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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스크랩] “스님들이 왜 산에만 있느냐구요?” “재가불자가 뭘 할 수 있냐구요?”

 

스님들이 왜 산에만 있느냐구요?” 재가불자가 뭘 할 수 있냐구요?” 출재가의 역할분담

 

 

 

이제 제대로 된 불교가 시작되려나

 

최근 도박사건과 관련하여 위기감을 느낀 조계종에서 획기적인 대안을 내 놓았다. 불교포커스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출가자는 수행과 교화, 재가자는 운영과 신행을 담당하는 체계를 수립하라.…중앙종회는 종책모임(계파)을 해산하고 대의입법기관으로 기능을 다라하."

 

조계종 자성과쇄신결사추진본부 자문위원회는 22일 문경 봉암사에서 2차 회의를 갖고 종단에 이같이 주문했다. 자문위원회에는 고우, 적명, 혜국, 지안, 혜남, 종진, 성우, 용타, 보선, 법등, 현응, 지원 스님 등 , , 종무행정 등 각 분야의 스님들이 참여하고 있다

 

비공개로 회의를 진행한 자문위는 회의 종료 직후 배포한 보도자료를 통해 "종단 의식개혁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세부사항은 원로의원 고우스님에게 위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조계종단을 일대 쇄신하여 한국불교의 미래를 새롭게 열어가기 위하여 다음과 같이 그 나아갈 기본방향과 원칙을 천명한다" 6개 항의 자문의견을 밝혔다.

 

6개항은 출가자는 수행과 교화, 재가자는 운영과 신행을 담당하는 체계 수립 부처님의 정법사상에 입각한 올바른 불교관을 확립하여 전 종도의 의식개혁 종헌정신에 입각한 사부대중 공동체 체계 확립 승단은 청정성을 바탕으로 소욕지족의 생활문화를 생활화, 제도화  중앙종회는 부작용을 낳는 종책모임(계파)을 해산하고 종도들 기대에 부응한 대의입법기관으로서 기능을 다할 것 종단은 과도기 상황에서 제정된 종헌 종법의 한계와 문제를 넘어, 율장과 청규정신을 근간으로 하는 한국불교 백년대계의 종헌종법을 완성시킬 것 등이다.

 

이날 회의에는 고우, 적명, 혜국, 지안, 혜남, 종진, 성우, 용타, 보선, 법등, 현응, 지원 스님 등 자문위원과 총무원장 자승스님, 결사본부장 도법스님, 총무부장 지현스님, 종회의원 법안스님봉암사 주지 원타스님 등이 참석했다.

 

(계파 해산…사찰운영 재가자에 맡겨라” 결사자문위원회 22 봉암사서 3차회의, 불교포커스 2012-05-22)

 

 

 

 

 

 

 

 

 

 

봉암사에서 조계종 자정과 쇄신결사추진본부 주관으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 도출된 6개항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첫번째 항이다. “출가자는 수행과 교화, 재가자는 운영과 신행을 담당이라는 내용이다.

 

이와 같은 내용이 시행된다면 한국불교역사에 있어서 큰 획을 긋는 일대사건으로 기록 될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불교가 스님들 위주, 특히 비구승들 위주로 되어 왔기 때문에 사찰의 운영과 재정을 모두 스님들이 맡아 왔었다. 그러다 보니 스님들이 돈을 만지게 되었고,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이 불교가 개망신을 당하고 있다. 그런데 스님들은 일체 사찰의 운영과 재정에 관여 하지 않는다 하니 이제 제대로 된 불교가 시작 되려는 것 같다. 하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다.

 

종권탈취를 위한 음모라는데

 

도박사건, 성매수 의혹 등 종단 지도부가 연일 신문과 방송, 인터넷포털 메인뉴스에 오르내리자 변화가 시작되려 하고 있다. 그것은 비구승들만의 불교가 아닌 사부대중의 불교로 탈바꿈 하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일부 수좌스님들은 총무원장의 조건부퇴진을 내 걸었고, 출가와 재가 단체에서는 연일 성명을 내 놓고 있다. 이유는 승가의 청정성 회복과 재정투명화 등 그 동안 출재가 단체에서 줄기차게 요구하여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저항도 보인다. 관련기사의 댓글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느 정도 의미를 파악 할 수 있다.

 


종권탈취를 목적으로 진행되는 음모는 저지 되어야한다.

스님들이 수행교화를 맡고....재가자가 행정을 맡겠다는 의도는 다분히 불순하다...
이론적으로 그럴듯하나....
내용적으로 간괴음모가 있다..

불교사에서 사부대중가운데 승보로서 재가자란
수행력을 인정해준 특별케이스가 있기는 하지만
그이상 그이하도 아니다 넘치는 과욕으로 오버하지 말라

(OO님댓글, 청정승가 회복 위해 출·재가단체 나선다, 2012-05-23, 불교닷컴)

 

   환부역종하는 마구니로 전락하지 않기를 간.docx

 

 

 

불교닷컴 기사에 실린 댓글이다. 댓글 작성자는 아마도 스님으로 보인다. 재가자가 사찰의 운영과 재정을 맡는 것에 대해서 종권탈취의 음모로 보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재가자가 사찰을 운영하였을 때

 

 이어지는 댓글은 다음과 같다.

 

 

과거 대처승 자녀들이 종단산하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을 가끔 확인할 있다.
그리고 현 종단의 실세라 지칭되는 주요사찰에 가족사촌팔촌이라는 형식으로 들어와서 종무소 살림을 관여해온 점이 인정된다.

종단의 주요인사들이 상좌보다는 가족을 믿고 살림을 맡기는 실태를 어찌 설명할것인가?

출가한 스님이 재자자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처참한 과정이지만 수행이라 생각하고 인욕의 세월보내야했다...

