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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교

육사외도에 대한 이해

육사외도에 대한 이해

 

사문과경을 읽으면서 육사외도가 왕사성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축산에 오르면 사방으로 보이는 것은 산 뿐인데 이러한 울창한 산이 있었기에 여러종류의 수행자들이 곳곳의 골짜기에 머물 수 있었을 것이다. 부처님이 비상비비상처를 배운 웃따까라마뿟따도 이곳에서 만났다. 사문과경에는 아잣따삿뚜와 육사외도들의 대화를 통해서 육사외도의 견해가 소개되고 있는데 궁금한 것은 같은 지역에 살았던 부처님과 이들이 만났다는 기록이 없는 것이다. 가섭삼형제를 찾아가서 제도했던 적극성에 비하면 부처님이 이들과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육사외도 산지야벨랏티뿟따는 사리뿟다와 목건련을 제자로 두고 있었다. 아자따삿뚜는 산자야를 찾아가 직접 대화를 나누고는 가장 바보같은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질문에도 “모른다고도 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라고만 대답하니 답답하고 화가 났을 법하다. 그러나 산자야 밑에 사리뿟따와 목건련이 한때 제자로 있었다는 것은 모르면서도 단언하는 사람들보다 끝까지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가 더 합리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래의 사후에 존재하느냐 않느냐등의 문제에도 산자야는 “그렇다고도 그렇치 않다고도 말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다. 부처님 같으면 여래 사후의 문제에 대해서 대답을 안하는 대신 대답을 안하는 10가지 이유를 분명히 하셨다.

“이것은 참으로 이익을 주지 못하고 [출세간]법에 바탕한 것이 아니며, 청정범행의 시작에도 미치지 못하고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설명하지 않는다."(D9)

 

니간타나따뿟따는 지금까지 인도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자이니즘이다. 육사외도중에 유일하게 니간타가 출생지와 열반지가 알려져 있으며 지금까지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이들의 교리가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니간타는 부처님의 교리를 어느정도 알고 있었기에 부처님의 사상의 헛점을 논파하라고 수차례 제자들을 보냈다. 그렇게 보내진 제자중에 삿짜까바라문과 우빨리와 시하장군과 아바야왕자의 대화가 전해진다. 우빨리는 부처님을 만나 신업(神業)보다 의업(意業)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부처님의 대답을 듣고 쾌재를 부른다.(M56)



“세존이시여, 커다란 신체적인 처벌에 비한다면 사소한 정신적인 처벌이 뭐가 중요합니까? 언어적 처벌이나 정신적 처벌보다 신체적 처벌이 악한 행위를 짓고 악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가장 비난할 만한 것입니다.”

“장자여,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 니간타의 교도가 질병이 들었는데 중병이 들었다고 합시다. 그가 찬물을 거부하고 더운물만을 찾는다고 합시다. 그가 찬물을 얻지 못하면 죽을 것입니다. 장자여, 그에 대하여 니간타 나따뿟따는 어떠한 곳에 태어날 것이라고 말합니까?”

“존자여, ‘정신이 오염된 신들’의 하늘이 있는데, 그는 그 곳에 태어날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는 정신이 오염되어 죽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자여, 장자여, 장자여, 숙고하여 대답하십시오. 그대가 앞에서 말한 것은 뒤와 맞지 않고 뒤에서 말한 것은 앞과 맞지 않습니다. 장자여 그대는 앞에서 ‘저는 진리에 입각해서 논파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도록 합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존자여, 고따마존자께서 어떤 것을 말하더라도, 언어적 처벌이나 정신적 처벌보다 신체적 처벌이 악한 행위를 짓고 악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가장 비난할 만한 것입니다.”

“장자여, 니간타 교도는 네 가지 금계를 수호하는데,  그가 오고갈 때에 많은 생물들을 죽일 것입니다. 장자여, 이것에 대하여는 니간타 나따뿟따는 어떠한 과보를 말합니까?”

“존자여,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면, 니간타 나따뿟따는 크게 비난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장자여, 만약 의도적인 것이라면, 어떠합니까?”

“존자여, 만약 의도적인 것이라면, 크게 비난할 만한 것입니다.”

“장자여, 장자여, 장자여, 숙고하여 대답하십시오. 그대가 앞에서 말한 것은 뒤와 맞지 않고 뒤에서 말한 것은 앞과 맞지 않습니다."

