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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천장사



연암산 천장사

 

천장사는 연암산 남쪽에 자리잡은 천장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에 속해있으며 인법당내에 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천장사의 창건 연대는 백재 무왕34년(633)에 담화선사가 수도하기위해 창건한 사찰로 전하며 조선 말기 고종 순종때의 고승 경허선사( 1849~1912)가 이 사찰에 기거하며 수도하였고 또한 그의 제자인 송만공 선사가 득도하는 등 조선말 승려들의 수도장으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인법당은 "ㄷ"자형 목조 와가로 축대를 2단으로 높게 조성하고 자연석 덤벙 주초석 위에 원주를 세워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겹처마 팔짝 지붕으로 건립되었다. 1988년 8월 18일 전통 사찰로 지정되었다.

 

 고북면 소재지에서 동쪽 장요리 방향으로 약3.5km정도에 연암산이 위치한다. 천장사는 장요리의 뒷산 연암산의 남쪽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천장사는  산기슭의 경사가 심하여 앞에는 축대를 2단으로 높이 쌓아 사찰을 조성하였는데 경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그리고 요사체가 있다.

 

사찰에 전하는 말에 의하면 천장사는 서기 633년  백제의 담화선사에 의하여 초창되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문이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조선말에는 경허선사가 수도하고 송만공대사가 득도한 고사찰로써 법당인 민법당을  중심으로 주변에 소형의 산신각과 요사체를 구비함으로써 가람을 구성하였다. 규모의  사찰이지만 천장암에는 문화재자료 제202호인 천장사칠층석탑을 비롯한 조선 고종33년(1896)에 제작된 제석, 천룡도, 영산회도 등 귀중한 자료들이  있다.

 

연암산 남쪽에 자리잡은 천장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에 속해있으며 인법당내에 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천장사 경내

 

인법당이란? 

작은 절에서 법당을 따로 짓지 않고 중의 거처()하는 방에 불상을 모신 곳

 연암산 정상에서 내려 본 천장사

 

경허스님이 천장사에 수도 할 때 지은 청산이라는 시가 실감이 나게 하는 풍경이다.

 

                     산은 절로 푸르고    물도 절로 푸른데                          山自靑水自綠  

              맑은 바람 떨치니    흰 구름  돌아 가네                        淸風拂白雲歸

              종일토록 바위 위에  앉아서 노나                                盡日遊盤石上

              내 세상을 버렸거니  다시 무었을 바랄것인가                我捨世更何希

 

 

온 나라가 개국의 여파로 뒤숭숭하던 1880년 6월 어느날 충남 서산군 고북면 연암산 마루의 천장암에 30대 중반의 한 승려가 나타났다. 경허(1846~1912)라는 법명의 이 스님은 당시 불교계에서 경전에 밝은 학승으로 이름이 높았다.

 

하지만 그는 이미 세상 사람들이 아는 경허가 아니었다. 한 해 전 삼남 지방을 덮친 콜레라의 참상 속에서 교학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고는 선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당시 머물던 동학사 강원으로 돌아간 경허는 제자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방문을 걸어 잠근 후 참선에 몰두했다.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고 칼을 갈아 턱에 들이대면서 화두에 몰두하던 그는 3개월 만에 의문을 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번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해서 그냥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로부터 선가에서는 깨달음 이후 그것을 굳게 다지는 수행을 ‘보림’이라 부르며 몹시 중시했다. 경허는 바로 보림을 위해 천장암을 찾았던 것이다. 백제 무왕 34년(633년) 만들어졌다는 천장암은 산 위에 달랑 법당 한 채가 자리잡은 작은 암자였다. 당시 천장암에는 그의 친형 태허 선사가 모친 박씨를 모시고 수행 중이었다.

 

지금도 천장암으로 가는 길은 쉽지가 않다. 콘크리트로 부분 포장된 산길을 자동차로 오르다보면 갑자기 급경사가 나타난다. 할 수 없이 차에서 내려 다시 10분쯤 걸어 올라가자 저쪽에 암자가 보였다. 새 건물을 두 채 짓기는 했지만 법당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잠시 숨을 돌린 후 경허 스님이 사용했던 법당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방을 찾았다.

 

한평 남짓한 이 골방에서 경허는 1년 넘게 장좌불와를 했다. 그는 한벌 누더기 옷을 입은 채 지냈으며 모기와 빈대, 이로 몸이 헐어도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구렁이가 방에 들어와 어깨를 타고 올라가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자 구렁이가 스스로 기어나갔다.

뼈를 깎는듯한 수행을 거듭한 끝에 깨달음을 확신하게 된 경허는 천장암에서 첫 설법을 하게 된다. 법당에는 바로 그 설법 때 읊은 게송이 그의 절 집안 증손자인 수덕사 방장 원담 스님의 글씨로 붙어 있다.

