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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개혁

초기불교와 열반의 상락아정

초기불교와 대승불교 열반의 상락아정 

 

 

아미타경이나 열반경에서 열반을 常.樂.我.靜이라고 설명하는 것에 대하여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보면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대승경전을 위경이라거나 흰두화된 경전이라고 쉽게 단정 짓고 폐기처분하자는 의견에도 동의하기 힘들다. 대승경전이 흰두화 되었다는 주장을 하기에 앞서 초기불교와 대승불교를 맥락적으로 이해하는 정밀한 연구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불법을 비방하는 잘못을 범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기 불전에서 열반을 탐진치의 소멸이라고 설명하는 것과 常.樂.我.靜 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말 모순되는 표현인가? 그래서 우리는 이 둘 중에서 하나는 택하고 하나는 버려야 하는가?

초기불교 경전이 갑작스레 많이 소개되고 있는 우리 불교계가 혼란스러운 것은 지금 까지 초기경전부터 대승후기 경전들의 사상의 흐름과 용어 흐름을 연구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이 작업은 초기경전과 대승경전을 모두 공부하는 지역 에서 진행될 수 밖에 없는데 그런면에서 중국이나 일본이나 한국에서 그런 정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초기불교에서 후기 대승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변화와 언어의 변화를 연구해 본다면 초기와 대승이 하나의 실에 꿰어 질 수 있을 것이다. 우선적으로 초기경전에서는 정견이 아니라고 말해지는 常.樂.我.靜의 표현이 대승불교에서는 열반의 속성으로 설명되는 것에대해서 살펴보자.

열반에대한 중요한 설명이 상윳따 니까야에 나타난다.

 

상윳따 니까야 제43쌍윳따 무위 상윳따(Asankhatasaṃyutta)에 보면 열반에 관해서 33개의 동의어가 등장한다.

 

 

[세존] 비구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위해 무위(Asankhata)와 무위로 이끄는 길을 설하겠다.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무위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무위라고 한다.

 

 

[세존] 비구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위해 종극(anta)과 종극으로 이끄는 길을 설하겠다.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종극이란 어떠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종극이라고 한다.

 

 

 

[세존]비구들이여, 나는 너희들을 위해 무루(anāsava)와 무루로 이끄는 길을 설하겠다. 잘 들어라. 비구들이여, 무루란 어떠한 것인가? 수행승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수행승들이여, 무루라고 한다.

 

 

이 경전들은 [비구들이여, 무위란 어떠한 것인가? 비구들이여, 탐욕이 소멸하고 성냄이 소멸하고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그것을 비구들이여, 무위라고 한다]라는 경전을 시작으로 종극(終極)antaṃ ,무루(無漏)anāsavaṃ 등의 33개의 단어가 연속해서 나타난다. 그 단어들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무위(無爲)Asankhata 2.종극(終極)anta 3.무루(無漏)anāsava 4.진리(眞理)sacca 5.피안(彼岸)pāra 6.극묘(極妙)nipuna 7.극난견(克難見)sududdasa 8.불노(不老)Ajaratta 9.견고(堅固)dhuva 10.조견(照見)apalokita 11.무견(無見)anidassana 12.무희론(無戱論)nippapa 13.적정(寂靜)santa 14.불사(不死)Amata 15.극묘(極妙)panīta 16.지복(至福)siva 17.안은(安檼)khema 18.애진(愛盡)tanhakkhayo 19.희유(稀有)acchariyaṃ 20.미증유(未曾有)abbhuta 21.무재(無災)Anītika, 22.무재법(無災法)anītikadhamma 23.열반(涅槃)nibbāna 24.무에(無恚)Abyāpajjho 25.이탐(離貪)virāgo 26.청정(淸淨)suddhi 27.해탈(解脫)mutti 28.무착(無着)anālayo 29.섬(嶋)Dīpo 30.동굴(洞窟)lena 31.피난처(避難處)tāna 32.귀의처(歸依處)sarana 33.도피안(到彼岸)paramita]

 

 

 이 밖에도 초전법륜경(S56:11)에서는 "중도는 고요함으로(upasamāya) 최상의 지혜로(abhiññāya) 바른깨달음으로(sambodhāya) 열반으로(nibbānāya) 이끈다"고 설명하며 열반의 동의어 3개를 나열하고 있다.

