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암에서 희망을 보다
승가(Saṅgha)라는 단어는 부처님이 처음 사용하신 단어가 아니라 당시 인도사회에서 사용되던 말이다. 부처님은 물론 그 당시 육사외도를 이끄는 지도자들도 상기(saṅghī) 가니(gaṇī)라고 불려지고 있었는데 그 것은 무리(Saṅgha,gaṇa)의 지도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상가(Saṅgha)라는 단어를 특별하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상가는 4인상가, 5인상가, 10인상가, 20인상가, 20인 이상의 상가라는 5종류의 상가만을 인정하셨고 규모에 따라 역할이 달라지게 만드셨다. 2~3인의 모임은 별중(gaṇa)이라고 불렀다. 상가는 僧伽,衆. 和合衆, 和合僧등으로 번역되었는데 특히 和合衆, 和合僧으로 번역된 것은 정기적인 포살과 자자 그리고 대중갈마로 ‘청정과 화합’을 유지하는 단체임을 말한다. 그러므로 재가자가 승가에 포함되는 일은 가능하지 않았다. 만일 재가자도 승가에 포함된다면 재가자 4인이 모이거나 비구 2인과 재가자 2인이 모여도 승가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다. 출가자 재가자가 모여서 포살과 자자를 하고 재가자에게도 멸빈이나 제적이나 공권정지를 내리는 갈마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부터 지금까지 어느 승가에서건 재가자에게 비구들의 포살에 참석할 자격을 주지 않았고 지금도 주어지지 않고 있다. 구족계를 받지 않은 이에게 구족계 갈마를 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이렇게 조금만 생각해보면 승가에 재가자가 포함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주장임을 알 수 가 있다.
승가에 재가자가 포함된다는 주장을 하게된 것은 조계종 종헌 제8조에 ‘본종 승려는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듯이 출가자와 재가자를 다같이 보살이라 부르며 출가자와 재가자가 한 자리에서 같이 보살계를 받고 있는 영향이 있을 것이다. 또한 초기경전을 번역하는 사람들에게는책임이 있다. 각묵스님은 “승가로 음역한 상가(Saṅgha)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함께 모인 집단을 뜻하며 불교에서는 좁게는 비구 비구니의 승단, 넓게는 비구비구니, 청신사청신녀의 사부대중의 모임을 뜻한다.”고 주장하고 있다.(디가니까야 1권(2007년) p.80주석) 전재성거사는 “재가자를 포함시킬 때 승가라는 말 대신에 사부대중이라는 말을 쓴다. 그러나 승가안에 재가자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사방승가 안에는 재가자도 당연히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디가니까야1권 해제 41p) 이렇게 초기경전을 번역하고 있는 사람들조차 재가자가 포함되는 승가를 말하고 있으니 지금의 재가자들이 따라서 혼란스럽게 된 것이다. 출가자와 재가자가 서로 의지해 있고 재가자가 승가를 외호하고 있다는 사실과 재가자가 승가에 포함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방승가도 현전승가의 집합일 뿐이므로 사방승가에 재가자가 포함된다는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 재가자는 꼬삼비 시민들처럼 사부대중의 일원으로서 승가를 외호하고 비판하는 세력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전재성거사는 또한 불자가 삼귀의 할 때 승가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승보에 귀의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승보에는 비구비구니승가가 모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예류향에서부터 열반에 도달한 아라한 까지의 사쌍팔배의 참사람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전재성거사의 주장과는 다르게 초기경전에서 일반 비구승가에 귀의함으로서 불자가 되는 문장이 수없이 나타나고 있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승가에 귀의합니다.(Esāhaṃ,bhante, bhagavantaṃ saraṇaṃ gacchāmi dhammañca bhikkhusaṅghañca) 율장 대ㄷ에서도 삼귀의로서 구족계 주는 것을 허용하며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상가에 귀의합니다.(Saṃghaṃ saraṇaṃ gacchāmi)”를 세 번 복창하게 시키고 있다. 이때 귀의 대상은 분명히 승보(Saṅghe ratana)가 아니라 상가(Saṅgha)이다.
어떤 사람들은 조계종 종헌에 ‘본종은 승려(비구 비구니)와 신도(우바새 우바이)로서 구성한다’고 되어있는 것을 보고 재가자도 승가에 포함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승가’와 ‘승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단(parisa)과 승단(Saṅgha)도 구분하지 못하여 생긴 오해이다. 승가안에 ‘승보’가 포함되어 있듯이 사부대중(catasso parisā)이 참여하는 ‘교단’안에 ‘승단’이 포함되어 있다. 재가자들이나 출가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승가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며 승가가 승가운영의 원리대로 운영되는 것을 본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요즈음은 승가라는 단어의 쓰임도 협소해져서 ‘중앙승가대학교’처럼 '승가’는 스님이 다니는 대학교, ‘승가교육’에서처럼 ‘스님들’을 위한 교육'등 '승가'를 단순히 '스님들’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처럼 ‘승가’를 ‘스님들’로 번역해 놓고 이것이 왜 잘못된 것인지 모르게 된 것이다.