 

(OO님댓글, 청정승가 회복 위해 출·재가단체 나선다, 2012-05-23, 불교닷컴)

 

 

재가자가 사찰을 운영하였을 때 예상되는 폐해을 지적 하고 있다. 과거에 주로 대처승 자녀들이 절을 운영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이들을 상전 모시듯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재가자, 그것도 대처승자녀나 종무원 출신이 절을 맡았을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을 표시 하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결론 아닌 결론으로 말한다.

 

 

어물쩡하게 행정살림을 재가자가 맡고 수행교화는 스님들에게 맡기겠다는
이분법적인 사고의 이거는 상당히 불행한 일이다.
불법의 대의를 망각해도 한참 망각한 이러한 작태는 멈춰져야 한다.

(OO님댓글, 청정승가 회복 위해 출·재가단체 나선다, 2012-05-23, 불교닷컴)

 

 

스님은 오로지 수행과 교화만 하고, 재가자는 사찰운영과 재정을 맡는 것은 이분법적 작태라 한다. 교화와 포교는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재가자도 할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칼로 무 자르듯이 역할을 나누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승가와 재가의 역할분담

 

현재 한국불교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 스님도박사건으로 촉발된 문제가 총무원장 관련 비리와 의혹으로 확대 되고 있어서 신문과 방송, 인터넷에서는 비리집단으로 내몰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을 그대로 내 버려 둔다면 여론은 점점 악화되고 불교의 이미지는 급속도로 나빠져 불자들마저 등을 돌리게 될지 모른다. 이와 같은 한국불교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아 해결방법이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승가와 재가의 역할 분담에  관한 것이다.

 

하지만 스님들은 이를 의심으로 눈초리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일부 불순세력들이 재가활동가들과 짜고 종권탈취를 음모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런 배경에는 기득권을 모두 빼앗긴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돈줄을 빼앗기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과 돈줄을 쥐고 있는 재가자들을 상전 모시듯이 하는 치욕을 맛 볼지 모르기 때문이다.

 

과연 승가와 재가의 역할분담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까. 현상황에서 잠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제스쳐는 아닐까. 말로는 승가와 재가의 역할 분담을 이야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없던 일로 되는 것은 아닐까.

 

이것들이 사찰을 접수하려고 수작부리는 구나

 

이런 여러가지 의문에 대하여 재가자의 입장에서 본 댓글을 보았다. 이번 도박사건이 일어나기 4개월 전 지난 1 9일자 불교포커스에 재가불교, 한국불교의 희망이 있나라는 글이 실렸는데. 이기사에 어느 재가자의 댓글을 보면 승가와 재가의 역할분담이라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종단내에서 아무런 권한이 없는 재가불자가 사찰에 보시,울력하는거 빼고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까요.

가령 깨어있는 소수 재가불자들이 작은 모임을 만들어 주지스님께 사찰운영에 저희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사찰운영에 참여한다는 말은 장부를 들여다 본다는 말이고 사찰이 추진하는 일에 책임자로 관여한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현재 조계종단 스님들은 "이것들이 사찰을 접수하려고 수작부리는 구나" 이렇게 생각합니다.

(YY재가불자댓글, 재가불교, 한국불교의 희망이 있나, 불교포커스 2012-01-09) 

재가불자가 뭘 할 수 있단 말이죠.docx  재가불자가 뭘 할 수 있단 말이죠.pdf

 

 

 

재가불자가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장문의 댓글이다. 댓글의 제목은 재가불자가 뭘 할 수 있단 말이죠?”이다. 제목이 말해 주듯이 사찰에서 재가불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자조적인 내용이다.

 

만일 사찰운영을 재가불자들에게 맡겨 달라고 이야기 한다면 사찰을 접수하려 한다고 수작부리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스님들의 이와 같은 인식은 앞서 어느 스님의 댓글에서 표현된 종권탈취 운운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주지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데

 

글쓴이는 이어지는 댓글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주지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주지 맘대로 하던 걸 재가자들이 제지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지스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부대중이 공평한 권한을 가지고 민주적으로 사찰이 운영되는 것이 주지독단으로 사찰이 운영되는 것 보다 훨신 낫습니다.

 

재정투명도, 수행자들끼리 재산다툼, 수행자의 무능에 의한 사기,,,, 신도들의 소중한 보시금을 하루아침에 날려 버리는 일이 많이 줄어 들겠지요. 신도들이 모아준 보시금이니 신도들 일부에게 사찰운영에 참여토록하는 방안도 신도들에 대한 일종의 보답이 아니겠습니까.

(YY재가불자댓글, 재가불교, 한국불교의 희망이 있나, 불교포커스 2012-01-09)

 

 

글쓴 재가불자의 말에 따르면 사찰운영과 재정을 재가자가 맡으면 투명성등 여러가지 이점이 있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주지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을 때 주지의 독단에  의한 폐해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것은 소중한 시주돈을 사기 당하거나 심지어 토지를 팔아 먹거나 공금횡령등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지가 돈을 가지고 있을 때 도박, , 매음 등 수행자로서 해서는 안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주지불교 시스템의 폐해

 

이런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 여러 차례 블로그에 올렸던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라는 글이다. 지난 2009년 법보신문 어느 기사의 댓글에서 캡쳐 한 것이다. 그 글을 보면 한국불교는 주지불교라고 명명하였다. 그런 주지불교의 폐해에 대한 글 중 일부를 보면 오늘날 왜 도박사건과 같은 일이 일어 났는지 알 수 있다.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를 위한 첫 단추이자 그 변화의 중심적 과제는 과연 무엇일까?? 먼저 그 답을 내리고 시작하자..

 

오늘날 그것은 <승과 속을 제대로 분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승과 속>이란 무엇인가??

