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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참가 후기

 

 

국제학술대회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참가후기

 


우연한 기회

 

인도에서 돌아와 나는 서산의 천장암에 머물다 치과에 들르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다. 치료를 마치고 수유리 화계사에 머무는 동안 8월 12일~13일까지 간화선을 주제로 한 국제학술대회가 동국대에서 개최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서울을 벗어나 대전으로 가려든 계획을 수정하여 이틀 동안 서울에 머물게 되었다. 마침 인도 사르나트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귀국해 있는 경서보살님과 서울에 사는 무애보살님과 연락이 되어 함께 학술대회에 참석하였다. 

 


전체적인 분위기

 

이틀 동안 모든 좌석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왔다. 발표자들도 이렇게 많은 청중 앞에서 발표해 보는 것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외국인이 7 명이 발표를 했는데 그분들의 전공은 중국불교나 일본불교 전공자들 이었다. 정작 간화선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한 외국인은 Robert Shart(UCLA)말고는 없었다. 그만큼 한국 불교와 간화선을 연구하는 외국인 학자들이 없다는 증거 일 것이다.

한국의 발표자들은 재가자가 2명이었고 출가자는 9명(비구8명, 비구니 1명)이었다. 여기서는 외국인 학자들의 발표를 소개하는 것은 생략하고 간화선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던 스님들만의 발표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혜국스님의 발표  

 

[간화선의 유래와 수행방법]이라는 주제로 법문하셨는데 연기무아의 정견을 세우고 나서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을 특히 강조하셨고, 소소영영한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그리고 중생을 구하려는 대자비심을 내지 않으면 수행이 완성되지 않음을 강조하셨다. 다음은 스님의 말씀이다.

  

“정견이 바로서지 않은 상태에서 주로 번뇌 망상과 싸우느라  공부가 순일하지 못했다. ...그 화두가 반야공성을 일러준 一句라는 것을 모르고 잘못 생각하여 소소영영한 주인공이 각자 따로 있는 걸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화두는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냥 오직 모를 뿐인 그것을 참구하는 것이다.”

“간화선은 구하는 길이 아니고 덜어내는 길이다.”

“허공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본래 허공이다. 고로 본래 부처다. 허공을 만들 수 없듯이 부처도 닦아서 새로 만드는 세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견이 바로서야 되고 정견에서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이 일어나야 한다.”

“결국 법이란 중도 연기를 달리 표현할 뿐 그 근본 뜻은 달라진 게 전혀 없다는 결론이다.”

“나 혼자만을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을 위해서 공부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제대로 된 깨달음은 오지 않는다.”

 


 

**고우스님의 발표

 

[참선 수행의 목적]이라는 주제로 오후에 법문하셨는데 무소유의 의미를 교계 싱갈라경(D.31 선생경)을 인용하시며 설명하셨다. 즉, 물건 출세 권력 등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무소유가 아니라, 나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 것이 무소유라고 말씀하셨다. 특히 무아를 알면 외형적인 것에 비교하여 생기는 갈등, 스트레스가 없어지며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를 알게 되며 자주적인 사람이 되고 원할한 소통이 이루어 진다고 법문하셨다. 유식의 이론으로 깨달음을 설명하시고 인간과 나비족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아바타, 미국대통령 오버마의 정치관, 빌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 폴호겐의 자연 자본주의, 파이만, 힉스의 소립자 이야기 등을 하셨다.

   

“지금 불교인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수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부처님 께서는 수입의 1/4은 생활을 하고 1/4로 재투자를 하고 1/4은 저축을 하여 미래의 위험에 대비하고, 1/4은 어려운 이웃에게 배풀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부자가 천국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명으로 들어가기 보다 어렵다고 물질을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

 


 

**수불스님의 발표

 

[간화선 수행의 대중화]라는 주제로 학술대회 이틀째 아침에 법문을 하셨다. 대신심을 스승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대의심을 내서 공부하면 은산철벽이라는 정신적 벽이 나타나는데 이것을 꼭 뚫고야 말겠다는 마음이 대분심이라는 독특한 해석을 내놓고 이렇게 공부시키기 위해서 “단번에 의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답만 찾도록 수행자를 다그치는” 방법으로 화두공부를 지도하고 있다고 설명하셨다.


“‘어째서 무라했을까?’ 를 생각 생각에 끊어지지 않게 하려고 공안만을 자꾸 떠올리면서 되새김질하듯이 의심하는 사구(死句) 가지고는 참구가 지속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한국 조실스님들은 법문은 조사선 입장에서 하면서 수행은 간화선으로 하라고 요구한다.”

 


 

**미산스님의 발표

 

초기불교의 5근 5력과 간화선의 3요소라는 대신심, 대의심, 대분심을 비교하는 글을 발표했다. 발표자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간화선을 초기불교와 비교하려는 시도였다고 생각한다.


