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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셔온 글

한국인의 얼굴, 넉넉함과 편안함의 근원

 

 


강은교 시인


만년 소녀 같은 시인이 어느덧 나이가 들었습니다. 지금도 그는 꿈꾸는 소녀처럼 보입니다. 동아일보가 올 초부터 매주 화요일 오피이언 면(23일자는 29면)에 연재하고 있는 사진입니다.

‘세월의 선물-조세현의 인물사진’이라는 제하에 연재되고 있는 이 사진물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사진작가 중 한 사람인 조 씨가 50대 이상의 연륜이 녹아 있는 한국인의 얼굴에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그는 피사체에 드리워진 시간의 흔적을 통해 세월이 불편함과 기피의 대상만이 아니라 넉넉함과 편안함의 근원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23일 소개된 강은교 시인은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서 시 ‘순례자의 잠’으로 등단했습니다. 1992년 37회 현대문학상, 최근에는 시 ‘너를 사랑해’로 18회 정지용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시집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어느 별에서의 하루’, 산문집 ‘추억제’ ‘그물 사이로’, 동화 ‘하늘이와 거위’ 등을 썼습니다.

다음은 지금까지 올라 온 조세현 작가의 인물 사진을 모은 것입니다.


김동건. “인생은 만남이고 누구나 꼭 한 번밖에 초대받지 못한다”던 그는 자신의 인생관 끝말에 “다시 태어나서 한 번 더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아나운서를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법정스님. 스님은 늘 그렇게 사람과 자연 사이에 계신다. 산(山)과 동화된 침묵과 무소유의 자연인. 수만 가지 가르침 속에서 가장 가슴에 남는 것은 이웃에 ‘덕’이 되라 하신 말씀. 법정 스님과의 인연만으로도 내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 싶다.



이영희. 한복의 멋을 세계에 알리며 한복 하나 믿고 살아온 여자. 지금도 갓 데뷔한 신인처럼 겁도 없이 큰일을 벌이고 그 속에 빠져 산다. 열정이 눈부셔서일까? 그녀의 얼굴에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복의 세계화에 나섰다. 1993년 한국인 최초로 프랑스 파리의 패션쇼 ‘프레타포르테’에 진출해 ‘한복 부티크’를 열고 12년 동안 24회의 쇼 개최. 2004년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한복 12벌을 기증해 100년간 보관하기로 했다. 2005년 부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두루마기 디자인. 동덕여대 디자인학부 겸임교수.




황석영. 거칠고 가파른 삶이 그에게 가르친 것은 ‘초연함’이었나 보다. 외유내강의 자세로 새로운 도전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은 든든해서 의지하고픈 맏형 같았다.

고등학교 시절인 1962년 ‘사상계’에 소설 ‘입석부근’을 발표하며 데뷔. 초기에 탐미주의적 경향을 보였으나 ‘객지’(1971년)를 계기로 민중주의적 리얼리즘으로 돌아섰다. ‘한씨연대기’(1972년) ‘삼포 가는 길’(1973년) ‘장산곶매’(1979년) ‘어둠의 자식들’(1980년) ‘장길산’(1984년) ‘사람이 살고 있었네’(1993년) ‘손님’(2001년) 등을 발표.



정경화. 동양에서 온 신비롭고 자그마한 소녀가 서양 고전음악을 제패했다. 조국이 어렵던 시절, 문화적 핸디캡을 극복하면서…. 격정적이고 강인한 그녀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신들린 듯, 그러나 냉정함을 잃지 않는 완벽주의자의 연주는 늘 품위 있고 고혹적인 향기로 넘실거린다.

미국 줄리아드음악원 7년 장학생. 1967년 미국 레벤트리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한국인으로서 첫 유명 국제 콩쿠르 우승. 대한민국 문화훈장 등을 받음.




이매방. 그의 한평생은 손끝으로 음악을 타고, 허공을 날아다니고, 춤의 멋과 맛을 보여 준 세월이었다. 마음이 고와야 춤도 곱다며 누구나 남을 가슴 아프게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셨다.
무형문화재 27호 승무 및 97호 살풀이 춤 예능보유자. 할아버지 이대조 명인은 목포 권번(일제강점기 기생들이 기적을 두었던 조합)에서 승무 검무 북을 가르쳤다. 7세 때 옆집에 살던 권번장의 권유로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중국 경극 배우 겸 무용가 매란방에게서 칼춤과 등불춤을 배우기도 했다. 1998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받음.



김금화. 남의 아픔을 대신 아파하고 대신 울어 주는 큰무당 김금화. 그 인생에는 우리의 수만 가지 상처가 녹아 있지만 얼굴이 주는 느낌은 마치 새색시 같다. 편견과 수모 속에서도 한길만 걸어 온 그녀 앞에 나는 존경과 사랑을 보낸다.
서해안 대동굿의 인간문화재.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9세에 신병을 앓기 시작해 17세에 내림굿을 받아 만신(무당의 높임말)에 입문했다. 1985년 중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풍어제인 배연신굿(선주들이 배에서 올림)과 대동굿(마을사람들이 같이 올림)을 전통예술 공연으로 인식시키는 데 힘써 왔다.




이생강. 작은 구멍에서 우러나오는 대금 소리는 우리들 가슴속에 숨어 있는 한을 내뱉는 듯 처절하다. 세월이 준 신들린 바람 소리는 온전히 그의 것이다.

중요 무형문화재 45호 대금 산조 예능보유자. 대금 산조의 명인 한주환 선생을 사사했으며 피리 단소 태평소 등 관악기를 두루 섭렵했다. 단소 산조를 부활시켰고 반주 악기로 여겨지던 대금을 독주 악기 반열에 올렸다.
1960년대 말부터 대금과 서양 악기와의 협연, 대금을 이용한 가요 팝 재즈 연주 등을 시도해 ‘퓨전 국악’의 원조로 불린다. 2004년 한국예술실연자단체연합회 대상 수상.