 

(승가)의 핵심은 곧 <출가비구의 역사적/현재적 전통>을 의미한다.. 또한 속(재가)의 핵심은 당근 <재가신도가 주축이 된 민주화된 오늘날의 재가불교운동>이 된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 자명한 명제를 새삼 거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가?? ?? 그 이유는 불을 보듯 명약하다.. 곧 소위 <<반승반속>>(사실상의 승가의 재가화/세속화!)이란 작금의 현실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쳐박고 있기 때문이다..

 

<반승반속의 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단적으로 소위 각 종단의 총무원장/종회의원 <금권선거> 등에서 여실히 보여지는 바, 오늘날 한국불교의 저 면면한 <치부>(부끄러움/참괴심)를 부단히 양산하고 있는 <<주지불교/재산관리인의 불교>>를 말한다..

 

지난시절 소위 해방공간의 정화운동에서 내걸린 <비구/대처 운운>의 깃발은 종내 <명색의 변경>에 불과했다.. <금강경>은 누누이 말하지 않던가?? 명색 따위로는 결코 법의 실상을 볼 수 없노라고..

 

비구승가가 전혀 비구승가 답지 않고, 실제 승속이 서로 뒤엉켜버려 <출가비구라는 수행자의 성인지향의 그 성스러운 삶>은 오늘날 오직 <세속화된 범부의 경제적 치부의 삶>으로만 나날이 전락해가고 있다..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라는 제목의 댓글에서, 2009 법보신문)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docx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pdf

 

 

 

한국불교는 승과 속이 구분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이유중의 하나로서 주지불교를 들고 있다. 주지가 모든 사찰운영에서부터 재정에 이르기 까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승속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돈줄을 쥐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주지가 되려 하고 한몫 챙기려 하기 때문에 세속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불교에 대하여 주지불교또는 재산관리인 불교라고 명명하고 있다.

 

어디 감히 스님들과 맞먹으려고?”

 

이어지는 댓글에서 재가자들이 주지스님에게 사찰운영과 재정을 재가전문가에게 넘기라고 말하면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설명하면서 재가불자들이 요구 안했겠습니까.

 

어디 감히 스님들과 맞먹으려고?,

수행자를 그 따위로 대접하라고 부처님이 일렀어?

3악도에 떨어지려고 환장했구먼

 

이런 소리만 듣게 되는 것입니다. 종내에는 "니가 그렇게 사찰운영에 관심 가질 거면 머리 깍으면 될 거 아니야~~" 이렇게 되구요.

(YY재가불자댓글, 재가불교, 한국불교의 희망이 있나, 불교포커스 2012-01-09)

 

 

이런 이야기를 댓글을 통하여 접하였을 때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찰운영과 재정에 대한 공개를 죽어도내줄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사찰운영과 재정을 재가자에게 맡겼을 때

 

그런데 재가자의 요구를 받아 들여 사찰운영과 재정을 전문재가자가 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우 승가사회에서 어떻게 취급받을까. 매우 실감나게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만일 재가불자들의 요구를 어떤 개혁적인 수행자가 공감한다고 칩시다. 그런데 그 스님은 스님들 세계에서 왕따되는 겁니다. 재가불자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 삼보정재를 지킬 줄도 모르는 멍청한 중이라고 욕먹는다니까요.

 

대한민국에 등록된 스님들만 4? 5? 그렇답니다. 문화관광부 등록된 종단만 100개가 넘고 비공식 종단까지 하면 200개가 넘는다고 하죠.아마 조계종단의 운영에 불만을 가진 자들이 창종으로 방향을 많이 틀었을 것입니다.

 

특히 스님들 중 개혁성향의 젊은 스님들은 조계종의 폐쇄적 시스템에 회의를 느끼고 나가는 경우가 많죠. 조계종단 스님들의 특권의식, 비민주성, 물욕,권력욕...이런 걸 목격하게 되면 갈등과 회의가 일고 그렇다고 환속할 수는 없고, 신도들 일부 데리고 창종하는 것입니다.

(YY재가불자댓글, 재가불교, 한국불교의 희망이 될 수 있나, 불교포커스 2012-01-09)

 

 

사찰운영권을 재가자에 맡겼을 경우 그 스님은 왕따된다고 한다. 재가불자의 사탕발림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지불교, 재산관리인불교시스템에서 왕따 당한 개혁적인 스님들이 조계종의 폐쇄적인 시스템에 견디다 못해 창종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불교에서 종단이 수백개 되는 이유중의 하나 일 것이다.

 

이어지는 댓글에서는 주지스님의 권한에 대한 문제를 제기 하고 있다.

 

 

손바닥만한 작은 사찰도 재가불자가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하려면 주지스님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일부 작은 사찰에선 신도들이 장부관리하고 주지스님은 수행에 무게를 두고 정기적인 법문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경우 돈없는 포교당으로 신도들에게 사찰운영을 맡겼다기 보다 주지스님이 맡아할 정도로 크지 않아서 방치했다고 보는게 더 정확하죠. 신도수가 늘고 재정이 안정적으로 되면 바로 주지스님이 권한을 회수해 버립니다.

(YY재가불자댓글, 재가불교, 한국불교의 희망이 될 수 있나, 불교포커스 2012-01-09)

 

 

어떤 일을 하든지 주지스님의 허락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한다. 설령 재가자에게 사찰운영과 재정을 맡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의 규모가 작을 때는 허락하지만, 사찰 규모가 커져서 큰 돈이 들어오게 되면 주지가 그 권한을 모두 가져가 버린 다고 한다.

 

신도회는 견제의 대상

 

다음으로 사찰에서 볼 수 있는 신행단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신도회, 거사림회, 청년회, 학생회....회원수가 급감하고 있고 사라진 모임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들이 모임에 나가는 것은 자기가 그 모임에서 의미있는 존재, 의미있는 하고 있다는 자부심등 이런게 있어야 나가는 것인데요. 불교 모임이란게 스님들 들러리나 해주고 스님들이 시키는 일만하는 것이죠. 모든 수고는 재가불자드이 다하고 영광은 스님이 다 차지해 버리죠.