 

“홀연히 고삐 뚫을 곳이 없다는 사람의 소리를 듣고(홀문인어무비공)/문득 깨닫고 보니 삼천세계가 나의 집이네(돈각삼천시아가)/유월 연암산 아랫길에(육월 암산하로)/일없는 들 사람이 태평가를 부르네(야인무사태평가)”

 

법당 안에는 불상 좌우로 경허 스님과 그의 제자인 만공 스님 영정이 나란히 걸려 있다. 그렇다. 천장암은 경허 스님뿐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 수행한 곳이기도 하다. 보림을 마치고 1882년부터 전국을 돌며 꺼져가던 선풍을 다시 불러 일으키기 시작한 경허 스님은 이후에도 천장암을 틈틈이 찾았다. 또한 마음에 드는 후학을 만나면 제자로 삼아 천장암에서 수행하게끔 했다. 법명이 월면인 만공을 비롯해서 ‘경허 문하의 세 달’로 불리는 수월, 혜월 스님이 출가한 곳이 천장암이었다.

 

이번에는 오른쪽 능선에 있는 제비바위로 향했다. 경허가 즐겨 좌선을 했다는 곳이다. 공사가 한창인 서해안 고속도로가 발 아래 있었고 그 너머로 서해 바다와 내포 평야가 멀리 보였다. 뒷 산에는 경허의 또다른 수도 공간이었던 동굴이 있다. 한 사람이 들어서면 꽉 차는 동굴 속에 앉으니 맞은 편 삼준산 봉우리가 눈 앞에 마주선다.

 

다시 천장암 뜰에 서서 바람 소리, 새 소리를 들으니 경허 스님이 왜 이곳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는지 알 것 같았다. 경허는 어느 처사로부터 ‘콧구멍 없는 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깨달은 소’라는 뜻의 성우라는 법명을 새로 지었다. 이리 저리 끌려다닐 일이 없어 자유와 해탈을 상징하는 ‘콧구멍 없는 소’가 되기에는 이곳만한 곳이 없어 보였다.

( 조선일보 이선민 기자 smlee@chosun.com ) 

 

 탱자나무의 탱자와 절간의 기와가 묘한 조화을 이룬다.

탱자나무 : http://blog.daum.net/zmstks/13158188

 

 대웅전 법당

 

 

 천장암 인법당

 

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재하방

念到念窮無念處 염도염궁무념처

六門常放紫金光 육문상방자금광

                        (인법당 주련)


생각은 생각을 이어가다 생각조차 끊어진 곳에 이르면

아미타불 어느 곳에 계실까

내 몸의 육근에서 찬란한 금빛이 흘러나오네.


白玉明毫發兩眉 백옥명호발량미

紫檀金色不雙? 다단금색불쌍검

照嶢朦朧五彩明 조요몽롱오채명

當空宛轉千花秀 당공완전천화수

一音淸震三千界 일음청진삼천계

七辯宣淡八諦門 칠변선담팔체문

                     (인법당 주련)


백호광이 양미간에서 발하니

붉은 연꽃 탁자 위에 존엄하신 부처님은

밝고 빛난 아름다운 오색광명 비추시고

부처님 전에 천만가지 만다라 꽃 공양하니

한 말씀에 삼천세계 두루 맑게 빛나므로

무진 말씀 중생구제 해탈문을 보이시네.

 

 

 천장사 7층석탑

 

 천장사 인법당 앞뜰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1층 기단 (基壇) 위에 7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은 모습이다. 기단은 밑돌이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그 위로 지붕 모양의 맨 윗돌을 덮어두고 있는데, 그 폭이 탑신의 1층 몸돌과 거의 같다. 탑신부 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으며,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줄어드는 비율이 그리 크지 않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새겨두었다. 4층 지붕돌에서부터 7층 몸돌까지 놓인 돌들은 제자리가 아닌 듯 어색한 모습이며, 꼭대기에 있는 머리장식 또한 아래의 7층 지붕돌과 크기가 맞지 않아 원래의 형태는 아닌 듯하다. 탑신부의 몸돌이나 지붕돌의 모습에서 고려의 양식이 보이고 있으나, 기단의 폭이 탑신의 1층 몸돌과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이후에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요사채

 

선사는 일년 후 쪽방의 방문을 활짝 열고 깨침의 노래 가운데는 유래없이 긴 오도송을 토해냈다.

그리고 게송으로 우리들에게 일렀다.

홀연히 코뚜레를 꿸 콧구명 없다는 말을 듣고
몰록 삼천대천 세계가 내 집임을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돌사람 일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


 

 

부처님의 오묘한 불법의 진리를 전해들은 수보리 존자는 부처님께 묻는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이와같은 말씀을 듣고 실다운 믿음을 내는 자가 있으오리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셨다.

