잘 때도 깨어있을 때도 항상(satataṃ) 끊임없이(samitaṃ) 앎과 봄이 현전한다.’라고 말하는 그들은 내가 말한 대로 말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거짓으로 나를 헐뜯는 자이다.”

 

위 문장은 붓다가 스스로 일체지자(一切知者)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끊임없이앎과 봄이 현전한다는 일체지의 성격에 대한 부정이라고 봐야한다. 밀린다왕문경에서는 왕에게 나가세나 비구는 이렇게 대답한다. ‘부처님은 일체지자(一切知者)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에게 항상 끊임없이 앎과 봄이 현전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숙고하신 뒤, 알고 싶어하는 것을 알았습니다.(mahārāja, bhagavā sabbaññū, na ca bhagavato satataṃ samitaṃ ñāṇadassanaṃ paccupaṭṭhitaṃ, āvajjitvā yadicchakaṃ jānātī)

 

붓다는 이어지는 문장에서 사문 고따마는 세 가지 명지(明智)를 갖춘 자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이 일체지의 내용이다. 붓다가 일체지자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깐나깟탈라 경(M90)에서도 보인다. 빠세나디왕에게 대왕이시여,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며 완전한 지와 견을 공언할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다. 그런 것은 불가능하다고 사문 고따마가 말했다.?라고 이렇게 말하는 그들은 내가 말했던 대로 말하는 자들이 아니고, 사실이 아닌 거짓으로 나늘 헐뜯는 것입니다.(“Ye te, mahārāja, evamāhaṃsu: ‘samaṇo gotamo evamāhanatthi so samaṇo  brāhmaṇo  yo sabbaññū sabbadassāvī aparisesaṃ ñāṇadassanaṃ paṭijānissati

, netaṃ ṭhānaṃ vijjatī’ti; na me te vuttavādino, abbhācikkhanti ca pana maṃ te asatā abhūtenā”ti.)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서는 니간타들이 사용하는  항상(satataṃ) 끊임없이(samitaṃ)라는 단어들이 등장하지 않는다. 붓다는 대왕이여, 나는 한 번에(sakideva)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보는 사문이나 바라문은 없다. 그런 경우는 있을 수 없다.라고 말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Evaṃ kho ahaṃ, mahārāja, abhijānāmi vācaṃ bhāsitā: 'natthi so samaṇo  brāhmaṇo  yo sakideva sabbaṃ ñassati, sabbaṃ dakkhiti, netaṃ ṭhānaṃ vijjatī’”ti.) 고 말한다. 이것은 항상, 끊임없이, 동시에, 앎과 봄이 현전하는 그런 일체지는 없다는 것이. 그러나 붓다는 이 세상에 일체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있다

 

제자들은 붓다를 일체지자라고 불렀다는 증거는 니까야와 아함에서 공통적으로 보인다. 장로게에서 멜라지나(Thag131) 비구는 부처님을 일체지자(sabbaññū)라고 부르고 있다.

 

스승께서 말씀하실 때 나는 그 가르침을 들었으니

일체지자인 불패의 님께 결코 의혹을 품은 적이 없네.(전재성역)

(yadāhaṃ dhammamassosiṃ, bhāsamānassa satthuno.

na kaṅkhamabhijānāmi, sabbaññūaparājite.)

 

 

아디뭇따(Thag722)비구도 나의 스승은 일체지자(sabbaññū)이며 일체를 보는 자(sabbadassāvī)라고 표현하고 있다.

 

일체를 아는자, 일체를 보는자 승리자가 나의 스승이니

크나큰 애민을 지닌 님이자 모든세상의 치유자로서의 스승이다.(전재성역)

(sabbaññū sabbadassāvī, jino ācariyo mama.

mahākāruṇiko satthā, sabbalokatikicchako.)

 

증일아함 고당품에서는 지금 보리수 아래 금강좌에 앉아 일체지를 얻음으로서 걸림 없는 지혜에 이르렀다(今於此樹下 坐於金剛床 以獲一切智 逮無所礙慧)고 나타나고 있다. 중아함 빈비사라왕영불경에서도 "그렇다 가섭아, 그렇다 가섭아, 내게는 일체지가 있지마는 너에게는 일체지가 없느니라"(如是迦葉 如是迦葉 我有一切智 汝無一切智)라고 붓다 스스로가 일체지자임을 인정하고 있다.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무상정등각을 얻은 그때 일체지를 얻었으며 부처님의 제자인 아라한은 일체지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붓다가 일체지인 숙명통과 천안통 누진통을 사용하려 할 때는 마음을 그쪽으로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한다는 표현들이 등장한다. 밀린다왕문경의 표현으로 숙고한 뒤(āvajjitvā) 알게 되는 것이다. 사문과경(D2)에서 수행자가 숙명통을 사용하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전생에 대해 기억하는 지혜(宿命通)마음을 향하게 하고(abhinīharati) 기울게 합니다(abhininnāmeti). 그는 여러 전생을 기억합니다. 한 생...열 생... 백 생, 천 생, 백천 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합니다. '어느 곳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이런 용모를 가졌고, 이런 음식을 먹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고,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 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합니다.”

 

불자들이 일체지와 전지자를 혼동하는 것은 각종 사전에서 삽반뉴(sabbaññū)一切知者全知者the Omniscient one등으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일체(sabba)一切(all), 全部(entire)등의 뜻이 있기에 사전적인 의미로만 일체를 해석하여 일체지를 삼라만상 모든 것을 아는 지혜로 오해한다. 그리하여 니간타들의 주장처럼 일체지를 가진 사람은 모든 것을 항상 끊임없이 동시에 알 수 있다고 주장하거나, 핸드폰 설계도를 그릴줄 알고, 코로나바이러스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알고, 모든 요리 레시피를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다. 마치 삽베 상카라 둑카(Sabbe saṅkhārā dukkhā)를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번역해 놓으니 일부에서 모든 것은 괴롭다’. ‘삼라만상은 괴롭다라고 일체(sabba)이해하는 혼란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제까지 아함과 니까야를 살펴보았듯이 불멸후 후대에 붓다를 신격화하여 일체지자(一切知者)라고 부르게 된 것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붓다가 보드가야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길에서 만난 우빠까 유행자에게 나는 삽바비부(sabbābhibhū)삽바위두(sabbavidū)라고 설명했는데 이것도 일체승자와 일체지자라고 번역되고 있다. 여기서도 스스로가 일체지자라고 지칭한 것이다. 처음 출가한 행자들이 외우고 예불 끝에 발원하던 이산혜연선사발원문맨 끝에는 유정들도 무정들도 일체종지(一切種智) 이루어지이다라는 발원문이 들어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일체종지(一切種智)가 일체지(sabbaññū)이다. 일체지를 부정한다면 그동안 대한불교조계종에 출가한 출가자들은 헛된 발원을 해왔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이 니까야의 경장과 율장 그리고 아함경과 축원문등에서 일체지자라는 말이 사용되고 그 동의어가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것은 붓다가 일체지자라는 것은 초기불교든 부파불교든 대승불교든 공통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이다. 나와는 다른 불타관을 가져서 일체지자가 아니다라고 말해서는 안될 것이다. 부처님이 일체지를 인정하지 않으면 부처님이 설명하시는 육신통과 부처님과 제자들이 행한 다양한 기적도 인정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요즘 점점 이런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기에 일체지를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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