 

그런데 내가 불교모임에 나가서 '이용만 당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날이 옵니다. 모임에 나가서 불교 공부가 많이 진척되도록 스님들이 가르치지도 않아서 절 오래 다녔는데 남은게 없다, 시간만 축낸 것 같다. 이렇게 느끼게 됩니다.

(YY재가불자댓글, 재가불교, 한국불교의 희망이 될 수 있나, 불교포커스 2012-01-09)

 

 

사찰에 신도회가 있다. 불자들의 모임이다. 이런 신도회는 거사림회, 청년회, 학생회 등 여러이름으로 불리우고 있는데, 모든 사찰에 신도회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름있고 규모가 있는 사찰에 신도회가 있을 뿐 그 외 대부분의 사찰에서 신행단체는 지리멸하거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한다.

 

그런 신도회도 규모가 커지면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을 폐쇄한다든가 하여 신도회를 무력화 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신도회를 키워서 호법신장으로 활용 하는 것이 아니라 주지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간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신도회가 구성되어 절에 열심히 다닌다고 할지라도 절에서 방치 하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그런 신도회에 대하여 긍지와 자부심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녀 보았자 배울 것도 없고 시간만 낭비한다는 생각을 가지면 신도회는 유명무실한 단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주지불교의 폐해 때문일 것이다.

 

재가불자가 뭘 할 수 있냐구요?”

 

장문의 댓글에서 댓글을 단 이는 다음과 같이 결론 아닌 결론을 내린다.

 

 

재가불자 리더, 중간리더들을 스님들이 길러내지 않았고 제도화도 못 시켰고, 그저 스님이름 날리는데, 아니면 스님 편하자고 재가불자들 이용만 하고 말은 것입니다. 다 떠나고 껍데기만 남았죠.

 

재가불자가 뭘 할 수 있냐구요?

없어요, 너무 늦었어요.

재가불자동력이 사라졌거든요.

 

(YY재가불자댓글, 재가불교, 한국불교의 희망이 될 수 있나, 불교포커스 2012-01-09)

 

 

주지스님들이 재가불자를 양성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다. 오로지 주지스님 1인 위주로 사찰이 돌아 가다 보니 재가불자 들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돈줄을 놓지 않으려고

 

이렇게 한국불교에서는 재가불자가 무엇을 해 보려 하여도 할 수 없는 시스템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것은 주지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주지에게 과도한 권한이 집중되다 보니 서로 주지가 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고 그 결과 한국불교가 주지불교로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는 한 마디로 돈줄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바로 힘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돈줄을 놓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도박사건, 성매수 의혹등으로 인하여 종단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리자 승가와 재가의 역할분담론을 발표 하였는데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지 의문 스럽다. 댓글을 보면 돈줄을 놓지 않으려는 집요함이 엿 보이기 때문이다.

 

주지로부터 돈줄을 빼았는 것은 권력을 빼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주지스님들이 이를 종권탈취행위라는 표현 등을 사용하며 절대 내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만일 주지스님들이 돈줄을 재가자에게 내 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댓글에서 어는 스님은 재가자에게 상전 모시듯이 하는 상황이 도래 할 것이라 하지만 이는 다름 아닌 주지불교의 해체를 의미한다.

 

주지가 돈줄을 가지지 못하였을 때

 

주지가 돈줄을 가지고 못하였을 때, 사찰 운영과 재정을 재가전문가에게 맡겼을 때 주지들은 주지라는 직책에 대하여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권력은 돈에서 나온다고 생각하는 주지불교의 현실에서 주지들이 돈줄을 내 주었을 때 주지자리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돈맛을 들인 주지들이 수행과 포교를 할리 만무이다. 그렇다면 주지불교 시스템에서 주지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는 한국불교 자기 정체성 제고라는 댓글에서 적절하게 잘 표현 되어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소위 비구종단들에서조차 소위 비구들이 오직 <경제적으로 치부하기> 위한 <본사/수말사 주지 자리> 하나 꿰차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발버둥치는 작금의 <한국불교(물론 어디 이게 불교만이랴??

.

.

 

소위 각종 종교 <>들 하시는 분들!! 당신들 모두 <돈많은> 주지님들 아니신가?? 아무리 <>(정법!)보다 <>(돈벌어 도대체 무엇에 쓰시는가?)이 더 높은 세상이래도 넘 하지 않은가?? 돈도 안 벌리고 지위도 힘들기만 하다면 다들 지발로 세간으로 도로 나가실 분들이다..

 

(한국불교의 자기정체성 제고라는 제목의 댓글에서, 2009 법보신문)

 

 

현재의 주지불교, 재산관리인 불교 시스템에서 주지들이 돈줄을 놓았을 때 절에 남아 있을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돈도 만질수도 없게 하고 수행과 포교만 하라고 하였을 때 힘들게 절에 남아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라 한다. 그런 경우 제발로 스스로 절에서 나가 환속하게 될 것이라 한다.

 

이렇게 주지불교의 폐해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 도박사건이 일어나고 성매수 의혹이 신문과 방송, 인터넷에 보도 되어 불교가 개망신을 당하고 있고 불교존립기반 마져 흔들리고 있다. 모두 승가의 스님들의 허물 때문이다.

 

그래서 승가와 재가의 역할 분담을 들고 나오고 있지만 모든 것이 스님들 위주로 되어 있고 스님불교라고 불리우는 한국적 현실에서 과연 제대로 시행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주지스님들이 죽어도 돈줄을 내 놓지 않으려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돈줄을 내 놓은면 재가자들의 세상이 될 것이라는 우려아닌 우려도 하는 것으로 보아 그 심정을 알 수 있다.

 

스님들은 포교에 대한 원력이 있을까?

