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은 무아(無我)를 가르친 적이 없다.
부처님은 깟짜야나경(S12:15)에서 세상의 사람들은 대부분 있음(atthita) 또는 없음(natthita)이라는 두 가지 견해(見解)에 의존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있음을 상견(常見) 그리고 없음을 단견(斷見)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외도들이 갖고 있던 견해들이지만 불교를 공부하면서도 바른견해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흔하게 발견되는 견해이다. 이 상견과 단견이 중생들의 깊은 병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의해서 최초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 두가지 극단을 떠나는 것이 중도의 정견이다.
“세존이시여,‘올바른 견해, 올바른 견해’ 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어떠한 점에서 올바른 견해가 있는 것입니까? 깟짜야나여,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있음(atthita) 또는 없음(natthita)이라는 두 가지에 의존한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발생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세상에 없음(natthita)은 사라진다. 깟짜야나여, 참으로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는 자에게는 있음(atthita)은 사라진다."
있다(atthi) 또는 없다(natthi)는 동사가 ta가 붙어 있음(atthita) 또는 없음(natthita)이라는 추상명사가 된다. 이 두가지 견해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는 세상의 발생과 세상의 소멸을 관찰하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찰은 연기의 순관과 역관을 관찰하는 것으로 연기에 대한 철저한 이해가 없다면 단견과 상견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불교의 핵심인 내가 없다는 무아(無我)도 단견이 아닐까? 모든 번뇌 경(M2)에서는 '나의 자아가 있다.(Atthi me attā)'라는 견해와 ‘나의 자아가 없다.(Natthi me attā)'라는 표현은 모두 견해의 황무지, 견해의 뒤틀림, 견해의 족쇄라고 한다. 아난다경(S44:10)에서도 부처님은 유행승 왓차곳따의 '자아는 없는가?' 라는 질문을 받고 '자아가 없다(natthi atta)' 라고 대답하면 그것은 내가 허무주의자(ucchedavādā)인 사문이나 브라만들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유아(有我)가 견해의 족쇄라는 것은 이해되지만 우리가 그렇게 오래도록 배워왔던 무아(無我)를 왜 견해의 족쇄,허무주의 견해라고 하셨을까? 부처님이 가르치신 아나따(anatta)는 모든 번뇌 경(M2)과 아난다경(S44:10)에서 나타나는 ’자아가 없다(無我)‘라는 주장과 어떻게 다를까?
무아(anatta)의 오해는 뿌리깊다. 무아와 윤회의 문제가 지금도 심심치 않게 거론되는 것을 보면 현대인들에게도 무아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부처님은 무아(無我)를 말한 적이 없고 비아(非我)를 말씀하셨다. 아나따(anatta)는 부정접두어 an이 '아니다'혹은 '없다'는 두가지로 사용된다. 문법상으로 anatta는 무아(無我)로 번역되거나 비아(非我)로 번역될 수 있다. 영어의 not이 ‘아니다’와 ‘없다’로 번역되는 것과 같다. 그런데 not이 ‘아니다’와 ‘없다’로 나누어지는 것은 not 그 자체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구조에 따라 결정된다. 마찬가지로 an이 '아니다' 와 '없다'로 결정되는 것도 문장의 구조에 따른다.
아나따(anatta)를 ‘자아가 아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은 ‘A는 not B’라는 문장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부처님이 설하시는 아나따(anatta)는 항상 A와 비교대상인 B가 등장한다. 무아상경(S22:59)에서 “그러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것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겠는가?” 라고 묻기에 제자들은 ‘이것은 내 것이 아니요(netaṃ mama),이것은 내가 아니며(nesoham asmi),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na meso attā)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다른 경(S22.55)에서도 마찬가지다. ‘몸(A)은 자아(B)가 아니다(anattaṃ rūpaṃ)’. ‘느낌(A)은 자아(B)가 아니다(anattaṃ vedanaṃ)’. ‘모든 법(A)은 자아(B)가 아니다(sabbe dhammā anatta)’처럼 ‘A는 not B’라고 나타나기에 ‘~아니다’라고 해석된다. ‘모든 법은 자아가 아니다’를 ‘모든 법은 자아가 없다’(諸法無我)라고 번역하는 것은 문법에 맞지 않다. ‘모든 법(A)과 자아(B)가 모두 주격이기에 ‘~아니다’라고 번역해야한다. 이것을 '자아가 없다(無)'라고 해석 하는 것은 마치 '그는 한국사람이 아니다(He is not Korean)'이란 문장을 '그는 한국사람이 없다'라고 번역하는 꼴이다. 왓차곳따의 질문에 무아라고 것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부처님이 삽베담마안아따(諸法非我)를 당당하게 설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부처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아니다(非我)라는 대답만 가능하지 내가 없다(無我)라고 대답을 할 수 없다. 영어와 일본어로 ‘all phenomena are nonself’, ‘all things are not-self’, ‘一切諸法は非我である’라고 번역되었는데 모두 ‘~아니다’는 뜻을 취하고 있다.