“존자여, 고따마존자께서 어떤 것을 말하더라도, 언어적 처벌이나 정신적 처벌보다 신체적 처벌이 악한 행위를 짓고 악한 행위를 행함에 있어서 가장 비난할 만한 것입니다.”  (M56)

부처님은 이렇게 차례로 3가지 비유를 들어 의업이 다른 업들보다 중요함을 깨우쳐 준다. 우빨리는 이 대화가 끝나면서 부처님께 귀의하게된다. 이것은 법구경 1~2번게송과 게송이 만들어진 인연담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삿짜까는 ‘물질은 나의 자아다. 느낌은 나의 지아다. 인식은 나의 자아다. 심리현상들은 나의 자아다. 알음알이는 나의 자아다.’(M35)라고 주장하며 부처님 제자들은 몸을 닦지 않고 마음만 닦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다. 시하장군은 부처님에게 단멸론자라고 비판하자 부처님은

“시하여,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단멸을 가르친다. 그 때문에 어떤 사람이 ‘사문 고따마는 단멸의 법을 설하고 그것으로 제자들을 인도한다’라고 말할지도 모른다.”(A8:12)

라고 상대방의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내용을 바꾸어 멋지게 설명한다. 아바야왕자는 “세존이시여, 여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스럽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왕자여 거기에 대해서는 한 가지로 대답할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 니간타들이 졌습니다"(M58)

라고 단번에 귀의해 버렸다. 니간타의 제자들이

‘도반 고따마시여, 행복으로 행복은 얻어지지 않습니다. 괴로움으로 행복은 얻어집니다. 행복으로 행복이 얻어지는 것이라면 세니야 빔비사라 마가다 왕은 행복을 얻었을 것입니다.“(M14)

라고 말하는 것이나 신업을 중요시하는 것을 보면 니간타의 제자들이 고행을 하는 쪽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도성지를 하면서 자이나교 사원에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잠자리도 편안하고 음식도 깔끔하게 나왔다. 사상이 잘못되어서 그렇치 마음씨는 좋은 사람들 같아 보였다. 육사외도주에서 니간타들과 부처님과 대화가 가장 많이 나타난다. 이것은 니간타는 자신의 똑똑한 제자들을 자주 붓다에게 보내 붓다를 설복시키라고 지시했다. 그들은 모두 부처님의 제자가 되고 말았는데 이런일이 반복되다보니 니간타들에게 부처님은 사람을 '개종시키는 요술을 부리는 자'라는 소문이 났다. 

 

역시 단멸론을 주장하는 아지따 께시깜발리는 “대왕이여, 보시한 것도 없고 제사지낸 것도 없고 헌공 한 것도 없습니다. 선행과 악행의 업 들에 대한 열매도과보도 없습니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습니다.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 도 없습니다. 화생하는 중생도 없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내는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 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부처님이 사견이라고 설명한다. 부처님은 번뇌가 있는 정견으로 “보시한 것도 있고 제사지낸 것도 있고~~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여 드러내는 바른 도를 구족한 사문· 바라문들도 이 세상에는 있다.”고 설명한다.

 

빠꾸다 깟짜야나는 7요소설을 주장하는데 그것들은 땅 물 불 바람 즐거움 괴로움 영혼이다. 세상은 7가지 요소들의 모임일 뿐이기에 “날카로운 칼로 머리를 자른다고 해도 누구도 누구의 생명을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칼이 이 일곱 가지 몽들의 가운데로 통과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라는 무시무시한 말을 태연하게 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일체를 아는 자[一切知者]요 일체를 보는 자[一切見者]인 뿌라나 깟사빠는 무제한적인 지와 견을 공언합니다. ‘내가 가거나 서있거나 자거나 깰 때에 언제나 지와 견이 확립되어 있다.’라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끝이 없는 지혜로 끝이 있는 세상을 알고 보면서 머무른다.’라고.

고따마 존자시여, 일체를 아는 자[一切知者]요 일체를 보는 자[一切見者]인 니간타 나따뿟따도 무제한적인 지와 견을 공언합니다. ‘내가 가거나 서있거나 자거나 깰 때에 언제나 지와 견이 확립되어있다.’라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끝이 없는 지혜로 끝이 있는 세상을 알고 보면서 머무른다.’라고.

고따마 존자시여, 이 두 사람은 지혜를 말하면서 서로서로 반대되는 말을 하는데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말을 합니까?”