“간화선의 대신심은 오력의 믿음에 해당하고 간화선의 대분심은 오력의 정진에 해당하고

간화선의 대의정은 오력의 마음챙김 삼매 지혜에 해당한다.“


“오력에서 정과 혜를 균등하게 닦기 위해서는 마음챙김(sati)이 바탕, 중심축이 되고 간화선에서는 의정이 중심축이 된다.”



 

**혜민스님의 발표

 

혜민스님은 송담스님, 성철스님, 수불스님이 제시한 화두참구에 대한 다양한 가르침들을 소개했다. 송담스님은 학생들에게 단전으로 호흡하는 기술을 터득하고 호흡을 세는 수식관을 가르친다. 그다음으로 “이 뭣꼬?” 화두를 참구하도록 한다.


“이....뭣꼬....?” 숨을 깊이 들이 마셨다가 3초동안 머물렀다 내쉴 때 “이....뭣꼬....?” 다 내 쉬면 스르르 숨을 들이 마시되, 들이 마시면서도 “이....뭣꼬....?”한 그 의심의 여운이 그때 까지 오도록 조용히 관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 되면 두 번 들이 마셨다가 내쉴 때 한번만 “이....뭣꼬....?”를 하고 이것이 익숙해지면 다섯 번 호흡하는 동안 ‘이뭣고’ 한 번의 의심이 쭉 이어지도록 합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아침에 눈 떳을 때 ‘이뭣꼬’ 한번 해놓으면 하루종일 ‘이뭣꼬’ 한 번으로 살아 갈 수 있게 될 때가 꼭 올 것입니다.


성철스님의 가르침은 “화두를 들 때에는 ”“어째서”를 꼭 붙여서 “어째서 무라 했는가?” 이렇게 해야 합니다. 성철스님은 화두가 들리는 수행단계를 동중일여-몽중일여-숙면일여로 구분해 놓아서 몽중일여도 안 되는 단계에서 깨달았다고 확신하는 병폐를 경책하셨다.


수불스님의 가르침은 “수행자가 화두를 속으로 되풀이 하면서 억지로 의심을 짜내려 한다면, 이 방법은 그다지 효과가 없으며 모든 노력을 단지 답을 찾는데만 쏟는다면 의심은 훨씬 빠르고 쉽게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문제를 따라 답을 알려고 하는 생각이 일어나면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이 마음속에 걸리게 된다. 의심이 제대로 되면 목을 꽉 쪼는 느낌이 되며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사방에서 쪼여온다. 나아갈 길은 안보이고 답은 찾아야 겠고, 앉지도 서지도 오도가도 못하게 된다. 이 상태가 은산철벽이다.”

 

 


 

**월암스님의 발표

 

[한국불교 전통 선원의 현황과 수행]이라는 주제였다.

월암스님이 제시하는 전통선원의 문제점과 방향 제시는 다음과 같다.

1.선교겸수로서 정견이 확립되어야 한다. 정견이 없으면 선을 신비적 체험이나 번뇌 넘어 소소영영한 실체를 찾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정견은 “정견은 연기 무아 공에 대한 바른견해이다. 선이란 반야직관에 의한 중도정관으로 자아와 세계에 대한 바른 견해를 획득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수행자는 정견의 확립 없이 실참에 뛰어들어 선수행의 내용과 방향을 모른다.

2. 좌선과 행선이 병행되어 현대인의 기호에 맞는 수행방편이 제시되어야 한다.

3. 하루 수행하면 하루 만큼 행복해 져야 한다. 지금처럼 수행과 인격이 일치하지 못하는 수행풍토로는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없다.

4.간화선과 다른 수행법이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수행계위를 체계화하고 조도의 방편을 적극 활용해야한다. 시대와 대중에 알맞은 수행법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진제스님의 발표

 

[향상의 정맥]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의 대미를 장식했다.

진제스님이 27세에 화두를 타파하여 향곡스님에게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올렸다고 한다.


이 주장자의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성인들도 알지 못한다.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빛 용으로 변화해서

한량없는 조화를 마음대로 부린다.


이 글을 보고 향곡스님이 “너는 용 잡아 먹는 금시조를 만나서는 어떻게 하려는고?”

하고 물었는데

진제스님이 “당흉하여 몸을 굽히고 세 걸음 물러나겠습니다”라고 대답하니

향곡스님이 “옳다, 옳다”라고 하시었다.


그러나 다시 일면불 월면불이라는 화두에 다시 막혀서 화두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시 5년을 보내고 33세(1967년)에 드디어 이 화두도 타파하여 향곡스님에게 전법게를 받았다 한다.