 

혼란스러움 경(S54:12)에서는 "도반 마하나마여, 아라한들은 번뇌가 다했고(khīṇāsavā) 삶을 완성했으며(vusitavanto) 할 바를 다했고(katakaraṇīyā) 짐을 내려놓았으며(ohitabhārā)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anuppattasadatthā) 삶의 족쇄를 부수었으며(parikkhīṇabhavasaṃyojanā)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하였다(sammadaññāvimuttā,)."라고 설명하며 열반의 동의어 7개를 열거하고 있다.

 

초전법륜 경(S56:11)에서도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苦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tahāya asesavirāganirodho), 버림(cāgo), 놓아버림(painissaggo) , 벗어남(mutti) , 집착 없음(anālayo)이다.

 

위에서 소개한 열반의 동의어만 해도 33개가 되는데 경에서는 더 많은 동의어를 찾을수 있다.

 

이러한 열반을 포함한 33개의 단어들은 모두 탐진치가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들이지만 같은 특징이 있는 단어들끼리 분류할 수 있다.

 

첫째 불노(不老)Ajaratta 무희론(無戱論)nippapa 불사(不死)Amata 애진(愛盡) tanhakkhayo 무재(無災)Anītika, 무재법(無災法)anītikadhamma  무에(無恚)Abyāpajjho 이탐(離貪)virāgo 무착(無着)anālayo 번뇌를 부숨(khīṇāsavā)  짐을 내려놓음(ohitabhārā)  족쇄를 부숨(parikkhīṇabhavasaṃyojanā) 처럼 ~이 없는 상태, ~가 사라진 상태, ~를 벗어난 상태라는 표현으로 단어에서 그 뜻이 드러난다. 붓다는 열반이 어떤 것인지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 없는 상태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그런 표현은 스스로가 직접 거기에 도달해야 파악되는 언어들이다. 또한 이러한 언어표현은 수행자들에게 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며, 지금여기에서 수행하도록 하며, 수행의 의미를 알게해 주고, 수행자 스스로 수행점검도 가능하게 해준다. 이러한 이유로 ~이 없는 상태라는 부정적인 표현이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둘째 열반(涅槃)nibbāna 이나 해탈(解脫)mutti도 ~이 없는 상태, ~를 벗어난 상태라는 부정적인 표현이지만 그 단어에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열반(nibbana, nirvana)은 단순히 불어서 끄다(nir +va) 혹은 덮어서 끄다(nir +vr)라는 의미인데 이 뜻만 가지고는 열반의 뜻을 알기 힘들고 어원분석으로도 그 의미가 드러나지 않는다. 불어서 끄든 덮어서 끄든 무엇을 끄느냐는 것은 경을 읽고 맥락을 알아야 한다. 붓다는 탐진치의 불을 꺼야한다고 밝히고 있다.

 

셋째 청정(淸淨)suddhi, 지복(至福)siva, 안은(安檼)khema, 적정(寂靜)santa  고요함(upasama) 최상의 지혜(abhiññā) 바른깨달음(sambodhi) 삶의완성(vusitavanto) 할일을 다함(katakaraṇīyā) 이상을 실현함(anuppattasadatthā)처럼 [...한 상태]라는 긍정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단어들이 있다. 그러나 청정 지복 적정이라는 단어는 그 단어를 듣는 사람에게는 단어의 소리만 들어오고 의미는 들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의미가 파악되면 위험하다. 이 단어들도 어원을 찾는 방법으로는 그 뜻을 알기 어렵다. 청정을 공간적인 깨끗함이나 상대적인 깨끗함으로 해석하고 지복을 자신이 느낀 가장 행복한 상태라고 이해한데도 이것은 청정과 지복에 대한 추측과 이미지일 뿐이다. 결국 이러한 단어들은 듣는자에게 믿음과 이미지와 추측으로 남게된다. 긍정적인 표현의 언어들은 영원한 것이 있다는 상견을 갖게할 가능성이 높다. 붓다는 탐진치가 없는 상태가 청정이고 지복이고 적정이라고 설명한다.  