그런말을 하지 말지니라,

여래가 멸도에 든 뒤 후 오백세에 이르러 계를 가지고 복을 닦는 자가 있어서

능히 이 글귀에 신심을 내며, 이로써 실다움을 삼으리라.

 

 

경허선사는 수월, 혜월, 만공, 한암이라는 큰 스님을 키워내고는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훗날 만공스님이 발굴해 찾은 경허선사의 열반송은 이러했다.

마음달이 외로이 둥그니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것이 무슨 물건인고

하고 붓에 먹을 듬뿍 묻혀 일원상을 그렸다. 이 때가 1912년 4월 25일 세수 67세, 법랍 59세였다.

 

 

 

하늘을 감춘 천장암 ‘수월선사’

몸으로 법문 쓴 ‘중생의 머슴’  

 

충남 서산군 고북면 장요리. 고북저수지의 맑은 물에 비친 그림자를 뒤로 하고 연암에 오르면. 지금 오르던 산등성이는 벌써 세상과 담이 되고. 능선으로 켜켜이 포개진 산 속에 천장암은 숨어 있다. 경허와 수월이 앉았던 제비바위 위에 오르니 안면도 앞 서해바다까지 온 천하가 시원하다. 그러나 바깥 세상에서 이곳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을 감춘 암자’인 천장암인가 보다. 나무꾼 선사 수월 또한 세속인이 엿보기 어려운 인물이다. 경허 선사의 맏상좌(첫제자)로 그 시대 가장 존경받은 선사였지만 그는 글 하나 법문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근대의 고승 중 가장 알려진 게 없는 인물이다.

수월은 인근 고을에서 머슴을 살다가 30살이 다되어 천장암의 불목하니(절머슴)로 들어왔다고도 하고, 10대에 입산했다고도 전해진다. 만해 한용운이 발행하던 <불교>는 수월이 북간도에서 열반한 6개월 뒤에야 열린 추도식에 즈음해 ‘전 조선을 통하여 현대의 유일한 대선지식이신 전수월 대선사께서 열반하셨다’고 보도해 그가 1928년 열반한 것은 확실시되지만, 그가 태어난 때는 확실치 않다. 경허보다 9살 적은 1855년생설이 주로 전해진다.
머슴 살다 서른무렵 입산나무하고 방아찧고 궂은일후일 북간도서 중생 보듬어한용운 “대선사 열반” 탄식이 허름한 천장암 대웅전 옆 구석엔 계룡산 동학사에서 생사를 넘은 경허가 다시
1년여 동안 씻지도 않고 눕지도 않으며 보임(깨달음 이후의 정진)해 마침내 태평가라는 깨달음의 노래를 부른 1평짜리 방이 있다. 이곳은 불교 역사상 다시 보기 어려운 수월, 혜월, 만공 등의 법기(불도를 수행할 자질이 있는 사람)들을 경허가 법신(불법을 완전히 깨달은 부처의 몸)으로 빚어놓은 곳이기도 하다.

그 방 주위엔 가래떡처럼 모양 좋게 썰어놓은 장작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절을 안내한 혜중 스님 등 절식구들이 겨우살이용으로 해놓은 것들이다. 나무꾼 수월의 후학들답다. 수월은 낮에는 나무하고 밤엔 방아 찧어 스승과 절 식구들 뒷바라지를 했다. 글을 몰랐던 그는 경전 공부도 못하고, ‘천주다라니’(산스크리트 원어로 된 불경)만을 외워 삼매에 들었다.  누구고 가릴 것 없이 중생에게 베푼 그의 정성은 하늘도 감동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절에 손님이 오면 발 감싸개인 감발을 벗겨 손수 빨아서 불에 말렸다가는 아침에 신도록하고, 밤새 몸소 만든 짚신 3~4켤레를 바랑 뒤에 메워주었다고 한다.  그의 사제로 당대 최고의 선사로 존경받던 만공은 생전에 “수월 형님만 생각하면 난 늘 가슴이 뛴다”고 말할 정도였다.

수월은 늘 머슴처럼 일만  했지만 밤에 아랫마을에서 산불이 난 줄 알고 달려올 정도로 방광(빛이 남)을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그는 가는 곳마다 조실로 모셔졌으나 누가 조실로 부르던 머슴으로 부르던 아랑곳 없이 오직 머슴처럼 일만하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 숨곤 했다. 북녘을 유랑하던 수월은 1912년 두만강을 넘어 간도로 갔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과 초대 총무원장을 지냈던 청담은 젊은 시절 각기 따로 스승을 찾아 북간도까지 가서 그를 만났다. 당시 간도엔 비적이 들끓어 집집마다 송아지만한 만주개를 길러 집과 마을을 지켰다고 한다. 그 개들은 모르는 사람이 밤에 나타나면 다짜고짜 물어뜯을 만큼 사나왔지만 수월에게만은 꼬리를 흔들며 엎드리더라는 것이 그들의 증언이었다.

