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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우연한 승려대회

우연한 승려대회
 
8.26승려대회가 끝나고 나니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들린다. 승려대회에 대변인겸 기획홍보를 맡았던 사람으로서 승려대회준비 과정을 정리하는 글을 남기고자 한다.
 
조계종의 적폐청산운동의 흐름은 재가자들에 의해서 몇 년간 꾸준히 이어져 왔지만 승려대회 직접적인 계기는 5월1일과 5월 29일방영된방영된 mbc pd수첩의 <큰스님께 묻습니다>1탄과 2탄이다. 5월8일 부천포교당을 운영하는 현산스님이 조계사 일주문앞 아스팔트위에서 참회의 1080배 절을 올렸다. 이에 5월 28일부터 도정스님과 제가 조계사 일주문앞에서 참회의 좌선정진을 시작했고 그 모임을 ‘오송선원’이라 하였다. 6월 5일 하림각에서 승려대회의 주최가 되는 ‘조계종을 걱정하는 스님 모임’(조정모)이 창립하였다. 6월 20일 설조스님의 단식이 시작됨에 따라 일주문 ‘오송선원’은 단식천막장으로 이동하여 외호활동에 전념하였다. 설조스님 단식이 20일째되는 7월 9일 ‘조정모’는 승려대회 참석을 묻는 설문지를 3천개의 사찰에 보냈다. ‘전국선원수좌회’와 ‘조정모’의 이름으로 승려대회를 8월21일 하려는데 참석을 원하는 분은 서명을 하고 사진 찍어서 보내달라 내용이었다. 애초에 이 설문지는 설정스님 퇴진을 묻고,승려대회 필요성을 묻고, 개혁기구 구성을 묻는 등 5개항의 질문이었으나 갑자기 ‘조정모’의 대표 원인스님의 제안으로 8월 21일 승려대회에 참석여부 하나만을 묻는 설문지가 되었다.

 여기서부터 우연한 승려대회의 시작이다. 작년에 수좌회가 승려대회를 선언했지만 슬그머니 포기해버렸기에 이제는 누가 나서도 승려대회 개최 가능성은 0%였다. 그런데 설문조사와 함께 승려대회가 결정된 것이다.
나도 황당하기는 했지만 평소에 내가 제안하던 3가지 조건(직선제, 수행보조비, 재정투명화)을 조건으로 여는 승려대회였기에 동의하였다.
 
 
이러한 설문을 보냈을 뿐 설조스님의 단식은 점점 사회의 첨예한 이슈가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승려대회준비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설조스님이 41일간 단식을 마치신 7월 30일 날부터 본격적으로 승려대회준비를 하게 되었다. 준비기간은 26일. 우여곡절도 많았다. 전국수좌회는 우리가 우편물을 보낸 다음날 총무원에 공문을 보내 수좌회는 승려대회에 동의한 적이 없다고 밝혀서 졸지에 ‘조정모’는 명의를 도용한 괴상한 집단이 되었다. 그 후 수좌회는 침묵을 이어가다가 7월 27일에서야 승려대회 동참을 선언하였고 실천승가회는 8월1일날 승려대회 동참선언을 한다. 승려대회를 개최하기 위한 조직구성의 허술함, 실무를 담당하는 인원부족, 기획홍보부족등은 지속적으로 문제가되었다. 종정, 원로회의, 본사주지협의회, 중앙종회등 모두가 승려대회를 반대하고 승려대회에 참석하는 승려들을 채증하여 징계하겠다는 엄포속에서 승려대회 취소, 명칭변경, 날자 연장건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급기야 우리는 승려대회 직전에 명칭을 ‘승려결의대회’로 변경하기로 해서 재가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러나 ‘승려결의대회’라는 명칭은 우리가 전국에 배포한 8월 3일자 우리불교신문에 광고로 나갈 만큼 우리는 두 가지 이름을 같이 사용하고 있었다. 스님들이 적게오면 ‘승려결의대회’라고 이름 변경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준비가 얼마나 허술했던지 실제로 승려대회 봉행위조직도 발표하지 못한 채로 승려대회를 치뤘다. 우리가 봉행위를 구성하지 못했다하여 인터넷 신문에서는 처음에는 승려대회 광고도 받아주지 않았다. 봉행위를 꾸리지 않은 상황에서 승려대회를 개최한다는 것은 기존의 사고방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우리는 봉행위도 없고, 돈도 없고, 조직도 각추지 않은채 승려대회를 준비했다. 2차결집의 주도한 야사비구가 베이샬리에 자신을 지지하는 승려들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다른 지역스님들을 찾아가 설득해서 2차결집을 이루어냈듯이 우리는 이러한 조건속에서도 승려대회를 개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영주 대승사에 머무시는 원인스님은 거의 매일 조계사로 출근하고 많은 후원금을 내시며 승려대회에 모든 노력을 다하셨다. 도정스님, 부명스님도 자신들이 운영하는 사찰의 일을 포기하고 이 일에만 몰두했으며 선방을 박차고 나온 곡산스님, 대청스님, 우룡스님, 각진스님, 원만스님, 수좌회 대표로 나온 정과스님, 혜우스님, 비구니 현우스님,영빈스님,묘운스님, 유연스님도 ‘승려대회 캠프’로 변한 단식장에 살다시피하며 굿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하루에 수백통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준 법계향보살님,단식장 지킴이 여여행보살님, 보명거사님등 헌신적으로 도와준 불자님들은 승려결의대회가 치러질 수 있게 한 숨은 공로자들이었다. 태풍 때문에 승려대회날자가 바뀌고, 재가불자들이 전국에 현수막을 설치하고, 팀을 짜서 전국 어른스님과 선방을 찾아가는 노력등등...
지금 돌이켜 보아도 승려대회 개최를 말리던 수많은 사람들의 의견처럼 승려대회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은 오로지 가능과 불가능을 따지지 않고 꼭 해야하는 일이라는 당위성에만 집중하였던 결과이다. 그래서 평가는 크게 다르다. ‘가능’과 ‘불가능’을 생각했던 이들에게는 300여명이 참석한 이번 승려결의대회는 실패다. 이름을 바꾼 것도 비겁한 짓이다. 그러나 당위성만을 가지고 일해왔던 우리에게는 이번 승려대회는 성공이며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1. pd수첩 방영이후로 300명이 넘는 승려들이 길바닥에서 대국민참회를 하였다.

참회없이 비난한느 손가락만으로 변화를 가져올수는 없다. 우리는 진정한 참회를 하였고 하고싶은 말을 하였다. 조계종에도 양심있는 승려들이 있다.는 것을 보연준 것이다.


2.승려들이 징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었다. pd수첩의 방영으로 불교, 조계종이 부끄러운 이름이 되어가는 현실에서 그나마 부끄러워하는 승려들이 있고 미약하지만 자정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 불자들이 조금이나마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3. 부처님이 재가자로부터 사찰, 임야,가사등의 받을 때 승가의 이름으로 받은 이래 승가의 재산은 승려들에게 사용되어지는 공유재산이었다. 이러한 승가의 공유전통을 살리고 공동체를 회복하자는 이번 승려결의대회는 승려들이 자신의 권리를 최초로 확인하고 결의한 역사적인 날로 기록될 것이다.
 
4. 조직과 권력이 있어야 개혁이 가능하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광화문 촛불혁명처럼 민초들이 모이고 소통하면 개혁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황을 판단한 뒤 내가 그 조건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불법을 실천하는 길이고 의식개혁운동이라는 것을...
 
2018년 9월 1일
승려결의대회 대변인 허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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