 

넷째 비유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피난처(避難處)tāna 귀의처(歸依處)sarana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하고  섬(嶋)Dīpo 동굴(洞窟)lena 처럼 특정 대상을 비유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섬이나 동굴이 의미하는 것은 안전한 곳, 피난처를 의미하는데 그 피난처의 내용은 역시 탐진치가 없는 상태다.

  

다섯째 무견(無見)anidassana 극난견(克難見)sududdasa처럼 보기 어렵고 성취하기 어렵다는 것은 목적지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것을 표현하는 경우고 희유(稀有)acchariyaṃ 미증유(未曾有)abbhuta는 성취하기 어려운 것을 성취했기에 놀라운일. 예전에 없던 일이라는 기쁨과 놀라움의 표현이다. 이같은 입장에서 표현되는 단어들 또한 열반의 동의어라는 것이 특이하다.

  

 

대승 열반경에서 열반을 常.樂.我.靜이라고 4가지 덕성으로 표현하는 것은 [...한 상태]라는 긍정적인 표현이다. 이러한 표현은 위 33개지 단어들중에서 비교하자면 常은 무위Asankhata, 樂은 지복siva, 我는 견고dhuva, 靜은 청정suddhi로 대입하여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애초부터 [탐진치가 없는 상태][苦가 소멸한 상태]를 의미하는 비유일 뿐이다. 열반의 동의어인 33개의 단어들은 모두 탐진치가 없는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들이지만 ~이 없는 상태, ~가 사라진 상태, ~를 벗어난 상태라는 표현과 ~인 상태, ~인 경지라는 부정과 긍저의 표현들이 섞여 있다. 불멸후 5백년까지는 부정적인 표현으로 많이 사용되다가 대승불교가 일어나는 시기에는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뀌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긍적적인 표현이 주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표현해야하는 시대의 요구가 있었을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부처님은 같은 단어라도 다르게 사용하셨다는 점이다. 위에서 열반의 동의어로 사용된  견고(堅固)dhuva 라는 단어가 다른 곳에서는 상견(常見)을 나타내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그 단어가 가진 의미를 고정시키지 않고 사용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런데 그때 범천 바까에게 이와 같은 나쁜 견해가 생겼다. '이것이야말로 항상(nicca)하고 견고(dhuva)고, 영원(sassata)하고 완전(kevala)한 불변법(acavanadhamma)이다."(S6:4)

 

 

대승경전을 편집자 들은 애초에 이 단어들이 같은 내용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혼란이 없이 자유롭게 사용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마치 초기경전에서 배척한 상락아정의 사견이 그대로 대승경전속으로 흘러든게 아니냐, 대승경전이 흰두화 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었다. 그렇게 오해할 수 있는 소지는 충분히 있고 실제로 요즘 그렇게 오해하여 해석하는 이들도 있는것이 사실이다. 불교의 역사를 배우지 않고 불립문자를 외쳐왔던 선종에서는 특히 그 위험성이 넓게 드러난다. 아트만이나 신(God)처럼 무엇인가가 있다는 표현은 사람을 끌어 다니는 힘이 엄청 강하여 유한하고 불안전한 인간들의 욕구에 부응하기 쉽다. 인간의 경향과 어리석음으로 봐서 대체적으로 부정의 단어들로 나타난 표현들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라는 허무주의(단견)로 이해하기 쉽고 그리고 긍정의 단어들로 나타난 표현들은 [행복을 누리는 존재가 있다]는 영원주의(상견)으로 이해하기 쉽다. 이러한 위험성을 간파했기에 붓다는 다양한 입장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열반의 경지를 설명하고있다. 산정상에 오르지 못한 이들에게 산정상을 설명하는 언어들은 어차피 방편이요 비유요 손가락일 수 밖에 없다. 그 비유와 방편과 손가락에 속지 않으면서도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가게 하려면 당근도 필요하고 채찍도 필요하다. 붓다는 가장 쉬운 언어를 가지고 가장 정확하고 편리하게 사용하였던 분이다. 그것이 33개나 되는 단어를 사용하여 제자들을 목적지까지 데려가려는 붓다의 자비요 지혜일 것이다. 애초에 붓다가 왜 그리고 어떻게 그단어들을 사용했는지를 안다면 그 표현들에 속지 않고 가야할 길을 올 곧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 

 

 

 2008년에 제가 쓴 글을 2019년에 간략하게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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