깨달음의 경지를 진제스님은 “법신의 진리, 여래선의 진리, 향상의 최고의 진리가 있는데 향상의 최고의 진리를  알아야만 깨달음이라고 한다.”라고 나누어 설명 하셨다.

 

 

 

 

 

 

** 참가 소감

 

  발표를 맡은 스님들은 하나같이 화두를 하기 전에 정견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고 자비심이 있어야 공부가 성취됨을 설명하였다. 스님들은 정견을 연기무아(緣起無我), 중도정관(中道正觀)등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러한 정견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사람은 없었다. 부처님은 '대 사십 경(M117)'에서 정견을 설명 할 때  세속적인 정견과 출세간적인 정견으로 설명한다. 정견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생활과 분리되지 않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정견과 출세간적인 정견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마지마니까야의 설명이 가장 자세하다 할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정견을 공부해야하는 이유는 대승경전이나 선어록에서 나타나는 정견은 언어표현에서나 내용면에서 자세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소영영한 주인공이 따로 있는 걸로 잘못 알았던 것이다.” 라는 혜국스님의 설명처럼 한문 어록만을 보게 되면 초기경전에서 연기무아로 설명되는 정견의 의미를 놓치게 될 수 도있다. 정견이 연기무아임을 강조하는 선사스님들이 많아진 것을 보며 초기불교와 니까야의 영향력이 무시하지 못 할 정도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고우스님처럼 니까야(아함경)의 내용을 직접 인용하여 무소유를 설명하고 영화와 최신과학의 원리를 인용하며 불교를 쉽게 설명하려는 노력이나, 월암스님처럼 “지금처럼 (간화선) 수행과 인격이 일치하지 못하는 수행풍토로는 대중의 호응을 얻을 수 없다. 간화선과 다른 수행법이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수행계위를 체계화하고 조도의 방편을 적극 활용해야한다. 시대와 대중에 알맞은 수행법이 개발되어야 할 것이다.” 라는 발언은 한국불교의 앞날을 밝게 만드는 징조일 것이다. 또한 혜국스님의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수불스님의 핵심을 찌르는 화두공부법은 아직도 간화선이 이 땅에 지속적으로 이어지리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많다.

국제 학술대회이면서 원할한 통역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시간에 쫒겨서 발표자들끼리의 토론이나 발표자와 참가자들의 질의문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간화선을 드러내고자 했다면 간화선 하나만을 이야기하는 자리가 되기보다는 다른 사상이나 수행법을 비교 하면서 설명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마지막 토론의 사회를 맡은 천주교 서명원 신부의 지적대로 ‘다양함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하나만이 우수하고 최고다라는 태도가 과연 바람직 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신부님을 초청해서 토론의 사회를 보게하는 것도 나쁠 것은 없지만  한국말과 영어가 가능한 외국인 스님들 즉, 숭산스님의 제자들이 한명도 초청되지 않았다는 것이 의문점으로 남는다.  무상사 조실 대봉스님, 주지 무심스님, 현각스님, 청안스님 등등 숭산스님의 제자들은 누가 보아도 한국의 간화선을 세계에 알리려는 이번 행사에 꼭 초청되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인재들을 놔두고 한국불교나 간화선을 연구해보지도 않은 외국인 학자들만을 초청하여 억지 모양새를 갖추려는 행사를 진행한 것은 이해 할 수없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제스님의 마지막 법문은 이미 교재에 나와 있는 것을 다시 이야기 해주는 수준에 그쳐서 살아있는 법문이나 법거량이 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진제스님의 법문을 듣자니 이러한 의문이 생긴다. 진제 스님이 27세에 분명히 화두를 타파했다고 향곡스님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는데 왜 다시 다른 화두에는 막히게 되는가? 27세에 타파한 경지와 33세에 타파한 경지는 초기경전에 따르면 각각 어느 경지쯤 되는 것일까?


외국에 살다가 오니 진제스님에 대한 여러 소문이 들린다. 진제 스님이 원로위원이 될 때 기존의 원로의원스님들에게 돈 봉투를 돌렸다는 것이다. 최근엔 동화사 주지 선거 때도 어느 한쪽 스님을 주지로 추천하여 대중의 화합을 깨트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단다. 개인적으로 탐진치를 여읜 도인이라면 과연 탐욕이 있고 번뇌가 있는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법상위에 있는 스님의 언행과  법상 아래 스님의 언행이 다르다면 우리는 어떤 모습의 스님을 따라야 할 것인가?  그리고 진제스님의 법어집에서 간화선 공부만이 궁극의 깨달음을 이루지 위빠사나 같은 수행법은 궁극의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고 한다. 그말이 사실리라면 부처님의 깨달음은 궁극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고 진제스님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한국의 도인을  우리불자들과 세계 불교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러한 의문을 갖게된 국제 학술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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