반면에 외도들이 사용하는 아나따(anatta)는 자아(A)가 홀로 주어로 등장한다. 모든 번뇌 경(M2)에서는 ‘나의 자아(A)가 없다.(Natthi me atta)’, 아난다경(S44:10)에서도 '자아(A)가 없다(natthi atta)'라고 나타난다. 이와같이 자아라는 단어가 단독 주어로 나타나는 질문은 존재유무를 묻는 질문이 되기에 ‘있다-없다’로 표현될 수 밖에 없다. 가전연경에서 보았듯이 ‘있다-없다’는 단견과 상견에 떨어져 관념적으로 흘러가게 되어있다. ‘있다-없다’는 ‘우리집에 아빠가 없다’‘수박에 씨가 없다’는 일상적인 생활영역부터 '기독교적 절대신의 유무' '힌두교의 창조신 브라흐마의 유무'등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존재에 대한 ‘있다-없다’까지 나아간다. 한번도 보지 못한 아트만, 만져보지 못한 아트만이 있느냐 없느냐는 논쟁은 희론이다. ‘있다-없다’라는 관점은 나아가서 '무아인데 윤회하는 주체는 누구냐' 하는 질문을 불러 일으킨다. 내가 없다(無我)라고 말하면 ‘그럼 이렇게 말하는 무엇이지?’‘그럼 나는 어디있지?’라는 두려움이 생겨날 수도 있다. 부처님이 사용하지 않은 무아, 오히려 단멸론이라며 배격한 무아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끝임없는 망상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다-아니다'는 단견과 상견에 떨어지지 않으며 몸을 나라고 집착하는 유신견을 극복하도록 돕는다. 이것은 ‘이것이 나의 자아(아트만)가 아니다’라는 문장은 아뜨만의 유무를 알아야 대답할 수 있는건 아니다. 몸은 무상하고 고통스럽고 부서지는 것이므로 영원한 아트만이 있다해도 몸은 아트만이 아니다라고 쉽게 부정 할 수 있는 것이다. 10살 짜리 라훌라 사미도 즉각적으로 ‘몸은 나의 것이 아니다’,‘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대답 할 수 있었던 이유다.
부처님은 외도의 주장경(A3:61)에서 육계, 육촉입처, 18가지 마음의 지속적인 고찰, 사성제라는 교리가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알지 못하는 전생이야기 이거나 믿음을 필요하는 관념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설하신 법을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며, 지혜로운 이들이 스스로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특징짓는 것도 불교는 관념적인 가르침이 아니라는 선언이다. 비아(非我)에 대한 가르침은 현실적이며 논리적이며 실천적이며 누구나 확인할 수 있고 비난받지 않는 가르침인 것이다.
오래전부터 비아 대신에 아나따(anatta)가 무아라고 번역되어 불교를 배우려는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불러 일으켜 왔다. 한문경전에서는 아나따(anatta)를 무아로 번역한 것보다 비아로 번역한 것이 2배정도 많으며 無常苦空無我의 순서로 나타나는 문장도 無常苦空非我로 번역된 것이 3배정도 많다. 우리의 선배들은 그나마 부처님이 가르친 의도와 문법을 따라 非我라는 번역을 선호해 왔는데 지금 니까야를 번역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無我라고 번역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무아라는 단어를 선호하게 된 이유는 諸行無常(제행무상) 一切皆苦(일체개고) 諸法無我(제법무아)라고 삼특상이 확정된 탓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이 비난받지 않는 실천적인 가르침이 되려면 비아(非我)로 번역되어야 한다. 부처님은 무아(無我)라고 가르친 적이 없기 때문이다.
anatta가 비아(非我)로 번역되는 경우의 특징
1.오온과 자아(atta)가 같은 주격으로 A는 not B라는 문장으로 나타난다.
2.오온이 비교하는 주체이고 자아(atta)는 비교대상이 된다.
3.오온이 무상하고 괴롭고 변괴하고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는 성질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에 오온은 자아(atta)와 다르다.자아가 아니다라(非)고 대답한다.
4.영원불변하는 자아(atta)가 있는지 증명할 필요도 없다. 자아가 있건 없건 오온의 무상하고 괴로운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관심사다.
5.체험적으로 논리적으로 누구나 오온이 자아가 아니다라고 자연스럽게 대답할 수 있기에 비난받지 않는 가르침이고 누구나 알수 있고 와서보라고 말할수 있는 가르침이다.
6.부처님이 사용하신 중도정견의 어법이다.
anatta가 무아(無我)로 번역되는 경우의 특징
1. 자아(atta)가 홀로 주격으로 나타난다.
2. 영원불변하는 자아(atta)를 경험해보지 못하였기에 사람마다 믿음의 영역에서 자아의 유무가 결정된다. 자아를 주장하는 사람이나 부정하는 쪽이나 서로를 설득시키기 어렵다.
3. 자아가 있다고 대답하면 상견(常見)이되고 없다고 대답하면 단견(斷見)이 된다.
4. 체험적으로 논리적으로 누구나 자아가 없다(無)라고 대답할 수 없기에 누구나 알수 있고 와서보라는 가르침이 아니며 비난받는 가르침이다.
5.자아가 없다고 하면 바로 윤회의 주체는 무엇인가하는 질문이 따라다닌다.
6.외도들이 사용하는 단멸론적인 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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