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의 아주 특별한 외출] 불교학자 전재성 박사
- “수행이 앉아서 참선만 한다고 되나 마음 다스리고 세상 보는 눈이 있어야…”
- 20년째 초기 경전 번역… 2~3년 안에 마무리
나중엔 대중을 위한 쉬운 책 쓰고 싶어 한때 출가하려고 산에 올라갔다가 무서워 포기 부처의 말씀은 실천으로 풀면 쉬운 것인데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니 자꾸 더 어려워져
전재성 박사(55) 서울대 농화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인도철학과에서 석ㆍ박사 과정을 마친 후 독일의 본 대학에서 인도학과 티베트학을 연구했다. 영어, 독일어, 팔리어, 산스크리트어, 인도어, 티베트어, 일본어, 중국어 등을 해독할 수 있는 불교학자이다. 그는 최근 팔리어로 된 ‘앙굿따라니까야’의 역주를 완료했다. 전 박사는 베스트셀러 ‘거지 성자’의 저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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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 우리나라에는 1700년 전 불교가 전해졌다. 이후 선불교가 들어왔고 8만 대장경이 간행됐다. 그렇다면 8만 대장경 간행 이후 한국 불교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일까. 부처님이 설법했던 당대의 언어인 팔리어로 된 불교 경전을 한문(漢文)을 통한 중역(重譯)이 아닌 팔리어에서 직접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한역(漢譯)되면서 발생한 중국식 의역이나 왜곡 없이 부처 가르침의 원형을 그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의 가르침인 경장(經藏)은 주제나 숫자에 따라 ‘쌍윳따(相應部)니까야’ ‘디가(長部)니까야’ ‘맛지마(中部)니까야’ ‘쿳다까(小部)니까야’ 등 5부로 나뉜다. 불교학자 전재성 박사는 이 중에 ‘쌍윳따니까야’ ‘맛지마니까야’에 이어 ‘앙굿따라니까야’를 번역했다.
지난 3월 17일 전 박사가 본사 주필 서재에 들어왔다. 수염이 덥수룩한 모습이었다.
강천석 몇 년 전 우연히 선생이 번역한 ‘쌍윳따니까야’를 읽고 쉬운 번역에 끌려 이어 맛지마니까야를 접하게 되고 이번에는 다시 앙굿따라니까야를 만나게 됐습니다. 이번에 나온 ‘앙굿따라니까야’는 어떤 책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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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재성 부처의 가르침이 구전되어오다가 기원전 1세기경 주제와 숫자에 따라 5부의 니까야로 기록됐습니다. 스리랑카에 전쟁과 심한 기근이 와서 승려들이 굶어 죽게 되자 맥이 끊어질 것을 걱정한 사람들이 부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죠. 이전에는 부처의 가르침은 성스러운 것이라고 여겨 일부러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문자는 장사꾼들이 돈 거래를 하기 위해 또는 죄수를 다루기 위해 생겼다고 하잖아요. 앙굿따라니까야 번역으로 저는 5부의 니까야 중에서 세 개를 출간하게 된 겁니다. 원문 자체를 생략 없이 완전히 복원해서 번역한 것은 이번이 세계 최초입니다. ‘앙굿따라’라는 말은 ‘고리가 하나씩 증가된다’는 뜻을 지닙니다. 1권은 한 개의 주제를 담고 있고, 2권은 두 개의 주제가 있는 식이죠. 앙굿따라니까야는 총 11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강 우리가 읽어온 불경은 중국 승려들이 번역했던 것을 한글로 재번역한 것인데, 전 선생은 지금 팔리어로 된 원본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팔리어는 어떤 언어입니까.
전 팔리어는 부처님 당대의 언어로서 부처님께서 설법하셨던 언어와 같거나 또는 아주 가까운 친척 관계에 있는 말입니다. 일각에서는 아니라고도 주장하지만 초기 경전은 팔리어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강 전 선생이 불교를 처음 접한 것이 언제인가요.
전 저는 네 살 때 전신화상을 입었고 거의 죽다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사춘기 때 유난히 고민이 많았죠.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었고요. 그래서 종교를 가져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중학교 때부터 절에 다니게 됐습니다. 대학교 때는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회장까지 하게 되었고요.
강 서울대(농화학과)와 동국대 대학원(인도철학 전공)에서 공부한 후 독일로 갔다고 들었습니다.
전 1970년대에 대학교 동아리 회장을 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었지요. 매일 데모만 했던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공부하기도 어려웠으며 취직하기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군대 있을 때는 늑막염에 걸렸고 또 결핵으로 고생도 했어요. 그러다 보니 ‘가만히 앉아서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만 들더군요. 더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안양천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가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호흡이 느려지고 몸에 정체불명의 빛이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체험 후 건강도 좋아지고 주변의 모든 것이 느릿느릿한 속도로 다가왔어요. 그래서 어학 공부를 하기가 수월해졌죠. 모든 게 천천히 들렸거든요. 또 어떤 책을 읽어도 이해가 잘 됐습니다. 저는 인류의 가장 고전부터 읽기 시작하자고 결심했고, 베다(인도 성전)부터 공부했어요. 제가 동국대 대학원에서 쓴 논문 제목이 ‘베다에서의 불(火)의 형이상학’입니다. 다음으로 서양철학도 공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죠. 그래서 독일의 본 대학으로 갔습니다. 8년쯤 공부하다가 한국에 돌아왔어요.
