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희성님의 “보살예수”를 읽고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창조적 만남-
2004년도에 현암사에서 발행된 이 책을 나는 오늘에서야 접하게 되었다. 기독교인이자 종교 철학자인 저자가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하고자 하는 고뇌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오직 기독교를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면 우리의 조상들은 모두 구원받지 못하는 것일까?” 라고 묻고 진정한 구원은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처럼 자기중심적인 삶을 떠나서 큰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요, 깨닫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그는 “산을 오르는 길은 여럿이지만 우리는 모두 정상에서 만난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종교간의 대화 특히 기독교와 불교간의 대화를 모색 한다. 이것은 “종교간의 평화없이 세계의 평화가 없다”는 절박한 필요성에 의한 것으로서 특히 한반도에서 생겨나는 기독교와 불교의 대립과 긴장관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지적하면서 한국에서 기독교가 성장 할 수 있었던 3가지 이유,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3가지 패러다임 전환, 다른 종교의 구원을 인정하면서도 특정한 종교를 신앙하는 종교 다원주의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불교는 신에게 의지하기보다는 인간의 주체적인 노력을 중시하는 자기개발과 자기실현의 종교이며 불교의 교리가 과학에 위배되지 않아서 불교를 믿으려고 지성을 희생하지 않아도 되고, 이러한 불교교리의 합리성 때문에 불교인들은 다른 종교인들을 개종시키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하지 않은 평화의 종교라고 설명한다. 이 책은 사성제 연기법 공 무아 색즉시공 등의 불교사상을 설명하고 나서 기독교사상을 대비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특히 공사상과 보살사상 그리고 열반을 통하여 기독교를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연기사상이나 보살사상을 기독교에서 하느님을 이해하고 구원을 이해하는 방법론으로 이용하자는 것이다. 초기불교부터 중관 유식불교와 화엄경 그리고 선불교에 이르는 저자의 박식한 설명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저자가 얼마나 불교공부를 열심히 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불교를 “인간의 마음을 다스려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되려는 것”이라는 흰두교적인 발상을 마치 불교의 목적인 것처럼 설명하는 것이다. 특히 오온무아를 설명하면서는 “나라는 것이 오온일 뿐이라고 자각하는 자가 있음을 상기시키며 이것은 오온의 배후에 있는, 오온과는 다른 초월적인 자아,참자아, 아트만이다”라고 설명은 초기불교의 가르침과는 반대되는 것으로 인정 할 수 없는 발언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대승불교후기에는 무아설을 불완전한 이론,방편설로 간주했으며 무아설의 근본취지를 이해하면 부처님은 오히려 대아,진아와 같은 참된 자아를 가르쳤다고 하여 흰두교의 정통베단타 사상에 접근하고 있다”라는 일본학자 카나쿠라 엔쇼의 [인도철학의 자아사상p223-230]을 인용하고 있다. 무아사상은 방편설이고 진아사상이 진정한 불교라고 주장하는 대목은 초기경전을 읽어본 불자라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발언이다. 역사적으로 힌두교 사상가들이 불교를 평가할 때 이중적인 태도를 취한다. 즉, 불교와 흰두교를 차별할 때는 “불교는 무아를 말하는 허무주의”라고 비판하고 불교를 끌어 안고자 할 때에는 “불교의 불성론과 흰두교의 아트만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들은 불교를 흰두교의 아류로 취급한다. 저자에게서도 유일신을 믿는 사람이 갖는 마음상태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 보이는데 그것은 불교를 기독교와 같이 신의 은총영역에 있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다. 그는 부처가 연기 공 무아의 원리를 발견한 자연 그 자체는 신이 창조한 세계임을 강조하면서 “동양이든 서양이든 자연은 이미 거룩한 분에 의해 주어진 축복이며 은총이기에 부처님이 발견한 법도 부처님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자연현상이므로 신의 은총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연기 공 무아를 사물의 수평적 의존관계를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불교도 기독교처럼 사물이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를 밝히는 수직적 의존관계를 물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불교에서는 태초를 묻는 등의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부처님이 이미 침묵으로 답하셨고 그 침묵의 이유를 고의 소멸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물이 존재하는 ‘제 1원인’을 물어야 하며 그것을 “존재론적 뿌리를 물어 들어가는 지혜”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제 1원인’을 묻는 것은 불교에 의하면 어리석음의 근본이다. 스리랑카의 라훌라 스님은 인간이 신을 상정하게 되는 마음상태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관념이 심리적으로 깊이 뿌리 박혀 있다. 그것은 자기보호와 자기보존이다. 사람은 자기보호를 위하여 신을 창조하였다. 자기자신의 보호와 안전과 안녕을 위하여 신에게 의존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엄마, 아빠에게 의존하듯이. 사람은 자기보존을 위하여 영원히 사는 불사의 '영혼' 또는 아뜨만의 관념을 품어 왔다. 무지와 나약함과 두려움과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달래려고 이 두 가지를 갈구한다. 그래서 그것들에 깊이 그리고 열광적으로 달라붙는다.”
태초라는 것을 설정하고 이 세상은 분명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은 인간의 욕망과 기대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유일신이 있고 그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것은 인간에게 한 번도 경험되지 못한 지식이다. 이해로서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직 믿음으로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 지식이기에 기독교는 이성이 희생을 당해야만 성립하는 종교인 것이다. 그가 지적한 대로 “약주고 병 주는 하느님”은 그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독교 사상의 모순을 스스로 잘 아는 저자가 다시 ‘제 1원인’을 강조하는 것은 신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우주를 신의 은총으로 보는 저자는 자력이라는 말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며 불교의 수행을 “자아로서 무아를 얻으려는 노력은 모순”이라며 “자력은 없다”고 강조한다. 붓다가 열반경에서 자귀의 법귀의하라는 마지막 유훈을 내렸음에도, 우주현상이 신의 은총임을 믿는 그는 자귀의 마저도 신의 은총안에서 성립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가 불교를 인용하는 경전이나 논문에도 문제가 있다. 마치 기독교 역사 안에서도 수많은 이단이 있었던 것처럼 2500년의 불교사에 있어서 다양한 불교가 출현했으며 각각의 불교는 사상과 표현하는 방식에서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지금 2500년 불교사상을 정리하는 학자들은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이라는 초기불교에 초점을 맞추어 불교를 정리해 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초기불교보다는 자신의 입맛에 맞는 대승불교의 사상과 학자들의 글을 인용하여 불교의 무아사상을 전면 부인하고 불교를 힌두교와 같은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은 단순한 실수라고 보기 어렵다. 이 책의 부록으로 실려진 2003년도에 중앙승가대학교에서 발표한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수행]이라는 논문에는 오온 외에 초월적자아가 있다거나 ‘제 1원인’을 묻는 것이 지혜라는 등의 표현은 삼가고 있는데 이것은 스님들 앞에서 발표한 논문이라서 그러한 것인가? 자신의 신앙에 의거해서 다른 종교의 사상을 왜곡하기 보다는 차라리 “이런 정도로 서로가 차이를 보인다.”라고 차이점은 차이점대로 인정하려는 태도가 더 정직하고 학자다운 태도라 할 것이다. 저자가 종교간의 대화를 시도하려는 좋은 의도에서 시작한 글임에도 불구하고 불교를 기독교인의 눈으로 해석하고 왜곡시킨 것은 다른 종교를 존중하는 태도라고 보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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