 

만일 승가와 재가의 역할이 분리 되어 출가자는 수행과 포교에 전념하고, 재가자는 사찰의 운영과 재정을 담당한다고 치자. 과연 스님들은 포교에 대한 원력이 있을까.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수 많은 댓글을 받는데, 어느 스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댓글을 받은 적이 있다.

 

 

산중 중들이 도시 교화를? 왜요?

무엇때문에 우리가 죽고 살기로 세속중생들을 교화 해야 합니까?

 

그럴일 없습니다. 그런건 도시땡중들에게나 시키십시요.

우리 산중 수행승들은 오직 간절히 불법을 원하는 에게만 자비심으로 교화 할 뿐입니다.

누구들 처럼 [믿어십쇼~. 믿어야 천국갑니당~]은 절대 안합니다.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님은 [불교] [기독교식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네욤?

(산중승님 댓글,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의 피를 토하는 듯한 호소’2011-09-05)

  산중승역할.docx

 

 

 

글을 주신 분은 산중에서 오랫동안 수행하던 스님이다. 스스로 산중승이라 하였다. 선방에서 수행하는 수좌스님으로 보면 될 것 같다. 삼보 사찰중의 하나인 문중출신이라 하니 선사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스님은 왜 우리가 교화를 하느냐고 반문한다.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런 말은 매우 충격적이다. 불자들이 생각하는 스님상은 수행한 결과를 중생에게 회향하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으로 알고 있으나 산중의 스님은 결코 교화할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대신 다음과 같이 말한다.

 

 

출가승려'들이야 모두들 세속인연을 다끊고

산중으로 들어와버린 몸인데

세속인연에 연연할 일 없쟎습니까?

 

 (산중승님 댓글,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의 피를 토하는 듯한 호소’2011-09-05)

 

 

이 한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이제까지 어느 스님으로 부터도 듣지 못한 솔직한 고백이다. 왜 한국불교에서 포교가 이루어지지 않는지에 대한 답이라 볼 수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스님들이 저잣거리로 내려와 중생에 바다에 풍덩 빠져 교화해 주기를 기대하였던 것이다.

 

중생들이 답답하면 산중으로 찾아오던지 말던지..”

 

그런데 산중 스님의 솔직한 댓글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세상과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세상으로 돌아 올 일이 없다는 명쾌한 대답이다. 그렇다고 해서 산중승이 중생교화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였기 때문이다.

 

 

설사 불교가 세속에서 잊혀지더라도, 우리 수행자는 언제까지나 山中에서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을 겁니다.
목마른 중생들이 답답하면 산중으로 찾아오던지 말던지.. . 값진 山蔘은 깊은 산중에 와서 찾아야 하는 겁니다.
~은 불교의 참 모습을 아직 모르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산삼을 얻고 싶으면 山中으로 찾아오십시요~
, 山蔘이 있는 山中으로 찾아와야지... 山蔘 없는 큰 관광 사찰에 가봤자 헛걸음이겠지요.
그런곳엔 '무늬만 산삼'이 있을 뿐이지요 ^!^]

 

(산중승님 댓글,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의 피를 토하는 듯한 호소’2011-09-05)

 

 

산 좋고, 물 맑고, 공기 좋은 심산유곡에 사는 스님들이 중생교화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스스로 저자 거리를 찾아가 교화하는 것이 아니라 산중으로 제발로 찾아와 법에 대하여 물으면 그때 가르쳐 주겠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목마른 자가 물을 찾듣이 법을 간절히 원하는 자에게만 자비심으로 교화할 뿐이라 한다.

 

나이롱 뽕으로 얻은 도()가 아니기에

 

중생교화에 대하여 또 이렇게 말한다

 

 

길잃은 중생들이 길을 물어면, 그때서야 길을 가르쳐 주려고' 서있는 겁니다.길을 묻는 답답한 입장이니까

[답답한 물어라. , 공손하게 예의를 차리고... . 그러면 답을 가르쳐 주리다]하는 것입니다.

중생들이 묻기 전엔 먼저 [설교]따위 하지 말라는 것이 우리의 계율입니다.
목마른 짐승이 물을 찾으면, 물있는 곳 가르쳐주고/ 길잃은 중생이 길을 물어면 그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수행승'이 할 일입니다. 그뿐입니다.

 

물을 찾지 않는 소에게 물 먹일수 없고/ 길 묻지 않는 에게 길을 말해 줄수 없는 것입니다. [중이 해야 할 일]이란 [길 묻는 자]에게 길을 가르쳐 주면 됩니다. 그 방법이 꼭 [설교]식의 장광설일 필욘 없는 겁니다. 그냥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머리를 끄덕여 주거나, 빙긋이 미소짓는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만으로도 큰 자비행'인 것입니다. ?

수행승들이 [나이롱 뽕]으로 얻은 것이 아니고, 수십년 처절한 수행으로 어렵게 깨우친 것인데, 묻지 않는 들을 찾아다니며 싸구려 물건 팔듯이 [믿셤니까?]를 외칠 이유가 없습니당~

 

(산중승님 댓글,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의 피를 토하는 듯한 호소’2011-09-05)

 

 

중생들이 가르쳐 달라고 해야만 알려 줄 수 있다고 한다. , 예의를 갖추라는 것이다. 수행승들이 이룬 도는 나이롱뽕으로 얻은 싸구려 물건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 한다.

 

사판승과 이판승

 

정말 산중에 사는 선사들이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면 승가와 재가의 역할 분담은 실현 가능한 것일까. 아마도 실현 불가능한 쪽에 무게를 더 둔다.  

 

스님을 크게 사판승과 이판승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판승은 주지 등의 소임을 맡은 스님을 말하고, 이판승은 산중에서 수행하는 수좌스님을 말한다.