김응룡. 지난 50년간 오직 한 가지만 일구며 살아온 김응룡. 그러나 그의 얼굴에선 뚝심과 고집보다는 어떤 변화도 두려워하지 않는 젊은 호기심이 느껴진다.
부산상고를 졸업한 뒤 1960년 한일은행 야구단에 입단해 실업야구 홈런왕을 2번 차지했다. 감독으로서의 능력은 더 뛰어나 22년간의 감독 생활 중 10번이나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현 삼성라이온즈 대표이사 사장.




박윤초. 명창 팔자를 타고나듯 ‘끼’를 타고난 그녀. 그녀의 인생은 늘 봄인 듯 신명이 난다.
소리는 물론이고 춤과 가야금, 서예, 한국화, 시문 등 다양한 분야의 재능을 보유한 인물로 해외 공연을 통해 우리 문화를 알리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사재를 털어 국악을 지킨 박석기 선생과 김소희 국창(國唱)의 딸로 태어나 7세 때 학춤으로 첫 공연을 할 정도로 재능을 보였다. 시창(시에 음률을 붙여 부르는 창)을 국악의 한 장르로 정착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며칠씩 누워 지낼지언정 무대에만 서면 신명을 내는 사람이다.



이장호. 마음속에 꿈과 희망을 가득 안고 살아가는 영원한 피터팬. 그의 지독한 순수함에 반해 버렸다.
홍익대 건축미술학과를 다니던 시절 신상옥 감독과의 만남이 인연이 돼 학교를 그만두고 영화계에 입문했다. 1974년 ‘별들의 고향’ 감독을 맡으며 데뷔해 ‘바람불어 좋은 날’(1980년), ‘무릎과 무릎 사이’(1984년), ‘어우동’(1985년),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년) 등의 영화를 만들었다. 19회 대종상 감독상, 38회 베를린영화제 칼리가리상 등을 수상했다. 현 전주대 예체능대 영상예술학부 교수.



김백봉. 춤과 함께 살아온 80년의 세월이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우면서도 힘 있는 자태의 김백봉 씨는 관객들이 보낸 사랑의 힘에 늘 감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다. 평양에서 여학교를 다니던 13세 때 거리에 붙은 최승희 무용 공연 포스터를 보고 최승희를 찾아가 사사했다. 승무 태평무 화관무 부채춤 무당춤 등이 유명하며, 그의 만다라는 최승희 보살춤의 재연이었다.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로부터 ‘20세기를 빛낸 예술인’으로 선정됐다. 현 예술원 회원 및 서울시무용단 단장.



박서보.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한 그에게 이 세상은 광활한 대지이며 그는 그 대지에 우뚝 선 작은 거인이다. 그의 거친 손가락과 빛나는 눈빛은 예술 혼을 불살라 온 시간의 흔적이다.
박서보 화백은 한국 추상미술의 대부다. 1970년대부터 연필이나 철필로 반복해서 선을 그어 그림을 완성하는 묘법(描法)을 통해 ‘바탕’과 ‘그리기’를 통합하는 독특한 작품 활동을 해 왔다. 요즘도 하루 10시간씩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홍신자. 강하고 강해서 부러질 것 같은 여자. 하지만 그 얼굴은 몸짓 하나로 유유히 살아가는 그대로의 삶을 보여 준다. 영원한 자유인의 모습이다.
‘웃는돌’ 무용단 이사장 홍신자 씨는 한국의 대표적인 현대무용가로 ‘구도의 춤꾼’으로 알려져 있다. 호텔경영학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우연히 춤의 세계를 접하고 27세의 늦깎이로 무용을 시작한 그는 동양 전통미학에 뿌리를 둔 서양 전위무용을 펼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경성. “인생은 허영이다.” 곱게 찾아온 노경(老境)의 독백. 그는 사색을 즐기는 낭만주의자이다. 이경성(88) 전 국립현대미술관장·미술평론가




김혜자. 그녀는 스타이지만 생의 화려함에 결코 속지 않는 허무주의자이며, 그 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어떤 것을 바라본다. 나는 그 눈빛에 늘 매혹된다.



고은. 그는 저녁노을의 친구이다. 그를 처음 만나고 23년이 흘렀건만 그의 얼굴에는 변함없는 친구 같은 눈빛이 여전하다. 나는 그 아이와 같은 눈빛을 사랑한다.



김일. 상대편의 반칙과 술수로 게임이 절망적인 상황에 이르렀을 때 박치기 한 방으로 희망을 되살려 내던 우리의 영웅.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삶의 고단한 무게에 짓눌려 그만 포기하고 싶다는 맘이 들 때마다 우리는 김일의 박치기를 보며 역전(逆轉)을 꿈꾸곤 했다. 1967년 세계레슬링협회(WWA) 제23대 세계헤비급챔피언에 오르는 등 1960, 7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그는 한국 프로레슬링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더욱 깊어진 그 눈빛의 인자함은 세월의 먼지를 털고 찾아낸 소중한 음반을 듣는 듯하다.




윤정희. 올해로 데뷔 40년을 맞는 배우 윤정희는 우리 시대를 가로지른 은막의 여왕이다. 그는 또한 내게 가장 그윽하고 품위 있는 모델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 그윽함과 품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그가 세월로부터 받은 선물이라고 굳게 믿는다.

조세현 작가 약력 : △중앙대 사진학과 졸업, △중앙대 겸임교수, △아이콘스튜디오 대표, △‘천사들의 편지-빛과 그림자’ 등 다수의 개인전과 단체전
사진 제공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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