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언어
부처님은 언어를 매우 세심하게 사용하신 분입니다. 경을 읽을수록 그분의 언어사용에 탄복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당신이 사용하는 언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의미와 표현을 구족한 법을 설하고 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을 드러냅니다.”(D2) 특히 의미와 표현을 구족한 법을 설한다는 설명은 부처님의 언어가 누구에게나 오해되지 않고 이해될 수 있음을 말하는데 당신이 평소에 자주 말했던 “잘 설해진 나의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상식적인’ 사람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라는 선언과 내용이 일치합니다. ‘상식적인사람’(viññū)은 일반적으로 ‘지혜로운 자’라고 번역하였는데 viññū는 분별력있는, 이성적인, 상식이 있는의 뜻 입니다.(S41:1) 부처님은 시작과 중간과 끝에 이르기 까지 일관되게 설하시고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는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또한 부처님은 “만일 사실이 아니고 옳지 않고 이익을 줄 수 없다 고 여기면 여래는 그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현재가 사실이고 옳고 이익을 줄 수 있다 하더라도 여래는 바른 때를 알아서 설명합니다.” 부처님은 한마디를 하더라도 여러 가지 조건을 잘 살펴서 언어와 침묵을 사용하시기 때문에 부처님의 언어와 침묵은 설득력이 있고 생명력이 길고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효과를 냅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여기서 경험되지 않는 오해 할 만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최대한 오해할 가능성을 없애는 방법으로 부처님은 심오한 깨달음을 ~을 부수어버린 상태, ~이 없는 상태, ~가 사라진 상태, ~를 벗어난 상태라고 표현합니다. 부정되는 상태는 지금 여기서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알 수 있는 상태들입니다. 초심자가 지켜야 할 계행을 설명할 때도 죽이는 것을 삼가라. 거짓말하는 것을 삼가라고 표현하고 감각적 욕망, 적의와 성냄, 해태와 혼침, 들뜸, 의심이라는 다섯가지 장애를 없애는 것으로 삼매를 설명하고 10가지 족쇄가 제거라는 차례대로 성인4과를 설명합니다.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말이 소멸한다. 제2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일으킨 생각과 지속적인 찰이 소멸한다. 제3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희열이 소멸한다. 제4선을 증득한 자에게는 들숨날숨이 멸한다. 공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물질의 인식이 소멸한다. 식무변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공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무소유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식무변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한 자에게는 무소유처의 인식이 소멸한다. 상수멸(想受滅)을 증득한 자에게는 인식과 느낌이 소멸한다. 번뇌가 다한 비구에게는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한다"(S36:11)
이렇게 성인의 단계를 자세하고 정확하게 4가지로 나누는 능력을 가진 분은 부처님이 유일하고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과 열반(nibbāna)이나 해탈(mutti)도 ~이 없는 상태, ~를 벗어난 상태인 탐진치의 불이 꺼진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계율에서 선정과 지혜에 이르기까지 모든 상태들이 ~이 사라진 상태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고 점검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런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는 수행방법 또한 관념적이지 않습니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이나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나 마음을 관찰하는 4념처법은 관찰대상이 지금여기 나에게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이자 사건들입니다. 도달해보지 않은 어떤 상태를 제시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수행을 시작하는 발심도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 시작하고 그 괴로움을 벗어나는 방법도 호흡이나 느낌등 사실을 관찰하는 것이고 괴로움을 벗어난 상태도 다만 ~이 사라진 상태라고 표현되기에 어떤곳에서든 관념이 개입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손에 잡히는 친절한 언어들 덕택에 누구라도 언제라도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고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불교의 목표인 이고득락(離苦得樂), 파사현정(破邪顯正)이 모두 이러한 태도와 표현과 입장입니다. 이고득락이라고 해서 고통을 버리고 다시 즐거움을 추구할 게 있는 것이 아니고 파사현정이라고 해서 삿된 것을 파한 뒤에 다시 바른 것을 드러낼 것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을 버리는 그 자리가 즐거움이 얻어진 자리요 삿된 것이 버려진 그 자리가 이미 바른 것이 드러난 자리입니다. 내 마음속의 삿된 것을 버리는 것이기도 하고 종단과 사회의 삿된 것을 바로잡는 이러한 이고(離苦)와 파사(破邪)의 태도는 불자들이 죽는 날까지 견지 해야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방거사가 말한 “있는 것을 비워 버릴지언정, 간절히 없는 것을 진실로 여기지 마라.(但願空諸所有 切勿實諸所無)는 것과 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하나님, 영혼, 천국, 진아불성등 내가 경험해보지 못하고 당장 보여줄 수 없고 지금 여기서 확인해 볼 수 없는 언어들이 아닙니다. 이런 언어들은 각자의 믿음으로 들어가게 하고 추측하게 해서 각자가 다른 그림을 그리게 합니다. 내가 스스로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절대자나 영원한 무엇에 의지하게 만듭니다. 주체적인 삶의 태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려는 태도를 갖지 못하게 합니다. 부처님도 가끔씩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긍정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정(淸淨,suddhi), 지복(至福,siva), 안은(安檼,khema), 고요함(寂靜,santa)등의 표현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이 내가 생각하는 청정, 내가 느낀 지복, 내가 이미지화한 고요함에 머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러한 표현들의 내용이 탐진치가 소멸한 상태임을 밝혀놓고 있습니다. 대승불교가 이러한 긍정적인 ~인 상태, ~인 경지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방편이요 비유요 손가락으로 이해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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