강 독일에서 만난 페터 노이야르에 대해 쓴 ‘거지 성자’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됐다는데 페터 노이야르는 어떤 분인가요.
전 객지 생활이 너무 외롭고 힘들어서 여기저기 숲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매우 허름한 옷을 입고 벤치에 앉아 칼로 썩은 당근을 깎아먹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 앉았는데 제게 당근을 권하더라고요. 얼굴을 자세히 봤더니 무척 맑고 투명한 눈이 성자처럼 보였습니다. 제가 ‘당신은 예수처럼 생겼다’라고 했더니 페터 노이야르는 ‘나는 부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대답하더군요. 그래서 ‘왜 이렇게 거지처럼 사느냐’고 물었더니 ‘돈 없이, 집 없이, 여자 없이 사는 것이 내 생활신조’라고 했습니다. 그날 만남이 인연이 돼서 이후 자주 만났습니다. 한번은 라인강을 따라 8시간 동안 함께 산책을 했는데, 그분이 불교 경전에 담긴 구절을 리듬이 살아있는 목소리로 알기 쉽게 이야기해줬습니다. 이후 저는 불교 경전을 번역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죠.
강 팔리어로 된 불교 경전을 처음 번역할 때는 무척 힘이 들었을 텐데, 무엇을 참고했나요.
전 독일본이 최초의 번역이었기 때문에 많이 참고했고 영국 최초의 번역본도 참고했습니다. 고전 번역은 사전이나 문법이 완전하지 않아 굉장히 어려웠죠. 그래서 관계가 있는 언어를 잘 알아야 합니다.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독어, 영어, 프랑스어 등을 모두 알아야 서로 대조하면서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강 니까야 번역은 언제부터 시작했습니까.
전 독일에서 귀국한 1989년부터 쌍윳따니까야 번역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불교 번역용어가 확립된 것이 없었고 학자들끼리 주장도 달랐습니다. 각자 자신이 번역한 용어를 양보하지 않았고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던 중 잠실 쪽에 스리랑카 빠알리(팔리) 부디스트 대학의 분교가 들어왔습니다. 그곳의 주임 교수로 가면서 팔리어를 가르쳤고 사전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학생들 가르치랴, 논문 쓰랴 번역할 시간이 없어 잠시 손을 놓았죠. 그러다 IMF가 왔고 대학이 문을 닫았습니다. 가족을 먹여살릴 길이 막막해지자 처제가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하와이로 아내와 두 아들을 보냈습니다. 이후 저는 작은 절에 들어가 다시 니까야를 번역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워 출간은 계속 미뤄졌습니다. 그러다가 1998년쯤 도법스님을 만났습니다. 제게 ‘10년이 지났는데 책 한 권 안 나오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돈이 없어서 출판을 못한다고 하니까 마련해주시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강 전 선생 작업실에 화재가 나서 이전에 모은 자료가 모두 불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전 서울 종로구 사간동에 한옥을 빌려서 만든 연구소가 하나 있었습니다. 수천 권의 불교도서와 팔리 대장경 및 니까야 관련서적이 300권 정도 있었죠. 그런데 불이 나서 모두 타버렸습니다. 의기가 한풀 꺾였죠. 그것이 다시 중단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혼자 번역을 하기로 마음먹고 한국 빠알리성전협회를 만들었죠.
강 5개의 니까야를 번역하는 데 순서가 따로 있나요.
전 배열 순서로는 디가니까야가 처음이지만 성립 순서로 보면 달라요. 쌍윳따니까야가 처음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번역했습니다. 그 다음에 번역한 것은 맛지마니까야입니다. 맛지마니까야는 부처의 긴 설법이 체계적으로 잘 짜여있습니다. 쌍윳따니까야는 부처가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과 대화한 것처럼 짧은 글들이 모여있죠. 이제 할 것은 시를 모아놓은 쿳다까니까야인데 시(詩)라 번역이 굉장히 어려워요. 그렇지만 가장 어려운 숫타니파타는 이미 몇 년 전에 끝냈습니다.디가니까야는 긴 모음집이라고 하는데, 중편 소설 크기 정도의 법문을 모은 것입니다.
- 강 앞으로 몇 년쯤 더하면 된다고 봅니까.
전 직접 전한 말씀만 번역할 생각인데 한 2~3년 안에 끝날 것 같아요.