 

 

아니 온 듯 다녀가세요!

 

수월의 행적을 듣기 위해 예산 덕숭산 정혜사 선원장 설정 스님을 찾았다. 설정 스님은 “지금은 열반했지만 수월 선사와 같은 마을 출신이었던 ‘지선 노스님’으로부터 ‘수월 선사가 천장암 아래 갈산 사람으로 세간에 알려진 ‘全’씨가 아닌 ‘田’씨이며 독자인데 아주 어려서 출가한 것’으로 들었다”고 전했다. 또 수월의 행적을 좆아 1989년 중국을 답사했던 설정 스님은 “수월 선사가 살던 옛 간도의 고을에서 80~90살 든 노인들은 수월에 대해 자기는 없고 중생만을 위했던 자비의 화현보살로 기억하고 있었다”며 수월이 간도로 갔던 이유를 전했다.

“나라 잃고 고향을 잃은 백성들이 쫓기고 쫓겨서 간 곳이 간도였지요. 고갯마루에서 상처입고 지친 사람들을 기다렸다가 따뜻한 물과 밥 한술을 먹이고, 신을 삼아 보내며 생애 마지막 수십년을 헌신하다 그는 소리 없이 떠나갔습니다.”  생전에 한 번도 대우를 받으려하기는 커녕 오직 남의 손발 같은 머슴으로 살았던 수월은 자신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서 조용히 헌신하다 자취 없이 떠난 바람이었다. 가파른 산 길을 내려오니 숨이 거칠어진다. 나무가 내어준 신선한 산소를 바람이 전해준다. 숨구멍이 트인다. 이제 수월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보이는 것, 내딛는 곳이 하나같이 아낌 없이 주는 나무요, 더 없이 포근한 산이다.

[한겨레신문 조연현 기자]  서산·예산/ 글·사진 조연현 기자  cho@hani.co.kr  ⓒ 한겨레(han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1) 경허 스님


  경허 성우(鏡虛 性牛, 1849∼1912)선사는 조선말기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중흥조로 출현하여 무애자재로운 생활속에서 전등의 법맥을 이으며, 선불교(禪佛敎)를 진작시킨 선의 혁명가이자 대승(大乘)의 실천자였다.
 
  스님의 법명은 성우(性牛), 법호는 경허(鏡虛)이다. 9세 때 경기도 과천 청계사로 출가하여 계허 스님의 제자가 되었으며 절에 와있던 어느 거사에게서 사서삼경을 배우고 기초적인 불교교리를 익혔다.
 
  이후 동학사의 만화강백에게 천거되어 불교경론을 배우니 그는 불교의 일대시교(一代時敎)뿐 아니라 유서(儒書)와 노장(老莊)등의 사상을 고루 섭렵하였다. 어느날 전염병이 돌고 있는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 문자공부가 죽음의 두려움을 조금도 없애주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후 오로지 영운선사의 "나귀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는 화두를 들고 정진하던 중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라는 한 사미의 질문에 모든 이치를 깨달았다.
 
  이때부터 육신을 초탈하여 유유자적하였다. 그후 천장암에서 1년간 보림 후 활연대오하니 생사에 자재(自在)하였으며 56세에 만공에게 전법계를 전할 후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생활로 말년을 보냈던 스님은 1912년 4월 25일 함경도 갑산 웅이방 도하동에서 입적하니 세수 64세, 법랍 56세였다.
 
  경허 스님은 전국 곳곳에 선원과 선실을 개설하여 불교계에 선수행의 풍토를 조성, 선풍을 진작시켰고 스님의 문하에는 만공(滿空), 혜월(慧月), 수월(水月)등이 있다.
 

 

 

 

천장암에서 꼭 하나 보고 와야하는 곳이 있다. 다른 곳은 보지 않아도 이 곳만은 꼭 봐야한다.

그곳은 경허선사가 강원을 파하고 동학사에서 깨침을 얻고 이 곳에 와서 보림을 했던 그 작은 방이다.

그 방은 사방 일미터도 안된다고 전해진다. 그 방안에서 6개월이나 꿈쩍도 안했다고 한다.

 

그 방 앞에는 깨침을 구하는 문(원구문 圓求門)이란 현판이 붙어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 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법당 안에는 경허선사의 친필 한 폭이 걸려있다.

 

 

 

암자의 마당은 아담하다.

홀로 걷기에 모자람이 없다.

수월, 혜월, 만공, 한암 선사가 걷던 그 마당이다.

 작은사진은 모셔온 것임

 제비바위...

 천장암 ‘수월선사’ http://blog.daum.net/zmstks/13114880

가져온 곳 : 
블로그 >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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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큰산의 초심| 원글보기
출처 : 두레박
글쓴이 : 김인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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