 

그런데 출가와 재가의 역할 분담에 따라 스님들은 수행과 교화를 주요한 역할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렇게 되면 사판승은 몰락하게 될 것이다. 거의 대부분 제발로 스스로 절을 떠나 세속으로 들어 갈 것이 명약관화 하기 때문이다. 이는 절에 남아 보았자 힘들기만 할뿐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돈줄을 재가자에게 맡겼으니 할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산중에서 공부하는 이판승은 어떨까. 산중승의 댓글을 보면 이판승들이 수행은 할지언정 교화는 하지 못할 것으로 보여진다. 선방에서 참선하는 수좌스님들이 저잣거리로 내려와 포교할 일은 없어 보인다는 것이다. 단 깊은 산중으로 찾아가서 배우면 모를까 저잣거리에서 선사들 보는 일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출가와 재가로 분리하여 역할 분담하는 것은 사부공동체의 정신을 실현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조치임에 틀림 없지만 선사들에게 중생교화 업무를 기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돈맛을 안 기존 주지스님들이 포교일선에 나서기를 바라는 것도 무리이다. 돈맛을 이미 안 주지스님들이 힘들게 포교 하려 않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출가와 재가의 역할 분담이 정말 실현 된다면 가장 큰 소득은 주지불교의 해체라 볼 수 있다. 그에 따라 도박, 몰카, 고발, 은처, 음주, 매음 등으로 인한 불교망신은 많이 줄어 들 것이라 본다.

 

초기불교는 불교가 아니라는데

 

하지만 이판승 즉 선사들의 중생교화는 기대난망이다. 그것은 세상과 인연을 끊은 사람들이 세상으로 다시 나올 수 없는 법아닌 법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선사들의 불법에 대한 의식 구조가 보통불자들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이점을 산중승의 댓글을 통하여 발견하였다.

 

 

자꾸만 [초기불교]를 들먹이시는데, 과연 [초기불교]라는게 있었습니까? 혹시 [원시불교]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이라면, 그것은 불교'가 아니지요. 그냥, 샤카무니'의 설법시대'였을 뿐이죠.
샤카모니 열반하신 후에 10대불제자를 중심으로, [불교적 교리]가 체계화되고,
[불경]이 집대성 된후에 비로소 컬리큘럼이 만들어지면서 [
佛敎]라는 宗敎 성립되어진 것이지요.

(산중승님 댓글,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의 피를 토하는 듯한 호소’2011-09-05)

 

 

보통불자들은 산중에 사는 스님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른다. 깨달음을 향하여 열심히 수행정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책이나 매스컴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보통불자 보다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 선승들이 말하는 불교가 불자들이 생각하는 불교와 다르다고 말하면 어떤 생각이 들까.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이 최고라고 알고 있는 불자들에게서 말이다.

 

산중승은 매우 솔직하게 말한다. 초기불교는 불교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것은 단지 인간 샤카무니의 설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말을 불자들이 들었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을 것임에 틀림 없다.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라고

 

그렇다면 산중승은 어떤 근거로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한 것일까. 이어지는 댓글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때로 부터 수천년을 지나오면서 [불교]는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 사카무니'께서 확연하게 다 말씀 못하고 가신, 우주의 진리 아눝따라 삼먁삼보리'에 대한 이해 체계가, 그 수많은 히말라야 수행승들과 [대승불교의 중국 불교계]에서 수많은 고승들이 '깨달아 얻은 진리들로서, 불교교리는 엄청나게 진화되어온 것입니다. 감히 초기(원시)불교'와는 비교도 할수 없을 만큼...

불교는 믿음'이 아닙니다. 본래부터 [여여하게 있는 우주의 진리]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진화를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법은 無常 것이고 一體唯心造'인 것입니다.

끝없이 진화하는 교리체계'가 대승적인 현대불교입니다. 아무런 교리체계도 없던 시절의 초기불교'는 종교적인 수준이 아닌, 샤카무니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대한 견해 일뿐입니다.

 

(산중승님 댓글,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의 피를 토하는 듯한 호소’2011-09-05)

 

 

불교는 진화해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 샤카무니가 깨달은 것은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후대 제자들이 체계화 한 것이 초기불교이고, 이후 석가모니 부처님 못지 않은 또는 더 뛰어난 분들, 히말라야 수행자들이나 중국조사 스님 등이 점점 발전 시켜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런 말을 불자들이 듣는다면 인간 석가모니 부처님의 위상은 매우 초라해 진다. 왜 절에 가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3등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 sabbannuta-ñāa)’에 대하여

 

과연 이런 말을 믿어도 될까. 삼보 사찰의 문중에서 수십년 공부를 한 선사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선사들이 이와 같은 마인드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 없다.

 

하지만 테라와다 불교 전통에서는 이와 다르게 본다. 마하시사야도의 법문집 초전법륜경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을 펴실 때, 고성제(苦聖諦)에 대한 의미를 다른 원본들과 다르게 설명하셨다고 볼 것인가?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첫 법문을 하실 때에는 괴로움에 대해서 한 가지로만 정의하셨다가, 나중에 다르게 말씀하셨을 것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러한 식의 견해는 아주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일체지(一切智 sabbannuta-ñāa)로 모든 것을 아는, 위없는 지혜의 소유자인 부처님께서는 시종일관 똑 같은 정의를 내리셨지만, 나중에 율법 전수자들이 완벽하지 않은 지적능력과 기억력으로 여러 세대를 거쳐 전수하는 동안, 이러한 차이점이 원본에 나타나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 것입니다. 오늘날 원본의 차이점에 대한 사례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석서와 복주석서의 원본들도 나라마다 다르다는 것이 판명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원래 원본에는 이런 차이점이 없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발전돼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하시사야도, 초전법륜경 법문집 제4장 고성제)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상).hwp  마하시사야도초전법륜경(하).hwp

 

 

 

부처님의 일체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초전법륜경에서 고성제에 대한 문구가 율장과 경장에서 약간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율장의「대품」에 속하는「초전법륜경」에, ‘질병도 괴로움이다.’란 구절은 삽입하는 과정에서,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란 구절을 삭제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래서 율장에는「초전법륜경」원본이, 경장과 논장의 빨리어 원본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라 한다.