“바라문들이여, 그만하라. ‘이 두 사람은 지혜를 말하면서 서로서로 반대되는 말을 하는데 누가 진실을 말하고 누가 거짓말을 합니까?’라는 것은 그냥 내버려두어라. 나는 그대들에게 [사성제의] 법을 설하리라. 이제 그것을 들어라. 듣고 마음에 잘 새겨라. 나는 설할 것이다.”(A9:38)

 

윤회를 통한 청정을 이야기하는 막칼리고살라는 “마치 감긴 실타래를 던지면 [실이다 풀릴 때 까지] 굴러가는 것처럼 그와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자나 현자나 같이 치달리고 윤회하고 나서야 괴로움의 끝을 냅니다.”라고 주장한다. 특이하게도 부처님이 막칼리고살라를 비난하는 대목이 나온다. 

“비구들이여, 이 사람과 다른 어떤 단 한 사람도 이렇듯 많은 사람들에게 손해가 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불행이 되고 많은 신과 인간들에게 해로움이 되고 손해가 되고 괴로움이 되는 사람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쓸모없는 인간 막칼리이다.

마치 어떤 자가 강어귀에서 그물을 치면 많은 물고기들을 불편함과 괴로움과 재난과 파멸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그와 마찬가지로 비구들이여, 쓸모없는 인간 막칼리는 세상에 태어나 사람을 낚는 그물로 많은 중생들을 손해와 괴로움과 재난과 파멸로 인도한다.”(A1:18)



 

도덕부정론자인 뿌라나 깟사빠는 “생명을 죽이고 주지 않은 것을 가지고 문을 부수어 도둑질하고 약탈하고 주거침입을하고 노상강도질을 하고 남의 아내를 범하고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사람은 죄악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만일 날카로운 원반을 가진 바퀴로 이 땅의 생명들을 모두 하나의 고깃덩어리로 만들고 하나의 고기 무더기로 만들지라도 그로 인한 어떤 죄악도 없으며 죄악이 생기지도 않습니다”라고 주장한다.

 

이들 육사외도들의 주장은 단견(斷見) 아니면 상견(常見)에 속하며 쾌락주의자나 고행주의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숙명을 가지고있다. 초전법륜경에 쾌락주의자나 고행주의자가 되지 말라고 나오는 것은 이들의 사상이 어떻게 사람을 망치는가를 부처님이 철저하게 경험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의업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고 팔정도를 가르치고 호흡과 느낌을 관찰하라는 가르치는 불교가 고행주의나 쾌락주의로 흐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육사외도의 사상은 무지에서 일어난 잘못된 생각들로 부처님은 생각이 끊어지는 자리(止觀)에서 구원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부처님은 말 조련사가 말을 조련하는 것을 비유로들며 당신이 사람을 길들이는 방법을 설명한다. “만일 사람을 길들일 때 그 사람이 온화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혹독한 방법으로도 길들여지지 않고 온화함과 혹독함 둘 다로도 길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때는 여래는 그를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여래가 훈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교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참으로 이 성스러운 율에서는 살해된 자이다." (A4:111)

말 조련사 께시에게 사람을 길들이는 방법을 설명하신 것처럼 부처님의 다른 이름인 ‘조어장부(調御丈夫)’는 길들여 질(damma) 사람을(purisa) 조련하는 분(sārathi)이다. damma는 길들이다, 관리하다, 제어하다라는 √dam의 미래분사로서 ‘길들여 질‘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이 아무나 길들이는 분이 아니라는 이야기인데 비구보디는 “unsurpassed trainer of men to be tamed”로 적절하게 번역했다. 수자또 비구는 “supreme guide for those who wish to train”라고 번역했는데 부처님은 불청객이 되어서라도 사람을 찾아가 제도했으므로 적절한 번역이라고 볼 수 없다. 부처님이 육사외도를 찾아가서 그들을 제도하지 않은 이유를 ‘길들여 질 사람을 조련한다는 조어장부에서 찾을 수 있겠다. 석가족 출신과 가섭 삼형제 같은 불을 섬기는 무리에게는 4개월의 견습기간을 면제해 주었지만 육사외도들이 불교승단에 찾아와서 출가를 원하면 4개월의 견습기간을 두고 받아들였다. 적어도 인과를 믿는 배화교들은 부처님이 길들일 만 했고 육사외도처럼 단견과 상견에 빠진 사람들을 길들이진 않았다. 이것이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부처님과 육사외도들의 만남이 기록되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관세음보살도 아무나 도와주는게 아니고 관세음보살이라는 이름을 불러야 도와준다고 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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