강 대승경전은 무엇을 기준으로 번역되어야 하나요. 20세기 초 유럽의 시인들은 중국어가 매우 시적(詩的)이라며 중국시를 좋아했습니다. 읽는 이로 하여금 상상을 일으키는 언어이기 때문이지만 그다지 논리적이지는 않죠. 중국에 논리학이 발달되지 않은 것도 중국어의 이런 특징과 관련되어 있다는 설도 있지요. 그래서 중국어로 번역하면 불교 경전의 논리적 탁월함이 애매하게 흐려진다는 지적도 있는데….
전 산스크리트어를 기준으로 합니다. 이는 논리적 서술이 가능한 언어입니다. 반야심경을 보면 ‘관세음보살’이라는 말 대신 ‘관자재보살’이라는 말이 있어요. ‘세상을 보살피는 하느님’ ‘세상을 자비의 눈으로 살피는 최상의 지배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죠. 인도 사람들은 말장난을 잘하는데 중국의 불경 번역자들이 원래의 문맥과는 다른 데에서 끊어 잘못 번역된 부분이 한역 불경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관자재보살이라 할 것을 관세음보살이라고 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지요. 산스크리트어는 매우 논리적이고 서양 모든 언어의 모태언어이기도 합니다.
강 부처는 쉽고 명료하게 말했는데 경전들은 왜 이렇게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나요.
전 부처의 말씀은 실천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머리로 이해하려다 보니 어려워진 것이 아닌가 싶어요. 초기 경전은 반복적이고 굉장히 쉽습니다. 따라서 후대의 학자들이 조금이라도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서 연구했으면 이렇게 어렵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요.
강 한국 불교와 조계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본래의 부처 말씀으로 돌아가라고들 합니다. 그것이 가능할까요.
전 저는 불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조계종 스님 가운데 상당수가 기존의 교육체제에 만족을 못하니까 미얀마 등에 가서 공부하고 달라이 라마 밑에 가서 공부하기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 초기 경전이나 대승교학에 바탕을 두고 있으니까요. 사실 한국 불교는 수행의 측면에서는 선불교의 강한 전통을 갖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매우 빈약합니다. 앉아서 참선을 하더라도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하고 세상을 보는 안목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한국 불교의 그 빈 곳을 부처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강 불교 경전은 번역하는 사람마다 느낌이 다릅니다. 전 선생은 어떤 점을 가장 잘 살렸나요. 정확성인가요, 아름다움인가요.
전 니까야에는 리듬이 있습니다. 저는 쉬우면서도 아름답게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죠. 한자에는 리듬이 있지만 한글은 리듬을 살리기가 조금 어려워요. 그래서 운율이 있는 번역을 하면 낭송하기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당시 팔리어도 음악처럼 들렸을 것이니까요. 운율이나 시적인 측면을 더 살리려면 많은 시인이나 소설가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실 혼자서는 힘들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교 경전 번역은 어떻게 보면 국가적 사업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이 작업에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 왜 니까야 번역이 한국 불교나 승려사회에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나요.
전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 승려들은 팔리어에 대해 잘 몰랐고 마치 이교도의 것처럼 여겼습니다. 소승불교권의 경전이라고 잘못 생각한 것이죠. 하지만 최근 들어 부처님 원래의 목소리가 그대로 담겨있는 초기 경전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인식한 양심 있는 스님들이 많이 나타나 동조해주고 있습니다.
강 니까야 다음에는 무엇을 번역할 계획입니까.
전 니까야 5부를 다 끝내면 일단 대중에게 보급하기 쉬운 책을 쓰고 싶습니다. 소책자 형식으로도 만들어 다양한 용도로 쓰일 수 있게 출판하고 싶어요.
강 앞으로 대승경전을 번역할 생각은 없나요.
전 금강경이나 천수경은 이미 번역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다라니에도주석을 달아놓았습니다. 천수경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으로 다라니경에 살을 붙인 것입니다.
강 불교 경전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치고 있는 셈인데 개인적으로 직접 출가해 수행할 생각은 없나요.
전 사실 하고 싶어도 못해요. 고등학교 때 오대산에 있는 절에 갔을 때는 너무 무서워서 그냥 내려왔어요. 이후에도 출가하려고 했지만 온몸에 화상을 입었고 흉터가 많아 출가에는 결격자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강 가족도 전 선생처럼 불교에 관심이 많나요.
전 큰 아이는 하와이 대학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있고 작은 아이는 고등학생입니다. 아내 역시 절에는 나가지만 불교를 잘 알지는 못하죠.
강 윤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전 윤회는 의외로 간단한 개념입니다. 수레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수레가 다 분해되어 부품만 남았다면 그것을 수레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수레는 관계성 속에서 주어진 명칭인 것이죠.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장, 핏줄 등을 모두 나눠놓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또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정체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라는 존재는 원래 없는 거예요. 이것이 무아론입니다. 윤회는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일부들이 모였다가 다시 분해되고 다시 모이고 하는 거죠.
/ 정리 = 서일호 기자 ihseo@chosun.com 손유정 인턴기자ㆍ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3년
한국불교개혁카페 원불사(原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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