 

이런 내용에 대하여 어떤 이는 부처님께서 첫 법문을 하실 때에는 괴로움에 대해서 한 가지로만 정의하셨다가, 나중에 다르게 말씀하셨을 것은 터무니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부처님의 일체지(sabbannuta-ñāa)’를 아는 분이기 때문이다. 일체지자인 부처님은 시종일관 똑 같은 법문을 하였지만 경장과 달리 율사들이 율장을 만들 때 율법 전수자들이 완벽하지 않은 지적능력과 기억력으로 여러 세대를 거쳐 전수하는 동안 발생된 차이점으로 본다는 것이다.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이처럼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이 설한 경장인 니까야를 보면 놀라우리 만치 일관성을 보이고 있다. 이경에서 한 말 다르고, 저 경에서 한말 다르는 모순이 없다는 말이다.

 

이처럼 일체지자로서 부처님은 초기경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Sabbāhibhū sabbavidūhamasmī
Sabbesu dhammesu an
ūpalitto,
Sabbañjaho ta
hakkhaye vimutto
Saya
abhiññāya kamuddiseyya?

Na me ācariyo atthi sadiso me na vijjati,
Sadevakasmi
lokasmi natthi me paipuggalo,
Aha
hi arahā loke aha satthā anuttaro,
Ekomhi samm
āsambuddho sītibhūtosmi nibbuto.

Dhammacakka pavattetu gacchāmi kāsina pura,
Andhabh
ūtasmi4 lokasmi āhañcha5 amatadundubhinti.
34. 'Yath
ā kho tva āvuso paijānāsi anantajino'ti?

" Mādisā ve jinā honti ye pattā āsavakkhaya,
Jit
ā me pāpakā dhammā tasmāha upakā jino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

모든 상태에 오염되는 것이 없으니

일체를 버리고 갈애를 부수어 해탈을 이루었네.

스스로 알았으니 누구를 스승이라 하겠는가.

나에게는 스승도 없고 그와 유사한 것도 없네.

 

하늘과 인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 없어

나는 참으로 세상에서 거룩한 이, 위없는 스승이네.

유일한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자로서 청량한 적멸을 얻으니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기 위하여 까씨 성으로 가네.

눈 먼 세계에서 감로의 북을 두드리리.’

 

‘벗이여, 무한승리자가 될 만하다고 자인하는가?

 

‘번뇌가 부수어지면 그들도 나와 같은 승리자가 되리.

악한 것을 정복하여, 우빠까여, 나는 승리자가 되었네.

 

 

I have overcome everything, know everything. I'm not soiled by anything,
Giving up everything, with the destruction of craving I'm released,
I realised this by myself and have no Teacher.

Or an equal among gods and men
I'm perfect in this world. I'm the incomparable Teacher
By myself I rightfully realised Enlightenment. Cooled and extinguished.

I go to the city of Kāsi, to set the wheel of the Teaching rolling
It is to sound the drum of deathlessness to the blindfolded world.

Friend, as you acknowledge, it seems you are the world winner.

Upaka, all my demeritorious things are overcome, therefore I'm winner.

 

(아리야빠리예사나경-Ariyapariyesanasutta- The Noble Search- 고귀한 구함의 경, 맛지마니까야 M26, 전재성님역)

  아리야빠리예사나경(고귀한 구함의 경-M26).docx  아리야빠리예사나경(고귀한 구함의 경-M26).pdf

 

 

 

이 게송은 우빠까와의 대화에서 나온 것이다. 부처님이 위 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고 오비구에게 초전법륜을 설하기 위해 베나레스(가야)로 향하여 가는 도중 나형외도 니간따 나따뿌따의 제자인 나체수행자 우빠까(Upaka)를 만난 것이다. 우빠까는 부처님의 상호를 보자 보통이 아님을 알았다. 그래서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차분합니다, 그대의 피부색깔은 청정하고 빛이 납니다. 그대는 어느 분에게로 출가하였습니까? 당신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어느 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게송으로 답한 것이다.

 

하지만 우빠까는 부처님의 첫번째 제자가 될 기회를 놓쳤다. 일체지자라고 말하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도 “벗이여, 그럴지도 모르지요.” 머리를 갸우뚱하고는 부처님께 길을 양보하고 자기 여행을 계속 하였기 때문이다.

 

불교가 시대에 따라 진화해 가는 것이라면

 

게송에서 부처님은  일체를 아는 자( sabbavidūhamasmī, know everything)’라 하였다. 이는 일체지자를 말한다 . 하늘과 인간에서 나와 견줄만한 이가 없고 위없는 스승이라 하였다.

 

그런데 산중승은 부처님의 지혜가 단지 석가모니 개인적인 견해라고 일축 하였다.  석가모니 부처님 사후에도 석가모니 부처님 못지 않은 조사들이 출현하여 불법을 진화 시켰고 지금도 진화 중이라 한다.

 

이렇게 불교가 시대에 따라 진화해 가는 것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완전한 깨달음이 아닐 뿐더러 선종에서 추구 하는 깨달음 역시 완전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은 부처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일체지라 하였다. 이런 일체지라는 말을 듣고도 머리를 갸웃하며 그럴지도 모르죠하고 길을 비켜 준 우빠까가 현재의 선종의 산중승들의 모습과 같은 것이 아닐까.

 

산중에 사는 스님들에게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

 

성자의 흐름에 들어가는데 있어서 조건이 있다.  그것은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환상과 연기법에 대한 의심, 그리고 잘못된 수행방법이다. 산중승을 통하여 이 세가지가 모두 포함 되고 있음을 본다. 