비구승가의 운영원리는 율장에 포살과 자자하는 법, 갈마하는 법, 은사스님 모시는 법, 객스님 대하는 법, 탁발하는 법, 꾸띠(토굴)를 만드는 방법등 250계율로 나타나고 있다. 초기에 승단이 규칙적으로 모인 것은 보름마다 포살을 하게 되면서부터인데 보름마다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새로운 승가의 규칙을 공유하고 견해를 탁마하게 됨으로서 진정한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었다. 같은 지역에 사는 스님들이 특정한 장소에 모여 포살을 할 때 먼거리에 사는 스님들은 하루에 도착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이 하루에 걸어서 다녀올 수 있는 범위를 정하게 되었는데 그것을 결계(結界)라 하고 그 지역안에서 얼굴을 맞대고 모이는 승가를 ‘현전승가’라 한다. 요즈음은 교통의 발달로 어디든지 하루에 다녀올 수 있으므로 종단자체가 현전승가가 되었다. 예전에 현전승가에서 행하던 수계, 교육, 갈마, 안거등을 종단에서 관리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승가의 운영원리를 여섯가지(六和敬)로 간단하게 정리한 것이 꼬삼비경(M48)에 남아있다. ①‘동료에게 자애롭게 행동한다.’ ② ‘동료에게 자애롭게 말한다.’ ③‘동료에게 자애롭게 사유한다.’ 이상 3가지는 평소에 구성원들끼리 자비로운 마음과 따듯한 눈빛으로 화합하며 지내는 것이고 ④ ‘동료들과 균등하게 나눈다.’는 것은 승가의 소유물은 구성원이 평등하게 사용해야 하는 공유물이라는 뜻인데 부처님은 발우안에든 것일지라도 평등하게 나누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⑤ ‘계를 구족하여 머문다.’는 것은 정기적으로 포살과 자자를 통해 자정(自淨)하는 것이며 ⑥ ‘바른견해를 구족하여 머문다.’는 것은 자주모여 법담탁마로 바른견해를 갖추는 것이다. 부처님은 바른견해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고 총체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바른견해가 있어야 불자가 될 수 있고 발심수행을 할 수 있으며 대중공의를 존중하고 동료들과 보시물을 균등하게 나누려고 할 것이다. 여섯가지 화합의 원리로 승가가 운영될 때 스님들은 개인소유물이 없이도, 노후를 걱정하지 않고도, 각자도생하지 않고도, 수행에 매진하며 승가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승가에 귀의 한다는 것은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고 대중을 공경하며 공심(公心)으로 살겠다는 약속이다. 대중을 통솔해 보겠다는 마음을 가진 자, 자리와 권력을 얻기 위해 돈선거를 하는 자, 계파를 만들어 이득을 취하려는 자들은 진정으로 승가에 귀의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번 백장암선원에 하안거를 나면서 여섯가지 화합하는 원리로 사는 승가를 체험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곳 대중들은 매일 법당에 참석하여 사시예불을 올리고, 일주일마다 경전을 읽고 법담탁마하고, 보름마다 포살을 진행하고 있다. 백장암의 살림은 매달초 대중에게 공개하고, 모든 대중이 참여하여 공개적으로 사찰의 대소사를 결정한다. 저녁에는 공양간을 개방하지 않아서 대개의 스님들은 오후불식을 실천하고 있으며 객스님이 오면 결제 기간임에도 법랍에 따라 좌차를 정하여 대중과 같이 공양하게 하고 불편없이 머물다 가도록 하고있다. 안거철이나 해제철에 관계없이 매주 두번째 네번째 토요일 오후2시에는 정기법회를 열고 있으며 누구든지 절에 머물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머물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백장암이 이렇게 원융살림을 하게된 것은 몇몇스님들이 3년전부터 승가의 운영원리에 맞게 살아보려는 마음을 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어머니 품속 같은 승가에서 안거를 하게되었고 26년만에 비구계로 포살하는 경험을 가졌다. 그동안 나는 외형적으로는 승가라고 불리우는 집단에 살았지만 내용적으로는 '승가'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종단이 포살을 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은 단순히 포살만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공의제'가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현재 종단은 보시물이 균등하게 나누어지지 않아 승려들사이에 빈부차이가 심하고, 모든 사찰이 승가 공유물임에도 어느 사찰에서나 편히 머물 수 없게 되었고, 가사와 승복을 개인이 구입해야하고, 몸이 아프면 속가에 가서 치료해야 하고,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재갈을 물리는등 자유로운 발언권이 보장되지 않고 있다. 승가는 해탈로 나아가는 수행공동체이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의사를 결정하는 민주공동체이고, 포살과 자자와 갈마로 자정(自淨)하는 화합공동체이고, 집단지성이 발휘되는 전법공동체이며, 누구나 찾아와서 머물다가는 안식처이며, 귀의하고 보시하면 큰 공덕을 얻는 공덕의 밭이다. 이러한 승가를 항해 나아가는 백장암에서 변화의 바람과 위안을 느끼게 되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1700면 한국불교의 물질적 정신적 자산을 계승한 조계종은 사회에서 오아시스 역할을 하는 승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승가의 의미'와 '승가의 역활'을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이러한 승가공동체 복원에 동참하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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