 

나 또는 참나를 찾는 수행은 존재에 실체가 있다는 환상에 대한 것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덜 완성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법에 대한 의심에 해당되고, 나를 찾는 수행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은 잘못된 수행방법에 해당된다. 이렇게 세 가지 조건에 맞지 않으므로 산중에서 나를 찾는 수행방법으로는 결코 해탈 열반을 실현 할 수 없고 성자의 흐름에 들어 갈 수 없다.

 

더구나 세상과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저잣거리로 나올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하는데, 그런면으로 보았을 때 출가와 재가의 역할이 분리 된다고 하더라도 산중에 사는 스님들에게 크게 기대할 것이 없다.

 

중들이 왜 산에만 있느냐구요?”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불완전한 것이라 하여 샤카무니 개인적인 견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니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한 저잣거리로 나와 포교한다고 해도 따라 줄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런 산중승이 하는 말은 다음과 같다.

 

 

중들이 왜 산에만 있느냐구요?

본래 세속이 싫어서 머리깎고 산으로 들어온 것이니까

/ 그리고 산속이 편하니까.

(산중승님 댓글, “언제까지 산속에만 계시렵니까? 혜문스님의 피를 토하는 듯한 호소’2011-09-05)

 

 

산속에 사는 것이 편하다고 한다. 세속이 싫어서 세상과 인연을 끊었기 때문에 다시는 저잣거리로 내려 올 이유가 없는 것 같다.

 

저잣거리에 내려갔더니

 

그런 산중승이 한 번쯤 저잣거리에 내려온 것 같다. 그 때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산중스님들이 도시에 내려와서 저들과 진검승부를 하라시는데,
산중 토굴 수좌들은 가난해서, 도시에 내려와서 진검승부를 해보려해도 숙식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답니다.

그리고,
//
저들 유치한 야훼교도들과 무슨 '진검승부'따위가 있겠슴니까? 그냥 내버려두면 됩니다.

연꽃님이 염려 하시지 않으셔도, 불교는 묵묵히 그냥 흘러갑니다.

다만, 산중절집이나 도시 절집이나 점점 경제적으로 어려운 지경에 빠지겠지요. ? 신도들이 점점 절집 승려들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아서....물론 佛心 옅으지고 있습니다만... .//

 

(산중승님 댓글2)

 

 

저잣거리로 내려와도 숙식이 해결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 중의 하나로서 도시의 절집에서는 산중수좌들에게 하룻밤 묶을 방도 내 주지 않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저잣거리에서 법을 펼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 한다.

 

포교는  도시사찰이 하는 것이라고

 

그래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도시에서의 불교포교문제'는 산중승'이 해야 할게 아니라, 도시의 사찰에 살고있는 도시승려들이 당연히 해야 할 문제아니겠습니까?

[조손 가정...]과같은 문제점은, 도시사찰의 스님들이 해결하도록해야 하는것 아님까?

도시사찰'은 무얼 하는 곳이던가요?
맨날 49재 영가천도재 따위나 하는 굿당인가요?

(산중승님 댓글2)

 

 

포교는 도시에 있는 사찰들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속이 싫어서 떠난 사람들은 찾아와 길을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고 길을 물었을 때 여러가지 방편으로 알려 줄 수 있지만 도시의 포교는 도시에 있는 사찰의 스님들이 할 일이지 산중에 있는 수좌가 할 일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는다. 그런 도시의 사찰을 보면 천도재나 굿 따위로 부처님의 정법과 거리가 먼 짓을 하고 있다고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바라고 바라던 사항이지만

 

출가와 재가의 역할분담은 바라고 바라던 사항이다. 출가자는 수행과 교화에 전념하고, 재가자는 사찰운영과 재정을 담당하다는 역할분담로는 매우 바람직하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인지는 미지수이다. 돈줄을 쥐고 있는 주지불교현실에서 스님들이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역할 분담에 대한 요구를 승가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역할분담이 공찰인 경우는 가능할지 몰라도 스님들의 개인 소유 사찰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우리나라 크고 작은 사찰 대부분이 개인사찰로 되어 있는데, 재가자가 사찰운영과 재정관리하고 스님은 수행과 교화에만 전념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설령 역할분담이 된다고 할지라도 스님들이 포교의 일선에 나서줄까. 현재의 분위기로 보아서 기대난망이다. 돈줄을 쥐고 있는 주지스님들이 돈줄을 놓아 버렸을 때 스스로 포교일선에 나서 교화하기 보다 제발로 산문을 떠나기가 쉬워 보인다. 돈도 만질 수 없는데 힘들게 절에 남아 있을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판승이 이렇다면 이판승에게 기대해도 될까?

 

 

이판승 역시 기대난망이라 본다 산중에 사는 스님의 글에서와 같이 산중승은 세속이 싫어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에 들어 갔기 때문에 다시 저잣거리로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는 도시에 사찰이 많이 보이지 않는 것이 첫번째 이유이다.

 

선방에 있는 스님들이 자비심을 가지고 중생교화 의지가 있었다면 도시에 사찰로 넘쳐 날 텐데, 도시에 사찰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수좌스님들이 결코 저잣거리로 내려 올 일은 없어 보인다. 도시에 있는 사찰들이 포교를 담당해야 하지만 산중승의 지적대로 천도재나 하고 굿이나 하는 정도로라면 정법이라 볼 수 없다.

 

이런 저런 이유로 따져 보았을 때 출가자와 재가자의 역할분담이라는 말이 이상적인 사부공동체를 실현하는 것처럼 보이나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설령 그런 시도를 한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지부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2012-05-24

진흙속의연꽃

 

 

 

출처 : 이 고뇌의 강을 건너
글쓴이 : 진흙속의연꽃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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